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건강한 혐오가 가득한 사회를 위해

  • 작성자 필온
  • 작성일 2025-07-13
  • 조회수 528

인간이라면 마땅히 무언가를 혐오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보며 지어지는 표정들, 추앙받는 것을 보며 느껴지는 질투심은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심지어 사랑이라는 어쩌면 덜 인간적인 개념이 우리의 인식적 틀을 사로잡았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었으므로 혐오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교묘히 이용되었고 이는 당연한 일이다. 자유주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유주의는 아주 오래전 인간이 가장 강인했을 때의 모습을 닮고자 한다. 그리고 더 성숙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자 한다. 가장 강인한 인류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는 혐오를 인정한다. 국가가 형성된 이래로 인간은 꽤 많은 시간 동안 인간의 근본적 속성인 혐오를 명목상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려고 했다. 지배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자애롭고 도덕적인 이상적 인간을 목표로 세우고 그렇게 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앞서 혐오가 교묘히 이용되었다고 말했듯이 이 또한 혐오였다.

혐오는 단순히 미워하는 감정으로 정의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이상적 사랑이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상대의 특성을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반대인 혐오는 독자성을 파괴해야 하며, 동시에 그 특성을 미워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혐오는 미워하는 감정에 더하여 독자성을 파괴하는 것, 즉 그 특성을 철저히 복종시키는 것을 내포한다. 복종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열등한 것에 대해 자신의 권력을 견고히 하고자 하는 욕구이고, 둘째는 자신이 달성하지 못한, 혹은 우월한 것을 낱낱이 탐험하고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따라서 혐오의 종류도 두 종류가 된다. 전자를 수호적 혐오, 후자를 성취적 혐오라고 부르겠다. 인류는 이 두 가지 혐오를 통해 발전해왔고, 혐오는 그 자체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수호적 혐오는 인류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가치의 반대를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체제를 유지했다. 앞서 말한 사랑과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미움과 악을 배척하는 것이 이 종류의 혐오이다. 수호적 혐오는 발전적 속성을 갖고 있지만 그 정도가 강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사랑과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것은 비록 그것이 다음에 설명할 성취적 혐오를 저해하기도 하지만 다른 종류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안정을 견고히 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혐오라는 점에서 발전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러나 잘생긴 사람이 못생김을 혐오함에 따라 스스로를 가꾸는 것이나 건강을 위해 독이 있는 음식을 혐오하고 피하는 것처럼 가치의 견고함을 유지할 뿐 혐오의 속성을 약화시키지 않는 종류의 수호적 혐오도 있으며, 수호적 혐오는 의미있는 혐오이다. 

