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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두몽(雙頭夢)

  • 작성일 2025-02-01

   쌍두몽(雙頭夢)


구병모


   굴속에 두고 온 겨울잠이 나를 엄습한다.


   한순간 새의 노랫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채는데, 그것이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건지 내 몸속에서 흘러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바람과 모래와 나무 사이에서 닳아 가는 의식이 육(肉)의 허물을 벗겨 낸다. 소리만이 텅 빈 몸속에서 진동한다. 

   한 마리의 새는 광막한 하늘에서 탈각된 가피(痂皮)일 뿐이다.

   정처 없던 사고는 짓이겨져 새의 몸을 살찌우고 그 날개 아래 영원히 유폐된다.

   나는 내 존재에 그어진 선명한 취소선 두어 줄을 느낄 수 있다.


*


   시간의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살갗마다 앉은 흉터 아래를 탐침하고자 하는 이들이 기억 집담회에 모인다. 이는 기억의 회의라고도 하고, 기억 세미나 혹은 기억의 제의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기억이 열리는 나무 밑에 둘러앉아 나무 열매를 따서 나눠 먹고—그 씨앗은 다시 땅속에 묻는다, 그것이 무엇으로 열리든지, 그대로 흙의 일부가 되더라도—손을 잡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몸짓을 유지한 채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는데, 이는 체온을 전달하기 위한 행위로, 축축한 땀이 차오르는 타인의 손바닥을 신경 쓰는 이는 참석이 불가하다.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혹은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한. 어쩌면 이미 휘발되어 떠나간 지 오래여서 창궐하는 유령처럼 사방을 배회하며 약탈할 몸을 찾는 기억을, 원래의 소유자에게로 다시 데려오기 위한. 그러므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단순 건망증이 있는 이들, 빈지 워치 시대의 보편적인 디지털 중독자들, 인지증 진단을 받은 이들. 최초의 기억 집담회가 자생적으로 싹텄을 때는 인지증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위한 나눔과 위로의 성격이 강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약간의 포즈, 실제로 기억 증진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행위들. 누군가는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암송하고 (틀리거나 일부 구절을 건너뛰어도 좋다), 누군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영화 속의 인상적인 한 장면을 묘사하고, 누군가는 40년 전 자기가 입었다던 삭기 일보 직전의 배냇저고리를 공개하면서 여밈 부분에 묻은 얼룩의 기원을 상상하여 들려준다. 상상은 기억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까. 좌우로 기우뚱하는 고개들. 기억은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변형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상상과 크게 다른 범주라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간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라면, 상상은 웬만큼 도움이 되리라고, 사람들은 수긍한다. 처음 문턱을 넘을 때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흔히 있는 최면 센터일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마음 다스림을 빌미로 삼은 장삿속. 유쾌한 기억,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 잊고 싶은 기억, 왜곡된 기억 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번드러운 말로 시선을 끌고 기억전시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림과 소조(塑造)와 글로 기억 구조물이라는 것을 세워다가 춤, 노래, 연주, 꽃 무엇으로든 사람을 사로잡은 다음 꽃(화도)은 은근슬쩍 차(다도)로 넘어가고 차에 곁들일 향기로운 마들렌이 제공된 다음 종국에는 기억 회복과 증진에 도움된다는 영양제 홍보가 뒤따르겠지. 이런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밀려 밀려나 집담회가 열리는 곳은 박해의 숲이라 불린다. 명칭은 다소 종교적이며 대단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도모할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 안을 파고드는 어둠에 잠식되어 그곳을 헤맨다는 흔한 괴담의 패턴 가운데 하나가 된다. 박해의 숲에 모여든 사람들을 빠져나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숲에 불을 지르는 것뿐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지금껏 그것을 실행에 옮겨 본 사람은 없다.


   낱개의 음운으로 분해된 말들이 날개를 달고 저마다의 입속에서 탈출하여 허공에서 춤춘다.


   아니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는 이중의 부정문은 긍정문이 됩니다. 거짓의 거짓은 참이지요. 마찬가지로 허구가 중첩되면 실존하는 무엇이 됩니다. 허구는 마주 세워 놓은 두 장의 거울 같은 거예요. 허구가 무한히 중첩되어 실재인 줄 알았다가 허구였음을 깨닫다가 다시 실재라고 믿게 만드는 거지요. 아닌 게 아니라 허구는 실재를 전사하고, 실재는 그 전사한 결과물의 탁본을 뜬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것이 참된 기억인지 불가능한 상상인지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는 거예요.


*


   옆집 사람이 도망갔다는 소식은 퇴근길에 들었다. 집주인은 마치 내가 그녀를 숨겨 주었든지 공모자나 된다는 듯 거기 살던 이에 대해 뭐 아는 거 없느냐 내지 평소 옆집이 어떻게 지내더냐 제대로 된 일을 하면서 사는 성실한 사람으로 보이더냐 같은 걸 물어보려고 일부러 대문 앞까지 마중 나와 서성였던 것인데, 그 세대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일이라는 게 당최 뭔지 모를뿐더러 내가 들려줄 대답이라곤 그녀와 친하게 지낸 적은 물론 마주칠 때 눈인사 말곤 대화를 나눠 본 일조차 거의 없다는 사실이 전부였으므로 얘기를 빠르게 매조질 줄 알았지만, 집주인이 나를 세워 놓고 넉 달간 밀린 월세를 받지 못했다며 하소연과 푸념을 이어 가는 바람에 공연히 그 말들이 나를 겨냥하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가방이라도 좀 내려놓게 집에 들어가서 계속하시면 안 되겠느냐고 간신히 저항감을 내비쳤을 때는 이미 그쪽의 일장 연설이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집도 어찌나 더럽게 썼는지··· 짐을 죄다 놔두고··· 문도 활짝 열어 두고··· 저거 보라고 어디 한 번 보라며, 주인이 내 어깨를 잡아채다시피 옆집 문 앞으로 이끄는 짧은 동안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은, 남의 집 꼴이 말이 아니라면서 그걸 왜 나더러 들여다보라는 건지, 세입자로서의 연대책임이라도 지라는 뜻인지, 그보다 세간을 그대로 놓아두고 문만 열어 놓고 갔다면 도망이 아니라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의심 또는 걱정해야 하지 않는지, 어떻게 도주임을 확신하는지, 설령 사람이 짐을 놔두고 도망쳤음이 사실이라 한들, 문 잠긴 집 안에서 뒤늦게 고독사로 발견되는 상황보다는 집주인 입장에서도 차라리 낫지 않은지 같은 것이었다.

