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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을 기다려

  • 작성일 2020-10-01

[창작 - 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아이돌을 기다려




작 김연주





■ 등장인물
새리(여, 26)
6년 전까지 잘나가던 아이돌이었다.
6년 전 언니의 생일날 불이 나서 부모님이 죽고 얼굴에 흉이 생겼다.
흉이 진 얼굴 때문에 돌연 은퇴하고 세상과 단절한지 6년이다.
언니를 원망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유리(여, 27)
6년 전 자신의 생일에 생일 초에 불이 붙어 집에 불이 났다.
부모님과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동생에게 용서를 구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고딩팬(여, 19)
8년 전부터 새리의 골수팬. 새리를 동경했다.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진 새리를 기다리다 탈덕을 선언한다.


팬클럽 회장(남, 24)
새리의 팬클럽 회장. 떠나는 팬들은 진정한 팬이 아닌 배신자라고 말한다. 자기만이 새리를 지키고 바라보는 진정한 팬이라고 한다. 새리에 대한 환상을 지키고 싶다.


■ 무대
집은 호화로운 느낌이다. 왼쪽 구석에 벽처럼 세워진 문이 하나 있다. 그 문으로 왼쪽은 새리의 방 그리고 오른쪽 넓은 공간은 언니 유리가 생활하는 거실이다. 거실에는 소파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현관문이 있다. 거실 구석에는 아령이 쌓여 있다.




1장.
새리의 방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유리. 유리는 등에 가방을 메고 있다. 맞은편 새리는 새리의 방에 있다. 새리의 방은 어둡다.


새리     언니 거기 있어?

유리     (새리의 목소리에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한다) 새리야. 나 여기 있어.

새리     뭐 해?

유리     어떻게 하면 너가 나를 용서해 줄까 고민하고 있었어. 잘 잤어?

새리     신이 기도를 또 안 들어줬어.

유리     뭐라고 기도했는데?

새리     아침에 눈을 뜨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거든.

유리     왜 그런 소리를 해.

새리     왜라니? 언니는 매일 아침 눈뜨면 기쁜가 봐? 하루가 기대되고 행복하고 그런가 봐? 난 얼굴이 촛농처럼 녹아내려서 방에만 이렇게 처박혀 있는데?

유리     아니. 안 기뻐. 안 기대돼. 안 행복해. 미안해…….

새리     그럼 불행해? 나같이 못나고 지랄 맞은 동생을 돌봐야 해서?

유리     아니.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새리     그럼 행복해? 언니 잘못을 설마 잊은 거 아니지?

유리     절대 안 잊었어. 내가 생일 케이크에 초만 제대로 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늘 원망하고 자책하고 있어.

새리     언니가 언니의 잘못을 자꾸만 잊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 기분 탓이겠지?

유리     반성하고 괴로워하고 있어.

새리     안 되겠어. 언니한테 벌을 줘야겠어.

유리     새리야…….

새리     언니 속죄의 가방에 지금 몇 킬로 들어 있어?


유리는 가방에서 아령을 꺼낸다.


유리     20kg…….

새리     2kg 추가해.

유리     새리야…… 지금도 너무 무거워…… 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

새리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비하면 그깟 목이랑 허리 아픈 게 대수야?

유리     미안해…….


유리는 거실에 있는 아령을 하나 꺼내서 가방에 넣는다.


유리     2kg 추가했어.

새리     언니, 언니가 한 잘못을 잊지 마.

유리     응. 안 잊을게……. 새리야…… 그 대신 용서하고 밖으로 나오면 안 될까? 내일 엄마 아빠 제사야. 이번에도 제사 안 지낼 거야?

새리     엄마 아빠가 죽을 때 나도 같이 불타서 죽었어.

유리     무슨 소리야. 이렇게 내 옆에 살아 있는데…….

새리     이 방구석에서 시체처럼 틀어박혀 지낸 지가 벌써 6년이야.

유리     이제 방 밖으로 나와서 나도 용서해 주고 다시 재밌게 살자. 응?

새리     다시 재밌게 살자고? 난 옛날의 새리가 아니야. 이렇게 흉측하게 변해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재밌게 살 수 있겠어?

유리     안 흉측해.

