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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 작성자 희희희
  • 작성일 2012-01-11
  • 조회수 31,753

 

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0. 불쌍한 인생

  난 올해로 만 17살, 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교의 고3 수험생이 되었다. 겨울방학이지만, 그리고 보충수업을 거부하고 집에 틀어박혀 매일 하릴없이 영화를 보는 게 일이지만,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만큼이나 걱정과 고민이 많다. 주변에서는 등급, 점수, 대학, 선택과목, 독서실 등의 얘기로 그득하다. 내가 그런 화두를 전혀 즐기지 않음에도 이제 고3이 되었다는 죄목(?) 하나로 어쩔 수 없이 나누게 되는 이야기 소재들이다.

  지나친 자기애는 이기주의로 전락하기 쉽고, 나 또한 별 것 아닌 것에 자기연민을 과하게 불어넣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나는 내가 정말 불쌍하다고 느낀다. 내 친구들 또한 자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끔찍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삶을 불쌍한 삶, 안타까운 삶으로 규정하고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또 사는 것이 원래 고통의 연속이자 불행이라고 쳐도 이건 좀 슬프다. 행복을 추구해야 할 인간이, 더군다나 이제 열일곱 열여덟인 우리들이 벌써부터 우리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왜인지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래. 우리가 늘 당연시 하며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혹은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타협했던 것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들을 무시당했다. 그 무시는 은폐된 채로. 그리하여 그 종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더욱더 굳건하고 탄탄히 유지해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별 것 아닌 것이 절대 아닌데도 ‘별 것 아닌 문제’로 치부되고, 오히려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듯 여겨지는 이 사회를 보며 매일 울음을 삼키는 것도 이제는 신물 난다.

  

  1. 교육제도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라의 교육제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 입학의, 대학 입학에 의한, 대학 입학을 위한’ 이 나라의 교육제도 말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서열화 되어있다. 말 그대로 ‘학벌사회’다. ‘스카이’, ‘인서울’, 심지어 ‘지잡대’라는 용어들만 봐도 대학으로 개개인의 직위를 나누고 차별을 두는 이 사회의 풍조를 엿볼 수 있다.

  물론, 학생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저절로 대학을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점수를 받아오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이 사회가 학생에게 묻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른들에게 여쭤보고 싶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배웠니?”, “그걸 공부하면서 어떤 걸 생각하게 되었니?”라고 물은 적이 많은지, “몇 점 받았니?”, “몇 등 했니?”,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니?”보다 많은지. 가치가 전도 되었다. 이런 교육에서 나온 숫자 몇 개가 한 개인의 지적능력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숫자로 입학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또 엇비슷한 수치화된 자료가 나의 남은 인생을(정확히 말하자면 계급과 신분을) 규정짓는다.

  나는 우리의 삶이 진짜 배움과 참교육을 갈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녕 내가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대안학교’와 ‘혁신학교’, ‘홈스쿨링’과 같은 새로운 교육에 대한 논의도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대한민국의 60만 명에 육박하는 수험생들이 수능 시험을 보고 대학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도 고단하다. 한 교실에 적어도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차례로 줄 세워지며, 등수의 앞자리 수를 줄이기 위해 영어단어를 몇 개라도 더 암기해야 하고, 수학 공식을 더 외우는 경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너희의 경쟁 대상은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아니라 전국의 아이들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계속해서 토해낸다. 그 토사물을 꾸역꾸역 내면으로 집어넣으며 악착까지 버텨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없을 것이다. 뭔가 기형적이고 파행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를 행복하게 공부시킬 수 있다는 ‘대안학교’에 들여보내고 싶어도, 아직 이 사회의 시선들이 곱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애가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할까봐 두려워 포기한다.(물론 그런 부모들보다 ‘특목고’와 ‘자사고’에 아이를 들여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훨씬 더 많겠지만.) 교사들은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들만 되풀이하는 타성에 젖은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어른들 밑에서 가장 고통 받는 아이들은, 무슨 말이라도 할라 치면 묵살 당하고, 매를 맞는다. 참아라, 견뎌라, 조금만 버텨라, 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도 물러설 수가 없어 그 잔인한 경쟁의 장에, 모순적인 살생 게임에 (아무리 큰 회의를 느낀다 하여도 결국엔) 들어서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불합격을 하여 절망하고, 그의 불합격을 전제로 한 나의 합격은 ‘지난 노력의 산물’이자 ‘아름다운 결과’로 둔갑된다. 다른 길이라는 게 없다. 다른 길이 있다 해도, 그 길을 걸을 경우 대부분이 무시 받고 외면당한다. 각 개인의 재능과 관심을 모른 척하는 이 사회의 문제를 다름 아닌 학교에서 가장 잘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 가지 못해도, 혹은 가려 하지 않아도 무시 안 받고 자신의 꿈을 인정받는 사회여야 하는데, 이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기생’, ‘예체능 학생’이라면 공부를 못해서 그 길을 선택했다고 보거나,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보는 현실이 그러하다. 결국 이 사회에서 재능은 두 가지 차원으로서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발견되지 못하거나, 밟히는 차원으로서.

