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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에어컨 아래서

  • 작성자 아기호랑이
  • 작성일 2025-05-25
  • 조회수 691

따사로운 햇볕은 들어오시되, 후끈한 여름 공기는 환영하지 않아요. 창을 닫고 커튼을 엽니다. 선풍기로는 부족할 테니 간만에 에어컨을 틀어볼까요. 이제 산뜻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겠어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온몸이 나른해져요. 주말이라서 그럴까요. 여름이라서 그렇다고요?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요. 돌이켜보면 어느 계절이건 이불 속에 파묻히고 싶은 날들이 있어요. 오늘은 채광이 참 좋네요. 하늘이 맑아요. 이렇게 좋은 날, 언제나처럼 공원을 산책할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가을이었다면 나갔을 텐데. 어림도 없는 상황을 가정하며 의자에 앉아봅니다.

닫힌 창틈으로도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와요. 항상 같은 노래, 보이지 않는 분수마저 그려집니다. 흩날리는 물방울을 맞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사뭇 그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요. 나라면 쉽게 나아가지 못할 자리에서 누군가는 미소를 띠네요. 여름이 선사하는 해방감. 그 웃음이 부러워요. 

온도와 습도를 확인한 후에도 목적 없이 SNS에 접속해 봅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나날이에요. 속으로 몇몇 친구의 안부를 물어보다가 무의미한 걱정인 걸 알고는 핸드폰을 덮습니다. 이토록 자연이 밝은 날, 반짝이는 화면은 어울리지 않아요.

자연스레 책장으로 향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의 세계입니다. 대부분 소설이에요. 작은 책장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까요. 그곳에 내가 있을까요. 무심코 책을 꺼내어 작가의 말을 읽습니다. 이야기는 허구여도 그들의 말에는 꾸밈이 없어요. 모두가 진심을 다하고 있어요.

가볍게 읽기 좋은 책 하나를 들춰봅니다. 작가의 말이 길어서 좋아요. 아껴두었다가 소설을 마치고 천천히 곱씹어야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재작년 겨울에 읽었던 책이에요. 소설의 배경은 봄입니다. 어째서 아무것도 들어맞지 않을까요. 상관하지 않습니다. 침대로 향해요. 

베개를 둘 쌓아 올리고 살포시 이불을 덮습니다. 에어컨을 거쳐 간 이불이 맨살에 닿는 느낌이 좋아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입니다. 괜히 두 다리의 모양을 자꾸만 바꿔봅니다.

다리를 반쯤 접고 책장을 넘깁니다. 연두색 속지가 마음에 들어요. 마치 봄인 것만 같은 여름입니다. 짧은 소설은 금방 읽어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오후의 햇살이 조금은 약해집니다. 작가의 말이 쓰인 시점은 9월입니다. 아무것도 들어맞지 않지만,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간 듯합니다. 봄과 가을 사이에 잠든 여름을 깨워봅니다. 꿈만 같아요. 


P.S. 제가 좋아하는 여름날을 그려보았습니다. 반쯤 허구라는 소리에요.



2025.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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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서진 문장을 짊어진 우리는

언젠가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문자는 투명해지고 단어의 의미만이 흐릿하게 남아 문장을 이룬다. 오래된 문자는 유리와도 같아서 잘 보이지 않더라도 상당한 무게를 감내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짊어져야 해. 내가 언젠가 경에게 말했던가. 경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엇을 짊어져야 하는지 물었고, 나 역시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빛바랜 유리와도 같은 문장이 몇 년간 나를 옥죄었다. 글을 쓰지 못하는 날이 반복될수록 깊어지는 회의감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한 문단을 넘지 못하는 글감과 뒤를 이어가지 못한 채 단절된 문장. 한번 흐름을 놓친 글은 방치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죽어간다. 자신을 갉아먹으며 연명하는 문장의 단면은 거칠고 해리하다. 때로 글자의 모서리는 날카롭게 갈려 알게 모르게 무의식에서 빠져나와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자꾸만 심장을 찔러대는지 마음에는 숭숭 구멍이 난다. 글쓰기로는 메꿀 수 없는 성질의 공허함. 한구석에 뚫린 틈새로 더는 자라나지 않는 열정이 흘러 나가고, 지독한 무기력감에 빠져 시간을 죽이는 날에는 생각한다. 글 쓰며 얻는 것이 의구심뿐이라면 나는 더 이상 작가 하기 싫어요. 그러나 나는 이 생각마저 문장으로 직조하는 존재. 나를 괴롭히는 문장 앞으로 다가가 문장의 양 끝을 움켜쥔다. 녹슨 단어가 손에 찰과상을 입히고 손가락은 핏기에 젖어 무감각해진다. 주어와 서술어를 붙잡고 문장을 내리친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부서진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파편을 남긴다. 때로는 문장보다 단어 하나가 심장을 더욱 깊게 파고든다. 내가 문장을 이어가지 못하고 끝내 분쇄하여 단어로 조각조각 흩어져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누가 그런 것을 문학이라 불러줄까. 부서진 나의 언어로는 더 이상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문장을 내리친다면 글을 쓸 때 내 마음이 아팠던 이유가 되어줄까. 부서진 문장을 짊어지고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경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완전한 문장을 가지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데? 나는 문장을 만드는 것만큼 문장을 부수는 데 익숙한 사람. 조각난 단어들이 잠들어있는 마음속을 헤집으며 손에 잡히는 어휘를 집어 든다. 나의 심장에서 나온 단어는 유리 파편과도 같아 조심해서 만지지 않으면 상처가 난다. 그러나 나는 어떤 어휘도 부드럽게 다룰 마음이 없고, 피 묻은 손으로 경에게 깨진 단어를 던진다. ‘뭐가 달라지나’, ‘잘 쓴다고’, ‘글 좀’. 나의 언어는 경의 목을 가르는 흉터를 남긴다. 경의 얼굴도 내 손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간다. 투명했던 마음은 유리처럼 쉽게 깨져 어느덧 불투명한 단면을 수없이 생성해 내고. 아껴 읽던 옛 시집이 끈적한 콜라병과 함께 분리수거장에서 발견될 때 산산이 부서지던 순수한 열정은. 쓰레기 더미에서 낡은 시집을 끄집어내고 함께 탈출한 콜라병을 발로 걷어찬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기억이 구른다. 그날 이후로 경은 콜라를 마시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사이다를 건넸다. 그는 나를 피하며 내가 주는 무엇도 마시지 않

  • 아기호랑이
  • 202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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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체
    훈훈해요

    이 이상적 여름날, 저도 한번 살고 싶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2025-08-09 01:59:17
    이체 훈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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