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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 외 6편

  • 작성일 2022-09-09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개평




유수연






조금 얻어 올 수 있었다


전부를 걸어 얻을 것은 좀 더 넓어진 의미의 전부였기에
내가 걸었던 것도 그것뿐이었다


국수를 삶는 어머니
국수를 삶는 냄비가 바글바글 끓는 저녁이다


검지를 엄지에 이렇게 동그랗게 말면 한 사람이고
좀 더 크게 동그랗게 말면 두 사람도 넉넉히 먹일 수 있다


운동회에서 아이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더 넓은 원을 만들고
가운데로 모이며 좀 더 작게 원을 만들어 낸다


커졌다가
작아지는


놀란 눈동자를 본 적이 있다, 내가 본 도형 중
가장 슬픈 정수리였다


일의 뒤에 줄을 세우면 숫자가 커졌고 커지다 못해 감당할 수 없었다
영의 뒤에 줄을 세우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다 먹을 수 없을 양도 먹다 보면 다 먹을 수 있다
그런 양을 다 해치우다 보면


못 이룬 꿈보다 가끔 못 먹은 밥이 생각날 수도 있겠다는 네 말이 생각난다


그 미련이 가끔 웃기는 저녁이다


분명 누가 굴러떨어지고 깔아뭉개지고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데굴데굴 무릎을 안고 있는데


엄마, 배고파요
그게 유언인 삶도 있는 저녁인데


부러진 소면은 배수구에 흘려보내며 아주 가는 분노를 생각한다


다들 걸러져 접시에 올리는 일 인분을 가졌고
다들 저녁 다음에는 아침이 있었다









믿음 조이기






잘 버티고 있다


그거 하나쯤이야 그거 하나쯤이야
사는 데 문제없으므로


자신을 버리고 싶은 생각을 겨우 참아 본다


모든 사람을 지우고 싶은 날
조용히 운동장을 도세요


이런 생각은 그만 접어 두자 말하며 이런 생각은 그만 잊어버리자 생각하며 운동장을 잊을 정도로 돌았다


잊으려 할수록 또렷해지면 대개 그 생각이다
그러면 주먹을 쥐었다


누군가 울면 따라 울 힘을 남긴 채
묻지도 않은 대답을 준비한다


날씨가 좋네요 같이 죽을까요 날씨가 좋네요 날씨가 좋아요


마주 오는 사람의 눈을 먼저 보았다


두어 번 주저앉았지만 일어나 마저 운동장을 돌기로 했다










미래라는 생각의 곰팡이






공동묘지엔
비공동체적 침묵이 존재하고
주인은 청설모, 너


차에 치인 청설모가
죽기까지 튀어 오르는 걸 본 이래로
붉음은 내겐 탄성을 가진 색


언제나 그렇듯 붉은 것 안에는 하얀 것이 있고
언제나 그렇듯 박살 난 몸에는 빨간 피가 있고


윗부분만 깎은 사과를
서로 나눠 먹는 동안
너무 익은 분말 같은 속살을 씹는다


여기에
온몸을 납작 엎드리는 인사는 누가 시작했을까
슬픔은 일종의 세레모니
승기를 올리듯
썩은 것엔 곰팡이가 피듯


시체는 깨진 체온계


붙잡고 종일 울 것 같지만 만지기도 꺼려지는 것
이미 부풀어 오르고 싹이 난 감자가 되고
살았던 것보다 길게
그런 긴 환상을 잊을 만큼 따분한 상태였다


시체에게
영혼은 철 지난 상상일 뿐이고
여름은 무성한 잡초를 키울 뿐이니까


도려내고 싶다 사과에 난 곪은 상처처럼
깨물어 뱉어 버리고 싶다 상자 밑 사과처럼
그만 멍들지 않게
남은 사람은 슬픔의 테두리를 도려내 버려야지
붉음
개가 꾸지 못하는 색깔의 낮잠처럼
살짝만 좌절하고


자는 개를 깨우면
개의 표정도 경멸을 담을 수 있음을
그걸 보고 웃는 인간을 이해하는 노력으로


괜찮다는 마지막을 남기고
계속해 시체가 되는 버그가 있다


이해한다


성장하는 건 역시 끔찍한 것이군
멋쩍은 듯 던져진 게
그것이 종일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 만지기






잘 기다린다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갇힌 것 같다, 이 생각은 책에서 보았던 문장을 가둬 둔 것 아직 내 생각은 구하지 못했다


