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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호

  • 작성일 2025-03-01

기획의 말

《문장웹진》의 커버스토리는 문학을 이미지로 재해석하는 특별한 시도입니다. 편집위원이 선정한 작품을 일러스트레이터가 시각화하며, 문학의 감각을 새로운 형태로 확장합니다. 문학과 그림의 만남이 만들어낼 다층적 감상을 기대합니다.

차유오, 「비워 내기」를 읽고(《문장웹진》 2024년 2월호)

피츠



피츠 작가 한마디

“            .”


▶차유오, 「비워 내기」 감상하러 가기

피츠 작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미지와 이야기를 그립니다.

문장웹진 3월호 살펴보기

신년 기획좌담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차별 구성 -1차: 책장 업고 튀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일 시: 2024년 12월 7일(토) 17:30~19:30 ㅇ 장 소: 온라인 zoom ㅇ 참여자 -사회자: 김준현(소설가, 목포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참여자: 이지용(단국대학교 HUSS사업단 연구교수), 이명현(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염승숙(소설가, 문학평론가), 이어진(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웹문예학과 객원교수, 웹소설 작가 레고 밟았어) 〈개회〉 김준현: 반갑습니다. 사회를 맡은 국립목포대학교 김준현입니다. 먼저 이번 좌담의 기획 의도를 다시 짚어 보는 것을 통해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래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는 제도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다양한 ‘콘텐츠’, ‘웹’, ‘크리에이티브’ 관련 전공들이 두 학과 제도를 대체하고 있다. 반대로 전통적인 ‘문학 산실’인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는 점점 다른 교육 체계로 변화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시대, 교육 현장에서 교강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이러한 체제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본다.” 기획 의도는 이러하고, 이러한 의도를 참가자 선생님들과 공유하며 먼저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맥락에서 제 소개를 드리면, 올해 4월부터 국립목포대학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제 전 직장은 서울사이버대학교 웹문예창작학과였고요. 이 기획 의도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야말로 학과의 이름에 ‘웹’이 들어가는 학과였습니다. 제가 올해 4월부터 일하게 된 국립목포대학교도 아마 국립대 최초로 문예창작에 웹소설, 웹문예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고 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문예창작학과 학과장으로 3년 정도 있었고요.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이지만, 웹소설 특화를 표방한 학과에서 두 학기 정도 일한 셈입니다. 4년 정도를 소위 말해 ‘전통적인 문예 창작 교육’이 아닌 새로운 문예 창작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요. 웹소설 작가이기도 하고, 데뷔는 2012년에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가 사회를 맡게 됐고, 패널로 초대받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반갑다는 말씀드립니다.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화면에 떠 있는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들마다 화면이 다를 텐데, 제 화면으로 보기에 제일 위에 떠 계신 분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명현 선생님이십니다. 이명현 선생님 자기소개를 한번 받아 보겠습니다. 이명현: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과 문화콘텐츠를 가르치고 있는 이명현입니다.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2016년부터 근무했고,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면서 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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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비평의 딜레마