  김규항이 말했듯 “보수엘리트 부모들은 아이가 일류대학생이 되길 바라고, 진보엘리트 부모들은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학생이 되길 바란다.” 결국 진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거나 소위 잘 나가는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면 용돈을 더 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영락없는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인 것이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아이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하길 닦달하는 분들에게 또 하나 여쭤보고 싶다. 그 공부가 지극히 교과서에 나오는 협소한 내용들을 주입식으로 단순 암기하며 밤 10시, 늦으면 12시까지 학교에 남아 ‘감독’받으며(나는 ‘감시’라고 생각하지만.) 자습하게 하는 것이면 문제 아닌가? 학교 마친 그 늦은 밤에도 또 과외를 받고 학원을 가는 데도 여전히 성적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하루하루 줄지 않고 오히려 더해진다면 문제 아닌가? 그 공부가 이미 점수 올리기, 등수와 등급 올리기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문제 아닌가? 대체 어디까지 가야, 얼마만큼 해야 ‘이건 문제다’라고 인정할 것인가?

  아이들은 점수가 잘 나온 것에 기뻐하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잘 활용해서 기쁘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수학을 정말로 싫어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많은 문제들을 떠안고 있는 교육제도에서 나온 수학’이 싫기도 한 것이다. 시험 거부, 대학 거부 말이 많지만 애초에 그것들이 제 기능과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했다면, 우리의 교육이 시험과 대학에 천착하지 않고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체제와 환경이었다면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사회는 자발적으로 시험 응시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지 않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는 인식이 기저에 있는 사회겠지.) 내가 매일을 고민하고 우는 이유는, 그냥 ‘시험’, 그냥 ‘대학’ 때문이 아니라 이런 교육제도에서 파생된 ‘이런 시험’, ‘이런 대학’이여서다.


  2. 두발과 복장규제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둘째인 ‘두발과 복장규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최근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어렵사리 성사되면서 학교에서의 민주주의가 조금이나마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이대영 부교육감에 의해 재의 요구가 신청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인권감수성이 얼마나 수준이 낮은지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교육’을 연구하고 논한다는 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 더 무섭다. (물론 학교의 교사들을 통해 그런 무서움을 느낀 적이 많긴 하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학생도 사람이고,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가 되겠다. 근데 그 말이 다수에게 동의를 얻는 데까지 너무도 오래 걸렸다. 그 뿐만 아니라 ‘학생도 사람이고,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의제기마저 나오는 현실!

  그 현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전히 ‘교칙’, ‘규정’이랍시고 전국의 학교들에서 매서운 힘을 발휘하고 있는 두발과 복장규제에 대해 논하고 싶다. 두발과 복장규제는 명백한 기본권 침해다. 헌법에 명시된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행복추구권으로써 ‘개성 발현권’에 모두 위헌이다. 게다가 ‘기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이다. 헌법에 명시된 바로는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법률로써 제한 가능하다’고 하는데, 두발과 복장규제가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할 리는 전혀 없고, 무엇보다 ‘법률’로 만들어진 경우에만 제한이 가능하다지 않은가.

  교육제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언급했듯, 교사들은 이 나라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학교 내의 반인권적인 규정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레퍼토리로 응수한다. 이미 정해진 것이니 ‘안 따르면 너희들만 손해’, ‘우리 때도 그랬다’라는 식이다. 듣다보면 참 어이가 없다. 잘못 됐으면 고쳐야지 따르긴 왜 따르라는 건지. 그렇게 고치는 걸 미루고 따르기만 하다가 후세대까지 그걸 물려주려고 그러는 모양이다. 당신들의 기성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당신들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당신들 때도 그랬고 지금도 이런 게 잘못된 것 아닌가? 그래서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학교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두발과 복장규제가 불가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난 애초에 성적과 두발-복장에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관련 있다고 치더라도, 성적을 위해 인간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오류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공부만 하는 기계로 보는 인식이 기저에 있으니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개개인의 개성을 짓밟고 규제를 강요하는 일종의 전체주의 논리를 내세우며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와 외투 색깔까지 지정해주는 아주 ‘친절하신’ 우리나라 학교들. 공부를 교과서와 문제집에 나오는 지극히 협소하고 획일적인 개념으로서밖에 생각하지 않으니 이런 인권탄압 문제에서도 모자란 인권감수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맞는 옷을 입고 내게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찾는 것, 어떻게 입으면 옷맵시가 사는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또한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다운 미(美)를 추구하는 것도 다 공부인데 말이다.