새리     언니 지금 용서받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거지?

유리     넌 지금이나 옛날이나 똑같이 나한테는 새리야.

새리     사람들은 이제 새리를 다 잊었겠지?

유리     아직도 새리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팬들이 얼마나 많은데.

새리     내가 얼마나 잘나갔었는지 기억나?

유리     (아부 떨 듯) TV만 틀면 온통 새리였잖아. 데뷔 이후로 쭉 새리가 아이돌 브랜드 평판 1위였어. 파급력이 어마어마했지. 뮤직비디오도 최단기간 내에 조회 수 1억 찍었잖아. 현역 아이돌 중에서 새리 기록을 따라잡은 사람은 아직도 없을걸. 정말 대단했었어.

새리     비참해.

유리     왜…….

새리     지금은 이 좁아터지고 햇빛도 안 들어오는 방에서 주는 밥만 먹으면서 겨우 살아가고 있잖아. 그냥 콱 죽어버릴까?

유리     안 돼.

새리     죽어야겠어.

유리     새리야…….

새리     밧줄 줘.


유리는 가방에서 밧줄을 꺼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 반복해서 밧줄에 칼집을 낸 뒤 새리의 방문 밑의 작은 공간으로 밧줄을 밀어 넣는다.


새리     내가 죽어서 그때 하늘에서 언니를 용서할게. 언니 안녕.


새리는 목을 매단다. 캑캑거리는 새리의 소리.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5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4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3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2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1


새리는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유리     괜찮아?

새리     언니를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네.

유리     용서하고 싶을 때 말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유리는 쪼그리고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한동안 말이 없는 둘.


새리     (유리가 말이 없자) 언니. 거기 있어?

유리     응. 새리야…….

새리     정말 사람들이 나를 잊었을까?

유리     아니야. 모두 너를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새리     내 이름 검색하면 아직도 글이 올라와? 기사 한 줄도 없겠지?

유리     잠깐만.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는 유리.


유리     어…….

새리     왜?

유리     그게…….

새리     왜?

유리     올라온 글이 없네…….

새리     거 봐…… 사람들은 이제 나를 잊었어. 내가 죽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나 봐. 내가 죽어도 상관없나 봐…….


말없이 핸드폰으로 검색하는 유리.


새리     언니?


말없이 핸드폰으로 검색하는 유리.


새리     (언니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초조해진다) 언니!

유리     찾았다!

새리     언니가 사라진 줄 알았잖아.

유리     미안. 새로 고침 하느라……. 방금 새리와 관련된 글 찾았어!

새리     뭔데?

유리     사과마켓이라는 사이트인데…….


유리는 핸드폰을 보다가 말을 잇지 못한다.


새리     사과마켓이 왜?

유리     아니…… 그게…….

새리     사과마켓이 뭐야?

유리     중고거래 하는 사이트…….

새리     (자신과 관련된 글이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아! 거기에 내 싸인 CD 구하는 글 올라왔구나! 그 사람 어떡하냐……. 내 싸인 CD 구하기 어려울 텐데…….

유리     그게 아니라…….

새리     그럼?

유리     팔겠다는 글이…… 올라왔어…….

새리     판다고? 설마 내 싸인 CD를???

유리     응……. 1집, 2집, 3집 앨범이야…….

새리     (실망) 거봐…… 사람들이 이제 나를 안 좋아해……. 그러니 내 싸인 CD를 팔아버리지……. 얼마에…… 팔겠대? 500만 원?

유리     어??

새리     300만 원?

유리     어???

새리     100만 원……?

유리     어……??

새리     50만 원?

유리     어?

새리     설마 10만 원?

유리     어? 2만 원…….

새리     뭐 2만 원? 헐값에 팔겠다고? 한때 나를 사랑했던 팬이었으면서……. 정말 나를 사랑하긴 한 거야?

유리     가격을 잘못 올렸나 봐! 새리인데…… 어떻게 2만 원이겠어.

새리     그 판매자 왜 파는지 그리고 왜 하필 그 가격인지 내가 직접 들어야겠어. 그리고 언니가 사버려. 그 사람은 내 싸인 CD를 가질 자격이 없어.