비평의 딜레마 ― 이론과 문학, 삶의 거리 최진석 1. 이론에 대한 저항 문학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나 스스로도 매번 고민하고 학생들과도 자주 토론하게 되는 주제 중 하나는 이론의 효용에 관한 물음이다. 이를테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신비평, 맑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등, 문학비평 개론서나 문학 이론 입문서를 펼쳐 보자마자 쏟아지는 수많은 이론의 홍수에 당황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듯싶다. 더구나 읽기도 어려운 외국 이론가들의 이름이나 전문용어, 특수한 개념 등은 몇 글자 읽기도 전에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얼른 이 ‘수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설마 이 많고도 복잡한 이론을 다 섭렵해야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일까? 다른 한편, 저 무겁고도 쓰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칼에 매혹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쉽게 이해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멋져 보이는 용어나 개념은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듯싶고, 단순한 감상을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니까. 실제로 어느 정도 길이 들고 나면, 마치 샐러드 먹을 때와 고기를 썰 때 사용하는 칼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어떤 작품에는 이런 이론이 맞고 어떤 작품에는 저런 이론이 적절하다는 판단도 제법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문학비평에서 이론의 효용과 용법을 조금씩 알게 되면, 이론이라는 도구가 손에 맞는 독서의 무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비평에서 이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문학 독서의 오랜 금언은 역시나 작품 자체에 대한 꼼꼼한 읽기에 있고, 작품 자체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이나 통찰에 있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충실한 보조가 되어야 할 이론이 어쩌면 독서 자체를 집어삼키거나, 난해한 곡예에 올려놓는 역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그래서 어딘가에서는 이론을 멀리하고 작품에 충실하라는 충고도 곧잘 듣지만, 그것이 문학 독서와 비평, 연구에 다가서려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론이라는 무기를 어디까지 신뢰하고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을까? 아니, 문학비평과 연구에서 이론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론은 꼭 필요할까? 아마도 비평과 연구라는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이 같은 의문은 종내 풀릴 것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한 번쯤 다시 돌아보는 것은 여러모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비평과 이론의 딜레마에 대한 자기 정리이자 설득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2. 형식주의와 리얼리즘의 역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1896~1982)은 청년 시절인 1910년경 ‘모스크바 언어학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시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젊은 시인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같은 시기에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시어연구회(OPOYAZ)’가 결성되었으며, 두 학술 모임은 후일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학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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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안지영 1. 그날 광화문에서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너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사관이 여기 있었네”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고 너는 그것이 팔레스타인 대사관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옆에서 너의 말을 들은 친구는 말했다. “아 여기, 그 우크라이나 대사관이야. 그, 전쟁 난 곳 있잖아.” 너는 “아” 하고 잠시 멈칫하다 말 잇기를 그만두었다. 사실을 정정하는 너의 말이 친구를 비난하는 투로 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쌓여 왔던 너의 분노를 잘못된 대상을 향해 터뜨릴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래도 말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팔레스타인에 대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면 이 이야기를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비극의 무게를 함부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1)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집단 학살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느린 죽음(slow death).2) 트위터에 팔레스타인 관련 소식을 팔로잉하며 너는 거의 매일 폭격받는, 울면서 호소하는, 폭탄에 맞아 피 흘리는, 기아로 온몸에 거죽밖에 남지 않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신생아에 가까운 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하얀 천에 쌓인 시신들. 학교, 병원, 재활센터를 공격하며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도 제지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의 절망.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며 경악하다가 어느 때는 담담하게 스크롤을 올리다 어느 순간에 울음이 터져서 창을 닫고. 그러다 다시 켜서 그걸 다시 보고 기도했지만 결국 깊은 무력감에 빠졌었다. 어쩌면 팔레스타인에 대해 일상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바닥, 절대 악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의 막막함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에 꺼내고 난 이후 다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너의 입을 닫게 만든 것이다. 아니, 너는 그저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영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너는 그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학하듯이 그것들을 보며 끊임없이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팔레스타인 문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2. 계엄이 선포된 이후,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밤중에 자다가 깨어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 영상을 보았다. 헤드폰을 끼고 바닥에 누워 네, 다섯 번을 반복해서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죽은 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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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악녀들

악녀들 서은영 1. 악녀 선언 ‘두고 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분명 상대를 향한 경고성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 말에 겁을 먹기보다는 ‘두고 보면 네가 어쩔 건데’라는 류의 무시로 응수되는 경우도 흔하다.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게다. 가만있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그런 발언이 필요한 상황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한들 조용히 응수하면 될 일이다. 곧 이 발언은 자신의 분함과 억울함을 행사할 방법을 좀처럼 찾을 길 없는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말이자, 그런 약체의 다짐이다. 그러나 복수는 하고 싶지만 복수의 길은 요원하고, 현실의 나는 힘이 없다. 대신, 고구마를 먹고 목구멍이 꽉 막힌 현실의 나와는 달리 통쾌한 복수혈전을 실현하는 그녀들이 있다. 바로 로맨스 판타지 속 악녀들이다. 악녀들은 버릇처럼 되뇐다. ‘이번 생엔 기필코 살아남겠다’고. ‘두고 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의 악녀판 버전이다. 달라진 나를 보여 주겠다는 결기이자 나의 독기를 끌어올리는 주문으로 들린다. 2010년대 이후 여성들은 웹콘텐츠 소비에서 굳이 악녀들을 소환했다. 일종의 ‘악녀-되기’의 선언이다. 될 게 없어 악녀가 되느냐고 하겠지만, 그렇다. 악녀가 되지 않으면 사회적 죽음, 혹은 실존적 죽음이 도사리는 비정한 세계를 경험했기에 당하고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악녀 선언은 로맨스 판타지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일상툰인 〈퀴퀴한 일기〉에서는 “니가 애매한 나쁜 년이라 마음이 무거운 것이야. 더 나쁜 년이 되도록 하여라”고 조언하고, 〈쌍년의 미학〉에서는 말 그대로 ‘쌍년-되기’를 충고한다. 일련의 악녀 선언이 페미니즘이 재발화된 2015년 이후 본격화했다는 점은 여성들이 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정립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 목소리들이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현현된 것이 바로 악녀이자 #악녀물이다. 악남(惡男)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악녀 선언은 흥미롭다. 〈악녀는 마리오네트〉의 레제프나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의 아버지, 〈재혼황후〉의 하인리를 우리는 악남이라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폭군이자 패륜아 같은 이들은 악인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악남이라 호명하지 않는다. 그들을 명명할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역대급 영지설계사〉의 김수호가 빙의한 인물 ‘로이드 프론테라’도 악남이 아니라 ‘개망나니’일 뿐이다. 악남은 없다. 악녀만 있을 뿐이다. 악녀란 일찍이 남성들을 위협하는 여성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상한 것임을 안다. 악녀의 대척점에 겨우 개망나니가 존재하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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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오토매틱 블루베리

