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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소나기마을 황순원문학관

  • 작성일 2016-09-01

기획의 말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소나기마을 황순원문학관

김주성

9월 황순원문학관

황순원문학관 탄생 과정

2009년 6월에 문을 연 소나기마을은 황순원 선생의 문학을 아끼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선생의 문학의 향기를 함께 누릴 수 있는 1만 4,000여 평의 문화 체험공간이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첫사랑의 낙원을 재현해 놓은 정서적 힐링의 장소이다.

이 소나기마을 조성은 황순원 선생이 23년 반 동안 봉직했던 경희대학교 국문과의 김종회(한국평론가협회 회장) 교수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정성을 기울이고 양평군이 적극 협력하여 이루어졌다. 2003년 6월 경희대학교와 양평군이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탄생의 초석을 마련했고 이후 6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소나기마을’이라는 이름은 선생의 대표작이자 온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소나기」 속,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다. 주인공 소녀가 양평읍으로 이사를 가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작품상의 사실이다. 고향이 북한인 황순원 선생의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던 중 이곳 양평을 최적지로 삼게 된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여기에 선생의 삶과 문학을 살펴보고 체험해 보도록 꾸민 ‘ 황순원문학관’과 선생의 문학세계를 심도 있게 연구할 수 있도록 문헌, 홍보물, 영상자료 등을 집대성한 ‘황순원문학연구센터’도 마련돼 있다.

황순원의 문학세계

황순원(1915~2000)은 20세기 한국문학사를 대표하는 거목의 한 사람이다. 생애 동안 어떤 시대적 조류에도 휩쓸리지 않고 일관되게 순수문학의 본령을 지키면서 그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열어 나갔다.

초기에는 한국의 토속세계를 그린 작품들을 주로 창작하였다. 「닭제」(1938), 「별」(1940), 「산골아이」(1940), 「세레나데」(1943) 등이 그것으로, 이 작품들 속에는 전통적인 한국의 농촌이나 산골 마을이 무대로 설정되어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의 꾸밈없는 삶과 원시적 생명력의 아름다움이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 황순원은 한국의 토착정서와 전통정신, 인간 내면의 원형적 모습을 감각적으로 묘사하였다.

1950년대 이후 황순원은 다양한 여성 인물의 창조를 통해 환상적인 모성성의 세계를 추구였으며, 「학」(1953), 「소나기」(1953) 등의 단편을 통해 단편소설의 완숙한 경지를 이룩하였다. 한편으로 『별과 같이 살다』(1950), 『카인의 후예』(1954),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2), 『움직이는 성』(1973)에 이르는 왕성한 장편소설의 창작을 통해 구원의 문제 또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과 소외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하였다.

황순원 소설과 샤머니즘

황순원 소설의 특징으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초기 단편들에서 후기 장편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품 속에 독특한 방식으로 샤머니즘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샤머니즘은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성립되어 민중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전통문화의 기층을 이루며 전승돼 왔다. 황순원은 이렇게 전승돼 온 토착정서와 전통정신에 실린 샤머니즘의 요소를 초기 단편들 속에 생생하게 녹여 넣었다.

토속적인 농촌이나 산골마을이 무대로 설정된 초기작인 「닭제」, 「별」, 「산골아이」, 「세레나데」 등의 작품들의 경우, 일련의 샤머니즘 요소들이 작품의 구성 전개는 물론 주제 형상화에 중요한 매개물로 작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닭제」에서 희생제의의 모티프가 되고 있는 수탉의 살해, 「별」에서의 저주의 주술, 「산골아이」에서 통과제의의 모티프가 되는 전래설화, 「세레나데」의 경우 어두운 시대현실의 메타포로 기능하는 무당에 관한 삽화 등이 그것이다.

1950~1970년대를 거치면서 황순원은 본격적인 장편소설 창작을 통해 한국인의 전통정서의 표현 외에도 사회 변화의 문제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도 샤머니즘 요소의 수용은 여러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장편 『일월』과 『움직이는 성』에 이르면 샤머니즘의 세계가 전면적이고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주제 형상화의 핵심적인 모티프이자 서사 전개의 중추적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일월』의 서사 구조는 주인공이 느끼는 숙명적 고독의 근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 숙명적 고독을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황순원은 그 물음의 과정을 백정들의 세계에 전승되어 온 ‘우공태자 신화’와 대비시키고 있다. ‘우공태자 신화’는 소에 대한 보편적 신성시의 사고를 근원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이 백정들의 세계에 전승되어 독특한 서사 체계를 갖추고, 샤머니즘적 제의의 기능까지 포함하는 양식으로 전화된 것이다.

