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 작성일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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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최지인
너는 슬프지 않다고 하는데
몇 주 전 암 진단을 받았다 암세포가 림프샘에 전이된 상태다
네 아버지는 이름난 연주자였다 술에 취하면 너를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 너는 가까스로 화장실에 들어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나중에 엄마가 그러더라
지나간 일이니 용서하라고
또 그러더라
사촌에게 연락해 진단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보라고
오른쪽 눈에 대하여:
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피를 모조리 다른 사람의 것으로 수혈해야 했다 네 몸에는 모르는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네가 돌봤던 아이들
한국어가 서툴렀던 이민자 2세들
한 번도 너희를 잊지 않았어
너희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네 오래된 악기는 집시의 것처럼 보통보다 조금 작고 까맣다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네 삶을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첼로를 시작한 뒤로 나는 나를 인정할 수가 없었어 졸업 연주회 마지막 여덟 마디를 남겨 두고 손이 아파지더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무대가 마지막인 줄 알았어
너는 천 년 된 은행나무 밑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큰 가지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멍울이 자라는 게 느껴져
사람들이 자꾸 내 꿈을 꾼대
네가 왼쪽 눈을 꺼내 찬물에 씻는다
잠깐 깜깜해질 테지만
네가 웃는다
그래, 너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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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지기
-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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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지기
- 2025-02-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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