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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 작성일 2023-05-02

기획의 말

2023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갑수, 「보르헤스의 e-book 도서관」을 읽고(《문장 웹진》 2023년 4월호)

수명

도서관은 꽤 마법적이다.

수명
수명 작가

사람, 사물, 장소가 일으키는 일상의 사건을 연필로 그립니다. 인프피 사람과 8살 강아지 그루와 함께 지냅니다.

문장웹진 5월호 살펴보기

내 것이 아닌

내 것이 아닌 홍지호 허공을 찢고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하늘만 보던 친구는 분명히 있었다고 찢고 있었다고 허공도 찢기더라고 아물었을까 친구 덕분에 나도 종종 하늘을 본다 어디쯤이었을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동네에는 가장 큰 건물이 들어섰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는 잊었다 어릴 때 놀이공원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적 있다 그렇게나 사람이 많았는데 허공이었다 예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고 건물과 발전에 대해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에서 놀았었다 잘 들어 보면 허공이 찢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친구가 말했었는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던 누군가는 설명도 잊은 채 어쩌다가 이렇게 크게 지어버렸는지도 잊고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도 잊은 채 건물로 들어가고 있다 허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허공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잊어버리고 들리는 것도 같다 모두와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친구의 이야기 모두가 내 것이 아닌 무언가를 찢고 나왔다는 이야기 허공을 찢어버리고 허우적거리는 아가의 울음을 건져 올리던 엄마의 손자국에 관한 허공에 관한 내 것이 아닌 이야기

  • 홍지호
  • 2023-05-04
[달면 삼키고 쓰면 글이다] 4화 : 까페 창비, 나를 쓰게 하는 것들 / 서재진 시인, 정성우 소설가

까페 창비, 나를 쓰게 하는 것들 서재진, 정성우 들어가며 카페 창비가 아니다. ‘까페’ 창비다. 예스러운 발음을 가진 이 공간은 현재 브라운 핸즈와 협업한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북카페라는 본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1층에는 다양한 도서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 책들은 판매용이라 서가에서 서서 읽는 것만 가능하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아동 청소년 도서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진열해 놓았다는 점이리라. 서가를 살펴보자 어릴 적 즐겁게 읽었던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웨이싸이드 학교 별난 아이들』, 『짜장면 불어요!』 등의 소설이 눈에 띄었다. 아동 청소년들이 서가를 둘러보다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나의 유년을 만들었던 책들이 아직도 눈에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카운터 근처의 신작 서가에는 작가들의 친필 사인본과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놓여 있다. 창작과 비평에서 출간된 그 도서들은 매우 흥미로웠고 표지 디자인이 아름답다. 선배나 동료 작가들의 신간들도 몇 권 놓여 있었는데, 훑어보자 묘한 창작욕이 불타올랐다. 언젠가는 나도 책을 내야지, 하는 마음에서 솟아오른 욕구고 바람이다. 이 시기의 지하 1층, ‘작가의 방’이라는 공간에서는 김지안 작가의 동화책 『튤립 호텔』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창작을 위한 대형 테이블도 몇 개 있다. 테이블에는 콘센트가 적절히 비치되어 있으며 카페 분위기 자체가 시끄럽지 않아 글을 쓰기 좋았다. 이 도입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아마 자신만의 무언가를 쓰러 왔을 누군가가 자연스레 합석했다. 북카페라는 특성답게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까페 창비는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든다. 명저와 신인 작가들의 첫 책이 한 공간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을 배우고 따라 하며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얻고 나면 또 무엇을 쓸 것인가. 창작에 대한 강한 열망과 더불어 내 욕망의 본질에 깔려 있는 ‘작가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를 쓰게 하는 것들-서재진 시인 중학교 때, 흔히들 반의 분위기 메이커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교정기와 단발머리와 까르르 웃는 소리가 사랑스럽던 그 애는 내가 작가가 될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글을 쓰려면 국어지! 하며 우선 국문학과, 그것도 고려대 국문학과를 목표로 잡은 참이었고 친구들은 모두 나를 응원해 줬다. 2008년도의 책상에 고려대학교 14학번 서재진, 이라고 낙서하기도 했었다. 그 애는 어느 날 자기가 대단한 걸 알아 왔다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인터넷에서 본 건데,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들은 은, 는, 이, 가, 같은 조사를 빼먹지 않고 쓰는 경향이 있대. 그러니까 너도 글을 쓸 때 조사를 많이 넣어서 써봐. 너는 꼭 노벨 문학상을