유리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유리     저 사과마켓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새리 싸인 CD 아직도 판매 중인가요? 아 그럼 혹시 오후에 직거래 가능한가요?


암전.


2장.
거실에 서 있는 유리와 고딩팬. 방 안에서 유리와 고딩팬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새리.


유리     오시느라 힘드셨죠?

고딩팬    언덕이 너무 많아서 쓰러질 뻔했어요.

유리     제가 사정상 집을 비울 수가 없어서요.

고딩팬    근데 집이 되게 좋아요. 집 좀 둘러봐도 돼요?

유리     네.


고딩팬은 집을 둘러보다 새리의 방 앞에 선다. 긴장하는 새리와 유리.


고딩팬    이 집 꼭 연예인이 사는 집 같아요!

유리     (놀람) 연예인이요……?


새리는 방문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엿듣는다.


고딩팬    네! 이렇게 좋은 집은 보통 연예인들이 살잖아요! 근데 왜 집에서 가방을 메고 계세요?

유리     제가 까먹으면 안 되는 게 있어서 가방에 넣고 다니거든요.

고딩팬    되게 중요한 건가 보다.

유리     네……. 그럼 물건 볼 수 있을까요?

고딩팬    잠시만요.


고딩팬은 새리가 그려져 있는 쇼핑백에서 싸인 CD를 꺼낸다.


고딩팬    상태는 특A일 거예요. 제가 엄청 소중하게 다뤘거든요.

유리     새리의 열렬한 팬이었나 봐요?

고딩팬    네. 팬이었죠.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처음 좋아한 연예인이 새리거든요. 새리 언니 데뷔 무대를 보는데 새리 언니처럼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어요. 노래, 춤, 연기…… 다 완벽했어요. 새리 언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마시는 공기가 특별해지는 느낌이랄까요.

유리     근데 왜 파시는 거예요?

고딩팬    배신자예요.

유리     배신자요?

고딩팬    새리가 갑자기 사라진 지만 벌써 6년이에요. 새리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 하나로 버텼는데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새리는 팬들 생각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거 같아요. 항상 우리 곁에 있겠다고 했으면서 말도 없이 사라지고…….

유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새리가 돌아올 수 있잖아요.

고딩팬    6년이 지났어요. 안 돌아와요. 그리고 이제 저도 고3이에요. 이참에 그냥 마음 접고 공부나 하려고요.

유리     그럼…… 왜 2만 원에 파는 거예요?

고딩팬    요즘에 사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빨리 팔고 싶어서 2만 원에 내놨어요.

유리     이렇게 귀한 것들을 2만 원에 팔다니 납득이 가지 않아요. 새리 정도면 100만 원에도 사려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고딩팬    에이 100만 원에 누가 사요.

유리     왜요 살 수도 있죠!

고딩팬    저는 그냥 2만 원에 팔래요.

유리     2만 원이라니…….

고딩팬    왜 너무 비싸요? 만 원으로 깎아 줄까요?

유리     아뇨 아뇨! 깎다뇨! 어떻게 만 원에 사요……. (버럭) 그러고도 당신이 팬이에요!!!!

고딩팬    네??

유리     좋다고 싸인 받고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헐값에 팔고……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새리는 팬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요!!!!! 당신은 새리를 만 원짜리로 만들었어!

고딩팬    팬들을 보고 싶었다면 나타났겠죠? 6년이에요. 저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요.

유리     새리는 돌아온다고요!

고딩팬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유리     (당황) 제 아는 동생의 친구에 언니의 동생의 친구가 새리가 곧 나타날 거라고 그랬대요.


새리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고딩팬    무슨 소리 안 나요?

유리     (당황) 무슨 소리요?

고딩팬    우는 소리 같은 거요.

유리     바람소리인가???


새리는 입을 틀어막고 흐느낀다.


고딩팬    어. 이상한 소리 들리는데.


고딩팬은 새리의 방 앞까지 다가간다.


고딩팬    (방문에 귀를 대려고 한다) 여기 누가 있는……?

유리     저기요!

고딩팬    네?

유리     100만 원에 살게요.

고딩팬    네?

유리     100만 원에 살 거예요. 마음 같아선 천만 원에라도 사고 싶어요!


