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에 대한 비판.
- 작성자 다시마
- 작성일 200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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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79
- 조회수 25,767
비판에 대한 비판.
혹은 변명과 회피이거나 책임 전가.
글을 쓰는 커뮤니티는
처음 와보았다.
이야기글 게시판보다는 시 게시판을 더 유심히 관찰했다.
이곳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씀에 있어 시는 어떤 장르보다도 더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언어의 미학이라고,
주관적인 하나의 성립된 세계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 게시판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나는 시라면 흰 도화지를 벗어나 모든 곳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은 달랐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흰 도화지를 여백 없이 가득 차게,
그것을 벗어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흰 도화지를 벗어나면 그들은 칼 같이 이야기 한다.
어디어디가 '틀렸다'라고.
왜 그렇게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은 마치 자신이 평론가인 것처럼 글에 대해 일종의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어떤 평론가라도 작품에 대해 객관적인 점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은 수학이 아니다.
모든 것이 답일 수 있지만, 그것은 각자의 시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생각과 추억과 주관과 사상을 담는다.
스스로의 눈에 맞추되, 그것이 '생각이나 느낌' 임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이것은 평가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이 느끼는 것을 평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일수도 있다.
일반적인 독자가 실제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맞춤법정도이다.
평론가들도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말할 뿐이다.
그 누구도 어떠한 작품에 대해 확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글의 구성, 내용, 문체, 주제 등등.
어떤 글이 당신 눈에 거슬린다면 그것은 그 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만약 작품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기거나
어떠한 부분을 지적하고 싶다면 작가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다.
어째서 이런 표현을 쓴 것인가, 구조를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사람의 작품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않았으면 한다.
이곳은 웹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책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서 문학이 게제 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
우리는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물론, 우리가 쓰는 글들이 모두 완벽하지는 못하다.
내가 얘기하고픈 것은 비판을 하지말자-라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태도로 비판을 하란 이야기이다.
상대방의 우위에서 내려다보는 듯 하다 건방진 태도는 버리고,
독자와 작가로서 대화를 하자.
서로 지적하고 상처 받고 도태되기 보다는
부족한 점이 있다면 서로 이야기해서 고쳐나가고 발전해야할 것이다.
느낌 대 느낌으로 대화하자.
**
사실 더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시 게시판과 이야기 게시판을 보면서 느꼈던 가장 큰 감정을 쏟아 놓았습니다.
작가에 대해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독자들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틀린 주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각자의 주관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만,
그것에 대해 반박을 받는 것은 두 가지 이유뿐입니다.
말 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작가와 주관이 다르거나.
작가와 주관이 다른 경우에는 차이를 인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말하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면 서로에 대해 격해지고 맙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왜 정의 내리려고 하지요?
어째서 규격에 꼭 맞아야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무리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곳은 억눌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완벽한 글쓰기를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들 점수를 받기 위해 이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 사람들이, 같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상처를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라고 바른 생활 어린이는 아닙니다만
글을 쓰다보니 흥분이 되어 이런 식으로 쓰게되는군요.
문체에 대해 태클거실 분들께 말하죠.
명령이 아니라 권하는 것입니다.
이 글 또한 저의 주관이기 때문에 이에 반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겠죠.
가끔, 혼란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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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 뮤지컬에서 넘버는 왜 서사의 언어가 되는가 연극에서 인물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뮤지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만으로 더 이상 감정을 담아낼 수 없는 순간 이야기를 노래로 넘긴다. 이때 뮤지컬의 넘버(Number)가 맡는 역할은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음악적 즐거움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넘버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대사이자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 장치다. 뮤지컬을 감상하다 보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있다. 흔히 ‘대표 넘버’라 불리는 이 곡들이 기억되는 이유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대중적 인지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표 넘버는 인물이 삶의 전환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거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 순간 음악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기는커녕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 자체를 결정한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경험하게 만든다. 배우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지고 선율은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 오르내리며 리듬은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다. 여기에 가사와 오케스트레이션, 연기와 무대 연출이 더해지는 순간 하나의 넘버는 독립된 음악을 넘어 한 장면, 한 서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비평은 ‘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사랑과 성장이라는 전혀 다른 서사를 다루는 두 작품이자,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뮤지컬인 『베르테르』와 『킹키부츠』를 선정하였다. 장르와 시대, 음악적 색채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마다 넘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본 비평에서는 『베르테르』의 넘버 「어쩌나 이 마음」과 「발길을 뗄 수 없으면」, 『킹키부츠』의 넘버 「Step One」과 「Soul of a Man」을 중심으로 가사, 선율, 리듬과 템포, 배우의 음악적 표현, 장면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분석할 것 이다. 네 곡 모두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대표 넘버이자 서사가 가장 크게 전환되는 순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각 넘버가 왜 하필 그 장면에서 울려야 했는지 그 노래가 없었다면 인물의 서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살펴봄으로써 넘버가 음악을 넘어 인물의 삶을 완성하는 언어임을 고찰하고자 한다.Ⅱ.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지만 그 사랑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작품은 한 사람이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다가, 끝내 그 감정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서정적인 심리의 결은 대사만으로는 다 담아내기에는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그 순간마다 넘버가 등장한다. 베르테르의 넘버는 이미 정리된 감정을 노래로 옮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과정 자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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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 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모티프다. 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그중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 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 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카타르시스 안에는 사회정의라는 이름에 감춰진 폭력이 존재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본래, 참된 교육이라는 뜻으로 선생이나 어른이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뜻한다. 현재까지도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지향해야 하는 교육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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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마님의 유연한 답변에 고마움과 동감을 느끼며, 앞으로 상호 더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함을 새삼 되새깁니다. 다시마님과 같이 제 생각에도 이 이야기는 도휘 군이 불씨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도휘 군이 애화 군 등과의 댓글 토론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도휘 군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불특정다수의 글틴들 안에 현재까지 누적되어온 비판 문화에 대한 치명적 결함일 따름이지, 도휘 군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비뚤어진 발자국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고쳐 걸어가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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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들... 제가 괜히 불씨 던지고 간 것 같아서.... 제가 왜 자꾸 다른사람에게 밉보이려 노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술에 대해서는... 저는 꼭 예술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입니다만, 저는 인간의 삶 하나하나가 모두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류의 보편적인 면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부정적인 측면입니다만... 조금 위험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