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관종들

  • 작성일 2025-02-01

   관종들


김혜진


   정해는 남편 영기에게 가져다줄 전복죽을 포장해 오는 길에 그 애를 봤다. 

   추운 날이었다. 한겨울은 아니지만 제법 겨울이라고 할 만한 공기가 아파트 단지 내의 풍경을 빠르게 바꿔 놓는 중이었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는 여름내 노인들이 점거하다시피 애용하던 팔각 정자에 누군가 두고 간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찌그러진 음료 캔, 지저분한 돗자리, 마른 낙엽 같은 것들과 나란히 놓인 아이의 모습이 이상한 방식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건 날씨에 비해 얇은 아이의 옷차림 탓인지도, 어쩐지 울적해 보이는 표정 탓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정해의 성격 탓이 컸다. 그녀는 그런 사람을,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해는 아이에게 다가갔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 뭐 하니, 여기서?

   아이의 자그마한 코가 빨갰다. 

   동생 기다려요. 

   동생이 어디 있는데?

   집에요. 

   집에? 그럼 집에 있지 왜 나와서 기다리니?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그녀는 알아보았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단속하듯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아이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어렸다. 그건 그녀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완강하게 입을 다문 아이를 간신히 관리사무소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전복죽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정해는 냄비에 죽을 데우며 (남편 영기는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것을 싫어했다) 그 아이 생각을 계속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냄비를 태울 뻔했다. 

   애가 혼자 정자에 있었다고? 이 날씨에?

   며칠 전, 대장의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영기는 숟가락으로 죽을 맥없이 휘젓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평생 설비업자로 일한 그는 재주에 비해 늘 아쉬운 대우를 받았지만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정해는 바로 그 점(소박함이라고 해야 할지, 아둔함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이 그의 삶을 고만고만하게 만들었다고, 더 높이 도약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여겼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뭔가를 수리하고 복구하고 바로잡는 것에서 그가 큰 희열을 느낀다는 걸 알았으니까.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가 그런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맞다. 그에겐 뭐든 고칠 수 있다는 자신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죽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앉은 그에게선 이제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해는 그가 잃어 가고 있는 것이 다만 자신감 하나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정해는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은 저물어 있었다. 정해는 아이가 입고 있던 얇은 바지와 바지 아래로 드러난 발목, 구멍이 숭숭 뚫린 슬리퍼 같은 것들을 떠올렸고 미안함을 느꼈다. 아이를 떠넘기듯 관리사무소에 맡기고 돌아올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뭔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어서였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봐. 누가 와서 애를 데려갔는지. 

   영기가 재촉했고 정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곧바로 연락하지는 못했다. 아까 본 사무소 직원들의 냉랭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 부부가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껄끄러운 관계가 된 건 이미 여러 해 전이었으나 정해는 그 사실이 여전히 불편했다. 그럼에도 한 시간 뒤에 결국 전화를 걸었고, 아이가 무사히 귀가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무사히? 어떻게? 누군가 아이를 데리러 왔는지, 그 사람이 가족이 맞는지, 아이가 집에 들어가는 걸 직접 봤는지 묻진 못했다. 그러면 다시금 유별나다거나 유난하다는 반응이 되돌아올 테니까. 

   애는 어떻게 됐어? 잘 들어갔대? 확실히 물어봤어? 제대로 확인했대?

   잘 해결되었다는 답을 듣고서도 영기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정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와 말을 섞으며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문제들을 줄 세우다 보면 이 일을 관리소 직원과 통화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불안을 나누는 데 익숙했다. 가정과 상상 속에서 상황을 비관적으로 몰아가는 데 능숙했다. 맞다. 그들 부부는 작은 문제를 크게 키우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건 정해의 언니, 정미가 한 말이었는데 일종의 질책이라 여겼던 그 말을 정해는 더디게 수긍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3년 전, 두 사람은 이천 세대에 육박하는 낡은 이 아파트 단지로 이사 왔다. 그 해에 딸이 음주 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냈고, 이웃 하나가 그들 부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일이 있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큰 비용이 들었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가계가 폭삭 주저앉았다. 그래서 눈발이 흩날리는 추운 날에 감행해야 했던 그 이사는 정해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앞으론 우리만 생각하면서 살자고. 다른 사람들 신경 쓸 거 없이.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돌아가고, 어수선한 집 안에 남겨졌을 때 영기가 그렇게 말했다. 피곤한 탓인지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후회인지, 반성인지, 결심인지 모를 그 말의 의미를 정해는 바로 이해했다. 돌이켜보면 몰랐으면 좋았을 일들이, 모른 척 넘겼다면 좋았을 일들이 그들 부부에겐 많았다. 그런 일들에 간섭하고 참견하면서 잃은 것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그동안 자신이 잃은 것들을 냉정하게, 뼈아프게 셈할 수 있게 된 거였다. 