  • 2023-05-04
‘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질문할 것들

‘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질문할 것들 김미정  스스로의 글을 언급하는 것이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한 부지런한 지인으로부터 「시장에서 생태계로」(졸고, 《문장 웹진》, 2023년 4월호)에 대한 짧은 감상을 들었다. 지인의 감상의 요지는 그런 것이었다. “시장 모델을 생태계 모델로 대체해 생각해 보려는 아이디어는 이해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 바깥이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글이 시장 시스템의 공고함을 결정론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한편, 현실의 다양한 문제 앞에서 ‘생태계’라는 말을 낭만적인 뉘앙스로부터 어떻게 구출할 수 있을까.”  쓰는 입장에서도 이해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번 2회 차 글에서 계획한 내용이 이 감상, 의견에 대한 느슨한 응답이 될 수도 있을 듯하여 잠시 언급해 둔다. 즉, 지인의 감상은 거칠지만 이렇게 바꿔도 취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 왜 시장으로부터 출발하는가. 시장 모델과 문학(쓰기/읽기)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둘째, 이 글에서 말하려는 생태계란 무엇인가.  1. 왜 시장에서 출발하는가  2010년대 초 이래로 ‘지구의 멸망보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기 어려워진 시대’(프레드릭 제임슨,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체감을 반복적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세기말의 이른바 세계화(globalization)의 연장선상의 일이며, 당시 외부소멸 테제들(세계화, 대항 세계화 측 모두)1)이 각기 다른 심정으로 예상했을 내용일 것이다. 저 인식은, 수용자와 창작자의 관계가 상품의 구매자와 판매자(소비자와 생산자) 등으로 치환되거나, 예술·문학장이 노동력 시장과 다를 바 없어졌다는 식의 상황만 지시하지 않는다. 우리 사고와 신체의 디테일을 위화감 없이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문제를 저 말로부터 환기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2)  물론 이것은 세기말 세기 초에 갑자기 문학·예술이 시장의 산물이 되었다거나, 근대 이래로 문학·예술이 자본주의를 모태로 출발했음을 간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문학·예술이 자본주의 시장 내의 환금성을 지닌 상품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은, 2000년대 이래 한국 문학계의 ‘제도 연구’가 내내 골몰해 온 바였다. 오늘날 문학·예술이 근대 자본주의 조건과 불가분이었음은 2000년대 이래로 연구장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체감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해, 이른바 작가론이나 작가연구야말로 지극히 근대적인 문학, 예술의 방법이라는 사실도 환기되었다. 작가론, 작가연구 속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삶과 사유와 감성체계로 통용된다. 그런데 일찍이 마르셀 뒤샹이나 앤디 워홀 같은 이들의 잘 알려진 퍼포먼스가 단적으로 보여주었듯, 작품의 성취에 개재된 작가(이름)의 신화는 시장의 브랜드네임과

  • 김미정
  • 2023-05-04
[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1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1회) 사회, 원고정리 : 살림 참여자 : 재재, 아리엘, 모아 책 : 신유진, 『창문 너머 어렴풋이』(시간의 흐름, 2022) 창밖 독서모임 1회, 2023년 4월 4일, 지향집 살림 : 이번에 나눌 책은 신유진 작가님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입니다. 신유진 작가님은 들어가는 말에 “내 글이 방이라면…”이라고 말하면서 두 개의 창을 내고 싶다고 말했어요. 오늘은 작가님의 시선으로 그 창밖을 함께 보려고 해요. 아리엘 : 저도 들어가는 말에 띠지를 붙였어요. 저는 평소에 인생을 과거와 내가 앞으로 나아갈 미래 중간 지대에 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작가님은 그것을 두 개의 창으로 말씀하신 것 같았어요. 모아 : 신유진 작가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인데, 작가님의 인생을 엿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재재 : 저도 신유진 작가님이 같은 지역에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평소에 에세이를 많이 읽지 않아서 조금 어색하긴 했는데 중간에 ‘기억’, ‘빛’이라는 큰 글자는 떠올라요. 살림 : 맞아요. 앞에서 두 개의 창이라고 했던 부분이 ‘기억’과 ‘빛’이라는 창이에요. 작가님은 “내 글이 방이라면… 글자 가득한 방에 기억이 보이는 창 하나와 빛이 들어오는 창 하나를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 창가에는 당신을 위한 편안한 의자를 가져다 놓을 겁니다. 창가에 잠시 머물다 가시겠습니까? 지금, 창문 활짝 열었습니다.”라고 썼어요. 아리엘 : 저는 ‘기억’ 챕터를 읽을 때는 조금 힘들었어요. 힘들었던 과거 때문에 저의 아팠던 기억도 떠올라 빨리 ‘빛’ 챕터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모아 : 기억은 곧 경험에 대한 부분인데, 저도 엄마에 대한 부분하고 특히 미자 이야기를 읽을 때 그랬어요. 작가님은 과연 미자를 찾았을까? 궁금하고요. 재재 : ‘희와 교환 일기’를 읽을 때는 좋은 기억들은 다 기억하는데 멀어질 때는 언제 멀어졌는지, 왜 멀어졌는지 알 수 없는 관계들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살림 : 저는 개인적으로 신유진 작가님을 만나서 얼굴도 알고 현재 지내고 계신 동네도 가보아서 읽는 동안 오버랩 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물론 지금과 같진 않겠지만 상상하게 되더군요. 모아 : 저는 그 빨간 벽돌 2층집이 계속 머리에 남았는데, 제가 어릴 때 살던 집과 비슷하기도 하고, 당시에는 떠나고 싶었는데 다시 돌아오게 되고 지나고 나면 문득 그때가 그립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그리움 때문에 마음이 애리다고 할까? 그런 감정이 들 때가 있어요. 재재 : 우리 각자 마음속에 서로 다른 빨간 벽돌 2층집들이 있는 것 같아요. 살림 : ‘기억’의 상당 부분에서 ‘엄마&r

  • 2023-05-04
상실의 형식(2)