    와서 보라고 할 정도니 구청에서 긴급 구호에 나서야 하는 쓰레기 집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봐도 보통의 집이었다. 내 살림과 다를 바 없이 원룸 형태의 방 하나, 세탁기가 들어가는 작은 다용도실 하나, 문 열린 화장실 하나로, 구조와 평수에 비해 짐이 많아서 생활이 그리 쾌적할 성싶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구조를 변형한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에 칸칸이 세내어 산다고 하여 저마다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줄여서 무미 무취의 인간이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은 규격화된 영양환 같은 걸로 필수 에너지를 공급하면서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 색색의 곡물로 밥을 짓고 계절 나물을 먹어야 한다. 사람은 계절별로 옷도 몇 벌 이상은 갖추고 돌려 입어야 살 수 있고, 주방세제가 원 플러스 원인데 같은 값으로 굳이 당장 필요한 낱개만 산다는 선택지는 없으며, 할인 쿠폰과 마감 세일에 호구 잡힌다는 자각과 한탄을 그나마 사치품 아닌 생필품이라는 근거로 덮는 한편, 관심사와 취향에 따라 좁은 벽에 그림 액자를 걸어 놓든지, 책을 사서 읽거나 음반을 사서 들을 수도 있어야 한다. 비누 한 개로 이까지 닦지 않고 치약을 따로 두듯이 얼굴에는 로션을, 손에는 핸드크림을 발라야 한다. 적용 범위가 제각각인 크림 통이 화장대에 가지런히 정렬된 게 아니라 널브러져 뒤엉켰다고 해서, 이런저런 옷이 남들 눈에 안 보이도록 옷장에 잘 들어간 게 아니라 의자 등받이가 무너질 만큼 아무렇게나 걸쳐져 쌓였다고 해서, 이부자리를 칼 각 잡아 개키지 않고 일어난 그대로 흐트러졌다 해서 그녀가 집을 불결하게 썼다는 말은 과하다 싶은 정도를 넘어 모욕에 가까웠다. 초파리가 모이지 않도록 주둥이가 빈틈없이 묶인 종량제 봉투 하나와 세척한 흰 플라스틱 그릇이 포개어진 묶음 하나가 현관 신발장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볼 때 최소한 대책 없이 쓰레기를 쌓아 두고 살던 집은 아니라는 생각에, 더럽게 쓰긴요 제 방이랑 비슷한데요 하는 소리가 혀뿌리에 걸렸고, 그걸 해금했다간 내 방은 어떤지 한번 보겠다며 닦아세울지 몰라 글쎄요 그다지··· 정도만 말했더니, 내가 이의를 제기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집주인은 말끝을 채어 길길이 뛰기를, 그 여자가 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갔겠느냐며, 이 안에서 짐승 키우지 말랬는데 고양이고 개새끼고 이것저것 주워 오는 거 틈틈이 봤고 소리도 들었고 대체 몇 마리의 짐승이 그 방에 우글거리는지 언제 한번 따져 물으려던 참이었다고, 그나마 제가 거둔 짐승들을 내버리지는 않고 다 끼고 갔는지 아니면 짐만 죄 놓고 동물만 챙겨 갔다는 것도 이상하니 어디 밖에 풀어다 버리고 튀었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하여간 그것들의 냄새가 배어 버려 양심상 환기라도 하는 흉내를 내볼 셈이었나 싶은데, 그래봤자 냄새가 뿌리를 내렸으니 도배며 장판까지 싹 다 새로 갈아야 한다고. 

   그러면서 집주인은 도리어 내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그 왜 애니멀 호던가 그런 거 있지요, 요새. 감당 못 하니까 고양이들 열댓 마리씩 집에 내버려두고 이사 나가 버리고 막. 그런데 정말 옆집에 살면서 그동안 짐승들 울음소리를 못 들었다고요? 냄새나고 더럽고, 안 그랬냐고. 추궁하는 식의 말투도 달갑지 않은 데다 나는 이제 타인에 대한 언급을 더 이어 가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며, 그게요, 대부분은 회사 때문에 늦어서요. 저는 집에 잠만 자러 오거든요. 자는 동안은 화재경보기라도 울리지 않는 한 일어나기가 힘든데요, 고양이 울음 정도는 못 들었을 것 같아요. 아마 잠결에 들었더라도 건너편 집 아기가 깼나 보다 하고 신경 안 썼을 테고요. 주인은 나를 더 털어 보았자 나올 먼지가 없음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현관문을 닫았다. 마스터키도 없고 도어 록을 통째로 뜯어냈으니 잠기지는 않지만 도리 있나, 뭐 어차피 이런 살림 누가 훔칠 만한 것도 없고, 딱 봐서 골라 팔 것도 없고 고물상 아저씨나 불러야지, 다 실어 간들 밀린 월세랑 대면 턱도 없고··· 나더러 들으라는 말인지 중얼거리며 다세대 주택의 외벽을 두른 층계를 걸어 올라갔다. 그러다 그 얼마 안 나간다는 고물 값이나마 아까웠는지 고개를 휙 돌려 보곤 덧붙이는 것이었다. 문 열려 있다고 아가씨는 뭐 손대고 그러면 안 돼요. 내 날 밝으면 한번 싹 뜯어 보고 분류하려 했으니까. 주인은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침묵을 대답으로 간주했는지 곧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대답! 대답 똑바로 안 하나! 요즘 것들은 하여간 죄다 제멋대로··· 의욕도 없고 성취는 개나 줘 버리고 뭘 좀 치열하게 매달려 보겠다는 마인드도 없이 정신 상태가 영 글러 먹어 가지고 자기들은 노력하겠다는 기본자세도 없이 윗세대가 뭘 하나도 안 내준다며 징징댈 줄이나 알지··· 구닥다리 회식 문화가 어쩌고저쩌고 구시렁대면서 그 시간에 윗사람 대하는 법, 동료들 거래처들 원활하게 소통하고 부드럽게 기름칠하는 법 배운다는 것도 모르고, 그래 갖고 무슨 놈의 사회생활을··· 회사에 이 한 몸 갈아 넣겠다 하는 각오를 근면 정직 성실로 보는 게 아니라 순 돌대가리 등신 취급하고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만큼만 일하면서 권리만 찾아 먹고 의무는 개나 줘 버리고 내 손해는 요만큼도 안 보겠다는 심보로 무슨 놈의 발전을··· 지난번 그만둔 새끼는 규정 근무 시간이 9시부터라면 9시 땡 쳤을 때 오는 게 맞지 왜 10분 먼저 와서 업무를 준비해야 하느냐는 무개념 헛소리를 싸지 않나··· 단지 퇴근 후의 회식 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을 뿐인데 그걸 두고 이유가 뭔지를 캐묻다가 업무 태도와 세대론까지 확대해석하여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지지난번 가족경영 회사의 부장을 떠올리면, 그나마 집주인의 자의적 판단은 견딜 만했다. 나는 어째서 저 집주인에게, 사람을 대체 뭐로 보느냐고 세입자가 사라졌음을 구실로 남의 물건을 함부로 쏘삭이려던 쪽은 당신 아니냐고 눈을 부라리지 못하는가 같은 자괴감을 되새김질해 보았자 체력 낭비였다.

