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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을 만지다

  • 작성일 2025-02-01

   빙점을 만지다

 

강보라

 

   직선으로 뻗은 도로 양편으로 수확을 막 끝낸 포도밭 풍경이 길게 이어졌다. 열매는 없으나 여전히 무성한 포도나무들이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며 잎에 묻은 햇살을 털어 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그 아래 연필로 그은 밑줄처럼 도드라진 도로의 색 대비가 너무 강렬해서 현기증이 났다.

   속도를 높이자, 열린 창틈으로 캘리포니아의 온기가 밴 가을바람이 스몄다. 알맞게 식은 목욕물처럼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지금 이 바람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저 단조로운 풍경에 잠겨 익사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가라앉았던 마음에 가벼운 상승감이 일었다. 같은 풍경이 지루하게 반복되어 졸음에 빠진 운전자들이 자주 사고를 일으킨다는 29번 고속도로에서 그처럼 시적인 문장으로 생각을 간추린 스스로가 뿌듯했다. ‘익사’라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있잖아. 나 여기서 사고 낸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으응, 신음한 양미가 잠결에 몸을 뒤치며 웅얼거렸다.

   “···뭔 마음.”

   “경치가 너무 단조롭잖아.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멎을 정도로. 이대로 계속 달리면 저 풍경 속에 익사할 것 같지 않아?”

   “···오빠 취한 거 아니지.” 조수석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양미가 “춥다, 최 기사 창문 좀.”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를 향해 돌아누운 양미의 입술 안쪽에 검붉게 말라붙은 와인 얼룩이 보였다. 취해? 내가? 어이없어 내쉰 한숨에 눈앞의 앞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렌터카로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세 곳을 연이어 방문한 오늘, 취해 가는 양미 옆에서 묵묵히 최 기사의 본분을 다한 사람은 나였다. 내가 양미의 가르침대로 ‘오로로로’와 ‘퉤’를 반복하며 맥주잔만 한 타구통을 가득 채우는 동안 양미는 그 많은 시음용 와인을 뱉지도 않고 족족 받아 마셨다. 입술을 조붓하게 오므리고, 입에 머금은 와인을 혀끝으로 ‘오로로로’ 굴리며 그간 부지런히 익힌 지식을 뽐냈다. 2019년에는 작황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2020년산 샤르도네랑 비교하니 미네랄의 질감이 확실히 다르네요. 와인 메이커의 선택이 달라서만은 아니겠고, 역시 수확 직전의 기후의 차이가 가장 크겠죠? 의례적인 미소로 와인을 따라 주던 에듀케이터들이 양미의 남다른 질문에 “굿 퀘스천”, “이그젝틀리” 감탄하며 이전보다 한층 깊이 있는 설명을 이어 갔다. 양미의 열정에 감동해, 시음 프로그램에 없는 귀한 와인을 서비스로 내어준 에듀케이터도 있었다.

   뭐 한편으로 신기하기는 했다. 에듀케이터가 와인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하면 내 혀끝에서도 두엄처럼 비옥한 땅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양미가 정향과 육두구 향이 난다고 하면 정말로 와인에서 정향과 육두구 향이 났으니까. 정향과 육두구 향이 어떻게 다른지는 몰라도, ‘클로브’나 ‘넛맥’ 같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맵싸한 후각적 심상이 단숨에 내 미각을 지배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언어가 만들어 낸 환각, 그러니까 미각이 진짜로 맛을 감각한 게 아닌, 지각이 언어에 속아 넘어간 결과라는 것이 나의 최종 결론이었다.

   “단어들이 아주 입안에서 춤을 추네요. 와인이 아니라요.”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무심한 듯 뼈 있는 농담으로 와인을 향한 그들의 맹신에 손톱만 한 흠집이나마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아주’에 담긴 부정적 뉘앙스를 영어로 어떻게 옮길지 고민하는 사이, 대화는 이미 다른 주제로 넘어가 버렸다.