   그래야지. 

   정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말을 지키기에는, 자신들의 삶만 신경 쓰고 살기에는, 모른 척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들은 문제를 제기했고, 시시비비를 따졌고, 목소리를 높이며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 이전 동네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정해는 아파트 후문이 아니라 정문을 통과해 비즈 공방에 출근했다. 그 아이가 앉아 있던 팔각 정자를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 아이로 인해 생겨난 작은 불씨가 저절로 사그라지길 바랐다.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불씨를 키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멸할 것이었다. 

   그녀는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온갖 물품과 잡동사니로 정리가 불가능해진 1평 남짓한 점포 문을 열었다. 지난밤, 대충 덮어 놓은 비닐과 천을 걷어 내고, 공중에 매달아 놓은 LED 전구를 켰다. 마트에 온 손님들이 이따금 기웃거리는 그녀의 점포는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매일 뭔가를 만들었다. 쇠락해 가는 건물 안에서 매일 존재감이 옅어지는 자신의 점포를 유지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는 아니었다. 

   정해는 뭔가를 만드는 것이 좋았다. 이전에 없던 걸 만들어내는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지만 순수한 기쁨을 주었다. 그건 자신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창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므로 그녀가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어떤 것이었다. 크기와 색깔이 다른 비즈들을 알맞게 배치할 때, 작디작은 비즈를 나일론 실에 꿸 때 정해는 도대체 누가 사갈까 싶은 철 지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아직 없는 어떤 근사한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언니, 고구마 맛볼래?

   그녀가 작은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작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옆 점포의 경아가 들어왔다.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데님 앞치마를 메고서였다. 

   뭐야, 못 보던 거네? 새로 만든 거야? 

   그녀가 앞치마를 보며 물었고 경아가 답했다. 

   어제 한 번 만들어 봤어. 색깔이 좀 탁하지?

   아니야. 색감이 고상하고 예뻐. 좋아. 

   진짜? 사람들이 좀 사 가려나? 

   경아가 신이 난 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고, 그 바람에 주변에 높이 쌓인 비즈 상자들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두 사람은 비좁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고구마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도무지 걷힐 기미가 없는 불황의 그림자, 그 속에서 분투하는 서로에 대한 격려, 나날이 터무니없이 느껴지는 오늘치 목표 매상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건 없었다. 그건 두 사람이 거의 날마다 입에 올리는 화제였고, 시시하게 끝날 게 뻔한 하루를 시작하는 준비운동 같은 거였다. 

   어제 뉴스 때문에 그런가. 기분이 계속 처지네. 언니도 봤지? 집에서 맨발로 도망 나왔다는 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를 어떻게 그렇게까지 굶겼을까. 진짜 요지경 세상이야. 

   그리고 경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을 때, 느슨해졌던 마음이 다시 팽팽해졌다. 

   뉴스? 그런 뉴스가 있었어? 누가 애를 굶겼대?

   누구겠어. 부모겠지. 

   부모가 애를 굶겼다고? 

   대답은 듣지 못했다. 손님이 들어온 것을 보고 경아가 재빨리 자기 점포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정해는 간식으로 챙겨온 삶은 계란을 우물거리며 기사를 찾아보았고, 기사 아래 달린 댓글을 하나씩 읽었다. 믹스커피를 홀짝거리며 영상 속 아이의 모습을 골똘히 살폈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를 소문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래서 퇴근 무렵에는 그 정자에 다시 가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아이는 없었다. 

   정해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정자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어쩌면 아이가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고약한 보호자의 비밀스러운 지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나무 기둥에 부착된, 너덜거리는 경고문(빨간색 매직으로 비둘기에 먹이를 주지 말라는 글씨가 다소간 살벌하게 적혀 있었다)을 제대로 붙이고, 쓰레기를 태운 흔적 같은 것들을 발로 헤집어 보았다.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불길한 추측을 떨치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는 그곳에 없었다. 

   정해가 아이를 다시 본 건 몇 주 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이의 존재가 흐릿해져 갈 무렵이었다. 토요일 오후, 복도에 내놓은 불법 적치물 문제로 703호 남자와 언쟁을 벌인 뒤, 그녀가 작정하고 관리사무소로 걸어가고 있을 때 멀리 그 아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누군가와 함께였다. 다가가자 남자아이보다 네댓 살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녕, 뭐 하고 있니, 여기서? 

   그녀가 묻고 여자아이가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데요? 

   날이 춥잖니, 감기 걸리겠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아이들의 차림새를 훑었다. 아이들이 입은 점퍼는 소매가 짧아 팔목을 다 가리지 못했고, 구멍이 숭숭 뚫린 투박한 슬리퍼도 바람을 막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며칠 감지 않은 듯한 아이들의 기름진 머리칼을, 길게 자라난 아이들의 손톱을,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은 아이들의 표정을 조심스레 오갔다. 

