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역사의 비탈에서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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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근대를 살아간다는 일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유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당장만 보아도 불과 2년 전(2023년) 출시되어 큰 반항을 일으켰던 인공지능 서비스 Chat GPT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 - 업무, 학업, 유흥 등 - 에 천착해있다는 사실은 시대적 감각을 가늠케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식적으로 보급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스마트폰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식주, 의사소통, 유흥욕구 등)을 편리적으로 소비/사용 하도록 돕고, 보다 나아가 개인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실존적인 문제를 증명하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처럼 보편화되어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기술과 문화 발전의 변화를 포용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계를 쫓는다. 발 빠르게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는 이 시대의 유동성만큼,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사고하고 운동하는 인간의 유동성은 그 시대의 변화들을 가능케 했다.
그렇기에 (칼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보자면), 이 시대에 변화하지 않는 것, 급변하는 근대에서 운동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고체는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곳에는 어느날 섬광처럼 번쩍 등장해서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유행과 기술들만이 존재할 뿐이고, 모든 부동한 고체들은 유동적인 세계의 산성에 의해 융해된다.
망각과 부활 - 경복궁 월대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을 중심으로
이런 세상에서 과거와 역사를 되살펴보는 일은 더욱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곧 유동적인 세계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채 특정 장소에서 미동 없이 머물고 있는 부동(不動)의 고체(또는 정물)들을 살펴보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고체’들은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잊고 있던 진실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근래에 재건된 경복궁의 월대는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월대는 예로부터 왕이 걷는 도보라는 의미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단지 오랜 기간을 버텨온 역사적 건축물 - 경복궁 월대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4세기의 일이고, 조성된건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4세기를 거쳐서 완성되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왕이 행차해왔던 길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이유로 1924년 경복궁 월대를 파괴했을 때, 그곳에는 ‘전철’이라는 조선의 근대화의 상징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선의 역사/권위적 상징과도 같은 왕의 길을 부숴버리므로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의식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적인 의도가 암암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지도자의 실권상실(순종의 죽음, 1926년)과, 민족문화역사의 폄훼와 왜곡(문화통치 1920년)으로 직결되어 조선의 국성을 뒤흔드는데 선험적으로 일조했다. 그러므로 일제 식민지배 치하에 파괴되어 버린 경복궁의 월대가 지니는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그렇기에 어엇 한세기가 지난 지금, 경복궁 월대가 복원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해 볼 만하다. ‘월대라는 고체(또는 정물)’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일제의 잔재라는 유령을 소환하고, 일본의 만행을 수면 위로 공론화시켜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역사적 진실(또는 역사적 의식)을 날카롭게 고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하든 원치않든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내부에 잔존하는) 민족/역사성을 복원시키며,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강화시키고, 종국에 일제의 문화양식을 얼마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던 과거의 망령을 소멸시킨다.
이처럼 역사적 건축물(또는 역사성을 지닌 정물들)은 항상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과거와 진실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특정한 장소에서 부활한 고체(경복궁 월대)는 급변하는 세상을 따라 운동하는 변속적 물체(사람)의 특정한 무의식/의식적 기억을 건들고, 그 변속적 물체의 운동을 정지시키므로서 진실을 망각하고 있던 그것에게 존재하지 않던 과거를 부여하며 물성을 뒤바꿔놓기도 한다. 특히 현재를 선험하며 역사를 지닌 채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사람과, 역사를 환기시키는 물질의 상호작용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이탈리아 여행>의 한 장면은 그러한 역사와 물질, 그리고 사람이 갖는 신유물론적 관계를 전면적으로 대두시킨다.
<이탈리아 여행>의 후반부, 이혼을 결심한 알렉스 부부는 폼페이 유적지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 석고가 되어버린 어느 부부의 유적을 보게 되고, 얼마안가 서로가 했던 말에 대해 사과하며 화해한다. 그곳에는 죽을 때까지 서로 떨어지지 않았던 ‘부부의 유적(고체)’이 지닌 ‘역사’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알렉스와 캐서린 부부(변속적인 물체)가 망각하고 있던 자신들의 또 다른 과거(석고가 되어버린 부부)의 다짐을 일깨움으로써, 이혼하기로 결정한 물체의 현재적 물성을 뒤집고, 그들이 과거를 경유하며 서로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만든다. 여기서 등장하는 ‘부부 유적'은 단지 ‘과거의 망령(서로 험한 말을 하며 싸웠던 알랙스와 캐서린 부부)’을 소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과거의 망령을 통해 자신들을 살펴보며 지금을 다시 살도록 만든다. 이처럼 역사성을 지닌 정물은, 자신이 지닌 역사성을 통해 사람을 변화기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모든 고체가 <이탈리아 여행>이나 경복궁 월대 마냥 우리가 망각했던 무의식을 건드리는 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아니다. 도시 재개발을 다룬 주호민의 만화 <신과 함께: 이승편>에는 부활하지 않는 역사적 건축물과 망각되는 역사, 고체가 되어버린 변속적 물체들이 등장한다.
