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를 읽고-인간 사회와 언어
- 작성자 김션
- 작성일 200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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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와 외국어
미국의 매래학자 앨빈 토플러에 의하면 세계는 제4의 물결이 흐르고 있고 제4의 물결은 세계화아고 했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지구촌 모두가 하나가 되어가는 세계화의 흐름은 인류역사의 한 흐름일 것이고 그 흐름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책에서도 ['세계화 시대'가 될수록 우리말의 '순수'를 지킨다는 일은 너무나 힘겨워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분명 세계화의 흐름에서 언어의 순수성만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 조선후기 사회 근대화기술의 무조건적인 배척에 의해 국력의 약화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현실로 이어진 어리석은 사례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세계화가 진행된다고 해서 언어의 순수성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외래어의 수입을 허용하란 말 역시 모순이다. 언어에는 민족의 혼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시대 때 조선어말살정책을 편 것도 이것 때문이다. 분명히 반세기의 우리 조상의 삶이 담긴 언어는 소중하고 지켜야하는 것이 틀림없다. 세계화 시대가 진행되어간다고 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고 아무런 근본의식 없이 세계화에 몸을 담는 것은 어쩌면 세계화시대를 이끄는 강대국의 정신적 노예가 될 수 있는 위험한일이다. 즉 민족의 혼 즉 우리말을 잃고 세계화시대에 발을 들려놓으면 일본에 의한 강점기가 아니라 세계화에 의한 정신적 강점기가 찾아올 것이다. 고1 국어시간에 배우는 최재천의 '황소개구리와 우리말' 에서처럼 황소개구리가 참개구리를 잡아먹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 외래어를 받아들이고 그에 발맞춰 살아가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래어와 우리말과의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말의 순수성을 머리 속에서 모두 지워서는 안된다. 민족의 순수성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혼합된 새 시대의 언어를 들여오는 일은 우리 개구리들을 돌보지 않은 채 황소개구리를 드려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래어와 혼합된 현대의 언어를 받아들이되 학교 교육과정에서 언어의 문법을 가르치는 단원에서 순수한 우리말을 상기시키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다.
언어, 인간사회의 표현
문학이란 언어를 재료로 인간의 삶을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가치를 드러내는 언어예술이다. 문학 언어와 일상 언어는 의사전달과 감정 표현의 수단, 현실과 사실을 재현함, 선전과 설득의 기능이 있다는 것에 공통점을 가지면 인간사회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아왔으며 세계화 시대가 흐르는 현재 미래에도 줄기차게 번영할 것이다.
우선 문학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인간의 감정은 무한하며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 역시 인간의 본연적 욕망이다. 그래서 몇몇 문학작품들과 본인(김시헌) 창작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사랑)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쉼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라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비교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가 내 초라한 입에서 떨어지는 말 가운데 몇 마디에 기꺼이 대꾸를 해주는 것도 영광인데, 하물며 나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또 아주 우아하게 차려입고 나왔다는 것.]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아랭드보통(소설)
미인도 - 김시헌(창작)
베란다 화폭가득
너의 붉은 치맛자락 흔들린다
연애라도 걸어볼 양으로
새들은 노래하고
틀러올린 머리칼 사이로 흐르는
늦 봄의 바람
누가 그려놓고 간 그림인가
넝쿨 장미 화폭 가득
치마 물들이고
내 속에선 그대
물들어 지워지지 않는다
(이별)
[올챙이가 팔다리 흔드는 걸 막으려면 그 꼬리르 잘라야만 하는가? 카페 검은고양이의 석판에 적힌 오늘의 메뉴처럼 엘레나에 대한 추억도 지워야만 하는가."당신을 결코 잊지 않겠어요."엘레나는 그렇게 속삭였다."우리를 결코 잊지 않겠소."나는 그렇게 대꾸했다.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말들.그리고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거리로 사라져갔다.증발되어버렸다.] - '꽃들의 질투'/이자벨 라캉(소설)
[비 갠 긴 둑에는 풀빛이 짙어지고 / 남포에는 임 보내니 슬픈 노래 울리다 /
대동강 저 물은 어느 때나 마르겠나 / 해마다 흘린 이별 눈물이 푸른 물결 보태니] - '송인'/정지상(7언절구 정형시)
슬픔 - 김시헌(창작)
눈가에 글썽이는 작은 햇살,
노오란 민들레 한송이 한송이
