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화계
- 작성일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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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계
박형준
님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종이를 만드네
그 위에 한자 한자 글씨를 쓰네
떠내려가는 물에 종이를 씻네
글씨들이 물에 풀려
완화계 푸른 물에 봄을 불러일으키네
완화계(浣花溪) 거닐며
두보를 닮으려 초막을 짓고 산
두 남녀의 사랑을 떠올리네
그들의 사랑이 새겨진 망강루(望江樓) 올려다보니
누각 사이로 테니스 코트가 보이네
서로 주고받는 공 소리가 연신 울리네
서로에게 전해지지 않는 편지를 쓰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지
누각 사이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테니스공 치는 소리에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잠자리 날개처럼 바스라질 듯 부드럽게 내 손에 잡히네
한 남자는 떠나고
한 여자는 종이를 만들며
그 위에 글씨를 쓴다네
쓰기만 하고 부치지 못한 편지는
완화계 시냇가에 창포 꽃잎으로 흘러가네
* 완화계 시냇가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중국 당나라 시인 설도에게서 착상을 얻었으며 인용 부분은 〈동심초〉 가사 중 일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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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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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준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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