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호
- 작성일 2025-07-01
- 댓글수 0
기획의 말
문장웹진 2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선정한 대표 작품들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
안중경
안중경 작가 한마디
지도에 없는 곳도 우리 생의 통로가 되어 어디선가 만나게 된다.
문장웹진 7월호 살펴보기
[문장웹진 REWIND]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서. 누구에게나 방이 필요하지만 중심인물인 이십구 년 차 중개업자인 김 씨는 “햇빛이 잘 들고 보증금 천오백만 원 정도의 방을 원하는&rdquo
- 관리자
- 2025-07-01
전쟁에 반대하며 ―고통과 쟁론 입론 박동억 1. 고통으로 향하기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98년 초의 일이었다. 이 무렵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은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뮌스터 대학에서 근동 고고학을 전공하며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차였다. 그해 말 NATO가 전쟁에 개입했고 공군을 동원하여 세르비아에 폭격을 개시했다. 허수경은 매스컴 보도를 보며 전쟁의 참혹함에 경악했고 두 나라의 고통받는 민간인을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의 석사논문 주제는 기원전 6,800년에 세워진 중동의 작은 도시 초가 미쉬(Choghā Mīsh)였다. 그는 반만년 전의 멸망한 유적지를 오가며 “도대체, 이런 아카데미의 고상한 놀이가 지금의 전쟁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잠겼다.1) 다행인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2001년 발표한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팔다리를 잃었고, 아이와 여자들은 고향을 잃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언어로 열거할 때 단조로운 사실이 되어 버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실감할 수 있도록 허수경은 시적인 상상력을 활용했다. 그의 시집에는 전쟁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스스로 목을 자르는 극적인 사건이나 난민이 된 여자들이 짐승 우리로 피난했다가 짐승과 교접하는 일화가 나타난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언어화할 수 없는 전쟁의 잔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코소보 전쟁은 그저 먼 나라의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아니었다. 허수경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 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라고 썼다. 이러한 애도가 무색하게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시인은 2005년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서문에서 아예 자신의 시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反)전쟁에 대한 노래’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시 쓰기는 그의 영혼이 저 먼 타인의 고통에 접경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어떻게 그는 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 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어떤 의미로 그것은 그가 자임한 윤리의식이 역사적 복잡성이나 정치적 알력을 멀리한 채 성립된 간명한 문제의식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누가 가해자인가. 허수경은 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자, 폭력을 수행하는 자를 고발했다. 누가 피해자인가. 그는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전쟁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평화주의나 남성중심주의에 기초한 문명을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 일컬어졌다. 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 관리자
