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 작성자 희희희
- 작성일 201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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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0. 불쌍한 인생
난 올해로 만 17살, 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교의 고3 수험생이 되었다. 겨울방학이지만, 그리고 보충수업을 거부하고 집에 틀어박혀 매일 하릴없이 영화를 보는 게 일이지만,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만큼이나 걱정과 고민이 많다. 주변에서는 등급, 점수, 대학, 선택과목, 독서실 등의 얘기로 그득하다. 내가 그런 화두를 전혀 즐기지 않음에도 이제 고3이 되었다는 죄목(?) 하나로 어쩔 수 없이 나누게 되는 이야기 소재들이다.
지나친 자기애는 이기주의로 전락하기 쉽고, 나 또한 별 것 아닌 것에 자기연민을 과하게 불어넣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나는 내가 정말 불쌍하다고 느낀다. 내 친구들 또한 자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끔찍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삶을 불쌍한 삶, 안타까운 삶으로 규정하고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또 사는 것이 원래 고통의 연속이자 불행이라고 쳐도 이건 좀 슬프다. 행복을 추구해야 할 인간이, 더군다나 이제 열일곱 열여덟인 우리들이 벌써부터 우리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왜인지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래. 우리가 늘 당연시 하며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혹은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타협했던 것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들을 무시당했다. 그 무시는 은폐된 채로. 그리하여 그 종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더욱더 굳건하고 탄탄히 유지해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별 것 아닌 것이 절대 아닌데도 ‘별 것 아닌 문제’로 치부되고, 오히려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듯 여겨지는 이 사회를 보며 매일 울음을 삼키는 것도 이제는 신물 난다.
1. 교육제도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라의 교육제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 입학의, 대학 입학에 의한, 대학 입학을 위한’ 이 나라의 교육제도 말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서열화 되어있다. 말 그대로 ‘학벌사회’다. ‘스카이’, ‘인서울’, 심지어 ‘지잡대’라는 용어들만 봐도 대학으로 개개인의 직위를 나누고 차별을 두는 이 사회의 풍조를 엿볼 수 있다.
물론, 학생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저절로 대학을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점수를 받아오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이 사회가 학생에게 묻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른들에게 여쭤보고 싶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배웠니?”, “그걸 공부하면서 어떤 걸 생각하게 되었니?”라고 물은 적이 많은지, “몇 점 받았니?”, “몇 등 했니?”,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니?”보다 많은지. 가치가 전도 되었다. 이런 교육에서 나온 숫자 몇 개가 한 개인의 지적능력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숫자로 입학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또 엇비슷한 수치화된 자료가 나의 남은 인생을(정확히 말하자면 계급과 신분을) 규정짓는다.
나는 우리의 삶이 진짜 배움과 참교육을 갈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녕 내가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대안학교’와 ‘혁신학교’, ‘홈스쿨링’과 같은 새로운 교육에 대한 논의도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대한민국의 60만 명에 육박하는 수험생들이 수능 시험을 보고 대학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도 고단하다. 한 교실에 적어도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차례로 줄 세워지며, 등수의 앞자리 수를 줄이기 위해 영어단어를 몇 개라도 더 암기해야 하고, 수학 공식을 더 외우는 경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너희의 경쟁 대상은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아니라 전국의 아이들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계속해서 토해낸다. 그 토사물을 꾸역꾸역 내면으로 집어넣으며 악착까지 버텨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없을 것이다. 뭔가 기형적이고 파행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를 행복하게 공부시킬 수 있다는 ‘대안학교’에 들여보내고 싶어도, 아직 이 사회의 시선들이 곱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애가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할까봐 두려워 포기한다.(물론 그런 부모들보다 ‘특목고’와 ‘자사고’에 아이를 들여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훨씬 더 많겠지만.) 교사들은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들만 되풀이하는 타성에 젖은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어른들 밑에서 가장 고통 받는 아이들은, 무슨 말이라도 할라 치면 묵살 당하고, 매를 맞는다. 참아라, 견뎌라, 조금만 버텨라, 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도 물러설 수가 없어 그 잔인한 경쟁의 장에, 모순적인 살생 게임에 (아무리 큰 회의를 느낀다 하여도 결국엔) 들어서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불합격을 하여 절망하고, 그의 불합격을 전제로 한 나의 합격은 ‘지난 노력의 산물’이자 ‘아름다운 결과’로 둔갑된다. 다른 길이라는 게 없다. 다른 길이 있다 해도, 그 길을 걸을 경우 대부분이 무시 받고 외면당한다. 각 개인의 재능과 관심을 모른 척하는 이 사회의 문제를 다름 아닌 학교에서 가장 잘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 가지 못해도, 혹은 가려 하지 않아도 무시 안 받고 자신의 꿈을 인정받는 사회여야 하는데, 이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기생’, ‘예체능 학생’이라면 공부를 못해서 그 길을 선택했다고 보거나,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보는 현실이 그러하다. 결국 이 사회에서 재능은 두 가지 차원으로서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발견되지 못하거나, 밟히는 차원으로서.
