바다는 당신의 우연
- 작성일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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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 – 협성마리나 G7]
바다는 당신의 우연
최영건
유리병 편지가 밀려오는 모래와 물, 소금과 손가락의 순간을, 당신은 떠올린 적 있으신지요? 사실 이 장면은 내게 퍽 익숙합니다. ‘동물의 숲’ 게임에 매일 찾아오는 순간이거든요. 게임 속에서 우리의 일과는 바다로부터 편지를 받는 것입니다. 열어보기 귀찮아 슬쩍 지나칠 만큼 꾸준히, 매일의 약속으로요. 부산에서 내게는 유리병은 없었지만 유리창은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그날의 윤슬로 바다가 일렁이던 창이요. 사실 이 말에는 약간의 거짓, 내가 알게 된 약간의 참이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윤슬은 매일 보이지 않아요. 저는 이걸 이번 레지던시 생활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물비늘’이라고도 불리는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해요. 그러나 어느 날은 바다에 반짝임이 없습니다. 어느 날은 흐려서 어두워진 바다, 묵직해진 바다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침마다 내가 본 것은 그날의 일렁임이지 그날의 반짝임은 아닙니다. 다만 얼어붙지 않은 바다에, 일렁임은 매일 있습니다. 그것만큼은 분명해요.
유리창으로 내가 본 것은 다만 매일이었습니다. 레지던시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약속을 지키듯 창밖을 보았어요. 그리고 매일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니지, 이것도 실은 약간 거짓입니다. 한 주에 하루이틀 정도는 안에만 머물렀어요. 소파에서 책을 읽다 보면 낮은 금세 저녁이 되었습니다. 부산역 근처엔 마침 배달비 무료 이벤트 중인 가게들도 꽤 있었어요. 어느 날엔 정말이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으며 책을 읽고, 그러다 씻고 잠을 잤습니다. 다만 그런 날에도 바다를 보았습니다. 내가 본 먼 곳의 다른 바다들과 이곳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월은 내게 지난해 머물렀던 군산의 작업실을 정리한 달이기도 했어요. 한 해를 다 살기는커녕 한 계절을 살기도 전인데, 한 해 계획이 다 세워져 버렸거든요. 계획이 나보다 먼저 한 해를 삽니다. 당신도 그렇겠지요. 계획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 우리이지만 우리가 아닌 사람, 우리보다 먼저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루에 두어 번 아침저녁으로 일기를 써요. 아침에 쓰는 일기는 계획표에 가깝습니다. 나보다 먼저 하루를 사는 그 사람의 어렴풋한 모습이 To-Do List로 쓰여 있습니다. 저녁에 그 사람은 다시 내가 되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여러 번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일기라는 글도 그래요. 당신은 일기를 쓰는 사람인가요?
4월이 되면서 한 해의 계획을 거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와 달리 작업실에서 지낼 시간이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고, 월세를 아끼려면 계약을 해지해야 했죠. 운 좋게도 생각보다 더 빠르게 계약을 이어 받아줄 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아주 조금 섭섭해질 만큼 빠르게요. 월세를 아낄 걸 생각하면 안도감이 들었지만요. 4월 레지던시 창으로 부산 바다를 내다보며 나는 아마도 내가 다시 보지 못할 군산 작업실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작업실에도 바다가 보이는 또 다른 창이 있었죠. 거실 베란다로는 숲이 보였고 반대편 벽에 난 창으로는 군산내항의 바다가 보였어요. 서해안 갯벌 곁에서 사는 사람은 하루의 중력을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없던 땅이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니까요. 어느 순간에는 바다가 없어지고 땅이 생겨납니다. 그 변화만이 매일 있습니다. 거기 있는 무엇을 한 사람이 붙잡아 수는 없어요. 시간과 중력이 그들의 힘으로 물을 움직입니다. 물론 더러는 사람도 힘을 가질 수 있죠. 서해안에는 갯벌과 바다의 자리에 사람들이 만든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이 태어나며 사라진 풍경이 있죠. 그 땅에 걸린 기대와 간절함이 있죠. 세상은 변합니다. 우리는 살아가요.
바다를 보면서 아름다움만을 떠올리지는 않아요. 특히나 4월에, 한국의 바다를 보며 그럴 수만은 없습니다. 4월 16일에는 오랫동안 걸었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것을 두려워했던지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두려움이 많아요. 그러나 용감해지고 싶습니다. 용감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루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 사랑만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나는 용기가 우리를 살아가게 해준다는 걸 비로소 알아챈 기분입니다.
부산에서 한 달 동안 지낼 기회가 생겼단 걸 알았을 때는, 한 달이 친구를 사귀기에 부족하지만은 않은 시간이라고 착각했어요. 그때 내가 깜빡한 건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새로 사귄 친구가 보고 싶어도 다시 금세 만나기는 어려워질 거라는 사실이었죠. 덕분에 나는 지금 엷은 그리움을 앓고 있습니다. 매일 바다를 보던 나날보다, 바다의 윤슬보다 훨씬 그리운 건 부산의 친구들이에요. 영도 바닷가의 아담한 건물 2층에는 책방이 있고, 그곳에는 크고 검고 근사한 개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검은 개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가 더욱 보고 싶어져요. 부산을 떠나는 날에 오늘이 사는 오늘책방에서, 오늘을 한참 쓰다듬다 왔습니다. 오늘은 참 좋은 말, 쓰다듬기 참 좋은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여름을 맞는 동안 부산에서 알게 된 유키가 개인전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초대를 받았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 가고 싶어요.
