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매마을
- 작성일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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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마을
한연희
폭설이 내린 마을엔 인기척이 없다
운전사를 태운 버스만 간신히 지나다닌다
모두들 쥐떼처럼 처박혀서는 때를 기다린다
눈사람이 앞마당에 자라나기를 기다린다
발밑에 놓인 작은 썰매 안에서
숨소리 없이 너는 태어나고
말을 배우고 손짓을 한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나의 작은 쥐새끼, 하얗고 커다란 눈망울을 간직한 너는 이 앞마당에도 저 앞마당에도 태어난다 한껏 웅크린다 그러다 눈덩이처럼 굴러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불어난다 아무도 밟지 않는 눈밭을 가로지른다
납작한 썰매들이 함께 겨울을 이끌고 간다
겨울과 오래도록 함께 있기 위해서 나아간다
눈사람이 죽은 쥐를 품고 가듯이
둔덕을 미끄러져간다
우리 마을엔 대장이 없단다
우리 마을엔 전설만이 있단다
우리 마을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우리는 마을처럼 애초에 없었던 거잖아요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태어나고 죽는 거잖아요
우리는 집안 전등이 꺼질 듯 깜빡거리는 걸 본다
골목 어귀가 발자국으로 더러워지는 걸
하얀 지붕이 어둠에 서서히 묻혀 가는 걸
보고 보고 또 본다
누군가 목을 매 죽었다던 나무는 밑동만이 남아 있다
그 자리에 슬픔이 그대로 자라서는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
담벼락이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디론가 향해 가는 발자국을 하나하나 지우는 동안
슬픈 마음들이 자꾸 썰매로 태어나 집 앞에 쌓여간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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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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