김규항이 말했듯 “보수엘리트 부모들은 아이가 일류대학생이 되길 바라고, 진보엘리트 부모들은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학생이 되길 바란다.” 결국 진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거나 소위 잘 나가는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면 용돈을 더 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영락없는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인 것이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아이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하길 닦달하는 분들에게 또 하나 여쭤보고 싶다. 그 공부가 지극히 교과서에 나오는 협소한 내용들을 주입식으로 단순 암기하며 밤 10시, 늦으면 12시까지 학교에 남아 ‘감독’받으며(나는 ‘감시’라고 생각하지만.) 자습하게 하는 것이면 문제 아닌가? 학교 마친 그 늦은 밤에도 또 과외를 받고 학원을 가는 데도 여전히 성적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하루하루 줄지 않고 오히려 더해진다면 문제 아닌가? 그 공부가 이미 점수 올리기, 등수와 등급 올리기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문제 아닌가? 대체 어디까지 가야, 얼마만큼 해야 ‘이건 문제다’라고 인정할 것인가?
아이들은 점수가 잘 나온 것에 기뻐하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잘 활용해서 기쁘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수학을 정말로 싫어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많은 문제들을 떠안고 있는 교육제도에서 나온 수학’이 싫기도 한 것이다. 시험 거부, 대학 거부 말이 많지만 애초에 그것들이 제 기능과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했다면, 우리의 교육이 시험과 대학에 천착하지 않고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체제와 환경이었다면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사회는 자발적으로 시험 응시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지 않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는 인식이 기저에 있는 사회겠지.) 내가 매일을 고민하고 우는 이유는, 그냥 ‘시험’, 그냥 ‘대학’ 때문이 아니라 이런 교육제도에서 파생된 ‘이런 시험’, ‘이런 대학’이여서다.
2. 두발과 복장규제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둘째인 ‘두발과 복장규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최근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어렵사리 성사되면서 학교에서의 민주주의가 조금이나마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이대영 부교육감에 의해 재의 요구가 신청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인권감수성이 얼마나 수준이 낮은지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교육’을 연구하고 논한다는 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 더 무섭다. (물론 학교의 교사들을 통해 그런 무서움을 느낀 적이 많긴 하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학생도 사람이고,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가 되겠다. 근데 그 말이 다수에게 동의를 얻는 데까지 너무도 오래 걸렸다. 그 뿐만 아니라 ‘학생도 사람이고,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의제기마저 나오는 현실!
그 현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전히 ‘교칙’, ‘규정’이랍시고 전국의 학교들에서 매서운 힘을 발휘하고 있는 두발과 복장규제에 대해 논하고 싶다. 두발과 복장규제는 명백한 기본권 침해다. 헌법에 명시된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행복추구권으로써 ‘개성 발현권’에 모두 위헌이다. 게다가 ‘기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이다. 헌법에 명시된 바로는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법률로써 제한 가능하다’고 하는데, 두발과 복장규제가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할 리는 전혀 없고, 무엇보다 ‘법률’로 만들어진 경우에만 제한이 가능하다지 않은가.