<우공태자 신화 - 원문 발췌 정리>

천왕의 태자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여색에만 빠져 있자 천왕이 노하여 태자를 소로 변하게 해 하계로 내려 보낸다. 이때 천왕은 태자가 하계에서 인간에게 고역을 당하다 죽으면 혼백만은 다시 천계로 올라오게 해주마고 한다

하계에 내려온 태자는 인간을 위해 저리고 아픈 고역을 땀 흘려 치른 후 인간의 손에 죽는다. 천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약속대로 천계로 불러올려 기쁘게 맞는다. 천계에서 태자는 억만년 만강을 누리며 속세를 제도하고 인간의 악귀를 굴복시킨다.

이 ‘우공태자 신화’는 영웅의 ‘떠남-시련-복귀’의 유형을 기본 구조로 하는 ‘원질신화(monomyth)’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천왕의 아들로 천상세계의 질서 안에서 살고 있던 우공태자는 그 ‘고귀한 신분’으로 볼 때 모든 원질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에 가름되는 존재이며, 그가 천상의 질서를 깬 벌로 ‘인간에게 고역을 치르러’ 하계로 내려오는 것은 영웅이 ‘위대한 사명’을 띠고 그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모험에 나서는 것과 상사를 이룬다. 또한 그가 인간을 위해 노역과 생명을 바치고 천계에 복귀하는 것은 영웅이 시련 끝에 과업을 달성하고 돌아오는 과정과 쌍을 이룬다.

이와 같이 백정들의 세계에 일종의 샤머니즘적 제의의 양식으로 전승돼 온 ‘우공태자 신화’는 주인공이 백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겪는 근원적 고뇌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정신적 여정을 그린 소설 『일월』의 구조적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움직이는 성』은 한국인의 심층의식과 표면의식을 지배하는 두 갈래의 기본 요인 즉 샤머니즘과 기독교를 정면으로 대질시키는 방법을 통해 한국인의 혼란한 의식구조를 심도 있게 파헤친 작품이다.

즉 『움직이는 성』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인 샤머니즘과 습합하여 본질에서 벗어난 왜곡된 모습, 다시 말해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부정적인 영향 관계를 냉정한 시각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방대한 문화사적 연구를 수용하여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아 온 샤머니즘의 본질과 현상 및 한계를 파악하고, 이를 기독교와 대비시켜 객관적 시각으로 비판하고 있으며, 그 한계 극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문장웹진 9월호 살펴보기

곤충채집 체험학습

[단편소설] 곤충채집 체험학습 김숨 * 전체적으로 검은빛에, 뒷날개 부분은 야광의 푸른빛이 살짝 도는 제비나비이다. 그가 휘두르는 포충망은 번번이 목표물인 제비나비를 벗어난다. 폭염인 데다 근처에 늪이 있어서 습도마저 높다.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는 짓무르도록 땀에 흥건히 젖었다. 그는 제비나비 잡는 걸 포기하고 숲을 둘러본다. 숲 여기저기 허공에 대고 포충망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다들 한낮의 몽유병자들 같다. 저마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홀려 찾아든 숲 속을 혼몽 중 헤매는 듯하다. 키가 훌쩍한 청년이 포충망을 어깨에 사선으로 걸치고, 그의 아들 옆을 조용히 지나간다. 서른 살쯤 되었을까? 청년의 길쭉하고 메마른 얼굴은 햇볕을 받아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본격적인 곤충채집에 나서기 전 강사는 펜션에 딸린 강당에 참가자들을 모아 놓고 곤충채집 도구들과 채집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강당에서 청년은 아들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의 ‘곤충채집 체험학습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 청년은 유일하게 혼자이다. 참가자는 스무 명 남짓으로, 대개 가족 단위이다. 나비와 나방이 매한가지라고 여길 만큼 곤충에 문외한인 데다 별 흥미가 없는 그는 나흘 전 충동적으로 곤충채집 체험학습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도 그는 그런 체험학습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한 달도 더 전,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은 동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차들을 날카로운 무엇인가로 긁고 다녔다. 한 대도 아니고 스물세 대나. 그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설치된 cctv카메라에 범행 현장이 고스란히 찍혔는데도 아들은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한사코 우겼다. 그는 완벽한 증거물인 cctv카메라를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들에게 자신이 한 짓을 똑똑히 일깨워주기 위해서. 아파트 관리소장은 일흔 살은 되어 보이는 늙은 사내로, 피해자인 아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흠집을 원상 복구해 놓으면 고발 조취는 하지 않겠다는 피해자들의 의사를, 법적 보호자인 그에게 전했다. 관리사무실 모니터에 지하주차장이 담겨오는 순간, 그는 곤충 표본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시동을 끄고 납작 웅크리고 있는 차들은 마치, 내장을 제거하고 박제 처리한 곤충들 같았다. 표본 상자 속에 질서정연하게 진열된 곤충들 사이를 아들이 하루살이처럼 한없이 가볍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비를 잡으려는 것뿐이었어요.” “나비?” “나비가 날아다녀서요.” “나비라…….” 관리소장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나비가 어디 있다는 거냐?” “저기 있잖아요.” 관리소장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모니터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기요…… 나비…….” 관리소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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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7
한국문학과 페티시즘