상실의 형식 (2) 김요섭 1 '이쪽'과 '저쪽'은 유동적인 구분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리고 먼저 지시하고 싶은 방향에 따라 이쪽과 저쪽의 위치는 언제든 달라지고, 또 서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이쪽과 저쪽의 나눔은 언제나 잠정적이자 사적인 기준일 수밖에 없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실제 일어난 현실의 상황과는 다르게.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에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사라진 친척들에 대해서 아주 드물게 이야기하셨다. 할아버지의 형제들, 증조할아버지의 가족들, 아버지가 고향의 먼 친척들과 만나서 나누던 이야기 속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만난 적 없는 그들. 집안의 그 웃어른들을 만날 수 없을지라도, 그 자손인 먼 친척들이야 어디서 만난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도 본 적이 없었다. 친척들과의 만남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가 빠진 톱니처럼 그 관계들 사이에 비어 있는 틈들을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조금씩 의식했던 것 같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하고 말이다. 아버지도 그들에 대해서는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역시 그들을 만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라진 친척들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주 짧았다. 그 불쌍한 사람들, 그 불행한 땅에 대해서 그저 '이쪽'과 '저쪽' 모두가 그들을 괴롭혔고 그래서 사라진 이들보다 남은 이가 훨씬 적었다고. 그 사라진 이들의 이름이나 나이, 다른 사연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듣지 못했다. 하필 그들이 살았던 그 불행한 땅은 '이쪽'과 '저쪽'이 반복해서 점령했었다. 톱질할 때 날이 위로 아래로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전선이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고 해서 생존자들이 '톱질전쟁'1)이라고 불렀던 그 전쟁의 톱날은 아버지의 고향을 파괴했다. '이쪽'에서 온 군인들이 '저쪽' 사람들이라며 죽이고, '저쪽'에서 온 군인들은 '이쪽' 사람들이라며 죽이는 폭력이 반복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전쟁의 톱날 아래 놓였던 이들은 이쪽과 저쪽 그 어느 편 모두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들의 가족과 가까운 이들, 그리고 그 자신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떤 정치적 입장과도 연결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은 이쪽과 저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또 적대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두 권력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도, 또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이쪽을 만족시키는 행동은 저쪽의 공격을, 그리고 저쪽을 만족시키는 행동은 이쪽의 공격을 정당화하는 근거였다.2) 이쪽과 저쪽, 남과 북의 두 국가가 모두 자신들의 시각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고 이제는 모두 잊어버렸다. 사라진 사람들은 그저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이들, 그렇게 잊힌 이름들이자 내가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들이다. 이쪽과 저쪽도 아닌 이들이 기억될 자리는 오랜 시간 이쪽에도 저쪽에도 없었다. 기억된다 해도 저쪽에 의해 살해당한 이쪽의 사람들과 이쪽에 의해 살해당한 저쪽의 사람들로 그 기억이 조각조각 나뉘어 있을 뿐이다. 사라진 그들의 이름을 한자리에

  • 김요섭
  • 2023-05-04
마샬

마샬 민병훈 너는 물에 젖은 곰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너는 동물원에 가자고 갑작스럽게 말했다. 너는 배를 잡고 크게, 오래 웃는다. 곰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 너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곰이 웃겨, 라고 물어 보는 대신 네 바지에 묻은 흙을 닦았다. 너는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으며 곰에게 손을 흔든다. 너는 동물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곰을 본다. 너는 평소 그런 식으로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풍경을, 하나의 장면을 오래 응시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그사이 매점과 화장실과 흡연구역과 식물관에 다녀왔다. 너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눈을 깜빡이고 있다. 곰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철문을 통해 어딘가로 향하고, 너는 아쉬운 듯 쩝 소리를 내면서, 다시 물웅덩이에 들어가는 곰을 지켜본다. 너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입으로 소리를 낸다. 나는 네가 어떤 기분일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전부 알고 있다. 곰이었다니까. 좀체 흥분하지 않던 네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귀에서 잠시 삐, 이명이 들렸다. 휴대폰을 떼고 앞을 보자, 앞으로 넘어질 듯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잠실대교가 보였다. 언젠가 너는 시에서 대여하는 자전거를 타고 대교를 건넜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오도가도 못 하겠다고 전화한 적이 있다. 휴대폰 너머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너의 몸에 부딪혔다가 흩어지는 소리. 너는 가까운 곳에서 곰이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배달음식. 너는 그때 상반신만 겨우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고 봉지에 손을 뻗었다. 옆집 문이 열렸다. 너는 곰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곰은 자기가 음식을 주문한 것처럼, 하얀 봉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는 종일 밥을 먹지 않았고, 몸이 아픈 건 아니지만 기운이 없었다. 퇴근길에 내게 아무 음식이나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혹시 곰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시켰는지 떠올렸다가, 그보다는 곰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네게 놀라 가슴이 뛰었다. 어땠어, 묻자 곰이었지, 너는 말했다. 너는 동물원 폐장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자 그제야 자리에서 벗어난다. 너는 뛰다시피 걷는다. 새로 산 운동화 끈이 풀린다. 허리를 숙여 끈을 묶는 동안, 너는 네가 본 그것이 저 곰만큼 크진 않았다고 말한다. 가면을 썼던 건 아닌지, 인형 알바 옷을 입었던 건 아닌지, 나는 묻지 않는다. 네가 등을 두드릴 때, 나는 다른 신발끈도 풀었다가 다시 묶는다. 지하철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에 오르고, 너는 어깨에 기대 곯아떨어진다. 나는 버스가 운행 노선을 한 바퀴 더 돌 때까지 너를 깨우지 않는다. 수중에 있는 돈은 삼십오만 원. 너는 휴대폰 액정에 은행 어플을 켜고 내게 보여줬다. 이게 다야. 이게 다지만, 첫 인사에 빈손은 싫으니까. 너는 두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침 겨울이었고, 동면에 든 동물처럼, 하루의 반 이상을 침대에서 잠만 잤다. 네가 하던 일은, 네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 민병훈
  • 2023-05-04
일러두기