다음으로 성취적 혐오는 수호적 혐오보다 발전적 속성이 강하며 어쩌면 더욱 혐오다운 혐오이다. 달성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ㅏ혐오 혹은 질투심으로 보이는 이 혐오는 복종 욕구와 완전히 동일시해도 무방하다. 자신이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복종욕구는 인간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첫째는 그 특성을 마침내 복종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그 특성이 정말 우월하고 달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도록 이끌어 더 나은 사회로의 전복을 성취하는 것이다. 인류는 성취적 혐오를 통해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인류가 가장 강인했던 오래전으로 돌아가 보면 사람들은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땅을 갖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정복 욕구와 질투심을 결국 그것을 성취하게 했고 이는 혐오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증대하였다. 또 멍청한 귀족들에게 부당한 권력을 보장하고 어쩌면 정말로 더 우월한 천민들의 잠재력을 억압할 가능성이 있는 신분제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유주의라는 위대한 사회의 전복을 달성하였다. 이처럼 혐오는 인류의 근본적 속성이며 그 자체로 발전적인 것이고 혐오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주장은 반박당할 것이다. 우리 주변만 보아도 혐오는 끔찍한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혐오를 우상화하기만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사랑과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세우고 명목상 혐오를 배척한 것도 가장 강인했던 인류가 과도한 전쟁으로 겪은 고통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혐오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혐오라면 마땅히 발전적 속성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 주변의 혐오를 보면 끊임없는 고통을 초래한다. 혐오의 발전적 속성이 유지되려면 혐오가 초래하는 고통보다 이익이 커야 하며 우리는 혐오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이익보다 더 큰 고통을 초래하는 혐오를 건강하지 못한 혐오로 규정하고 이를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하지 못한 혐오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건강하지 못한 혐오란 무엇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유가 되는 '이성 간의 혐오'가 바로 건강하지 못한 혐오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성 간의 혐오의 모습을 보면 반대 성별을 갖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혐오한다. 심지어 본인의 아버지나 어머니까지도 말이다. 얼마나 끔찍한가. 이 혐오의 원인은 혐오의 확대에 있다. 앞서 말했듯 혐오는 복종욕구를 포함할 수 밖에 없다. 이성 간의 혐오의 원인 또한 복종욕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 이성에 대해 복종욕구를 느낄까. 남녀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접촉한다. 접촉을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성별이 갖는 특성들에 대해 배우고 상대의 특성에 대해 배우는 것은 상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배우기 어려운, 곧 달성하기 어려운 특성은 사람을 사랑보다 이를 복종시키고 싶은 욕구로 이끄는데 이러한 특성이 바로 성적 욕구이다. 아무하고나 성적 관계를 맺을 수는 없으므로 이성에 대해 성적 욕구를 달성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성적 욕구라는 영역에 강한 복종욕구를 갖게 된다. 이때 성취적 혐오의 위험한 특성이 발현된다. 마치 남의 땅과 음식을 소유하고 싶었던 고대 사람들이 상대 집단 자체를 악마화하고 전쟁해야 마땅한 대상으로 간주했듯이 특정 영역에 대한 혐오는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해당 특성을 갖는 대상 자체에 대한 혐오로 발전한다. 성적 욕구가 결핍된 사람들은 이성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만 간주하거나 이성 자체를 혐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특정 대상이 가진 거의 대부분의 특성을 혐오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가능하기는 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외모를 혐오하면서, 그 사람의 음악취향도 혐오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말투도 혐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혐오가 확대되면 점점 그 사람의 특성을 혐오하는 것과 그 사람 자체를 혐오하는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사람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혐오의 속성, 즉 발전적 속성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호적 혐오와 성취적 혐오 모두 열등하거나 우월한 것, 즉 자신과 다른 것을 혐오한다. 그러나 사람 자체를 혐오하는 것은 동등한 것을 혐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특성은 혐오 주체와 혐오 대상 간의 공통된 특성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혐오하면 스스로가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하거나 그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성 간 혐오가 발전적 속성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인 번식 작용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성 간의 혐오가 성적욕구의 결핍에 의해서만 나타난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국 개인이 성취하지 못한 이성의 특성에 대한 결핍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에 따른 복종 욕구의 과도한 확대 그리고 마침내 동등한 것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면 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방식으로 혐오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해야할 것은 진정한 혐오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혐오의 본질적 속성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구체적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첫째는 특성 하나를 혐오할 때는 그 특성 자체만을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하게 하나의 특성을 근거로 다른 특성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 다른 특성을 혐오하기 위해서는 그 특성에 대한 복종욕구를 가져야 한다. 둘째는 동등한 것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것이다. 동등한 것에 대한 혐오는 자기파괴적이거나 과도한 혐오의 표출로 이어지며 결국 혐오 주체와 대상 모두가 멸종하는 전쟁상태를 초래할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성숙한 혐오가 아니다. 혐오를 인류의 근본적 속성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된 자유주의 시대의 우리는 그 업적에 대해 자랑스러워 해야 하며 이제는 더이상 혐오의 자유가 억압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건강한 혐오가 가득한 세상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추천 콘텐츠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kim

    혐오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다만 자유주의가 절대적 선이라고 생각하시고 글을 작성하신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다른 의도 없이 궁금증을 해소 하기 위해 남기는 질문이니 오해 하셔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2025-07-16 18:18:57
    kim
    0 /1500
    • 필온

      @kim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만 보면 제가 자유주의 신봉자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자유주의를 고평가할 뿐인 것이지 절대적 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를 고평가하는 이유는 억압적 권력구조에 따라 발생하는 부당함을 평등을 통해 제거하고자 하는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유주의가 인간성의 기준을 인간 종적인 기준까지 낮춤으로서 인간되먹지 못한 사람에게도 자유를 부여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는 자유와 동시에 책임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건전한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 글에 대해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기능사 님의 글과 수필에 올라와 있는 제 보완글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25-07-17 16:45:20
      필온
      0 /1500
    • 0 /1500
  • Ted

    혐오를 발전을 위한 강한 원동력으로 본다는 생각이 저로서는 공감이 되어서 글을 남겨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니체를 읽을 때 생긴 발전적 혐오를 바탕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철학에 대한 관심을 높여 갈 수 있었습니다. 한때는 모든 감정이 오직 얼마나 행동하게 하는지로만 측정 될 수 있는 건 아닐지 생각을 해보기까지 했고요. 다만 요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사실 혐오를 도구로 바라볼 때 그 목적은 '발전'이 될 텐데 우리가 이 근대적 의미에서의 '발전'을 확신에 차서 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비해 발전이 보수적 목표라 할 수 있는 사랑이나 행복보다 더 타당하거나 인류 혹은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이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차피 '타당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목표가 가정 될 때 그에 대한 도구가 얼마나 목적에 부합하는 지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결국 모든 목적으로 오는 가치는 어떤 것이 더 나은지 판단할 수 없기에(설령 판단할 수 있다면 그때엔 이미 하나의 가치가 이미 목표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겠죠) 하나의 가치를 목적으로 믿고 다른 목적적 가치들을 부정하기 보다는 차라리 한발 물러나서 그 모든 목적적 가치들을 인정하고 그 인정을 바탕으로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 2025-07-13 19:15:55
    Ted
    0 /1500
    • 필온

      @Ted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추가 설명을 한 글을 올렸으니 한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씀해주신 것에 대한 제 생각은요. 저는 모든 목적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목적적 가치를 의심할 수 있는 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제가 이 글에서 주장한 혐오에 대해서 마저도요. 세상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겠죠

      • 2025-07-13 20:45:52
      필온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