- 2025-07-01
암시 최경민 뚜껑을 돌려 내용물을 꺼내야 합니다 온도가 낮은 장소에 두면 성능이 저하될 수도 있습니다 과량 섭취 시 질식의 우려가 있으니 한 알씩 드세요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하는 기술은 사막이 넓어지는 이유와 같습니다 짐 자무시의 영화를 본 적이 있나요? 별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라디오에도 나왔습니다 호주의 검은 따오기는 빈 치킨이라고 부른대요 그리고 양파는 남성명사입니다 여섯 살 아들은 자고 있네요 저도 여백만 정하며 살고 싶은 기분을 알고 있습니다 세 시에는 면도를 하고 이불의 간격을 정리해 보세요 천국이 포함된 안내문은 두 번째 서랍에 있습니다 거의 모든 걸 담을 수 있다는 블록이 있습니다 가볍게 헹궈 준 다음 창가에 말려 주세요 다 마르면 한번 쪼개 보세요 검은 머리에 속은 노란색이라고 합니다
- 관리자
- 2025-07-01
독서 모임 최경민 매일 다른 장소를 열어 보고 있어요 처음 오시는 분에게는 상자가 있습니다 이달의 질문지가 있으니 집에서 작성해 보세요 어디에 내리면 좋겠습니까? : 애인이 사는 해변에 내려 주세요 그는 다시 미치게 될까요? : 캘린더에 날짜를 표시해 뒀습니다 저는 크림색 수정테이프를 좋아합니다 캘린더는 귤 모양 스티커랑 같이 샀습니다 금세기 말 출판계의 위대한 결실 오래된 띠지들은 사건을 모아 두는 통에 담겨 있습니다 책꽂이 옆 옷장을 열면 세계의 모든 체크무늬를 한 번에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린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요 저는 예언에 취미가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여름 한정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그는 이국의 해변에서 발견될 예정입니다 묘지 안내원 역할을 맡고 있을 거예요 주인공을 찍은 사진으로 방을 꾸밉니다 계란 껍질에 흙을 담고 물을 줍니다 모종이 배경 역할에 심취해 있습니다 그럼 한번 나가 보시겠어요? 낮게 나는 비행기를 멈춰 세웁니다 출입문 비밀번호는 4736입니다 어디까지 올라가 보고 싶어요? 내려갈 일만 남은 이야기는 인기가 없습니다 흔들리는 컵은 코스터 위에 올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 관리자
- 2025-07-01
열다섯 번의 겨울이 지났다 최현우 여름에 버리지 못할 목도리는 없어 우리는 모든 옷장을 열었다 결심을 부추긴 건 파란 봉투를 소각장에 던져 놓고 돌아오다 본 어딘가 기울어진 집 무너질 듯 비틀거리는 중심축을 뒤틀리게 한 석양의 착시 유행했던 천국들 비만했던 계절들 가장 먼저 버려지는 건 너무 입어 형태를 잃었거나 한 번만 입고 입지 않았거나 어쩌면 한 번도 입지 않아서 영영 입을 수 없게 된 아쉽지 않을까 겨울은 올 텐데 너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가소로운 미련이었다 몸은 하나인데 대봉투 열세 묶음 너무 많이 입고 벗었고 그리고 돌아가지 않았고 몇 번을 왕복하며 버리고 다시 집으로 간다 집이 무게를 회복하기를 바라면서 운명이 더욱 세련되어지기를 바라면서 대문 앞에서 네가 잠깐만, 하고 먼지 낀 손을 놓고 뒤돌아 뛰어간다 소각장 쪽으로 다 없어질 곳으로 내가 본 너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목도리를 하지 않는다
- 관리자
- 2025-07-01
인터미션 최현우 늙은 피아니스트가 잠시 후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발음을 적어둔 종이를 펼쳤다 “다음 곡, 바다으에서 용감 받았습니다” 서툰 한국말로 말한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나, 영감” 씩 웃으며 자신의 희고 벗겨진 정수리를 쓰다듬는다 농담이 끝나고 관객들이 웃는다 “그럼 잘 들으십세요” 박수가 쏟아진다 어깨는 좁아졌다 구부정한 허리로 건반 앞에 앉는다 삼십 년 전에 만든 음악을 두드린다 그때의 결별 그때의 폭풍 그때의 믿음 증기, 털어 내지 못한 소금기 같은 거 피아니스트는 음악을 두고 늙었다 음악은 피아니스트를 떠나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까 이름 몇 개를 누르기도 했을 것 수중의 물길 속으로 뼛가루를 던지며 그 소리도 채보하는 동안 도무지 찾아오지 않는 조율사를 기다렸다면 어긋나는 관절을 주무르며 누가 버린 악기에 귀를 대고 두들겨 보듯이 보았다 관객석의 빈자리를 힐끔 보며 무언가 타이핑 하듯 피아노를 적는 손가락 곡이 종료되고 암전 풀린 객석을 쳐다보는 그가 다시 씩 웃는다 박수가 쏟아진다 그가 스툴에서 일어난다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본다 텅 빈 백지를 들고 읽는다 다음 곡이 있다고, 서툴게 말한다
