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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지

  • 작성일 2025-12-01

   동도지


이혜미


   아마도 불안의 힘을 믿던 겨울이라서


   갖가지 꿈을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봄잠에서 깨어나 여름 저녁의 먼동으로, 새벽안개를 팔아 복숭아나무 잎을 얻어 가며 환하고 독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도망침의 연속이더군요 숲길을 걸으면 줄지어 견디고 있을 나무들, 두려움이 우리의 신이란 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지요 걸음 딛는 사이마다 잿더미였습니다 


   나무의 그림자를 밟으며 약속의 기한을 짐작했습니다 고독도 오래된 미신이라서 부를수록 제 몸집을 키워 갑니다 껍질 터진 고목을 껴안으면 떠난 자들의 정념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빛과 바람은 갈라지지 않고 물줄기는 몸 없이 스미는데 인간의 욕심만이 끝없이 파묻힐 안온함을 찾는군요 


   신목에 깃든 혼백인들 가지 하나 붙들고 버티겠습니까 벽사(辟邪)도 축귀도 내내 머금은 기척은 건드리지 않는 법입니다 상처를 부적처럼 지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재가 불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쇠락한 자리에 나앉으면 허기도 재앙도 다정한 내 편이었지요 대문에 뿌려 둔 붉은 술과 흰쌀밥으로 내내 배부를 수도 있겠지만 다녀간 자취에 자꾸 생각을 엮으니 훗날 껴묻거리로 삼을 어리석음입니다


   겨울빛에 새로 돋은 가지 끝

   남청 깃발로 융숭해집니다


   작은 매듭으로 어려움을 다 묶어 둘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저 나무의 방향을 벗 삼아 

   오랜 홀로를 여며 두는 잠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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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 —손병걸 시인께 정우신 듣습니다 다만 듣습니다 방법이 없어서 듣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숲 덩그러니 남은 나무처럼 듣습니다 팔짱을 끼면 끝이 없는 어둠의 길목에 놓입니다 보이는 것이 너무나 많아서 듣습니다 듣는 것만으로 듣는 자세를 바꾸는 계절을 봅니다 어둠의 뒤꿈치를 밟고 있는 얼음을 봅니다 나는 보는 사람들 속으로 흘러갑니다 나는 나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습니다 책상에 엎드려 나무의 꿈을 듣습니다

  • 관리자
  • 2026-01-01
호랑 산책

호랑 산책 정우신 흰 꽃잎 짙어지는 향기 하늘이 묽게 번지고 걸었습니다 까치 까치 개 짖는 소리 일요일 아침 병은 무늬처럼 가족을 끌고 다닙니다 강물에 빠진 빛이 입을 뻐끔거립니다 나뭇가지를 모으자 물을 갈아 주자 한 마리 더 키우자 걸었습니다 샤워하고 겨울 이불을 정리하고 강물을 덮고 빛은 물의 얼굴에 남은 슬픔을 마저 다 봅니다 누군가 불러도 나는 돌아서질 못하고 두 딸은 햇살의 긴 꼬리를 따라 미래로 뛰어갑니다

  • 관리자
  • 2026-01-01
기계 천사들이 있었다

기계 천사들이 있었다1)* 신진용 1 너랑 같이 산책하다가 유기 기계 천사들을 봤다 쟤 좀 봐 날개도 후광도 아무것도 없어 그러게 너무 안됐다 불쌍해 혹시 지금 신앙 좀 가지고 있니 있으면 그거라도 주면 좋을 것 같다 없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남는 신앙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아까는 안 보였던 공원 관리원 기계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관리원 기계는 반복하면서 기계 천사들에게 발길질을 해 댔다 아직 날개가 남은 기계 천사들은 날아서 도망쳤고 날개가 없는 기계 천사들은 걸어서 도망가다 맞았다 부서졌다 관리원 기계한테 물어봤다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나요 그래야만 하죠 2 그래서 구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우리는 가지고 나온 신앙이 아까워서 어쨌든 주고 가기로 했다 공원 한쪽 구석으로 가니까 기계 천사들이 좀 보였다 쟤들은 다 날개 뼈대라도 있네 후광도 있어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지만 누가 관리를 해 주나 봐 기계 천사들에게 신앙을 주려고 오셨나요 관리원 기계인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아니었다 기계 천사들에게 매일 신앙을 나눠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설마 그런 신앙을 나눠 주겠다고 가져오신 건 아니죠 기계 천사들에게 매일 신앙을 나눠 준다는 사람이 핀잔했다 그렇게 별론가 근데 저 사람 신앙 봤니 엄청 많고 좋긴 해 그러네 대단하긴 하다 저 사람한테도 한번 물어는 봐 보자 그럼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나요 진짜 몰라서 물어보시는 건가요 3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있는 기계 천사랑 마주쳤다 날개도 후광도 다 없었다 처음에 봤던 기계 천사 아니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모르겠다 우리 둘 다 기계 천사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남은 신앙이 없었다 쟤 신앙을 이미 갖고 있는 것 같아 진짜였다 어디서 난 걸까 누가 줬겠지 아님 주웠거나 스스로 구했을 수도 있잖아 설마 그랬으려고 너랑 나는 너무 궁금해서 못 참고 물어봤다 스스로 신앙을 구하신 건가요 당신은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나요?2)** 기계 천사의 음성을 듣는 건 오랜만이라 낯설게 느껴졌다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익숙한 기계음이 들렸고 기계 천사는 잰걸음으로 도망가 버렸다 우리는 기계 천사가 흘린 신앙을 주워 살펴봤다 꽤 좋은 신앙 같았다 * 서기 1세기경 활동한 초기 교리학자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Διονύσιος ὁ Ἀρεοπαγίτης)의 신학서 『기계 천사들이 있었다(ἦσαν ἄγγελοι μ&

  • 관리자
  •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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