묘사하지 않아도 괜찮다
많은 사람이 각자의 것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눈이 어디에 있는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여러 방향으로 돌리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알아듣는 뜻은 아니니까


사방으로 뚫려 있다, 사방으로 도망칠 곳이지만
도망친 것은 없다 나는 손을 뻗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이 생각은 빌려 온 것이라 다시 살려야겠다
이 세계에 쓸모없는 생명은 없으니까


아니다 여덟 정도는 있다


부드럽다, 이 생각은 별로인 것 같아 혼자 만지고 놀기로 했다


손이 겨우 닿을 정도의 벽에 달아 두었다


잠시 나왔기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오래 서 있었으므로










무력의 함






먹지 않으면 똥은 안 나올 줄 알았다


통을 들고 복도에 나오면 보통의 세상이다
자꾸 깨어 있는 곳이다


깨진 화분처럼


물을 넣으면 물이 나오고
밥을 넣으면 똥이 나온다


자라는 게 없는 손아,


자꾸 잡아 보고 힘을 쥐어 보고 쥐여 줘도 잡히지 않는다


무당 아줌마,
기억해?
혼자 쓸쓸한 관이 된 사람 있잖아
너는 쓸쓸하게 박스가 되게 두지 않을 거야


오랜 혼잣말은 가끔 대화가 되고
돌릴 수 없는 게 자식의 마음이라면 부모의 고집은 헛된 드라이버질이겠지


십자가


제일 들어맞지 않는 것


어느 날 네가 먼저 깨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날 역시나 나만 먼저 깨어나 잠든 너를 바라본다


잡을 몸이 또 줄었네
그래도 표정이 좋다


그런 억지가 가끔 희망이 되는 곳에선 잠든 이만 꿈을 꾸었다










직성






이런다고 풀릴 게 아니다


우리 영혼은 껍질에 둘러싸여 있고 너는 내가 잠들었을 때 내 비늘이 비비빅 하는 소리를 들었다


가슴에 얼굴을 얹는 건 진부하지만 따뜻한 온도다


비비빅이 어떤 소리일까


혹시 공감각적 심상이니? 물어보려 하니 언제나 너는 잠들어 있다


이런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아슬아슬이야 정말 그렇지 않니? 언제 다시 엄마가 들이닥칠지 몰라 내가 오면 말이야 빗장쇠를 꼭 걸어 둬 숨을 시간은 벌어야 할 거 아냐


새로 우리가 집을 구했지만 우리의 집이지만
도망치면 들킬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면 들킨다
도망치면 들킨다


이런 생각이 풀리지 않게 되었을 때
망치가 닳기 시작했다










수련이 피기까지






너한테선 상처를 덮은 밴드 냄새가 난다


가렵지만 너를 뜯어 보고는 했다 가만히
잠들어 있는 걸 알면서도
그 속에는 작은 점


같이 누워 결혼에 대해 얘기하던 홍천의 밤하늘
흰 침대보
잔뜩 어지러운 별자리
역시 긁다 보면 모든 게 상처였다
흰 이불
얼굴까지 끌어당기고 무성한 머리칼을 만졌다
잠들어 있는 걸 알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얼굴


사랑도 담요를 덮으면 그 안에 뭐가 든지 몰랐다
웃는 소리는 전혀 아니었는데
너의 눈에 든 멍도
내가 하늘을 가져다 다 가리고 싶었으나
자꾸 손바닥 밖으로 빠져나왔다


우리는 어떤 자세에 열중했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성공한 것이 없다, 이별을
서운한 일이라고 말해 줬지 차렷 자세로 누워서 말이야
주머니 없는 몸이었지만
넣어 갈 수만 있다면
네 마음을 키워 꽃을 피워 보고 싶었다


손등도 그게 있네
나랑 같은 오른손에 그게 있어
사실 나 말이야 죽을 만큼 힘든 적 없었다
사실일 것까지 없는데 나도 그런 적이 없다
우린


불효에 대해 생각하면
서울이 모두 불에 타도
우리는 주먹 꼭 쥔 채 버틸 것이다, 지독하게
우린


겨울 수감자처럼
서로를 안고 사랑보다는 생존하려 했다
그렇지
녹일 수는 없어도 죽을 수는 더욱 없으니까
잘 구운 상감청자처럼
내 몸을 초과하는 마음이 너무 많아도