- 관리자
- 2025-07-01
부탁의 해변 송재학 파도는, 바다의 간절함을, 바스러지도록 움켜쥐고 있다 눈물의 평지를 달려와서 파도에 매달린 눈썹의 휘날리는 생각 때문에 먼지투성이 항구는 화분의 품종을 바꾸는 중이다 내 아랫도리가 흠씬 젖지 않을 수 없다 먼 곳이라는 꽃말을 가진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건 다른 생각이다 낮달이 만들어 준 면적만큼 어리둥절했다 좋은 색과 슬픈 색이 다르지 않다는 해안선 일부처럼 내 누낭에도 길고 긴 주름이 있다 가슴을 덮는 해일, 자주 마주치는 이 헐렁한 물의 높낮이를 또 어쩌자는 걸까 물결에 비친 나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거 같은 마음이다 먼바다가 파도에게 부탁한 일을 다시 내륙으로 전달하는 순서에 있는 검붉은 절단면을 감출 수 없다
- 관리자
- 2025-07-01
첫눈처럼 종로5정목에 간다 송재학 1925년 내내 경성일보의 백두산 화산 소식을 정기구독했다 입구가 비좁은 땅의 숨소리 때문에 잉크 냄새와 검음은 서로를 알게 되면서 분주하다 말린 꽃을 판매하는 잡화점마다 닙보노홍 일츅 죠선 소리판의 광고, 도월색과 김산월이 부른 「압록강절」 「장한몽가」 「이 풍진 세상을」 「시들은 방초」의 노랫말은 열대어 주둥이처럼 납작하고 뾰족하니 수줍은 느낌 「B사감과 러브레터」와 「벙어리 삼룡이」는 진열대 앞자리여서 선 자리마다 몇 쪽씩 읽고 나는 누구일까 되새김하는 어린 사람들 연해주나 오사카로 훌쩍 떠나간 친척들은 그곳에서도 알음알음이 있다 할미꽃 김음전이 태어난 해, 을축년 대홍수를 기록한 경성부 수재도를 남겼다는 1925년 아직은 성기지만 종로5정목을 지나가면 조선약학강습소의 근처 약 냄새는 뭉뭉하다 모던 보이도 기다리는 전차가 돋을새김한 흑백 삽화들 버짐나무 잎들은 진즉에 누레졌다 종로5우편소가 회색 목을 뽑아서 어딜까 기웃거리는데 양옥과 화옥 돌담을 듬성듬성 셈하면서 상해 황포구 소문에 귀 기울인다 경성 정동에 적기가 꽂힌 공사관이 있다지만 싸락눈 때문에 관절염이 도드라지는 골목길은 구부러지면서 북로군 흔적을 지우니까 어떤 목질의 주소라도 자꾸 희미해진다 연해주에서 북만주까지 대설주의보에 휩싸이는 청춘의 강설량은 들쑥날쑥하다 국경의 밤을 넘나드는 순애보는 일찍 북촌과 남촌이라는 이중도시 경성의 밤길을 창백하게 비추는 가로등 아래 폐결핵과 마주쳤다 무섭고 버거운 일이 많은 친일문학선집의 등뼈는 잘 꺾어지기에 진둥걸음으로 뒤쫓아 간다 첫눈과 함께 도착한 옛날 경성의 단색 두꺼워지는 경성백과사전을 믿는다 2025년에서 출발하여 1925년 구간을 왕래하는 경성열차궤도에 각혈이 파인다 들꽃이 피고 진 흔적이 고스란히 화물칸에 적재되어 있다 음영이 많은 경성역의 재능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묶는 일 백 년의 연대기에서 수줍은 삭망을 골라 낸다 외롭고 뿌연 유리창에 입김으로 써 내려간 상하이 경성 도쿄를 오가는 우울하고 비뚤비뚤한 직선들
- 관리자
- 2025-07-01
정당한 요구 여세실 당신은 어느 날 나더러 미쳤다고 말하고 나는 알게 된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어느 날 문득 양배추의 맥박을 알아차리게 된다 입속에 샐러드를 넣고 천천히 씹을 때 사려 깊은 초록의 비명을 듣게 된다 산책을 하다가 발치 앞에 떨어진 꽃 뭉텅이를 줍고 사지가 찢길 것 같아 멈춰 섰다 급소를 걷어차인 구름의 표정을 읽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사슴의 뿔과 나뭇가지의 경로가 같아 보이고 그러다가 우리 집 앞 안양천 물비늘에서 혼잣말의 손금을 읽게 된다 접시 하나가 깨질 때 그 속에서 천둥 벼락을 보게 됨 그런 것을 알아보게 되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도 됨 실격임 일정하고 똑바른 패턴들 아기의 옷에 그려진 비행기는 셀 수 없어서 꾸준히 사랑하려면 더 느리게 뛰기 위해 전념해야 함 물비늘 저것은 동물이다 졸졸졸 포효하는 한 줄기 동물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 입술이 겨울마다 트고 시뻘겋게 뜯어져 피톨이 맺힐 이유가 없다 잠 못 들고 일어나 한밤 내내 나무 옆에 비뚜름히 서서 당신의 가장자리를 녹이느라 두 뺨이 붉어질 리 없다 어느 날 문득 귀가 멀고 눈이 멀 리 없다 구름을 팔려면 양식장에 가두어 한 마리씩 팔아야 할까 다발을 엮어 한 단씩 값을 매겨야 할까 조금씩 말라 가는 동안에도 불을 써서 밥상을 차려 낼 줄 알게 됨 배우지 않아도 칼을 잡는 법을 익히게 됨 계량 없이 양념을 한 줄 알게 됨 그리고 조용히 내 혀를 베고 손모가지를 비틀게도 됨 어떤 의사는 나를 마녀로 진단하고 또 우리 부모는 내가 신을 받은 줄 알고 치성을 드려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여자뿐인 여자, 숨길 수 없이 대번에 여자인 것이 탄로 난다 여자이기 전에 먼저 천치가 된 믿을 수 없는 여자라는 것