수수로이 부서져 흩날린다
어디에 무릎 꿇어야 하나
내쉬는 숨결 홀로
차디찬 바람이 되어
가슴 속 일렁이는 한 뼘의 무지개는
아주 낮은 문턱 조차 넘지 못한다
조용한 공간 속 소리없이 울먹이며
차갑도록 목이 메여오는 오늘,
당신과 나 사이에 문고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 고운 볼을 타고 흐르는 슬픈 시선
멈출 수 없는 순간 내 눈도 물에 젖는다
아득한 소리 넘어는 빈 구름 뿐이다
(참회/자아)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중략)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락으로 닦아보자/.........(중략)]
- '참회록'/윤동주(시)
[모든 것이 포함된 하나의 장소... 라고 말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어 버였다. 아짤 스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체념을 한 죄수처럼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중략)... 낮게 낮게 발굽 소리를 퉁기며 내닫기 시작했다.] - '말 발굽소리를 듣는다'/윤대녕(소설)
정전 - 김시헌(창작)
화려한 이야기가 꺼졌다
불빛 없는 공간
멈춰 버린 시간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둑 어둑 스며드는
무엇이라 말 할 수 없는 공간
남길 것 마저도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시간
오늘, 나에 대한 삶
보이지 않는 거울 앞에
나의 모습이 없다
보이지 않는 얼굴, 나는 누구인가
(사회)
-산업화와 가난, 빈민층의 서글픔
[만석은 서서히 잡을 향해 발길을 옳겼다. 곱창골목을 빠져나와 좁다란 시장 사거리로 접어드니 혜성극장이 보였다. 삼류저질영화만 상영하는데도 공단 주변에 우글거리는 실업자들로 인해 항시 만원을 이루는 극장이다. 공단 게시판에 모집공고가 하루도 거리지 않고 닥지 닥지...(중략)] - '봄배 내리는 날'/김한수(소설)
[쇠망치를 든 사람들 앞에 쇠망치 대신 종이와 볼펜을 든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가 아버리를 보았다. 아버지가 바른손을 들어 집을 가리키고 돌아섰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집을 쳐부수기 시작했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소설)
[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일 데나 됩니까? 고작해야 고기잡아니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어허 몇 년만에 가는 거요?" "십년" 노인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삼포 가는 길'/황석영(소설)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는 흥분한 소리가 까막득히 먼 곳에서 자기를 향하고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에 오한을 느끼며, 원구는 호박넝쿨 우거진 밭두킬을 앓고 난 사람 모양 허전거리는 다리로 걸어가가는 것이다.] - '비 오는 날'/손창섭(소설)
-비판,풍자,저항
[주인 미스터 방은 술이 거나하여 감을 따라, 그러지 않아도 이즈음 의기자못 양양한 참인데 거기다 술까지 들어간 판이고 보니, 가뜩이나 기운이 불끈불끈 솟고 하늘이 바로 돈짝 만한 것 같은 모양이다.] - '미스터 방'/채만식(소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중략)....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중략)...가각 자기 자리에 않는다./주저앉는다]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시)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중략).../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러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중략)...../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 '광야'/이육사(시)
산야에서 -(국회) - 김시헌(창작)
어두운 그늘 밑에 독버섯이 위태롭다
왁자지껄 득실대는 나방들
서로의 자리싸움에
힘없는 풀들은 쓰러져 신음한다
누구의 아픈 가슴 짓밟고 서려는가
찢긴 세월에 쫓겨난 햇살은
산 그늘로 몸을 숨기고
모난 세월,
서글픈 장맛비 막바지 턱
빛가린 세상 속 구름에 얹힌 그리움
바위틈 사이로
숨어버린 작은 햇살,
스스로 말라버린
벼랑 위에서 꽃잎 떨군
생각만 해도
듣기만 해도
한 없이 그리운 이름
휴전선에서 - 김시헌(창작)
우리들은 제발 처참한 6.25의 허물에서 벗어나자
바래진 기억 속에 타다 남은 사랑 한 조각을
출렁이는 압록강 푸른 물결에 띄워
깊고 깊은 동해에 가득 채우며
휑하니 뚫려버린 가슴 속으로
묻어두었던 그리움,
백두대간의 장엄함에 기대어
고요한 외침으로 다가가자
가끔은 어깨를 들썩이며
고인 눈물을 흘리고 희미한 기억 속
사랑했던 만큼 그리워지는 작은 슬픔을
가슴 한켠에 남기어
작은 불씨로 타 오른
지리산 속 갓 피운 야생화처럼 풋풋한
따스한 봄날 제주도 유채꽃과 같이 정겨운
소년 소녀의 사랑으로 기억하자
시베리아의 차가운 고독이 찾아오더라도
퍼붓는 총탄이 심장을 꿰뚫어도
우리들의 사랑 막을 수 없다고 포옹한 채
분단의 휴전선을 베어버리고
산골짜기 흐르는 정갈한 물로
비무장 지대 녹슨 철책을 걷어버리자
학교 - 김시헌(창작)
뜨거운 여름날
쓰레기 더미 위에서
썩은 생선 쪼가리 찾으려는 듯
서성거리는 고양이를 본다
음식 찌꺼기 먹고 살며
어린 자식들에게
훔치든, 죽이든
땅을 파서라도 먹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가르친다
햇살 따뜻한 마당가에서
행복을 꿈꾸던 어린 마음
썪은 물 줄기 흐르는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리는
그것,
고양이 학교...... .