교육제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언급했듯, 교사들은 이 나라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학교 내의 반인권적인 규정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레퍼토리로 응수한다. 이미 정해진 것이니 ‘안 따르면 너희들만 손해’, ‘우리 때도 그랬다’라는 식이다. 듣다보면 참 어이가 없다. 잘못 됐으면 고쳐야지 따르긴 왜 따르라는 건지. 그렇게 고치는 걸 미루고 따르기만 하다가 후세대까지 그걸 물려주려고 그러는 모양이다. 당신들의 기성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당신들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당신들 때도 그랬고 지금도 이런 게 잘못된 것 아닌가? 그래서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학교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두발과 복장규제가 불가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난 애초에 성적과 두발-복장에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관련 있다고 치더라도, 성적을 위해 인간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오류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공부만 하는 기계로 보는 인식이 기저에 있으니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개개인의 개성을 짓밟고 규제를 강요하는 일종의 전체주의 논리를 내세우며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와 외투 색깔까지 지정해주는 아주 ‘친절하신’ 우리나라 학교들. 공부를 교과서와 문제집에 나오는 지극히 협소하고 획일적인 개념으로서밖에 생각하지 않으니 이런 인권탄압 문제에서도 모자란 인권감수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맞는 옷을 입고 내게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찾는 것, 어떻게 입으면 옷맵시가 사는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또한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다운 미(美)를 추구하는 것도 다 공부인데 말이다.
3. 체벌과 상벌점제
최근, ‘학교폭력’이 전보다 훨씬 부각되면서 학교 내의 집단 따돌림과 폭력을 근절시켜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애들은 매로 다스려야한다’, ‘폭력으로 군림하는 자에게는 폭력이 답이다’라는 댓글들이 다수의 네티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을 정도다. 물론 나는 ‘학교폭력’이 이슈화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고 논의가 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분명 중요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식의 방향에는 조금 회의적이다.
학교는 이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다름’에 대해 배척하는 정도가 다른 사회보다 심하다. 그런데 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왕따문화’는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어린 것들이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이들을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오늘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다가 한 역사학자의 트윗을 읽었는데, 맞는 말이다 싶어 인용해본다.
‘어린 일진’은 100원 주면서 “빵이랑 이것저것 사 오고 나머지는 너 가져”라고 한답니다. 생계비도 안 되는 임금 주면서 궂은 일은 다 시키는 ‘어른 일진’이 아니면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모든 것은 어른들 탓이다! 라는 맹목적인 원망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각 가정과 학교를 보면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쉬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훈계’랍시고 ‘어른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여기지 않는가.
체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체벌은 순간 일어난 문제를 손쉽게 매듭짓고 교사가 아이를 편하게 통제하기 위한 한시적 대책으로서-대책도 아니지만.- 자행되어왔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라는 것에 기인한다고 보는데, 결국 체벌은 ‘나이 혹은 신분에서 소위 연장자나 강자가 나이 적은 사람이나 약자를 때리는 것이 쉽게 가능하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의식을 당연시하며 그것에 쉽게 편승함으로써 촉발된 일종의 ‘폭력’이다. 친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장난 식의 주먹다짐도 아니고, 친한 사이더라도 가끔은 진심으로 화가 날 때가 있는데, 학교에서 벌어지는 체벌의 대부분은 그런 수준에서 그치는 것도 아닐뿐더러, ‘교육현장’이라는 곳에서 그 행위를 무탈하다고 여기며 행사하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 것인 걸까? 오히려 반교육적, 비교육적 행태가 아닌가.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학창시절 체벌을 받고 자신의 행위에 반성한 적이 있었느냐, 라는 물음에 거의가 ‘없었다’고 답했다. 나 또한 되돌아보면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누가 누구의 잘못에 대해 ‘때린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왜 나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규제가 ‘맞아야한다’까지 연장 되는 것인지. 결국 잘못을 한 뒤 체벌을 받고 다시는 그 잘못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단순히 체벌을 피하기 위해서지 ‘내가 잘못 했구나’하고 ‘반성’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란 말이다.