- 관리자
- 2025-07-01
계주 여세실 나는 오늘 처음 보는 엄마가 되어 너를 위해 달린다 네가 지금껏 달려 온 레이스를 계속 이어 나가 보려고 우리는 전생에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사이 같아 다른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 나가 놀 때 외따로 거리를 두고 앉아 각자의 책을 읽고 있었을 것 같아 이미 배가 부른대도 억지로 식판에 남아 있는 밥을 다 먹는 심정으로 각자 몫의 책을 읽어 내려 갔겠지 나는 오랫동안 어설프게 말을 건네지 않으려고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 척 네 뒤에서 쭈뼛거려 온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 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것일 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 말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는 비껴가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똑똑히 건네주려고, 너의 친구가 되어 보려고 망설임 없이 너의 운동장에서 뛴다 배턴을 넘겨받아 질주한다 앞서 나가는 상대 팀의 뒤통수가 영영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처럼 보일 때 숨을 참고 그 뒷모습을 한 번에 눈앞으로 끌어당겨 온다 뛴다 당혹감을 넘어, 미래와 안녕을 넘어, 도달해 본 적 없는 새로운 가정법에 접근하기 위해 팔다리를 움직여 전속력으로 너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 마침내 너에게 외칠 수 있다 네가 이겼어 나는 어쩌면 너의 엄마이거나 언니이거나 언젠가 떠나 온 적 있는 집 내 사랑도 생활이 되고 싶어 비가 내리면 흠씬 젖고 너는 그냥 와락 울어 버려도 좋다 해가 나면 잠을 뭉개고 앉아 칭얼대도 좋다 네 입에 넣어 주는 반찬들을 다 뱉어 내고 투정을 해도 좋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하루 종일 내 머리맡에서 꿈의 뒷이야기를 지어 말해도 좋다 내 화단에 새로 돋아난 봉우리들을 다 꺾어 가지고 오롯이 너만이 향기로워도 좋다 너는 나에게 온다 나도 너에게 간다 네가 꽝 닫아 걸어 잠그고 있어도 안심되는 세계가 되기 위해 언제든 문을 열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생활을 향해 다발로 묶이고 싶은 마음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풍경을 향해 뛴다
- 관리자
- 2025-07-01
휴지기 권민경 만원 전철 창문에 짜부된 볼처럼 네게 붙어 있었지 많은 걸 해냈다 남몰래 입안에서 이름 굴리며 힘내고 동명이인투성이 세상 어떤 이름은 유일하다 혀끝으로 능히 바다라도 만들 기세 너 바다에 있는 왕의 무덤을 알아? 정말 대박 아이디어지 뭐니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니 기상이 대단하지만 우린 서로의 목숨이나 잘 지키자 나는 매일 아무 역에서 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실은 극기를 모름, 겨울 바다를 헤엄칠 줄 모름, 얼음 위를 뒤뚱거림, 매일이, 생활이 미끄러지고 많은 걸 잃었다 칠칠치 못하게 놓고 온 부장품, 비닐우산, 시시각각 죽음으로 향하는 세포들 여전히 나이지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 생물적으로다가 참 아름답다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되레 미쳤었다 말할 수도 있지만 아름답니? 사랑이 밥 먹여 주니? 남의 무덤 앞에서 나눴던 대화, 초록 곰 인형, 소중했던 트레이딩 카드 잡다한 취급을 받으며 가라앉겠지만 유실물 센터 갈 것 없이 우리 각자 건강하길 바라 멀리멀리 멀어져 운 나쁘게 만원 전철에 타도