오토매틱 블루베리 구소현 1 치와와를 닮은 거대한 구름이 서서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움직이는지 모를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지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귀에 꽂혀 있던 에어팟을 뺐다. 빠른 비트로 귓가를 울리던 테크노풍의 음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차단됐던 주변 소음이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철근 골조와 청록색 유리,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진 초대형 백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는 뼈대와 같은 구조물을 외부에 노출한 하이테크 스타일의 건축물이었다. 그녀는 콘택트렌즈나 안경을 끼지 않았는데도, 시야가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백화점 정문 앞은 붐볐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6월 15일 토요일, 오후 1시 20분. 택시 앱이 켜져 있어 확인해 보니 택시를 이미 부른 상황이었다. 지한은 어깨에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크기가 다양한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있었다. 택시는 6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그녀는 잠시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구글을 켜 도착지로 설정된 장소를 검색했다. ‘다이버’라는 가게였는데, 검색해 보니 마포구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그녀는 최근 주고받은 문자와 메신저 대화창을 훑어보며 ‘다이버’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상대를 찾았다. 남자 친구였다.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택시가 그녀 앞에 도착했다. 차가 오래 정차할 수 없는 장소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바로 탑승했다. 그녀는 택시에 타자마자 창문부터 내렸다. 내부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도착 예정 시간을 보니 15분 뒤였다. 택시 기사는 핸드폰에 사이버 렉카 유튜버가 악의적으로 편집한 가짜 뉴스 영상을 틀어 놓고 운전을 했다. 지한은 에어팟을 다시 끼려다 말고 잠시 바라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뒤졌는데, 일회용 알코올 솜을 발견했다. 그녀는 일회용 알코올 솜 포장지를 뜯어 곧장 에어팟과 자신의 귀를 닦기 시작했다. 에어팟에서 더러운 게 묻어 나온다거나,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가방 안에 있던 알코올 솜을 모두 사용했다. 2 지한이 도착한 곳은 벽면이 거대한 수족관처럼 물로 채워져 있어, 마치 수중에서 식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블루베리가 가득 올려진 피자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이 가게의 주메뉴라며 남자 친구가 미리 주문해 둔 음식이었다. 하얀 모차렐라 치즈에 콕콕 박혀 있는 보라색 과일을 보자마자 그녀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음에도 입맛이 뚝뚝 떨어졌다. “지한아.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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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빛의 한가운데

빛의 한가운데 정이현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낳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안희는 몇 해 전 이토록 모순적인 마음을 미령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은 미령에게만 할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미령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진심, 나도. 어깨에 얹힌 타인의 무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안희와 미령은 경쟁하듯 토로했다. 그들은 한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안희의 아들과 미령의 딸은 동갑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그와 상관없이 가까워졌다. 비슷한 일들이 어디서나 일어난다. 아이들이 진급할 때마다 안희와 미령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제 몇 년째, 라고 헤아리곤 했다. 10년이 되던 해에 내년엔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겠다고 안희가 말하자 미령이 그럼 발가락으로 세면 된다고 말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올해 초, 안희의 집에 놀러 온 미령이 귤을 까려다 말고 갑자기 한쪽 양말을 벗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부터 카운트를 시작하자면서 맨발을 꼼지락댔다. 그녀만큼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희를 웃겨 준 사람은 없었다. 또 없을 것이다. 언니가 늘 귀엽게 봐 주니까. 미령은 안희를 언니라고 불렀고, 안희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령과의 관계에서 안희는 어떤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나이가 몇 살 어린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미령이 상대방에게 지금 친구랑 노는 중이라고 말했던 때부터인 것도 같았다. 그런 말들은 연장자가 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이가 어린 쪽에서 하면 꽤 근사하게 들린다. 안희가 보기에 미령은 근사한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같이 노는 사이가 친구가 아니면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 안희는 미령을 처음 본 순간을 기억했다. 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학교에서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가 열렸다. 3월 초, 아직 스웨터 아래 히트텍을 벗기 힘든 날씨였다. 안희는 두꺼운 머플러를 동여매고 그 속에 얼굴 절반을 파묻은 채 강당으로 갔다. 교장과 교감, 교무부장으로 이어지는 긴 인사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학생부장이 연사로 나와 학교 폭력의 사례에 대해 설명했다. 휘말리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그가 열변을 토했다. 행사가 끝나자 안에 있던 학부모들이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참석자는 전원 여자였다. 그런 곳엔 언제나 엄마들뿐이었다. 교정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느슨한 원들이 여럿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희는 곤혹스러웠다. 동네에서 유치원에 보내는 동안 알게 된 얼굴들도 꽤 눈에 띄었지만, 그들과 자신이 정말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막 형성되고 있는 그 원에 쓱 끼어들 만한 숫기도 의지도 없었다. 아무도 눈여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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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이름 쓰기