울지도 못한다
생각도 못한다
그날,
내가 본 고양이 학교는
똥물이 줄줄 흐르는
쓰레기 위에 지어졌다
재미있지 않은가
위 와 같인 사회 인류는 계속해서 문학을 통한 언어로 삶을 표현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문학을 이룩한 언어를 통해 세계화 시대 각 나라와 민족의 정서와 현재 상황을 교류하며 서로 공감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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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신기하게도 한국 연극(항상 연극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이 생각났다. 그 중에서도 (굉장히 정치적인) 참사에 관한 연극. 참사에 대해 명확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려는 연극이 생각났다.디거의 큰 축 중 하나는, 시스템을 비판하는 연극마저도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이랄까. 결국 내가 예술 작품을 소비- 생산하면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이 지점이었다. 예술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 예술가는 쓰레기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탁상공론과 끝없는 담론 생성밖에는.디거를 보면서 수많은 한국영화가 생각이 났다. 참사들, 한국사,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고 다치는, 기후에 관한 영화, 돈 룩 업 등 말이다. 정말 개중에는 순수한, (디거의 케니 록웰처럼, 진심으로 반성하고 추모하는 기득권, 시스템처럼) 의도로 만들어지는 영화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그런 서사들이 꽤 많다. 그러나 순수한 의도였건 아니었건(그리고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결국 그런 영화들도 시스템의 안주하게 만들고 안주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참사에 관한 극 기타등등 그것이 무엇이든지, 특정인에게 분노를 유발하고 그 유발된 감정을 특정 상징에 투사시켜 심리적 고어 포르노로 소비하게 만들고, 그리고 소비한다. 우리가 무슨 엄청난 세뇌를 당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도 딱히 별 의도가 없다.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Fossil Fools> 연극이 끝나고, 4단계 경보가 울린다. 사람들은 방독 마스크를 쓰고 거리로 나선다. 결국 현실을 비판하는 예술이, 비판을 예술이라는 비좁은 공간에 가두고 해소하게 만든다. 이를 진작에 알았던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러한 이유로 카타르시스를 반대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제 4의 벽을 깨는 여러 테크닉을 통해 몰입을 방해하는 소격 효과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이는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게 해서 관객이 실제 현실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행동을 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난 항상 서사예술과 정치성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이다. 서사 예술은 무언가를 강력하게(즉 정치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 주장은 필연적으로 단순화와 납작함, 폭력 따위가 붙기 마련이다. 내 주장이 옳으려면 상대방의 무언가가 합리적이더라도, 공감 가능하더라도 무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론과 논쟁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주로 백분토론, 혹은 젊은 남성 정치인이 "논리적"으로 패는 "사이다" 영상이었다. 그들은 꼭 괄호 안의 용어를 필수로 넣어 제목을 지었다.) 소비하며 즐겼지만, 즐길 때는 몰랐지만, 지금도 즐기지만, 다만 지금에 즐김에는 결국 이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코카콜라는 여전히 팔리고, 24시 햄버거 가게는 어차피 값싼, 법적으로 최소한의 선만 지키면서 노동자를 뽑을 것이고. 그들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는, 기업인은 모에화되고 소수자는 악마화되고, 그렇게 우리는 힘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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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귀여우며 무서운 -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 진시황은 어째서 불로초나 수은도 마다 않고 영생을 희구했는가? 인생의 절정이라는 순간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단순히는 죽음을 두려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정말 영원하고 무한한 삶의 추구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고 싶지 않다'라는 말은 '영원히 살고 싶다'로 치환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은 영원을 제대로 감각하고 있는가? 애초에 감각할 수는 있는가?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이하 『치이카와』)은 이 같은 질문의 중심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 순간을 극복하려다 영원의 함정에 빠져버린 자들이 그려낸 궤적으로 관통한다. 작고 귀여운 것들, 그 이면 '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들'의 줄임말인 먼작귀로 공식 번역된 치이카와의 극장판 캐치프레이즈는 '그 우정도/ 그 죄도/ 그 생명도/ 언제까지나'. 아무래도 수상쩍다. 줄거리를 보자. 인어섬에 간 치이카와 일행은 영생을 불러오는 인어 동료를 잡아먹은 범인을 찾으려 마을에서 흉포를 부리는 세이렌에 맞서 싸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마을 주민 히토바와 후타바는 사전에서 본 영생을 가져오는 인어를 낚으러 바다로 향하지만 세이렌의 실수로 사고가 나 후타바가 중태에 빠지자 히토하는 복수를 위해 납치한 세이렌의 잉어를 후타바에게 먹인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작고 귀여운' 얘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문제는 다음이다. 