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호
- 작성일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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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문장웹진 2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선정한 대표 작품들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
김민주(리피워크스)
김민주(리피워크스) 작가 한마디
용기를 내 떠난 노인들의 여행.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배에 탔을까?
문장웹진 6월호 살펴보기
새로움의 경제 2(3) - 문학적 사용에 관한 비체계적 단상1) 강동호 1. 예술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 ‘유용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출발점으로 보일 수 있다.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상품이 식별될 수 있다면, 양자의 새로움이 발휘하는 효과 또한 서로 다른 원리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품 경제에서 새로움은 도구성과 결부된 차별적 정보 가치로 통용된다. 새로운 상품은 대개 기능적 유용성(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과거의 상품과 구별되며, 뚜렷한 비교 우위의 원리에 따라 그 가치가 측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새로운 상품에 부여되는 더 높은 가격이라는 차이적 가치(교환가치)는, 한층 개선된 사용가치의 우월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 예술 작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술의 새로움 역시 과거와의 차이를 전제로 한 비교적 가치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비교 우위의 척도(사용가치의 명시적 우월성)가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새로운 예술 작품은 과거의 것보다 한층 매력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동시대의 감각에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과거 작품에 대한 일방적 우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유용성처럼 명확히 우열을 판별하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의 새로움을 더욱 복잡한 가치로 만드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2 예술의 자율적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전통적 이론들은 대체로 유용성의 결여 또는 그로부터의 자유를 예술의 핵심 본질 중 하나로 파악해 왔다. 유용하지 않다는 점, 즉 그 어떤 실용적 목적이나 기능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유용성의 부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공통 척도의 결여를 통해 부각되는 교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사유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은 칸트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가 제시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e)이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과 같은 개념은, 예술을 시장적 가치 평가와 경제적 교환의 논리로부터 구분하는 철학적 근거에 해당한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그 어떤 외적인 목적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생산해야 하며, 감상자는 이해득실과 무관한 순수한 향유를 통해 작품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처럼 예술의 자율성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에도 편향되지 않는 행위의 독립성과 무관심성에 깊이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공업적 기예는 임금이라는 대가를 전제하는 강제적 노동이지만, 예술은 그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기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이익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주체(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무용성은 이와 같은 비환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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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되기-잿빛 위의 작은 파랑 이제니 잿빛 위의 작은 파랑은 하나의 언어가 되어 너를 찾아낸다. 