유리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다.


유리     (5만 원짜리 지폐를 센다) 자, 여기요.

고딩팬    헐…… 너무 많아요…….

유리     전혀요.


고딩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고딩팬    여보세요? 아, 새리 싸인 CD요? 방금 팔렸는데요.


고딩팬이 전화를 끊는다.


유리     방금 사겠다는 사람한테 전화 온 거죠? 맞죠!

고딩팬    네.

유리     (기뻐하며) 거봐요. 아직도 이렇게 찾는 사람이 있잖아요. 얼마에 사겠대요?

고딩팬    진짜로 새리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세요?

유리     그럼요!

고딩팬    새리는 안 돌아와요.


말없이 나가려는 고딩팬을 멈춰 세우는 유리.


유리     좀 전에 사겠다는 그 사람 전화번호 알려주고 가요. 그 사람은 당신과는 다른 일편단심 팬일 거예요.


고딩팬은 유리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유리는 전화번호를 입력한다.


고딩팬    그럼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유리     저기요! 새리는 언젠가 꼭 나타날 거예요! 두고 봐요!


고딩팬은 뒤돌아보지 않고 퇴장한다.
유리는 새리의 방 앞으로 간다.


유리     새리야.

새리     (훌쩍이며) 갔어?

유리     응. 내가 100만 원에 샀어. 어떻게 2만 원에 팔 수가 있지? 가짜 팬일 거야.

새리     이제 내 가치가 2만 원인가 봐…….

유리     아니야! 내가 100만 원에 샀다니까……. 그리고 또 새리 싸인 CD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타났어.

새리     그 사람은 얼마에 사고 싶대?

유리     2만 원보다는 비싸게 사겠지! 기다려 봐.


유리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유리     새리 싸인 CD 구하고 계시죠? 저 1, 2, 3집 싸인 CD 다 갖고 있거든요. 상태는 특A예요. 직거래 가능하세요? 네네. 제가 사정상 집을 비울 수가 없어서요. 그럼 제가 주소 문자로 남길게요. 그때 봬요.


암전.


3장.
거실에 차려진 제사상. 유리는 오늘도 가방을 메고 있다. 유리는 새리의 방 앞에 앉아 있다.


유리     새리야…… 이번 제사도 나 혼자 지내?


대답이 없는 새리.


유리     새리야…… 내가 힘들게 제사상도 차렸어……. 나와서 절이라도 해. 아님 밥이라도 같이 먹자…….

새리     난 오늘이 정말 싫어.

유리     새리야…… 오늘 너랑 같이 보내고 싶은데……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새리     언니 설마…….

유리     어?

새리     지금 언니 생일 축하받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지?

유리     어! 아니야! 아니야!

새리     지금 언니 생일인 거 은근히 티내고 있잖아.

유리     아니야! 내가 그렇게 염치없는 인간은 아니야. 내 생일 초 때문에 엄마 아빠가 죽고 너도 이렇게 됐는데……. 내가 생일 같은 거를 챙기면 사람도 아니지…….

새리     안 되겠다. 오늘은 언니 생일이니까 더욱 벌을 줘야겠어. 5kg 추가해.

유리     새리야……. 5kg는 너무 무거워…….

새리     당장!!


유리는 거실 구석에 쌓인 아령을 하나 가방에 넣는다. 가방에 넣고 무거운 걸음으로 새리의 방 앞에 앉는 유리.


새리     언니. 거기 있어?

유리     응. 나 여기 있어.

새리     언니. 그 싸인 CD 사겠다는 사람 말이야. 왜 안 와?

유리     그러게. 온다고 했는데 안 오네…….

새리     그래. 이제 나를 잊은 거야. 내 싸인 CD 따위는 필요가 없는 거지. 죽을래. 밧줄 줘. 밧줄!

유리     새리야…….

새리     밧줄 달라고!


유리는 가방에서 밧줄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커터칼을 꺼내 밧줄에 칼집을 낸다. 유리는 새리의 방 밑으로 밧줄을 밀어 넣는다.


새리     내가 죽거든 내 제사상은 차리지 마.


새리는 밧줄에 목을 매단다. 캑캑거리는 새리의 소리.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5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4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3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2

유리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1


새리는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유리     괜찮아?