- 관리자
- 2025-07-01
특정기 권민경 죽지도 않은 각설이처럼 우울기가 다시 찾아와도 그 기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인생을 케이크처럼 똑 잘라 낸 시기 특정 기운 똑같은 암수가 새끼를 낳고 또 낳아도 매번 다른 특색의 자손이 태어나는 것처럼 내가 가진 기운도 그러했다 배에 얼룩무늬가 있는 강아지 누렁둥이 어미가 품어 주지 않아 얼어 죽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미 죽어 나왔던 걸지도 모른다 문득 발굴되는 과거 새로운 역사의 증거는 어째서 자꾸 발견되는가 왜 확정되질 못하는가 의구스러웠는데 나는 내 가슴을 열고 도떼기시장 같은 유적지를 펼쳐 놓았다 오로지 혼자 발굴해야 한다 노동수용소에 나를 가둔 것은 나인가 아니면 낳아 놓고 얼어 죽게 한 사람들인가 넌 죽지 않았어 나도 알지 알지만 연명한다 글로 먹고산다는 뜻이 아니라 쓰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부족한 도파민을 채우기 위해 파괴적으로 굴거나 슬퍼지고 그나마 쓺이 나를 잘 도왔다 착한 대학원생처럼 내가 뇌가 이상하더라도 참고 내게서 태어나 얼어 죽기 그리하여 지금은 빙하기 유적지 도떼기 5일 장 죄스러운 노동수용소 절멸 같은 단어들을 싹싹 지워 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시기 버스데이 나는 한겨울 홀로 살아남은 강아지 이름을 안다 샛별
- 관리자
- 2025-07-01
여름 대삼각형 -수지상결정눈 정다연 ⁑ 데네브 2,600~3,200(?)광년 측정 불확실 늙은 학자는 고어를 읽는다 종이 자작나무 버치 백자작나무 영혼이 날아가지 않게 뿌리로 감고 새 계절을 부르는 나무 학자는 눈을 감는다 어린 딸의 발목에 밴 민트 향처럼 잎이 수런거리고 디딘 발 아래 찬물이 고인다 사방은 은백색 숲 여름 곡식의 껍질처럼 눈이 내리고 눈, 눈이라고 본 적도 밟아 본 적도 없는 먼 나라의 죽은 단어를 소리 내 발음한다 촛불이 꺼진다 여름 초거성이 드러난다 어둠에서도 반짝이는 열쇠처럼 학자는 책을 덮는다 사유를 덧씌우지 않고 이름짓기를 그만둔다 별들의 위치를 베끼지 않는다 각기 다른 조도를 기억하면서 부스러질 것 같은 과거의 필체와 접촉한다 ⁑ 알타이르 16광년 다시 눈, 눈이다 남자는 설산을 오른다 분명 누군가는 바보라 할 테지 길 잃기 좋은 이곳에 안내자도 없이 턱끝까지 숨이 차 폐 속까지 찬 공기가 들이찰 때 어쩐지 벌을 받는 것 같지만 상쾌하다 수지상결정눈 수지상결정눈 벨 듯이 날카롭지만 무엇도 베지 않는 그 윤곽을 훔치고 싶다 조부는 말했었지 눈에게 부끄럽다 눈이 다 봤다 그리고 눈이 덮었다 그 많은 구덩이를 피를 단호하게 조부의 임종은 무엇 하나 미화시키지 못했지만 이 눈은 세상의 것들로 오염될 것 같지 않다 리셋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방향에 서 있어도 빛이 돌아오도록 설계된 반사경처럼 손바닥에 눈이 도착한다 깨뜨린다 깨뜨린다 깨진다 그것을 눈이 지켜본다 ⁑ 베가 25광년 7세 아이는 문을 걸어 잠근다 책상 밑으로 들어가 머리칼을 푼다 손에는 유리구슬로 엮은 머리끈이 쥐어져 있다 아이는 그것을 가위로 자른다 무언가를 갖겠다는 것이 어떤 것을 절단하는 일이라는 걸 학습하면서 가방에 집어넣는다 안은 이미 조잡한 색색의 구슬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아이가 세상 모르게 탐낸 첫 번째 아름다움이다 아이는 혼자서 별을 바라본다 부모가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멋대로 이름을 붙였다가 지워 버린다 죽죽 취소선을 긋는다 손가락이 붓도록 빤다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떠오를 때까지 눈동자가 영문 없이 빛난다 별이 그러하듯이 아이는 거울 앞에 선다 가까이 다가간다 별빛이 미약하게 방안을 드리운다 아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이 자신임을 깨닫는다 몸을 이리저리 털고 문질러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은 아이의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첫 번째 비밀이다 누구도 방문을 두드리지 않아서 아이는 자신을 두드린다 만지고 깨우고 논다 저마다의 별들이 그 장면을 자신이 품은 수억 개의 시간대로 내보낸다 여름 나라에서는 이상한 첫눈이 내리고 눈, 눈이라 말하기 시작한다
- 관리자
- 2025-07-01