   어제저녁 해규 형이 일하는 식당에서 인당 125달러짜리 코스 요리를 먹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몇 번 있었다. 비꼬고 싶은 순간마다 적당한 영어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양미에게 물어보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항공권이며 숙박비며 모두 양미가 부담한 마당에 통역까지 부탁하자니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양미의 국어 실력이 못 미덥기도 했다. 사흘 동안 함께 여행하면서 새삼 깨달은 바가 있었다. 평소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양미의 습관이 그녀의 말과 행동에 은연중에 배어난다는 것. 빈약한 어휘와 잘못된 표현으로 말의 정확성을 흐리는 양미의 언어가 이따금 참을 수 없이 거슬린다는 것. 

   양미는 누가 경영학과 출신 아니랄까 봐, 부동산이나 재테크 관련 서적만 열심히 뒤적거렸다. 유행하는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도 가끔 읽었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손이 가지 않는 저자들―띠지에 근사한 프로필 사진을 앞세운 인플루언서 작가나 일타 강사 스타일의 강의로 대중을 호도하는 유명 방송인―의 저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공들여 출판한 숨은 명저의 번역본이나 시대의 성찰을 담은 인문서는 앞부분만 조금 읽다가 싫증 난 에코백처럼 아무 데나 팽개쳐 두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책다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남은 반생을 함께 하고 싶은 여자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 같은 책이 아닌, 다디단 설탕물을 입힌 탕후루 같은 책에만 골몰한다는 것. 일평생 언어를 사고의 근본으로 여기며 살아온 내게 있어 그건 좀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2019년과 2020년산 샤르도네의 질감 차이에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양서(良書)와 악서(惡書)의 차이에는 놀랄 만큼 무감한 양미가 나는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고 실망스럽고 짜증 나고 귀엽고 섹시하고 사랑스럽고···.

   엿장수 마음대로인 양미의 언어는 한편 엿장수의 가위처럼 박력이 넘치기도 해서, 그 뭉툭한 칼날이 일상에 잡초처럼 돋아난 허위를 싹둑싹둑 잘라 내는 모습을 보면 엿판에 엉겨 있던 판엿이 덩이째 떨어져 나가듯 속이 시원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 주변에는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상대의 말을 곱씹으며 그 속내를 집요하게 가늠하는 인간들뿐이니까. 문자 하나를 보낼 때도 혹여 뒤따를지 모를 책임과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십 분 넘게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축축한 인간들뿐이니까. 그에 비하면 양미의 내부는 얼마나 산뜻하고 투명한지.

   양미는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웃을 땐 시원하게 웃고 화를 낼 땐 선명하게 화를 냈다. 일을 도모하는 추진력도 남달라서, 저자 북토크나 도서전 같은 행사를 제외하면 별다른 이벤트가 없는 나의 일상을 작은 축제처럼 만들어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남자친구의 한마디에 곧장 나파 밸리 여행을 계획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양미를 보고 있으면 젖은 양말을 벗어던진 듯 마음이 개운해졌다. 장대비에 안개가 걷히듯 시야가 환히 트였다. 백화점 상품기획팀 소속인 양미가 또래보다 빠르게 승진해 지금처럼 높은 연봉을 받게 된 것도 아마 그런 면모 덕분일 터였다. 

  

   가벼운 호기심 수준이었던 양미의 ‘와인 애호’가 본격적인 양상을 띤 건 올해 초 백화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자기 계발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양미가 와인 아카데미 수업을 수강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에 나는 양미의 그런 학구열이 내심 반가웠다. 사회에 그럭저럭 안착한 삼십 대 중반 직장인이 입문하기에 나쁘지 않은 취미인 듯했고, 가성비 좋고 맛난 술을 찾아 마시는 일이라면 나 역시 꽤 좋아했으니까.