   우린 안 추운데요. 

   여자아이가 새침하게 대꾸했고 남자아이가 그 말을 따라 했다. 

   안 추운데요. 우리는!

   정해는 아이들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703호 남자를 잠깐 떠올렸다. 복도에 내놓은 잡동사니를 치워 달라고 벌써 몇 달째 요청하는데도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처음엔 형식적으로라도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나왔다. 바로 옆집도 아니고, 복도 맨끝 집에 사는 당신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거였다. 그녀는 공손한 태도로 복도가 공용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아파트 법령을 입에 올렸다. 화재가 났을 경우, 이런 적치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설명할 땐 어떤 비극적인 상황들이 눈앞에 펼쳐져서 잠깐씩 말을 멈춰야 했다. 남자의 언성이 커졌고, 705호 신혼부부가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녀와 남자를 흘끔거렸고, 결국 경비원이 올라왔다. 

   709호 분, 그만하시죠. 그 정도 하셨으면 됐어요. 

   그리고 경비원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흡사 호통이라도 치는 목소리였고, 성가시다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말은 703호 남자가 들어야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아니라. 그 순간,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703호 남자와 경비원, 705호 신혼부부까지. 정해는 다섯 명을 상대로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이어 가다 관리사무소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는 말을, 이번에는 기필코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을 선전포고처럼 남기고 나온 길이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함은 잦아들고 다시금 미심쩍은 마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이 유별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문제는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 일은 그녀에게도 쉽지 않았다. 좋아서 하는 일도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과 얼굴을 붉혀야 하는 데다 거기서 비롯된 얼마간의 미안함과 자기 의심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이 일,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 적치물을 철거하고 말고 하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게 과연 그만 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남들도 반기지 않는 이런 일을 이젠 진짜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름이 뭐니?

   그녀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민지, 서민우? 예쁜 이름이구나. 누가 지어 준 거야?

   그리고 질문을 이어 가는 동안 정해는 이런 일들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임을 상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었다. 

   점심은 먹었어? 누구 기다리니? 관리사무소에 가서 기다릴까? 여긴 좀 추운데. 

   아니요. 거긴 안 가요. 

   대답은 주로 여자아이 민지가 했고, 남자아이 민우는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말이 없었다. 잠시 말이 끊어졌을 때, 민우가 잠꼬대하듯 물었다. 

   아줌마, 근데 지금 몇 시예요?

   2시 20분. 왜 이제 가려고?

   아뇨. 아빠가 올 거예요. 좀 이따가. 

   그래? 아빠를 기다리는구나. 아빠가 어디서 오시는데?

   집에서요. 

   진짜였다. 잠시 뒤 추리닝 차림의 남자가 자전거를 끌고 나타났다. 그는 멀찌감치 서서 아이들에게 손짓했고,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반가운 기색을 보였더라면, 아빠라고 소리치며 뛰쳐나갔더라면 정해는 그 남자에게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였다. 

   안녕하세요. 

   정해는 어쩐지 주저하며 걷는 아이들을 뒤따라갔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 예. 

   남자가 건성으로 답했고 확인하듯 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누워 있다가 나온 듯 뒷머리가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애들이 아빠를 얌전히 기다리는 게 기특해요. 애들이 귀한 시대인데 둘씩이나. 키울 때야 고생스러워도 다 키워 놓고 나면 든든하죠. 나도 딸이 하나 있는데 언제 이런 시절이 있었나 싶어요. 

   남자가 고개를 까딱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으므로 정해는 마음이 급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건데 애들 하나씩 줘도 되죠? 대단한 건 아니고 애들이 귀여워서. 내가 공방을 하거든요. 

   정해는 가방을 뒤적였고, 샘플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팔찌 몇 개를 꺼냈다. 

   아니요, 됐습니다. 괜찮아요. 

   남자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정해가 막상 민우의 손목에 팔찌를 끼워 주는 걸 보고서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정해는 아이들에게 어울릴 만한 팔찌를 골라 주는 척 시간을 끌었고 계속 말했다. 질문이기도 하고 혼잣말이기도 한 말들. 대답을 들을 수도, 듣지 못할 수도 있는 말들.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정해는 그 일을 영기에게 털어놓았다. 

   오늘 그 꼬마 애 봤어. 누나랑 같이 있데. 정자에서. 우리 바로 뒷동에 사는 것 같아. 애 아빠가 데리러 왔더라고. 

   멀리서 휘파람 소리 같은 자동차 경적이 높이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날도 추운데 왜 애들을 자꾸 거기 둔대. 한 번 물어보지 그랬어. 정신 나간 놈. 