하나의 이미지라기보다는 하나의 언어적 기호로서. 너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본다. 보이지 않는 평야 혹은 비어 있는 하늘을. 물감이 덧발라진 어둠의 가장자리로부터 떠오르는 한 줄기 빛을. 너는 작은 파랑이 되기를 바란 적이 있다고 느낀다 너는 작은 파랑의 기억을 되찾기를 바란다고 느낀다 너는 희미한 잔상 속에서 오래 머물렀던 적이 있다 잿빛 속의 작은 파랑도 아닌 잿빛 안의 작은 파랑도 아닌 잿빛 위의 작은 노랑 혹은 잿빛 위의 작은 빨강도 아닌 어쩌면 잿빛 위의 작은 분홍과도 유사한 너는 너를 찾아온 이 낱말을 사라진 기억의 가장자리 위에 얹어둔다 잿빛의 기억에 의지한 채로 자신의 부피와 밀도를 증식해 나가고 있는 하나의 단어를 하나의 세계를 오래전 잃어버린 세계를 언제나 새롭게 다시 또 되살아나는 익숙한 세계를 잿빛의 잿빛 위의 잿빛 위의 작은 파랑 입안에서 소멸하면서 다시금 다가오는 잿빛 위의 작은 파랑이 너의 목소리 위에서 맴돈다 너는 언제나 네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그러나 이미 감각했던 하나의 세계가. 단 한 번도 발음해보지 않은 하나의 단어 위에서. 불현듯 너에게 도착하는 순간의. 그 기이하고 기묘한 끌림에 대해서. 머나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는 기원에 대해서. 다시금 발원하는 네 글쓰기의 모든 것에 대해서. 너는 아직 밝아오지 않은 어두운 푸른 새벽의 창 아래에서.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쓰인 텅 빈 노트 위에서. 잿빛 위의 작은 파랑이. 어리고 흐린 채로 겹쳐 흐르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 그것은 이미 쓰여진 것으로서.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인 어떤 문자로서. 흐릿한 이미지 혹은 불분명한 기억으로서. 너는 그것을 작고도 큰 백지 위에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의 모든 여백 속에서. 네가 겪은 무수한 잿빛의 세계 속에서. 잿빛 위의 작은 파랑은 어둠 속 푸른 지붕의 윤곽처럼 점점 밝아오는 박명의 빛과도 같이 어슴푸레한 새벽녘 창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빛바랜 치마의 색처럼 밝아오는 동시에 어두워져간다 어둠 속에서 받아 적은 것이 분명한. 너의 필체가 분명한. 그러나 그저 무언가가 적혀 있다고 느껴질 뿐인 텅 빈 여백을 무연히 바라보면서. 알아볼 수 없는 너의 글씨에 대한 해석을 해독을 포기할 때쯤. 너는 직전의 꿈속에서 오래전 죽은 너의 개가. 잿빛 털을 가진 너의 개가. 아픔 없이 슬픔 없이 네 곁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네가 너의 늙고 오래된 개의 잿빛 등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잿빛 등 위에 희미한 파랑의 기미가 드리워지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도 오래된 애도의 빛으로서 혹은 다시 다가올 어둠의 전조로서 잿빛 위의 작은 파랑은 오직 미래의 예언으로서 너에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너는 생각한다 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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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되기-물방울 속의 물방울 이제니 물방울과 물방울은 겹이다 겹은 아주 미세한 차이를 가진다 겹쳐진 만큼의 부피와 밀도 겹쳐칠 만큼의 질감과 형태 투명함과 투명함의 겹침 혹은 감싸안음 물방울 속의 물방울은 물방울의 안을 보는 것일까 밖을 보는 것일까 물방울은 떠오른다 하나의 물컵 속에서 떠오른 높이만큼의 깊이를 낙하의 자유를 동시에 품은 채로 한 알의 모래에서 하나의 우주를 보듯이 물방울 속의 물방울은 물방울 안팎의 이음새를 바라본다 물방울과 물방울 사이를 유영하거나 뒤따르면서 물방울의 물 방울의 울음 울음의 방과 물음의 방은 서로의 안팎이 되어 방울 방울 떨어진다 하나의 눈물로서 뒤섞여 흐르면서 기억의 파편으로서 감정의 지층으로서 울음을 품은 시간의 반사면이 너의 방 안을 가득히 비추고 있다 눈 물 은 물 방 울 은 눈 물 방 울 은 울음의 방을 가득히 채우는 물방울 속에 비친 너의 방은 떨어진다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때까지 너의 물방울은 너의 물 방 울 속 의 눈 물 은 잠겨 있는 것 잠들어 있는 것 깃들어 있는 것 땅 속의 땅 속의 물방울 속의 물방울처럼 침잠하듯이 천천히 스미는 것 잠시 살았다가 문득 잠들어버리는 것 죽기 죽어가기 죽어가기의 표면이 되어 알알이 맺히는 열매의 속도로 다시 살아나는 물방울의 입자로 열매의 얼굴 위에서 흐르고 있는 세계의 눈 물 방 울 을 둥근 사과의 속살 같은 둥근 지구의 표면 같은 물방울 하나가 울음의 방과 방울의 울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나아가기 진동하기 품어 안기 하나의 물방울이 하나의 물방울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투명하게 나아간다 투명하게 사라진다 맺히고 떨어지고 묻히면서 가장 낮은 곳의 흙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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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메가폰의 밤 Ⅱ 송승환 1 새야 새야 2 가는 바늘 끝 흰 종이 거친 표면을 긁는다 가는 바늘 끝 말아 올린 종이 원뿔 