   나 또한 하찮기는 하나 집주인에게 굳이 들려주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그걸로 그쪽의 몰상식을 상계한다고 쳐도 되는 일이었다. 그래 봤자 옆집 사람의 행방에 대해 함구한다든지 적극적으로 은닉과 옹호를 일삼은 게 아니라 단 두 가지였으므로 이실직고를 하나 마나 별반 차이는 없었을 테지만, 나는 비록 통성명까지는 안 했어도 그녀와 말을 나눠 본 적 있고, 그녀가 가끔 이런저런 동물을 데려다 키우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그렇게 말하기엔 적절치 않은데, 그녀가 데려온 건 대부분 새였다.


   날개나 다리를 다친 새가 숲도 아닌 도시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방까지 일부러 날아 들어오는 일은 흔치 않을 텐데, 어디서 그런 걸 발견하는지 그녀는 다친 새를 주워 와서 돌보곤 했다. 퇴근 시간대가 비슷한 건지 우리는 종종 마주쳤고, 그녀는 처음에는 구조한 새를 등 뒤로 감추려는 듯싶다가 내가 기함하는 표정이 아닌 걸 확인하곤 자기가 먼저 ‘다친 아이들’이라고 설명하며 말을 걸었다. 그녀는 늘 바닥만 내려다보고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포착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하며 자신의 재능을 겸허하게 표현했지만, 나 같으면 아무리 바닥만 본들 전단지나 깡통에 눈살 찌푸리고 지나치기가 고작일 터였다. 눈썰미 여부를 떠나 길을 걸을 때 바닥만 본다는 사람이 제 발끝 외의 다른 것에 시선을 줄 수 있다는 것부터가, 마음의 깊이 내지 개인 정서의 역량을 보여 주는 증거일 테고. 그런데 마음의 역량 따위 그녀나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만고에 쓸데없다. 고용주가 원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실용적이면서도 돈이 되는 역량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파열을 꾀하는 대신 꿈과 희망이라는 마취제를 투약하고자 하는 일군의 영화나 만화에서라면 노인의 짐을 들어 주거나 횡단보도에서 어린이를 구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부상당해 면접 시간에 제때 당도하지 못한 구직자가 신입사원으로 채용되겠지만, 현실에서는 떨어진 새를 구조하여 돌보기를 잘한다고 특기사항 난에 기입한 사람이 서류를 통과할 가능성부터가 낮을 것이다. 새와 의사소통이라도 가능하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그녀는 바닥을 보고, 다친 새들을 구해서 회복시킨 뒤 숲으로 돌려보내고, 그것에 몰두하는 동안 살아 있는 인간들과는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거나 그럴 기회를 놓쳐서 보편적인 관계라고 할 만한 걸 맺지 못하고, 손해 보는 일이 잦으며, 안 그래도 불안정한 일터를 여러 번 옮겨 다닌다는 것을, 몇 번 마주쳐 나눈 짧은 대화를 조립해 보니 알게 되었다.

   거대 도시에서 새가 다칠 일이 있다면 그건 천적의 공격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로 투명한 방음벽에 달려들어서가 아닌가요. 그럴 때는 보통 부상이 아닌 즉사일 텐데 이 아이들은 두 번 운이 좋았네요. 유리창에 부딪치고도 살아남아서, 무엇보다 당신이 발견해 주어서. 그런데 동물 병원에 데려가 보는 건 어떨까요? 

   공동으로 사용하는 철제 대문 앞에 조금 떨어진 새똥의 출처와 그것을 치울 의무에 대해, 내가 망설이던 끝에 언급한 어느 날 그녀는 잠깐 들어와서 얘기하자고 한다. 위층에 사는 집주인이 우리 말소리를 들을까 부담스럽고 그녀는 마침 코트로 감싼 한 마리의 새를 더 데려온 모양이어서 나는 잠자코 그녀의 방으로 따라 들어간다. 이미 돌보던 새는 개똥지빠귀, 지금 막 구해 온 건 노랑지빠귀라고 한다. 한 마리는 원기를 되찾아 가는 중이다. 지빠귀 종류는 백설조라고도 불러요. 백설조라는 이름만 듣고선 흰 눈과 같은 새인가 싶은데 이는 혀를 백 개 지닌 새를 뜻한다. 서양의 신화에는 백 개의 눈 달린 거인이 등장하나 그와는 달리 백 개의 혀란 단지 비유로, 지빠귓과에 속하는 새들은 다른 수많은 새의 울음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이 만일 백 사람의 울음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면 그는 미쳐 버릴 것이다. 그런데 울음소리인가, 노랫소리인가. 울음과 노래는 같은 것인가. 죽음과 삶이 한줄기인 만큼이나.


*


   삼위산(三危山)의 치(鴟)는 수리를 닮았고 머리 하나에 몸이 세 개 붙은 새다.

   익망산(翼望山)의 기여(鵸䳜)는 까마귀를 닮았으며 머리 세 개에 꼬리는 여섯 달린 새다. 

   취산(翠山)의 유(鸓)는 까치의 생김새에 머리가 둘이며 다리는 넷이다. 

   숭오산(崇吾山)의 만만(蠻蠻)은 날개가 하나에 눈도 하나인 물오리로 다른 한 마리와 짝을 지어야 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새는 공명조(共命鳥)의 일종일까. 몸 하나에 머리가 둘. 하나의 머리가 죽으면 남은 하나의 머리도 살 수 없게 되는. 두 개의 머리에 하나의 목숨이 눌어붙은 새. 너는 둘인가, 하나인가.


   그녀는 새를 두고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날 밤,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내게 새장을 내밀었다. 잠깐만, 단 하룻밤만 맡아 달라고, 지금은 사정상 도저히 데리고 있을 수 없다고, 제대로 맡아 준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며 지금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중이니, 내일 바로 찾으러 오겠다고 말했다. 당분간 모이는 따로 줄 필요가 없을 만큼 넘치게 공급했답니다. 덮개는 열어 보지 않는 게 좋아요. 나는 가려진 새장을 받아 들고 그녀가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섰다가 그것을 탁자에 올려 두었다. 덮개 그거 열지 마세요. 문밖에서 그림자의 자취까지 사라지기 전, 그녀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 대목에서 당신은 누구나 흔히 할 법한 패착을 저지른 거군요! 

   손을 잡고 둘러앉은 청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패착을 즐거워하는 어조로 끼어든다. 

   열지 말라고 두 번 언급하는 건 열어 보라는 암시와 같지요. 그렇지요.

   둘러앉은 이들 가운데 반짝이며 요동치는 흥미의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이야기를 이어 간다.


