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지 못하는 울음에 관하여 -청소년 과대대표의 관점에서- Op.70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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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백은별인가?
왜 백은별이냔 말이다.
오래전에 비청소년이 되어버린 청소년이나 비청소년성을 겪어보지 못한 청소년이나, 사실은 어떤 영웅주의에 심취하여 이 시대의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기성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오래도록 고대하였다. 그것은 아주 추상적이고 거론되어 본 적도 없어 우리는 그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나, 창작자로서 창작물을 통한 해방, 그 해방자를 우리는 꿈꾸었고, 우리는 스스로 그 데데떼 같은 아이콘이 되고자 소망하여, 사실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단지 그 때문에 그대는 펜을 들지 않았는가?
자 여기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브하고 느린 전격전의 주인공, 교복을 입은 구데리안이!
도대체 우리의 황제는 어디 가고 이 오만한 코르시카인 소설가만 남았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후에 자기 창작물들을 모두 거둬들여 폐기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또 다른 압제자를, 물론 두 팔 벌리고 환영한 사람은 없겠지만은, 다시 튈르리에 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라 마르세예즈를, 혹은 에반게리온을 안다. 그러나 콩코르드 다리는 한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
자, 이제 다시 들어가라!
원래 있었던 네 <클리송과 외제니>로!
다시 짝사랑하거나 연애하거나 헤어지거나 늙어버리든가
심심하면 죽이던가 자살이라도 하란 말이다!
툇,
젠장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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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긴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가 그간 혹자, 혹은 독자라 부르던 사람들에 대한 나의 애정과 존중은 너무 깊이 파묻은 탓인지 잠시 옆에 치워두고 싶다. 한국어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 내가 읽어온 한국어는, 특히나 문학에 있어서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본질이라기 보다도, 더 큰 맥락을 대표하기 위해 존재했다. 상록수와 수난이대를 읽던 내게 아몬드나 그 엇비슷한 표지들의 요즘 책들,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픽션들은 내게는 너무도 난해한 것들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외계의 스토리들, 그리고 낯선, 그러니까 엉뚱하리만치 이상한 단어들을 가져와다 쓰는 서평들을 읽다보면 그 소설들은, 또 문학은 현실의 프라모델이라기보단 또봇이라거나 카봇이라거나 하는 대중적인 메카물의 피규어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즐기거나 즐기지 않건간에, 사유라거나 깊이라거나 하는 단어들, 그러니까 해설하자면 적어도 500쪽은 되는 책들에서나 기대하고 찾던 작가들 본연의 누적된 생각들은 뜨고 지는 사조들의 저편으로 이미 사라졌다고밖에는 내게 남아있는 결론이 없다. 예수가 말했듯 비판받기 싫다면 비판하지 말아야하므로 나는 나의 주장을 만듦에 있어 어느정도는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어는 단지 문학의 필요가 전혀 없는 맥락이다. 한국 문학의 세련된 학풍, 그리고 여러 비평, 발문, 서평등으로 지껄여지는 공명은 한국어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또 괴이하게 스스로 발전하며 작동한다. 한국 문학의 고요하고 정제된, 말하자면 연구된 문장으로서의 문학은 어쩌면 고도의 완곡한 풍자극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한국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텍스트는 작가들의 불평불만은 고결하게 풀어낸 보여주기식의 자기고백이나 오덕들의 엔터테인먼트라고밖에 할 수 없는 픽션들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다. 우리 백치들은 우리가 마치 이전 사조들보다 위대한 걸 건축해 낸 것 마냥 떠든다. 무슨 소설집이 넷플릭스보다 재밌다느니 토마토가 심장보다 단단하다느니 하는 모든 것, 또,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으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다는 등의 모든 너무 자기의식적인 나머지 병신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아냥으로까지 들리는 개소리들말이다. 말해왔던 바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갈 사람들을 응원한다. 열심히 해라. 사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 차라리 작가 기획사를 차려서 사업을 하는게 훨씬 낫지 않을까도 싶지만 우리 백치들은 그럴 염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사업성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문학의 구성요소로서의 메세지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없지만서도, 은연중에 문학은 근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지만 중심적이며 추상적인 메세지가 있어야 여운이 남는다거나 더 완결적인 작품이 된다거나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쓴다면 쓰는 거다. 쓰는 것에 대해 연역적으로 선행하는 목적같은 건 있을 수 없으며 쓰는 것은, 그리하여 적히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목적이며 메세지다. 기껏해봐야 로맨스물, 단순성장물 쓸거면서 페미니즘, 기후변화같은 것들을 찍먹하는 걸 나는 순수히
- 기능사
- 2025-11-20