속에서 공기를 진동시킨다 소리는 공기가 많을수록 큰 소리를 낸다 너는 긁는다 3 깃 찢어지면서 휘날린다 너는 긁는다 4 한 사람의 목울대에서 세 사람의 목울대로 더 멀리 더 크게 흩어지지 않고 앞으로 소리는 귀는 고막은 떨린다 물속에서 타오르는 잠수부의 횃불처럼 5 너는 긁는다 잠의 미광과 밤의 안개 속에서 공기의 떨림은 검은 폐에 머문다 있다 있지 않음이 있다 이름하지 않음이 있다 얼굴 없이 너는 말한다 너는 비로소 사람으로 태어난다 6 새야 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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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메가폰*의 밤 Ⅰ 송승환 1 풀 뜯는 물소 정수리에서 솟아오른다 뿔 2 각궁 밤의 화살은 멀리 빠르게 과녁을 향한다 활 시위 진동 폭이 커진다 소리의 폭이 커진다 움츠릴수록 팽팽하다 뿔 3 한 여자의 정수리에서 자라나고 있다 밤의 사이렌 불의 말에서 불길에 휩싸인 말로 뿔 4 오월의 푸른 밤 검은 피의 목소리 시민 여러분 * Megap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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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레스보스 아일랜드* 이소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진심은 통한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고. 저 하늘의 새는 너를 위해 죽는다고. 네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네 얼굴을 그린 커다란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바보들의 사고방식이라고. 등신처럼 한 그루의 나무는 심지 말자 고민은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거 하자 단지 이런 거 하려고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내일 없이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미래를 앞다투어 나누어 보려던 그 사람들의 생각을 따윈 빌려 오지 말자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없지. 다만, 사랑이라고 불리던 그 나약한 진심은 알 수 없는 거잖아 만약 진심을 알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고개를 저었지 그건 불가능해 신파 연극 본 적 있어? 입 모양을 벙긋대며 전형적인 슬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소비해 왔잖아 그래서 지금 네 마음이 뭐라고 하고 있어? 내일 죽어도 좋았지만 사랑하고 싶었지만 죽기엔 우리의 사랑은 너무 짧고 얇았다. 낯선 도시에서 너에게 온몸을 의지 채 점점 작아졌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 처음 살았던 곳은 하수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건물이었지 낡은 건물 안에서 먼지가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자주 방이 날아가는 악몽을 꾸었어 연필이 바닥에 뒹굴었어 눈이 오고 오일 파스텔은 다 닳아 없어지고 너를 문지르느라 지문은 옅어지고 연필심도 다 엷어져 부서지는 꿈속이었지 너를 계속 그리는 동안에 꿈속에서 계속 깨고 싶어서 머리가 깨져라 하며 머리를 날렸어 날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너를 생각했어 창밖을 내다보니 창밖은 온통 하얀 연골의 무덤이었지 하얀 연골이 만들어 내는 곡선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지 하얀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창밖에는 전기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계속해서 몸이 날아가는 꿈을 꾸었어 계속 현실이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뭇거렸지 머뭇거리는 사이 우리 사이도 자꾸 바뀌었지 우리는 그리스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지 방은 트윈 베드였고. 창문은 하나. 침대가 두 개.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아무것도 없다는 건 얼마나 평온한 일인지 서로의 몸을 뒤척이는 일 말고는 할 것이 없다는 일은 얼마나 평온한 일인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어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없었어 해변만이 있을 뿐 창밖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전부였어 호텔이 있는 도시가 전부 바다, 오직 바다만이 전부였어 * 2600년 최초의 여성 서정 시인인 사포의 고향이란 이야기가 퍼지며 유명해진 섬이다. 전설에 따르면 2600년전 사포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이곳에 어린 소녀들을 모아 시를 가르치는 교육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 공동체에는 동성애가 행해진다는 소문이 퍼져 이후 대륙에는 레스보스 주민은 동성애자는 말이 돌았을 정도라고 한다.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은 여기서 유래했다.