일러두기 조경란 모른다고도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재서에게 생겼다. 미용은 평소에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는 편은 아니지만 며칠 전에는 검은색 복면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손님이 텔레비전을 틀어 달라고 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여자 주인공이 눈과 입만 빼고 얼굴을 다 가리는 복면을 쓰곤 인질처럼 잡고 있던 아이들을 어떤 단체에서 구출해 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게 멋있어 보이기도 한 데다 주인공이 쓴 검정 니트 복면이 그 순간 못 견디게 갖고 싶었다고. 재서는 그 말을 하는 미용을 처음 보는 눈으로 봤다. 성인 여성 평균 키에서도 한참 모자라고 목소리도 작고 앳되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수줍어하는 마흔아홉 살의 미용. 그녀와 검은색 복면은 아무래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숨 쉬는 데 편하고 시야도 가리지 않는데요. 미용은 에코백에서 검은색 복면을 꺼내더니 무릎에 올려놓고 반듯하게 폈다. 방한용 안면 마스크인가 본데 구멍 세 개가 뚫린 조금 긴 털모자 같았고 재서의 눈에도 영화에서 도둑들이 쓰는 것과 엇비슷해 보였다. 이걸 쓰고 다니실 건 아니겠지요? 재서는 자신이 잘 모르는 지점의 미용에게 물었다. 사람 일은 모르죠. 미용은 소리 없이 웃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고 소리 없이 먹고 마시고 심지어 노래할 때도 미용은 그래 보였다. 그래서 다른 가게 사장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의식하고 있지 않다간 미용의 존재를 까맣게 잊기 십상이었다. 그게 미용의 남다른 점이라면 점인데 얼마 전부터인가 재서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되었다. 재서는 인쇄․복사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사’의 오래되고 쿠션이 푹 꺼진 소파에 미용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가게였고 지금은 재서가 꾸려 가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대학사 COPY’라는, 한때는 눈에 띄었고 쓸모가 있었으나 최근엔 눈여겨보는 사람이 드문 간판이 무겁게 걸려 있을 것이다. 한 차례 장맛비가 지나가 후텁지근한 6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였다. 미용의 가게는 토요일이 휴무, 대학사의 휴무는 내일이다. 재서가 오른쪽 팔에 반 깁스를 하지 않았다면 미용이 쉬는 날 여기 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미용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제일 먼저 왔다가 정작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돌아가는 사람. 미용이 이 동네에 처음 나타날 때부터 재서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런 사람과는 더 거리를 두고 싶어서 재서는 미용을 더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도와주러 왔다는 말 대신에 미용은 정 사장님이 우리 집 단골이시니까요, 라고 얼버무렸다. 재서의 아버지가 미용의 우엉 전문 반찬가게의 조림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재서는 평소보다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다. 나흘 전 밤중에 장롱 한 짝이 방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재서의 뒤로 쓰러졌다. 무슨 소리가 들려 순간적으로 피하긴 했는데 장롱 모서리가 오른팔 팔꿈치를 스치듯 쳤다. 아버지 말대로 만약 장롱이 머리로 무너졌다면. 집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상상은 한

  • 조경란
  • 2023-05-04
꽃섬

꽃섬 김재영 1. 섬의 동쪽 끝. 연홍이 보기에 그해에는 모든 바람이 그리로 부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제주행이 결정되었다. 살고 있던 강변의 아파트는 세를 내놓자마자 임차인을 만났고, 당장 생활비를 벌 일감도 생겼다. 일감이라야 출판사로부터 의뢰받은 번역이지만, 장소에 매이지 않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기에 그녀에겐 적격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래되었지만 아직은 쓸 만한 바닷가 이층집을 싸게 얻을 수 있었다. 집 뒤에는 널찍한 채마밭과 허름한 별채도 달려 있었다. 연홍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소리쳤다. “걱정 마.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번역을 해서 먹고살 거야.” 마침내 마주한 바다 앞에서 연홍은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넘실대는 푸른 바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죽어 있는 심장마저도 다시 뛰게 할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며 출퇴근을 반복하던 도시의 일상과는 사뭇 달랐다. 허망한 세월처럼 한 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는 강물과 달리 바다는 갯벌을 드러내며 멀리 물러났다가도 밤새 돌아와 아침이면 어미가 새끼를 핥듯이 해변을 적셨다. 파도가 희고 부드러운 거품으로 모래알을 적시는 동안 보말이며 조개, 다시마 같은 숱한 갯것들이 새 생명을 얻듯이 그녀도 바다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없이 잇닿은 그리움인 양 쉼 없이 일렁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연홍은 깊은 잠을 잤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어지럼증도 하루가 다르게 차도를 보였다. 때때로 차를 몰고 중산간의 곶자왈 숲에 가거나 이름 난 관광지에 들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마을 뒤쪽 기생화산인 오름에 오르거나 근처 철새도래지를 둘러보며 지냈다. 수많은 겨울철새들이 날아와 습지 일대를 가득 채웠다. 어떤 새들은 무리를 이루고, 어떤 새들은 외로이 어디론지 날아갔다. 하루는 온몸이 새까맣고 이마가 흰 새가 연홍의 눈에 띄었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동작이 웃음을 자아냈다. ‘어째서 저리 좌우를 살피는 걸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습성인가? 아니면 천적을 자주 살펴야 할 만큼 불안한 걸까?’ 일순 자기 자신이 철새처럼 여겨졌다.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에게까지 외면당한 채 외로이 이곳까지 날아온 나그네새……. 연홍은 어두운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댔다. 찰칵찰칵.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웬 사내가 갈대숲에 숨어 카메라 앵글을 이쪽으로 들이대고 있었다. “뭐예요? 당장 치우세요!” “쉿! 잠깐만. 조용히 좀 해.” “이자가 정말. 어디서 반말이에요?” “아, 글쎄 조용히 좀 하라니깐. 에이, 참. 글렀군, 글렀어.” 사내가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뭐 싼 놈이 큰소리친다더니…….” “그쪽 때문에 중요한 장면을 놓쳤잖아요