우리 문학이 점점 짧아진다. 오랫동안의 사견이었으나, 단지 사견으로 끝날 주장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당장 어느 서점에 가더라도, 대하소설은커녕 엄지손가락보다 두꺼운 소설들도 곧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하소설은 대가 끊겼다. 2000년대 초에 나온 것 역작들만 옛 독자들이 알아볼 뿐이고, 등단 수십 년을 바라보는 옛 작가들의 추억 이야기가 이제는 정말로 대하소설의 일몰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실제로 교보문고에서도 그러한 장편 중에선 (당연히 경장편들은 제하고) 조정래와 김진명, 무라카미 하루키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전부다하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현대의 트렌드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거나 대중의 테이스트가 너무 스낵컬처에만 맞게 퇴화했다거나 하는 분석은 차치하고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대하소설, 더 나아가, (대하소설은 그 자체로는 그냥 플롯 구조가 완만한 거대한 소설이라는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총체 소설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 총체 소설은 사학이다. 역사를 재구함에 있어 기타 사료와 수량화된 자료들만큼이나 그 맥락을 증언하는 것은 문학의 존재다. 토지가 그러했고, 한강의 여러 작품이 그러했으며, 한국 문학의 원초를 거슬러가 본다면 역시나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이므로 그것이 실체적인 진실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실체적인 진실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작가는 집필의 의지와 과거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사투하고 공부하고 또 갈등해 나가야 한다. 또 그렇게 작품이 발표된다면 그것은 다시 공격받고 다른 매체, 어쩌면 다른 소설로서 반박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야말로 역사에 기여하는 올바른 방법이다.총체 소설은 그러한 이유로 맥락을 충분히, 그리고 최대한 완전히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 혹은 필요했다. 그러나 요즘의 사조는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굳이 역사 소설이라 표현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굳이 과거사만을 위한 총체소설일 필요는 없으므로) 소설의 필요성은 다양한 의미에서 무시된다. 짧은 가방끈으로 뭐라 할 말이 있겠냐마는 현대의 도그마는 역시나 개인이다. 더 나아가 사회의 대비로서의 개인이다. 집단의 안티로서의 개인, 수량화된 전체 속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 무채색의 수많은 ‘개체’들 간에서 억눌리어 살아가는 개인이다. 비단 캐릭터가 여러 명 등장하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오로지 개체에서 개인으로 정체화되어야만이 성립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이 얕아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클리셰를 그대로 쓰는 작가가 어딨겠냐마는 독자들이 원하는 건 이해 가능한, 또 그렇기에 정상적인 형태로 감정적인 주인공이지 까발려진 타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학이기보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길을 문학이 택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남을 것이냐하는 걸 생각해야 한다. 우리 인간군(군체로서의 개체들, 나는 사회라는 개념을 싫어한다)이 고민해야 할 것을 고민하지 않은 세대로 남아도 되느냐고, 정말 그래도 되느냐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혹자는 사회가 정말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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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0
요즘 시 게시판에서 멘토링으로 배우고 느는 바가 적은 것 같아 이참에 스스로의 시론을 되돌아보고 미학을 정리해보려구 합니다. 멘토링욕을 돋우기 위해 극히 자아도취적인 표현을 썼으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기능사는 글틴에서 단연 가장 개성있는 글을 쓰는 작가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글은 천방지축이고, 대부분의 경우에선 그 난해함이 그 불규칙성, 그리고 의미의 발산을 더욱 확신케 한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유치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글을 더욱 어렵게 쓰는 것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난해한 시들이 그런 다다이즘으로만 비치진 않는다. 그것들은 더욱 높은 층위에서 시의 가능성을 질문하는데, 그 중엔 특별히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 있다. Ignorabimus Op.64저쪽 굴 끝엔 이그노라비무스*들이 삽니다 산다고 하긴 좀 뭐 하죠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의 시체나 처리하는 게 전부인 한량들이니 토막 내어서 묻어버리지 않으면 아마 그들도 버티기 힘든가 봅니다 그들의 시체는 그러기보다도 단단한 번뜩이던 그들의 눈빛은 대단한가 봅니다 중절모를 썼을 땐 몰랐겠지만 백 년씩이나 그들을 잘라내고 있으니 그들은 굴밖을 나와서 은하수를 볼 자격 따윈 없습니다 그들은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신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의 우울증은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였고 괴델은 병신*****처럼 죽었다죠 YHWH는 금세 숨어버렸습니다 뿌옇게 떠버린 먼지 속으로... 칸토어******와 플랑크*******는 아무래도 몰랐을 겁니다 YHWH는 분명 그들이 신이라 불렀던 것을 두려워했겠죠 --- 아주 재밌는 꿈이 있습니다 제 신실한 아내에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질색할 테니 말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이 마인크래프트같이 그저 물리엔진 속 세계이고 우리가 그저 컴퓨터라면 우리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면 그 속의 인간은 우리를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두렵습니다 YHWH의 상상일 뿐이라면 어쩌냔 말입니다 난 그를 비웃습니다 그가 인간이거나 아니기 전에...