[비평 in 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한국문학과 페티시즘(Fetishism) 양윤의 1. ‘최초의 책’이라는 환영 식민지 시절에 출간된 초판본 시집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김소월의 『진달래꽃』, 백석의 『사슴』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1) 그 이유로 기사에서는 “감성을 자극한 패키지와 초판본을 그대로 재현한 디자인 콘셉트”를 들었다. 아련한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녔다는 점에서 팝 아이콘 상품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 초판본 시집에는 대량생산되는 도서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종의 아우라가 서려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 책들의 이미지는 SNS를 타고 수많은 유저들에게 인증 혹은 재-인증되고 있다. “초판본을 그대로 재현”한 시각이미지 속에서 고인이 된 시인의 삶이 그 책을 통해서 현현한다고, 긴 시간을 거쳐서 손에 쥔 저 책의 즉물적인 감각이 특별한 소유욕을 낳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열풍은 벤야민이 말한 예술작품의 아우라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육필원고도 희귀본도 아니다. 그것은 문학을 희귀한 ‘레어템(한정판)’의 형태로 소유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대체상품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이 책을 소장한다. 작가의 친필 사인이 인쇄되어 있는 책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상상하기, 대량생산된 책을 ‘단 하나의 책’으로 간주하기. 이것은 단순한 키치가 아니다. 키치는 ‘대량생산’된 예술작품으로 처음부터 원본성이 거세되어 있다. 하지만 저 초판본 시집은 대량생산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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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5
세목이 사라진 자리

[비평 in 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세목이 사라진 자리 책과 삶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듯, 세목(細目, detail)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세목을 알아야 하는 것은 그것들 중 무엇이 중요한지, 또 어떤 단어가 사물의 이면으로부터 빛나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도르 마라이, 『잉걸불(embers)』 중에서 서희원 1. 리얼리티에 대한 열정 ‘1830년의 연대기’라는 부제가 붙은 스탕달의 『적과 흑』은 쥘리앵 소렐이라는 문제적 인간을 통해 왕정복고 시기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혼돈을 빼어나게 재현하고 있는 교양소설이다. ‘재현’의 측면에서 말할 때,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의 전범으로 꼽히는 『적과 흑』을 그 이전의 소설들과 구분지어 주는 장르적 특성은 단연 ‘묘사’이다. 『적과 흑』에서 스탕달은 인간이나 사물이 가진 고유의 형태나 자질에 주목하며 이를 세세하면서도 실감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개별적인 대상이 가진 특수성 ― 중세 신학자 던즈 스코터스가 ‘이것다움(thisness)’이라고 명칭을 붙인 ― 을 드러내고 있다. 스탕달은 경우에 따라서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직접 노출하며 자신의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세계의 형상을 기술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쥘리앵 소렐이라는 특수한 렌즈에 의해 감광된 형태로 제시된다. 마치 쥘리앵 소렐의 감각으로 포착된 모든 것을 수집하려는 듯한 스탕달의 태도는 그가 자신의 파멸을 향해 내달리는 『적과 흑』의 결말부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서사적 정합성이나 장면들을 균등하게 기술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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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5
한낮에 한낮이

한낮에 한낮이 김선재 옥수수 잎이 타는 계절 지평선은 빛난다 멀어서, 다가가면 더 멀어서, 몸은 흐려지고 나날은 길어, 길고 가는 숨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할 때 후후, 숨을 내뱉으면 호호, 김이 퍼져가고 얼어붙은 유리창에서 퍼져가던 손가락의 온도, 뜨거운 눈이 내렸고 볼 빨간 아이들은 줄지어 숲 쪽으로 걸었다 말을 나누듯 불 속의 얼음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며 타는 숲 속으로 걸어갔다 뒤를 모르는 아이들의 이마는 서늘하고 가슴은 뜨거워 돌아보면 어느덧 귀를 막는 여름 창문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숲이 떠오른다 고양이는 고양이를 물고 웅덩이를 건너가고 무릎이 생긴 바람은 돌고, 도는 바람이 시려 떠다니는 것들, 떠나가는 것들, 주먹을 쥐고 문 앞을 서성이는 것들 뜨거운 숨을 내뱉으면 뜨거운 허공이 목을 죈다 창문은 정지하고 안은 쏟아진다 쏟아지는 안을 닫을 길이 없다 그 곳에 닿을 길이 없다 다만 나는, 흘린 물처럼 서서히 말라가다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울고 내가 듣는다 누군가 빠져 나갔다 한낮에 한낮이 울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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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적선동