후타바가 영생이 가져올 공포, 히토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죽고 없어지는 동안 홀로 남겨질 공포를 어렴풋이 감각하고는 히토하도 인어를 먹도록 종용하자, 재촉에 못 이긴 히토하도 인어를 먹은 뒤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을 둘러싼 사유를 추출해낼 수 있다. 우선 후타바가 영생을 얻은 이유는, 그가 사경을 해메고 있었으며 죽음 아니면 영생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치료의 가능성은 묘사되지 않았으므로 논외로 친다). 히토하는 후타바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기에 그를 영원히 살리기로 한다. 고로 후타바의 영생은 도피 시도이며 동시에 일종의 도피처이다. 반면 히토하는 어떤가. 히토하가 영생을 얻은 이유는, 이미 영생의 운명이 정해져버린 후타바가 뒤늦게 영원에 수반되는 공포를 직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히토하의 영생은 후타바가 겪는 공포를 덜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되었다. 영생이 수단으로서 이용된 것이다. 이렇듯 두 인물의 영생은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영원이 순간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 두 인물이 영생에 이르는 계기는 사소하며 지극히 순간적인 감정과 선택에 매여있다. 지금 죽음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공포를 달래기 위해서 택해진 수단이 영생이라는 것은 농담에 가깝다. 이러한 농담이 하나의 실체로 구현되는 이유는 그들이 영원을 순간의 렌즈로 해석하여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 도두
- 2026-10-03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_ 소설집『오직 두 사람』, 113p., 문학동네 편리하게 해석한다면 이렇다. 옥수수 = 나. 옥수수를 쪼아먹는 닭 = 출판사 사장 내외. 작가와 편집자는 마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기한 내에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고, 반드시 소비되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창작자가 느끼는 압박은 모이 시점에서 닭이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출판부(닭)가 작가(나=옥수수)를 ‘쪼아대는’ 것이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169p.) 중얼대지만 잡아 먹힐 것 같은 생존의 불안을 일상적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나’는 옥수수다. 그건 단지 출판계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 전반은 마감에 맞추어 빨리 빨리, 효율적으로, 생산적으로, 성실하게, 신 들린 것 같은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일들을 처리하라고 인간들을 쪼아대고 있다. 교육도 시장의 요구를 반영하는데,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는 성실한 산업 역군을 양성하는 전일(全日)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인 '나'는 딸의 뒷바라지를 하려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고, 딱히 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써야만 한다. 그런데 글이 안 나온다. 원고료를 지급했는데 마감일이 훌쩍 지나도 산출물이 없는 것에 대해서 출판사측은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그러면 '나'는 민법에 따라 금전적 손해배상의 의무를 지게 될 것이고 더불어 '사기죄'로 형사 재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월스트리트 금융계 출신 출판사 사장을 만난 뒤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막 써버린다. 서사 구조의 개연성, 인물의 성격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들이지 말자. 이미 쓴 글 되돌아보지도 말자.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마감과 효율, 생산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에라 모르겠다’, ‘신경 꺼’, ‘너무 공들이지 마’, ‘대충대충 해’의 정신을 학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작품 속 인물들과 현실 세계 사람들이 내면화한 메시지를 나의 언어로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오랜 시간 몰두하지 마. 천착하지 마. 시간이 아깝지도 않니? 그런 자잘한 골몰은 접고 거칠게 획을 그어가야 해. 그렇게 다들 계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거야. 왜 작가들은 자꾸 채무를 불이행하니? 결국 인생의 핵심적 요소는 생존(돈)과 생식(섹스)가 아니겠는가. 일을 ‘쳐내는’ 감각으로 빠르게 과제를 ‘마감’했다면, 너는 비로소 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게다가 그런 감각은 곧 인류가 숭배해온 거친 ‘남성성’과도 유사하므로 '생산성이 좋은' 사람이 '광포한 섹스'(150p.)도 잘 하는 거야. 이 작품은 쟁취의 감각, 온라인 게임하는 감각, 경영학, 세상물정, 똑부러짐 같은 것들과 멀다고 여겨지는 문인조차 그러한 지배적 사회질서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을 인생이라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작가라고 믿으며, 자신이 사회구조적으로 결정되는 “종속변수”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양식
- Marllin Zero
- 2026-10-02