  • 김재영
  • 2023-05-04
난 선배하고만 하고 싶은데

난 선배하고만 하고 싶은데 원재운 혹시나 이상한 생각부터 든 당신이라면, 덮어요. 읽지 마. 아니다. 꼭 봐요. 순백의 깃털 같은 이야기를 보게 될 테니까. 1 경찰 언니가 시커먼 가방을 들고 나타난 건 약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운동용 제품이었다. 보기보다 묵직한지 테이블에 올려 둘 때 소리가 둔탁했다. 지퍼가 열리고 나타난 건 터져 나갈 듯 넘치는 돈이었다. 몇 다발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황금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비현실적이었다. 천 원짜리 돈 뭉치는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놀라서인지 어이가 없어서인지 아무도 떨어진 현찰 뭉치를 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을 잇는 언니를 빼고는 그랬다. 새파란 다발을 챙긴 언니는 대본을 낭독하듯 말을 뱉었다. 습득한 물건을 신고하지 않고 사유하면 절도죄(형법 제329조)나 점유이탈물횡령죄(형법 제360조)로 처벌받는다. 회사에 들고 가려다 문득 여기가 떠올랐다. 어차피 천 원짜리다. 엄청 큰돈도 아니다. 부담 없이 한 판 하자. 모두 비밀을 지킨다는 전제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경찰 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소리가 났다. 진열장 한가운데의 붙박이 시계는 멀쩡했다. 말썽은 위쪽의 뻐꾸기 몫이었다. 뻐꾸기는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무시했다. 멋대로 튀어나와 울어댔다. 울음의 크기와 횟수도 엉망이었다. 가끔은 누구의 혼백이라도 담겼나 싶을 정도였다. “민중의 지팡이가 그래도 돼?” 이죽거리는 마스터였다. 경찰 언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디든 인공지능 탑재가 유행이잖아요. 지팡이라고 다를 것 있나.” “지금은 보행 보조보다 재밋거리가 우선인 게 문제군.” “진짜 문제는, 범법이잖아요.” 용인하려는 듯한 마스터와 달리 선배는 단호했다. 창을 타고 스며든 달빛이 선배의 윗도리를 푸르스름하게 적셨다. 뭐가 얹혀도 무너지지 않을 듯한 어깨였다. 동시에 언제든 스러질 것처럼도 보였다. 달그림자의 마법에 나는 살짝 도리질을 쳤다. 경찰 언니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모범생의 할아버지께선 생각이 달라 보이는데.” “하고 싶어요. 해도 돼요?” 할아버지가 눈망울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나는 방금의 도리질보다 흐릿하게 숨을 뱉었다. 선배는 할아버지를 말렸다. 소용은 없었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마스터가 게임 테이블의 딜러 자리에 앉았다. 마스터의 카드 다루는 솜씨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딜러로서는 훌륭했다. 모였던 칩 더미가 네 패로 재차 나뉘었다. 정확했고, 능숙했다. “각자 돈이 아니니 캐시 게임은 못 되겠고, 그냥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저 가방 갖는 걸로. 다들 동의하지?” 나는 카드 더미를 쥐어 보았다. 오버핸드 후에 리플, 이후엔 한 손으로만. 코팅이 잘 된 카드는 파로 셔플을 아무리 해도 생채기 하나 돋지 않았다. 여기 처음 왔을

  • 원재운
  • 2023-05-04
이응 이응

이응 이응 김멜라 할머니와 나는 그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뭇잎 모양이나 열매를 보며 나무의 진짜 이름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어떤 이름이든 나무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 나무는 회색 수피가 매끄러웠고 잔가지 없이 하나로 곧게 뻗은 기둥 끝에 우산 살처럼 둥글게 휜 나뭇가지가 느긋하게 자라 있었다. 보리차차는 꼭 그 나무 밑동에 대고 오줌을 쌌다. 보리차차가 나무를 돌며 꼼꼼하게 냄새를 맡았기에 우리는 그 곁에 서서 나무의 잘생긴 풍모를 봤다. 시간이 흐른 뒤 나 혼자 그 공원에 갔을 때 나무는 잎을 다 떨군 채 잿빛 기둥으로 쉬고 있었다. 갈색 깃털의 새가 악보의 음표처럼 나뭇가지를 오르내렸다. 나는 근처의 흙이나 돌멩이에 보리차차의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나무와 그 나무가 뿌리 내린 땅, 할머니와 내가 보리차차를 앞세우며 걷던 공원의 오솔길, 그 풍경 어딘가에 보리차차의 오줌이 스며든 자국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똥은 없겠지. 똥은 늘 우리가 배변 봉투에 싸서 가져갔으니까. 하지만 고불거리는 털 오라기나 콧방울에서 나오는 숨, 담홍색 젤리 같은 혓바닥에서 떨어진 침방울, 높고 빠르게 짖는 소리······ 그게 무엇이든 보리차차의 일부가 산의 한 부분이 되어 여전히 내 곁에 머무는 것 같았다. 부르면 의심 없이 달려오는 보리차차. 나는 땅에 떨어진 솔방울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잘생긴 나무가 있는 산의 저지대에서 클럽하우스가 있는 중턱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갔다. 내구성이 좀 더 강한 신발을 신어야 했다고 후회한 건 검은 바위가 솟아 있는 비탈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길이 나지 않은 오르막에 낙엽과 마른 솔잎, 잔가지들이 우부룩하게 쌓여 있었다.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나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맺힌 진창에 발을 잘못 디뎌 흰색 스니커즈가 발등 부근까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바람결에 따라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이번에도 내가 쏜 화살을 찾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잃어버린 화살을 찾으려면 같은 방향으로 한 번 더 활을 쏴야 했다. 할머니는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 짓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할 땐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해봐.” 그때 할머니는 부엌 바닥에 앉아 오미자를 우려낸 물을 유리병에 담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주둥이가 좁은 유리병에 빨갛고 맑은 오미자물이 채워지는 걸 바라봤다. 할머니는 병 밖으로 흐른 오미자물을 행주로 닦아내다가 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슙 하고 빨았다. “더럽게.” “얼레?” 할머니는 보란 듯이 한 번 더 자기 검지에 키스했다. 슙. 그러자 무슨 일인가 하고 보리차차가 할머니에게 다가와 콧등을 들이밀었다. 나를 보며 타각, 할머니를 보며 타각. 어서 둘 중 한 명이 자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는 듯 타각