적선동 김선재 어제를 밀어내며 나는 걷고 있다 낯선 곳에서 낯선 곳으로, 잎들이 점멸하는 정오에서 숨을 멈추는 자정까지, 어깨가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얼굴이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이 길은 언젠가 네가 아닌 너와 걸었던 길 골목에서 불어온 바람이 타래처럼 몸을 감던 길 무성해지면 소문이 된다는 것도 모르고 그늘을 골라 나무를 그리며 내가 아닌 나와 네가 아닌 네가 서 있던 곳 내가 아닌 나는 바라던 사람 네가 아닌 너는 모르는 사람 이 교차로를 지나면 이 길의 끝, 끝과 끝이 만나는 곳에 서 있다 끝과 끝을 이으면 내일이 될까 나란히 선 사람들 뒤에 서면 나란히 선 사람이 될까 어제를 밀어내며 나는 녹고 있다 안에서 바깥으로, 잎들이 까만 계절에서 바라는 쪽으로 바래가는 계절로, 마치 오래 전에 결정決定된 결정結晶처럼 단단하게, 미열도 없이 잡았다 놓은 사물들은 바람이 되고 놓았다 잡은 몸은 내일 쪽으로 놀이터의 시소가 혼자 흔들린다 흔들지 않아도 흔들리는 것이 그것의 균형이라면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것이 나의 하루, 길어진 손톱을 들여다보며 서 있다 멀리, 더 멀리 누군가 놓아두고 간 모자처럼 우두커니, 뒤집힌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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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세계 문학축제 특집] 서울국제작가축제

[세계 문학축제 특집]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 주목받는 국내외 28인의 작가가 한 자리에! 국내외 작가들에게는 문학적 영감을, 국내 독자들에게는 저명한 작가들과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더없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서울국제작가축제가 올 9월의 마지막 주를 문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한국 작가와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과 만나는 지점을 확장하기 위해, 한국 문학 세계화의 중심 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하는 이 축제는 2006년 제1회를 시작으로 격년제로 개최되어, 올해 제6회를 맞이한다. 서울국제작가축제(SIWF, Seoul International Writers' Festival) 주최 : 한국문학번역원 일시 : 2016년 9월 25일(일) ~ 10월 1일(토) 장소 : 서울 대학로 주제 : "잊혀진, 잊히지 않는" 홈페이지 : http://siwf.klti.or.kr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siwfest 트위터 : https://twitter.com/siwfest 벌써 10년, 서울국제작가축제가 걸어온 길 “낯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친해지는 방법으로 축제 이상의 멋진 만남을 나는 알지 못한다.펜을 놓고, 막 골방에서 나온 작가들의 눈을 바라보는 것, 그들의 손을 잡는 것, 축제는 벌써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 참가 작가 소설가 함정임 - 제1회 작가축제의 기획위원이자 참가 작가로 함께하였던 소설가 함정임은 10년 만에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와 함께한다. 사람들이 쉽게 친해지는 방법으로 축제 이상의 멋진 만남을 알지 못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국내 작가와 해외 작가들의 지속적인 문학교류를 위해 서울국제작가축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행사의 이름은 로 시작했지만, 더 폭넓은 세대를 아우르고, 문학과 출판의 거점 도시로 ‘서울’을 내보이기 위해 현재의 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국내외 작가의 문학세계에 대한 토론과 낭독 이외에도 춤, 노래, 연극과 같은 다양한 예술 공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문학 축제인 서울국제작가축제는 현재까지 세계 60여 개국에서 148명의 작가가 참여하였으며 서울을 대표하는 문학축제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축제의 바람대로, ‘서울’이 국제적인 문학 도시로 우뚝 서기를 기원하며, 서울국제작가축제를 들여다보자. 서울국제작가축제만의 매력 “엄청난 영감을 주는 축제” – 2008년 참가 작가 어니스 모주가니(미국) - 이 시대 최고의 스포큰 워드 시인이라 불리는 어니스 모주가니는 이 축제를 두고, “엄청난 영감을 주는 축제”라고 말한다. 축제를 통해 처음 만나는 국내외 작가들이 문학을 매개로 소통하는 교류의 장인 서울국제작가축제는 상업적 성격이 짙은 도서전이나 독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작가 행사와는 달리 작가가 주체가 되는 작가들의 축제인 만큼, 온전히 작가들의 영감을 진작시키기 위한 축