- 관리자
- 2025-06-01
에덴 이소호 의사들이 보는 앞에서 한번 쩔쩔 끓인 뒤 병실 침대에 던졌지 아무도 보지 않았어 내가 다시 쩔걱거리자 애인은 말했어 이 병원은 내가 가면 영원히 죽을 거야 그때 네가 말한 침대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 있었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지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서로에게 침을 뱉었다 서로의 입속에 침을 넣었다 서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안겼다 서로가 안고 있던 침이 폭발했다 서로가 폭발한 침 속에서 두 마리의 뱀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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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미래 시차 연습 박연 태어나기 직전 가장 격렬하게 뒤척이고 있을 벌레의 알들. 리듬이 되기 전의 리듬을 생각해. 빛을 만드는 구더기들. 처음 시작되었을 장송곡의 리듬을 생각해. 불의 이마 위에 손등을 대어 보는 아이의 숨죽임. 열이 올라 울고 있는 불덩이의 뒤척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뒷모습을 매번 돌아보는. 어둠의 가장자리를 헤아리려는. 이해했다고 믿을 때마다 스스로를 한 꺼풀씩 벗겨 내서 살갗이랄 게 남지 않은 사람의 리듬을 생각해. 도끼로 스스로를 찍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어서 누구나 용서할 수 있는. 날개를 퍼덕이는 새의 노동, 노동으로 인한 근육의 파열. 힘줄이 끊어지는 소리를 듣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우는 부리의 리듬을 생각해. 언어를 가지지 않은 자의 지저귀는 움직이는 타오르는 리듬을 생각해. 눈송이와 눈보라 중 무엇이 더 치열한 리듬을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듯이.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는 중인. 펄럭이며 뒤섞이는. 흩날릴 때 가장 선명해지는 리듬을 생각해. 힘을 주어 말할 때마다 불타오르는 돌이 되어 상대를 관통하는 사람. 관통한 자리에는 부드러운 검은 재가 남고. 상처가 남지 않도록 모조리 태우며 타오르는. 흐르는 피가 없도록 내부를 닦아 내는 방식을 생각해. 매일 격전지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 애써 왔으므로. 모든 공간이 개척지이고. 부딪히고 뚫고 나가는 방식만이 자신을 살게 하는 환한 리듬을.
- 관리자
- 2025-06-01
용사 박연 쌀떡 한 덩어리가 언덕에서 굴러떨어진다 횃불을 감추고 빈 항아리를 들고 떨어지는 쌀떡을 줍기 위해 뛰었다 발을 헛디뎌 똥통에 발이 빠질 때마다 잇새로 웃음이 샜다 불씨를 만들기 위해 나뭇가지 끝을 뾰족하게 깎다가 손바닥에 잔가시가 박혔다 발 앞에 빛나는 바늘이 쌓인다 바늘을 들어 쓴다 나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1) 초가집에 아기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어른들은 태연했다 오래전 죽은 네 언니가 있어 살아있는 아를 질투하나 보다 깎은 나뭇가지를 나무판에 대고 비벼 재를 만들었다 불씨가 생기기도 전에 기침이 새어 나왔다 저녁 풀숲 사이 개구리 울기 시작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점점 커다래지는 파문 날카롭게 벼른 선단을 발톱으로 두른 채 뚫린 창호지에 귀를 댔다 나를 위협하는 건 오직 나의 빛나는 이빨뿐이니 오만만이 나의 사랑이라 이야기를 들을수록 귀가 커졌다 귀를 질질 끌며 잠자리에 들기 전 손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낼 때는 간지러웠다 흙 묻은 떡을 씹었다 씹을수록 단맛이 났다 혀끝이 따끔거렸다 비명이 고이고 고여 구슬이 되어 굴러왔다 좋다고 밤낮으로 구슬을 찾으러 다녔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그런 말을 하는 건 도무지 무섭지 않았다 죽은 언니 몫까지 주머니를 두둑이 챙기고 싶었다 1) 사무엘상 제17장 33절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를 변형하여 인용