이름 쓰기 문지혁 1 1994년 봄에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방배중학교는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로, 작고 아담한 운동장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아마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업 중에 갑자기 앞문이 열렸습니다. 평상시에는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을 때 생기는 일이지요. 문지혁, 나와. 저를 호명한 사람은 학생주임 선생님이었습니다. 머리가 꽤 많이 벗겨진 데다 웃을 때마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치열 때문에 〈개구쟁이 스머프〉에 등장하는 ‘가가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분이었지요. 본업은 음악 교사였습니다. 주무기는 끝을 다듬은 하키채였고요. 당시 선생님들에게는 저마다 그런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과거형과 과거 완료형의 차이를 가르치던 영어 선생님이 말을 멈췄습니다. 졸던 아이들이 눈을 떴습니다.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를 손으로 지목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 쏠렸지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앞문으로 곧장 나가야 할지, 아니면 뒷문으로 돌아 나가야 할지를 두고 아주 잠깐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수업 중인 영어 선생님께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복도로 나가 뒷문을 닫자 학생주임 선생님도 앞문을 닫고 먼저 걷기 시작했습니다. 설명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계단 쪽으로 걸어갔고 저는 우리가 교무실로 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직감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교무실은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교무실에 가는 것을 지옥문을 여는 것처럼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반장 혹은 부반장이었고 전교 학생회의 임원이었으며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으니까요. 심부름을 비롯한 다양한 용건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에 드나들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저를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네가 문지혁이구나. 용무를 마치고 나면 몰랐던 선생님도 제 초록색 명찰에 새겨진 하얀 이름을 눈여겨보며 말했습니다. 마치 도감 속에 나오는 동물을 실제로 본 어린아이처럼요. 이번엔 무슨 일일까? 교실이 있던 3층에서 교무실이 있는 1층까지 내려가는 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부름이라면 매우 중대한 일이거나 아주 급박한 이유일 거라고 짐작했죠. 이를테면 상을 받는다거나, 학교 대표가 되었다거나, 당장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거나··· 그것이 나쁜 일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 계단을 다 내려가면 제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만으로 겨우 열넷인 소년에게 세계란 그토록 단순하고 안온하며 순진한 것이기 마련이니까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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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파 프롬 홈

파 프롬 홈 강지원 데이팅 어플에서 매칭된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재이는 가장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 주고받는 대화의 간격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게,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적절한 간격을 터득한 것 같았고 민주와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머리 길이나 성향을 묻는 등 소상한 신변잡기에 심취하지도 않았다. 이따금 주고받은 일상 사진으로 추측건대 취향도 대강 비슷한 것 같았다. 민주는 취향을 가늠하기에 가장 보편적인 질문으로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다. 각자의 별 다섯 개짜리 영화와 이런저런 퀴어 영화를 나열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아가씨〉와 〈캐롤〉에 대해서는 서로 비슷한 감상이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적에는 감명 깊었고 언젠가 그런 영화처럼 대단한 인연을 만나길 바란 적도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실감과는 다소 동떨어진··· 여느 판타지 영화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재이가 덧붙였다. 그런 건 이제 〈아이언맨〉 시리즈처럼 보는 거죠. 여러모로 호기심이 동하는 사람이었다. 화면 속 인력이 민주를 자꾸만 끌어당겼다. 얼마 전, 전 여자 친구인 보영을 만난 참이기도 했다. 헤어지고 한 달 만에 연락을 하더니 이사할 적 챙기지 못한 짐을 가져다주겠다며 대뜸 선언한 것이다. 이제 와서 대체 뭘? 뾰족한 말이 불거졌으나 그것을 부러 꺼내어 겨누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버려 달라며 부탁해도 보영이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탓에 속수무책이었다. 얼굴 보고 대화도 할 겸. 보영의 연락에 마지못해 응하고서는 근처 역 이름을 말했다. 간만에 본 보영의 얼굴은 어딘가 누추하고도 조촐한 몰골이었다. 두고 왔다던 짐만 챙길 심산이었는데··· 정작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뭔가 헛헛하네. 간소한 세간을 보자마자 보영이 중얼거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으면 그럴 수도 있지. 곧 눈치를 살피며 수습했다. 기껏해야 다섯 평일 방은 냉전을 치르는 동안 급하게 구한 곳이라는 걸, 함께 살던 집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형편에 맞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는 것을··· 전 여자 친구 앞에서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현관 앞에 짐을 둔 보영이 머뭇거렸다. 돌이키기에는 지나치게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거운 찬장을 뒤적거리는 시늉을 하다 냉장고에 처박아 두었던 맥주캔을 대접했다. 1인용 좌식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선 안부와 근황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듬성듬성 이어 갔다. 내밀한 공간은 마음가짐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싸구려 가벽 너머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앞집 커플이 주고받는 욕설 따위가 들렸다. 밤만 되면 불거지는 것들이었다. 씨발! 한 번 더 욕설이 떨어지자, 보영은 놀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앞에 커플이 사는데, 자주 저래. 민주는 별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다. 너는 저게 괜찮아? 보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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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노래할 차례