그 짧고 강렬한 순간이 지나가고 난 후, 까닭 없이 죄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여느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어떤 사고가 발생하기만 하면, 그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우선 사과하도록 교육받은 탓이었을 것이다.그래서인지 나는 그 일을 엄마에게도, 그리고 그 시절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었다. 시간이 좀더 지나고 나이를 먹게 되니,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예단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순간’에 대한 자세한 서술 이전 이 단락을 읽었을 때, ‘그 순간’이 벼락 맞은 순간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보다 현실적인 비일상적 경험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스로가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첫 성적 경험 같은. ‘나’는 유년 시절의 그 순간을 어쩌면 잊은 게 아니라 묻어뒀던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친구를 통해 ‘벼락 맞고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을 알게 되고 가입한다.우리는 이미 한 번 살아났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공포보다 빨리 덮친 수만 암페어의 전류를 받아냈습니다. 그때 전류는 우리 몸에 길을 냈기 때문에 또다시 맞는다 해도 전류는 그 길을 따라 마치 피뢰침을 지나듯 우리 몸을 지나갈 겁니다. 초점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벼락 맞은 경험의 발설을 성폭행 경험의 진술로 치환하는 것, 벼락을 맞아 몸에 전류가 흘렀던 경험을 ‘첫 경험’이라 칭하는 것, 모임 구성원들을 뜻하는 ‘발기한 피뢰침’이라는 표현을 통해 짐작할 때, ‘벼락 맞고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은 ‘성폭행 생존자 모임’이 아니었을까?하지만 그렇다면 왜 ‘탐뢰여행’을 떠나는 걸까?*이들은 벼락을 맞아 죽을 뻔 했음에도 일부러 벼락을 맞으러 간다. 다 같이.트라우마 극복을 목적으로 한 자조모임 성격의 ‘퇴역 군인들 모임 같은 건가요?’, ‘레저 삼아 위험을 즐기는 건가요?’ 모임의 지도자격인 J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 왜 이 모임에 왔는지를 물어보라고만 한다. 또한 J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를 이곳에선 마음 놓고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첫 경험을 털어 놓은 이후에도 빗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꿈을 꾼다. 사실 벼락을 네 차례 맞아 의연해보이는 J도 꿈을 꾼다. J는 말한다.그 경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게 우리 몸에 흔적을 남깁니다.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곧 되살아납니다. 공포 보다 먼저 지나간 것을 몸은 잊지 않습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 라는 ‘나’의 질문에 J는 ‘공포와 전류를 일치’시키고 ‘스스로 전격이 되어 대기와 대지와 몸의 주인이 되라’고 한다. 이는 모임 구성원들이 주기적으로 ‘탐뢰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다. 벼락 맞고도 살아난 인간은 벼락에게 당한 객체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탐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탐뢰여행을 가면 ‘표백제’ 냄새가 나는데, 이는 방전이 시작되면 공기중의 산소가 오존으로 변하는
- Marllin Zero
- 2026-09-28
서론1) 탐구 배경칸트는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달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나는 소설가가 꿈인 사람이다.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진행했다. 나의 문구를 작성해보라는 내용의 수행평가였다. 3학년 2학기 수행은 쉽고 단순하다. 3학년 2학기는 반수를 하지 않는 이상 성적에 포함되지 않고, 수능도 준비해야 하는터라 내신의 중요도는 훨씬 떨어진다. 그렇기에 수행평가도 이런 간단한 것을 주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어려운 수행평가가 또 없었다. 평소 글쓰는 것이라면 모든지 자신있었던 내가, 갑자기 문구 하나를 작성하려고 하니 손이 덜덜 떨리기만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부담감 때문일까. 문예창작과 입시생이기에 이런 글 하나, 하나에도 신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을까. 정작 나는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지 명확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거울' 응집되지 않은 기억을 뒤져 겨우 기워낸 한 단어였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 나의 소설은 거울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타인 그리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 그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였고, 내 소설이 지향하는 방향이었다. 단순히 글자의 기교와 나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 되주는 것. 그것이 나의 원초적 입장이었다.소설이 거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사회에 가장 아래부터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에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 어려우며, 그들은 소외되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런 잊혀질 기억들을 다시 되찾는 것, 이번 연구는 가장 아래에 있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칸트는 에서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를 언급했다.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는 다음과 같다.1.자살2.거짓약속3.자기계발포기4.자선거부이는 현대적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고 보았다. 특히 4번과 같은 자선거부의 경우 현대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쟁점으로 보였다. 현대 사회는 매우 풍요롭지만 여전히 빈곤하고, 심지어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조차 충족되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칸트가 정언명령 위반 사례, 그 중 ‘자선거부’를 이야기한 것이 이것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후 롤스의 분배적 정의 개념과도 연결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우선적으로 탐구 대상으로 삼기로했다. 두 번째는 사회문제를 다뤄온 경험이 많아서 세 모녀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 해당 사항에 대해서 “국가의 재분배는 공정한가?”를 주제로 탐구를 진행했던 경험이 있었다. 여기서 롤스 관점과 노직 관점을 비교하여 국가의 재분배가 공정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 재분배가 단순히 최소수혜자에게 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닌, 최소