   아카데미에서 첫 강의를 듣고 돌아온 날, 양미는 크게 감복한 기색이었다. 우리가 이제껏 믿어 왔던 와인에 대한 상식은 모두 엉터리였다며 ‘떼루아’니 ‘빈티지’니 하는 전문 용어를 입에 올렸다. (“입안에서 혀끝으로 와인을 ‘오로로로’ 굴려 주는 거야. 공기 반, 와인 반 느낌으로. 그래야 포도가 자란 토양인 떼루아의 개성을 오롯이 감각할 수 있거든.”) 본인 명의의 와이너리를 소유하는 것이 꿈인 중소기업 대표부터 소믈리에가 되고 싶어 월급의 절반을 수업료로 쏟아부은 편의점 알바생까지, 수강생들의 다채로운 면면에도 적잖이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와인을 신의 물방울처럼 받들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양미는 빠르게 물들어 갔다. 기름진 외모의 아저씨들이 나오는 와인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업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와인 박람회와 시음 행사를 열성으로 찾아다녔다. 소매가 5만원이 넘는 와인을 ‘데일리 와인으로 딱’이라며 박스째 구입하는가 하면, 주말에는 전처럼 우리 집으로 놀러 오는 대신 손잡이가 긴 유리잔들이 거꾸로 매달린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한 해에 한 번 함께 떠나는 휴가 장소가 늘 가던 일본이나 동남아가 아닌 샌프란시스코로 정해진 것도 와인을 향한 양미의 뜨거운 학구열이 불러온 결과였다.

   ‘언제 한번 여자 친구랑 놀러 오라’는 해규 형의 빈말 섞인 인사를 전하자마자 양미는 헛바람이 훅 들어서는 그날부터 틈만 나면 샌프란시스코로 휴가를 가자고 졸라댔다. 대학 선배인 해규 형과는 졸업 후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가, 얼마 전 내가 보낸 문자를 계기로 십여 년 만에 간신히 안부를 주고받은 처지였다. 그러니까 양미는 해규 형이 누군지도 몰랐다. 양미에게 중요한 건 해규 형이 뉴욕도 엘에이도 아닌 샌프란시스코,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이너리들이 모여 있는 나파 밸리 인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작정하고 와이너리 투어를 해 보는 거야. 와인도 마시고 생산자들 이야기도 들으면서 현지의 떼루아를 느껴 보는 거지. 간 김에 오빠 선배도 만나고. 짧고 굵게 4박 5일. 어때?”

   여름내 회사 일에 붙들려 휴가도 쓰지 못한 양미의 처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쓰이기는 했다. 그러나 양미가 검색한 항공권 가격을 확인하자 다시금 경고등이 켜졌다. 두 해 전 다니던 회사에서 독립해 1인 출판사를 시작한 이후 나는 돈다운 돈을 손에 쥔 기억이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요즘 약쟁이 천국 됐다는 소문 못 들었어? 거리에 주삿바늘이 막 굴러다닌대.”

   “오빠 아는 선배도 거기 있다며. 살 만하니까 있겠지.”

   “네가 몰라서 그래. 해규 형은 일단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고···.” 

   나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숙소를 검색하며 설레발을 치던 양미는 내 몫의 항공권과 숙박비까지 본인이 지불하겠다며 최후통첩을 시도했다.

   “워렌 버핏이 남긴 유명한 말도 있잖아. 경험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존재란 우리가 경험한 감각들의 총합이다. 아니다. 워렌 버핏이 아니라 조지 소로스가 한 말인가? 아무튼 이번 경험이 오빠 일에도 언젠가 반드시 도움이 될 거야.” 

   양미의 성화에 마음을 꺾은 나는 ‘그렇다면 식대와 와인 시음 비용은 내가 책임지겠다’며 마지막 남은 한 줌 자존심을 챙겼다. 하지만 출발일이 가까워져 오자 돈 문제와 별개로 또 다른 걱정이 앞섰다. 얼마 전 노문과 동기 모임에서 전해 들은 해규 형의 근황 때문이었다.