  


  3. 체벌과 상벌점제

  최근, ‘학교폭력’이 전보다 훨씬 부각되면서 학교 내의 집단 따돌림과 폭력을 근절시켜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애들은 매로 다스려야한다’, ‘폭력으로 군림하는 자에게는 폭력이 답이다’라는 댓글들이 다수의 네티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을 정도다. 물론 나는 ‘학교폭력’이 이슈화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고 논의가 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분명 중요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식의 방향에는 조금 회의적이다.

  학교는 이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다름’에 대해 배척하는 정도가 다른 사회보다 심하다. 그런데 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왕따문화’는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어린 것들이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이들을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오늘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다가 한 역사학자의 트윗을 읽었는데, 맞는 말이다 싶어 인용해본다.


‘어린 일진’은 100원 주면서 “빵이랑 이것저것 사 오고 나머지는 너 가져”라고 한답니다. 생계비도 안 되는 임금 주면서 궂은 일은 다 시키는 ‘어른 일진’이 아니면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모든 것은 어른들 탓이다! 라는 맹목적인 원망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각 가정과 학교를 보면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쉬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훈계’랍시고 ‘어른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여기지 않는가.

  체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체벌은 순간 일어난 문제를 손쉽게 매듭짓고 교사가 아이를 편하게 통제하기 위한 한시적 대책으로서-대책도 아니지만.- 자행되어왔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라는 것에 기인한다고 보는데, 결국 체벌은 ‘나이 혹은 신분에서 소위 연장자나 강자가 나이 적은 사람이나 약자를 때리는 것이 쉽게 가능하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의식을 당연시하며 그것에 쉽게 편승함으로써 촉발된 일종의 ‘폭력’이다. 친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장난 식의 주먹다짐도 아니고, 친한 사이더라도 가끔은 진심으로 화가 날 때가 있는데, 학교에서 벌어지는 체벌의 대부분은 그런 수준에서 그치는 것도 아닐뿐더러, ‘교육현장’이라는 곳에서 그 행위를 무탈하다고 여기며 행사하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 것인 걸까? 오히려 반교육적, 비교육적 행태가 아닌가.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학창시절 체벌을 받고 자신의 행위에 반성한 적이 있었느냐, 라는 물음에 거의가 ‘없었다’고 답했다. 나 또한 되돌아보면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누가 누구의 잘못에 대해 ‘때린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왜 나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규제가 ‘맞아야한다’까지 연장 되는 것인지. 결국 잘못을 한 뒤 체벌을 받고 다시는 그 잘못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단순히 체벌을 피하기 위해서지 ‘내가 잘못 했구나’하고 ‘반성’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란 말이다.

  체벌이 문제로 부각되자 대안으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생활평점제(상벌점제)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본질적으로는 체벌과 다를 바가 없다. 규정들을 정해놓고 아이들의 생활, 태도, 모습에 점수를 매긴다는 것이다. 근데, 누가 누구의 행동에 벌을 주고 상을 주고 한다는 건지? 18년간 성장하며 만들어져온 ‘나’라는 수백 수천 명의 인격체를 겨우 학교와 기성세대들이 보기 좋은 아이로 길들이기 위해 만든 제도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은 아무리 추워도 학교에서 지정한 날짜부터 자켓을 입어야 하고, 체육복과 교복을 상하의로 나눠 입어서는 안 된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교육’이고, ‘질서’를 가져다주는 것이란 말인가!