*19, 20세기에 존재했던 철학사조. 진리따위는 알 수 없을 거란 입장이 특징적이다.**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것이다.****독일의 물리학자 불확정성 원리의 주창자다.*****오스트리아, 미국의 수학, 수리철학자.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하다.******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으리라*******새로운 과학적 사실은 설득을 통해 패러다임이 되기보다는 반대자들이 죽고 그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며 기존의 원리를 대체한다.Ignorabimus는 그의 난해시 중에서 특기할만한 한쪽 끝에 있다. 특별히 이 시에 있어선 전에 기능사가 Ted에게 부탁한 설명문이 있다. 저는 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해서 감히 뭐라 말할 권리가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그냥 몇가지 와닿은 부분과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라도 몇가지 써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수학
- 기능사
- 2025-11-03
출판문화협회가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특별공로상 수상을 취소했다. 많은 이들이 안도하는 분위기다. 펜을 잡고서 나이브하거나 두루뭉실하게 덮고 넘어가기엔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문학과 폭력의 관계가 말이다. 벌써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1주년이다.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워낙 많이 다루어져 어느 정도 대중적인 소개는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문학은 모든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 그녀의 말은 서정적이면서도 한의 감정을 보여주는 우리 문학의 한 단면을 잘 노정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 고민과 사유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청소년 작가’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관련이 없으므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폭력이야말로 문학의 트리거이고, 그것은 문학의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플롯에 대하여 설명할 때,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배치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갈등 또한 폭력이며, 캐릭터 간의 서사의 깊이감을 주는(적어도 준다고 여겨지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갈등의 플롯은 어느 정도 언어가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인간 본능, 그러니까 말하자면 폭력성에 대한 어필이라 볼 수도 있다. 가령 긴장감이란 요소를 든다면, 서사적 긴장감은 어느 정도 인간이 진화론적으로 폭력성을 발달시키며(창을 들고 은밀히 사슴에게 접근하는 네안데르탈인을 상상해 보라. 클라이막스 직전의 긴장감이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못할 것이다) 생기는 부수적인 직관들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관들을 유용함과는 무관하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폭력이 긍정적인 관점에서 제시된 경우는 드물다. 아니, 정상적인 문학 안에서는 없다고 확언할 수 있다. 문학가들은 외교관이나 기업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티테제로서, 그들이 초래한 모든 차악적인 관념들을 비판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문학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윙어의 강철폭풍 속에서가 특히나 그렇다) 그것들은 파시즘으로 규정되고 맥이 끊겼다. 그러나 문학이 폭력을 다룸은, 폭력을 다루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가져온다. 창작자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문학은 때론 폭력을 호도하고, 편향시키며 왜곡이나 체리피킹이 당연히 무엇보다 잘 일어나나, 우리는 아주 원론적인 부분만 규정할 뿐 연속적으로 얽혀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해법은 주지 못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예시를 들어보자면, 만약에 박유하가 아니라 어느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커티스 르메이의 도쿄 대공습이 현대적인 총력전에서 아주 적절한 방식이라고 칭찬한 어느 냉혈한 군사학자가 받았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깊게 이야기해 본 주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10만 명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유 없이 살해된 데에 있어 우리는 그 또한 비판해야 하고, 또 수상이 결정된 바가 있다면 또한 취소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정확한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작가가 다룬 것이 그것의 당
- 기능사
- 2025-10-03