- 관리자
- 2025-06-01
유기생명체 노은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만들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분명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 관리자
- 2025-06-01
생사륜1) 노은 이걸 놓치면 죽는 거야 삶은 돌아가는 두 개의 바퀴 같은 거라서 우리는 이걸 멈출 수 없고 평행한 두 개의 다리 두 개의 손 두 개의 삶 습관적으로 유치해지는 륜과 내가 있다 우리는 힘의 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시권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사람들 륜이 대답했다 원심분리기에 삶을 집어넣고 돌리고 싶다 그렇게 하면 몇이 되어 무엇이 나올까 우리는 머리와 머리를 맞댄 채로 그런 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할 수 있는 거라서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무언가를 쥐고 있는 일 태어날 때와 똑같은 마음인 거니까 띡똑띡똑 오늘도 삶과 죽음의 서커스는 돌기 시작하지 등을 맞댄 채 동일한 궤적을 그리며 돌아가는 륜과 나의 요람 포근한 이부자리 삐걱거리며 주저앉은 침대 결국에는 무덤으로 겹쳐 눕는 원 인간은 어디까지 돌(spin) 수 있는 거지? 륜은 물었고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는 분명 성심성의껏 회전시키고 있으니까 이것 봐봐, 여러 개의 겹쳐진 손으로 젖 먹던 힘을 다해 당기고 있잖아 태어났을 때의 중력과도 같은 질량을 땀을 슥슥 문지르고 싶은 마음 인중에서 살랑거리는 깃털처럼 가벼운 두 개의 축을 두 개의 삶을 아직까지는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를 휑한 정수리에 털이 자라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돌리고 있으니까 지친 쪽이 먼저 놓치는 게임이라 륜은 두손 두발을 들며 힘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졌다 천천히 침범하는 내가 있었다 1) 삶과 죽음의 바퀴. 두 개의 원이 나란한 궤적을 그려 가며 회전하는 장치로 서커스에서 사용된다. 한 번 원에 발을 들인 순간, 나는 륜을 좇고 륜은 나를 좇는다. 끝과 끝이 함께인 모양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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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거림 이창수 까마귀가 운다 바위 위에서 운다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줄기 보고 운다 할 줄 아는 게 우는 것밖에 없다는 듯 까마귀가 운다 소리 없이 피고 지는 철쭉 희고 붉은 화사한 철쭉 속에서 까마귀가 운다 우는 일이 제 일이라는 듯 검은 몸통에 울음 한 바가지 담아 지리산 여기저기에 흘리고 있다 지리산 초록 항아리 속 말라가는 구상나무에 앉아 까마귀가 운다 유월에서 칠월로 흐르는 바람 속에서 칠월에서 팔월로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 관리자
- 2025-06-01
마술사 이창수 구청 건너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에서 젊은 마술사는 지나가는 아이의 겨드랑이와 머리털 사이에서 동전 꺼냈다. 아이의 커다란 눈앞에서 마술사는 지팡이를 보자기로 바꾸고 그 속에서 흰 비둘기도 꺼냈다. 엄마의 손잡고 가다 아주 걸음 멈춘 아이 물방울 속에 넣는 묘기도 보여 주었다. 해리포터가 다니던 마법 학교를 졸업한 모양이군. 구경하던 구청 직원이 큰 소리로 웃었다. 아이들의 박수 소리에 허공 떠다니던 물방울이 터졌다. 비누 냄새가 났다. 알면서 속고 모르면서 속는 아무리 자주 속아도 손해 볼 게 없는 길거리 마술 앞에서 아이들이 깔깔깔 뛰어다닌다. 해가 기울고 동전 몇 푼 딸랑거리는 깡통과 낡은 보자기와 날 줄 모르는 비둘기 챙겨 든 마술사가 분장 지운다. 마술사가 노인이 되었다. 보따리 들고 노인이 골목으로 사라지고 엄마의 손 꼭 잡은 아이들 머리 위 누군가 커다란 손가락으로 해를 집어 달로 바꾼다. 비누 냄새가 남아 있는 어두워 가는 골목에서 나는 달 뒤에 숨은 흰 머리카락이 보고 싶었다.