  상벌점제는 결국 체벌로 자행되던 악습을 명문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에 더해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규정들을 상정하고서는 그에 미치지 않으면 ‘니가 어떤 환경과 사정과 성격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규정 어겼으니 가차 없이 벌점 1점, 탕탕탕! 빠이!’로 아이들의 자유와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을 탄압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체벌을 금지한다고 상벌점제를 시행했으면서도 교사들마다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 상쇄 프로그램에서 한 시간 동안 눈 감고 의자에 서 있게 하는 간접체벌을 한 후 청소를 시키는 등의 부차적인 문제 또한 엿보인다. 이름 바뀌고 표면적인 방식도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체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4.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쓰면서 자주 분노했다. 나는 나의 삶이 가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 나라의 어른들과 학교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길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걷는 중인데, 갑자기 내 길에 쳐들어와서는 마라톤을 뛰어보라고 종용한다. 난 원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내가 불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나는 내가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자신들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무엇보다 지금 내 앞에 닥쳐있는 교육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피력하고, 대안을 모색할 것이다.

  수능까지 열한 달이 남았지만, 그런 것 상관없이 나는 내 삶에 주어진 길을 더 열심히 걸을 생각이다. 가다가 심심하면 옆에 세워진 나무 이파리도 보고, 향그러운 꽃내음도 좀 맡아보고, 벤치에 앉아서 낮잠도 좀 자다가, 그렇게 끝으로 도착하고 싶다. 내 인생, 내가 행복하고 싶다. 더 이상 우리 삶을 갉아먹는 것들에게 내 인생을 팔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조금이나마 사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오기는 올 런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조금이나마 더.


 *비문이 많아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네요. 흑흑.

희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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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10-04
작고 귀여우며 무서운 -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

작고 귀여우며 무서운 -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 진시황은 어째서 불로초나 수은도 마다 않고 영생을 희구했는가? 인생의 절정이라는 순간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단순히는 죽음을 두려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정말 영원하고 무한한 삶의 추구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고 싶지 않다'라는 말은 '영원히 살고 싶다'로 치환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은 영원을 제대로 감각하고 있는가? 애초에 감각할 수는 있는가?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이하 『치이카와』)은 이 같은 질문의 중심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 순간을 극복하려다 영원의 함정에 빠져버린 자들이 그려낸 궤적으로 관통한다. 작고 귀여운 것들, 그 이면 '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들'의 줄임말인 먼작귀로 공식 번역된 치이카와의 극장판 캐치프레이즈는 '그 우정도/ 그 죄도/ 그 생명도/ 언제까지나'. 아무래도 수상쩍다. 줄거리를 보자. 인어섬에 간 치이카와 일행은 영생을 불러오는 인어 동료를 잡아먹은 범인을 찾으려 마을에서 흉포를 부리는 세이렌에 맞서 싸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마을 주민 히토바와 후타바는 사전에서 본 영생을 가져오는 인어를 낚으러 바다로 향하지만 세이렌의 실수로 사고가 나 후타바가 중태에 빠지자 히토하는 복수를 위해 납치한 세이렌의 잉어를 후타바에게 먹인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작고 귀여운' 얘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문제는 다음이다. 후타바가 영생이 가져올 공포, 히토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죽고 없어지는 동안 홀로 남겨질 공포를 어렴풋이 감각하고는 히토하도 인어를 먹도록 종용하자, 재촉에 못 이긴 히토하도 인어를 먹은 뒤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을 둘러싼 사유를 추출해낼 수 있다. 우선 후타바가 영생을 얻은 이유는, 그가 사경을 해메고 있었으며 죽음 아니면 영생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치료의 가능성은 묘사되지 않았으므로 논외로 친다). 히토하는 후타바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기에 그를 영원히 살리기로 한다. 고로 후타바의 영생은 도피 시도이며 동시에 일종의 도피처이다. 반면 히토하는 어떤가. 히토하가 영생을 얻은 이유는, 이미 영생의 운명이 정해져버린 후타바가 뒤늦게 영원에 수반되는 공포를 직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히토하의 영생은 후타바가 겪는 공포를 덜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되었다. 영생이 수단으로서 이용된 것이다. 이렇듯 두 인물의 영생은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영원이 순간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 두 인물이 영생에 이르는 계기는 사소하며 지극히 순간적인 감정과 선택에 매여있다. 지금 죽음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공포를 달래기 위해서 택해진 수단이 영생이라는 것은 농담에 가깝다. 이러한 농담이 하나의 실체로 구현되는 이유는 그들이 영원을 순간의 렌즈로 해석하여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 도두
  • 2026-10-03
모이의 운명: 『옥수수와 나』 (김영하, 2011)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_ 소설집『오직 두 사람』, 113p., 문학동네 편리하게 해석한다면 이렇다. 옥수수 = 나. 옥수수를 쪼아먹는 닭 = 출판사 사장 내외. 작가와 편집자는 마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기한 내에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고, 반드시 소비되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창작자가 느끼는 압박은 모이 시점에서 닭이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출판부(닭)가 작가(나=옥수수)를 ‘쪼아대는’ 것이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169p.) 중얼대지만 잡아 먹힐 것 같은 생존의 불안을 일상적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나’는 옥수수다. 그건 단지 출판계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 전반은 마감에 맞추어 빨리 빨리, 효율적으로, 생산적으로, 성실하게, 신 들린 것 같은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일들을 처리하라고 인간들을 쪼아대고 있다. 교육도 시장의 요구를 반영하는데,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는 성실한 산업 역군을 양성하는 전일(全日)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인 '나'는 딸의 뒷바라지를 하려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고, 딱히 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써야만 한다. 그런데 글이 안 나온다. 원고료를 지급했는데 마감일이 훌쩍 지나도 산출물이 없는 것에 대해서 출판사측은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그러면 '나'는 민법에 따라 금전적 손해배상의 의무를 지게 될 것이고 더불어 '사기죄'로 형사 재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월스트리트 금융계 출신 출판사 사장을 만난 뒤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막 써버린다. 서사 구조의 개연성, 인물의 성격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들이지 말자. 이미 쓴 글 되돌아보지도 말자.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마감과 효율, 생산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에라 모르겠다’, ‘신경 꺼’, ‘너무 공들이지 마’, ‘대충대충 해’의 정신을 학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작품 속 인물들과 현실 세계 사람들이 내면화한 메시지를 나의 언어로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오랜 시간 몰두하지 마. 천착하지 마. 시간이 아깝지도 않니? 그런 자잘한 골몰은 접고 거칠게 획을 그어가야 해. 그렇게 다들 계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거야. 왜 작가들은 자꾸 채무를 불이행하니? 결국 인생의 핵심적 요소는 생존(돈)과 생식(섹스)가 아니겠는가. 일을 ‘쳐내는’ 감각으로 빠르게 과제를 ‘마감’했다면, 너는 비로소 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게다가 그런 감각은 곧 인류가 숭배해온 거친 ‘남성성’과도 유사하므로 '생산성이 좋은' 사람이 '광포한 섹스'(150p.)도 잘 하는 거야. 이 작품은 쟁취의 감각, 온라인 게임하는 감각, 경영학, 세상물정, 똑부러짐 같은 것들과 멀다고 여겨지는 문인조차 그러한 지배적 사회질서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을 인생이라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작가라고 믿으며, 자신이 사회구조적으로 결정되는 “종속변수”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양식

