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여름
- 작성일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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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여름
윤은성
풀이 있는 길을 알아. 나는 시멘트 포장된
희고 거친 잔물결 무늬가 팬 길을 기억한다. 비탈과 볕과 그늘을 기억한다. 나는 사라진다. 목욕탕 옥상 위에서 누운 채 깨어났다.
빗방울이 닿고.
당신을 떠올렸다. 불렀다. 거기에 시가 있었단 걸 어렴풋이 느꼈다. 잠의 둥근 모양이었다. 헤엄치는 마음으로 저녁을 맞았다. 얼굴에 이끼가 피고. 잔물결 무늬에 물이 고였다.
내 등에선 풀이 거세게 자랐다.
*
돈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래도 돈이 필요한 날들이 한없이 이어졌다.
더운 계절이 이어지고 있을 때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여자와 아이들이, 서로의 머리맡에 감자나 익은 앵두, 옥수수를 두고 갔다.
목사님은 찾아와서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 주고 가셨다.
내가 아팠던 게 감기 때문인지, 태어났기 때문인지, 마을의 가부장이 누구인지 알아 버렸기 때문인지 조금 헷갈린다.
헷갈리지 않는다.
마을의 언니들이 종종 나를 안아 주거나 나를 버렸다. 버리는 인형들을 내가 주워 왔다. 지나다니는 아이가 없으면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나는 없음을 알았다. 자꾸 흙의 색이 붉거나 검게 변했다.
죽지 않은 개, 잡히지 않은 개, 버린 개, 홀로 살아난 개, 뜬 장 밖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개들이
산을 오르고 내려왔다. 나는 있음을 알았고, 사라짐을 알았다. 죽임도 알았다.
*
내가 아빠를 찾으러 간 길에서는 커다란 뱀과 작은 뱀을 차례로 봤다. 커다란 뱀이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나는 사라지지 않고 뱀에게 나타났다. 뱀에게는 시가 필요가 없는지, 뱀에게 시는 나의 시와는 또 다른 무언가인지 조금은 궁금하다.
슬픔과 분노를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우리 집엔 많았다. 풀이 집에 많듯이.
*
옆 마을 돈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나는 시가 돼지의 몸으로 타 버린 걸 상상했다. 목이 마르고
글자들이 살에 눌어붙었다가 부서지는 시간 내내 그러니까 아주 오래
타고 있는 시를 봤다.
뉴스 안쪽으로 그리고 그 바깥으로 화염이 인다. 돼지는 형체가 남았다. 나는 내 얼굴과 팔을 자주 더듬었다. 마른세수를 했다. 알 것 같은 남자가 뉴스에서 울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문화적인 이유에서였다고 생각하면
내 입안 양쪽 볼과 배 안에 누른 살점들이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치아에 살점이 붙고 썩는 기분이 든다.
붙어서 함께 썩는 시를 봤다. 옥상이 있던 작고 흰 페인트칠 된 건물은 내가 성인이 되기 전 부수어졌다. 부수어지다 무너졌다. 무너졌고 더 부수어졌다.
아랫집 노인이 결국 담을 다 고치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내 아이가 담 위에서 놀 때 마침 무너졌다.
*
아랫집 노인이
태몽을 자꾸 내게 일러 주러 온다. 풀이 자라라고 내버려둔 담장들이 풀 속에서 시처럼 놓여 있었다. 돈사에서 돼지들이 다시 태어나려 했다. 돈사 바깥의 시들이
돼지를 다시 임신시키려 했다.
덜덜 떨며 풀포기를 붙잡았다.
용달차가 오자 나는 치마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짚 속에서 나왔다. 저긴 이미 다 타 버렸는데
나는 줄 돈도 받을 돈도 없었다. 마을이 타 버렸고 나도 거기 없었다.
다리를 다쳤던 내 아이가 자랐다.
엄마의 꿈이 내 꿈에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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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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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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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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