   뒤돌아보지 말라. 소금 기둥이 될 것이다. 그 상자를 열지 말라. 죄악이 쏟아져 나와 창궐할 것이다. 그 얼굴을 보지 말라. 그 자리에 돌이 되어 굳을 것이다. 여신상의 베일을 걷지 말라. 앞이 안 보이게 될 것이다. 그 문만은 열지 말라. 푸른 수염에게 살해당한 여인들의 시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 모든 패턴을 알면서도 나는 새장을 덮은 보자기를 벗긴다.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새장 안에서 새가 계속 푸드덕대는 소리가 방 천장을 울리는 바람에, 단지 걱정했을 뿐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아픈 데가 없다 한들 이렇게 아무것도 못 내다보도록 답답한 장막으로 가려 두는 일이, 숨탄것에게 좋을 리 없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천을 걷어 낸다.

   그리하여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사라지고, 나는 술래가 된다. 수건을 쥐고 영원히 원을 그리며 타인들의 등 뒤를 도는 술래가 된다.


*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방에 들렀다가 지금은 토요일에 와서 일요일에 떠나는 식으로 지낸다. 초기에는 거의 격일이었던 것을, 아무리 집주인네와는 다른 대문을 쓰더라도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그쪽 레이더망에 포착될지 모르니 조금 자중하는 게 좋을까 싶어 그에게 제안했던 것인데, 요새 그가 머물다 가는 모양을 보자면 가만히 내버려두었더라도 방문의 빈도가 어차피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성싶기도 하다. 그는 자고 일어난 이불을 어설프게나마 접어 두지 않고 매트리스 발치에 그대로 밀어 둔다. 옷걸이에 걸려 행거에 정돈된 본인의 외투와는 대조적이다. 그는 배달 음식을 먹고 난 뒤 용기를 물로 헹구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내가 설거지를 시작하면 그는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켜고 리모컨으로 OTT 플랫폼을 재핑하거나 휴대전화를 쥐고 게임을 한다. 간간이 쓰레기봉투는 내다 버려 주었던 적도 있지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솔선수범하여 일어난 적은 없고, 그나마도 길고양이와 쥐가 비닐을 뜯어 놓으니 반드시 수거 차량이 오는 요일의 전날 밤에 맞춰서 쓰레기를 내놓아 달라고 집주인이 요청한 뒤로는 타이밍이 맞지 않으니 부탁하지 않는다.

   그는 새장 안의 새를 바라보며 묻는다. 얘 밥 안 줘도 돼? 기운 없어 보인다. 나는 설거지를 하다 물소리가 대화에 방해되어 수도를 잠그고 등 너머로 말한다. 그 여자가 주고 가면서, 따로 얘기가 없었어. 그러고는 결국 안 돌아오고, 집주인은 그 방을 다 비워 버렸고, 이게 무슨 민폐인지. 조용히 있으니까 그냥 데리고는 있는데 이걸 어디다 어떻게 입양 보낼 수도 없고. 마트에서 아무 모이나 적당히 사다가 물이랑 줬어. 사료가 줄어든 거 보면 곧잘 먹기도 하는 모양인데 저래. 이름도 모를 새, 따로 뭔가 먹는 게 있는지 조류 카페에 물어봐야 하나 싶어. 나도 골치야. 그는 새를 보고 처음에만 눈을 휘둥그레 떴을 뿐, 그것이 우리 집에 온 경위를 듣고 난 뒤로는 딱히 별말 없다. 나는 머리가 둘인 새를 보고서도 그것의 건강에 대해서만 묻는 그의 심상함이 마음에 든다. 어쩌면 머리가 둘인 걸 보며 굳이 묻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병든 새려니 짐작했을 수도 있다. 모이가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네. 혹시 육식조 같은 거 아니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우기에 젖은 흙 위로 고개를 내미는 환형동물이나 쓰레기장의 설치류 같은 걸 잡아다가 그것에게 바치고 싶지는 않다. 지렁이도 그 무엇의 애벌레도 쥐도 징그럽다. 살아 있는 새가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딱 거기까지, 또 다른 살아 있는 것을 잡아 와서 새의 부리가 그것의 몸을 쪼는 장면을 눈뜨고 볼 만큼의 정성은 없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이니 두 입을 모두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 뭐든지 반 갈라서 양쪽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강물을 건네주는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아다 주시오. ···먼저 나를 저 강 건너편까지 무사히 건네주면 그때 말씀드리겠소. 기슭에 닿아 내려선 주인공은 수부에게 대답한다. 다음번 손님이 하선하기 전에 그의 손에 노를 쥐여 주고 당신은 기슭으로 뛰어내리시오. 그러면 이 배에서 해방될 수 있소. 다음번, 또 다음번 손님이 나타날 테고 무궁한 노동은 무한히 전염될 것이며 이 배는 영원히 건너편과 이편 사이를 오가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나는 그에게 이 새장을 바통 터치해 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는 새장을 덮은 보자기를 직접 벗겨서 금기를 깬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드러낸 지 오래인 새장 안을 들여다보았으니, 그가 넘겨받지도 않을 듯싶고 설령 받아 갔다 한들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내게 돌아오리라는 걸 예감한다. 이 또한 고전적인 패턴이다. 

   내가 그에게 새장을 떠맡긴다. 나는 이것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한 적이 없는데 마침 이걸 보고도 무서워하거나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는 당신이 맡아 주었으면 좋겠어. 그는 의아해하다가 다소 떨떠름한 태도로 새장을 접수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탄 차는 전복되고, 차 안에서는 부서진 새장이 발견되는데 그 안은 텅 비어 있다. 며칠 후 새는 내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혹은 그가 집으로 무사히 귀가한다. 그는 새에게 먹이도 주고 벌레도 곧잘 잡아다 바치나, 새는 이상하게도 살이 오르기는커녕 점점 야위는 것만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쳐 버려서 어느 날 산으로 올라가 그것을 야생에 풀어 버린다. 그것은 날아오르는 둥 마는 둥 날개를 몇 번 푸드덕대다가 힘없이 떨어지더니 가느다란 다리로 수풀 위를 걷기 시작하며, 그는 그것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간에 뒤돌아보지 않고 하산한다. 내게는 먹이를 주기 위해 열어 둔 새장 문으로 그것이 달아났다고 적당히 둘러대는데, 며칠 뒤 그것은 내게로 날아 돌아온다. 