   형에게 직접 전해 들은 근황은 모임에서 들은 것과 그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했다(“나는 그냥 조그만 한식당에서 서빙 비슷한 일 하고 있어”).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형의 목소리도 전과 다름없이 천진해서,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그 천진함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전화로 여행 소식을 전하는 과정에서 해규 형 특유의 능글맞은 말투를 확인한 순간(“와, 우리 동표가 온다니 너무 기대되는걸?”) 시공간이 쪼그라들면서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이 빛의 속도로 되감겼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나는 두꺼운 전공 서적을 품에 안고 봄날의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해규 형이 나를 발견하고 힘차게 팔을 흔들었다. 

   “동표야, 여기!”

  

*

  

   해규 형은 대학 시절 나를 내 이름 그대로 불러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른 후배들에게는 김성태, 박종민, 오충연, 하면서 나에게만은 동표야, 하고 부득불 간지러운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자주 토라진다는 이유로 모두가 나를 ‘꽁표’라고 부를 때도 그렇듯 다정하게 이름을 호명해 혈기 방장한 20대 청년인 나를 아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던 사람. 동기들과 까불거리며 교정을 걷다가도 뒤에서 해규 형이 “동표야” 부르면 “네, 형” 돌아보는 내 얼굴도 청년 시절의 톨스토이처럼 진지해졌다. 양미는 모르는 나의 숭고한 문학청년 시기랄까.

   인문대 자유전공학부로 입학한 형과 나 사이에는 각자의 학번에서 ‘자발적으로’ 노문과를 지원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공 선택을 앞두고 한두 학기씩 결정을 미루다가 그동안 올린 학점을 바탕으로 취업에 유리한 영문과나 중문과에 1순위로 지원하는 동기들과 달리 우리는 1학년 과정을 마치자마자 망설임 없이 노문과로 직행한, 모두가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경쟁 사회의 출발점에서 제 발로 가시밭길을 택한 순도 높은 문학도들이었다. 

   다만 우리의 순도에는 차이가 있어서, 내가 소비자의 취향에 적당히 구미를 맞춘 백금 반지라면 해규 형은 살짝만 깨물어도 잇자국이 남는 순금 반지에 가까웠다. 인간 본성을 파고드는 체호프의 희곡과 스타크래프트의 정교한 유닛 컨트롤과 오아시스의 감성적인 멜로디를 허들 없이 넘나들며 동기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나와 달리, 군대를 다녀와 나보다 세 살 위 복학생이었던 형은 오로지 문학에만 천착하는 외골수 기질로 모두를 한 발 물러서게 만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작품 이야기를 꺼내며 세계와 인간을 향해 도저한 질문을 던지는 해규 형을 동기들은 재미있어하는 동시에 부담스러워했고, 겉으로는 존경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도망 다니기 바빴다. 그렇게 하나둘 줄행랑을 친 손해규라는 광야에서 끝까지 의리를 지킨 사람이 바로 나, 최동표였다.

   해규 형의 주요 토론 무대는 문과대 건물에서 중앙도서관으로 내려오는 길목,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본뜬 청동상이 있는 일명 ‘로댕 동산’이었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벤치가 곳곳에 놓여 있어, 애매하게 뜬 공강 시간에 학생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곳이었다. 빗물에 부식되어 암녹색으로 변한 그 청동상을 동기들은 ‘주먹 먹는 사람’이라 불렀다. 턱을 괴어야 할 남자의 손등이 입술을 짓누르고 있어 마치 주먹을 입에 쑤셔 넣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처럼 대상에게 조금이라도 우스운 기미가 보이면 곧장 별명을 붙이고 조롱하는 동기들이 해규 형 같은 희대의 캐릭터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당시 정신 연령이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던 녀석들은 별다른 고민 없이 직관적으로 형의 별명을 정했다. 요컨대 ‘해광이 형’은 로댕 동산에서 같은 과 학우들을 붙들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해규 형의 모습이 마치 ‘광인일기’에 나오는 포프리시친, 즉 ‘광인’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붙은, 형만 모르는 형의 별명이었다. 

