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 작성일 2026-08-01
- 댓글수 0
[문학의 곁]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 책 읽는 사회를 위한 <KBS 라디오 문학관>
서현이
1. ON AIR
스튜디오 출입문에 불이 들어왔다. 붉은색의 ‘ON AIR’ 글씨가 선명하다. 드디어 큐 사인이 떨어지고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다. 이제 소설 속 단어는 목소리 연기자 성우들을 만나 살아 움직일 것이며 쉼표ㅇ와 숨표는 호흡이 되어 깊이를 더할 것이다. 숨을 쉬기 시작한 문장은 음향효과를 만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고 음악을 만나 날개를 달 것이다.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나면 또 하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사진. KBS <라디오 문학관> 제작 모습
2. 오프닝 혹은 여정의 출발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나기까지의 여정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전부터 시작된다. 1년 전부터 작품을 준비하는 경우는 특별히 의미가 있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작가의 탄생 100주년이라든가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 삼일절 특집 같은 기획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별한 기획이 아닌 경우 통상 3~4개월 전부터 준비한다.
라디오 드라마가 만나고 싶은 소설에 제한은 없다. 다만 어려운 점은 존재한다. 만남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 요소는 2차 저작물 저작권료다. KBS 측에서 책정한 저작권료를 상대측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만남은 성사될 수 없다. 라디오 드라마와 소설의 만남을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물은 다시 듣기(=다운로드)다. 다시 듣기도 넓은 의미에서 저작권에 포함이 되겠지만 다시듣기만을 제한하는 곳도 있다. 이 경우 최대한 조정해 보지만 불발되면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는 만날 수 없다.
3.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의 주파수 맞추기
라디오 드라마의 주파수와 잘 맞는 소설은 어떤 작품일까? 주파수를 궁합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 사이에 궁합이라는 게 존재할까? 당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궁합이 잘 맞는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간단하게 정리하면 ‘소설을 읽었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서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다. 소설가들은 반문할지 모른다. ‘소설 문장은 서술과 묘사로 이뤄져 모든 상황을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다. 그리고 소설은 책을 덮은 후에도 깊이 사유하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게 소설의 힘이자 매력이다. 더구나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은 의미와 가치보다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경향이 뚜렷했고 그 결과 기발한 방법으로 형상화하는 소설들도 대거 발표되었다. 다양화된 소설 중에는 읽는 즉시 이해가 되는 작품도 있지만 두세 번 읽어야 하는 작품도 있다. 그런데 라디오 드라마 청취자들은 방송을 듣는 동시에 그림그리기를 원하고 듣는 즉시 이해하기를 원한다. 바로 그 차이, 읽는 소설과 듣는 라디오 드라마 주파수의 차이를 맞추는 게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방송 글의 기본은 구어체이면서 쉬워야 한다. 방송 진행자들이 하는 말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간혹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있을 때 진행자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설명한다. 같은 단어를 중복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중언부언도 용납된다. 그럼, 언제까지? 정답은 없지만 대중들이 이해할 때까지 해야 한다. 단, 지루하지 않게. 이왕이면 재미있게!
4. 라디오 드라마 각색의 비밀
라디오 드라마 작가는 소설을 오디오 대본으로 각색하는 사람이다. 각색이 또 하나의 장르가 됐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TV 드라마나 OTT(Over-The-Top)의 활성화로 소설이 드라마로 각색되어 대중들을 열광시키는 사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일상화되었다. 소설을 각색할 때의 범위와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제목만 유지한 채 원작 전체를 재창작하는 방법도 있고 원작의 뼈대만 가져온 채 구성을 바꿔버리는 사례도 허다하다.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라디오 드라마의 각색은 어떻게 할까? 작가마다 차이가 존재하므로 개인적인 경험을 공개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할 때 몇 가지 원칙을 정해두고 있다.
우선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다. 원작자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최대한 살린다. 이때 가장 큰 어려움은 방송 시간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원작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고 담기 위해서는 경중을 가려야 한다. 꼭 필요한 부분을 살리기 위해서는 아깝더라도 덜 중요한 곳을 버려야 한다. 동시에 청취자들이 지루해하면 채널을 돌리거나 꺼버리니까 재미도 고려해야 한다.
그다음 소설가의 독특한 문장과 문체는 최대한 살린다. 소설은 문어체이고 방송은 구어체이다. 소설 문장 중에 메모해서 암기하고 싶은 문장일수록 문어체가 많다. 그 문장을 독백이나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면 문어체로도 소화할 수 있지만 대사 즉 구어체로 처리할 때도 있다. 간혹 성우들이 표현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소설가를 빛나게 하는 문장이라면 그대로 살린다.