우주는 다 계획이 있다
잎 속에 잎이 있듯


넘쳐 날 건 없을 것이다
우린


그저 수렴할 테니까
너 없는 지구라도 너와 닮은 것은 너무나 많을 것이고
같이 걸을 길은 자꾸 생겨나겠지
염치없이, 너 없는데도 말이야


홍천의 주일
꽉 움켜쥔 것은 무엇이든
손을 펴 봐


내 점이야, 왼쪽 눈 밑에다가 붙이고 살아
울음이 그친대













유수연
작가소개 / 유수연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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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콤마 시·시조

「금서」외 6편

금서 김정배 글을 읽고 나면 눈이 멀었다지 평생 그 글만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지 손끝의 힘으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제국은 무너지고 흰 종이는 숨을 거두었다지 모든 문장은 늘 절박하지 어떤 구절도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지 가령 내 어머니도 읽지 말아야 할 구절이었다지 밑줄이 너무 많아 가슴에 귀를 대고 있으면 어떤 호흡도 두근거릴 필요가 없었다지 불길에 휩싸이면 불보다 먼저 타오르는 얼굴 입가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지 눈멀고 혀가 굳은 표정들이 찾아와 얼굴을 바닥에 쏟아낼 때마다 금서로 쌓아둔 책들은 서술어가 지워진 나뭇잎을 떨어트렸다지 그걸 줍는 아이들, 자라서도 입속에 유배를 구겨 넣고 살았다지 스스로 금서가 된 줄도 모르고 이미 밑줄 친 문장에 또 밑줄을 그었다지 마지막 페이지의 독이 사라지고 손끝의 글자가 희미해질 때까지 사람들은 읽지 않아도 되는 얼굴을 해독하며 문장을 이어갔다지 모탕 아이들의 웃음이 튀어 오른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 놀이터 한 켠 낡은 그물망 위로 5분에 300원 널빤지에 그린 노인의 빼뚤빼뚤한 글씨가 파도 소리에 지워질 듯 넘실거린다 아이들은 탄력 있는 수평선을 발판 삼아 대서양 어딘가로 향하는 참다랑어 떼처럼 한꺼번에 공중으로 솟구친다 허공의 허공 위로 웃음이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바닥의 머리카락이 천장 끝에 가닿으면 햇살 출렁이는 공중의 난류 속에서 만선을 꿈꾸는 거미들, 잔챙이 바람이 빠져나가기 좋은 간격으로 바다에 그물을 치고 있다 바닥 아닌 바닥 밑으로 아직 상처를 배우지 못한 풀들이 자라고 그 풀들이 가끔 풍랑을 풀어놓으면 바닷가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인도에까지 표류하기 일쑤였다 가장 높은 허방을 짚고 서서 얼굴 검은 아버지를 만났다가 내려온 하루 아이들의 얼굴엔 침묵이 부표처럼 떠다녔다 10분에는 500원, 생선 궤짝 마냥 지루해진 하루 속에서 몇 번의 계절을 뒤집으며 착지하는 나뭇잎들 문득 밑도 끝도 없는 바닥에서 홀로 튀어 오른 트램펄린은 지루한 바닷가 풍경을 잠깐 감추기도 하였다 그제서야 노인은 흰 머리카락을 수평선 너머로 쓸어 넘기며 찢어진 하루를 오래 손질했다 참다랑어 떼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모탕: 나무 팰 때 밑에 받치는 나무토막. 빗속을 헤매는 휘파람처럼 당신이 뒤에서 휘파람을 불 때 나는 우산 대신 햇살이 필요했던 날이었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태양은 녹아내리고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개미의 연회가 되었어요 하지만 일하지 않아도 창밖은 고요하니 증명해 볼까요? 붉은 골목에 쉼표를 던지며 바람 속에서 태어난 비닐봉지의 아이 더 말해볼까요? 그저 한 장의 전단지는 목숨을 구하지 못해요 울음은 때로 강력한 무기가 되니까요 가뭄에 죽은 맨드라미를 봐

