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그램
- 작성일 2017-10-01
- 댓글수 0
홀로그램
이용임
너는 하루 종일 썰고 있지
차갑고 딱딱한 감정을
도마는 불쌍해, 아주 불쌍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눈과 입술이 반대라니
끼릭끼릭 웃음을 참고 참다가
불이 닿기도 전에 끓는 주전자
우리 집에는 우리가 살았고
유령 같은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대문 앞을 지나가는 이웃들은
소금을 끼얹고 잠든대
엎드려서 일어날 줄 모르는
이런 접시에는 무엇을 담지
그런 그림자는 아무도 안 사가고
미안해 미안해 오늘은 햇빛처럼
여러 가지 각도를 가져서
해가 돌아눕도록 가만히 두어서
까마귀들이 손등을 쪼는 동안
침대보가 펄럭이며 머리를 덮으면
눈보다 먼저 구두를 엎어둬
세상에 비슷한 발들은 많으니까
너는 하루 종일 꾸고 있지
싱겁고 납작한 꿈을
우리는 깨끗해, 아주 깨끗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하면 안 돼
미안해 할 사람이 없는데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를 받아야 할 것 같고
용서를 받으면
이해를 받아야 할 것 같고
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그런 칼이 아니었는데
그런 자세가 아니었는데
아직 꿈속이구나?
그만 일어나자, 타는 냄새가 나
너는 자고 나는 머리를 흔들지
흔들고 흔들면 몸속에서 누가
먼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연기 속에서 목소리가 졸아든다
잘못 빨고 잘못 말린 스웨터처럼
순서를 잘못 배워서
뒤늦게 잘잘못을 따지는 사람들처럼
그럼에도
서로를 껴안는 날실과 씨실처럼
절대로…… 괜찮다고 말하면 안 돼
괜찮아도 되는 일이 없는데
괜찮다고 말하면
용서를 해야 할 것 같고
용서를 하면
우리가 졌다는 미신이
정말 사실이 되고
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니
그런 믿음은 잘 썰리고
나의 검은 천사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나는 너를 쓰다듬는다
너의 뒤통수, 동그란 뒤통수를
우리 집에는 우리가 당연히 살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으니까
몸이 조금 차가워지고
뒤를 돌아보게 돼
나는 아직도 코가 막혀서
누가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우리만 한 동그라미를 빼면
세상은 까맣게 그을릴 수 있겠지만
방바닥에 모르는 접시들이 누워 있네
나는 여기에 앉아
밥도 먹는다
* 우리는 무지개처럼 한 점에 기록된다.
추천 콘텐츠
핸드폰 박형준 핸드폰을 어디다 두었는데 찾지를 못하겠다 밤 산책을 나갔다가 길에 흘렸는지 풀숲에 앉아 있다가 빠뜨렸는지 고물 자전거를 타고 김포바다에 가 보거나 한강 하류 시골 읍내처럼 생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높은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갈 때 삐걱대는 페달에서 다리를 떼고 속도를 즐겼다 울퉁불퉁한 산길의 초지를 달리다가 핸드폰을 빠뜨려 먹고 집에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대여섯 시간을 되돌아가 기적처럼 핸드폰을 찾아왔다 술 많이 먹던 시절 택시에서 핸드폰을 두고 내리던 때가 생각난다 다음 날 택시 기사와 간신히 내 전화로 통화가 되어 무슨 비밀작전처럼 택시 기사가 지정한 곳에 가서 구멍가게 옆 자판기 밑에 놓아둔 핸드폰을 찾고 사례비를 놓아두고 온 적도 있었지 운이 좋아 소중한 것을 모를 때가 많았다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잃을 때야 비로소 내 자신을 투명하게 본다
- 관리자
- 2026-03-01
완화계 박형준 님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종이를 만드네 그 위에 한자 한자 글씨를 쓰네 떠내려가는 물에 종이를 씻네 글씨들이 물에 풀려 완화계 푸른 물에 봄을 불러일으키네 완화계(浣花溪) 거닐며 두보를 닮으려 초막을 짓고 산 두 남녀의 사랑을 떠올리네 그들의 사랑이 새겨진 망강루(望江樓) 올려다보니 누각 사이로 테니스 코트가 보이네 서로 주고받는 공 소리가 연신 울리네 서로에게 전해지지 않는 편지를 쓰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지 누각 사이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테니스공 치는 소리에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잠자리 날개처럼 바스라질 듯 부드럽게 내 손에 잡히네 한 남자는 떠나고 한 여자는 종이를 만들며 그 위에 글씨를 쓴다네 쓰기만 하고 부치지 못한 편지는 완화계 시냇가에 창포 꽃잎으로 흘러가네 * 완화계 시냇가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중국 당나라 시인 설도에게서 착상을 얻었으며 인용 부분은 〈동심초〉 가사 중 일부임.
- 관리자
- 2026-03-01
인노첸시오 8세의 불멸 김혜순 먼지로 흐린 유리창 때문에 밖의 나무도 흐리고 안의 남자도 흐리다 벌레의 주검들로 거무튀튀한 유리창 때문에 피아노 소리도 거무튀튀하고 방안의 남자도 거무튀튀하다 더러운 주전자에 물이 끓고 남자는 주전자가 타도록 일어나지 않는다 전화선은 늘어져 있고 주전자를 태우는 불꽃만은 싱싱하다 검은 연기 속에서 시간을 가득 먹은 파리가 날고 전국의 공중전화 박스들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흘러드는 연기로 폐는 쿨적거리고 눈물도 쿨적거리지만 그의 핵은 뛰고 있다 때 묻은 나무의 새로 돋은 이파리들은 방을 엿볼 생각이 없다 방의 남자도 밖을 내다볼 생각이 없다 태양이 거머리빛으로 창을 기어가면 창 안쪽에서 해파리들처럼 먼지구름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인노첸시오 8세는 영원히 살아 있다 먼지로 흐린 유리를 열고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않지만 볼록한 배 검은 진주로 변한 눈동자 그는 나무였으나 기괴한 광물이 된 몸 안에 살아 있다 그의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고 그의 목을 조르는 형광타원형들이 계속해서 천정에서 떨어진다 인노첸시오 8세가 먹은 세 소녀의 피 창밖에 억울한 장미 세 송이 영원히 피어 있다 나는 그의 몇 번째 시녀인가 밤이 오면 등불을 끄고 집을 쪼개는 금들이 몰려드는 것을 그대로 둔다
- 관리자
- 2026-03-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