- 노스텔지아
- 2026-09-16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인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맞부딪히는 지점에 놓여 있다. 안락사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하는 것을 말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 생명 보호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는 실제 인물인 라몬 삼페드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메나바르는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은 물론 편집과 음악까지 직접 맡았으며, 한 사람의 시선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라몬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작품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라몬은 사고 이후 오랜 시간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라몬의 삶을 따라가며 인간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라몬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하는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몬에게 죽음은 단순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에 가깝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살 수 있는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라몬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 개념은 대사로만 설명되지 않고 영화 속 단 하나의 상상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압축된다. 푸치니의 아리아 ‘네순 도르마’가 흐르는 가운데 라몬은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를 달려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카메라는 그의 시점이 되어 갈리시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날아간 뒤 훌리아와 입을 맞춘다. 영화 전체에서 라몬의 몸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지는 장면은 이 순간이 유일하다. 실제로 아메나바르 감독은 이 장면을 라몬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으로 설명했으며,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그의 몸과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것이 오직 상상 속에서만 허락된다는 사실은 라몬이 되찾고 싶어 하는 자유가 걷고 뛰는 신체적 자유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감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선택을 인간의 자유로 인정한다면,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 역시 개인의 의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라몬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후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며 일상적인 행동은 물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오랜 시간 이러한 삶을 살아온 라몬에게 고통은 단순한 신체적 불편함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고, 삶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 자체가 고통
- 시유레
- 2026-09-07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2번, 책으로 1번 봤다. 영화로 봤을 때의 감동이 더 컸기 때문에 영화로 비평을 쓰려한다. 마지막을 어기의 이야기로 장식하기 위해 누나인 비아의 이야기로 먼저 시작하겠다. 비아는 가족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갔다. 그녀도 물론 동생을 아끼고 좋아했지만 온 가족의 관심이 안면기형을 갖고 있는 동생한테 쏠리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티 내지 않고 꿋꿋하게 참아냈다. 비아가 뭐라고 하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할 걸 알기에 짐이 되지 않으려 늘 노력했다. 비아도 아직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일 뿐인데 투정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녀가 안타까웠다. 성숙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렇지만 비아의 행동이 옳은 행동일까? 맞다, 아니다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지만 비아 혼자 그 모든 상처를 짊어지는 것은 가족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짐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면 그녀의 상처가 조금은 치유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큰 문제는 비아의 친구 미란다와의 일이었다. 미란다는 비아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는데 그러다 보니 비아의 가족과도 잘 알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란다는 여름 캠프를 갔다 오더니 비아를 피하게 된다. 비아는 당황했고 나 역시 그녀의 태도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그러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유가 나온다. 