  • 김멜라
  • 2023-05-04
연희동 놀이터

연희동 놀이터 홍지호 놀이터에 있을게 말하고 놀이터에 앉아 있으면 놀이터가 너무 좋아져서 다음에 보자 할 수도 없고 친구가 늦게 오기를 아주 천천히 걸어오기를 걷다가 길이 좋아서 잠깐 멈춰서 산책하는 사람들 틈에서 만남도 잊고 만남을 잊고 걷다가 그렇게 나는 친구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놀이터에서 바랬다 그러다가 나중에 놀이터를 지나가다가 기다리고 있던 자리에 앉아서 놀이터가 너무 좋아져서 거기에서 보았던 산책에 대해 생각하기를 친구도 걷고 있겠거니 어딘가로 걸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산책하고 있겠거니 생각하기를 걷다가 걷다가 행복하시길 그리고 다시 한 번 어쩔 수 없이 행복하시길

  • 홍지호
  • 2023-05-04
사치

사치 박세미 몬스테라의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온다 흰 부분에 대한 직감 말린 새순이 조금씩 펼쳐질 때마다 선명해진다 아름답게 보인다…는 느낌은 나와 몬스테라 둘 중 누구의 유전적 형질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나의 오른쪽 수정체에 드리워진 흰 막 몬스테라의 무늬와 겹쳐질 때 강력한 초점이 되어 타오른다

  • 박세미
  • 2023-05-04
미술관을 위한 주석

미술관을 위한 주석* 박세미 기둥 1, 24 전시장은 거대한 하나의 공기통으로서 약 750일 동안 한 명의 남자가 호흡할 수 있다. 하나의 공기통으로서 약 천일 동안 한 명의 여자가 호흡할 수 있다. 관람자는 미술관이라는 공기통을 메고 잠수한다 기둥 6 후박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다. 높이 20m까지 자란다는 후박나무 공중에 심겨진 뿌리는 옆으로 옆으로 자라다가 기둥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관람자는 기둥을 오르는 뿌리를 줄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후박나무에게는 지금 위아래 앞뒤는 중요하지 않다 기둥 7~12 미국 스트라토론치 시스템스가 만든 비행기 스트라토론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날개를 가진 비행기. 뜯어진 오른쪽 날개가 여기 있고, 날개 위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된다. 음악이 고조될 때 관람자는 미술관을 타고 이륙한다 땅에 세워진 기둥만이 미술관을 증언하고 기둥 9, 10, 15, 16 거울 속 기둥들 거울 속 관람자는 기둥 사이에 감금되고 기둥처럼 복제되다가 천천히 거울 밖으로 풀려난다 기둥 13 숨어 있는 기둥 그림자를 모두 찾으시오. (서른여섯 개 이하이거나 이상일 수 있음) 관람자는 그림자들의 속닥거림을 듣게 되고 그들의 수다에 참여하려 하지만 조명의 저지로 포기한다 기둥 18 개미는 기둥을 이용하여 집을 지을 수 있다 / 없다 있다고 대답하는 관람자는 세계 유일의 개미가 될 것이다 기둥 19 전시를 가장 빨리 감상하는 방법은 벽을 따라 달리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100m를 16초에 뛴다면, 1분 안에 전시를 볼 수 있다. 사실은 절대 볼 수 없겠지만. 이에 관람자는 항변한다 관람 속도와 관람 깊이는 무관하다! 기둥 21 주위에 고인 물 관람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신발을 벗고 물을 밟는 자 미술관 직원에게 미술관의 하자를 건의하는 자 기둥 31 누군가 신발 안 반쯤 벗겨진 양말을 다시 신느라 기둥에 한쪽 손을 살짝 댄다면, 기둥은 예상치 못한 횡력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고, 손은 잠시 기둥의 힘을 느낄 것이다. 기둥과 사랑에 빠진 관람자는 앞으로 전시가 열릴 때마다 기둥을 만나러 미술관에 올 것이다 기둥 33 전시가 지루해진다면, 기린에게 목말을 부탁해 보자. (과천어린이대공원에서 탈출시켜 주는 조건으로!) 의외로 기린의 키는 전시장의 높이보다 작다 의외로 관람자의 키는 미술관 입장에선 지루한 요소다 기둥 35~36 누군가의 발밑에 머리를 두는 일을 어른들은 두려워하겠지만, 침대 네 개를 잇는 어린이가 있다. 여기에 딱 맞기 때문에. 이어진 네 개의 침대는 누운 기둥이나 마찬가지다 관람자는 더 이상 눕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둥 36 누구도 기둥을 의심하지 않으며 의식하지 않을 때, 가장 기둥이다 관람자는 관람하지 않는다 여기 있을 뿐 가장 자신이기 위하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3)의 전시 제목이며, 전시의 커미션 작업인 본인의 구체시 를 위한 주석이자 연계 시이기도 하다.

  • 박세미
  • 2023-05-04
비세계

비세계 변선우 들판에서 닭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그것은 눈동자가 되고 있으므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자꾸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비세계에 있으므로, 우리 사이에 커튼이 있다. 닭 한 마리는 돌다가 탈주하고 있다. 숲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으므로, 닭 한 마리가 덩달아 좇아가고 있다. 숲속이 조금 더 뻑뻑해지고 있다. 커튼은 세차게 펄럭거리고 있으므로, 나는 들통 나고 있다. 닭들의 눈은 모두 마흔세 개. 아니, 팔십하고 여덟 개……. 숲속에서 전쟁은 개시되고, 세상은 평면이 된다. 도무지 정지하지 않는 평면. 평평해지지 않는 평면……