여름 대삼각형 -섬광 정다연 흙을 거두면 닿을 수 있는 깊이에 이야기는 잠들어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고 흑곰이 깨어나고 낮밤이 공평히 이야기에 어둠과 빛을 쏟았다 조금씩 벌어지는 옅은 꿈결에서 이야기는 의심 없는 맑은 기운으로 인간을 들었다 전부 지나가는 소리였다 한 줌 두 줌 흙을 걷어 낼 소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보드라운 손길은 아득하고 이야기는 혼자여야만 하지만 소녀는 올 것이다 온몸 가득 들어찬 피를 밝힐 가장 밝은 섬광 하나를 부싯돌처럼 품고 이야기는 마침내 그것이 드러나게 될 세상을 향해 전부를 쏟는다
- 관리자
- 2025-07-01
유리의 마음 백아온 선생님은 내 얼굴에 흰 천을 씌워 주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온 편지는 함부로 뜯어 보지 말아요. 50분짜리 모래시계가 뒤집혔다. * 열차는 어딘가를 지나치고 있었다. F열 13번 좌석에 앉아 소설의 도입부를 읽었다. 작가는 첫 페이지에 이 글은 20년 뒤, 사랑하는 딸에게 바치는 일기라고 했다. 작가는 딸이 자신을 ‘엄마’라고 불렀던 순간을 환희와 슬픔에 빗대서 쓰고 있었다. 마지막 줄엔 자기가 불행한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열차는 바다와 숲과 절벽을 지났고 식물원에 다다랐을 때 쏟아지는 잠. 그때 선생님은 원래 있던 모래에 모래를 덧대었다. 먼 과거를 쓸어내리는 모래. * 아이가 엄마에게 고래는 어떻게 울어요? 물었다. 고래는 푸우- 하고 울어. 푸우- 푸우- 푸우- 그렇게 고래 울음을 따라 우는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밑에 숨은 아이가 보였다. 엄마가 아끼는 화분을 깨뜨린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고 푸우- 푸우- 푸우- * 난 찢어진 몸에 다른 말을 새겼어. 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 당신은 나를 보고 말했잖아. 아름답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아니면 다른 말이라도. 당신도 내가 어떻게 될까 봐 두렵거든. 바다에 가면 모두 비겁해지는 거야. 당신은 내게 달려오지 않았지. 다그쳤지. 나를 안아 주질 않았지. 울지도 않았지. 조금도 머물러 주지 않았지. 이제 모르게 될 거야. 날짜를. 문제를. 피부를. 당신은 절대로 나를 도울 수 없지. 식물이 단단해지는 순간을 알고 싶어. 나는 매번 죽이기만 하니까. * 식물원을 오래 비우면 안 됐다. 적당한 온도를 맞춰 놓고 매일같이 잎사귀를 살펴보고, 분갈이할 때는 식물에 금이 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날이면, 식물원의 조명이 나갔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조명을 점검했고 때로는 등을 갈았다. 모든 게 유리로 된 것들이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내가 유리 식물원에 살게 된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었다. * 오피스텔 603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는 아이. 열아홉이었다. 소파 뒤에는 큰 창이 있었다. 건물 너머로 붉은 달이 뜨는 걸 남자와 함께 봤다. 너는 스스로 망가뜨린 아이구나.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남자는 커튼을 쳤다.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저도 화분을 망쳐 봐도 될까요? 그럼, 물론이지. 아이의 일기장은 증거가 되기엔 부족했다. 거기엔 무한한 사랑만이 있었다. 이건 존재하지 않는 기록. 저는 모르겠어요, 선생님. 말하기 싫어요. 답답해요. 창문을 열고 싶어요. 선생님은 내가 한 말들을 받아적었다. 때로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때로는 밑줄을 치면서. 시간을 조금 더 줄게요. 모래시계가 한 번 더 뒤집혔다. * 14번 좌석에 앉은 남자로부터 독한 잉크 냄새가 났다. 그가 내릴 준비를 해서 바깥을 봤다. 여전히 절벽이었다. 그는
- 관리자
- 2025-07-01
