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가 사는 섬
- 작성일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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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남이섬 호텔정관루]
토끼가 사는 섬
구돌

남이섬은 1.4km의 직선과 그를 감싸는 호로 이루어진, 긴 달 모양의 섬이다. 본래 홍수가 나면 물에 둘러싸이던 곳이었는데, 1944년 댐이 들어서며 북한강 수위가 높아진 뒤 완전한 섬이 되었다. 모래땅이던 곳에 나무를 심고 길러 지금은 3만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숲을 이루었다. 2025년 문학 레지던시를 열었고, 나는 2026년 3월, 그곳에 보름간 머물렀다.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세 번째 작가라고 했다.
그곳 역시 나의 세 번째 레지던시였다. 첫 번째는 도시 한복판에, 두 번째는 인적 드문 산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남이섬은 유명한 관광지였다. 앞선 두 곳의 조건이 묘하게 겹쳐졌다. 야생동물과 마주치는 숲길 옆에는 갤러리와 카페가 있었고, 인파가 넘쳐나다가도 어느 순간, 나는 섬에 혼자였다. 한 시기마다 한 명의 작가만 초청하는 남이섬 레지던시의 특성은, 섬 안의 섬처럼 온전한 고립을 만들어주었다.

고립. 내가 레지던시에 들어간 목적이다. 작년 말 나는 모든 모임에서 빠져나왔다. 친구들에게도 반년간 연락이 닿지 않을 거라 말해 두었다. 그러고는 묵언수행을 하는 명상원에 들어갔다. 열흘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어느 절에서 묵언수행자의 등을 멀찍이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나는 그가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지쳐 있었다. 끝까지 타 흘러내린 초의 자국처럼 책상 위에 눌어붙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을 낸 일은 전생인가 싶었다. 작년까지 나는 수험생 두 명과 살았고, 둘을 차례대로 대학에 보내 놓고 고립을 택한 건,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런데 남이섬에 들어오기 전날 밤, 그중 한 명이 재수를 선언하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뜨자마자 급히 짐을 쓸어 담고 택시에 탔다.
“남이섬이요! 최대한 빨리 가 주십시오.”

섬에서 눈을 뜨면 러닝화부터 신었다. 숙소의 왼쪽 길은 그대로 긴 달 모양의 외곽선과 이어져 있었다. 남에서 북으로 곧게 뻗은 직선 길을 달리다 섬의 끝에 다다르면 거대한 돌탑을 8자로 턴하며 돈다. 북에서 남으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달려 돌아온다. 해가 떠오를 무렵이라 뿌연 물안개가 수면에 낮게 깔려 흐르고 물안개를 가르며 오리 떼가 줄을 지어 따라왔다. 러닝을 마치면 아침으로 황태국을 먹었다. 황태국은 운동 후 단백질을 보충하기에 적당했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작업실로 출근했다가, 오후가 되면 숲길을 걸었다. 해가 질 녘의 섬은 언제나 다른 그림을 보여주었다. 낮 동안 사람의 발걸음에 맞춰 땅에서 걷던 공작새는, 어두워지면 높은 나뭇가지로 날아올라 밤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나도 작업실로 돌아와 온 섬의 불이 꺼질 때까지 책상 앞에 있었다.