  • 변선우
  • 2023-05-04
반복재생

반복재생 최주연 있는 힘껏 달리자 시원한 바람이 다리 사이로 들어오고 내 하얀 원피스가 둥그렇게 부풀어 올라요 저 멀리서 당신이 보이기 시작하고 두 손으로 치마 모아 움켜쥐어 봐도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 안 해요 다시 만난 우리는 오월의 어린이 대공원 풍선처럼 서로의 어깨에 쓰러지듯 기대어 바람만 탓해요 나 이제는 우리의 들뜬 마음 엮어 만든 매듭을 손에 쥐고 당신과 함께 버스에 올라탈 거예요 오늘은 같은 노래를 들어요 그간의 이야기를 담은 덜컹거리는 버스 안 자꾸만 맞닿는 팔꿈치 바람 섞인 옅은 땀 냄새가 계속해서 코끝을 스치고 이런 순간이면 우리가 정말로 같은 계절 속에 있다는 생각 조금 늦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늘이며 멈추고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버스 위에서 한 곡이 끝나도 이어지는 플레이리스트처럼 계속될 거예요

  • 2023-05-04
아주 작은 메리 상자

아주 작은 메리 상자 최주연 나는 있어요 성실하게 귀를 말랑하게 데울 수 있는 따뜻한 마룻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채 있거나 시작되는 건물의 하나 아래층 같은, 그런 곳에 있어요 사람들과 또다시 사람들 사이에 그런데도 나는 쉽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그게 좋아요 조금 낮은 곳에서 마음의 최선으로 고개를 치켜 올린 뒤 사람들 발끝의 움직임을 천천히 따라가는 게 요즘 나는 부쩍 의자나 테이블의 다리 같은 것들과 더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고 어떤 이의 운동화와 바지 밑단을 보고 나머지를 상상해 보는 일은 너무 안전해서 저기 저 사람은 짜임이 엉성한 스웨터를 입고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누구도 다치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가졌을 법한 입술의 곡선에 대해 떠올려 보고 이대로는 정말 다 녹아버릴 것만 같아요 그럼 사람들이 쉽게 도망갈 텐데 나 한때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요 불행히도 나의 꿈은 여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여전히 아이스크림콘을 먹다 보면 끝부분은 꼭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어져요 초콜릿이 발린 아주 작은 고깔 모양 그걸 마음이라고 부르진 않을 테지만, 하면서 끝내 감추고 만 그런 마음은 어디에 담아 모으면 좋을까요 있어요, 아직 여기에

  • 2023-05-04
비세계

비세계 변선우 1 세계에 구멍이 났다. 너무 많은 가시 때문에 너무 많은 구멍이····. 신께서 힘이 없어 거대한 후라 크레피탄스*를 심으시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버렸다. ···이제 무엇이 흘러들까. 인류는 땅에다 용기를 묻고 있다. 땅콩만 한 믿음이 땅콩만큼 새겨지고 있다. 완고하던 유산들이 하나둘 가루가 되어 가는 기분···. 세계는 가장 먼저 음악을 잃었으며 유행은 도둑처럼 찾아오는데 2 바람이 쪼개지고 해가 불어온다. 하늘이 넘어지고 땅이 쏟아진다. 의사는 손목을 긋고 정원사는 목을 매다는 거다. 제정신이 자꾸만 제정신을 해산하는 거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시를 쓰고 있다. 분수에 빠진 생쥐와 분수에 빠진 또 다른 생쥐는 껴안는다. 분수는 정말 크고 생쥐들은 정말 작아서 방법이 이것뿐이라는 듯 껴안지만 냄새를 맡지 않는다. 후회와 모의가 없다. 믿음만 깊어진다. ···시인은 시작한다. 3 나는 한 구멍에 걸터앉았다. 발가벗고 털을 뽑는다. 세계에 흩뿌린다. 인류는 굴을 파서 몸을 욱여넣고 있다. 싱싱한 땅콩이 되고 있나. 나는 마지막 남은 한 가닥까지 뽑고 있다. 알쥐가 되고 있다. 세계는 쟁취에 점령당하였다. 인류는 (육안상) 멸종하였다. 신은 이제서야 다락방과 환몽을 발명하므로 나는 넘나들고 싶은 거다. 일단 코를 후비는 거다. 엷은 안개들이 차례대로 펼쳐진다. 불처럼 번져 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무 중 하나이며, 몸통에 가시를 두르고 있다. 독성이 높은 수액과 열매의 씨앗을 자랑한다. 열매를 다이너마이트처럼 터뜨려 번식한다.

  • 변선우
  • 2023-05-04
구유 앞에서

구유 앞에서 이영은 어여쁘신 아기를 뵙습니다 계신 곳 너무 낮아서 무릎을 꿇습니다 작고 허름한 짐승 밥그릇 다리를 구부리고 허리를 굽힙니다 그리고 힘이 듭니다 누우신 곳보다 제가 서 있는 곳 더 높아서입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더 높이 오르려고 버둥거릴 테지만 큰절 올리며 깨닫습니다 한사코 낮아지시는 하느님 앞에서 기어이 우뚝 서고 싶었던 부끄러움 삼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듣는 마음을 향해 달려가는 열망에게 무지개의 음계로 용기를 주시리라는 것을 #솔로몬의 지혜

  • 이영은
  • 2023-05-04
늙은 나무의 노래

늙은 나무의 노래 김영미 붉은 낮이거나 느릿한 가을 오후거나 살결이 새하얀 겨울 새벽이거나 푸른 눈을 가진 어느 짐승의 숨결이거나 그대, 한숨이 되어버린 그대 눈 먼 그대의 아침 그 어디쯤에서 나는 어설픈 사랑을 연주하겠네 투명한 영혼이 불길처럼 솟아오르다 하얀 재처럼 흩어지고 한껏 게을러진 목마가 끽끽거리는 계절 낡고 헐거워진 사랑을 느린 노래로 읊조리겠네 한때는 향그러운 풀잎의 냄새로 허공을 메우고 또 한때는 차가운 이슬로 삶을 채우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일로 허기를 잊기도 하던 그대, 나의 소리 없는 희망이여 꿈을 꾸는 것도 사는 동안의 부조리한 일이라 허름해진 마음을 못내 닫지 못해 머뭇거리고 망설이던 푸르던 날의 슬픔과 제멋대로 해석했던 부서진 사랑을 주워 담고 중독된 평온함에 기대어 느슨해지는 기억의 기억들이 허상을 매만지는 긴긴 어느 날 오후는 맑은 계절이었으면 좋겠네