  • Marllin Zero
  • 2026-10-02
피뢰침(김영하, 1998)의 상징에 관한 효용론적 관점의 해석

그 짧고 강렬한 순간이 지나가고 난 후, 까닭 없이 죄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여느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어떤 사고가 발생하기만 하면, 그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우선 사과하도록 교육받은 탓이었을 것이다.그래서인지 나는 그 일을 엄마에게도, 그리고 그 시절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었다. 시간이 좀더 지나고 나이를 먹게 되니,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예단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순간’에 대한 자세한 서술 이전 이 단락을 읽었을 때, ‘그 순간’이 벼락 맞은 순간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보다 현실적인 비일상적 경험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스로가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첫 성적 경험 같은. ‘나’는 유년 시절의 그 순간을 어쩌면 잊은 게 아니라 묻어뒀던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친구를 통해 ‘벼락 맞고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을 알게 되고 가입한다.우리는 이미 한 번 살아났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공포보다 빨리 덮친 수만 암페어의 전류를 받아냈습니다. 그때 전류는 우리 몸에 길을 냈기 때문에 또다시 맞는다 해도 전류는 그 길을 따라 마치 피뢰침을 지나듯 우리 몸을 지나갈 겁니다. 초점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벼락 맞은 경험의 발설을 성폭행 경험의 진술로 치환하는 것, 벼락을 맞아 몸에 전류가 흘렀던 경험을 ‘첫 경험’이라 칭하는 것, 모임 구성원들을 뜻하는 ‘발기한 피뢰침’이라는 표현을 통해 짐작할 때, ‘벼락 맞고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은 ‘성폭행 생존자 모임’이 아니었을까?하지만 그렇다면 왜 ‘탐뢰여행’을 떠나는 걸까?*이들은 벼락을 맞아 죽을 뻔 했음에도 일부러 벼락을 맞으러 간다. 다 같이.트라우마 극복을 목적으로 한 자조모임 성격의 ‘퇴역 군인들 모임 같은 건가요?’, ‘레저 삼아 위험을 즐기는 건가요?’ 모임의 지도자격인 J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 왜 이 모임에 왔는지를 물어보라고만 한다. 또한 J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를 이곳에선 마음 놓고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첫 경험을 털어 놓은 이후에도 빗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꿈을 꾼다. 사실 벼락을 네 차례 맞아 의연해보이는 J도 꿈을 꾼다. J는 말한다.그 경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게 우리 몸에 흔적을 남깁니다.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곧 되살아납니다. 공포 보다 먼저 지나간 것을 몸은 잊지 않습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 라는 ‘나’의 질문에 J는 ‘공포와 전류를 일치’시키고 ‘스스로 전격이 되어 대기와 대지와 몸의 주인이 되라’고 한다. 이는 모임 구성원들이 주기적으로 ‘탐뢰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다. 벼락 맞고도 살아난 인간은 벼락에게 당한 객체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탐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탐뢰여행을 가면 ‘표백제’ 냄새가 나는데, 이는 방전이 시작되면 공기중의 산소가 오존으로 변하는