또 하나, 청취자들이 원작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색한다. 소설의 특성상 그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다. 당연하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읽을수록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오는 게 소설의 힘이자 매력이다. 하지만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청취자들은 바로 들으면서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각색할 때는 남녀노소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게 각색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사람들이 소설 속 장면을 그릴 수 있도록 한다. 이 경우에는 음향효과를 최대한 살린다. 간혹 라디오 드라마 작가가 대사만을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오디오 드라마 대본 자체를 만든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소설 속 무대가 70년대 서울의 중산층 가정이라고 한다면 대본에는 음향효과에 대한 부분을 자세하게 적어야 한다. 전화기는 다이얼 전화기인지 주택은 단독주택인지 대문은 철 대문인지 방문은 여닫이인지 등등. 물론 ‘70년대 봄, 서울 중산층 단독주택, 마루, 밤’이라고만 적어도 음향효과 감독들이 알아서 표현한다. 70년대 봄 풍경 음을 깔고 서울 단독주택 마루에서 밤에 들을 수 있는 개소리나 새소리, 벌레 소리 등을 들리게 해 청취자들을 단숨에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음향 감독들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표시하는 것 역시 라디오 드라마 작가의 몫이다.
그리고 하나 더. 라디오 드라마 각색에 관심이 있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오디오 각색의 비밀도 공개하겠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공식은 딱 하나다. 들으면서 알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시나리오라면 별다른 대사 없이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클로즈업 하고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표정만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라디오 드라마는 그럴 수 없다. 오디오 대본에서는 먼저 음향효과를 정해줘야 한다. 된장찌개를 먹는 장소가 식당인지 가정집인지, 만약 식당이라면 테이블이 몇 개 정도 있는지, 손님들은 많은지를 적어둬야 음향효과 감독이 상황에 맞는 배경음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콕 찍어서 된장찌개라는 것’을 말로 해야 한다. 대사로 ‘이 집이 된장찌개 맛집’이라든지 ‘오랜만에 된장찌개를 먹으니까 엄마 생각이 난다’든지 그런 식으로 언급해야 한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가 된장찌개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5. 인공지능(AI) 시대 목소리 연기자 성우에게 희망은 있을까?
라디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나만 꼽으라면 목소리 연기자인 ‘성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성우들을 만나면 ‘AI 때문에 위기’라는 말을 한다. 이러다 성우라는 직업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성우들이 담당했던 안내 방송을 AI가 차지하는 사례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AI가 계속 발전하면 성우라는 직업은 사라질 것인가? 30년 넘게 성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라디오 드라마 작가의 대답은 ‘위협은 될 수 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발음이나 발성에서는 AI가 성우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니까 지치지도 않을 테고 상처받을 일도 없다. 감정기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며 목소리가 갈라지는 일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점,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AI가 유리한 그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성우들한테 희망을 안겨준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현장은 라디오 드라마 연습실이다.

사진. 라디오 문학관 연습실
그날 배역을 맡은 성우들은 연습실에 오기 전 이미 대본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로 참여한다. 주요 배역을 맡았으면 원작도 읽고 온다. 그러니까 성우들은 이미 연습실에 오기 전부터 소설 속 인물로 살고 있다. 연습할 때는 치열하다 못해 경이롭다. 하나의 문장, 한 줄의 대사라도 그 속에 의미가 담겨 있다면 그냥 뱉지 않는다. 호흡에도 수십 가지가 있고 호흡의 길이를 몇 초 하느냐에 따라 감정은 달라진다. 망설임, 설렘, 떨림, 탄식, 절망 같은 감정을 표현할 때는 숨소리 자체가 달라진다. 웃음이나 울음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라디오 드라마 연습실에 참가한 성우들은 소설 속 인물이 되어 호흡하고 탄식하며 울고 웃는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고 최선을 다해 목소리 연기를 했는데도 마이크가 꺼지면 성우들은 아쉬워한다.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 마음은 결코 AI가 흉내 낼 수 없다. 그래서 인공지능 시대에도 목소리 연기자 성우들에게 희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6. 소리 마법사 폴리 사운드 음향효과 감독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 때 많은 스태프가 함께 한다. PD, 기술감독, 음향효과 감독, 음악감독까지. 모든 분야가 다 중요하지만, 라디오 드라마의 매력을 가장 잘 구현하는 분야는 폴리 사운드 아티스트인 음향효과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문장이 폴리 사운드를 만나면 독자들은 곧바로 소설 속 공간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건 마치 마법과도 같다. 실제로 음향효과 감독이 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마법과 같다. 그래서 음향효과 감독은 소리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물끄러미 바다를 보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라디오 드라마 작가는 음향효과 감독들이 이 장면을 만들 수 있도록 지문을 적어준다. ‘가을, 해거름, 바람 약하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