   로댕 동산에서 해규 형과 대화 중인 나를 발견한 동기들은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처럼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는 시늉을 하며 “꽁표 자식, 해광이 형한테 또 걸렸네” 하고 놀려댔다. 그럴 때면 나는 입 모양으로 살려 줘, 속삭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화를 이어 가곤 했다. 순진한 놈들 같으니. 녀석들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형과 내가 문학이라는 심연으로 자진해서 추락한 사람들이라는 것 말이다. 그랬다. 사실 그때 나는 해규 형과의 대화를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형과 대화할 때면 굳어 있던 뇌의 근육이 활발히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여러 번 읽어 익숙한 시나 소설도 형의 해석과 시선이 더해지면 새로운 의미가 발생했다. 졸업 후 출판사에 입사해 이상이 점차 빛을 잃어 가던 시기에도 한동안 형의 전화를 피하지 않은 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

   

   “오빠. 그분 한식당에서 일하신다고 하지 않았어?” 

   양미가 두부 한 모 크기로 돌출된 간판을 고갯짓하며 물었다. 엊그제 저녁, 장시간 비행으로 피로한 몸을 이끌고 해규 형이 알려 준 식당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정육면체 모양의 간판 귀퉁이에는 ‘JANGO’이라는 이름이 손톱만 하게―체감상 한글 프로그램 기준 8포인트 정도 크기로―적혀 있었다. “여기 와인 리스트 끝장이다. 귀한 오베르가 빈티지별로 있네.” 양미가 식당 입구에 진열된 빈 와인 병들을 훑으며 감탄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서는데, 엄정화의 〈배반의 장미〉가 쿵작쿵작 귀를 때렸다. 자리마다 청사초롱을 밝힌 실내는 웃고 떠들며 잔을 부딪치는 서양인들로 시끌벅적했다. 천장에는 한옥의 대들보를 흉내 낸 목조 기둥이, 벽면 한쪽에는 ‘장맛은 손맛’이라고 휘갈긴 한글 캘리그래피 액자가 걸려 있었다. 직원의 뒤를 따르던 양미가 나를 향해 고개 돌리며 대박, 하고 속삭였다. 

   우리는 식당 맨 안쪽 좌석에 앉았다. 미니어처로 제작한 장독대 하나가 테이블 가운데 장식물처럼 놓인 자리였다. 양미가 눈짓으로 옆자리를 슬쩍 가리켰다. 드레스와 장신구로 한껏 멋을 낸 백인 여자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앞에 두고 핸드폰 각도를 바꿔 가며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거 뚝배기 계란찜 아니야? 고깃집에서 서비스로 나오는 거.” 

   “내 말이. 오빠 여기 너무 재밌다. 요즘 미국에서 한국이 난리라더니 진짠가 봐.”

   조금 전까지 여독에 지쳐 있던 양미가 갑자기 흥이 나서는,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나를 택했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냥 스칠 인연, 한 번도 원, 한 적 없어···.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와락 붙들었다. “동표야!” 

   “어우, 깜짝이야! 형!”

   해규 형이 한 걸음 물러서며 씩 웃었다. 

   “뒤통수만 봐도 알겠더라. 녀석, 어쩜 하나도 안 변했니?” 

   나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형을 얼싸안았다. 물개처럼 미끈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가느다란 턱수염까지 기른 형을 보니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제수씨가 미인이시네. 저 손해규라고, 동표 대학 선배예요.” 양미에게 악수를 청하는 형의 걷은 소매 밖으로, 핏줄 돋은 근육질의 팔뚝과 번쩍거리는 금색 롤렉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제수씨는 아닌데.” 부끄러운 듯 몸을 꼰 양미가 “살짝 스티븐 연 닮으셨어요.” 하며 형의 손을 잡았다. 스티븐 연을 닮은 형이 팔을 들어 손가락을 튕기자, 종업원 한 명이 재빨리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저녁 메뉴는 어차피 코스 하나니까 고민할 거 없고, 술은 시키지 마. 내가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으로 그때그때 맞춰서 내줄 테니까.”

