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할게요. 순수문학에 미래가 있나요?
- 작성자 Jeffery.K
- 작성일 201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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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18,195
일반 사람들은 '문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랄까. 나이 지긋하신 원로 소설가님들께서 이것저것 고지식하고 일상 생활에서 쏟아내는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글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글은 다가가기도 힘들고, 정말 딱 틀에 박힌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순수문학이랍시고 출판되고 있는 소설들은 정말 몇몇 작가가 아니면 잘 팔리지도 못하는 추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소설을 읽는 이유가 뭘까요? 자기 영혼에 살을 찌운다는 식의 대답이 있을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이유는 '읽는 즐거움'을 위해서일 겁니다. 물론 순수문학이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즐거움을 준다'라는 순 기능면에서만큼은 장르소설이 순수소설을 훨씬 앞서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출판산업이 굉장히 발전한 나라인 미국이나 일본을 보면 왠만큼 잘 팔리는 책은 거의 다가 추리,호러,판타지 등의 장르소설입니다.
글을 '잘' 쓴다. 그 잘쓴다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독자들을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더욱 잘 가둘수 있다'라고 정의합니다. 더욱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더욱 심오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답답하기 짝이없는 주제들은 논문에나 쓰세요. 소설의 본질은 즐거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때 저는 매드클럽 작가분들 전부가 이병주나 이수광 같은 딱딱한 역사소설을 쓰시는작가분들보다 훨씬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출판되는 책들을 보세요. 거의가 다 장르소설입니다. 장르소설은 비록 문학의 정도[正道]라는 것에서 떨어질 지는 몰라도 충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순수문학은 미래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문학의 본질은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즐거움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고, 괜히 진지한 주제를 다루어 독자들을 고민하게 하는 순수문학은 한국 출판업계의 독[毒]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르소설을 육성하여 세계 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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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인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맞부딪히는 지점에 놓여 있다. 특히 ‘존엄한 삶’이 무엇인지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안락사를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으로만 바라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이야기 된다. 결국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죽음의 선택 자체를 넘어,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는 실제 인물인 라몬 삼페드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메나바르는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은 물론 편집과 음악까지 직접 맡았는데, 한 사람의 시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은 라몬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이 영화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라몬은 젊은 시절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를 움직일 수 없게 된 뒤 오랜 시간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의 방에 난 창문은 하필 그가 사고를 당한 바다를 향해 있는데 이 창문은 영화 내내 반복해서 등장하며 라몬에게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자 동시에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사고의 기억을 매일 떠올리게 하는 이중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고,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현실 속에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생각뿐만 아니라 법과 사회가 바라보는 생명의 가치와도 충돌한다. 영화는 라몬의 선택을 단순히 옳거나 그른 것으로 판단하기보다, 그가 왜 죽음을 선택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라몬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하는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몬에게 죽음은 단순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에 가깝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살 수 있는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라몬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 개념은 대사로만 설명되지 않고 영화 속 단 하나의 상상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압축된다. 푸치니의 아리아의 ‘네순 도르마’가 흐르는 가운데 라몬은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를 달려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카메라는 그의 시점이 되어 갈리시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날아간 뒤 훌리아와 입을 맞춘다. 영화 전체에서 라몬의 몸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지는 장면은 이 순간이 유일하다. 그것이 오직 상상 속에서만 허락된다는 사실은 라몬이 되찾고 싶어 하는 자유가 걷고 뛰는 신체적 자유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감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선택을 인간의 자유로 인정한다면, 자신의 삶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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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tr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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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의의가 즐거움에 있다는 데에는 글쓴이님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글쓴이님과 저는 그 ''즐거움''의 의미에 대해 이견이 있을 것 같군요. 글 쓰신 분은 사람들을 진지한 주제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을 독이라 생각하시는데도 소설에 흥미를 가지고 계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요. 소설보다는 TV 시청이나 게임을 하시는 게 님이 추구하는 즐거움에 더 적합한 일이 아닐까요? 장르문학 또한 대부분 -매드클럽 작가분들 또한 - 그 이면에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담는 걸 시도하는데 님은 그것을 독으로 받아들이니까요.
솔직히 저는 순수문학을 훨씬 더 많이 읽습니다. 순수문학의 깊음과 교훈에 대한 즐거움도 있거든요. 너무 개인의 취향만을 고려해 말하지 마시고 넓게 보자구요. 쓴글에서도 ''''-라고 생각합니다,있다고봅니다,''''와 같은 말을 많이쓰신걸 보아하니 너무 개인적인 생각같군요.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것도 좋은데 너무 자신의 생각만 가지고 ''''순수문학은 미래가 없다.''''는 식의 극단적이고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무슨 정립화된 규칙마냥 말하시는건 좋지 않다고 봅니다.
즐거움이란 것을 단지 재미로서의 즐거움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물론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을 수 있지만 분명 문학을 읽고 하는 고민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때론 소설 안에서 얻는 어떤 깨달음에 의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구요. 물론 즐거움 자체를 잊은 지나치게 실험에만 몰두한 소설은 저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쨌든, 소설을 통해 얻는 즐거움=스토리상의 재미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문학은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골고루 담아야한다는 생각입니다. 골라 먹을 수 있게요.
순문학과 장르문학으로 나뉘어 싸우고들 있는데 양쪽 의견 다 편파적이고 짜증나는 글이 많네요. 분명한 건, 자칭 엘리트 문학이라며 순문학 일각에서는 스스로를 올리는 짜증나는 행위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인생 전반을 살펴 보게 하는 작품들도 분명히 있다는거죠. 잘르문학도 마찮가지로양판소라 불리는 쓰레기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좋은 작품은 많습니다.
더구나, 최근 경향은 순문학은 장르문학으로, 장르문학은 순문학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군요. 순문학을 까시는 분은 순문학의 젊은 작가들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장르문학을 까시는 분은, '거울'이란 웹진을 추천합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