미란다는 부모님의 이혼 등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다, 캠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비아의 따뜻한 가족(어기 포함) 이야기를 마치 자기 가족의 이야기인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자신에게 동생을 위하는 희생적인 누나라는 프레임을 덧씌워 사람들의 동정을 얻으며 결핍을 채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비아를 마주하기 부끄럽고 미안해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미란다의 행동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미란다는 비아의 화목한 가족이 부러웠던 것이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비아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고 생각해봐도 좋겠다. 물론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도, 잘한 선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비아에게 말하고 사과했으면 됐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란다에게는 그 방식이 최선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 보면 어떨까? 미란다도 그저 가족의 사랑이 고팠던 미숙한 아이였으니까. 둘의 화해는 학교 연극에서 이루어진다. 미란다가 주인공을 맡고 그 대역을 비아가 맡았다. 미란다가 객석에 온 비아의 가족을 본 후, 비아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며 무대에 서게 해 줬다. 비아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미란다의 진심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미란다는 여전히 그들과 잘 지내기를 바란 것 같다.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주던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 친구의 가족을 소재로 삼아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미란다가 현재, 주인공이 될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이 한 번도 가족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비아에게 자리를 넘기며 그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 캔디
- 2026-08-30
서론1) 탐구 배경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이 질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질문에 한 번에 답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묻는다면 머리가 아팠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재밌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그래서 역사를 좋아했고,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었다. 카뮈의 소설은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 알베르 카뮈처럼 나의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면, 나의 철학을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 욕망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남자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주위에 소설을 쓰는, 아니 글을 쓰는 친구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노트북에 초고는 쌓여만 갔지만 그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은 무의미했다. 학교 내에서는 백일장을 포함하여 이러한 문예행사가 아예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고립된 무인도에 갇혔다. 그때 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소설은 나의 생각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문학에 대한 교류를 하지 못하여 외로움을 겪던 차에 나는 온라인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약 100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나는 소설을 쓰기 보다는 작품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토론을 하던 중 어떤 사용자가 민음사 책의 표지 하나를 올렸다. 이름은 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파란색 표지에 그려진 한 외로운 노인과 안개. 나는 그 사진에 매료되었다. 그것이 김승옥과의 첫 만남이었다. 민음사는 원래 외국 문학 전집만 발행한다고 생각하고, 한국 문학도 나오는지는 몰랐기에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바로 구매했다. 그리고 첫 문장은 나의 마음을 점령하기에 충분했다.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리는 그의 문체는 문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나에게 모범답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문체보다도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형성한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세계였다. 이라는 작품에서 드러난 '자기세계'의 개념 이후 현대인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멸망해가거나 몰락하는 인물은 분명 무언가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한 세계는 무엇일까. 마치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김승옥 작가의 소설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답을 절대 정해주는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만 하더라도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질문만 던지지는 않는다. 실존주의도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칸트도 인간 존엄성에 따른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김승옥은 항상 소설을 애매하게 끝낸다. 의 주인공 ‘나‘는 윤희 누나가 범죄에 연루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놓고서는 그저 마을 주위를 서성이며 여러 생각을 하며 끝이 난다. 소설 에서는 주인공의 욕망을 결국 실현하지 못한 채로 다시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김승옥은 이런 애매한 상황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 노스텔지아