체벌이 문제로 부각되자 대안으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생활평점제(상벌점제)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본질적으로는 체벌과 다를 바가 없다. 규정들을 정해놓고 아이들의 생활, 태도, 모습에 점수를 매긴다는 것이다. 근데, 누가 누구의 행동에 벌을 주고 상을 주고 한다는 건지? 18년간 성장하며 만들어져온 ‘나’라는 수백 수천 명의 인격체를 겨우 학교와 기성세대들이 보기 좋은 아이로 길들이기 위해 만든 제도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은 아무리 추워도 학교에서 지정한 날짜부터 자켓을 입어야 하고, 체육복과 교복을 상하의로 나눠 입어서는 안 된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교육’이고, ‘질서’를 가져다주는 것이란 말인가!
상벌점제는 결국 체벌로 자행되던 악습을 명문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에 더해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규정들을 상정하고서는 그에 미치지 않으면 ‘니가 어떤 환경과 사정과 성격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규정 어겼으니 가차 없이 벌점 1점, 탕탕탕! 빠이!’로 아이들의 자유와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을 탄압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체벌을 금지한다고 상벌점제를 시행했으면서도 교사들마다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 상쇄 프로그램에서 한 시간 동안 눈 감고 의자에 서 있게 하는 간접체벌을 한 후 청소를 시키는 등의 부차적인 문제 또한 엿보인다. 이름 바뀌고 표면적인 방식도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체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4.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쓰면서 자주 분노했다. 나는 나의 삶이 가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 나라의 어른들과 학교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길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걷는 중인데, 갑자기 내 길에 쳐들어와서는 마라톤을 뛰어보라고 종용한다. 난 원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내가 불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나는 내가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자신들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무엇보다 지금 내 앞에 닥쳐있는 교육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피력하고, 대안을 모색할 것이다.
수능까지 열한 달이 남았지만, 그런 것 상관없이 나는 내 삶에 주어진 길을 더 열심히 걸을 생각이다. 가다가 심심하면 옆에 세워진 나무 이파리도 보고, 향그러운 꽃내음도 좀 맡아보고, 벤치에 앉아서 낮잠도 좀 자다가, 그렇게 끝으로 도착하고 싶다. 내 인생, 내가 행복하고 싶다. 더 이상 우리 삶을 갉아먹는 것들에게 내 인생을 팔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조금이나마 사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오기는 올 런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조금이나마 더.
*비문이 많아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네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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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문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이 작품이 잘 읽힐지 모르겠다. 으음 그래도, 이 시를 한 편의 소설이라고 생각해 봐. 두 사람은 초능력을 가진 누군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그 초능력은 보잘 것 없는 초능력이야. 우산을 쓰면 자신에게만 비(슬픔)가 내리고, 우산을 접으면 온 세상에 비가 내리는 능력이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그는 비를 맞아야만 해. 외롭겠지. 혼자만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거야. 남들이 보기엔 길을 가다가 넘어진 것처럼,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그런 얘기에 빠져 있던 ‘너’에게 ‘나’는 말해. “외롭다는 거지? 아니, 그 사람 말고, 너 말이야.”“너 집이 어디야? 내가 데려다줄게.” 그 말에 ‘너’는 집(안식처,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없다며 우물쭈물하게 대답해.그런 ‘너’에게 ‘나’는 흔쾌히 우산을 빌려주지. 영원히 비가 내리면 어떡할지 걱정하는 ‘너’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 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다고. 온 세상이 흐린 법도 없다고. 그러니까 지금의 감정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영원히 ‘외로우면’ 어떡하지, 그 마음을 비 내리는 풍경에 빗대 말한 ‘너’에게, ‘진짜 비’를 예시로 든 ‘나’가 ‘너’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괜히 퉁명스러워져선 “내가 그걸 모르겠어?” “이건 시(비유)라고.” 대답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 “아니, 이건 대화야.”여기서 대화는 무슨 뜻일까?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때 대화의 방식을 사용하잖아. 대화를 하면서 곁에 함께 있어주잖아. 그러니까 대화는 위로라는 뜻이야. 더불어서 좀 크게 보면 ‘대화’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해. 이건 ‘시’가 아니라 ‘대화(시 제목)인데? 하는, 맛이 나는 농담이기도 한 셈이지.