   이윽고 목과 팔에 타투를 새긴 종업원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양송이버섯 두 송이가 한국인들이 고깃집에서 구워 먹는 형태 그대로 갓 안쪽에 물을 머금고 나왔을 땐 뜻밖에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기분이었다. ‘10년 묵은 씨간장 드레싱을 곁들인 도토리묵 타르타르’나 코스 중간에 입가심으로 나온 ‘쌈장 마카롱’도 그럭저럭 유쾌했다. 종업원이 한입 분량의 미니 핫도그 위에 고추장 파우더를 톡 뿌려 주었을 땐 별로 웃기지 않았다. 달걀을 닮은 볼 형태의 접시에 나온 ‘된장 거품을 올린 채끝살’은 심지어 남성용 소변기에 고인 가래침을 연상케 해서, 한식의 재해석이고 뭐고 그저 속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기껏 미국까지 왔는데 첫날부터 한식을 먹게 해서 미안하네. 이건 서비스.”

   해규 형이 둥글납작한 캔 두 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장독대 모양이 찍힌 동그란 달고나가 들어 있었다. “이거 그거네. 오징어 게임.” 흥미롭게 들여다보던 양미가 과감하게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뽑기 맛이 되게 고급지다. 대체 뭐가 들어간 거지?” 

   미간을 모으고 맛에 집중하던 양미가 “생강? 홍삼? 막 이래.” 하고 깔깔 웃었다. “뭐래. 거기서 홍삼이 왜 나와.” 나는 해규 형의 표정을 살피며 가볍게 핀잔했다. 양미의 말투가 형에게 어떻게 들릴지 신경 쓰였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동표야, 이따 내가 달고나 몇 개 더 챙겨 줄 테니 계산할 때 꼭 얘기해.”

   “아냐, 형. 그러지 마. 지금도 충분히 배불러.” 

   딱밤을 맞은 양 골이 띵 울렸다. 계산할 때?

   “오늘 내주신 와인들, 하나 같이 다 맛있었어요.” 

   양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찬했다. 

   “특히 마지막에 나온 쥐라 와인이요. 채끝살이랑 궁합이 진짜 대박이던데요.” 

   “쟤는 뭐만 하면 만날 대박이래.”

   나의 타박에 양미가 피, 하고 작게 삐죽거렸다. 해규 형이 그런 우리를 귀여운 조카들 보듯 흐뭇하게 내려다봤다.

   “형, 고마워. 덕분에 나도 좋은 경험 했지 뭐야. 서비스가 너무 대단해서 무슨 미쉐린 레스토랑이라도 온 줄 알았네. 하하.”

   “아, 입구에 붙은 거 못 봤구나. 실은 올해 별 하나 받았어.”

   “아···.” 

   형을 올려다보는 양미의 눈에 존경심이 어렸다. 미쉐린 레스토랑이면 음식값이 대체 얼마인 거지?

   “그래, 내일은 뭐 할 계획이니?” 

   해규 형이 테이블을 정리하며 다감하게 물었다.

   “아침 일찍 렌터카 픽업해서 나파 밸리에 있는 와이너리 몇 군데 돌아보려고.” 

   “그렇구나. 시음 예약은 했고?”   “응.”

   형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수염을 쓸었다.

   “왜? 더 좋은 데 있어?” 

   “이왕 나파까지 간 김에 러시안 리버 밸리도 들르면 좋을 것 같아서. 우리 식당이랑 거래하는 와이너리가 그 지역에 있거든. 원하면 내가 예약 도와줄 수 있는데.”

   “러시안 리버 밸리? 거기 요새 제일 뜨는 피노 누아 산지인데?”

   양미의 귀가 먹잇감을 발견한 길고양이처럼 쫑긋거렸다. 

   “역시 제수씨는 아시는구나. 나파 밸리에서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거든요. 최근 기후변화 때문에 그 지역에서 나는 부르고뉴 품종의 산도가 오히려 전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아쉽네.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서둘러 형의 말을 끊었다. 

   “우리는 내일 나파 밸리만 돌아보기도 바쁠 것 같거든. 양미가 와이너리 시음을 세 타임이나 예약해 놔서.”