오늘과 오늘의 가족 디제이 725, 오늘책방의 이웃 유키 작가를 알게 된 건 수업 덕분입니다. 레지던시에서 지내는 한 달 동안 책방 무사이에서 <한 사람을 여러 곳에서 만나기>라는 타이틀의 수업을 했어요. 3주 동안 토요일이면 책방이 있는 부산 북구 화명역 근처 동네에 다녀왔습니다. 부산역에서 화명역까지 가려면 서면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하고, 1시간 좀 안 되는 시간이 걸립니다. 화명역에는 밤까지 여는 찐 옥수수 가게가 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배가 고파서, 별 기대 없이 찐 옥수수 한 자루를 사 들고 지하철을 기다렸습니다. 처음 사 먹었을 때는 배가 고파서 이렇게 맛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렇게까지 배가 고프지 않은 밤에도 옥수수는 무척 맛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한 자루만 사곤 해서 다음날이 되면 두 자루나 세 자루를 샀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더 큰 아쉬움은 세 번째 수업을 하러 간 날 생겨났어요. 화명역 근처 동네 칼국수 가게에서 정말 맛있는 해물 칼국수를 먹었거든요. 일찍 알았더라면 3주 동안 토요일마다 먹었을 텐데요. 부산을 떠난 직후 서울에서 어느 칼국숫집에 가서 칼국수를 먹다가, 혼자서 아무도 모를 한숨을 삼켰습니다. 딱 한 번밖에는 그 국수를 먹고 오지 못해서 내내 아쉬워요.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어간 곳입니다. 평범한 외관에, 평범한 리뷰들이 평온한 일상의 담백함으로 좋은 말들을 남기고 있는 곳이요. 다시 가기 전까지 나는 내내 고소한 배춧잎과 조개가 가득하던 그 칼국수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수업에서 내가 무슨 쓸모있는 말들을 했는지 여기 기록하려 했는데, 어쩐지 온통 맛난 것과 친구들 이야기만 하게 되는군요. 3회차에 걸친 <한 사람을 여러 곳에서 만나기>는 나라는 한 사람, 그리고 차학경이라는 한 사람을 여러 곳에서 만나는 일에 대한 이 시절의 독해에 대한 수업이었습니다. 부산에 가기 전엔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대학의 BAMPFA에서 약 40년 만에 열린 대규모의 차학경 회고전 <Theresa Hak Kyung Cha: Multiple Offerings>에 다녀왔거든요. 오래전 처음 차학경을 알게 되었던 어느 전시를 지나, 나는 그녀를 대양 너머에서도 산맥 너머에서도 만나요. 그녀의 책을 가지고 탄 기차에서도 다시 그녀를 만납니다. 차학경의 고향이 부산이란 걸 알고 있나요? 우리에겐 모두 고향이라 불리는 곳이 있죠. 한 곳이거나 여러 곳, 우리를 태어나게 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한 번, 어쩌면 여러 번, 탄생하게 하는 곳들이요.
탄생이라는 말을 작게 소리 내 발음해 보면 놀랍습니다. ‘ㅌ’은 터져 나오는 발음을 갖고 있죠. 튼튼한, 탄탄한, 터럭, 토마토, 탄환, 터키쉬 블루, 타이레놀, 탄원, 텅, 통, 탱탱, 토마레나이(とまれない), 같은 말이 떠오릅니다. 토마레나이는 요즘 자주 가는 카페의 토마토 음료 이름이에요. 일본어로 멈출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죠. 그 카페에 앉으면 유리창으로 서울 충무로 세운상가 근처 풍경이 보입니다. 바다는 없지만 정지한 듯 변하는 하루의 시간, 빛의 중력에 겹치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곳 소리들이 있죠. 오늘 나는 토마토 음료를 홀짝이며 영도 바닷가를 떠올립니다.
항구의 아담한 건물 2층에는 책방이 있고, 그곳에는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크고 검고 근사한 개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검은 개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가 더욱 보고 싶어져요. 오늘은 참 좋은 말, 쓰다듬기에 좋은 말입니다.
모든 글은 편지임에 틀림없죠. 언젠가 당신이, 어쩌면 내가, 여기 쓰인 기억을 읽을 테니까요. 모든 글은 기억이라는 운명에 얽혀 있습니다. 기억하지 않는다면 쓰지 않을 테죠. 이 글이 되는 기억 속에서 중력이 물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거대한 물, 날씨에 따라 이따금 반짝이고 이따금 색을 거두는 물이 일렁거려요. 틀림없이 움직이는 중입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여기 쓰는 게, 용기라는 걸 알아요. 그리움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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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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