   그건 못 물어봤어. 다음에 만나면 물어볼까? 집에서 나온 차림이던데. 왜 거기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까? 집에서 기다려도 될 텐데. 그 애들 말이야. 이상하지?

   이상하고말고. 

   잠시 말이 끊어졌고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몸을 일으킨 건 영기였다. 그가 싱크대 수전을 잠그고 돌아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사락거리는 이불 소리가 그치고 다시금 주변이 고요해졌다. 정해가 말했다. 

   하긴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지. 

   무슨 사정?

   모르지. 다들 사정이 있잖아. 우리도 그랬고. 

   그 말을 하면서 정해는 호경을 생각했다. 하나뿐인 딸. 성장하는 동안 자신에게 이런저런 실망과 아픔을 주었지만 술에 취해 인생을 허비하듯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자식. 영기와 옥신각신하면서 마침내 딸의 이름을 정했을 때, 수많은 글자 중 클 호(浩)와 볕 경(景)이라는 글자를 골랐을 때, 그녀가 상상한 딸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이름이 딸에게 버거웠던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 애는 그 이름에 담긴 부모의 염치없는 기대를, 뻔뻔스러운 욕심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게 아닐까 하고. 그런 의문은 딱 한순간의 방심으로 딸의 삶을 망친 게 바로 자신이라는 죄책감으로 돌변해 그녀를 짓누를 때가 많았다. 

   사정은 무슨. 그래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거야. 무슨 일이 있나 한번 살펴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1, 2분도 안 걸리는 일을. 

   영기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그러곤 저쪽으로 돌아누웠다. 정해는 그가 딸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았다. 아니, 고작 열 살이던 호경이 버스 차고지 주변을 기웃거릴 때, 버스 광고판에 붙은 캐릭터에 정신이 팔렸을 때 그곳에 있었던 (혹은 지나쳤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음을 알았다. 누군가 그 애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조심하라고 일러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호경은 버스에 치이는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왼쪽 다리를 절게 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을 돌보지 못한 부모에게 복수하듯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얼굴을 보여 주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기진 않았을 것이고. 말하자면 그녀는 그가 그런 말들을 가만히 억누르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건 그냥 알게 되는 거였다. 

   그러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정해는 그렇게 대꾸했고, 어둠 속 영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오갔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가 깨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캄캄한 적막 속에서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 듣고, 나누고, 새기고, 복기하면서. 

   그래서 세 번째로 그 애들, 민지와 민우를 만났을 때 정해가 경찰을 부른 건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 사이 날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땅거미가 지는 오후, 아이들은 정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이전보다 상태가 나빴다. 

   안녕, 또 만났네?

   정해가 인사했고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추위 탓인지 둘 다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돼지고기와 양파, 호박과 버섯 등이 담긴 묵직한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정자 한쪽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바람떡 한 팩을 꺼냈고 보란 듯 떡 하나를 집어 먹었다. 떨이로 싸게 구입한 것이었고 영기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하나 먹어 볼래?

   그녀가 묻고 민지가 물었다. 

   먹어도 돼요?

   그럼. 꼭꼭 씹어 먹어. 마실 게 없으니까. 

   아이들은 뭘 얼마나 만졌는지 알 수 없는 손으로 떡을 집었고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떡 한 팩을 무섭게 먹어 치우는 아이들을 보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그래서 민우의 팔목에 난 상처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엄마와 동생을 기다리고 있다는 민우의 말이 끝나고, 일하러 간 아빠가 일요일에 온다는 민지의 설명이 이어지고, 다시 민우가 무슨 말을 하려고 만세 하듯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을 때, 어딘가에 긁힌 것 같은, 데인 것 같은 붉은 상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팔목에 그거 뭐니? 다쳤어?

   그녀가 물었고 민우가 답했다. 

   네. 

   어쩌다가? 병원엔 다녀온 거야?

   몰라요. 그냥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어디 보자. 

   민우의 가느다란 손목을 쥔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이 애들을 이대로 그냥 둘 순 없겠다고. 그건 캄캄한 적막 속에서 영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 밤에 몰래 다짐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112에 전화를 걸었고 두 명의 경찰이 왔다.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유아차를 끌고 나타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차양 막 탓에 유아차 안 아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여자가 느릿느릿 유아차를 밀며 다가왔고 그보다 느린 말투로 물었다. 잠에 취한 듯 나른한 목소리였다. 통통한 체구 탓에 슬리퍼를 신은 여자의 발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이 애들 보호자세요?

   경찰 한 사람이 묻고 여자가 답했다. 

   네. 제가 엄마예요. 

   날이 추운데, 애들이 길에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어요. 

   네? 애들은 길에 있으면 안 되는 건가요?