  • 관리자
  • 2016-09-01
엄마에게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단편소설] 엄마에게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문진영 1 일주일 전부터 아빠 집에 머물고 있다. 십사 년 전 엄마 아빠가 이혼한 뒤로 처음이다.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고, 엄마가 짐을 챙기라기에 여행을 가는 줄로만 생각했다. 나는 책가방에다 비옷, 주머니칼, 손전등, 전국지도, 그리고 비상식량으로 건빵까지 챙겨 넣었는데 그건 『모험도감』이라는 책에 나와 있던 대로였다. 그 책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빠가 사준 것으로, 부제는 ‘야외생활의 모든 것’이었다. 거기에는 북극성 찾는 법, 불 피우는 법, 들짐승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법까지 나와 있었다. 그 책에서 배운 기술들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써먹어 보지 못했다. 처음 타본 기차가 마냥 좋았다. 차창 밖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가끔 엄마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아빠는 왜 함께 가지 않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자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그냥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다. 도착한 곳은 서울 면목동에 있는 큰이모네 집. 엄마는 이모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나는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야 했다. 그것도 모험이라면 모험이었다. 그때 아무도 내게 엄마랑 살지 아빠랑 살지 물어보지 않았다.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분명히 아빠 쪽을 골랐을 것이다.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 물어보면 나는 항상 아빠라고 대답하는 아이였으니까.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엄마는 내게 조금 벅찼다. 엄만 매사에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진취적이고, 목소리가 컸다. 엄마는 아빠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사람이라고 했다. 도무지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자면 그게 엄마가 아빠랑 헤어진 이유였다. 엄마는 늘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발전이 있는 거라고. 엄마 말에 의하면 나는 “아빠를 그대로 빼다 박은 년”으로서, 엄마는 그런 나를 지긋지긋해했다. 하지만 나도 바라는 게 있었다. 엄마랑 따로 사는 것. 엄마와 나는 한동안 이모 댁에 머물다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작은 전셋집을 구했고,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기꺼이 따로 살았다. 아빠랑은 엄마 몰래 종종 만났다. 엄마에겐 비밀이었지만, 사실 엄마도 다 알면서 그냥 내버려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빠를 찾아간 적은 없었고 늘 아빠가 나를 찾아왔다. 교문 앞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아빠 몸집에 비해 너무 커서, 아빠를 마치 아버지 양복을 걸친 어린애처럼 보이게 하는 면이 있기는 했지만, 보조 헬멧을 쓰고 바이크 뒷자리에 올라타는 내 모습을 다른 애들이 보는 것은 좋았다. 아빠 허리를 껴안고 가죽점퍼의 냄새를 맡으며 달리는 기분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엄마와 헤어지고 아빠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가죽점퍼를 산 일.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냄새가 나는 제대로 된 가죽점퍼를 하나 갖고 싶었다. 그때껏 갖지 못했던 건,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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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단편소설] 초상화 이야기

[단편소설] 초상화 이야기 김휘 초상화를 체포하란 말인가. 풀어 놓는 이야기가 하도 황당해서 듣는 내내 노파를 뜯어봤지만, 정신이 온전한지 아닌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노파는 고령에도 발음이며 언어구사력은 어눌하지 않았다. 내가 손목시계에 눈을 주면서 "초상화를 체포하란 말인가요." 하고 웃자,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체포하란 소리는 아니고. 초상화가 범인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지금 형사 양반도 내 말을 믿지 못하니까 웃고 있는 거 아니오. 초상화가 범인인 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해결 안 나. 결국 엄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거나 미제사건으로 남겠지. 그렇다고 무턱대고 초상화가 범인이니까 체포하겠다고 하면 송 형사만 바보가 될 테고." "그러니까 할머니 말씀은 저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하나. 초상화를 내게 달라는 거 아니오. 사례금도 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제보할 것이 있다는 말에 순순히 응한 내가 경솔했다. 제보란 일주일 전 발생한 방화 살인사건에 대해서였다. 사건 발생 팔일째, 불이 난 여배우 장미라의 자택에서 노인 시신이 발견된 것 말고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화재 발생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진 게 없었다. 장미라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추측만 난무했다. 타죽은 노인이 누구인가를 두고 장미라의 성장 과정에 대한 불분명한 정보에 기대어 빚쟁이일 거다, 장미라의 생모일지 모른다 같은 가능성도 제기됐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미라의 행방을 쫓는 데 중점을 두는 것 말고 매달릴 만한 게 없던 차였으므로 '제보' 소리만 들어도 귀가 솔깃했다. 노파가 말했다. "귀추가 다 장미라 행방에만 쏠려 있지 어차피 그 초상화에 관심 갖는 사람은 없잖아요. 일전에 화재 현장 근처에 갔었어요. 경찰이 깔려 있어서 가까이 가보지도 못했죠. 담당 형사니까 상황 봐서 초상화를 빼오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말이야." 커피집 안은 소나기로 축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노파는 기침이 잦았는데 떨리는 손에 쥔 손수건으로 입가를 찍는 모양새가 초조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이을 때는 미끼를 하나씩 던지면서 상대의 반응을 간 보는 사람처럼 눈빛과 어조에 교활한 데가 있었다. 이 노파를 만난 건 두 시간 전이었다. 나는 사건 발생 이후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풀릴 기미 없는 사건 수사에 목이 조였다. 게다가 머릿속에 차오르는 잡념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내 때문이었다. 아내는 낮부터 늦은 저녁까지 집으로도 핸드폰으로도 연결되지 않았다. 세차게 내리꽂는 비를 창밖으로 멍하니 바라봤고, 생각다 못해 나는 동료에게 몸살 핑계를 대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집 앞에 다 와 갔을 때 노파가 나타났다. 지팡이를 쥔 노파는 검은 우산을 든 채 골목길을 막아서고는 "송기석 형사지요?" 하고 물은 뒤, 대뜸 제보할 게 있다고 했다. 커피집에 들어와 마주 앉자마자 노파가 던진 질문은 뜬금없었다. 사고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가 SNS 블로그 기사에 뜬 구체적인 내용을 봤다면서 초상화 이야기를 불쑥 꺼낸 것이다.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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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에세이] 오래 외면 받고, 때로 외면하는 글쓰기