   혹은 그가 집으로 무사히 귀가하여 그것을 성심껏 돌보다가, 어느 날 오랜 출장을 떠나게 되어 새장을 임시로 내게 다시 맡긴다. 이후로 그는 접경 지역의 테러에 휘말려 출장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혹은 다른 연인이 생겨 예전 연인의 선물 아닌 선물을 언제까지고 책임질 수는 없다며 새장을 반환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내 곁에 정착한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고 얼마쯤 시일이 지난 뒤 나를 낳은, 정확하게는 내가 태어나는 데에 일정 지분을 보유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용건은 매번 대동소이하다. 거기서 변변찮은 일을 하면서 구질구질하게 지내지 말고 내려오지 않겠냐. 이쪽에는 일할 사람이 없다고 난리다. 서울, 그놈의 서울만 고집하지 않으면 먹고살 길은 여기도 얼마든지 있다. 이장님께 연줄을 부탁할 수도 있다. 읍내로 출퇴근하면 집에서 편안히 다니고 돈도 덜 들고 얼마나 이득이냐. 그리 있다가 적당히 시집도 가고 애도 낳고, 하는 대목에서 나는 전화를 끊어 버린다. 처음 몇 해 동안은 강경하게 스스로의 입장을 설파하려 애쓴 적도 있을 것이다. 적당히 시집도 가고 애도 낳고 그러지 않기 위해, 삶이 단지 먹고사는 것 이상임을 증명하기 위해 떠나온 거라고, 먹고사는 일이 보잘것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곳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먹고사는 삶이, 특별한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아닌 보편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아 마땅하다고. 설령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먹고살 듯하다가 현실의 투명한 벽을 들이받은 새처럼 부서진 끝에 그것이 결국 하고 싶은 일 아니게 되어 버리는 날이 오더라도. 의류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중소 브랜드 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성했을 때만 해도, 그토록 당연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앞세웠을 것이다. 현실의 썰물에 밀리고 밀린 끝에 중국산 저가 의류를 떼어다 파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CS 위주로 오너를 보조하면서 운송장 라벨을 붙이는 게 업무의 대부분인 일터로 옮기기 전에는,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하며 삶과 경영에 필요한 일임에도 이것이 어릴 적의 장래 희망은 아무래도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그럴 때면 수화기 너머에서 아이고 그래라 들은 척도 안 하는데 너한테 뭔 말을 말아야지, 장탄식이 들려온다. 그러고 이삼 주 지난 뒤 그전의 대화는 깡그리 잊은 것처럼, 혹은 모르쇠로 일관하여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 언젠가는 살아 있는 사람을 도끼로 찍어 넘길 수 있다는 듯 말짱 도루묵으로, 엇비슷한 내용의 전화가 걸려 온다. 모 여사네 아들이 한번 다녀왔다는데 자식은 없다 하니 한번 내려와서 만나 보아라. 정 싫으면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어 주면 그만이다. 아니, 만나는 사람이 따로 있단 얘기도 하루이틀이지, 그럴 거 같으면 진작 그 사람을 데리고 내려와 보든지 할 일이지, 왜 결혼 얘기가 없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게. 그러면 내 쪽에서도 남은 힘을 쥐어짜서 고작 한다는 저항이, 나는 결혼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에요, 아이를 낳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에요··· 여지없이 호통이 건너온다. 누구는! 누구는 뭐!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사는 게 그렇게 꼴같잖냐! 그리 쉬운 거 같냐. 네 눈에는 그게 겔러빠져 보이냐. 그건 그저 평범한 것이다. 기본을 다하는 것이다. 평범하게 사는 게, 최소한 가족을 이루고 애를 낳고 먹여 살려 기르고, 기본만이라도 하고 사는 게 세상 제일 어려운 사람 노릇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정말 그런 부모님이 있다고요? 우리 엄마 젊었을 때 이후로 그런 건 없어진 줄. 둘러앉은 또래 여성 몇몇이 분개하는데 그 속에 한 점의 흥미가 묻어나는 듯싶기도 하고 그런 티가 난 모양인지 다른 회원들이 눈치를 준다. 모르는 일이면 그냥 가만있어요. 그런 일은 어느 저개발 국가나 전근대사회, 강력한 종교적 권위를 사회 지배 원리로 삼는 비민주적인 국가에서나 일어나는 일 아닌가 하는 표정들. 초경을 시작한 여성을 불길하고도 불결한 존재로 간주하며, 지참금 명목으로 옷감이나 곡식 등의 재물을 주어 결혼할 여성을 구매하고, 예약된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의 손을 탄 여인을 광장에 끌어내어 그 아비나 오라비의 손으로 베어 죽이든지 군중이 돌팔매로 때려죽이는 이국의 사례를 듣고서는 분노하나, 인터넷이 안 터지는 데 없으며 차나 비행기로 선박으로 닿지 못할 데 없는 이 조그만 나라에서 여전히 그런 대화가 오가는 집이 있다는 사실은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극단적이며 무도한 일일수록, 경악과 전율의 크기만큼이나 신뢰가 생기는 모양이다. 아무리 두 다리가 닿을 수 있다 한들, 시선과 심장이 닿지 않으면 없는 일과 매한가지다. 당신들이 돌아보지 않은 어딘가에는 있다. 분명 그런 분위기가. 나는 대학을 명분 삼아 그런 기운이 일상적으로 만연한 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한 집안의 자본 규모는 대개 제한되어 있으므로 아들은 서울로 유학을 보내어 학비와 생활비를 이중 삼중으로 투자하는 대신, 그 집안의 딸은 되도록 집에서 가까운 지역의 국립대학에 진학하여 부모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여전히 있다. 번듯한 학위는 학위대로 따고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일자리도 얻고 늦지 않게 결혼하여 부모 근처에 거주하면서 아들딸 낳고 유사시에 부모를 정신적으로 밀착 부양하기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다. 멀리 떠난 아들은 제 앞가림만 하기에도 벅차지만 딸은 으레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는, 그리하여 네모반듯한 삶을 꾸려야 한다는 기대가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 박제된 딸에 대한 이미지란 보통 아기를 업고 둥개둥개 달래면서 빨래를 널거나 마당을 비로 쓰는 흑백사진 속 모습인 듯하다. 딸이 서울로 유학을 가려면 첫 학기 등록금 이후로 부교재나 생활비 일체를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다짐이 뒤따라야 그나마 가능성이 열리며, 성적 우수 장학금을 타기는 기본이다. 나는 그렇게 떠나올 수 있었다. 마을 어른이 ‘딸 같아서’ 자꾸만 끌어당겨 두드리는데 그것이 거의 주물럭거리는 손길에 가깝더라도 으레 격려와 칭찬이려니 하고 잊든지 비위 좋게 웃어넘기며 자기가 잘 알아서 좌중의 분위기를 깨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 자리를 현명하게 모면해야 한다든지, 성문법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알게 모르게 그런 태도가 리빙 포인트라도 되는 듯이 존재하는 곳에 더 머물렀다간 나도 자연스레 그 풍경의 일부로 녹아 버릴 것만 같아서 탈출한 지 8년째, 도망친 곳에 낙원은커녕 일말의 대안이라는 것도 없음을 알게 된 지는 4년째인데, 그럼에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전망의 부재 한가운데서 뒹굴기를 택했을 무렵 그 새가 내게로 온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둘러앉은 사람들의 눈에 피어난 은근한 기대를 나는 읽을 수 있다. 제 코가 석 자인 터에 감당하기 어려운 신체 조건을 지닌 새를 난데없이 떠맡았으나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을 돌보는 동안 시행착오와 좌충우돌을 겪으면서 어느새 부풀어 오른 희망이라든지 치유되는 마음과 한결 건강해진 몸에 이르기까지 긍정과 위로의 서사를 기다리는 눈빛들. 애초에 이 자리가 그러라고 마련된 것이다. 삶에서 개운한 순간을 확보하고 누려 본 적 없을수록 그런 경향은 강해진다. 몇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악보의 끝이 조화롭고 안정적인 온음표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