생명의 전화 백아온 나의 사랑은 자살을 선언한 사이보그1) 사이보그는 다시 태어나도 리듬 없이 산다 그래서 내 사랑 날마다 무지개 노끈이 걸려 있는 나무 앞에 선다 노끈이 품은 색색의 가능성 내가 거듭나면 사랑해 줄래? 픽션도 즐겁지 않으니 나의 사랑은 심장을 부풀리고 싶겠다 풍선껌처럼 질겅질겅 씹다가 아스팔트에 길게 늘어져 누군가의 발바닥에 붙어 얼마간 미행을 즐기겠다 차갑지 사이보그는 죽을 수 없게 설계됐다 나의 사랑에게 쥐여 준 에너지 빈방은 폭발할 수 없어서 네 몸을 먼저 통과한다 검은 베일 너머로 전화벨이 울린다 신이 꼭 선해야만 하나요? 괴짜 같은 질문을 하는 나의 사랑은 자기가 정말 괴짜인 줄 안다 싸구려 시가의 단맛을 아는 척하고 나의 안부를 물어보고 날씨를 전해 주고 그렇게 예쁘고 철학적인 자살을 생각한다 이제 나의 사랑은 봄날의 신부가 되어 가볍다 나는 나의 사랑을 뉘앙스 없이도 사랑한다 질 나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는 꽃다발을 안고 펑펑 웃고만 있다 우리가 감은 눈꺼풀에 투명한 줄기가 비춘다 노끈의 매듭이 힘없이 풀어지고 전화선이 우리의 이야기를 흘리는 만큼 나의 사랑은 줄줄 샌다 이건 금속이 아니고 이건 쓸쓸하지 않고 사이보그답지 않고 건강한 듯한데 내 사랑 그만 운동화를 신으려고 한다 1) 김행숙,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 관리자
- 2025-07-01
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헝가리 워터 홍성구 은수는 자신을 대학주보 기자라고 소개하였다. 나와 동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걸로 봐서는 한국적 정서에 기대는 MZ인 듯했다. 속단하는 부류에 드는 건 꺼림칙하지만, 곤란할 때는 한국식 정을 부르짖다가 느긋할 때는 서양식 합리를 따져 보는 MZ를 몇몇 봐 온 탓에 스마트폰 너머에서 이제 막 알게 된 후배가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경계심이 들게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터뷰는 성사되었다. 은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남자 조향사라서 관심이 생겼어요.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향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일까. 남자가 조향사라는 게 관심이 생길 만한 일인가. 인터뷰하러 온 은수는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았다. 그녀의 나신(裸身)에 미간이 찌푸려졌을 것이다. 향수는커녕 화장수조차 뿌리지 않았다니. 매일 밤 샤넬 No. 5를 입고 잠든 마릴린 먼로가 알았다면 야만적이네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얀 치맛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어떠한 향도 느끼지 못했다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은수의 반소매 니트 티에서 플로랄 계열의 향이 풍겼다. 흔한 싸구려 섬유유연제 냄새. 합성 향료의 조악한 외피를 두르고 있으니 누더기 정도는 걸치고 있는 건가. 나와 꼭 인터뷰하고 싶었다는 은수의 말이 진심인지 의심이 들었다. 은수는 향수에는 문외한인 데다 향수를 뿌리는 문화적 행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야생의 신입생처럼 보였다. 인터뷰는 지루하고 단조로웠다. 은수는 예상이 가능한 질문의 목록을 들추었고, 나는 잡지인지 유튜브인지 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인터뷰 답변을 하나둘 꺼내서 내놨다. 하품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러나 은수가 노트북 화면을 덮자 드러난 그녀의 오른손 때문에 졸음기가 싹 사라졌다. 저런 손으로 타이핑한 건가. 은수의 오른 손목 부근에서 검지에 이르는 데까지 초록뱀 한 마리가 몸을 펼치고 있었다. 은수는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려다가 뭔가 잊은 게 있는지 화면을 다시 열었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화면은 바닥에서 15° 정도 위로 펼친 탓에 초록뱀이 키보드를 누비며 꿈틀거리는 게 여실히 보였다. 은수가 검지를 까닥일 때마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은 아닌지 움찔 몸서리가 났다. 마을에서 독수리 삼촌, 용 삼촌, 호랑이 삼촌으로 불리던, 혈연이 아닌 삼촌들이 떠올랐다. 친숙함의 범위에서 한껏 벗어나 있지만, 두려움의 실체를 덮으려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정반대의 호칭을 얻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독수리,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당장 달려들 듯 노려보는 호랑이가 등에 새겨진 삼촌들. 대중목욕탕의 온탕에서 독수리, 용, 호랑이가 물 파편을 튀기며 솟구치면 따뜻한 물속인데도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유독 샅이 근질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한테 삼촌이라고 부르라 하고 정작 그네들은 육시랄 놈, 벼락 맞을 놈, 급살 맞을 놈, 욕했다. 호랑이 삼촌이면서 육시랄 놈이 나를 불러 세운 기억이 난다. 다섯 살 연상인 그는 한참 어른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에게 그가 물었다. 요새 너