근대가 파괴하는 것들 - <신과 함께: 이승편>을 중심으로
<신과 함께: 이승편>은, 폐지를 주우며 살고 있는 동현이와 할아버지의 집이 재계발 구역으로 확정되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집을 지키는 가택신들(성주신, 측신, 조왕신)이 그들을 그 위기로부터 지키기 위해 애쓰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택신들은 문화, 전통, 역사를 간직한 존재들이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고체-성주신이 머물고 있는 대들보, 조왕신이 있는 부뚜막, 측신이 머무는 측간-는 우리의 조상이 살아왔던 시간과 지혜, 그리고 일상 양식과 직접적으로 감응시켜주는 장소로서 우리의 역사를 의식시키는 역사적 건축물들이다.
역사를 품고 있는 것은 재계발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인 집 역시 마찬가지다. 그 집은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상경한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건축물이자, 단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살았던, 할아버지의 역사와 인생이 깃든 장소다. 하지만 종국에 이르러서 이 역사적 장소들은 모두 근대에 의해 파괴된다.
“요즘에는 측간을 사용하지도, 부뚜막을 사용하지도, 대들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만화 속 탄석차사와 단물차사의 대화를 예시로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금의 우리에게는 레버 하나만 돌리면 간단히 용변을 볼 수 있는 변기통이 있고, 간편하게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주방이 거실 옆에 딸려있으며, 집을 지탱하는 대들보 보다 더욱 효율적인 철근과 콘크리트가 있다. 가택신들이 머물고 있는 건축물은 이 시대에 무척 남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변기, 주방, 콘크리트 같은 근대의 산물들은 우리 삶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미래에 도움 되지 않는 모든 전통과 역사(가택신)를 멸종시켰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 6.25 때 상경해서 자신의 손으로" 지었다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집 역시 “재계발”이라는 근대적 산업에 의해 퇴후 된 장소로 간주되고, 포크레인이라는 근대적 발명품에 의해 부숴졌다. 이 근대적인 것들은 성주신이 깃들어있는 성주단지 마저 부숴버리고, 전통과 역사를 간직하던 집을 지탱하고 있던 성주신은 소멸한다. 근대는 역사와 시간을 품은 모든 유물을 일말의 고민 없이 파괴하고, 역사와 전통을 망각한다. 그것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변화와 번영을 추구하며 계속 운동할 뿐, 운동을 멈춰 세우고 사색적 고찰을 요구로 하는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빠르게 회전하는 구체를 떠올려보자. 그 구체 안에는, 특정 장소에 놓인 부동의 물체(역사)와, 구체의 회전력을 따라 운동하는 유동적인 물체(현재)가 함께 있다. 그 상태에서 구체가 회전하면, 유동적인 물체는 회전계의 구심력에 의해 중심부로 천착하고, 운동하지 않는 부동의 물체는 원심력에 의해 구의 외부로 떨어져 나간다.
우리의 시간은 지구가 태양계를 회전하며 발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이 빠르게 운동(회전-변화)하는 우리 세계 자체가 회전계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특정 (시)공간, 또는 장소에 머물고 있는 역사들(가택신, 낡은 집)이 관성에 의해 외부로 밀려난다.
운동하지 않는 물체(또는 특정한 장소에서 미동 없이 멈춰있는 역사)를 배태하는 근대의 관성을 현시하듯, 만화에서 조왕신과 측신은 성주신의 부활을 염원하며 깨져버린 성주단지를 복원하지만, 성주신은 결코 부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근대가 꼭 부동한 역사적 물체만을 도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과 함께: 이승편>은, 재계발 사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진압대와 충돌하며 여러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재계발”이라는 근대적 산물은, ‘유동적인 세계에서 열렬히 참여하고 운동하고 있던 생명체(사람)’ 마저 미동도 없이 ‘역사만을 간직한 고체(시체)’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은 이따금 유동적인 것마저도 파괴시켜 버린다.
특히 2011년에 공개된 <신과 함께: 이승편>을 보고나서, 불현듯 동시대 발생했던 용산철거현장 화재 사건이라는 유령이 우리 곁에 맴돌 때, 우리의 현실은 비로소 근대의 민낯과 직접적으로 마주한다.