글틴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거의 지체없이 화자라 답할 것이다. 그는 글틴의 유일한(이리 단언함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평가인데, 비평게시판에 있어서 가장 권위적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내게도 이 작품을 포함하여 여러모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글은 비평이 아니므로 헌사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청소년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주체성을 무시당함을 넘어서 부분적으로는 당연한 혐오의 대상이 됨은(말하기는 싫다만 잼민이가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비단 청소년의 능력이 크게 부족한 탓뿐만은 아니다. 권익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에 내가 설명한 바가 있지만, 이번에 화자의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내가 전에 쓴 글에서도 미처 말을 못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청소년에게나 비청소년에게나 청소년은 리미널하다는 것이다.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전이,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전체를 포함하긴 해도, 청소년이 맞닥뜨리는 완전한 방향감각의 상실, 그리고 어떤 혐오자극에 의한 역동성을 충분히 설명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화자의 은 비단 진부한 소재의 다소 극단적인 결말을 붙인 어느 짧은 영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어떤 위계를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혜송이 내린 층보다 일층 위에 엄마가 서서 혜송을 지켜본다. 그러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혜송을 나무란다. 이후에 엄마는 혜송을 집으로 데려가고, 혜송의 방에서 다시 장면이 전개되는데, 혜송은 대화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주고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나, 엄마의 명령을 완전히 복종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엄마는 ‘지켜보고 있다’는 걸 반복하여 강조하는 데, 이는 후에 또 다른 상관물로 연결된다. 후에 엄마가 방을 나가고 혜송도 곧이어 방을 나선다. 그 후에 밤 벌레소리와 함께 오프닝 타이틀이 띄워진다. 이 방에서 나감은 앞으로의 전개에 있어 중요한데, 이 영화속에서 혜송이 어느 결론적인 공간에 ‘들어감’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후에 더 이야기하도록 하고, 오프닝 타이틀 이후로는 배경음이 엘리베이터 기계음 같은 소리로 바뀌며 어느 지하의 장소로 장면이 넘어간다. 혜송은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그 ‘리미널’한 공간으로 들어서는데, 이후 혜송이 걸어가는 장면에서 화자는 다양한 촬영기법을 실험한다(내게는 분명 실험적으로 다가오지만 아마 이미 연구가 된 분야이지 않을까 싶다). 이 공간은 굉장히 인상깊다. 분명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다른 공간과 유리벽과 유리문만을 두고 분리되나 난반사 필름으로 인해 안은 전혀 들여다볼 수가 없고 불 또한 꺼져있다. 이후 대사는 혜송의 나레이션으로 처리되는데, 리미널 스페이스를 의도했음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혜송이 계단에서 내려와 나레이션을 마친 바로 직후의 씬에서 CCTV가 드러나는데, 이는 엄마와의 직전의 대화를 연상시키면서(다만 한가지 아쉬운점은, 엄마는 분명 능동적이고 양방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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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9
혐오에 관한 필온의 고찰은 휴머니즘이 미처 무시하고자 했던 부분은 직격하고 있다. 혐오는 단순히 악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회의 형성과 유지에 있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 스스로가 완전히 이해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만) 혹여나 있을 비판에 대해 먼저 필온을 옹호하고 싶다. 예수가 한때 말한 것이 있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필온이 주장한 혐오의 확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휴머니즘을 혐오가 초월하는데에 있다. 사람의 어떤 특성에 대한 혐오와 사람 그자체에 대한 혐오를 분리하자는 그의 주장은 굉장히 인상 깊다. 또한 그는 인류의 발전사중에서 레퍼런스를 찾는다. 진보의 근원적 힘을 혐오에서 찾는다는 점 또한 그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옹호를 위해서라면 이정도가 적당할 듯 싶다. 혐오의 문제가 혐오의 확대에 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해주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한 혐오가 인간 발전의 실체적인 힘이라 할지라도, 여러부분에서 여전히 문제점을 내포한다. 첫번째는 그가 수호적 혐오가 분명 사랑과 도덕을 최고 가치로 놓고 미움과 악을 배척하는 종류의 혐오라고 설명했지만 그가 곧바로 든 예시들은 이를 설명하기 보다는 혐오의 보수적인 기능을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이런 수호적 혐오의 개념이 논리적이거나 휴머니즘에서 연역된 것이라기보단 그저 사회적인 직관에 근거한다고 정의되는 듯 한데, 휴머니스트로서는 그런 혐오를 할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 휴머니즘에 있어 어떤 특정한 혐오가 휴머니즘으로부터 연역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사랑과 도덕을 최고 가치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서(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가적인 정의가 필요하긴 하다) 그런 정형화된 가치관에 대하여 오로지 혐오의 완전한 포기 혹은 혐오의 극단적인 확대만 강요될 때가 있는데(이스라엘의 어느 포병을 생각해보라. 그는 자기가 들고있는 트리거를 당겨야하는가 말아야하는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두번째는 그가 말한 성취적 혐오의 역사성과 그를 인정할 당위성에 관한 것이다. 