작업실은 남이섬 측에 별도로 요청드린 공간이었다. 그림책 작업 중이어서, 자료를 펼쳐 놓고 볼 수 있는 커다란 책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0인용 원목 책상 맞은편 벽에 족자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는데, 어떤 족자들은 시간이 흐르자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중 한 족자의 모서리에는 밧줄에 묶인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토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는 세 번째 책에 묶여 있었다. 2023년 12월, 세 번째 책의 계약서에 사인을 한 뒤, 빈 원고 위에서 난파된 보트처럼 떠돌고 있었다. 내가 왜 이 책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착각했을까. 이 직업이 나에게 맞는 건지 의심도 들었다. 뭔가를 오래 붙드는 데 서툰 인간이, 몇 년씩 걸리는 그림책 작업을 두 번 마쳤다는 이유로 세 번도 가능하리라 믿었던 건가.
이 책의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열일곱 살의 여름이 떠오른다. 방학 때 친구 외가댁에 방문한 적이 있다. 남쪽 바다의 섬에서 또 다른 섬으로 들어가야 하는, 지도에도 잘 나와 있지 않은 곳이었다. 우리는 경기도에서 출발해 전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종착역에서 바가지를 쓰며 택시를 탄 뒤, 다시 배와 버스를 탔고, 마지막에는 보트까지 얻어 타고서야 인적 없는 모래사장에 닿았다. 수십 가구가 사는 마을이었다. 친구와 꼭 닮은 외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마을회관에 들어섰을 때가 아직도 선명하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친구의 높은 콧대와 똑같은 각도의 콧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을 만드는 일도 이와 비슷한데, 단번에 가는 수단이란 없으며 어딘가 도착하면 갈아타야 했다. 때로는 다음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고, 이것저것 수소문해서 얻어 타야 했다. 길을 잘못 들었다가 되돌아 나오기를 수십 번, 그렇게 가보면 낯선 규칙으로 작동하는 마을이 있었다.
나는 2년째, 나의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곳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알지 못했던 것을 만나면, 읽고 기록하고 자료집에 분류했다. 조금 이상한 소리를 해보자면, 세 번째 책은 조각이 난 채 수백, 수천 곳에 흩어져 있는데, 나는 그 조각을 만나면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조각과 조각 사이는 어제와 1,000만 년 전처럼 아주 멀었기에 물리적으로 시간이 좁혀지지 않았다.
레지던시 기간의 반이 지났다. 지난 두 번의 레지던시는 거의 책 짐이었지만, 남이섬에는 가벼운 책 두어 권과 그간 분류한 자료집만 들고 왔다. 원고를 들여다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의자에 앉아서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녁이 되자 썰물처럼 섬을 빠져나갔고, 남은 몇몇 사람들마저 잠이 들면 섬은 사막의 중심처럼 고요해졌다. 쓰인 목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분량 120페이지쯤 되는, 약간 두껍고 커다란 그림책의 외곽이 보였다. 작업실을 나서니 온 섬에 불이 꺼져 있었다. 발밑만 겨우 보이는 어둠이 싫어 그 전에 나오려고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낮에 이곳을 메우고 있던 소리와 빛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 캄캄한 길의 끝에 내 숙소가 있다.
섬을 떠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첫날, 식당을 찾아 식당 반대 방향으로 걷던 나는, 이제 눈을 감고도 나침반처럼 북쪽을 가리킬 수 있었고, 해와 달이 뜨는 시각과 위치를 알았으며, 마트에서 마주친 분들에게 ‘숙소 2층에 전자레인지와 정수기가 있다’라는 쓸모 있는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백 번 넘게 스쳤던 길을 걷다가도 ‘저건 뭐지?’ 싶은 낯선 것들을 발견했는데, 그날은 토끼 표지판이었다.

길가에 흰토끼가 밧줄에 묶여 있는 게 아닌가. 책상 맞은편에 있던 족자가 떠올랐다. 그 토끼는 왜 묶여 있었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가 겹겹이 가려진 족자를 들춰보았다. 밧줄에 몸통이 감긴 토끼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이섬 안에서는 섬이 안 보입니다. 섬 속의 나무 풀 동물이 보입니다. 섬 밖에서도 섬 모양이 잘 안 보입니다. 섬이 너무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섬이 보입니다.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오랫동안 가꿨던 강우현 전 대표의 글과 그림이었다.
토끼는 웃고 있었다.
남이섬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호텔에서 지내다 오니 집이 어수선해 보여 오래된 물건을 버리고 정리했다. 나는 여전히 책상 앞에서 세 번째 책에 묶여 있다, 아직은 웃지 못한다. 가끔 토끼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나는 조각 하나를 꺼내 긴 달 모양의 외곽선을 그려 넣고 그 아래 이렇게 적었다.
‘토끼가 사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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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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