  • Marllin Zero
  • 2026-09-28
정언명령, 써야할 의무

서론1) 탐구 배경칸트는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달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나는 소설가가 꿈인 사람이다.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진행했다. 나의 문구를 작성해보라는 내용의 수행평가였다. 3학년 2학기 수행은 쉽고 단순하다. 3학년 2학기는 반수를 하지 않는 이상 성적에 포함되지 않고, 수능도 준비해야 하는터라 내신의 중요도는 훨씬 떨어진다. 그렇기에 수행평가도 이런 간단한 것을 주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어려운 수행평가가 또 없었다. 평소 글쓰는 것이라면 모든지 자신있었던 내가, 갑자기 문구 하나를 작성하려고 하니 손이 덜덜 떨리기만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부담감 때문일까. 문예창작과 입시생이기에 이런 글 하나, 하나에도 신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을까. 정작 나는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지 명확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거울' 응집되지 않은 기억을 뒤져 겨우 기워낸 한 단어였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 나의 소설은 거울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타인 그리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 그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였고, 내 소설이 지향하는 방향이었다. 단순히 글자의 기교와 나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 되주는 것. 그것이 나의 원초적 입장이었다.소설이 거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사회에 가장 아래부터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에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 어려우며, 그들은 소외되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런 잊혀질 기억들을 다시 되찾는 것, 이번 연구는 가장 아래에 있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칸트는 에서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를 언급했다.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는 다음과 같다.1.자살2.거짓약속3.자기계발포기4.자선거부이는 현대적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고 보았다. 특히 4번과 같은 자선거부의 경우 현대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쟁점으로 보였다. 현대 사회는 매우 풍요롭지만 여전히 빈곤하고, 심지어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조차 충족되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칸트가 정언명령 위반 사례, 그 중 ‘자선거부’를 이야기한 것이 이것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후 롤스의 분배적 정의 개념과도 연결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우선적으로 탐구 대상으로 삼기로했다. 두 번째는 사회문제를 다뤄온 경험이 많아서 세 모녀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 해당 사항에 대해서 “국가의 재분배는 공정한가?”를 주제로 탐구를 진행했던 경험이 있었다. 여기서 롤스 관점과 노직 관점을 비교하여 국가의 재분배가 공정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 재분배가 단순히 최소수혜자에게 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닌, 최소

  • 노스텔지아
  • 2026-09-16
살아갈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 (영화 『씨 인사이드』 비평문)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인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맞부딪히는 지점에 놓여 있다. 안락사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하는 것을 말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 생명 보호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는 실제 인물인 라몬 삼페드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메나바르는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은 물론 편집과 음악까지 직접 맡았으며, 한 사람의 시선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라몬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작품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라몬은 사고 이후 오랜 시간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라몬의 삶을 따라가며 인간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라몬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하는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몬에게 죽음은 단순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에 가깝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살 수 있는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라몬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 개념은 대사로만 설명되지 않고 영화 속 단 하나의 상상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압축된다. 푸치니의 아리아 ‘네순 도르마’가 흐르는 가운데 라몬은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를 달려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카메라는 그의 시점이 되어 갈리시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날아간 뒤 훌리아와 입을 맞춘다. 영화 전체에서 라몬의 몸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지는 장면은 이 순간이 유일하다. 실제로 아메나바르 감독은 이 장면을 라몬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으로 설명했으며,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그의 몸과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것이 오직 상상 속에서만 허락된다는 사실은 라몬이 되찾고 싶어 하는 자유가 걷고 뛰는 신체적 자유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감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선택을 인간의 자유로 인정한다면,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 역시 개인의 의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라몬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후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며 일상적인 행동은 물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오랜 시간 이러한 삶을 살아온 라몬에게 고통은 단순한 신체적 불편함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고, 삶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 자체가 고통