- 관리자
- 2025-06-01
주인 기원석 네가 먼저 나갔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네가 나간 자리에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빨간 목줄을 채운 감정이었다. 그것은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두고 간 감정을 데리고 나왔다. 너를 찾아 나는 무작정 뛰었다. 꼬리를 흔들며 감정도 따라 뛰었다. 감정은 어느새 나보다 앞서 나갔다. 감정이 목줄을 팽팽할 정도로 당겼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내달리다 길을 잃어버렸다. 감정은 지치지도 않았다. 나는 감정을 따라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 감정을 따라 정글짐으로 들어가고, 감정을 따라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감정을 따라 철조망을 넘어 폐건물로 들어가고, 감정을 따라, 푸른 감나무를 따라, 나는 잦아진 숲길로, 산새들을 따라, 엽총 소리를 따라, 감정을 따라 들어가고, 미궁 같은 계절을 따라, 낙엽이 쌓인 개울물을 따라, 나는, 죄를 따라, 빨간 목줄을 따라 들어가던,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감정을 이따금, 뒤돌아보며 모든 곳으로부터 되돌아 나왔다. 나오기 전의 그 자리에 네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네게 놓고 간 게 없느냐고 물었다. 네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울처럼 흔들리는 얼굴로
- 관리자
- 2025-06-01
아무렴 어때요 기원석 그렇게 말한 뒤에도 맴도는 것들, 이를테면 언제쯤 열어 봐도 좋을지 몇 밤이나 자야 좋을지 몇 마디를 떠올려야 좋을지 얼마나 삼켜야 좋을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기억들은 어쩌다 떠올려도 좋을지 이렇게나 조용해도 좋을지 얼마나 자주 비워야 좋을지 무엇을 알려야 좋을지 누구를 만나면 좋을지 얼마나 그리워해도 좋을지 언제까지 손을 흔들면 좋을지 몇 번이나 기워 붙여도 좋을지 몇 번이나 씹어 삼켜도 좋을지 잔을 얼마나 채우면 좋을지 언제쯤 문을 닫아도 좋을지 무슨 말을 적어 두면 좋을지 얼마나 흐르면 좋을지 얼마나 멈추면 좋을지 언제쯤 울지 않아도 웃지 않아도 좋을지 누가 읽어도 좋을지 언제 읽어도 좋을지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멀리 가도 좋을지 얼마나 멀리 가야 좋을지 얼마나 빠르게 가면 좋을지 얼마나 이곳을 비워도 좋을지 얼마나 나를 비워도 좋을지 언제쯤 웃어도 울어도 좋을지 언젠가 써도 좋을지 언젠가 쓰지 않아도 좋을지 그래도 좋을지
- 관리자
- 2025-06-01
히데오 서장원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저녁나절, 한적한 거리를 걷던 중에 히데오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줬다. 이후 히데오는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더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히데오의 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꿸 수 있게 됐다. 히데오가 태어난 곳은 교토 외곽으로,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지 교토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택가였다. 히데오는 그곳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습한 여름 날씨나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자기 기억인지 교토에 대해 보고 들은 뒤 상상해 낸 이미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곤 했다. 교토에서 있었던 일 중 히데오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나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 책상 가득 자이니치나 조센진, 총 같은 단어가 적혀 있던 풍경이나 동급생 남자애들이 그의 가방을 걷어차며 드리블 시합을 했던 일, 그를 조롱하려고 반 아이들이 케이팝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일, 그런 사건들. 한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히데오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나고야로 이주하는 일을 의논했다. 히데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나고야에서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히데오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데오가 아는 한, 히데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도 아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 거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날 밤, 히데오는 코의 통증과 식도로 넘어오는 피, 어머니의 고요한 얼굴과 나고야에서 보낼 새로운 나날의 환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히데오의 부모는 나고야행을 두고 갈팡질팡했고, 히데오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히데오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에서의 삶을 철저히 숨겼다.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첫 번째 이름 히데오를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히데오를 처음 본 건 연극원 강의실에서였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3월, 나와 히데오를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이 강의실에 책상을 둥글게 붙여 앉았다. 그해 연극원에서는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을 모아 15분 내외의 단막극, 일명 “짤막극”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신설했다. 입학 전에 그룹별로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3월 개강과 동시에 연극원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이색적인 신입생 환영회라 할 수 있었다. 학보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신입생 그룹 중 하나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해 들어 나에게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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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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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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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거짓말은 하얗게 김화진 여름까지 나는 지옥에 사는 것 같았다. 그간 나를 못살게 군 건 단 두 가지뿐이었는데, 그게 하필 내가 끼고 살던 전부였다. 날아간 보증금, 사라진 남자 친구. 그 모든 걸 겪어 내는 동안 미친 듯이 찌는 혹독한 여름 날씨와 함께였다. 찜통 지옥. 전세 사기 지옥. 이별 지옥. 모든 일이 일단락이 되고 거짓말처럼 가을바람이 불었다. 나는 드디어, 모든 손해와 마음에 남은 생채기와 우울감에도 불구하고 후련함을 느꼈다. 