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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광선

  • 작성일 2025-10-01

   녹색 광선


조인호

  

   형이 물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그의 몸은 너무나

   투명해져 있었다


   밤바다에는 달이 떴고,

   녹색 광선이

   형의 몸을 꿰뚫고 있었는데도

   형은 아파하지 않는 듯했다


   “봐라, 깨끗해졌어”


   형이 말씀해 주실 때마다

   형의 몸을 

   반으로 가르는 바다― 

   너머로

   파도가 밀려오고는 했다


   그 바다에서

   고아원 아이들은 모두 다

   보름달물해파리처럼 

   투명해졌고,


   그것은 너무나 투명해서

   마치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아이들 같았고


   그래서 나는 

   형들, 누나들, 동생들이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은―

   무서운 꿈을 

   꿀 것만 같아서


   감았던 

   눈을 뜨면

   그 바다, 

   거기에 고아들이 있었다


   투명해져서

   너무나 투명해서

   고아들은 서로를 통과해 

   지나다닐 수도 있었고

   물방울처럼

   하나가 둘로 나뉘기도 하고

   둘이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 바다에서,

   나는 형과 때론 하나가 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밤바다에 혼자 떠 있는

   기분이 들고는 했고


   그 순간은

   물을 무서워하던 내가 

   처음으로 물에 뜨는 시간이었고,

   밤바다에 누운 채

   형에게 

   몸이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다에는 이렇게나 많은 별이 떠서

   어딘가로 무섭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 해변에는 

   고아원의 여전도사가 함께 있어

   그녀는 

   고아들에게 세례를 주고 계셨다

   바다로,

   그녀가 먼저 걸어 들어가고,

   그녀를 따라 

   고아들이 

   형들, 누나들, 동생들이

   따라 걸어 들어갔고

   나도 

   따라 걸어 들어갔고


   고아들을 반으로 가르는 바다―

   수면 위로

   창처럼

   내려꽂히는 달빛, 

   녹색 광선


   그 바다에서,

   아이들이 나올 때는

   몸은 투명해져 있어서

   너무나 

   투명해져서


   형들에게는 검은 미역이

   누나들에게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동생들에게는 불가사리가

   담겨 나오고


   그 바다에서,

   나는 세례를 받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겨,

   올려다본 수면 위로

   일렁이는 고아들의 얼굴들


   눈과 코와 입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흔들고


   “숨 쉬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바다 가까운 곳― 

   폐교에서 보낸 고아들의 여름


   교실 마룻바닥 

   백여 명이 족히 넘는

   고아들이 잠들어 있고


   한밤중 형은 

   밤바다로 걸어 나가시고 나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간다


   밤의 바다 앞에서―

   우리 둘은 그렇게

   녹색 광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면 위로 

   여전히 

   창처럼 꽂히는 

   녹색 광선


   그 창은 

   점점 많아져

   바다 위 

   묘비들이 점점 많아져

   그 밤바다, 

   속으로 


   형은 걸어 들어가시고

   다시 해변으로 걸어 나왔을 때

   형은 

   다시 태어난 사람 같았고

   모래 위에 누워

   가쁜 숨을 쉬고 계셨다


   형의 

   몸은 투명해서

   너무나 투명해서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아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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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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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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