   “아니지, 오빠. 내일모레 아침 일찍 갔다가 빨리 돌아오면 되지. 우리 그날 일정 뭐 없잖아.”

   양미가 웃으며 테이블 아래로 내 발을 툭 건드렸다. 나는 입마개를 찬 개처럼 말없이 눈알만 굴렸다.

   “내일모레면 나 오프인데 마침 잘됐네. 그럼 그날 너희 와이너리 다녀와서 오후에 다 같이 볼까? 내가 저녁 살게. 두 사람만 괜찮으면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도 소개해주고. 동표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 있거든.”

   “신기하다. 저 미술관 좋아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양미가 물색없이 재잘거렸다. 

   “그래, 그럼 내일모레 봐. 어디가 좋은지는 형이 더 잘 알겠지 뭐. 나 잠깐 화장실 좀.”

   더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턱수염을 매만지며 부르고뉴 품종 운운하는 손해규라니, 낙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가 있지? 

   잠시 후 자리로 돌아온 내게 양미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아까 해규 오빠 명찰 봤어? 매니징 디렉터래. 대박.” 

                            

*

  

   해규 형의 근황을 접한 건 몇 달 전 학과 동기 모임에서였다. 

   동기들은 늘 가던 종로의 소 갈빗집 대신 광화문에 있는 프리미엄 한우 전문점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며 소주 대신 와인을 주문한 녀석들은 종업원이 잘게 썰어 준 고기를 받아먹으며 운동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등산, 골프, 러닝, 테니스 등 신기하게 저마다 몰두하고 있는 운동이 하나씩 있었다. 차 없이 걸어 다니는 생활 자체를 운동으로 갈음하는 나로서는 그다지 관심이 기울지 않는 주제였다. 딱히 보탤 말이 없어 그저 듣고 있는데, 요즘 들어 사는 게 부쩍 허무하네 뭐네 하소연하던 옆자리 동기가 내 어깨에 팔을 올리며 장난 투로 말했다. 

   “가만 보면 우리 중에 꽁표가 제일 성공했다니까? 결혼 안 했지, 애인 예쁘지,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지···.” 

   지켜보던 동기들이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쳤다. “부러우면 너도 해. 하고 싶은 일.” 나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녀석들이 “저 자식 또 꽁해진 거 봐” 하고 낄낄댔다. 고작 골프채 따위나 휘두르며 중년의 문턱에 찾아온 허무를 다스리는 녀석들의 처지가 딱하고 한심했다. 솔직히 당연한 귀결 아닌가 싶었다. 돈이 최고랍시고 눈앞의 성취에만 매달리면 결국 그렇게 되는 거야. 매 순간 타협하면서 세간의 기준에 휘둘리며 살면 그렇듯 허망해지는 거야. 그게 주식이니 코인이니 집적거리며 요행만 바라 온 너희 삶에 마땅한 결말인 거야. 빠르게 잔을 비우는 동기들을 노려보며 속으로 술값을 셈하고 있는데, 옆자리 동기가 자기도 어디서 건너 들었다면서 문득 해규 형 이야기를 꺼냈다. 

   “해광이 형 말이야. 미국에서 노가다 뛰면서 산다더라.”

   “해규 형이 미국?”

   “응.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삿짐 나르는 일 한댔나? 암튼 존나 개고생하면서 산다던데. 트럭 운전한다는 얘기도 있고.” 

   “그렇구나. 이민 갔나 보네.”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미국에서 이삿짐을 나르고 트럭을 운전하는 해규 형이라니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아서였다.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다른 동기들이 “샌프란시스코? 거기 지금 완전 고담 시티잖아”라며 저마다 한마디씩 얹었다. “좀비 거리 말하는 거지? 나도 유튜브에서 봤어.”, “설마 해광이 형도 마약하나?” 