어쨌든 세상에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거나 상관 없이, 혼자만 늘 비를 맞는 듯하고, 영원히 비를 맞을 것만 같은 외로움 속을 걷는 너를 위로하는 ‘대화’의 뜻 아닐까?즉 이 시는 ‘위로’를 말하는 시인 거지.‘ 너’는 ‘나’가 건넨 우산을 쓰고, 비를 맞지 않은 채 걸어가. 우산은 빗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슬픔을 견디는 힘이야. 그렇게 함께 가던 중 우산을 파는 편의점을 발견한 너는, 너만의 우산을 쓰고, 각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지. 인생의 길 속에서 우리는 가끔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겠지. 그 길을 혼자서 갈 수 없다면 함께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렇게 걷다 보면 네게도 너만의 힘이 생길 거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기를 수 있겠지. 편의점에서 새 우산을 구입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위로를 얻은 상대와 늘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시절인연이라는 단어 알지? 잠시 같은 마음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평생 인생의 길을 똑같이 걸을 수는 없어. 우리는 그 상대와 헤어질 수도 있으며, 어쩌면 시 속의 ‘너’와 ‘나’처럼 영영 다신 마주칠 수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두 사람이 함께 빗길을 걸어갔던 건, 좁은 우산을 나눠 쓰며 어깨나 등이 조금씩 젖으면서도 위로를 나눴던
-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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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2024년, 이상문학상의 주관사 은 재정난으로 인해 휴간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상문학상의 주관사도 문학사상에서 다산북스로 변경되고, 표지 디자인도 바뀌게 되었다. 이상문학상이 가지는 한국 문학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문학상 하면 거론되는 3대 문학상은 다음과 같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물론 ‘상’ 하나가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이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도 아니고, 작가는 상 하나를 받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상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적어도 현재 한국 문학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한국 문학을 접하는 일반 독자의 경우에도 현대 한국 소설을 읽기 위해서 문학상 작품집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예지와 같은 문학 잡지들의 경우에는 일반인이 접하기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로 문학상 작품집이 독자들의 첫 현대 한국 문학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이상문학상이 2026년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코멘트를 보던 중 흥미로운 코멘트를 발견했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겼다. '순수 문학은 더 이상 대중문학이라 볼 수 없는 것일까?'“한국 소설에서 부족했던 순전한 재미 요소가 느껴진다. 장르 소설 순문학 나누는 거 웃긴데 장르 소설 같은 면이 있어서 재밌음. 글고 눈과 돌멩이는 너무 조은 순소설 같다. + 뒤에 작가 인터뷰가 있는데 소설가를 하나의 셀럽으로 만들기 위한 혹은 하나의 소설을 진득하게 같은 느낌이었음. 다른 마케팅이 시작된 느낌. 민음사 tv로 촉발된.. 그리고 웃기게도 나는 모든 사람이 책을 중요히 여긴다고 살다가 이게 아주 극소수의 리그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된다. 대중문학이라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일단 이 코멘트는 사용자 한 명의 의견으로 한국 문학 전체를 대표하진 못한다. 그러나 한 독자의 의견으로 충분히 얻어갈 수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하나씩 문단을 끊어 보면,1) 한국 소설에서 부족했던 순전한 재미 요소가 느껴진다.-> 이 사용자가 바라 본 한국 소설들은 아마 매우 최근의 것으로 추측되는데, 재미 요소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2) 장르 소설 순문학 나누는거 웃긴데, 장르 소설 같은 면이 있어 좋았음.-> 최근 자주 거론되는 문제인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소설집은 장르 문학처럼 보이는 소설도 많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3) 그리고 웃기게도 나는 모든 사람이 책을 중요히 여긴다고 살다가 이게 아주 극소수의 리그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된다. 대중문학이라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순수 문학은 극소수의 독자들이 읽고 있다고 인식하며, 순수 문학이 대중 문학적이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두 문구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1. 한국 문학은 재미 요소가 비교적 덜하다. 2. 그럼에도 이번 작품에는 장르 문학적 요소가 있어 더욱 재미를 더한 것 같다. 3. 그러나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순수 문
- 노스텔지아
- 2026-07-12