   새는 두 개의 머리가 있다. 어떻게든 그것을, 시름시름 앓는 두 개의 머리를 살려야겠기에 나는 조류 카페에 게시물을 작성한다. 제목에 ‘사진 주의’라는 문구를 달고—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두 개의 머리를 단 새를 보면 측은함에 앞서 혐오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두 개의 머리가 있는 새는 환대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가? 머리가 두 개건 백 개건 새는 새가 아닌가—이 새의 이름을 아시는 분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새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정보를 구합니다. 타인이 구조한 새인데 저는 얼떨결에 임시 보호 중이며 새를 구조한 주인과는 지금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돌본 경험이 전무하여, (저 자신을 돌보는 일조차 힘에 부치고, 당신들 또한 그러하듯이) 이 새가 병들어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대규모 익명 게시판이 아닌 회원제 카페여서 다행히 ‘우욱 혐짤’ 같은 무도한 댓글이 달리지는 않지만, 대체로 동물 구호 센터에 연락해서 전문가를 찾아 보라는 충고, 결합쌍생아를 분리하는 수술과 같은 외과적 시도가 필요하리라는 제안, 그런 고난도의 수술에서는 어느 한쪽의 생명을 포기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 등이 올라오는 가운데, 이 새의 이름을 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회원들이 올린 비슷한 도움 요청 글에는 그래도 유경험자들 몇이 붙어서 우리 가게로 혹은 우리 집으로 데려와 보라든지, 제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든지 희망적인 댓글을 달곤 하는데 이번에는 다들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그러나 새가 기운이 없어 보이고 살이 눈에 띄게 내린다면 일단 아무 동물 병원에라도 데려가서 주사 영양 공급이라도 해 주는 게 임시 보호자의 도리 아니겠느냐는 이야기가 보인다. 

   그렇구나, 너무 무심했구나. 나는 그동안 회사가 힘들고 가족도 힘들고 집주인도 생계도 연인도, 도대체가 안 힘든 게 하나 없다는 이유로 살아 있는 것에 살아 있다는 것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구나. 이성으로는 그리 생각하며 근처 동물 병원을 검색하지만 야간 진료가 가능한 곳은 많지 않다. 회사가 끝난 뒤 전력 질주로 간신히 마감 시간에 맞출 수 있을 법한 데를 몇 골라 전화 문의를 해보지만, ‘그냥 기운이 없다 처진다고만 하시면 글쎄요, 저희가 포유류 전문이어서요’, ‘저희는 파충류와 양서류 전문이에요’, ‘아직 새는 진료 경험이 없는데 일단 한번 데리고 와보셔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도의 뜨뜻미지근한 답변을 받고, 반응이 그렇다 보니 머리가 둘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별반 소득 없이 조류 카페의 탈퇴 버튼을 클릭하려 할 때, 알림 표시와 함께 일대일 채팅창이 뜬다. 

   그거 머리 하나가 죽으면 다 죽어요.

   수의사인지 조류학자인지 아니면 내게 뱃사공의 노를 넘기고 사라져 버린 그녀인지 알 길은 없으나 나는 채팅을 보내 준 사람을 강기슭의 지푸라기처럼 붙들고 묻는다.

   이 새를 아시나요. 키워 본 적 있으신가요.

   그 물음에는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죽지 않는지 아실까요. 

   모이는 일단 주던 대로 주시고요, 물도요. 육식조는 아니에요. 병원에 데려가는 건 별로 소용없을 거예요.

   병원도 소용이 없다니, 나는 한편으론 치료비 부담은 덜었다는 은근한 안심을 감춰 두고, 이 새가 전생의 어느 날 처마에 매달고 잊어버린 감처럼 말라비틀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걸 원기 회복을 시켜 주고 싶으시면, 보호자 분의 기억과 희망을 나눠 주셔야 해요.

   그런 이름의 사료가 있나요?

   머리 하나는 과거를, 다른 머리 하나는 미래를 먹고살아요, 그거.

   과거와 미래라는, 그 뜻을 모르는 이 세상에 없으나 추상적인 말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던져져선 내 인식에 얼룩을 묻힌다. 쇠를 먹고 자라는 불가사리를 알고, 지나가던 사람을 집어삼키곤 모르는 척 봉오리를 다물어 버리는 식인꽃을 알지만, 그들의 먹이에는 최소한의 형태라는 게 있다. 질감도 양감도 없는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내놓을 수 있나. 농담인지 헛소리인지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그보다는 내가 꿈속에 잠겨 있는 건지 파악하느라··· 실은 당신이 내게 이 새장을 주고 사라진 그녀가 아닌가—개체수가 많을 성싶지 않고 학명도 붙지 않았을 법한 새에 대해, 어떻게 그런 부분까지 알 수 있단 말인가—묻기를 망설이다가 삼십여 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채팅창을 열었을 때, 닉네임 박스에는 선명하게 ‘탈퇴한 사용자’라는 글자가 뜬다.


