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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체능

  • 작성일 2024-10-01

 예체능


김중일


   망친 도화지를 찢었어. 물통에서 그만 잠이 넘쳤거든. 잠이 넘쳐서 흘러나온 그림자를 과자부스러기처럼 빨아들이는 여진들. 그걸 목격한 동공 지진. 붓을 든 채 깜빡 졸던 중에, 그만 졸음을 스케치한 여진들. 찢긴 도화지에 난 여진들.

   여태 최적의 비율을 찾으려 바람과 바다는 서로 섞이며 물타기 하는 중. 수평선에 줄타기하는, 바다를 찾은 뭍사람들의 상념들.

   하루에 한 장씩 찢겨 나가는 실패한 그림들. 무슨 소리, 찰나의 한 장이라는 말. 여태 지구를 그리고 있는 삼색 볼펜은 알다시피 해와 달과 그리고 그림자를 그리는 발.

   기본적으로 그림자를 잘 그리는 것이 그림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그림자 선생님이 말했어. 명보다는 암이나 잠을 잘 그려야 하듯. 잘 써야 하는 색깔은 엷은 투명, 짙은 투명, 흰 투명, 검은 투명 등등.

   오늘의 주제처럼 주어진 오늘의 물감. 해를 쥐어짜자 발끝에서 흘러나오는 엷은 밤. 확인 불가능한 찰나 떠오르며 대기 중에 녹아버린 러닝 타임이 담긴 숫자. 미술 시간 끝난 건가요 묻지도 못하고 일단 달렸어, 내가 아니라 미술 시간에 내가 열심히 그리던,

   머리 팔 팔 다리 다리 의도치 않게 온몸이 손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나를 바통처럼 꼭 쥐고 이어달리기. 그림자가 낀 장갑처럼 젖은 내 옷.

   미술 시간의 여진인지 한여름의 초록이 짙어지며 갈빛을 띰. 검정은 가장 짙은 초록. 그려진 궤적을 따라 하루 한 바퀴 도는 트랙.

   밤의 건물 안을 통과하는 찰나의 하룻밤. 나를 나에게 건네다가 그만 떨어뜨림. 떨어져 뒹구는, 바통처럼 꼭 쥐고 있던 기억. 실수도 루틴.

   건물 안에 침대를 들이고, 떨어진 바통처럼 침대에 뒹굴며 황망히 관중석에 빼곡히 놓인 잠을 열어 보지만, 열리지 않는 잠. 잠을 청해 보지만, 응하지 않는 잠. 이루지 못한 잠. 높이 쌓지 못한 잠. 반듯이 세우지 못한 잠. 그것은 당장은 달리기를 멈추는 것처럼, 불가능.

   함성처럼 흩어진 잠이, 일으켜 세우지 못한 잠이 대신 그림자가 되어, 잠시 넘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 나를 줍고 다시 꼭 쥐고 건물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 그림자의 손에 매달려 나뭇가지의 참새처럼 종일 재잘거린 나.

   여름 나무의 이파리들이 뜬눈의 눈꺼풀처럼 깜박이고 있어. 그 눈꺼풀 안에 얼음 눈동자들은 폭염과 여름 때문인지 녹아 사라졌어. 내 눈동자를 나무 이파리 안에 넣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그림자가 초록색인 걸 알 수 있어.

   오늘의 기록은 단축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어, 그것이 상관없다는 걸. 열심히 그려도 잠도 그림자도 늘 미완성, 그래서 손가락이 겨우 다섯 개뿐이라 자꾸 불면의 나를 밤중에 떨어뜨리는 것도. 초록 옷의 그림자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그저 달리는 네 손에 매달려 살짝 멀미가 나는데, 검은 눈동자 같은 나무 그늘 속에 빠진 눈썹 한 올처럼 붙어 잠깐 찌르고 싶어. 거슬리게 하고 싶어. 아무라도 눈물 나게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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