이때 초인종 소리.
유리는 현관문으로 달려간다. 들어오는 팬클럽 회장.


유리     왜 이제 오셨어요?

팬클럽 회장 (거실에 제사상을 보고) 어…… 제사 지내는 중이셨어요? 나중에 올까요?

유리     막 치우려던 참이에요. 식사는 하셨어요?

팬클럽 회장 아직이요.

유리     (제사상을 가리키며) 좀 드실래요?

팬클럽 회장 네?

유리     앉으세요. 어차피 먹을 사람도 없어요.


팬클럽 회장과 유리는 제사상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 팬클럽 회장과 유리가 밥 먹는 소리를 엿듣는 새리.


팬클럽 회장 맛있어요.

유리     고마워요.

팬클럽 회장 오늘 누구 제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유리     부모님이요. 6년 전에 화재로 돌아가셨거든요.

팬클럽 회장 아...


유리는 거실에 있던 쇼핑백을 건넨다. 쇼핑백 안을 살피는 팬클럽 회장. 하나씩 꺼내 본다.


팬클럽 회장 우와. 상태가 되게 좋네요. 왜 파시는 거예요?

유리     저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거 같아서요.

팬클럽 회장 잘 됐네요. 저는 새리와 관련된 건 일단 다 모으고 보거든요.

유리     새리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팬클럽 회장 제가 새리 팬클럽 회장이거든요.

유리     와. 회장님이시구나. 몰라뵀어요.

팬클럽 회장 팬클럽 수도 6년 사이에 많이 줄었어요. 저는 끝까지 새리를 기다릴 거예요.

유리     정말요?

팬클럽 회장 저는 철새 같은 팬이 아니에요. 새리를 기다리는 지금도 너무 행복해요.

유리     회장님 같은 진정한 팬을 만나 뵐 수 있어서 좋네요. 분명 새리가 좋아할 거예요.

팬클럽 회장 얼마에 파실 거예요?

유리     100만 원?

팬클럽 회장 100만 원이요?

유리     네.

팬클럽 회장 100만 원은 가격이 좀 쎈데…….

유리     새리의 친필 싸인이 담긴 CD인데……. 100만 원도 비싼가요?

팬클럽 회장 요새 100만 원에 안 팔 텐데…….

유리     싸게 파는 놈들이 문제인 거죠. 새리의 가치를 후려치는 놈들이에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팬클럽 회장 저 지금 좀 부끄러워요.

유리     왜요?

팬클럽 회장 그동안 새리 싸인 CD 중고로 싸게 샀다고 좋아했거든요. 제가 그쪽 덕분에 제대로 된 덕질을 배우는 거 같아요. 한 수 배웠습니다.

유리     사과마켓에서 새리 싸인 CD를 얼마에 파는 줄 아세요?

팬클럽 회장 얼마요?

유리     2만 원이래요. 심지어 만 원으로 깎아 주겠대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새리가 2만 원짜리예요?

팬클럽 회장 당연히 아니죠!

유리     현금 아니면 계좌 뭐로 하시겠어요?

팬클럽 회장 음…… 조금만 더 고민해 봐도 될까요? 예상했던 금액보다 훨씬 많아서…….

유리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팬클럽 회장 그쪽은 언제부터 새리 팬이었어요?

유리     사람들이 잘 몰랐을 때부터 팬이었어요.

팬클럽 회장 와. 저도요! 찐팬끼리 만났네요.

유리     회장님은 말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랑 달라요.

팬클럽 회장 평생 기다릴 거예요. 저는 기다리다 지쳐서 떠나는 그런 팬이 아니에요.

유리     (벅차다) 선물 받은 느낌이에요.

팬클럽 회장 선물이요?

유리     (새리가 들을까 봐 작게 속삭인다) 오늘 사실 제 생일이거든요.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거든요.

팬클럽 회장 그게 뭔데요?

유리     용서요…….

팬클럽 회장 용서요?

유리     네. 근데 회장님 같은 사람이 있다면 용서받기가 쉬워질 거 같아요.

팬클럽 회장 어 잠시만요!


팬클럽 회장은 가방에서 초코파이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포크를 초코파이에 꽂는다.