   정해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여자가 신고자의 정체를 따져 묻는다면, 아이들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나서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목격한 아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털어놓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제대로 조사를 할 줄 알았던 경찰은 그 아이들을, 어쩐지 미덥지 않아 보이는 엄마와 함께 그냥 보내 버렸다. 

   이게 이래도 되는 건가요?

   멀어지는 네 사람을 보며 정해가 물었는데 경찰 둘은 뭐가 문제냐는 듯 정해를 바라보았다. 

   따로 조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되묻고 나서야 경찰 중 하나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조사할 만한 사안은 아니어서 귀가 조처했어요. 별일 없을 겁니다. 

   어느새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들이 돌아가고 날이 완전히 저물 때까지 정해는 그곳에 남았다. 누군가는 이 짧은 소동에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경찰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불안을 부추겼다. 

   이튿날, 정해는 인근 지구대를 찾았다. 

   일요일 오후, 영기와 함께였다. 두 사람은 폭행 시비가 붙은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형광 조끼를 입은 경찰에게 다가갔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정해가 잠깐씩 말을 멈출 때마다 흥분한 영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말은 자주 부딪히고 엉키고 꼬였다. 

   어제 신고를 한 번 하셨다고요?

   잠자코 듣던 경찰이 그렇게 물었고 누군가와 짧게 전화 통화를 나누었다. 

   출동해서 확인한 사항이라 별일 없을 겁니다. 혹시 애들이 또 나와 있거나 하면 그때 다시 알려 주세요. 

   두 사람이 들은 대답은 그게 다였다. 정해는 아이들이 감금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애들을 때리고 굶기는 부모가 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 애들이 아직 어리다고, 그래서 걱정된다는 말만 했다. 그리고 영기가 감정적인 말을 본격적으로 쏟아 내기 전에 그를 떠밀다시피 하며 그곳을 나왔다. 

   이후 두 사람은 지구대를 다시 찾지 않았다. 그 애들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일을 그냥 지워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주 아이들을 생각했고, 불안과 걱정을 나누었고, 시간과 마음을 썼다. 그건 정해가 출퇴근길에 정자를 지나치는 것처럼, 영기가 산책 삼아 잠깐씩 정자 근처를 배회하는 것처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 중 하나였다. 최소한의 일. 그들은 자신들이 신경 쓰는 다른 문제들도 똑같이 대했다. 그건 선을 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누군가 현관문에 쪽지를 붙여 둘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눈 예보가 있던 아침, 현관문을 열자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고 순간적으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정해는 하마터면 그 쪽지를 발견하지 못할 뻔했다. 

   <관심도 지나치면 병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과 생활 방식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세요.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노란 포스트잇에 적힌 글씨는 모두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잉크가 번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뒤 쪽지를 뗐고,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녀가 그것에 대해 언급한 건 저녁을 먹은 뒤 영기와 나란히 소파에 앉았을 때였다. 

   누가 붙인 거야?

   영기는 구깃구깃한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고 정해가 되물었다. 

   누구 같아?

   그들이 그런 종류의 쪽지를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고소니 고발이니 하는 원치 않는 일들에 휘말리면서 그들은 조심하는 법을, 선을 지키는 법을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최근 행적을 더듬었고,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몇몇 이웃과의 언쟁을 떠올렸고, 자신들의 태도와 말투를 점검했다. 사생활이나 생활 방식을 언급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의논하고 절충할 문제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제기하고 요구한 문제는 모두 정답이 분명했다. 

   사생활과 생활 방식을 존중하는 법?

   정해가 혼잣말하듯 그 문장을 되뇐 건 그 때문이었다. 

   존중 좋아하네. 존중받을 짓을 해야 존중을 하지. 

   영기는 괘씸한 듯 쪽지를 도로 건네주고 텔레비전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혐의는 모두에게 있었다. 그 쪽지의 주인은 수개월째 복도에 적치물을 방치하고 있는 703호 남자일 수도, 주차장 한쪽에 온갖 폐품을 쌓아 놓고 버티는 509호 여자일 수도, 베란다 난간 위에 위험천만하게 화분들을 늘어놓은 3층 여자일 수도 있었다. 정해는 쪽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사방이 온통 적이라고. 상식도 예의도 없는 무뢰배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그 애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쪽지의 주인이 그 애들의 부모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며칠 뒤, 편의점 앞에서 그 애들을 다시 만났을 때였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이었고, 정해가 수술 후유증에 시달리는 영기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뽑기 기계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여전히 구멍이 숭숭 뚫린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안녕, 오랜만에 보네?

   그렇게 인사를 건넬 때 정해의 가슴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미안함인지, 불안함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 탓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 이 애들이구먼.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영기가 다가와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편의점 문이 열리며 여자가 나왔다. 애들은 길에 있으면 안 되는 거냐고 경찰에게 되묻던 여자. 행동에서, 말투에서 무신경하고 둔한 성격이 베어 나오던 여자. 아이들의 엄마였다. 