- 2026-08-23
유사한 소재와 다른 서술 조세희의 문학세계가 투쟁과 서늘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면, 윤흥길의 문학 세계는 다정함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결말부는 “꼭 죽여.”로 끝난다면 윤흥길의 『장마』는 “모든 걸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니까. 또한 난장이의 딸은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사람을 증오하는데,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철거민 입주 권리를 산 사람이다. 연작에서는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권력자를 절대적 악인으로 상정하고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를 구성함으로써 권력의 폭압에 대한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윤흥길은 철거민의 광주대단지 입주권을 구매한 엘리트층의 권씨라는 인물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상황을 묘사한다. 권씨는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을 기리면서 정장과 구두를 신고 공사장에 출근한다. 권씨가 자신을 도시빈민과 구별짓는 태도나 철거민의 입주 권리를 구매한 점에서는 전형적인 경제적 약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매일 구두를 닦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며, 조세희의 작품들이 드러낸 사회적 모순은 결국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권씨처럼 연민하게 되는 개인들의 집합일 수 있다.조세희뫼비우스의 띠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_30p.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살기가 너무 힘들다.”아버지가 말했었다.“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지섭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 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될 거다.” _72p.(…)“로스 씨의 편지를 받기 전에 보여줄 것이 있다. 지섭에게 말해서 쇠공을 쏘아올려 보여주마.” 집이 무너진다는 것. 지금은 죽은 여자가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새겨진 채 굳은 시멘트, 오랜 시간이 걸려 손수 지은 집, 집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숭늉을 먹는 식구들.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붕괴, 고유한 기억이 담긴 공간이 소멸하고, 빈터가 되고, 수몰되는 순간은 한국 문학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현진건의 『고향』, 문순태의 『 징 소리』등 20세기 문학은 전통 사회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의해 해체되어야 했던, 서구화와 근대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김애란의 『 침묵의 미래』는 집과 고향과 거기서 쓰이던 언어의 붕괴가 한국 사회를 넘어서 세계의 섬과 숲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로 시선을 확장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고향과 언어를 ‘중앙’에게 빼앗기고 중앙이 만든 집에 살며 중앙의 언어를 쓰게 되는 것은 비단 소수 민족 사회뿐 아니라 도시적 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다.남아
- Marllin Zero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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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님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A라는 근거를 통해 B라는 명제가 나오는 합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겁니다.
맞아요. 일제시대때 일본애들이 왜 국어교육을 탄압했겠어요. 언어는 그 사회의 얼을 반영해요. 지구상에 언어가 6000~7000개 있다고 할때 언어마다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죠. 어떤 언어는 형용사가 많고, 어떤 언어는 문장구조에서 동사가 먼저 나오고, 어떤 언어는 사냥용어만 많기도 하죠. 이런 것들은 언중의 생활형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 자체가 그 사회의 고유한 생활모습을 나타낸하고 할 수 있죠.
문제는 외래어와 뒤섞이고 있는 현재의 언어를 받아들인다고 했을때 이 경계를 어디까지로 허용해야 될까에 있지 않을까요? 김션님도 외국어한테 모국어만큼의 지위를 주자는 얘기가 아니라 현재의 모국어, 즉 국어의 순수성을 생각했을때 지금의 국어가 100%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언어가 아니며, 현재의 국어가 외래어와 뒤섞인 점이 많으나 그 점을 조화롭게 받아들이자는 거 맞죠?
그렇다면 어디까지나 그 경계를 명확히 해야되지 않을까요? 물론 언어의 역사성이란게 있죠. 언어는 불변하지 않아요. 비단 언어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는 타문화를 만났을때 변화가 일어나죠. 지금 우리의 언어도 외래어를 만나서 이전의 국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요. 쉽게 생각해서 일본어 번역체나 영어 번역체와 같은 것들. 근데 이미 김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언어가 그 사회의 문화, 얼을 반영한다면 지금의 외래어가 뒤섞인 국어는 외래문화가 뒤섞인 지금의 우리문화를 반영하는 것이죠.
지금 우리나라의 전통문화가 외래문화들한테 밀려서 주체성을 잃고 있다고 주장하면 그건 또 너무 저만의 생각일까요? 언어의 형태 또한 바뀌어버린 한글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말은 사물보다 밴드음악을 좋아하는 지금의 청소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말처럼 들리네요. 물론 100% 순수성을 고집하는 것도 웃기는 소립니다. 당장에 애들이 교복은 한복이고, 음악은 사물이다. 외치는 것도 우스은 일이죠. 다만, 저는 지금의 시점이 외래문화와의 조화를 주장해야 되는 시기일까.. 오히려 우리것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