[에세이] 오래 외면 받고, 때로 외면하는 글쓰기 최분임 저녁이면 무료하고 답답한 하루가 또 지나갔다는 느낌이 몸 어디선가 밀려 나왔다. 흔히들 늦었다, 라고 말하는 삼십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마흔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삶이 이렇게 지루하고 무력해도 되는 걸까?’ 씁쓸한 혼잣말에 손을 놓고 멍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스스로를 낭비했다. 주위를 둘러보거나 친구들과 전화 통화라도 하고 나면 나와는 전혀 다른 공기,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 삶의 방향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거침없고 당당해 보였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눅이 들었다. 마냥 이렇게 살 것이냐고, 내 안의 누군가가 날 툭, 쳤다. 그렇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지, 라고 되물으며 움츠러드는 자신이 보였다. 바람 빠진 풍선에 공기를 불어 넣듯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몰아세우자 묻어 뒀던 꿈, 글을 써보고 싶다는 대답이 들렸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막연하고 캄캄했다. 곧이어 열등감이 고개를 들었다. 열등감은 못처럼 견고해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쉽게 뽑혀 나가거나 뽑아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먼 저곳에서 이곳까지 그 어떤 알 수 없는 속도가 막 지나간 듯 내게 처음으로 열등감을 안긴 친구 희가 곁에 서 있었다. *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었다. 옆집에 살던 희는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다 얼굴도 예뻐서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집안 사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늙은 아버지와 배다른 형제들, 재취 자리로 들어와 1남 3녀를 낳은 희 엄마는 늘 술에 취해 풀어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오빠마저 알코올중독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삶을 접기 위해 여러 번 농약을 마셨고 매번 저승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은 망가져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희 오빠에게 마을 사람들은 ‘불사조’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꽉 막힌, 출구 없는 동굴 같은 환경에서도 희는 늘 밝고 명랑했다. 집안의 어떤 한 줄기 빛은 막내딸 희가 아니었을까, 아니 희가 붙잡고자 한 것이 한 줄기 빛 아니었을까, 싶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당시 5월이면 어린이날을 즈음하여 시내에 있는 황성공원에서는 박목월 시인의 이름을 딴 이 열렸다(검색을 해보니 올해로 49회째, 해마다 열리고 있었다). 그 백일장에 참여하려면 각 학교에서 실시하는 글짓기를 통과해 대표로 뽑혀야 했다. 다른 것은 다 기억에서 휘발되고 없는데 그 당시 희가 고른 , 이라는 시제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중 라는 제목의 동시는 다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른 봄 냉이를 캐 와서 물에 씻고 보니 하얀 뿌리가 드러났다. 그 종아리가 추워 보였다.” 선생님이 읽어 주시는 희의 동시를 듣는데 질투심과 열등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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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엄마와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을 때

엄마와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을 때 이원 손톱달 뼈에 나란히 걸터앉아 물었지 이렇게 작고 연한데 어떻게 엄마가 되려고 해? 바보 말랑말랑한 콩알을 알아버렸잖아 콩알? 넌 몰라도 돼 다음 생이 끝날 때까지 손톱달엔 엄마와 나 단둘이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젖어 있었다 푸른색이 연해지자 안겨 있었다 자장자장 엄마와 내가 함께 흔들린 마지막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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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연재에세이1] 고민해서 뭐할 건데