노래할 차례 윤은성 선언했던 이들이 집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줘.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자. 법정에 서기 전이었다. 소들이 편안해 보여. 떨고 있는 그에게 속삭였다. 내가 한 말들이 미래에 관한 건지 짐작에 불과한지 묻지 않은 채였다. 그는 벌금형을 받았다. 소들이 자면서 서로에게 나직한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을 그가 사는 마을에선 평범한 축복으로 여겼는데 작은 언덕과 초원들이 벌써 많이 사라지고 있었다. 가장 노래도 잘하고 돈도 잘 벌어다 주는 소들이 택해지면 모두 얼어붙거나 울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끔찍했어. 서로의 눈과 귀를 가려 주다 가도 우리는 다시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때도 노래를 하자고. 그건 어려운 일일 수 있겠지만 소와 함께 풀과 과일을 먹지 않았다면 알아듣기 어려울 선언 이후의 노래를. 전보다 더 가난해졌다. 새롭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풍성하고 단순한 요리를 함께 나누었다. 노래가 아닌 것은 이제 보이콧 하자. 나는 소가 하는 말을 천천히 옮겨 적었다. 서로의 먹을 것을 챙기며 노랫말을 생각하는 슬픔들이 비밀스럽게 자랐다. 이른 아침 법원으로 향했던 이들이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다시 새롭게 불복종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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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남아 있는 여름

남아 있는 여름 윤은성 풀이 있는 길을 알아. 나는 시멘트 포장된 희고 거친 잔물결 무늬가 팬 길을 기억한다. 비탈과 볕과 그늘을 기억한다. 나는 사라진다. 목욕탕 옥상 위에서 누운 채 깨어났다. 빗방울이 닿고. 당신을 떠올렸다. 불렀다. 거기에 시가 있었단 걸 어렴풋이 느꼈다. 잠의 둥근 모양이었다. 헤엄치는 마음으로 저녁을 맞았다. 얼굴에 이끼가 피고. 잔물결 무늬에 물이 고였다. 내 등에선 풀이 거세게 자랐다. * 돈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래도 돈이 필요한 날들이 한없이 이어졌다. 더운 계절이 이어지고 있을 때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여자와 아이들이, 서로의 머리맡에 감자나 익은 앵두, 옥수수를 두고 갔다. 목사님은 찾아와서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 주고 가셨다. 내가 아팠던 게 감기 때문인지, 태어났기 때문인지, 마을의 가부장이 누구인지 알아 버렸기 때문인지 조금 헷갈린다. 헷갈리지 않는다. 마을의 언니들이 종종 나를 안아 주거나 나를 버렸다. 버리는 인형들을 내가 주워 왔다. 지나다니는 아이가 없으면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나는 없음을 알았다. 자꾸 흙의 색이 붉거나 검게 변했다. 죽지 않은 개, 잡히지 않은 개, 버린 개, 홀로 살아난 개, 뜬 장 밖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개들이 산을 오르고 내려왔다. 나는 있음을 알았고, 사라짐을 알았다. 죽임도 알았다. * 내가 아빠를 찾으러 간 길에서는 커다란 뱀과 작은 뱀을 차례로 봤다. 커다란 뱀이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나는 사라지지 않고 뱀에게 나타났다. 뱀에게는 시가 필요가 없는지, 뱀에게 시는 나의 시와는 또 다른 무언가인지 조금은 궁금하다. 슬픔과 분노를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우리 집엔 많았다. 풀이 집에 많듯이. * 옆 마을 돈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나는 시가 돼지의 몸으로 타 버린 걸 상상했다. 목이 마르고 글자들이 살에 눌어붙었다가 부서지는 시간 내내 그러니까 아주 오래 타고 있는 시를 봤다. 뉴스 안쪽으로 그리고 그 바깥으로 화염이 인다. 돼지는 형체가 남았다. 나는 내 얼굴과 팔을 자주 더듬었다. 마른세수를 했다. 알 것 같은 남자가 뉴스에서 울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문화적인 이유에서였다고 생각하면 내 입안 양쪽 볼과 배 안에 누른 살점들이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치아에 살점이 붙고 썩는 기분이 든다. 붙어서 함께 썩는 시를 봤다. 옥상이 있던 작고 흰 페인트칠 된 건물은 내가 성인이 되기 전 부수어졌다. 부수어지다 무너졌다. 무너졌고 더 부수어졌다. 아랫집 노인이 결국 담을 다 고치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내 아이가 담 위에서 놀 때 마침 무너졌다. * 아랫집 노인이 태몽을 자꾸 내게 일러 주러 온다. 풀이 자라라고 내버려둔 담장들이 풀 속에서 시처럼 놓여 있었다. 돈사에서 돼지들이 다시 태어나려 했다. 돈사 바깥의 시들이 돼지를 다시 임신시키려 했다. 덜덜 떨며 풀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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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오기로 한 날

오기로 한 날 전욱진 네가 방에 슬픔을 치워 놓았다고 뿌듯해하기에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한다 오기로 한 날이잖아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나는 모른 척하기로 하고 네가 방문을 열면 먼저 놀라워할 준비 방 안에 들어서서 맘껏 즐거워할 준비 어떻게 이걸 혼자 다 할 수 있었느냐 물으면 너의 대답은 명료할 것이기에 나는 거기에 맞춰 소리 내면 될 것이다 오기로 한 날이니까 서로가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쾌해져서 함께 웃음 지을 것이다 같이 지내는 이 방에 이제 슬픔이란 없으며 그 형편에 금방 적응한 사람처럼 굴 것이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한동안 맛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나눠 먹고 술도 마셔서 모처럼 어지간히 취할 것이다 그러나 식탁 앞에는 너와 나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정이 넘으면 너는 방으로 가고 내다 버린 슬픔을 도로 가져오기 위해 나는 천천히 외투를 입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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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조각공원

