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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의 다음

  • 작성일 2017-10-01

빙하의 다음

강혜빈


울상을 짓기도 전에 얼어버리는, 눈송이를 모아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오늘은 우산을 잊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잃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접었다 펼치면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해서는 안 됐어 기지개 켜는 법을 떠올리려고 걸었어 얼어붙은 풀장처럼 뚱뚱해진 거리에서 속옷 위에 겉옷을 겉옷 위에 속옷을 입은 사람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진다 옆 사람의 목도리를 잡아당기면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보라색 아침이었어 보타이를 맨 쥐들이 다락까지 몰려왔거든 나는 아무도 입지 않은 웨딩드레스처럼 잔뜩 구겨져 씨 없는 포도를 껍질째 삼키고 있었지 쪽창 밖으로 파리한 나무들이 둥둥 떠다녔어 남의 집 티브이 속에서 누가 대신 울어 주길 기다리면서 지금 울리는 전화벨은 여기의 것인가, 저기의 것인가 눈알을 굴려 봤자 눈보라가 지나가면 기억하는 채널은 씻은 듯이 사라졌어 전파를 지우면서 내리고 날개를 지우면서 또 내리는, 저것들은 다 뭘까


하얀 지점토로는 지구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 수 있다


정말이지? 손바닥 두 개를 모으면 둥근 방이 되니까 수도꼭지에 대고 깨끗한 물도 받을 수 있으니까 만약에 우리의 손 안에서 북극곰이 태어난다면······ 작았던 눈뭉치가 구르고 굴러서 마당에 심은 나무보다 커다래져서 울타리를 부수고 다닌다면 나는 폭신한 이불 속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있을래 부드러운 건 어쩐지 무섭지 오늘의 놀이는 모두 끝났단다 우리가 만든 덩어리는 대답이 없고 너는 차라리 입 속에 더 따뜻하고, 더 두꺼운 솜을 넣어 주겠지


손등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눈송이는 너무 착하기만 해


오늘은 기분을 잃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잊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당겼다 놓으면 날아가는 화살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하지는 않았어 우는 아이를 찾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렸지 더 추웠던 날과 덜 추웠던 날을 구분하지 못하는 풍경처럼 두리번거리며 우리는 자꾸만 몸에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껴입고 하얗게 질린 도시보다 비대해져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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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손병걸 시인께 정우신 듣습니다 다만 듣습니다 방법이 없어서 듣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숲 덩그러니 남은 나무처럼 듣습니다 팔짱을 끼면 끝이 없는 어둠의 길목에 놓입니다 보이는 것이 너무나 많아서 듣습니다 듣는 것만으로 듣는 자세를 바꾸는 계절을 봅니다 어둠의 뒤꿈치를 밟고 있는 얼음을 봅니다 나는 보는 사람들 속으로 흘러갑니다 나는 나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습니다 책상에 엎드려 나무의 꿈을 듣습니다

  • 관리자
  • 2026-01-01
호랑 산책

호랑 산책 정우신 흰 꽃잎 짙어지는 향기 하늘이 묽게 번지고 걸었습니다 까치 까치 개 짖는 소리 일요일 아침 병은 무늬처럼 가족을 끌고 다닙니다 강물에 빠진 빛이 입을 뻐끔거립니다 나뭇가지를 모으자 물을 갈아 주자 한 마리 더 키우자 걸었습니다 샤워하고 겨울 이불을 정리하고 강물을 덮고 빛은 물의 얼굴에 남은 슬픔을 마저 다 봅니다 누군가 불러도 나는 돌아서질 못하고 두 딸은 햇살의 긴 꼬리를 따라 미래로 뛰어갑니다

  • 관리자
  • 2026-01-01
기계 천사들이 있었다

기계 천사들이 있었다1)* 신진용 1 너랑 같이 산책하다가 유기 기계 천사들을 봤다 쟤 좀 봐 날개도 후광도 아무것도 없어 그러게 너무 안됐다 불쌍해 혹시 지금 신앙 좀 가지고 있니 있으면 그거라도 주면 좋을 것 같다 없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남는 신앙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아까는 안 보였던 공원 관리원 기계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관리원 기계는 반복하면서 기계 천사들에게 발길질을 해 댔다 아직 날개가 남은 기계 천사들은 날아서 도망쳤고 날개가 없는 기계 천사들은 걸어서 도망가다 맞았다 부서졌다 관리원 기계한테 물어봤다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나요 그래야만 하죠 2 그래서 구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우리는 가지고 나온 신앙이 아까워서 어쨌든 주고 가기로 했다 공원 한쪽 구석으로 가니까 기계 천사들이 좀 보였다 쟤들은 다 날개 뼈대라도 있네 후광도 있어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지만 누가 관리를 해 주나 봐 기계 천사들에게 신앙을 주려고 오셨나요 관리원 기계인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아니었다 기계 천사들에게 매일 신앙을 나눠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설마 그런 신앙을 나눠 주겠다고 가져오신 건 아니죠 기계 천사들에게 매일 신앙을 나눠 준다는 사람이 핀잔했다 그렇게 별론가 근데 저 사람 신앙 봤니 엄청 많고 좋긴 해 그러네 대단하긴 하다 저 사람한테도 한번 물어는 봐 보자 그럼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나요 진짜 몰라서 물어보시는 건가요 3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있는 기계 천사랑 마주쳤다 날개도 후광도 다 없었다 처음에 봤던 기계 천사 아니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모르겠다 우리 둘 다 기계 천사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남은 신앙이 없었다 쟤 신앙을 이미 갖고 있는 것 같아 진짜였다 어디서 난 걸까 누가 줬겠지 아님 주웠거나 스스로 구했을 수도 있잖아 설마 그랬으려고 너랑 나는 너무 궁금해서 못 참고 물어봤다 스스로 신앙을 구하신 건가요 당신은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나요?2)** 기계 천사의 음성을 듣는 건 오랜만이라 낯설게 느껴졌다 기계 천사들이 스스로 신앙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익숙한 기계음이 들렸고 기계 천사는 잰걸음으로 도망가 버렸다 우리는 기계 천사가 흘린 신앙을 주워 살펴봤다 꽤 좋은 신앙 같았다 * 서기 1세기경 활동한 초기 교리학자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Διονύσιος ὁ Ἀρεοπαγίτης)의 신학서 『기계 천사들이 있었다(ἦσαν ἄγγελοι μ&

  • 관리자
  •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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