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에 쏘인 이야기
- 작성일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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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에 쏘인 이야기
안도현
하룻밤 우리집에 묵은 후배가 아침에 형님 텃밭에 풀 같이 뽑아요 하기에 나갔다가 여기 벌집이 있어요 어디 어디 하고 다가가서 풀덤불을 헤치다가 그만 쏘이고 말았다
오른쪽 정강이와 종아리 서너 군데가 몹시 따끔거렸다 아내가 물파스를 찾아왔고 냉동실의 얼음덩이를 꺼내 문질렀다 뭐 괜찮다 했지만 반바지로 나간 게 화근이었다 침을 찾아 빼내야 한다며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쏘인 데를 짓눌렀다 침은 보이지 않고 발갛게 부어오른 부위가 동전 크기만 해서 그러다가 말겠지 하면서 긁었다 손톱으로
긁었는데 손등이 내 손 아닌 것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가만 놔두지 읺겠어 에프킬라와 가스 토치를 들고 나가 화풀이하듯 벌집 쪽을 분탕질하고는 마당 가 의자에 점잖게 앉아
또 긁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사타구니로 가려운 게 퍼지는 것이냐 나는 차마 사타구니가 가렵다고 말도 못 하고 돌아앉아 벅벅 긁고 나니 이번에는 발등이 부어올랐다 그가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물었고 나는 어릴 적에 풀밭에서 놀다가 벌에 쏘인 적 있지 외할머니가 된장 발라 줘서 끄떡없이 나은 사람이라고
태연한 척하면서 대범한 척 이까짓 거 이까짓 거 하면서
아침을 먹으려고 물을 한 모금 삼키는데 넘어가지 않았다 목구멍이 부었나 봐 손등을 긁으며 발등을 긁으며 사타구니를 긁으며 목구멍을 긁을 수가 없어 이놈들 때문에 밥을 굶게 생겼네 그러다가 결국 응급실을 가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번졌다
거 참 벌에 몇 방 쏘였다고 쩔쩔매는 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샤워를 하려고 훌러덩 벗었는데 양쪽 겨드랑이와 허벅지가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적화통일된 것처럼 붉은 두드러기가 창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재난도 아니고 환란도 아닌 그렇지만 쏘이고 부어오르고 가렵고 긁은 이 뜻밖의 이야기를 시를 잘도 쓰는 후배가 벌에 쏘인 이야기를 먼저 쓰면 어떡하나 먼저 발표를 하면 어떡하나 나는 조바심이 나서 옹졸하게 부랴부랴 종이 위에 볼펜으로 몇 줄 적어 두고 나갔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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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현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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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현
-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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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현
-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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