조각공원 전욱진 내가 언제나 죽는 장소가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뜻하지 않게 당신과 그곳을 거닌다 그렇다면 바로 오늘일까 지나온 나의 삶을 낱낱이 조각하여 공연히 전시해 놓은 그의 악취미에 속으로 내가 혀를 내두를 때 당신은 여우 석상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이거 참 예쁘지 않느냐고 묻는다 폴짝 뛰어올라 눈 속으로 파고들던 세기를 문득 떠올리며 그거 참 예쁘다고 답한다 그렇게 허다한 나의 전생을 지나는 동안 우리가 공간이 아닌 시간을 걷고 있다는 생각 언제나 쓰러지던 지점에 다 이르렀을 즈음 당신에게 건네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는 생각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공원의 끝에 다다라서 이어지던 조각상도 더는 보이지 않았고 어리둥절해진 나는 당신을 놓아둔 채 앞을 향해 계속 걸어가 본다 이대로 조금 더 걸어도 좋겠지만 저만치 걷던 내가 다시 돌아온다 당신이 나 없이 살지 않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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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꽃도 없는 목련화

꽃도 없는 목련화 -영옥 누부 생각 안상학 병상의 누부 마른 손을 놓치고 돌아온 늦가을 어느 날 나는 남들 다 좋다는 고운사 단풍을 보러 가서 단풍도 단풍이지만 벌써 나목이 된 목련나무만 어루만지다 돌아왔습니다 그 푸르고 너른 잎 다 놓치고 벌써부터 꽃맹아리만 입 꼭 다물고 선 목련나무 한 그루 지리산 실상사에 첫얼음이 얼었다는 새벽 누부의 손을 딴 세상에 빼앗기고 나는 그 목련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누부는 환한 꽃 다 져 버린 오월의 목련나무 한 그루로 이 세상에 왔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허망한 목련나무 그 가난한 마음을 알아서 세상의 가난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보듬으며 살았습니다 일찍이 세상의 슬픔을 배워서 이긴 사랑으로 세상의 슬픈 마음을 찾아가 하나하나 사랑을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일찍이 그 아픈 절망을 알아서 세상의 절망을 낱낱이 일으켜 세우며 살았습니다 단 한 번도 당신을 위해서는 꽃 한 송이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 뜨겁던 여름도 그 푸르고 너른 잎 속에 근질거리는 자신의 꽃맹아리는 한사코 감춰 두고 오직 세상의 가난한 낱낱의 가슴을 찾아가 꽃 한 송이씩 피워 주며 살았습니다 나는 당신 평생 자신을 위해서 피운 꽃을 본 적 없습니다 그런데도 누부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누부는 언제나 환한 목련꽃으로 내 마음속에 되살아납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분명 당신과 헤어지고 있습니다만 그 환한 기억과는 결코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병상의 누부 마른 손을 생각하면 가슴이 어두워지다가도 일생의 당신을 생각하면 어두운 가슴이 금방 환해지는 까닭입니다 평생 꽃이 없어도 꽃이었던 당신 저 고운사 목련나무는 꽃맹아리를 물고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언제나처럼 사월의 하늘을 환하게 밝힐 겁니다 이 겨울 천 개의 꽃맹아리 입에 물고서 먼길 떠나는 누부 저기 가시거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부디 이 세상 모든 가난과 슬픔과 절망은 다 잊고서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 당신만의 꽃을 환하게 피우는 사월의 봄날로 영원하길 바랍니다

  • 관리자
  • 2025-03-01
성자와 토끼

성자와 토끼 안상학 권정생 선생이 작고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성자라고 불렀다 성자란 세상의 아픈 소리를 볼 줄 알고 세상의 슬픈 장면을 들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진정한 성자라면 다만 여기까지여서는 곤란하다 성자란 세상의 아픈 소리를 같이 낼 줄 알고 세상의 슬픈 장면을 같이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또 어떻게 하면 아픈 소리가 사라지는 세상일까 어떻게 하면 슬픈 장면이 끝장나는 세상일까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역시 다만 여기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모름지기 성자란 아픈 소리가 없는 세상을 위하여 피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슬픈 장면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목숨을 아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성자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권정생은 어쩌면 성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자이기에 앞서 권정생 자신은 아픈 소리 그 자체였고 슬픈 장면 그 자체였다 성자이기에 앞서 그 또한 바닥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과 아픔이며 슬픔을 나누고 어르며 살았던 한낱 범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꿈은 아픔과 슬픔에 처한 사람들이 바닥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었지만 자신만큼은 오히려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었다 단언컨대 그는 한 마리 토끼였다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풀과 꽃이 불쌍하여 하느님에게 차라리 이슬만 먹으며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그런 토끼 같은 존재였다 그 토끼를 불쌍히 여겨 같이 눈물을 흘린, 스스로가 스스로의 하느님이 되고자 몸부림친 한 마리 토끼와도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는 다만 그렇게 살다 갔다