   안녕하세요. 

   정해가 인사했는데 여자는 인사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자는 아이들을 단속하듯 가까이로 불렀고,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지난번에 경찰에 신고한 분 맞죠?

정해는 여자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것이 악의가 아니라 선의에서 비롯된 행위임을 말하기 위해. 그러나 여자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날 우리 애들이 거기 있었던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튼 이유가 있었어요.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저희 애들은 저희 방식대로 잘 돌보고 있으니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정말 부탁합니다. 

   공격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식탁 앞에 앉았을 때, 정해는 그 아이들에 대한 염려가, 그들 부모에 대한 의혹이 말끔히 걷히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영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어쩐지 겁에 질린 것 같은 두 아이의 표정을 입에 올렸고, 자신들이 목격한 미심쩍은 점들을 하나씩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들이 그냥 지나치면 꺼져 버릴 작은 불씨를 커다랗게 키우는 방식이었다. 해가 질 무렵, 두 사람은 다시금 뭐든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까 저녁 식사 전에 정해가 근처 지구대에 전화를 건 건 얼마간 예정된 수순이었다. 정해는 그 애들이 또 길 위에 있었다고 말했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아동 학대라는 단어는 언급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 단어를 소리내어 말한 건 며칠 뒤, 두 사람의 집을 방문한 언니 정미 앞에서였다. 

   영기의 병문안 겸 김장김치를 전해 주러 온 언니가 그들 부부의 안부를 물었을 때, 정해는 김치를 플라스틱 통에 차곡차곡 포개 넣으며 703호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고, 김치 조각 하나를 맛보며 3층 여자에 대해 말했다. 그 애들에 대해 말한 건 그 이후였고, 그 애들의 부모가 미덥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았다. 정미는 고개를 끄덕일 뿐 이렇다 할 대꾸가 없었다. 그리고 집을 나설 때,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 나온 정해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해야, 다른 사람들 심기를 건드리면 좋아?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나아?

   질책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언니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근심을 넘어 침통해 보이기까지 하는 언니의 시선을 정해는 피해 버렸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건 이웃과의 분쟁으로 언니에게 몇 차례 돈을 빌린 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 돈을 아직 다 갚지 못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뭐랄까. 찰나였지만 언니의 그 말이 자신 안의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나는 모르겠다. 사는 게 여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남들 사는 거에 줄기차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 너도, 제부도 살아 봐서 알겠지만. 

   정미는 무슨 말을 더 할 것처럼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고 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정해는 그 자리에 서서 층수가 낮아지는 엘리베이터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듯 복도 난간으로 다가갔고, 건물을 빠져나오는 언니의 작은 머리통이 나타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원래 손가락질하는 건 쉬워. 언니처럼 말하는 건 쉬운 일이라고. 무슨 일이든 터지고 나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정미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정해는 언니의 은색 승용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703호가 복도 한쪽에 쌓아 놓은 상자들을 노려본 뒤 집으로 돌아왔다. 

   12월 마지막 날에 오겠다던 호경은 오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타종 행사 방송을 지켜보는 내내 두 사람은 딸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 순간엔 각자의 기다림을 모른 척해 주는 것이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중요한 책무 같았다. 서른세 번의 타종이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지난해와 다를 것 없는 소박한 바람을 품었고, 짤막하게 서로를 격려했다. 그런 식으로 어쩐지 한 해 한 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만 같은 서로의 마음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래서 다음 날, 현관문에 적힌 낙서를 발견했을 때 두 사람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지난밤 나누었던 격려와 위로가 서로에게 얼마간 힘이 되어 준 것 같았다. 

   이봐, 잠깐 나와 봐. 

   이른 아침, 밖에서 자동차 도난 경보음이 울렸고 그것을 확인하러 나간 영기가 정해를 불렀다. 그녀가 싱크대 앞에서 대파를 다듬고 있을 때였다. 

   왜? 무슨 일 있어?

   그녀가 밖으로 나왔고 영기가 낙서를 가리켰다. 색연필인지 립스틱인지 모를 뭔가로 쓴 글자는 아이의 글씨 같기도, 어른의 필체 같기도 했는데 문고리 바로 위에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그 단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관종들. 그건 언젠가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었고, 그래서 낯설지 않았으나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좋은 의미가 아님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지우지 말고 놔둬야 할까?

   한참 만에 정해가 물었고 영기가 답했다. 

   놔둬야 하고말고. 그래야 범인을 잡지. 이따가 경비실에 한 번 가 보자고. 