[연재에세이] 이야기를 통한 고민 해결 ‘고민해서 뭐 할 건데?’ - 목걸이를 풀어버리자. 김혜정 파티에 초대받은 여자는 남편의 기대와 달리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파티에 어울릴 만한 옷과 장신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돈이 많은 여자들은 화려하고 예쁜 보석을 하고 올 텐데, 그 틈에 끼어 가난을 드러내는 것만큼 굴욕스런 일은 없으리라. 여자는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린다. 파티 날, 목걸이를 목에 건 여자는 누구보다 행복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목걸이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다. 똑같은 목걸이를 구해서 돌려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여긴 부부는 부모에게 받은 유산과 빚을 내어 3만 6천 프랑의 비슷한 목걸이를 사서 돌려준다. 그 빚을 갚기까지 꼭 10년이 걸렸다. 빚을 다 갚은 어느 날, 우연히 목걸이 주인인 친구를 만난다. 여자는 이제는 말 못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 친구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때 친구는 말한다. “아! 가엾은 마틸드! 내 것은 가짜였어. 기껏해야 5백 프랑밖에 안 나가는…….” ― 내 인생작,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 가끔 책을 읽다 보면, 혹시 이 작가가 나를 위해 이런 글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라서, 혹은 너무나 내 삶의 이야기 같아서.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는 후자의 이야기다. 150여 년 전에 쓰인 이 단편소설을 읽고 있으면, 모파상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것 같다. “지금 너도 저 여자랑 다르지 않아. 알고 있지?” 여자의 허영심과 나를 연결시켰다면 곤란하다. 내가 허영이 없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목걸이』를 또 천편일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다. 학창 시절 국어 공부를 하면서부터 작가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싫은 것 중에 하나가 작품의 주제, 교훈 등을 찾는 일이다. 중고등학교에서 문학 작품을 배울 때 선생님이나 참고서는 꼭 주제, 교훈을 정답처럼 만들어 놓은 후 외우라고 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외우면서도 ‘정말 이 작가가 이런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썼을까?’라는 의문을 마음속에 품었고, 그랬기에 국어 점수는 별로 좋지 않았다(학창 시절 내가 제일 못 한 과목은 국어와 체육이었다). 작가가 되고 난 후 독자들을 종종 만나는데, 독자들은 또 묻는다. “작가님, 이 글을 쓴 의도가 뭐예요? 독자들이 작가님의 글을 읽고 어떤 걸 느꼈으면 좋겠어요?” 같은 질문. 그때마다 난 “그건 독자 자유예요.”라고 대답을 하는데, 질문을 한 사람의 표정은 좋지 않다. 뭐 저런 무책임한 작가가 다 있나 하며 날 바라본다. 문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물론 글을 쓴 작가의 이유는 있다(그것 없이 글 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건 작가의 몫이고, 글을 읽고 해석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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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안에 사람이 있어요

안에 사람이 있어요 이원 산 아이 죽은 아이 손을 잡고 뛰어나온다 벌렸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엄마 부르는 뒤가 길어진다 끊어지지 않는다 엄마를 잃은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다닌다 엄마 알처럼 낳는다 엄마 한발이 놓친 한발처럼 기우뚱거린다 빛들이 모여 골목을 만든다 엄마들이 너머에서 뛰어온다 엄마들은 엉키지 않는다 심장은 나눠가질 수 없는 것 골목이 엄마를 먹으면서 해가 진다 뱉어내는 눈동자들이 벽에 박힌다 산 아이 죽은 아이 울지 않고 눈동자를 따라 들어간다 눈동자들이 모여 오돌도돌 떨고 있는 곳을 창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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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단편소설] 말과 키스