  • 김정배
  • 2024-11-04

문장, 콤마 시·시조

「꽃점은 끈끈이주걱으로」외 6편

꽃점은 끈끈이주걱으로 신춘희 나는 엄마의 꽃점대로 꼬리를 잡고 태어난 딸, 끈끈이주걱 같은 뒤를 달고 유년을 보냈지 창문이 달빛을 커튼으로 오므리면 보이지 않는 별들에게도 하나둘 이름을 지어 주었어 주술처럼 내 안에서 휘돌다가 꽃잎으로 흩어진 나날들, 끝내 나는 혼자 남겨졌지 그때부터 슬픔이 눈동자에 들러붙었던 거야 엄마가 남겨 준 건 지독히 외로운 점액뿐 그 꼬리를 어쩌지 못하고 맹목 같은 꼬리 나는 내 것보다 너그러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았어 사춘기를 소화시켜 고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나이가 되었지 내게 달콤하게 달라붙은 사람이 애인이 되었어 하지만 애인은 여러해살이 비밀에 서식하는 사람이었지 여자와 여자가 겹쳐도 가리지 않더니 바람에 이리저리 튀는 방아깨비처럼 되었어 소문은 돌고 돌아 쉽게 주울 수 있었지 기회 같은 꼬리 꽃이 피고 질 때쯤 새벽에 서둘러 되돌아온 애인은 화려한 꽁지깃이 없이 초라했어 나는 한 번 더 나의 점성을 믿어 보기로 했지 애인은 자신의 꼬리를 잘랐다고 맹세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어 애인에게 새 꼬리가 생겨났지 뭐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삭둑삭둑 자르기 시작했지 얼마 가지 않아 그의 꼬리는 둔갑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복수란 하는 게 아니라 잡는 것이지 비수 같은 꼬리 가끔 나는 나를 거쳐 간 꼬리를 생각하지 잡은 애인을 도망가지 못하게 조인 다음 단물 빠질 때까지만 두기로 했어 때론 꼬리가 채찍이 되기도 하지 내 꼬리가 휘둘러지면 애인의 질투가 묻어왔어 꽃이 화사한 것은 계절의 꼬리에 있을 때지 끝물처럼 사랑에도 점도가 있어 냉정하게 붙었다 떼는 말도 해 줘야 하는 법, 잠시의 침묵 이때만큼은 배후의 꼬리를 숨길 수 있어 대물림 같은 꼬리 냉정하게 점을 찍으며 선을 긋고 나만의 꼬리로 포획에 성공한 사람과 함께했지 나는 이제 꼬리를 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물고 있었어 돌아다보니 탯줄, 그 질긴 꽃점이 계속되는 거였지 신로(神路) 신들이 이끄는 길이 지상에도 있다 종묘 담장 안, 아무나 밟지 못하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누어진 통로 중앙에 높이가 다른 신로 종묘도 5월에 딱 한 번 길이 열린다 임금의 길보다 높게 깔린 박석(薄石) 오른쪽은 왕의 길 왼쪽은 세자의 길 양쪽에서 호위하고 있다 저 돌을 따라가면 맞배지붕 아래 신실에 모셔 놓은 신주들이 있다 황색 봉등을 밝히고 제실에 초를 피워 제례를 하면 세 번 나눠 피운 향이 신을 부른다 화장장 굴뚝에서 쏟아진 연기를 신로라고 생각한 적 있다 살짝 나부껴 공기가 호위하는 길 상주들이 올려다만 볼 뿐, 몸을 태워 만든 길은 신만이 걸어와 영혼을 데려갈 수 있는 건지 폐백과 함께 축문처럼 타오르는 불길과 그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한 사람과 그를 데리러 오는 자옥한 신들의 길이 저 중앙에 있다 통곡이 고인의 길을 터 가고 유족들 버스에 오르면 신도 뒤를 밟아