*


   나는 새에게 자장가 대신 옛날옛적에,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 정보 값은 없는 일화들,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사건들, 지금의 나를 이루는 데에 일조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사소한 조각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조각보다도 형태를 갖지 못했거나 금방 흩어져 버리고 마는, 기포에 불과한 장면들이었을지도. 예컨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좋아했던 아이와 문구점에서 플라스틱 반지를 사서 커플링으로 삼았던 일화라든지, 중학교 때 함께 다니던 무리의 대화방에서 가치관의 차이 혹은 집안 여유의 차이로 은근히 소외당했던 일, 보란 듯이 나만 제외하고 새로 방을 판 아이들, 수능 시험 2교시에서 답안을 한 칸씩 밀려 썼는데 어차피 포기 과목이어서 결과적으로 예상과 큰 점수 차이가 나지 않았을 때의 다행스러움, 대학교에 들어간 뒤 첫 번째 아르바이트를 한 달쯤 다녔을 때 점장이 기습 폐업하고 야반도주하여 끝내 받지 못한 월급 같은 것들. 예컨대라는 단서 아래 무작위 예시나 있을 법한 것들을 들어 일컫기는 이미 지금 와선 그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까닭이며,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 사실로 인해, 그것이 사소하지 않은 나의 자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튿날 눈에 띄게 건강해 보이는 한쪽 머리가 눈에 띈다. 탈퇴한 사용자인지 얌체같이 사라진 그녀인지 몰라도 거짓말만은 하지 않은 것 같다. 한쪽 머리는 고개를 기웃거리다, 다른 하나의 머리만 없다면 금방이라도 날갯짓할 수 있을 것처럼 목을 길게 뽑고 지저귄다. 호루라기를 있는 힘껏 아니라 입에 문 줄도 모르고 무심코 숨 쉬듯 가볍게 불었을 때 나는 소리 같다. 이 소리가 집주인의 귀에 들어가면 나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생각과 함께, 새장에 보자기를 덮고 출근한다. 세상에서 내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을 사수해야 한다. 서울 어디를 가든 이 수준의 월세로 이만한 공간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출근해서도 새에 대한 걱정뿐이며, 나머지 하나의 머리에도 원기를 찾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뿐이다. 과거는 이미 일어났던 일이며 나로선 더는 붙들고 늘어질 가치가 없기에 그것에게 넘겨주었을 게 분명한데, 도래하지 않은 미래는 어떻게 넘겨줄 수 있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한쪽이라도 회복시켜야겠다는 판단으로 과거의 덩어리에서 시시한 껍질만을 박피해다가 수시로 제공했을 것이며, 무의미한 기억의 우물이 바닥을 드러냈을 즈음—그날 그 순간까지도 어쨌든 갖고는 있었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는 말에 약간의 어폐가 있을지 모르나—이왕 소실되는 거라면 차라리 잊고 살면 좋겠다 싶은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억들을 새의 한쪽 머리가 야금야금 먹고 살이 올랐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다가 모친의 입에서 소환되는 일화를 듣고서 나는 뜬금없다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너랑 네 친구들한테 그, 문제 많았던 선생 있잖냐, 그때 일 유야무야 지나가고 서너 달 감봉 수준으로 그치더니 다른 학교 가서도 똑같은 짓 하다가 결국 이제야 제대로 파면당했단다. 응? 그게 누구더라. 얘는, 고3 담임이었잖냐, 뭐 얼마나 오래된 거라고··· 아니 됐다. 기억 안 나면 다행이지 뭐. 친구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서도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 새끼 결혼한단다, 그 양다리 말이야, 우리 가서 깽판 놓아줄까. 하긴 이제 너도 다른 사람하고 잘 지내는데 굳이 그러기는 싫지? 그래도 둘이 한 2년 사귀고 너 한동안 약 먹었던 거 생각하면 진짜, 어떻게 공통 친구들한테 모바일 청첩장 보낼 생각을 다 하는지. 나는 그게 누구냐고, 내가 약까지 먹었느냐고 묻는 대신 괜찮다고, 다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잊어버렸다는 건 포즈가 아닌 사실이다. 마음속이 다행감으로 차오른다. 새가 나의 나쁜 기억을 먹어 주는구나. 나에게는 쓸모없으니, 오히려 내게 해로운 것들을 다 주어 버려도 괜찮은 거구나. 나는 나쁜 기억을 내 몸에서 발라내고 너는 살이 오르고, 삶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고 마는 각질을 먹어 주는 물고기 같구나 너는. 그렇게 지나온 발자국들을 지워 나가는 데에 재미가 들린다.


   그러나 새의 한쪽 머리가 지나치게 커졌는데 나머지 한쪽이 무사할 리 없다. 한쪽이 원기를 되찾고 부피가 커지는 만큼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더욱 왜소해 보이고 줄어드는 것만 같다. 그것이 작아지다 못해 소멸하기 전에 나는 결국 다급하게 미래를 공급한다. 그건 다수의 평범한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어릴 적부터 몇 번은 바뀌어 왔던 장래 희망의 목록이다. 아름다운 옷을 좋아하여 그것을 입어서 보여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성장이 멈추었을 때 신장 최종 스코어는 무대에서 빛나기에는 애매한 숫자였지. 마침 가족은 워킹과 이미지 트레이닝 같은 사치스러운 교육에 지원사격을 해 줄 의향이 없었고, 얼굴과 몸이 그러하니 좋은 데로 시집을 가면 되겠다고 했지. 누구의 밀착 전문 관리도 없이 스스로 실천하는 식단과 체중 조절에 지쳤던 마당에 나는 신포도 요법으로 처음부터 내 길 아니었다며 접어 버린 다음, 옷을 직접 만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대학의 학과로 진학했지.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오기라도 하면 한동안 격조했던 마을의 남자 어른들이 어유 키가 꽤 크네, 남자 친구는 있느냐, 있거나 없다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남자 기죽겠다고 돌림노래를 불렀고, 나는 언젠가부터 집으로의 발걸음을 아예 끊어 버렸지. 디자인 학원에 다닐 돈을 버느라 정작 학원에서는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했고, 나는 옷이 좋았던 건지 그것을 입는 내 몸이 좋았던 건지 헛갈릴 때쯤 중소 회사에 들어갔지만 대표가 무슨 횡령인지 사기인지로 쇠고랑을 찬 뒤 임금 체불 상태로 구성원들은 공중분해되었고, 전임자가 개업한 인터넷 쇼핑몰에 피팅 모델을 하게 되어 잠깐 동안은 멀어졌던 꿈의 뒤꿈치라도 만져 보나 싶었는데, 사장은 어느새 협력처에서 전달한 외국 모델들의 피팅 사진을 그대로 쓰게 되고, 나는 두어 번 고객 문의 게시판에 응대하다가 어느새 그걸 전담하게 됐고··· 그런데 멀어졌던 꿈이 뭐였더라. 나 앞으로 뭐 하고 싶었지.

   내 미래를 먹은 머리는 눈에 띄게 기력을 되찾고 몸집이 불어난다. 어차피 닿지 못하여 접어 둔 겹겹의 갈피 어디쯤에서 삭아 바스러진 미래, 궤도를 변경한 지 오래이므로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미래다. 


   새는 하나의 몸이면서 두 개의 머리로 살아가며, 두 개의 머리로 꿈을 꾼다. 하나의 머리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나머지 하나의 머리가 뜬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은 없는 걸 보면, 둘은 머리만 둘일 뿐 실은 하나인 것 같다. 새가 두 개의 머리로 꿈을 꿀 때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미래의 머리를 만져 보나 그것은 눈을 뜨지 않는다. 새가 두 개의 머리로 노래할 때 그 울음소리는 저마다 템포와 음조가 다른 걸 보면, 둘은 실로 둘인 것도 같다. 이제 나는 과거와 미래가 지저귀는 소리를 주인집에서 듣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다. 