40년대 샹송 가수와 파리를 노래한 목소리, 장밋빛 인생을 꿈꾼 '작은 참새',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Nous aurons pour nous l'éternité 우리에게는 영원이란 시간이 있어요 Dans le bleu de toute l'immensité 끝없이 펼쳐진 저 푸른 하늘 속에서 Dans le ciel, plus de problème 하늘에서 걱정이란 있을 수 없어요 Mon amour, crois-tu qu'on s'aime 내 사랑, 우리의 사랑을 믿어요 Dieu réunit ceux qui s'aiment 하느님은 연인들을 다시 이어주시기에 " - 1950년에 발매된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 2024년에 셀린 디온이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연함.■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연하는 셀린 디온https://www.youtube.com/watch?v=9wQ-GYnKPYM■셀린 디온의 공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2010년작 '인셉션'의 삽입곡으로 알려진 곡, 'Non, je ne regrette rien'.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이 곡은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들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인셉션'의 여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코브'의 연인 '말'을 연기한 프랑스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여배우, 마리옹 꼬띠아르는 2007년에 이 노래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인생을 다룬 영화, '라 비 앙 로즈'의 주연을 맡게 된다. 비참하고 서글픈 에디트 피아프의 일대기는 올리비에 다앙 감독의 비선형적 편집 방식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절정의 무대 뒤에서 곧바로 약물과 병과 마약에 찌든 노년의 육체로 우리를 내던지고, 다시 비참하고도 낭만적이었던 유년의 기억으로 시공간을 무작위로 교차(Non-linear)시킨다. 이러한 비선형적 편집은 관객에게 극심한 감정의 멀미를 유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이야말로 평생 고독과 중독, 신체적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던 피아프의 내면을 가장 날것 그대로 체감하게 만드는 영리한 장치가 된다. 가로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그녀의 파편들 속에서 관객들은 지금껏 알아오던 아티스트로써의 '피아프'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에디트'를 만난다.이 영화는 언뜻 보면 보통의 일대기 영화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가난하게 태어나고, 우연히 작곡가를 만나고, 찰나의 성공과 밝게 빛나는 스타, 연예계의 중심이 되어 부귀영화를 맛보지만, 결국엔 죄악에 빠져 허우적대다 결국에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 나처럼 음악가들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지켜봐 온 사람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닳을 대로 닳은 클리셰(cliché), 아니, 흔해빠진 전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감독이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전개를 제멋대로 휘어잡아, 독창적인 방식으로 동정의 눈물을 자극하고, 에디트 피아프가 대부분의 뮤지션들의 '보통' 정도의 비극을 지극히 뛰어넘는, 그녀가 노래한 '장밋빛 인생'(La vie
- 손석호erik1234
-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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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도 몇 가지 질문들에는 답변을 해야할 것 같네요. 먼저 낡은펜촉님께서 말씀하신, '체벌, 상벌점제도 아니라면 과연 어떤 방안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대안은 '체벌을 없애는 것(상벌점제를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어이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가장 강력한 대안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제 글에서도 분명히 나와있는 것 같네요. 저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에 의해 사람이 사람을 때릴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체벌은 반성하라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라고 때리는 것'에는 역으로 물음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제 글에도 나왔듯, 왜 그 잘못들에 대한 규제가 '때리는 것'이어야 하지요?
그리고 '체벌이 정신적 변화를 촉발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작금의 교육 현장에서 물리적 고통을 피하기 위한 일시적 위선, 고통을 받는 동안 쌓이는 내면의 상처를 낳는 부정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되겠습니다.'라는 윤스리님의 의견에도 동감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네요.
작은시계님께서 하신 몇 가지 질문들에도 답변하고 싶습니다. 교권에 대한 정의가 여러가지이긴 한데, 저는 '교사가 학생을 학문적 영역부터 인성적 영역까지 가르치는 권리'로 이해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또한 교권과 학생의 인권을 대립구도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이성적으로는 그래야 된다는 걸 알지만 개인적으로는 감정적으로 자주 선생과 학생을 대치시켜왔는데, 작은시계님의 질문을 통해 저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되었네요.)
그렇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껴왔던 이유는, 교권은 추락이니 붕괴니 누구라도 관심들을 가져주는 것 같은데, 학생의 인권은 아예 논의도 뭣도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게다가 글에서도 말씀드렸듯, 대부분의 교사들이 제도와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생들에게 굳이 강요하고,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호도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