  • 신춘희
  • 2024-11-04

문장, 콤마 시·시조

「한밤의 까마귀」외 6편

한밤의 까마귀 이경교 한밤중에 까마귀를 본다, 방금 나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었다 까마귀는 어둠 속에 처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까마귀는 제 몸의 검은 빛을 어둠 속에 보태고 있다 어둠을 입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따스하게 밤공기를 뒤흔든 뒤 밤은 더 짙은 검은 빛 속으로 가라앉는다,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까마귀를 나는 더듬는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컴컴한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는다 한순간, 한 움큼의 어둠이 마치 까마귀만 한 분량으로 더욱 짙어지다가 풀어지는 걸 본다, 어두워 까마귀는 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한 줌의 어둠인 줄 안다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 한밤의 까마귀, 어둠 중의 어둠인 저 까마귀 저 검은빛은 누구의 빈약한 배후인가 잠든 하늘에 걸려있는 구름은 왜 딱딱하게 몸이 굳나, 까마귀 떼가 지나가자 구름은 맥없이 풀어지고 건드릴수록 구름은 더욱 캄캄해진다 오오래 변방을 떠돌던 까마귀들도 덩달아 어두워진다, 울음도 세월 가면 녹이 스는지 목쉰 까마귀들이 울고 있다, 보이지도 않는 허공을 흔들며 검은빛이 단단하게 뭉치고 있다 경전(經典),낙타 소설의 시작은 모래밭이었지 모래밭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이 사건의 암시였지 어떤 사건이 지나갔다는 걸 눈 밝은 독자들은 눈치챘을까 눈망울이 큰 낙타가 피해자였지 지난밤 선량한 낙타를 누군가 응징했지 그건 그가 신이라 해도 온당치 못한 처사였지 더구나 모두들 낙타를 사랑했지 그건 사랑에 대한 도발이었지 어지러운 발자국 속엔 낙타의 것도 섞여 있었지 영문도 모른 채 낙타는 주저하고 발버둥을 쳤으며, 끝내 저항한 걸 알 수 있었지 그 저항이 복선이었지 가혹한 우연이 낙타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 그러나 훨씬 많은 수의 발자국들은 일정한 궤도를 그리고 있었지 계획된 범행을 알리는 확실한 단서였지 누군가는 발자국들이 원형이란 사실을 지적했지 그 원형은 사건의 끝없는 순환을 상징한다고 했지 그것은 지속적인 낙타의 수난을 의미했지 불길한 예언이었지 발자국의 개수가 증식하고 있다는 걸 주목한 이도 있었지 원형증식은 무한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재앙이 온다고 했지 낙타의 수와 범인의 비율이 불균형을 초래하는 것도 문제였지 종말은 한쪽의 전멸과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지 낙타가 사라지는 건 순한 눈망울과 긴 속눈썹의 상실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종식을 뜻했지 아무도 소설의 결말을 알 수 없었지 그것은 소설의 소멸에 대한 암시이기도 했지 모두가 사라진 곳엔 텅 빈 모래밭만 남겨질 것이므로, 사람들 역시 모래를 닮아갈 것이므로 낙타는 사라짐으로써 영웅이 되었지 복선의 해명이었지 종말을 예고한 암시의 희생제물로서, 그는 종말에 저항하는 이들의 종교가 되었지 모든 신앙이 그래왔던 것처럼 점액질 사람들은 저마다 깃 안에 고개를 파묻고 흘러가지 물컹거리는 안개 더미 속으로 점액질처럼 스며들지 그냥, 묵묵히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어디쯤에서 다 녹아버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 다만, 흐르고 흘러 저 다리 아래로 강물은 흘러가고 사람들은 지

  • 2024-11-04

문장, 콤마 시·시조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외 6편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김연필 수조 속에 천국의 물고기가 있다 조명을 받으면 푸르고 붉게 빛나는 천국이라는 말이 생소하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천국을 말해본 적 없고 이 작은 천국을 바라본다 이 수조는 20x20x25센티미터의 수조로 센티미터라는 말이 생소하다 센티는 100, 지네는 영어로 센티페드이다 지네의 발은 40개, 지네 발에 신 신기고 다시 수조를 본다 천국의 물고기를 본다 저 작은 물고기가 왜 벌써 천국에 있을까 죽어서도 수조에 갇혀 밥을 달라 아우성치는 세상에는 천국의 계단도 있고 천국의 문도 있다 저기 남쪽 섬에 있다는 천국의 문, 그 문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 문 너머에는 정말로 죽은 것이 남아 있을 것 같았지만 아직 살아있는 이곳엔 천국의 것이 많아서 말해본다 천국의 계단 천국의 문 천국의 물고기 천국의 새 천국의 개 천국의 쥐 천국의 말이나 천국의 죽은 코끼리 같은 것, 살아서 천국에 간 너에게 말한다 나는 죽고 나서도 그곳에 가지 않을 거라고 작은 수조에서 이야기한다 한 번쯤 표면에 올라와 입을 뻐끔하고 기포를 아가미에 녹이며 저기 도마뱀 보인다 저것의 이름을 나는 안다 너는 천국의 도마뱀이 아니다 나는 너를 벌레라고 이름한다 빛이 없는 무대 이곳은 빛이 있는 무대이다 빛은 한 곳으로 수렴하고, 무대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빛은 무대의 알레고리이다 무대 위에 여러 오브제가 있다 하나는 악기이고 하나는 털실이다 아직 공연하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 무대에서 공연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오래된 통념이다 누군가 무대 위로 털실 뭉치를 던지며 공연은 시작한다 아직 아무도 무대에 올라오지 않았다 이곳은 사실 작업실, 사실 연습실, 사실 무대에 오르려면 아직 시간이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춤을 추는 이가 무대에 오를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화면을 바라보는 이로, 나의 다른 이름은 관객이라고 한다 # 무대 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아직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른다 무대 위에 아크릴 수조가 있다 물이 가득 찬, 그 안에서 조금씩 거품이 일어난다 거품은 파도의 은유이다 수조는 바다의 환유이다 수조는 오브제이고, 이 수조는 무대에서 벌어질 사건을 제시한다 수조의 한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그 물이 조금씩 사람이 되는 풍경이다 춤을 아장아장 추는 아기 하나 출연한다고 말해본다 # 저기 사람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을 그리는 글을 쓰는 춤을 추는 사람 그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을 무어라 불러야 될지 모르겠다 뒷걸음질을 치고 조금씩 휘청거리는, 나는 저 휘청거림에 물이라는 말을 붙인다 사람의 70%는 사실 물이라서 저 몸짓은 증발의 몸짓이다 저 사람의 70%는 물로 이루어졌는데 모든 물이 증발하고 난 후 남은 것은 사람일까 아닐까 # 물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 내 앞에 서서 눈을 마주친다 무대 위의 수조는 이미 물이 말랐다 아니