   미래의 머리가 커지자 이제는 과거의 머리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미세 측정을 해 보지 않았으니 눈대중만으로는 착시에 불과할 수 있으나, 나는 과거와 미래의 균형을 맞추는 데에 힘쓴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계획을 먹이로 내준다. 이야기는 형태 없는 먹이다. 어떤 존재는 이야기를 먹고 자란다. 그 사실을 형태와 부피로 알게 된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과거는 하나씩 지워지고, 언젠가 하려던 일들은 영원히 불가능의 영역에 머물게 되거나 나 자신이 그것에 대한 열망을 잃게 된다. 나의 현재 애인이라는 사람이 현관문을 두드리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하며, 컵과 칫솔과 몇 장의 양말 내지 옷가지만으로 나에게 애인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 그것들을 비닐봉지에 싸서 창밖으로 던진다. 현재 애인이라던 사람은 욕을 하며 침을 뱉고 그 자리를 떠난다. 내가 다니던 회사라는 곳에서 보내온 부재중 전화와 무단결근에 대한 경고 문자 메시지와 내용증명 따위가 날아온다. 집주인이라는 사람이 월세가 밀렸다고, 보증금에서 까겠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간혹 집 근처 어딘가에서 새 울음소리가 나는데 들은 적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보증금이 얼마인지 모르겠고 이 집이 내가 사는 곳이라는 사실만을 알 뿐이고 새가 어떤 경위를 통해 내게 왔는지는 알지만 그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이 아닌 언젠가 하려던 일이 무엇인지 어떤 꿈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거나, 어렴풋이 기억한다 한들 이미 시큰둥해진 지 오래다. 내게는 현재만이 있다. 현재만이 남게 되자 비로소, 내가 지나왔으나 알지 못하는 길의 발자국들, 앞뒤로 둘러본들 누구도 밟지 않은 흰 눈같이 깨끗하게 비워져 잔여가 남지 않은 고통과 슬픔과 분노 들이 어쩌면 미래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당신은 기억의 대부분이 없다면서 어떻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 건가요? 

   둘러앉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 애인이 생활 습관이 좋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알고, 주말마다 들러서 잠을 잤다든지 새한테 밥 안 줘도 되냐고 물었다는 얘기는 어떻게 한 거지요? 

   회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운송장 붙이는 업무를 했다는 건 어떻게 아나요? 

   그런 디테일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당신이 만들어서 예시로 들어 본 것에 불과한가요. 

   몇 사람이 앞다투어 지적하자 연식이 오래된 듯한 구성원이 주의를 준다. 

   기억을 지적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우리는 모두 기억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이고,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지점은 ‘이를테면 그런 거’로 여기기로 했잖아요. 

   기억 집담회에서는 발화자의 논리적 허점에 대해 섣불리 지적해선 안 된다는 암묵의 규약이 있는데—인지증이 있는 사람이 갑작스레 현실로 끌려 나오면 혼란스러워하고, 때론 위험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발화자의 이야기 흐름이 그럴듯할수록, 소위 ‘이야기성’이 강할수록 청중의 본능은 거기서 일정한 규칙과 패턴을 찾고자 하며, 눈에 띄는 오류를 발견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깎아 내어 빈틈없이 요철 없이, 소위 모양이 잘 빠진 한 편의 이야기로 가다듬고자 한다. 

   그러한 본능 앞에서는 간혹 망각되곤 한다. 이야기가 이야기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존재라는 게 홀연 떨어진 새털 한 장에도 얼마든지 압사당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나는 내 몫의 이야기가 소진되었고 내 차례가 끝났다는 뜻으로 양옆 사람의 손을 놓는다.

   허구가 중첩되면 실제의 무엇이 됩니다. 허구는 마주 세워 놓은 두 장의 거울 같은 거예요. 따라서 이것이 참된 기억인지 불가능한 상상인지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나는 어디까지가 기억이며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그 경계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야기에 압도당하지 마세요.

   세상의 이야기를 이루는 뼈대가 기억인지 상상인지도. 

   그러니 이야기에 연연하지 마세요.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란 이야기는 실인증에서 시작하거나 실인증 그 자체다.


*


   집담회 자리를 떠나 숲을 걷다가, 문득 이 숲은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다던 이야기에 생각이 미친다. 어떻게 처음 이 숲에 들어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집에는 여전히 새장이 있(을 것이)고 나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에게 주려야 더는 줄 것 없는 먹이를 주어야 한다. 과거라는 먹이가 없으니 미래의 양분 또한 없고, 가장 최근에 보았던 그것의 머리는 또다시 줄어들어 시름시름 앓았던 것 같다. 그것을 죽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이미 재활용할 만한 과거도, 저당잡힐 만한 미래도 남지 않았으면서 현재의 집념으로만 숲길을 헤쳐 나간다. 

   그러는 동안 나의 다리는 마른 꽃대인 양 가늘어지다 어느새 걷기 힘들어진다. 뼛속이 텅 비워지며 장기가 쪼그라드는 이물감이, 급습하는 기갈과 같이 몸속을 채운다. 입안에 가득한 노랫소리가 죽은 자의 기도처럼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리하여 나는 알 것만 같다. 과거가 삭제되고 미래가 소실된 혈관은 텅 빈 채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과거와 미래를 담았던 몸은 그것이 떠나가면 밀도와 부피와 질량을 잃는다는 사실을. 

   이만큼 바삭한 껍질만 남았으니 뱀이나 매미가 그러하듯 벗어 놓을 때가 됐구나. 

   내 몸은 풍등처럼 서서히 떠올라 바닥과 멀어진다. 입은 부리가, 팔은 날개가 된다.

   구름을 요람 삼아 하늘의 거주민이 된다.


*


   비약과 생략으로 가득한 문장들이—가득하다는 형용사는 생략이라는 명사에 어울리지 않고 나는 그 어울리지 않음이야말로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문장의 옷임을 안다—인식의 유리 위를 천천히 미끄러져 간다. 마찰력을 잃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던, 정맥처럼 푸르게 불거진 욕망들이 어느덧 유리를 닮아 투명해진다. 유리와의 경계가 사라진다.


   욕망을 유리에 수놓았으니 삶은 깨어지는 것. 

   나는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코 푼 휴지나 꽁초 혹은 금속 라이터와 함께 휘저어지다 부주의하게 떨어진 구릿빛 동전인 듯 굴러가던 존재임을, 이윽고 멈춘다.


   두 개의 머리를 지닌 새가, 내려앉아 그 날개를 쉬게 할 땅 한 뙈기 없이 영원히 태허를 활강한다. 

   입속에 머금고 있던 미래의 언어들이 흘러내려 부서진다. 

   봄바람 한 조각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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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크흐.....

    • 2025-03-05 20:19:59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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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