음향효과 감독들은 이 대본을 넘겨받으면 본격적으로 소리 만들기에 들어간다. KBS 라디오 문학관은 3명의 음향효과 감독이 소리를 만드는데 그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원작과 각색 대본을 읽은 후에도 장면이 그려지지 않으면 수시로 소통한다. 바다가 동해인지 남해인지 서해인지, 주변에 숲은 있는지, 어촌마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등을 확인한다. 어느 바다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바다마다 파도의 세기가 다르고 갈매기의 여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숲을 확인하는 것 역시 나뭇잎에 따라 바람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이고 어촌마을의 규모를 확인하는 것도 현장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음향효과 감독은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할 때 성우들의 움직임에서 나는 소리도 만든다. 예를 들어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밥과 장아찌를 꺼냈다. 단출한 밥상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밥에 물을 부었다.’라는 지문이 있다고 해 보자. 이때 음향효과 감독은 할머니 배역을 맡은 성우와 함께 움직이면서 소리를 만들어 낸다. ‘할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올 때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밥솥에서 밥을 퍼 담고 냉장고를 열어 장아찌를 꺼내 앉은뱅이 밥상 위에 올린 다음 숟갈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은 후 일어나 물을 가져와 밥에 붓는’ 움직임을 모두 소리를 표현한다. 실제 소리보다 더 실감 나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음향효과 감독은 소리 마법사다.
7. 소설에 날개를 달아주는 음악감독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면서 소설 속 인물이 눈물 흘릴 때 함께 가슴 아파했던 장면이 있는가? 소리 없는 안개가 펼쳐지는 장면에서 소설 속 장면이 떠올랐다면 그때는 어김없이 음악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라디오 드라마 음악감독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본과 원작 읽기다. 모든 음악감독이 대본을 숙지하겠지만 라디오 드라마의 음악감독은 ‘분석하고 연구한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깊이 들어간다. 그래야만 등장인물의 심리나 작품 속 배경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시대가 1930년대라면 그 시대에 유행했던 음악을 배경음으로 선곡한다. 주인공의 지적 수준도 고려한다. 필요에 따라 편곡도 하고 직접 연주한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간혹 여러 버전의 음악을 가지고 와 스태프들의 의견을 구할 때도 있다. 그만큼 완성도를 높이려는 것이다.
음악감독의 작업이 끝나고 음악이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소설은 빛을 발한다. 빛의 날개를 달고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다. 라디오 드라마 음악감독은 소설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이다.
8. ON AIR에 불이 꺼진 후
ON AIR에 불이 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저기 인사가 오고 간다. 라디오 드라마 제작이 끝났다. 하지만 소설 속 뒷얘기는 끝나지 않는다. 열린 결말이거나 오브제가 등장하면 더 길어진다. 최근 가장 열띤 토론을 했던 작품은 202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 김근희 작가의 「루빅스 큐브」를 제작한 후였다. ‘김현이 황치록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무엇일까?’와 ‘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라디오 드라마 제작은 불이 꺼진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성우들과 제작진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라디오 드라마 스튜디오의 문이 닫혔다.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또 다른 소설을 만날 준비를 할 것이다.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나면 또 하나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KBS <라디오 문학관>
프로그램 편성 : 한민족방송, 일 18:10 – 19:00
|
〈문학의 곁〉은 창작자뿐 아니라 문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확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책이 독자에게 닿기까지 그 과정에 머무는 사람들, 문학과 독자 사이 어딘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이번 문학의 곁에서는 국내 문학작품을 라디오 드라마로 재구성해 오디오북으로 전하는 KBS 〈라디오 문학관〉의 서현이 작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모색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 권예진
- 2026-09-01
문장웹진 모색
호주 도서관의 공간혁신과 문학 생태계를 살펴보다.[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호주 도서관의 공간혁신과 문학 생태계를 살펴보다. - 시드니·멜버른 도서관 탐방기 - 김성하(인천광역시교육청중앙도서관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 담당자)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로 선정되어 7박 9일간의 호주 국외연수에 참여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번 연수는 오랜 시간 도서관을 일터이자 삶의 공간으로 삼아온 사서로서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도서관과 문학, 문학과 지역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 생생한 현장을 살펴보는 뜻깊은 여정이었다. 5월 19일 저녁, 인천공항을 출발해 10시간 넘는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상공에서 마주한 붉은 여명은 긴 비행의 피로를 단숨에 잊게 만들었다. 도착해서 처음 만난 생명체는 현지에서 흔히 ‘쓰레기새'라 부르며 홀대한다는 호주흰따오기, ‘아이비스(Ibis)’였다. 