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카겔
- 작성일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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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카겔
이다희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진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하늘은 원래 구멍 그 자체이다. 구멍에 어떻게 구멍이 뚫린단 말인가.
비가 온다는 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나무로 만든 악기들은 습기에 매우 약하다.
나는 케이스를 열어 조심스럽게 첼로를 꺼낸다. 굳이 당겨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악기는 퉁퉁 불어 있다. 이런 날에 제대로 소리가 날 리 없다.
남은 실리카겔 봉투를 세어 본다. 5개가 남아 있다. 나는 더 이상 실리카겔을 사 두지 않는다. 5개의 실리카겔 봉투를 다 쓰는 날에 연주를 그만둘 것이다. 아, 겨우 이런 다짐으로 연주 생활을 이어 간다.
봉투 겉표지에 있는 붉은 입술 위에 검은색의 커다란 엑스 표시가 있다. 먹지 말라는 것이겠지. 나는 조용히 붉은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어 본다. 내 입술이 더 작은 것 같아. 이 표면은 모든 것을 밀어낸다. 먹지 말라고 그저 여기에 가만히 두라고 말한다.
봉투를 흔들면 마치 작은 쌀알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잘 정리해 둔 신경줄이 이상한 곳으로 흐른다. 이 소리는 나의 어떤 것을 열고는 바로 닫는다.
일어나 따뜻한 차를 만든다. 침대에서 포트까지 25보. 차를 손에 쥐고 서성거린다. 러그의 양모가 올라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이 만족감은 무엇일까. 무엇인가 해결된 기분이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다.
러그 위에 둘 가구를 사야겠다. 무엇이 좋을까? 나는 식어 가는 차를 쥐고 러그 위를 빙빙 돈다. 작은 원 위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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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희
-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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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적산가옥(敵産家屋)1) 이다희 며칠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딱딱한 바게트에 반숙으로 나오는 계란 노른자를 발라먹고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있으면 오후 햇빛에 슬쩍 낮잠을 자고 싶기도 하다 눈으로는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사라지는 곳을 찾는다 사랑했던 남자들 모두 아버지 옆에 세워 두면 아버지는 어딘가 허약해 보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허약함을 딱히 변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대했다 입천장이 까질 것같이 딱딱한 바게트를 씹는다 딱딱한 것을 이렇게 씹어 삼키는 것이 지혜일 텐데 나에게는 아직 그것이 없다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카페에는 내가 항상 보는 두꺼운 책이 있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초록의 기록을 모은 책이다 인간에게 짧지 않은 시간이겠고 초록에게는 그리 긴 시간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운동선수였다. 나는 그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2)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쳐다본다 오늘의 페이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나는 하루에 한 페이지만 읽기로 한다 어제 읽었던 페이지가 기억에 없어도 들춰 보지 않으며 미리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는다 발코니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제는 담배를 태우지 않지만 타고 있는 것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바닥이 큰 나사못 4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도 운동장이라면 어떤 초록이 가능할까 나는 건물의 소략한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식민지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이 지었다는 이곳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지금은 카페가 되었다 발코니는 카페가 된 후에 만들어졌으니 설계도에는 발코니가 없는 것이 맞겠다 나는 머릿속 설계도 발코니에 큰 엑스 모양을 그린다 소문에 일본인은 여기에 악어를 기를 생각이었다고 한다 정원 구석에 이유 없이 깊이 파인 구덩이가 있다 여기에 늪 같은 연못을 만들 생각이었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물과 뭍을 모두 다닐 수 있는 악어 때문에 연못 주위로 담장을 둘러야 했을 것이다 악어의 단단한 피부 사이에 촘촘하게 낀 물이끼가 오후의 햇빛에 말라 간다 집에 들인 정성을 보고 있자면 일본인이 꽤 긴 시간 동안 살 작정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구석에 놓인 풍금 앞에 앉는다 유일하게 길게 배운 것이 피아노였다 배우는 것을 그만둘 때 마음 어딘가에서 허전함을 느꼈던 것도 나는 조용한 흑백영화 같은 건반을 들여다본다 피아노는 풍금이 아니지만 발에 제대로 힘을 준다면 연주할 수 있을 것 같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고 호흡을 정리한다 그런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 위로 올라오고 손을 따라 시선이 올라가면 주인은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도와달라며 울먹인다 나는 발코니로 뛰어 나간다 1)적산(敵産)이란 적국 혹은 적국인의 재산을 뜻하며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물러나면서 국가에 귀속된 재산 가운데 일반에게 파는 것이 허용된 주택을 말한다. 2)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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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이다희 벽지는 방 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지켜봤다는 말이 있지 담배연기가 스며들면 환기를 해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 페트병 안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병을 흔들어 한 입 마시고 책상 위에 올려 둔다 빨랫감이 별로 없어도 아침에는 세탁기를 돌리려고 한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기가 일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회오리 모양으로 꼬여 있는 빨랫감 사이에서 인형을 꺼낸다 빨래들은 서로를 쉽게 놓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역할놀이를 하는 것은 미래 연습이 아니다 부모를 꺼내 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나는 엄마 너는 아빠 하고 내가 밥을 차려 놓으면 들어와 손을 씻고 밥을 먹어 이건 흙이지만 밥이니까 인형은 부드러운 조각 나는 내 속에 인간을 꺼내 보기 위해 인형을 샀다 인간을 꺼내 놓고 부드럽게 스트레칭을 한다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어느 시절에는 머리카락을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곳에서는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다 신하들의 충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눈을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네 나의 잘못으로 충성이 사라진다면 애초에 그대들에게 충성이란 무엇인가 왕관을 오래 쓰지 못하고 나는 옆으로 쓰러진다 나는 인형을 들어 올린다 왼손은 머리를 잡고 두 발은 오른손에 모아 힘껏 비틀어 물을 뺀다
- 이다희
-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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