- 관리자
- 2025-07-01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비/인간과 타자 김웅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1) 1 비인간이 가진 속도가 빨라질수록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감응하기 위해 우리가 경유하는 코뮨적 신체는 그러나 공통된 목소리를 요청하진 않는다. 인간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선(善)’이라는 보편성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의 총체적 시간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線)’을 만들고 있음을 주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점에서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의 의미를 재삼 곱씹게 된다. 2000년대 시적 주체는 한국 사회―넓게는 인간 사회가 구축해 놓은 알고리즘을 본격적으로 거부하는 타자의 자리에 자신을 노정 시킴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거나 보장받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존재”2)로 변모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체의 최소 단위인 ‘가족’이라는 중심점에서부터 시작된 시적 사유는 단순히 생리적으로 결속된 하나의 사회체에 불과할 뿐 윤리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관계를 방증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화자는 시적 주체를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차원에서 불화하는 관계”로써 “윤리적 모험”3)을 나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 아이-화자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시민적 트라우마’를 흡습한 시적 주체로 전성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애도의 총량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실존의 차원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능력’”의 테제가 되고 그 무능력이 곧 “‘내면적 성찰’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를”4) 희망하는 고무적인 발화자로 시인을 이끄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복무해야 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또 하나의 책무이자 윤리로 자리 잡는다. 이 같은 관점은 시민적 트라우마를 통감하는 주체로서 몸이 갖는 일종의 생활론적 윤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5) 그런데 2020년대의 시적 주체에게 윤리적 책무감은 역설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고독감’을 불러왔다. 시민적 영웅이 되지 못한 인간, 소박한 일상조차 꿈꾸지 못하는 인간, 죽지 못해 살아 내는 몸의 형상은 시민적 트라우마 앞에서 내색할 수 없는 존재로 내세워졌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안온한 고립을 거부”하거나 “낮이라는 다스려진 영역을 다루는 임무 가운데 의연한 관계를 유지하는”6) 숭고한 고독과는 거리가 먼 고독감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개인주의
- 관리자
- 2025-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