[단편소설] 말과 키스 김세희 고현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보험회사의 팀 비서로 근무하다 결혼했다. 상대는 계리사였다. 현진이 담당한 부서 소속은 아니지만 같은 층을 써서 자주 마주치던 남자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보험계리사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앞에 ‘보험’이라는 말이 붙지 않았다면 아마 닭과 관련된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 인생의 첫 번째 사회생활은 그렇게 사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면서 막을 내렸다. 결혼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둘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봉 잡았다거나, 얼마 못 갈 거라는. 그때 현진은 스물여섯이었다. 어깨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깔깔대며 말했다. “살아 보고 아니면 이혼하죠 뭐. 위자료만 많이 받으면 돼요.” 친구들에게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상처 받지 않으려고 한 말이었지만, 반복하는 사이 스스로도 암시가 되었다.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잠실의 그 9층 아파트, 현관 바닥의 오색무늬 타일, 자동차 시트에 밴 방향제 냄새. 전부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그 속에 자기가 있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그곳을 나와 경기도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과 싸우면서도 악착같이 머물렀다. 1년가량 쉬다가, 아는 사람 소개로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금씩 만화를 그려 무료 연재를 하기 시작했다. 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사흘 나갔는데, 그 외의 시간에는 뭘 하는지 모르지만 늘 바빴다. 가족들에게 전화가 자주 왔고 만나는 남자도 있는 듯했다. 나는 현진의 삶에 관해, 그녀가 직접 들려준 부분 말고는 거의 몰랐다. 주말은 누구와 보내는지, 친한 친구가 있는지. 그해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는 동안 그녀와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매번 다른 장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낯선 동네의 낯선 공간을 물색했다. 친숙한 물건이 없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낯선 곳. 눌린 베개가 지난밤의 잠을, 가운데가 움푹 팬 왁스양초가 그것을 선물한 사람과 보낸 시간을 불러내 훼방 놓지 않는 곳으로. 눈에 익은 사물들이 익숙하게 배열된 공간에서는 이야기도 이미 패어 있는 홈, 늘 가던 경로로 흘러가려 했다. 친교를 위한 말은 거의 없었다. 두 몸이 닿는 일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불필요한 말과 몸짓이 어찌나 많은지! 어떤 때는 주요 참고인으로서 캠코더 앞에 앉아 진술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거기 집중하면 자세는 점차 느슨하게 허물어졌지만, 의식은 아주 추운 날, 텅 빈 밤거리를 혼자 걸을 때처럼 팽팽했다. 제일 멀리 간 곳은 강화도였다. 현진이 어머니의 낡은 아반떼를 가져왔다. 강화대교를 건널 때, 잠시 눈이 멀 정도로 빛이 가득했다. 그 순간을 지나 또 다른 육지처럼 보이는 섬으로 들어갔다. 현진이 예약한 곳은 베란다 창들이 전부 바다를 향해 있는 낡고 휑한 콘도였다. 들어가기 전에 잠시 해변을 산책했다. 무더위가 막 지난 9월 중순이었다. 모래에는 열기가 배어 있었고, 바람은 서늘했다. 벙거지를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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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내일에서 돌아온다

내일에서 돌아온다 이성미 집이었지. 정거장이 아니었지만. 기차가 달려와 이곳에 섰다. 문이 열렸고. 회색 가방을 던져놓고 기차는 떠났네. 집의 지하는 정거장이 되었다. 회색 가방 때문에 집은 다시는 집이 되지 못하지. 플랫폼에서 아이가 물었다. 저 기차는 어디로 가나요? 대답을 해야겠지. 묻는 이가 있다면. 모르겠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지. 아이에게 회색 가방을 주었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렴. 기차를 타고 싶을 때 타렴. 미안하다. 그 가방은 너보다 큰데. 사람들이 가방에서 꾸역꾸역 쏟아져나왔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묻는 사람들은 가득하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답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졌고 신발만 남았다. 기차는 언제 또 오나요? 당신은 어디로 가나요? 회색 가방을 가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도록. 미안하다고 말한다, 나는 계단을 올라간다. 지상의 집으로 간다. 기차는 내일에서 돌아온다. 철로가 없어서. 날아서 돌아온다. 두고간 것이 있어서. 무서워서 돌아온다. 알 수 없는 얼굴들이 기차 안에 가득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미안하다. 기차 안은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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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저녁으로 가야겠다

저녁으로 가야겠다 이성미 보랏빛 포도를 먹다가 나는 저녁으로 가야겠다. 그게 좋겠다. 낮은 덥고 빛이 너무 많아서 시끄러워. 작은 소리들이 들리지 않고 어두운 동그라미도 없지. 보랏빛 포도알을 입에 물고 나는 저녁으로 가야겠다. 날갯짓을 하자. 펄럭펄럭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저녁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계속 펄럭펄럭. 바람도 만났는데. 머리칼도 흩날렸는데. 저녁에 닿지 않았고. 아, 참, 나는 날개가 없지. 그렇게 내일로 떨어졌다. 깃털이 나보다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햐얀 깃털은 햇빛 속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빛나고 시끄러운 낮을 향해 내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나는 왜 날개를 떠올렸을까. 저녁으로 가려고 했는데. 저녁에는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날고 있겠지. 새가 큰 전나무에 앉으면 가지가 출렁, 흔들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릴 거야. 내가 가지 못한 저녁은 구름처럼 지구를 떠돌다 사라졌을까. 땅 속에 묻혔을까. 침묵으로 스며들었을까. 책 속으로 글자가 되어 들어갔을까. 내가 가려고 했던 저녁. 그곳에서 돌멩이는 웃음이 터질 때까지 동그랗게 몸을 말았을텐데. 흰 새는 나무 꼭대기에서 흰 꽃이 될 때까지 웅크렸을텐데. 낮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나는 햇빛에게 야단을 맞으며. 나는 보랏빛 포도 껍질과 씨를 뱉고 나서. 내일로 가지 않고 저녁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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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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