  • 시유레
  • 2026-09-07
영화 <원더>-세상을 마주하는 용기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2번, 책으로 1번 봤다. 영화로 봤을 때의 감동이 더 컸기 때문에 영화로 비평을 쓰려한다. 마지막을 어기의 이야기로 장식하기 위해 누나인 비아의 이야기로 먼저 시작하겠다. 비아는 가족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갔다. 그녀도 물론 동생을 아끼고 좋아했지만 온 가족의 관심이 안면기형을 갖고 있는 동생한테 쏠리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티 내지 않고 꿋꿋하게 참아냈다. 비아가 뭐라고 하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할 걸 알기에 짐이 되지 않으려 늘 노력했다. 비아도 아직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일 뿐인데 투정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녀가 안타까웠다. 성숙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렇지만 비아의 행동이 옳은 행동일까? 맞다, 아니다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지만 비아 혼자 그 모든 상처를 짊어지는 것은 가족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짐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면 그녀의 상처가 조금은 치유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큰 문제는 비아의 친구 미란다와의 일이었다. 미란다는 비아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는데 그러다 보니 비아의 가족과도 잘 알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란다는 여름 캠프를 갔다 오더니 비아를 피하게 된다. 비아는 당황했고 나 역시 그녀의 태도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그러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유가 나온다. 미란다는 부모님의 이혼 등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다, 캠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비아의 따뜻한 가족(어기 포함) 이야기를 마치 자기 가족의 이야기인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자신에게 동생을 위하는 희생적인 누나라는 프레임을 덧씌워 사람들의 동정을 얻으며 결핍을 채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비아를 마주하기 부끄럽고 미안해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미란다의 행동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미란다는 비아의 화목한 가족이 부러웠던 것이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비아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고 생각해봐도 좋겠다. 물론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도, 잘한 선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비아에게 말하고 사과했으면 됐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란다에게는 그 방식이 최선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 보면 어떨까? 미란다도 그저 가족의 사랑이 고팠던 미숙한 아이였으니까. 둘의 화해는 학교 연극에서 이루어진다. 미란다가 주인공을 맡고 그 대역을 비아가 맡았다. 미란다가 객석에 온 비아의 가족을 본 후, 비아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며 무대에 서게 해 줬다. 비아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미란다의 진심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미란다는 여전히 그들과 잘 지내기를 바란 것 같다.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주던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 친구의 가족을 소재로 삼아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미란다가 현재, 주인공이 될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이 한 번도 가족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비아에게 자리를 넘기며 그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 캔디
  • 2026-08-30
김승옥론: 부끄러움을 마주하다.

서론1) 탐구 배경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이 질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질문에 한 번에 답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묻는다면 머리가 아팠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재밌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그래서 역사를 좋아했고,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었다. 카뮈의 소설은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 알베르 카뮈처럼 나의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면, 나의 철학을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 욕망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남자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주위에 소설을 쓰는, 아니 글을 쓰는 친구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노트북에 초고는 쌓여만 갔지만 그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은 무의미했다. 학교 내에서는 백일장을 포함하여 이러한 문예행사가 아예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고립된 무인도에 갇혔다. 그때 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소설은 나의 생각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문학에 대한 교류를 하지 못하여 외로움을 겪던 차에 나는 온라인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약 100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나는 소설을 쓰기 보다는 작품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토론을 하던 중 어떤 사용자가 민음사 책의 표지 하나를 올렸다. 이름은 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파란색 표지에 그려진 한 외로운 노인과 안개. 나는 그 사진에 매료되었다. 그것이 김승옥과의 첫 만남이었다. 민음사는 원래 외국 문학 전집만 발행한다고 생각하고, 한국 문학도 나오는지는 몰랐기에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바로 구매했다. 그리고 첫 문장은 나의 마음을 점령하기에 충분했다.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리는 그의 문체는 문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나에게 모범답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문체보다도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형성한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세계였다. 이라는 작품에서 드러난 '자기세계'의 개념 이후 현대인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멸망해가거나 몰락하는 인물은 분명 무언가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한 세계는 무엇일까. 마치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김승옥 작가의 소설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답을 절대 정해주는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만 하더라도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질문만 던지지는 않는다. 실존주의도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칸트도 인간 존엄성에 따른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김승옥은 항상 소설을 애매하게 끝낸다. 의 주인공 ‘나‘는 윤희 누나가 범죄에 연루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놓고서는 그저 마을 주위를 서성이며 여러 생각을 하며 끝이 난다. 소설 에서는 주인공의 욕망을 결국 실현하지 못한 채로 다시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김승옥은 이런 애매한 상황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 노스텔지아
  • 2026-08-23
조세희, 윤흥길, 김애란의 '집'