팬클럽 회장 생일 케이크예요.

유리     (울먹인다) 저 6년 만에 생일 케이크 처음 받아 봐요…….

팬클럽 회장 초는 없지만, 소원 빌어요.


유리는 눈을 감고 소원을 빈다.


유리     소원이 이루어질 거 같아요. 저기…… 만약에 새리가 돌아오면 어떨 거 같아요?

팬클럽 회장 음…… 반갑겠죠? 아니 놀랍겠죠? 아니 꿈같겠죠?

유리     새리가 전처럼 이쁘지 않다면요?

팬클럽 회장 새리는 안 이쁠 수가 없어요. 뭘 해도 새리는 새리예요.

유리     만약에 새리가 화상을 입어서 얼굴이 전과 같지 않다면요?

팬클럽 회장 상관없어요. 그래도 새리를 사랑해요. 새리를 기다릴 거예요.


유리는 팬클럽 회장을 끌어안는다.


유리     새리가 6년 전에 사라진 이유 궁금하시죠?

팬클럽 회장 네.

유리     다 저 때문이에요.

팬클럽 회장 무슨 소리예요?

유리     제 생일날 초를 잘못 끄는 바람에 집에 불이 났어요. 그때 엄마 아빠 모두 돌아가시고 저랑 동생만 살았어요. 동생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어요. 동생이 달라진 모습 때문에 사람들 모르게 숨어버렸어요.

팬클럽 회장 아, 갑자기 동생이라뇨?

유리     새리가 제 동생이에요.

팬클럽 회장 그쪽이 새리 언니라고요? 

유리     네…….

팬클럽 회장 농담하시는 거죠?

유리     지금 새리가 저기에 있어요.

팬클럽 회장 (유리가 농담한 줄 안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유리     저는 매일 새리한테 용서를 구하고 있어요. 새리가 저를 용서해 주는 날에 문을 열고 나올 거예요. 분명 언젠가 저를 용서해 주겠죠?

팬클럽 회장 이제 재미없어요. 농담 그만 하세요.

유리     새리에게 말을 걸어 보시겠어요? 분명 회장님이라면 새리도 좋아할 거예요.


유리는 팬클럽 회장을 데리고 새리의 방 앞에 선다.


유리     새리야. 팬클럽 회장님이야. 6년째 한결같이 너를 기다리고 계시대.

새리     아…… 안녕…… 하세요…….

팬클럽 회장 헐…… 진짜 새리 목소리예요.

유리     새리야. 너가 어떤 모습이건 늘 너를 기다릴 거라고 하셨어.

새리     정말요?

유리     너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어떤 모습이건 사랑해 준다잖아. 나와 볼래?


새리, 말이 없다.


유리     회장님은 언제나 널 사랑하신대. 그리고 100만 원에 싸인 CD도 사실 거야. 그쵸?

팬클럽 회장 (혼란) 네……?

유리     그럼. 걱정하지 마. 말만 사랑한다 해놓고 떠나는 사람들이랑은 달라. 잠깐 방문 열어 볼래?

새리     그…… 그럴까?

유리     응!


새리는 방에서 문을 열까 말까 갈등한다. 팬클럽 회장과 유리는 새리의 방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팬클럽 회장 잠시만요!!!!

유리     네? 왜요?

팬클럽 회장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워요.

유리     뭐가요?

팬클럽 회장 새리를 6년 만에 본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내일 보면 안 될까요? 그리고 제가 다시 올 때까지 싸인 CD는 다른 사람한테 팔지 마세요. 꼭이요!


팬클럽 회장은 도망치듯 퇴장한다.


유리     저기요! 저기요!

새리     내가 보기 싫은 거야……. 그래서 도망간 거야…….

유리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어……. 내일 다시 온다잖아…….

새리     안 올 거야.


암전.


4장.


새리의 방 앞에 앉아 있는 유리. 유리는 포크가 꽂혀 있는 초코파이를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다.


새리     안 올 거야.

유리     올 거야. 회장님은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무 반가운 나머지 놀라서 혼란스러운 거야.


유리는 포크를 뽑아 초코파이를 맛본다. 조금씩 음미하는 유리.