노천카페 주변을 서성이며 사람들이 남긴 빵 조각을 가로채는 녀석들의 모습은 낮선 도시의 첫인상을 도리어 친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하버 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마주하니, 비로소 이번 연수가 실감났다. 1. 시드니(Sydney): 전통과 혁신이 어우러진 도서관 문화의 현장 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시드니 작가 축제(Sydney Writers' Festival)가 한창 열리던 5월 21일,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을 찾았다. 1826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주 전체 도서관 서비스 개시 200주년을 맞이한 곳이다. 정문의 웅장한 사암 돌기둥이 인상적인 이곳은 1942년에 완공된 고풍스럽고 웅장한 구관 '미첼 빌딩'과 호주 이주 200주년을 기념해 1988년에 지어진 후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마친 '신관'이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한 도서를 열람하는 공간을 넘어 거대한 박물관이자 미술관의 역할의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웅장한 열람실은 벽면 전체를 채운 고서들과 클래식한 목재 책상,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지적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높은 곳의 책을 꺼낼 수 있도록 연결된 2층 구조의 난간과 계단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어린이도서관은 천장에 책들이 마치 새처럼 날아다니는 듯이 조형물이 매달려 있었고, 독창적인 도서 소개 사인물은 아이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의 자료는 관내열람만 가능하다. 법정 납본 제도에 따라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출판되는 모든 도서의 원본과 역사적 기록물을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 주립도서관의 핵심 임무이기 때문이다. 분실 위험이 있는 관외대출을 금하고 오직 관내 열람과 연구만을 허용하여 아카이브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었다. 도서관이 운영하는 '펠로우십 프로그램(Fellowship Program)'은 역사학자와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최소 1,000AUD에서 최대 120,000AUD에 이르는 파격적인 창작
- 2026-09-01
문장웹진 모색
30년 만에 만난 호주[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30년 만에 만난 호주 김중석(시옷책방 상주작가) “호주라니!” 상주작가 우수시설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기대했던 해외연수의 행선지가 호주라는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전 해에는 유럽으로 다녀왔다고 알고 있었던 터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호주라니. 하지만 연수를 하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 되돌아보는 지금까지도 호주가 너무 좋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여정에 많은 문화공간과 아름다운 자연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고 새로운 창작을 향한 에너지와 영감을 듬뿍 채운 시간이었다. 사실 호주는 30년 전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곳이었다. 그때는 결혼식을 마치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코스를 따라 몇 팀의 신혼부부들과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딘가에 내리고 밥을 먹고 멋있는 자연을 보며 감탄했지만, 자세한 것은 모두 다 머릿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기억에 선명한데 또 어디를 갔더라? 캥거루를 만나서 먹이를 주기는 했는데 이제는 어느 동물원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나의 호주는 아주 오래전 앨범을 뒤져야만 나오는 추억 속의 나라였다. 호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이미지는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코알라 그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멋진 공원들 그리고 원주민들의 미술이었다. 그때의 호주와 지금의 호주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기대감을 잔뜩 안고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맑고 청명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제까지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였다는데 다행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 ‘날씨요정’이 있었는지 여정 내내 좋은 날씨 덕분에 즐거운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오니 그때의 호주가 조금씩 떠올랐다. 커다란 나무들, 온통 영어로 만들어진 간판들(아주 당연하지만) 익숙함이 밀려왔다. 며칠의 여정 동안 인상 깊었던 몇 개의 장면들을 기억해 본다. 1. 라이온 킹 뮤지컬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우리 일정에는 뮤지컬 ‘라이온 킹’이 관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작자로서 부끄럽지만 뮤지컬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공짜 티켓이 생겨서 다녀온 게 전부였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미 영화로는 보았던 것이니 대충의 스토리는 이해가 되었다. (아! 영어의 벽. 이럴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해둘걸, 이라는 후회) 공연이 시작되기 전 놀라웠던 모습은 극장의 분위기였다. 판매원이 돌아다니며 맥주와 음료와 음식을 팔고 옆 사람과 떠들고 인사하며 사진을 찍고 객석에서 바로 보이는 무대 옆쪽 매점에서 음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공연 전의 풍경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본 것은 무대 미술과 의상이었다. 한정된 무대에서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로 이루어졌을까? 무대의 일정 부분은 회전판을 사용하고 어떤 부분은
- 김중석
- 2026-09-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