유사한 소재와 다른 서술 조세희의 문학세계가 투쟁과 서늘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면, 윤흥길의 문학 세계는 다정함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결말부는 “꼭 죽여.”로 끝난다면 윤흥길의 『장마』는 “모든 걸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니까. 또한 난장이의 딸은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사람을 증오하는데,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철거민 입주 권리를 산 사람이다. 연작에서는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권력자를 절대적 악인으로 상정하고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를 구성함으로써 권력의 폭압에 대한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윤흥길은 철거민의 광주대단지 입주권을 구매한 엘리트층의 권씨라는 인물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상황을 묘사한다. 권씨는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을 기리면서 정장과 구두를 신고 공사장에 출근한다. 권씨가 자신을 도시빈민과 구별짓는 태도나 철거민의 입주 권리를 구매한 점에서는 전형적인 경제적 약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매일 구두를 닦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며, 조세희의 작품들이 드러낸 사회적 모순은 결국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권씨처럼 연민하게 되는 개인들의 집합일 수 있다.조세희뫼비우스의 띠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_30p.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살기가 너무 힘들다.”아버지가 말했었다.“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지섭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 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될 거다.” _72p.(…)“로스 씨의 편지를 받기 전에 보여줄 것이 있다. 지섭에게 말해서 쇠공을 쏘아올려 보여주마.” 집이 무너진다는 것. 지금은 죽은 여자가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새겨진 채 굳은 시멘트, 오랜 시간이 걸려 손수 지은 집, 집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숭늉을 먹는 식구들.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붕괴, 고유한 기억이 담긴 공간이 소멸하고, 빈터가 되고, 수몰되는 순간은 한국 문학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현진건의 『고향』, 문순태의 『 징 소리』등 20세기 문학은 전통 사회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의해 해체되어야 했던, 서구화와 근대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김애란의 『 침묵의 미래』는 집과 고향과 거기서 쓰이던 언어의 붕괴가 한국 사회를 넘어서 세계의 섬과 숲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로 시선을 확장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고향과 언어를 ‘중앙’에게 빼앗기고 중앙이 만든 집에 살며 중앙의 언어를 쓰게 되는 것은 비단 소수 민족 사회뿐 아니라 도시적 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다.남아

  • Marllin Zero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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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스리/ 조언 고맙습니다. 저도 제 글이 대안책이나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형태로 완성되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부분을 지적해주셨네요. 그런데 한편으론 애초에 제가 글을 쓰려했을 때부터 '우리의 인생을 갉아먹는 것들'에 대해서 나열하는 식으로 문제를 전개하고 싶었고, 그것들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들인지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2012-01-11 13: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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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서도 비슷하게 언급했듯,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 등을 잘못됐다고 인지하지 못하는(혹은 부정하는) 이들의 존재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윤스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회 전체가 연대하고' '개혁'해야 하는 부분이니 분명 그에 맞는 대안과 해결의 제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음 글에서는 그런 부분들도 꼭 이야기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2012-01-11 13: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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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저도 느낀 거지만 많은 수험생들이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는 굴레를 욕하지만 그 체제 속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라 그냥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순응하죠. 대학생들이 시위 같은 데 참여하면 학점관리 실패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죠. 어쨌든 누군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저항의 의지가 생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날카로운 비판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희희 님도 제 댓글에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 2012-01-11 1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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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희희희님, 체벌도, 상벌점제도 아니라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할까요? 어떤 방안을 내세워주셨다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체벌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벌의 목적은 단지 '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학교는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대전의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체벌에 제약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간의 죄만 있어도 폭력적인 벌을 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 2012-01-13 08: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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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죄목(담배나 폭력, 따돌림)은 매가 날아가지만, 약한 죄목의 경우(수업중 졸기, 야자시간 떠들기, 숙제 안하기)는 약간의 얼차려로 끝내곤 합니다. 물론 그런 체벌을 받고 반성하는 친구들은 99%에 육박하지요. 하지만, 체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범행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그렇구요. 그것을 보아 체벌은 "반성하라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라고 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2012-01-13 08: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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