  • 관리자
  • 2025-03-01
북실이

북실이♦ 임유영 따뜻하고 둥근 개의 머리통. 작은 뒤통수를 겨눈 총구와 총을 쥔 손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훈기 도는 식사 시간. 음식을 준비한 사람이 말한다. “모두 기도하고 저녁을 먹자꾸나.” 개가 으르렁거린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신께 감사를,” 개의 허연 송곳니가 드러난다. 검은 눈동자가 빛난다. “음식을 마련한 두 손에 축복을.” 개는 뜨거운 콧김을 뿜는다. 끈적한 침을 흘린다. 개의 머릿속에는 회전하는 작은 불꽃들과 굉장한 어둠. 결코 쉬지 않는 코와 모든 소리를 듣는 귀. 다들 식기를 달그락거리며 미소 띤 입술을 오물거리는 동안. 누가 개를 참 사랑해서 홀로 두기 싫어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개가 사람을 공격해서 누가 다치거나 개가 총에 맞아 죽는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개의 작은 머리통을 손으로 감싸면 따뜻한 야구공을 쥔 것 같다. 누구나 그 느낌을 좋아한다. ♦ Кудрявка(쿠드랴프카, “Little Ball of Fur”, 다른 이름으로 “라이카 (Lajka)”)

  • 관리자
  • 2025-03-01
폭설

폭설 임유영 눈보라 휘몰아친다. 이번에도 문전박대. 너무 매정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을 들이려면 집을 부숴야 하잖아요. 이해해 주세요. 거인은 이해한다. 이해해요. 거인이 말한다. 마을의 마지막 집 앞으로 거인을 데리고 간다. 사람들이 너무 놀라니까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시면 어때요. 어깨가 움츠러든 거인이 걸음을 멈춘다. (똑똑 노크 소리) 누구세요? 죄송한데 하룻밤만 신세를 질 수 있을지. 들어오세요. 아니, 저 말고 제 친구인데요. 친구가 어디에 있어요? 제 뒤에 있는데 안 보이세요? 안 보이는데. 어, 어디 갔지? 어디까지 간 거야? 아무튼, 여기서 그러지 말고 일단 들어오세요, 눈이 너무 많이 오네. 눈이 정말 많이 오네요. 친구분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그게, 정말 제 친구인 건 아니고요. 말하자면··· 털쥐하고 곰 중 누가 더 추위에 강할까 하는 문제랄까요. 음, 털쥐가 작으니 금방 얼어 죽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지요? 상식적으로다. 해변에 웅크린 거인은 골똘히 생각 중이다. 아마 내가 땅 위의 개미라면, 곰의 발자국을 한눈에 알아보긴 어렵겠지. 알아보긴커녕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거야. 하물며 곰과 마주친다면 어떻겠어? 거인은 손으로 밤바다를 조금 떠서 먹어 본다. 그에게는 무엇이든 아주 조금씩 먹는 습관이 있다. 털쥐가 말했다: “털이 많다고 추운 곳에 살지는 않는다”라고. 곰이 말했다: “아무래도 몸이 크면 추워지는 부분도 많지 않겠어요?” 하고. 거센 눈발이 어둠마저 촘촘하게 뚫어 버린다. 거인은 설풍 속에서 잠에 빠진다. 모두 잠든 사이, 구름이 걷히자 환한 달빛에 물과 대기의 입자들이 일시에 마법처럼 빛나며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달이 서둘러 먹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누구도 그 광경을 보지 못한다. 수천수만의 은빛 바늘이 다각도에서 내려꽂힐 것이다.

  • 관리자
  • 2025-03-01
고백

고백 윤지양 좋아하는 시에 대해 흥분하며 말하고 싶다 탁자를 치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러나 가까이에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서 혼자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컴퓨터를 두드리고 눈이 뻑뻑할 땐 인공눈물을 넣었다 그런데 정말 좋은데요 좋은 걸 어떡해요 방금 넣은 눈물이 흐른다 왜 좋으냐고 물으면 모든 말을 잊을 것 같아서 탁자는 견고해진다 날이 기울면 크고 흰 새가 왔다 가곤 했다 이해하는 사람은 입을 다물게 된다

  • 관리자
  • 2025-03-01
시제

시제 윤지양 한 문장 다음에 오는 다른 문장은 자연스럽다. 그렇지 않다. 벌거벗은 채 태어난 아이가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다음 문장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지 않나. 아이는 즐겨 입었던 흰색 패딩을 싫어하게 될지 모른다. 흰 옷은 버린 지 오래인데 너는 십 년도 더 된 일을 떠올린다. 이전의 문장은 사랑스러운가. 그럴지도 모른다. 너는 그 하얗고 부드러운 볼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우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아이는 한 걸음 뒤 다른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너는 미래의 문장을 와락 안기로 결심하지만 발음했을 단어가 생경하다. 방금 마주친 아이가 입에 넣었다가 찡그린 표정으로 뱉는다.