새리     언니 뭐 해.

유리     (안 먹은 척) 어 그냥 있지…….

새리     나 죽고 싶어. 밧줄 줘.

유리     새리야…… 그러지 마…….

새리     소용없어. 밧줄 줘.


유리는 한 손에는 초코파이를 들고 한 손으로 가방에서 밧줄을 꺼낸다. 그리고 밧줄을 새리의 방 밑으로 집어넣는다.
새리는 목을 매단다. 그리고 캑캑거리는 새리.
유리는 초코파이를 다시 음미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끊어지지 않는 밧줄. 오랜 시간 괴로워하던 새리는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다. 쿵 소리에 자신이 밧줄에 칼집을 내지 않았음을 깨달은 유리.


유리     새리야!!!

새리     언니…… 날 죽이려고 했구나?

유리     괜찮아?

새리     무려 15초였어. 얼마나 긴 시간인 줄 알아? 죽을 뻔했다고!

유리     미안해. 내가 칼집 내는 걸 깜박했어.

새리     언니의 진심이겠지. 내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했겠지!

유리     아니야…… 오해야…….

새리     나한테 용서받을 생각하지 마.

유리     새리야…… 잘못했어……. 새리야. 새리야…….


대답이 없는 새리.


유리     새리야…….


이때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유리는 현관문으로 향한다. 들어오는 팬클럽 회장.


팬클럽 회장 저기…….

유리     역시 오실 줄 알았어요. 새리야, 회장님께서 오셨어.


새리는 자신의 방문에 귀를 대고 대화를 엿듣는다.


팬클럽 회장 싸인 CD는 그대로 있죠?

유리     그럼요. 다시 오실 줄 알고 아무한테도 안 팔았어요.

팬클럽 회장 살게요. 100만 원에.

유리     100만 원이요!! 새리야. 회장님께서 니 싸인 CD를 무려 100만 원에 사가신대. 역시 너의 가치를 알아보시는 분이야.

팬클럽 회장 그 대신 새리한테 부탁이 있어요.

유리     뭔데요?

팬클럽 회장 지금처럼 있어 주세요.

유리     지금처럼이라뇨?

팬클럽 회장 새리 그리워하고 기다릴 수 있게 지금처럼 쭉 방 안에 있어 주세요.

유리     새리가 지금 여기 있다니까요??

팬클럽 회장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6년이 지나서 새리를 만나면 내가 과연 행복할까…….

유리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리잖아요.

팬클럽 회장 6년이란 시간 동안 얼굴도 많이 달라졌을 거 아니에요…….

유리     새리는 언제나 이쁘다면서요…….

팬클럽 회장 사랑하고 기다릴 수 있게 계속 방에만 있어 주세요. 그럼 제가 영원히 사랑하고 기다릴게요.

유리     새리가 전처럼 웃고 떠들면서 사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

팬클럽 회장 제가 알던 새리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망치지 말아 주세요…….

유리     새리야 나와. 나와서 전처럼 살자.

팬클럽 회장 방에 있는 게 새리 본인을 지키는 길이에요. 나오지 마세요!

유리     새리야, 이 사람 말 듣지 마. 나와! 나와도 돼.

팬클럽 회장 나오기 싫다는 사람 왜 자꾸 나오게 하는 거예요?

유리     그럼 저 좁은 공간에서 평생 남이 하는 얘기나 엿들으면서 살길 바라는 거예요? 새리야, 이 사람은 널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아.

팬클럽 회장 새리를 생각하는 척 말하지 마요. 그냥 용서받고 싶어서 새리가 나오길 바라는 거 아니야!

유리     새리를 위해서야!

팬클럽 회장 언니는 지금 용서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새리! 당신 언니는 새리의 얼굴을 망가트린 사람이야. 부모님도 모두 죽였다고! 살인마에 악마라고요! 이렇게 쉽게 용서할 거예요??

유리     닥쳐!!!!!!!!!! 망상 속에 사는 놈 말 듣지 마! 평생 모니터로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주제에.

팬클럽 회장 뭐? 망상?

유리     그래 망상!!


팬클럽 회장은 유리의 목을 조른다.


