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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지 못하는 울음에 관하여 -청소년 과대대표의 관점에서- Op.70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09-12
  • 조회수 496

왜, 

하필 백은별인가? 

 백은별이냔 말이다. 

오래전에 비청소년이 되어버린 청소년이나 비청소년성을 겪어보지 못한 청소년이나, 사실은 어떤 영웅주의에 심취하여  시대의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기성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오래도록 고대하였다. 그것은 아주 추상적이고 거론되어  적도 없어 우리는 그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나, 창작자로서 창작물을 통한 해방,  해방자를 우리는 꿈꾸었고, 우리는 스스로  데데떼 같은 아이콘이 되고자 소망하여, 사실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단지  때문에 그대는 펜을 들지 않았는가? 


 여기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브하고 느린 전격전의 주인공, 교복을 입은 구데리안이! 


도대체 우리의 황제는 어디 가고  오만한 코르시카인 소설가만 남았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후에 자기 창작물들을 모두 거둬들여 폐기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다른 압제자를, 물론   벌리고 환영한 사람은 없겠지만은, 다시 튈르리에 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마르세예즈를, 혹은 에반게리온을 안다. 그러나 콩코르드 다리는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 


자, 이제 다시 들어가라! 

원래 있었던  <클리송과 외제니>로! 

다시 짝사랑하거나 연애하거나 헤어지거나 늙어버리든가 

심심하면 죽이던가 자살이라도 하란 말이다! 


툇, 

젠장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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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사 난해시 개론 -청소년기 무명작들을 중심으로-

요즘 시 게시판에서 멘토링으로 배우고 느는 바가 적은 것 같아 이참에 스스로의 시론을 되돌아보고 미학을 정리해보려구 합니다. 멘토링욕을 돋우기 위해 극히 자아도취적인 표현을 썼으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기능사는 글틴에서 단연 가장 개성있는 글을 쓰는 작가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글은 천방지축이고, 대부분의 경우에선 그 난해함이 그 불규칙성, 그리고 의미의 발산을 더욱 확신케 한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유치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글을 더욱 어렵게 쓰는 것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난해한 시들이 그런 다다이즘으로만 비치진 않는다. 그것들은 더욱 높은 층위에서 시의 가능성을 질문하는데, 그 중엔 특별히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 있다. Ignorabimus Op.64저쪽 굴 끝엔 이그노라비무스*들이 삽니다 산다고 하긴 좀 뭐 하죠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의 시체나 처리하는 게 전부인 한량들이니 토막 내어서 묻어버리지 않으면 아마 그들도 버티기 힘든가 봅니다 그들의 시체는 그러기보다도 단단한 번뜩이던 그들의 눈빛은 대단한가 봅니다 중절모를 썼을 땐 몰랐겠지만 백 년씩이나 그들을 잘라내고 있으니 그들은 굴밖을 나와서 은하수를 볼 자격 따윈 없습니다 그들은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신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의 우울증은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였고 괴델은 병신*****처럼 죽었다죠 YHWH는 금세 숨어버렸습니다 뿌옇게 떠버린 먼지 속으로... 칸토어******와 플랑크*******는 아무래도 몰랐을 겁니다 YHWH는 분명 그들이 신이라 불렀던 것을 두려워했겠죠 --- 아주 재밌는 꿈이 있습니다 제 신실한 아내에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질색할 테니 말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이 마인크래프트같이 그저 물리엔진 속 세계이고 우리가 그저 컴퓨터라면 우리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면 그 속의 인간은 우리를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두렵습니다 YHWH의 상상일 뿐이라면 어쩌냔 말입니다 난 그를 비웃습니다 그가 인간이거나 아니기 전에...*19, 20세기에 존재했던 철학사조. 진리따위는 알 수 없을 거란 입장이 특징적이다.**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것이다.****독일의 물리학자 불확정성 원리의 주창자다.*****오스트리아, 미국의 수학, 수리철학자.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하다.******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으리라*******새로운 과학적 사실은 설득을 통해 패러다임이 되기보다는 반대자들이 죽고 그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며 기존의 원리를 대체한다.Ignorabimus는 그의 난해시 중에서 특기할만한 한쪽 끝에 있다. 특별히 이 시에 있어선 전에 기능사가 Ted에게 부탁한 설명문이 있다. 저는 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해서 감히 뭐라 말할 권리가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그냥 몇가지 와닿은 부분과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라도 몇가지 써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수학