일제 근대화라는 이름 뒤에 조선의 민족성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성이 머물고 있듯, ‘근대(재계발)’에는 ‘운동의 정지’라는 은폐된 비극과 참사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오늘날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Chat GPT를 포함한 AI산업은 나날히 우리의 일상을 잠식해가고 있다. 우리는 AI를 사용할 때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의자에 앉아 타자기와 마우스를 몇 번 까딱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다시 말해, AI는 운동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크린과 전자 프로그램이라는 메타적인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잠정적으로 우리의 눈을 물리적이기 때문에 역사성을 간직할 수 있는 현실 세계로부터 떨쳐내 버리도록 하는 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인류는 AI와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물리적인 세계의 역사들을 수없이 스쳐지나 방관하다가, 종국에는 망각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파괴했던 <신과 함께> 속 근대는 오늘날에 와서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어 인류가 역사를 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AI”라는 매체가 아니라, 역사를 기만하는 인류의 태도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것이 위협이 되는지가 아니라,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하는 세기를 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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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 뮤지컬에서 넘버는 왜 서사의 언어가 되는가 연극에서 인물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뮤지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만으로 더 이상 감정을 담아낼 수 없는 순간 이야기를 노래로 넘긴다. 이때 뮤지컬의 넘버(Number)가 맡는 역할은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음악적 즐거움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넘버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대사이자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 장치다. 뮤지컬을 감상하다 보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있다. 흔히 ‘대표 넘버’라 불리는 이 곡들이 기억되는 이유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대중적 인지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표 넘버는 인물이 삶의 전환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거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 순간 음악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기는커녕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 자체를 결정한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경험하게 만든다. 배우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지고 선율은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 오르내리며 리듬은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다. 여기에 가사와 오케스트레이션, 연기와 무대 연출이 더해지는 순간 하나의 넘버는 독립된 음악을 넘어 한 장면, 한 서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비평은 ‘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사랑과 성장이라는 전혀 다른 서사를 다루는 두 작품이자,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뮤지컬인 『베르테르』와 『킹키부츠』를 선정하였다. 장르와 시대, 음악적 색채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마다 넘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본 비평에서는 『베르테르』의 넘버 「어쩌나 이 마음」과 「발길을 뗄 수 없으면」, 『킹키부츠』의 넘버 「Step One」과 「Soul of a Man」을 중심으로 가사, 선율, 리듬과 템포, 배우의 음악적 표현, 장면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분석할 것 이다. 네 곡 모두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대표 넘버이자 서사가 가장 크게 전환되는 순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각 넘버가 왜 하필 그 장면에서 울려야 했는지 그 노래가 없었다면 인물의 서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살펴봄으로써 넘버가 음악을 넘어 인물의 삶을 완성하는 언어임을 고찰하고자 한다.Ⅱ.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지만 그 사랑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작품은 한 사람이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다가, 끝내 그 감정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서정적인 심리의 결은 대사만으로는 다 담아내기에는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그 순간마다 넘버가 등장한다. 베르테르의 넘버는 이미 정리된 감정을 노래로 옮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과정 자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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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본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기억을 살려 다시 한번 충격에 빠져보고자 이 글을 쓴다.첫 장면은 드럼 소리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긴장감이 흘렀다. 어두운 화면에서 일정한 간격의 드럼 소리가 흘러나오다가 드럼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앤드류가 나온다. 앤드류는 또 다른 주인공인 플래처 교수의 강의실을 바라보기만 하며 선뜻 다가가지는 못한다. 앤드류 역시 플래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말하지 못하는 앤드류가 그때는 참 소심해보였다. 결국 플래처가 앤드류의 연주를 보게 되지만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하지만 곧 앤드류를 자신의 수업에 불러들인다. 이때까지는 희망적이었다.그러나 이는 곧 절망으로 돌아선다. 플래처 교수는 지속적으로 앤드류를 괴롭혔다. 여기까지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관점에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왜 앤드류는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플래처의 곁을 떠나지 못한 걸까? 이 영화를 보면 가족과의 식사 장면에서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자랑을 늘어놓으며 앤드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가족조차도 무시했던 앤드류를 인정해주고 받아준 사람은 플래처 교수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플래처를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위플래쉬(채찍)만을 휘둘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플래처는 앤드류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주었다. 강압적으로 몰아붙였지만 앤드류한테 잘할 수 있다고 말해준 것 또한 플래처 교수였다. 앤드류에게 메인 드러머를 맡긴 것도 플래처였다. 즉 그런 식으로 앤드류가 떠나지 못하도록 정서적 감옥에 가둔 채 꼭두각시 인형처럼 갖고 놀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강압적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플래처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드류에게 기회를 주고 다시금 희망을 빼앗으며 앤드류를 지배하고 있다는 감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앤드류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앞서 말했듯 앤드류는 소심한 아이였다. 플래처의 행동에 눈물을 보이던 여린 아이였는데 본인이 쟁취한 메인 드러머 자리가 다른 드러머로 대체되려 할 때 플래처에게 크게 화를 내며 둘은 싸움이 일어났다. 가장 놀랐던 부분은 대체 드러머가 상황을 말리려 할 때 그에게 소리치며 인신공격을 포함한 욕설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에 앤드류의 간절함과 함께 그가 점점 플래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음을 느끼며 안타깝고 두려웠다. 메인 드러머 자리를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스틱을 가져오는 길에 크게 교통사고가 난다. 온몸에 피를 흘리며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스틱을 잡은 채 모두의 만류에도, 플래처의 호통에도 공연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뜻대로 손이 움직여주지 않았고 스틱을 놓치는 등 공연을 망쳐버렸다. 플래처의 공감 능력의 결여를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픈 앤드류를 달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앤드류에게 '넌 이제 끝이다.'라는 말을 내뱉고는 돌아선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앤드류는 플래처와 몸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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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 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모티프다. 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그중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 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 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카타르시스 안에는 사회정의라는 이름에 감춰진 폭력이 존재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본래, 참된 교육이라는 뜻으로 선생이나 어른이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뜻한다. 현재까지도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지향해야 하는 교육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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