팬클럽 회장 난 진짜 새리를 사랑한다고. 새리를 망친 주제에 뭐 망상이라고?

유리     캑캑. 새리는 나를 용서해 줄 거야.

팬클럽 회장 용서하지 않을 거야.

유리     요옹서,, 캐캑. 해줄 캑. 거야.


점점 유리의 목을 세게 조르는 팬클럽 회장.
유리는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숨이 막힌다.


팬클럽 회장 죽어. 죽어버려. 나쁜 년. 넌 악마야.


이때 새리의 방이 열린다.


새리     그…… 그만.


팬클럽 회장은 유리의 목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린다.


팬클럽 회장 안 돼! 제발 들어가 줘요. 제발…… 새리…….

유리     잘했어. 새리야……. 들어가지 마.

팬클럽 회장 지금 그 모습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 줄 테니까 들어가 줘요.


유리는 가방으로 팬클럽 회장의 머리를 내려친다. 쓰러지는 팬클럽 회장.


새리     (쓰러진 팬클럽 회장을 보며) 언니…….

유리     (새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새리야,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새리     언니…… 목이 빨개. 괜찮아?

유리     난 괜찮아. 이제 나 용서해 주는 거야?


이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새리와 유리는 현관문을 동시에 바라본다.


유리     누가 왔나 봐.

새리     어떡하지?

유리     일단 치우자.


새리와 유리는 팬클럽 회장을 양쪽에서 잡은 뒤 새리의 방으로 끌고 간 뒤 방에 집어넣는다.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 새리. 유리는 새리를 붙잡는다.


유리     시체랑 같은 방에 있을 거야?


새리는 대답이 없다. 유리는 새리의 손목을 잡고 거실로 데려온다. 유리는 새리를 강제로 소파에 앉힌다. 불안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새리. 유리는 현관문으로 향한다. 현관문에서 들어오는 고딩팬. 등을 돌리고 현관문 쪽을 쳐다보지 못하는 새리. 유리와 고딩팬은 현관문 앞에서 이야기 나눈다.


유리     어쩐 일로 여기에…….

고딩팬    아무리 생각해도 100만 원은 너무 큰돈이에요…….

유리     제가 100만 원에 사겠다고요!

고딩팬    그냥 안 팔래요. 다시 돌려주세요.

유리     네?

고딩팬    새리가 돌아올 거라면서요…….

유리     다시 기다리게요?

고딩팬     기다린 게 아깝잖아요. 다시 기다려 보게요.


고딩팬은 소파에 앉아 있는 새리를 바라본다.


고딩팬    집에 누가 계시네요.

유리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새리가 돌아오면 어떨 거 같아요?

고딩팬    음…… 사진 찍어 달라고 할 거예요.

유리     (새리를 향해서) 새리야…….

고딩팬    새리요?


새리는 등을 돌린 채 한동안 대답이 없다.


고딩팬    저 사람이 새리라고요? 지금 장난치는 거죠? 빨리 싸인 CD나 돌려줘요.


새리가 작게 기침을 한다. 고딩팬은 새리의 등을 바라본다.


고딩팬    헐…… 새리 목소리예요…….


새리는 입을 막는다.


고딩팬    새리 언니…….


새리 뒤로 다가가는 고딩팬. 차마 뒤돌지 못하는 새리.


고딩팬    언니 보고 싶었어요……. 언니 기다린 보람이 있는 거 같아요…….


고딩팬은 새리의 손을 잡는다. 새리는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달려간다.


유리     새리야…… 저 방에 다시 들어갈 거야? 방에 이제 못 들어가.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들끓을 거야. 그게 좋아?


방 앞에서 고민하는 새리. 새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고딩팬을 바라본다. 고딩팬도 한동안 말없이 새리를 바라본다. 숨죽여서 둘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


고딩팬    헐. 저 성공한 덕후인가 봐요…… (사이) 사진 찍어 주세요.


암전.













김연주

작가소개 / 김연주

2020 국립극단 〈발가락육상천재〉 작
2020 두산아트센터 〈양질의 단백질〉 작/연출
2019 국립극단 〈자전거도둑헬멧을쓴소년〉 각색

희곡, 시나리오,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에서 글을 씁니다.



《문장웹진 202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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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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