   그쳤던 도난 경보음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정해는 주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녀가 보는 건 맞은편 아파트 건물이었다. 그 아이들이 사는 곳. 맞다. 그녀는 그 아이들의 부모를 떠올리고 있었다. 불안이, 걱정이 계속 그곳으로 향했고, 정해는 바로 그 점을 그 애들의 부모를 의심할 만한 타당한 근거로 삼았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정해는 이 일을 적당히 넘기지 않겠다고, 작은 의혹도 무시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새해였으니까. 그건 지난해도, 지지난해도 그녀가 목표로 삼은 일 중 하나였다. 한다고 하는데도 늘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한참 만에 도난 경보음이 멈추었다. 

   들어가, 일단 들어가자고. 

   영기가 현관문을 열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정해는 그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건 그냥 알게 되는 거였다. 

추천 콘텐츠

빙점을 만지다

빙점을 만지다 강보라 직선으로 뻗은 도로 양편으로 수확을 막 끝낸 포도밭 풍경이 길게 이어졌다. 열매는 없으나 여전히 무성한 포도나무들이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며 잎에 묻은 햇살을 털어 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그 아래 연필로 그은 밑줄처럼 도드라진 도로의 색 대비가 너무 강렬해서 현기증이 났다. 속도를 높이자, 열린 창틈으로 캘리포니아의 온기가 밴 가을바람이 스몄다. 알맞게 식은 목욕물처럼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지금 이 바람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저 단조로운 풍경에 잠겨 익사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가라앉았던 마음에 가벼운 상승감이 일었다. 같은 풍경이 지루하게 반복되어 졸음에 빠진 운전자들이 자주 사고를 일으킨다는 29번 고속도로에서 그처럼 시적인 문장으로 생각을 간추린 스스로가 뿌듯했다. ‘익사’라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있잖아. 나 여기서 사고 낸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으응, 신음한 양미가 잠결에 몸을 뒤치며 웅얼거렸다. “···뭔 마음.” “경치가 너무 단조롭잖아.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멎을 정도로. 이대로 계속 달리면 저 풍경 속에 익사할 것 같지 않아?” “···오빠 취한 거 아니지.” 조수석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양미가 “춥다, 최 기사 창문 좀.”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를 향해 돌아누운 양미의 입술 안쪽에 검붉게 말라붙은 와인 얼룩이 보였다. 취해? 내가? 어이없어 내쉰 한숨에 눈앞의 앞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렌터카로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세 곳을 연이어 방문한 오늘, 취해 가는 양미 옆에서 묵묵히 최 기사의 본분을 다한 사람은 나였다. 내가 양미의 가르침대로 ‘오로로로’와 ‘퉤’를 반복하며 맥주잔만 한 타구통을 가득 채우는 동안 양미는 그 많은 시음용 와인을 뱉지도 않고 족족 받아 마셨다. 입술을 조붓하게 오므리고, 입에 머금은 와인을 혀끝으로 ‘오로로로’ 굴리며 그간 부지런히 익힌 지식을 뽐냈다. 2019년에는 작황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2020년산 샤르도네랑 비교하니 미네랄의 질감이 확실히 다르네요. 와인 메이커의 선택이 달라서만은 아니겠고, 역시 수확 직전의 기후의 차이가 가장 크겠죠? 의례적인 미소로 와인을 따라 주던 에듀케이터들이 양미의 남다른 질문에 “굿 퀘스천”, “이그젝틀리” 감탄하며 이전보다 한층 깊이 있는 설명을 이어 갔다. 양미의 열정에 감동해, 시음 프로그램에 없는 귀한 와인을 서비스로 내어준 에듀케이터도 있었다. 뭐 한편으로 신기하기는 했다. 에듀케이터가 와인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하면 내 혀끝에서도 두엄처럼 비옥한 땅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양미가 정향과 육두구 향이 난다고 하면 정말로 와인에서 정향과 육두

  • 문장지기
  • 2025-02-01
쌍두몽(雙頭夢)