사실상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서로가 단단히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민과 생각을 조금 내려놓아도 된다는 게 기뻐서, 얼굴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하고서도 출근하는 걸음만은 비교적 가벼웠다. 나는 베이비슈가 유명한 빵집 겸 카페에서 슈를 굽고 크림을 짜 넣는 일을 한다. 다른 빵도 굽지만, 그래도 슈를 가장 많이 굽는다. 빵집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 그래도 이 일이 좋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앉아서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삐 손을 움직이는 직업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집에 돌아가서 다리를 마사지하는 시간도 좋다. 디저트를 만드는 걸 좋아하지만, 사실 나는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만드는 빵 중 짭짤한 치즈와 올리브가 들어간 발효빵을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내 빵 취향과는 상관없이 빵을 만드는 일은 좋다. 하얀 반죽을 만드는 일을, 하얀 크림을 짜내는 일을 좋아한다. 그게 단 빵일지라도. 그것의 맛을 죽도록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맛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일하는 빵집의 외관은 흰 벽에 오렌지색 간판과 차양이 포인트인 유럽풍의 디자인이다. 나는 유럽을 가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이 유럽풍인 것만은 알 수 있다. 가끔 대청소를 하는 날이면 호스를 끌어다 흰 벽에 뿌려 밀대걸레로 쌓이고 덮인 먼지를 닦는데, 고되지만 그 작업도 좋다. 눈에 띄게 희어진 벽이 보기 좋아서 가끔 집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머릿속이 생각으로 뒤죽박죽되었을 때도 밀대걸레로 머릿속에 쌓인 생각들을 밀어 버리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진짜로 좀 한결 나아진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생각들이 꾸물꾸물 밀려오는 게 느껴지지만 그러면 한 번 더 싹. 그 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잠이 든다.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생각들은 당연하게도, 여름까지 있었던 불행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미 다 벌어진 일을 왜 몇백 번이고 다시 정리하는 걸까, 나도 모르지만 이유를 모르는 와중에도 생각은 계속되었다. 그 일로 책을 쓰려고 그러나 왜 자꾸 시간대를 맞춰 보는 거야? 시작은 전세 사기였다. 그것은 봄부터였다. 이 가게에 출근하기로 결정된 것이 봄이어서였다. 지금 일하는 가게에 출근하기 전까지 나는 조금 쉬고 있었다. 원해서는 아니었고, 조금 쉬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은 아니었는데 이전에 일하던 가게에서 해고당했다. 그 일을 지옥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억울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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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문장웹진 REWIND]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자연의 질서와 공동체의 관습, 그리고 어민으로서의 노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향’인 것이다. 그러니까 떠날 수 없는 세대와, 어떡해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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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점과 획의 시간 ― 한강, 『빛과 실』1)로 『바람이 분다, 가라』2) 다시 읽기 이지연 1. 코스모스의 정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별의 자녀들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우주(宇宙)’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오늘, 위아래와 사방’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원전 4세기경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이 말은 천지만물(天地萬物)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아우르는 세상의 총체를 뜻하는 것이었다.3) ‘우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세 가지가 있는데 각각 목적과 용도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 그중 ‘코스모스’는 혼돈, 무질서를 뜻하는 ‘카오스(χάος)’의 반의어로서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됐다. 1980년 칼 세이건은 천문학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겠다는 목적으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거기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영되자마자 전 세계 인구의 3%가 시청했다는 이 프로그램은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되면서 현재까지 1,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 칼 세이건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코스모스』가 처음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원본 출간 이듬해인 1981년이었다. 당시 번역자인 서광운은 ‘Cosmos’를 ‘우주’라고 번역했고, 이후 2004년 홍승수의 번역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썼다.4) 그가 번역한 『코스모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5)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한 번에 오가는 ‘모든 것’의 이치가 우주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스페이스’도 ‘유니버스’도 아닌, ‘질서’를 뜻하는 이름 ‘코스모스’로 불린다. 600쪽에 달하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세이건의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그 탄생부터 소멸까지 모두 코스모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로서 코스모스의 자손이자 미래이다. 올해 4월, 문학과지성사는 한강의 산문집 『빛과 실』을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작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진행한 기념 강연의 제목을 땄고, 표지에는 그의 작은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흑백 사진이 실려 있다. 온통 까만 배경에서 유독 흰 사각형의 무늬가 눈에 띈다. 책에 수록된 산문 「북향 정원」에서 한강은 볕이 들지 않는 정원에서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모아 주어야 한다고 썼다. 거울에 반사된 빛의 형상인 듯한 그것은 &lsqu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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