  • 기능사
  • 2025-11-03
박유하 특별공로상 사건과 문학의 폭력성

출판문화협회가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특별공로상 수상을 취소했다. 많은 이들이 안도하는 분위기다. 펜을 잡고서 나이브하거나 두루뭉실하게 덮고 넘어가기엔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문학과 폭력의 관계가 말이다. 벌써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1주년이다.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워낙 많이 다루어져 어느 정도 대중적인 소개는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문학은 모든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 그녀의 말은 서정적이면서도 한의 감정을 보여주는 우리 문학의 한 단면을 잘 노정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 고민과 사유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청소년 작가’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관련이 없으므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폭력이야말로 문학의 트리거이고, 그것은 문학의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플롯에 대하여 설명할 때,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배치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갈등 또한 폭력이며, 캐릭터 간의 서사의 깊이감을 주는(적어도 준다고 여겨지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갈등의 플롯은 어느 정도 언어가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인간 본능, 그러니까 말하자면 폭력성에 대한 어필이라 볼 수도 있다. 가령 긴장감이란 요소를 든다면, 서사적 긴장감은 어느 정도 인간이 진화론적으로 폭력성을 발달시키며(창을 들고 은밀히 사슴에게 접근하는 네안데르탈인을 상상해 보라. 클라이막스 직전의 긴장감이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못할 것이다) 생기는 부수적인 직관들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관들을 유용함과는 무관하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폭력이 긍정적인 관점에서 제시된 경우는 드물다. 아니, 정상적인 문학 안에서는 없다고 확언할 수 있다. 문학가들은 외교관이나 기업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티테제로서, 그들이 초래한 모든 차악적인 관념들을 비판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문학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윙어의 강철폭풍 속에서가 특히나 그렇다) 그것들은 파시즘으로 규정되고 맥이 끊겼다. 그러나 문학이 폭력을 다룸은, 폭력을 다루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가져온다. 창작자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문학은 때론 폭력을 호도하고, 편향시키며 왜곡이나 체리피킹이 당연히 무엇보다 잘 일어나나, 우리는 아주 원론적인 부분만 규정할 뿐 연속적으로 얽혀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해법은 주지 못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예시를 들어보자면, 만약에 박유하가 아니라 어느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커티스 르메이의 도쿄 대공습이 현대적인 총력전에서 아주 적절한 방식이라고 칭찬한 어느 냉혈한 군사학자가 받았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깊게 이야기해 본 주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10만 명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유 없이 살해된 데에 있어 우리는 그 또한 비판해야 하고, 또 수상이 결정된 바가 있다면 또한 취소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정확한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작가가 다룬 것이 그것의 당

  • 기능사
  • 2025-10-03
<학업의 낙인>에 대한 감상 Op.46

글틴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거의 지체없이 화자라 답할 것이다. 그는 글틴의 유일한(이리 단언함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평가인데, 비평게시판에 있어서 가장 권위적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내게도 이 작품을 포함하여 여러모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글은 비평이 아니므로 헌사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청소년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주체성을 무시당함을 넘어서 부분적으로는 당연한 혐오의 대상이 됨은(말하기는 싫다만 잼민이가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비단 청소년의 능력이 크게 부족한 탓뿐만은 아니다. 권익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에 내가 설명한 바가 있지만, 이번에 화자의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내가 전에 쓴 글에서도 미처 말을 못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청소년에게나 비청소년에게나 청소년은 리미널하다는 것이다.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전이,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전체를 포함하긴 해도, 청소년이 맞닥뜨리는 완전한 방향감각의 상실, 그리고 어떤 혐오자극에 의한 역동성을 충분히 설명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화자의 은 비단 진부한 소재의 다소 극단적인 결말을 붙인 어느 짧은 영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어떤 위계를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혜송이 내린 층보다 일층 위에 엄마가 서서 혜송을 지켜본다. 그러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혜송을 나무란다. 이후에 엄마는 혜송을 집으로 데려가고, 혜송의 방에서 다시 장면이 전개되는데, 혜송은 대화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주고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나, 엄마의 명령을 완전히 복종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엄마는 ‘지켜보고 있다’는 걸 반복하여 강조하는 데, 이는 후에 또 다른 상관물로 연결된다. 후에 엄마가 방을 나가고 혜송도 곧이어 방을 나선다. 그 후에 밤 벌레소리와 함께 오프닝 타이틀이 띄워진다. 이 방에서 나감은 앞으로의 전개에 있어 중요한데, 이 영화속에서 혜송이 어느 결론적인 공간에 ‘들어감’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후에 더 이야기하도록 하고, 오프닝 타이틀 이후로는 배경음이 엘리베이터 기계음 같은 소리로 바뀌며 어느 지하의 장소로 장면이 넘어간다. 혜송은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그 ‘리미널’한 공간으로 들어서는데, 이후 혜송이 걸어가는 장면에서 화자는 다양한 촬영기법을 실험한다(내게는 분명 실험적으로 다가오지만 아마 이미 연구가 된 분야이지 않을까 싶다). 이 공간은 굉장히 인상깊다. 분명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다른 공간과 유리벽과 유리문만을 두고 분리되나 난반사 필름으로 인해 안은 전혀 들여다볼 수가 없고 불 또한 꺼져있다. 이후 대사는 혜송의 나레이션으로 처리되는데, 리미널 스페이스를 의도했음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혜송이 계단에서 내려와 나레이션을 마친 바로 직후의 씬에서 CCTV가 드러나는데, 이는 엄마와의 직전의 대화를 연상시키면서(다만 한가지 아쉬운점은, 엄마는 분명 능동적이고 양방향의

  • 기능사
  • 20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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