성취적 혐오가 물론 인류사 전반에 걸쳐 동력을 제공한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예시들은 그 성취적 혐오가 지금 문제시되는 건강하지 못한 혐오와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으며 그에 따라 그가 주장하는 건강하지 못한 혐오의 예시와 논지들은 작위적이며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앙시엥 레짐과 혁명파간의 갈등이 지금은 성취적 혐오의 예시이고 건강한 혐오로 보여도 당시에는 극단적으로 확대된 혐오, 현상의 어느 예시보다도 극단적인 혐오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필온이 마지막에 내린 결론에 대해서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첫번째는 어떤 특성에 대한 혐오로 다른 특성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지 않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특별이 할 말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두번째 결론은 주목할만한데, 동등한 것을 혐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개인이나 집단간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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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사람들이 바라던 말던 인류 앞에 서있는 질문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무수한 고통을 안기는 애국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긴요하거나 고결한 것이 될 수 있는냐는 거지요.-톨스토이, 존 맨슨의 편지에 대한 답변 중-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감동이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거의 완벽히 일치하거나 어느 종합적인 선을 향한다고 확신된다. 그것들은 인간을 허무에서 구원하며, 목적성과 인간다움을 부여한다. 그것을 맛본 인간은, 대체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나, 상황에 따라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으며, 살거나 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도, 그 4가지 모두가 동시에, 그리고 온전한 확신에 힘입어 진행되고 있다. 감동이라는 단어가 좋은 문장에는 안 어울릴 것 같다. 초보적인 감상에나 어울릴 단어이니 말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정의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감동은 수십억명의 인간이 2000년 전 어느 인간의 부활을 믿는 이유이자 또한 수십억명의 인간이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옹호하며 이행하려는 이유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인간들이 인간들을 정당하게 죽이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의 역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 역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 역사가 인류와 상존했었다는 것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또한, 대체로 그것에 대한 분석 자체가 모욕으로 여겨졌다. 생각해보라, 어느 양놈이 와서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가 열등감과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의식, 경제개발에 대한 허영심과(생각해보자, 나나 당신이나 경제 개발에 동참하기라도 했나?), 그리고 정부의 프로파간다 때문이라 하면 다 화를 낼 것 아닌가? 이처럼 그 감동은 직관적이고 단순하거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자연히 모욕적이다. 그러한 분석은 그런 감동을 피선동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명확한 맥락 안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결국 인간 비하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동이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단순히 눈물 몇방울 나오는 영화를 가지고 우리가 전 재산을 팔아버리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군대에 입대하진 않는다(100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랬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나 보편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장에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그리고 남과 북의 여러 사상가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까지 우리 사회의 컨텍스트에서 감동들은 자주, 그리고 각 사건사건마다 주목할만한 위력으로 기능해왔다. 현재도 그렇다. 8년전의 박근혜와 지금의 윤석열을 탄핵시킨 힘은 바로 무엇인가? 그것과 동시에 왜 같은 민족의 또다른 사람들은 그 ‘힘’을 피선동자들이라 규정하며 윤석열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옹호하는가? 그러한 힘이 생기는 것은 어느 합리적이고 건조한 진실이나 과학적 통찰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인지구조를 거치며 어떻게 기능하는 지에 있다. 인간은 이미 이것을 누구보다 더 잘안다. 일례로, 어느 바람직한 기독교 우파의 예시를 들어보자. 그는 분명 해방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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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3