쌍두몽(雙頭夢) 구병모 굴속에 두고 온 겨울잠이 나를 엄습한다. 한순간 새의 노랫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채는데, 그것이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건지 내 몸속에서 흘러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바람과 모래와 나무 사이에서 닳아 가는 의식이 육(肉)의 허물을 벗겨 낸다. 소리만이 텅 빈 몸속에서 진동한다. 한 마리의 새는 광막한 하늘에서 탈각된 가피(痂皮)일 뿐이다. 정처 없던 사고는 짓이겨져 새의 몸을 살찌우고 그 날개 아래 영원히 유폐된다. 나는 내 존재에 그어진 선명한 취소선 두어 줄을 느낄 수 있다. * 시간의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살갗마다 앉은 흉터 아래를 탐침하고자 하는 이들이 기억 집담회에 모인다. 이는 기억의 회의라고도 하고, 기억 세미나 혹은 기억의 제의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기억이 열리는 나무 밑에 둘러앉아 나무 열매를 따서 나눠 먹고—그 씨앗은 다시 땅속에 묻는다, 그것이 무엇으로 열리든지, 그대로 흙의 일부가 되더라도—손을 잡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몸짓을 유지한 채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는데, 이는 체온을 전달하기 위한 행위로, 축축한 땀이 차오르는 타인의 손바닥을 신경 쓰는 이는 참석이 불가하다.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혹은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한. 어쩌면 이미 휘발되어 떠나간 지 오래여서 창궐하는 유령처럼 사방을 배회하며 약탈할 몸을 찾는 기억을, 원래의 소유자에게로 다시 데려오기 위한. 그러므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단순 건망증이 있는 이들, 빈지 워치 시대의 보편적인 디지털 중독자들, 인지증 진단을 받은 이들. 최초의 기억 집담회가 자생적으로 싹텄을 때는 인지증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위한 나눔과 위로의 성격이 강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약간의 포즈, 실제로 기억 증진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행위들. 누군가는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암송하고 (틀리거나 일부 구절을 건너뛰어도 좋다), 누군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영화 속의 인상적인 한 장면을 묘사하고, 누군가는 40년 전 자기가 입었다던 삭기 일보 직전의 배냇저고리를 공개하면서 여밈 부분에 묻은 얼룩의 기원을 상상하여 들려준다. 상상은 기억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까. 좌우로 기우뚱하는 고개들. 기억은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변형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상상과 크게 다른 범주라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간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라면, 상상은 웬만큼 도움이 되리라고, 사람들은 수긍한다. 처음 문턱을 넘을 때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흔히 있는 최면 센터일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마음 다스림을 빌미로 삼은 장삿속. 유쾌한 기억,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 잊고 싶은 기억, 왜곡된 기억 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번드러운 말로 시선을 끌고 기억전시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림과 소조(塑造)와 글로 기억 구조물이라는 것을 세워다가 춤, 노래, 연주, 꽃 무엇으

  • 문장지기
  • 2025-02-01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김인숙 그즈음 유자는 자주 암벽 공원을 찾았다.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다. 넓은 공원 한 곳에 높은 암벽을 세우고, 예쁜 색깔의 조약돌 같은 돌들을 색색이 박아 놓았다. 사람들이 그 돌을 손으로 잡고 발로 짚으며 올라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몇 달 가까이 그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즈음에는 거의 매일 공원을 산책했음에도 암벽은 늘 아무 방해 없이, 아무 매달리는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멈춰 서서 고개를 쳐들어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도 대체로는 그녀뿐이었다.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안전 요원 없이 등반을 금지한다는. 아마도 특정한 날에만 운영을 하는 시설인 것 같았다. 그녀가 그곳을 산책하는 시간은 그 특정한 때의 밖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시간이 특정했을지도. 그녀는 ‘특정’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즈음에는 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험한 말을 많이 듣게 된 탓일 수도 있었고, 그 말들을 그릇 씻듯이 좀 씻어 버리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암벽 접근을 막는 펜스 바깥에는 벤치가 있었다. 잔디밭 바깥에 있는 벤치가 아니라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평생 ‘밟지 마세요’라는 표지판만 보고 살아온 유자는 걱정 없이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그 벤치가 좋았다. 그게 실은 들어가 앉으라는 것이 아니라 조경용이라는 걸 몰랐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 후에도 가끔씩 잔디밭 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처럼 생각 없이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암벽 앞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암벽을 등지고 앉아 잔디밭 한가운데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잔디를 밟을 때의 폭신하고, 미끌하고, 심지어는 바삭하기까지 한 감촉이 그리움처럼 남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기억인지 금지된 것을 안 후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때때로 발밑이 아찔한 것을 보면. 가끔씩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암벽 앞을 지나갔다. 개도 사람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암벽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암벽 사진을 찍으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올렸던 사람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녀가 앉아 있는 벤치는 지나치게 좋은 자리, 혹은 지나치게 나쁜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녀가 그런 사람이거나. 그렇다고 해서 일어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일어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딱 그곳에 앉았을 때만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소박하고 희미한 저항. 낯간지럽고 귀여운 의지‧‧‧. 그렇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나 징그러운 사람이면, 아직도. 유자는 그 벤치에 앉아 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생각하다 보면 타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장기 말도 생각하게 됐다. 그녀는 말을 타 본 적이 없었다. 달리는 말을 본 적은 있었다. 제주 어디 해안에서였는데, 곧 폭풍이라도 몰아칠 듯 어둑한 해변을 말 한 마리가 달려왔다. 유자는

  • 문장지기
  • 2025-02-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박동현

    좋아요 외롭고요

    • 2025-02-25 22:40:24
    박동현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