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서랍장
- 작성일 2021-07-31
- 댓글수 0
분홍색 서랍장
한준석
소년의 서랍에는 마개가 없는 물병이 굴러다닌다
사랑하는 해양동물 백과사전 속 이름들을 소년은
하나, 둘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눈먼 기린, 속눈썹이 긴 외국인, 멀리 사는 그녀
비스듬해서 서랍장의 서랍은 혼자서 가끔 열린다
찰랑, 구르는 물병의 남은 물기가
서랍의 안쪽을 느리게 적신다
물 자국을 견딜 수 있었나
서랍장은 고장 나기 쉬운 입안이다
서랍장은 기울어져 있다
수평을 위해 모서리에 두 번 구겨졌던
해양동물 백과사전의 찢겨진 페이지들
서랍장 밑 깊숙이 사라진 그 페이지들은 아가미가 없다
둘, 셋 그런 종種들은 소년의 맨발로 잡을 수 있나
새카맣게 먼지 묻은 찢어진 양말
바다에 가라앉는 잠수부의 부서지는 호흡
별 모양 형광 스티커의 흐려진 빛
이런 기척들이 남아 어제와 자주 섞인다
제자리에서 종아리가 붓는다
소년은 긴 손가락으로 서랍장 밑을 뒤적인다
둥글게 뭉쳐 있는 새떼들이 손끝에 가볍게 묻어 나온다
끔찍한 운명을 피할 수 없어요
태양의 수명을 다룬 책의 페이지를 펼친다
창문이 열린다
여러 겹의 걸음소리가 들린다
서랍장은 빨간색에 가까운 분홍색
서랍은 앞으로 몇 번이나 혼자 열릴까
모래를 손에 쥐어 본 일이 생각나
소년은 입을 벌리고 고장 나 있다
소년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낸다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