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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권유

  • 작성일 2024-12-01

   삶의 권유


나지환


   내리막길 여행에의 권유를 받았다.


   “내리막길 여행은 내리막길을 찾아 내려가는 여행입니다. 이 여행에서 경사를 오르는 일은 허용되지 않고, 내려가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북한산 정상에서 하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점점 해발고도가 낮은 인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경로를 상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내리막길 여행자에게는 더 완벽한 경로가 요구됩니다. 새하얀 종잇장은 펼쳐 놓으면 평평해 보이지만 공구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작게 구겨진 굴곡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사전자현미경 수준에서 파악한다면, 펄프의 압연차로 인한 높이 공차 ±0.005mm 안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산맥과 미세한 골짜기로 등고선마저 그려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곳에는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내리막 여행자는 완벽한 내리막 여행을 하기 위해 최대한 신중히 걸어 다녀야 할 것입니다.”


   선호는 숙련된 내리막 여행자였고, 우선 자신의 여행을 봐 주기를 원했다. 나는 한강공원에서 그가 동료들과 내리막 여행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북한산 정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듄』에서 모래걸음을 밟는 이들처럼 기묘한 보폭으로, 하나의 보폭이 발생시키는 수천 개의 선택지 중에서 단 하나의 높낮이를 채택하며,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하루살이들이 쏟아지는 노을에 가려진 채 역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한 내리막에 도달할 때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자 했다. 선 채로 가방에서 김밥과 물을 꺼내어 먹은 뒤 다시 내리막을 탐지했다. 다음날 직장에 갔다가 돌아오니 그들은 여전히 한강 대교를 건너지 못한 채로 있었다. 단지 어제에 비해 수십 미터를 옮겨 간 것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선두에서 나아가는 선호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그들만의 완벽한 내리막 경로가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이 정말로 서울에서 인천을 이어 내는 단 하나의 기다란 내리막, 연속적인 하향 궤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수로 미세한 오르막을 밟아 버린 내리막 여행자들은 그룹으로부터 낙오되었다. 그들은 그길로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낙오자들은 가끔 내리막 크루를 찾아와 식료품을 공급하고 그들이 내려가는 것을 응원하거나 걱정했다. 내가 회식하고 취한 채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드는 순간에도, 선호와 그의 크루들은 힘차게 내려가고 있었다. 선호는 휘황찬란한 목동의 먹자골목쯤 이르렀을 때, 요란한 불빛과 대중가요 소리 속에서도 정확히 내려가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때 양꼬치집에서 놀고 있었다. 선호를 지켜보겠다던 약속을 잊고 말았다.


   내가 뒤늦게 연차를 내고 인천에 뛰어갔을 때, 선호는 버려진 야적장에 있었다. 나뒹구는 컨테이너 사이에서 선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내리막 여행자들은 모두 낙오되었고, 선호만이 모든 내리막을 완주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내려오기만 했다. 그가 본 것은 내려가는 것들뿐이었다. 그는 기울어진 풍경을 헤쳐 왔다. 등대의 빛이 닿지 않는 위치였다. 검은 바닷물이 눈앞에서 출렁이는 곳이었다. 선호는 그 앞에 걸터앉아, 자신의 마지막 내리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삶을 권유했다.


   “너의 내리막은 끝났어. 이제 오르막길이 있어. 오르막길 여행을 하자. 오르막길 여행은 오르막을 찾아 올라가는 여행이야. 오르막길에 오르기 위해서는 신중하지 않아도 돼. 깊은 구덩이에 발이 빠져도 다시 올라서기만 하면 그것이 오르막길이다. 이 손을 잡아. 이걸 잡고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너는 너의 첫 오르막을 시작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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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지환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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