23년 한해에 중국인 이 3만 4천명이 순유입됐다. 십삼만명이 들어오고, 십만명이 나갔다. 단지 그뿐만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중국은 꽤나 큰 위협으로 인식되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에 정치권에서는 외교적인 결례는 차치하고 친중 여부를 가리는 것을 너머, 심지어 어느 인물이 화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말이 오가고 있다. 당연히 머릿수로만 영향력에 대해서 따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눈여겨볼만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논리적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을 머릿수로 치환하여 본다면, 사람들의 중국인과 중국에 대한 주의는 분명 대단하다. 3만 3천의 순유입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러나 그의 10배 가까이 되는 인구를 우리는 매년 맞아들이고 있다. 중국인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보호하며, 각종 의무로부터 면제시키고, 또 억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할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정의내릴 최소한의 지식에조차 무관심하다. 그들은 청소년이다. 청소년에 대해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수히 많지만, 그러기 전에 청소년이라는 인식자체의 몇가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청소년은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필연적이며 인류사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상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청소년들은 ‘아녀자’로, 역사학자들에게는 소유물이자 대상으로 서술되었다. 그렇다고 자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운 좋게 나라가 망하거나 하면서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로 적혀있는 게 전부다. 청소년은 오랜 시간동안 소어른으로 인식되어왔다. 애초에 시민권이 확립되기 전이므로 권리를 동등하게 누린다기 보단 그저 발달과정에 대한 무지라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차차 여러 동정적인 인권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 그리고 교육철학자들을 통해 청소년들은 ‘발견’’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차 정부는 청소년들을 그들의 존재에 대한 좋은 명분이자 훌륭한 수단으로 보았다. 정부는 자기 조직과 권력을 재생산하고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공교육을 만들어내어 복종적인 군인과 노동자들을 만들어 내고자 했고, 또 많은 경우에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고 정부는 자기가 하고 있는 훌륭한 역할에 대해 역설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절대로 대체되어선 안되는 것 마냥 말이다. 여성또한 비슷하게 정부에게 이용당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노동시장을 허용한것은 점차 가부장적 질서의 해체로 이어져 여성은 여러 권리를 요구하고, 또한 쟁취하게 되었다. 세계 대전 들을 생각해보자. 남성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지 않았다면 여성들이 부엌을 떠날 수가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이 청소년에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청소년은 희한하게도,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할 의지와 능력을 갖출 때쯤이면 이미 비청소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상에 스스로를 청소년으로 정체화 한 세력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 생기기도 요원해보인다. 청소년은 여러가지 특징점을 지닌다. 첫째, 정의상 국민으로 등록된 사람은 청소년일지라도 국민으로 여겨지나, 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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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원래 를 읽고 감상을 적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청소년 작가를 꿈꾸던 시절(다만 나의 작품들은 섹슈얼리티를 숨김없이 다루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내가 청소년 작가로 다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였기에 추천을 받아 사서 쟁여 놓았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현대 문학, 아니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정정하자면, 현대 문학의 어느 정의하기 어려운 일부에 대해서 내가 단순히 그것들을 읽는 것 자체에 대하여 역겹다고 느낀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한 그와 비슷하게 내가 작가로서 벌어먹고 사는게 불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을 실제로 하였다. 가 나의 안티테제라 할 정도로 내가 그를 적대시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는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순전히 이 책의 영향을 받아 나는 장편을 기획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글틴에 올리진 못할 것 같으나 언젠가는 볼 수 있길 바란다. 는 굉장히 감동적인 스토리와 심리전개로 고평가를 받았고,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베스트셀러로서 유명하며 대만등 해외로 번역까지(아시아인이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다) 되었다. 리얼리스트로서도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테지만) 굉장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구하게 스토리를 다 설명할 만큼 작품을 존중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요약하자면 친구가 죽고 슬퍼서 자살하려다 결국 안 한다는 얘기다. 