  • 관리자
  • 2025-03-01
새들은 북쪽 하늘에 밑줄을 긋고

새들은 북쪽 하늘에 밑줄을 긋고 조명희 스웨터에서 잔솔가지를 떼 준다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래 해 뜨는 것도 이곳에서 볼 수 있어? 으, 으응 자신 없는 대답처럼 해수면 위에서 해가 머뭇 해가 지는 걸 보러 온 사람들 송림 사이를 걷다 맥문동 꽃 진 자리 까만 열매를 본다 보라가 짙어 검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는데 백사장엔 아이들 때를 모르고 바짓가랑이 접는다 신발을 턴다 다시 바다의 끝을 향해 쓸려 간 모래가 다시 이 자리로 오기까지 숲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온다 긴 의자에 앉는다 어두워지는 하늘이 눈 밑으로 이렇게 하루가 가네 새들이 밑줄을 그으며 가는 북쪽 언저리가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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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일송정가든은 그때 그대로인데

일송정가든은 그때 그대로인데 조명희 이곳 와 본 집 같은데··· 기억해 내야 하는 것은 그때인지 그대인지 안티푸라민 냄새의 가죽나물 장아찌가 그때였다면 이 집 버섯은 저 너머 산에서 따온 거라 말하는 그대 누구랑 왔었어? 지금 내 앞의 사람은 그대만을 묻는다 좌식 테이블이 입식으로 바뀌었어도 마당 가 장승의 꼿꼿하던 허리가 굽었어도 저 너머는 그때 그대로인데 보이는 터널을 이쪽에선 이쪽대로 상촌터널이라 하고 저쪽에선 저쪽대로 황학터널이라 한다고 모두는 들어올 데와 나갈 데를 알고 쓰는데 누구였더라? 나는 지금 어둠 속 뜨겁다 조심해 버섯을 듬뿍 담아 내 앞에 놓는 사람은 뜨거움을 염려한다 영원히 출구로 나가지 않을 것처럼 황토벽엔 격자무늬 창문 거듭 가두려던 그대는 누구였는지 전골은 계속해서 끓고 정작 사람을 데게 하는 건 차가움이란 걸 이 사람은 드라이아이스에 데어 본 적이 없다 끓어 넘치는 국물에 김 서려 본 적 없다

  • 관리자
  • 2025-03-01
부추

부추 강은교 고향에서 쫓겨난 부추들아 흐르는 물 속에 쳐박히는 눈물들아 흐르는 구름 상자속에 쳐박혀 등불의 끈들을 한 무릎에 매달고 달리는 부추들아 찢기고 가죽이 벗겨져 추어탕 노을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너희 푸르른 날, 긴 웃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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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아마 하느님께는

아마 하느님께는 강은교 이 넋 저 넋 덩기덩기 산밭가에 덩기덩기 이 넋은 가지 끝에 저 넋은 꽃봉오리 끝에 아마 하느님께는 지구 위 마을 전체가 분홍빛 둥근 접시로 보이실 거야. 국들 혹은 수프 들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나물들에서는 바다 향기 바람 향기 꽃향기 끊임없이 날리는‧‧‧ 여인들과 남정네들은 긴 키스를 하고, 분홍빛 아이들은 계단에서 끝없이 재잘거리는, 아마 하느님께는 누추한 담벽에 기대어 시금치, 봄동, 부추를 파는 저 늙은 여인도 아름다운 귀부인일 거야, 아니 늘씬한 여신일 거야, 아마 하느님께는 유니세프 광고에 찍혀 허구한 날 서럽게 웃고 있는, 팔다리가 부러진 젓가락 같은 저 소년도, 저 소녀도, 하얀 바람 솔솔 부는 바위 위에 앉아 활짝 웃고 있는 아기 동자일 거야, 아니, 날개 한껏 편 아기천사, 이 넋 저 넋 덩기덩기 산밭가에 덩기덩기 이 넋은 가지 끝에 저 넋은 꽃봉오리 끝에 아마 하느님께는 스마트폰의 구인 광고 같은 걸 보며, 신호등이 보석 사탕처럼 반짝이는, 건널목을 마악 건너고 있는 후줄그레한 저 청년도 건장한 오디세우스 같으실 거야, 아마 하느님께는 저 키 아득히 큰 아파트도 옆구리에 날개 불쑥불쑥 돋아나와 구름 위로 훠얼훠얼 날아가는 우주선 같으실 거야 모두 모두 분홍빛일 거야, 아야아, 저승에서 마악 돌아오고 있는 비리데기의 분홍숨살이꽃 가지 같으실 거야, 아마도 하느님께는, 이 넋 저 넋 덩기덩기 산밭가에 덩기덩기 이 넋은 가지 끝에 저 넋은 꽃봉오리 끝에

  • 관리자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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