  • 김영미
  • 2023-05-04
Y의 사랑일지

Y의 사랑일지 김영미 책으로 사랑을 배워서 나의 사랑에서는 종이 냄새가 났다. 바스락거리는 숨결, 쉽게 구겨지는 웃음, 가볍게 흩어지는 감정, 뻣뻣한 자존심, 아무 아픔 없이 찢어지는 헤어짐. 알지도 못하는 남의 감정들이 속속들이 들어와 나의 사랑이 되었다. 끈적이는 그리움, 아리도록 아픈 이별, 추할만큼 추해진 눈물 속에 번들거리는 사랑. 내가 너에게서 사랑을 배웠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사랑이 사랑이었을까. 종일 어수선해진 가슴에 손을 얹어 위무하는 차분한 저녁 내음 중독된 글자가 주는 평화로운 게으름 속없이 투명한 책벌레가 지겨운 듯 기어간다. 살비듬 냄새와 같은 교양과 수줍음을 장전하고 오늘 저녁 너를 만나러 간다. 첫사랑의 말들을 복습하고 콩닥거려야 한다는 가슴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너에게 보여야 할 간지럽고 청순한 웃음을 꺼내어 자꾸 문질러 보기도 한다.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연필, 지우개, 볼펜, 형광펜, 수정테이프 그리고 상황을 예습한 감정들. 헐거운 필통에서 줄줄 새어 나가는 감정들이 정차하는 정류장마다 내렸다. 쓰고 지우고 수정하고 수정하여 넝마가 되어버린 행복. 너를 만나야 하는 정류장이 지나가 버렸다. 이것은 이별의 예고인가 예고된 이별인가 아니면 진부하다던 사랑의 한 페이진가. 어제 저녁 너는 구어체로 ‘사랑해’를 말하고 나는 문어체로 ‘저도, 그렇습니다’라고 사랑을 대답했다. 흐린 차창에 봄눈처럼 스쳐가던 너의 영상 습자지로 베껴낸 사랑이 책장 귀퉁이를 장식했다.

  • 김영미
  • 2023-05-04
목련 서사

목련 서사 이영은 흰 상여 꽃 식탁에 놓았네 목련 필 때 죽고 싶다던 어머니 꽃순들 끙끙 앓는 봄밤 얼마나 높은음으로 부르고 싶었을까 지금 나처럼 이 봄 가기 전 서둘러 엄마 찾아 나선다 붉은 흉터 들쑤시고 꽃을 피우는 가슴 눈물 향 올리는 작은 제사상 그리운 것이 남아 있는 꽃들의 무덤 수십만 송이 흰 나비 떼들 날아오른다 부디, 희디흰 사랑의 빛으로 기억해 주렴 작별 인사 끝내는 상냥한 시간 엄마는 하염없이 떨어져 내린다 백목련 한 송이 마음에 꽂는다

  • 이영은
  • 2023-05-04
반건조 살구

반건조 살구 안희연 버리러 다녀왔습니다 꼭지를 떠나려면 결심이 필요하니까요 떨어져 봐야 흙바닥인 삶이지만 아픔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버릴 땐 큰 것 위주로 버립니다 휑한 느낌이 좋아서요 속에 뭐가 많은 봄날이에요 나 하나로도 버겁다는 뜻입니다 이 집에 나와 간장 종지만 남은 사연입니다 누가 더 옹졸한가 겨루는 대국입니다 바둑에서는 하수가 흑을 잡는다면서요 양보합니다, 이 집엔 결국 간장 종지가 남을 거예요 그리울까요 가지 끝에 매달린 요람을 흔들어 주던 바람 밤과 나의 은밀한 결속이었던 달빛 실금들 언젠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저를 만난다면 흙은 살살 털어 주세요 처음은 텁텁하고 떫은 법이잖아요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신맛보단 단맛이 강해질 테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쫀득해질 거예요 위안이 있다면 받을 땐 한 다발이었던 꽃들도 죽을 땐 송이송이라는 것 알맹이 알맹이 느리게 오는 아침을 맞아요 미래요? 놓일 수 있는 식탁은 광활합니다 살구의 색감은 살구만이 낼 수 있습니다 식탁보로 속이지 않은 식탁을 원해요

  • 안희연
  • 2023-05-04
독 안에

독 안에 안희연 잘라낸 뒤엔 모체 가까운 곳에 두세요 고무나무의 삽수를 설명하는 전문가의 목소리가 밝다 물을 너무 자주 갈아 주어도 안 됩니다 가지치기는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과정이에요 흠칫 놀라게 되는 말들이다 밝음을 신뢰하지만 밝기만 한 사람은 무섭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주인은 나의 거처를 여러 번 옮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곁 홀로서기 좋은 위치를 궁리 중이다 밤이 되면 독 안에 든 기분이 들 거야 그때까지 햇볕 이불을 충분히 덮어야 해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우후죽순 밀어 올리는 계절, 봄이라 했다 태양과의 눈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여름 마른 잎을 전리품처럼 매달았다, 가을 생장점이 닫히는 계절, 겨울 독 안에서 독 안에서 깨버리면 그만일 독이더라도 연두를 밀어 올리려는 발걸음 당신은 나의 가지를 잘라 간다 무성하다는 뜻이다

  • 안희연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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