  • 2024-11-04

문장, 콤마 시·시조

「심오해 보이는 헛소리의 인식과 수용에 대해」외 6편

심오해 보이는 헛소리의 인식과 수용에 대해* 김조민 우리는 지금 여러 바람에 편승하는 과민성모방증후군의 시대 단지 유행하는 고양이일 수도 있겠지만 상자 안에 스스로 격리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어림짐작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까다로운 조건은 없습니다 부정확한 기억을 일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태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겠죠 그것보다 모호한 것은 없다는 확신 같은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인상적으로 읊조릴 수만 있다면 그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으로도 직관적인 경험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저 마침내 선택된 양식일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다양한 변수는 고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양식의 맨 위, 온전히 강조된 차원에서의 목적이 효과적인 오류나 출중한 편향이 아니기를 주장할 뿐이죠 그러나 우리의 고심은 책임감 있게 분산되므로 종종 서로를 무분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오케이, 그것으로 되었어 심오한 진실은 상자를 열었을 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2016년 이그노벨상 평화상 수상자 고든 페니쿡의 논문 제목이지만 이 시는 고든 페니쿡의 논문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없었던 금기어에 대한 최초의 증언 밀폐용기 안에 단어를 넣어 두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후회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몇몇 단어들은 슬리퍼나 가방이나 종이컵 따위로 대체되었죠 꽃잎들이 불필요하게 나뒹구는 저녁 우리는 어리둥절한 이별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순서대로 넘실거리는 책상과 막연한 가장자리 몇몇의 그물이 서로와 서로에서 헤매느라 한쪽만 닳아지고 있는지 몰랐던 거였어요 어느 날 흔한 얼룩조차 생소해지는 얼굴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이불 속에서 한참을 울겠지만 어떤 목소리에 뒤돌아봐야 할지 영영 알지 못하는 순간이 되고 말겠죠 밀폐용기가 공공연히 부풀어 올랐지만 그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닫힌 입을 부여받은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가 미리 준비했던 포기는 소용없었습니다 목록을 뒤적이는 밤 문을 열면 등 뒤의 문이 다시 앞에 놓이는 꿈을 연속해서 꾸었다 어떤 날은 등 뒤의 문이 내 앞에 놓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사라지는 나의 등을 보기도 했다 들어가자마자 다시 들어가야 하는 문을 열고 나가는 나의 등은 미세하게 쪼그라들었다가 평평했고 한 방향으로 기울어졌다가도 접혔다 어쩐지 누군가의 입술 같기도 했고 그렇게 쏟아졌던 수많은 악담 같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은 잠들기도 전에 벌써부터 내 등을 보고 있는 듯했다 눈을 감지 않아도 아주 잠깐 가벼워졌다가 문과 문 사이에 나는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잠깐은 결론을 위한 아주 짧은 한숨이었지만 무한의 조건이어서 내 등의 표정을 읽을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하는 순간이면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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