필자는 어느정도 만드는 캐릭터와 스스로를 분리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아마 독자들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작가가 캐릭터에게 자신을 너무 녹여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크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씩 작가들은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니까. 자기연민에 빠진 글은 에둘러 설명할 필요없이 작가가 글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또 작가가 미성숙하단 뜻이다. 자기연민에 잔뜩 빠진 글은 간혹 굉장히 서정적으로 문장을 쓸 때가 있는데, 다른 독자는 몰라도 필자는 그 부분에서 독서를 포기한다. 작법서에도 어설프게 미문을 쓰려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시적인 문장들은 임팩트도 없을 뿐더러 감정의 과잉, 곧 작가가 글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자주 감명을 받는 미문들은 딱 그부분만 떼어내어 보여주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아주 조금, 중요한 곳에서만 사용하며, 아예 읽어내려가다 지친 독자에게 잠시 메세지를 건내거나, 그냥 속독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해야한다. 자기연민을 조절하기를 포기한 글은 그냥 토사물같은 글이다. 실험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실험적이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고평가되질 않아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세상에 널려있어서 정말 잘 쓰지 않는 이상 발전시킬 부분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부분이라 할 것이다. 를 읽으면서 글틴에서 자주 봤던 글들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거칠게 말하면 문체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냥 백은별 작가가 글을 구조화하고 길게 쓸 의지가 있었을 뿐이지 필자로서는 그 이외의 차이가 아예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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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멘토님은 끝부분 부터 보십쇼)최근들어 벌어진 일련의 사건(분리해서 이해될 것도 아니지만 2개의 비슷한 현상이 간격을 두고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은 글티너들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당장 뒹글귕굴은 이 사안에 대해 다양한 접근이 제시되고 있고, 개중에는 다소 공격적인 것도, 또 그 반대의 성격을 띄는 것들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문제들과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이다(그중 다수를 필자가 직접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여러 현존하는, 그리고 새로운 접근을 제시하고자 짧은 글을 남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파고들어보자. 2025년 6월 12일과 20일, 하루 최대 3-4개의 글이 올라오던 수필게시판에 10-20개 정도의 글이 올라왔다. 대체로 1000자 이하의 짦은 글이었으며 주제가 비슷했기 떄문에 조직적으로 올렸으리라 짐작이 되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정중 일부가 소속 학교를 명시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추적한 결과 글틴을 교육과정중에서 활용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기 떄문이었다. 몇몇 글티너들은 분개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항의의사를 표했다. 글티너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긴 수많은 이유중 하나는 (화자님의 논지를 인용하자면) 글틴을 학생들에게 강제했다는 것이었고, 이 외에도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월장원에 대한 저평가등 중요한 이유들은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사건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글틴에는 분명히 글틴의 홍보 차원에서 이 사건이 비단 부정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고도 주장한다. 문학의 보급 차원에서 이는 어쩌면 문학이 더 대중화되고 있고, 또 이를 통해 더 대중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문예위에서 멘토 인력을 확충하면 될 일이다. 역사적으로 가능했었음은 여러 군데에서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서 한가지 짧게 짚을 점은, 문학가로서 평범한 한 인간에게 문학에 참여하는 것을 권하기란 꽤나 난감한 문제라는 것이다. 문학은 잉여적 노동이고, 항상 그래왔으며, 또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소모적인 동시에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진부한 공격이긴 하지만 필자는 예술의 본질이 아마추어리즘에 있다는 데에서 한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이에 대해선 후에 다루도록 하고, 문학을 권함에 있어 문학적 창작이 대중화 되는 것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마냥 좋기만 한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문학은 문학가의 수가 아니라 문학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 인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더이상 글틴이 ‘우리’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생각해보자. 이번 건은 큰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다른 조직적인 움직임이 나타났음에도 그에 대해 분석할만한 다른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개인적 수준의 단순 도배가 여러 형태로 제지되고
- 기능사
- 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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