   그사이 관련 영상을 검색한 옆자리 동기가 화면이 뜬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마약 부작용으로 허리가 굽고 팔다리가 야릇하게 꺾인 노숙자들이 좀비처럼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멀리서 당겨 찍은 영상이었다. “꽁표 너 해광이 형이랑 꽤 친하지 않았냐?” 옆자리 동기가 타박하듯 물었다. “친하긴. 연락 안 한 지 십 년도 넘었는데.” 나는 와인을 홀짝이며 한 손으로 카톡 창을 열었다. 형이랑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게 언제였더라.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한 해규 형은 내가 취업한 후에도 꾸준히 전화를 걸어 왔다. 저녁 일곱 시나 여덟 시쯤, 주로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였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시작된 통화는 집에 도착한 후에도 한 시간 넘게 이어져, 휴대폰의 뒷면이 뜨겁게 달궈질 때쯤 끝나곤 했다. 로댕 동산에서 그랬듯 형의 질문에 내가 답하면 그 답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토론이 벌어지는 식이었다. “요즘 『드리나 강의 다리』를 다시 읽고 있는데 말이야. 문득 다리의 시점이라는 형식적 주제가 역사적 비극이라는 내용적 주제를 지나치게 압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동표 네 생각은 어때?”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문학 편집자들조차 읽지 않는 오래된 슬라브어권 소설을 재독하며 관념적인 사고 실험에 몰두하는 형에게 진력이 나기 시작한 것은.

   나는 핏기가 도는 고기를 삼키며, 십여 년 전 형이 던진 물음들이 응답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대화창을 훑었다. 스크롤을 내리던 손이 대화창 끝에 멈춰 섰다. 이런 문자를 받은 적이 있었나?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형의 마지막 문자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앞선 문자와 며칠 간격을 두고 온 그 문자는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로 끝나 있었다. 

   ―동표야, 문학은 가짜야. 


*

   

   사건은 결국 러시안 리버 밸리에서 터졌다. 정오 무렵, 해규 형이 알려 준 와이너리에서 시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형과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으므로 나는 근처에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실은 운전하는 길에 눈여겨봐 둔 곳이 있었다. 식당 앞에 낡은 픽업트럭들이 주차되어 있어, 보자마자 현지인이 가는 맛집이라는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양미는 한사코 식사를 거부했다. 이왕 멀리까지 온 김에 근처에 있는 다른 와이너리도 들러 보고 싶다는 거였다.

   “배부르면 미각이 둔해진단 말이야. 와인은 빈속에 마셔야 향을 섬세하게 감각할 수 있다고.”

   아무리 양미가 주도한 여행이라지만 번번이 의견을 묵살되자 자존심이 상했다. 고대했던 셋째 날 일정마저 어그러진 판에 최소한 밥 한 끼 정도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먹고 싶었다.

   “와이너리를 또 가자고? 예약도 안 했는데?”

   “시음 안 되면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오면 되지.”

   “···어제 나파 밸리에서도 하루 종일 와인만 마셨잖아. 오늘 점심 먹고 시티 라이트 가기로 한 거 잊었어? 아침에 분명히 말했잖아, 나도 미국까지 온 김에 시장 조사 좀 하고 싶다고. 여행 와서 내가 가고 싶다고 한 곳은 그 서점 하나인데, 그것도 못 들어 줘?”

   “에이, 왜 정색을 하고 그래.” 

   양미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팔짱을 꼈다. 

   “우리가 언제 또 이런데 와 보겠어. 응? 오빠, 나 정말 기대하고 왔단 말이야. 와이너리 투어는 책이나 강의로 배우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경험···.” 

   “시티 라이트도 마찬가지야. 샌프란시스코에만 있는 특별한 서점이라고. 히피 문화를 선도한 잭 케루악과 앨런 긴스버그가 드나들던 전설적인···.” 

   “와, 그렇게 특별한 서점이면 처음부터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겠다. 그치? 그럼 서점은 내일 가는 게 좋겠네. 그래, 내일은 오빠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서점도 가고, 오빠가 궁금해했던 대게 요리도 먹고.” 

   “너 말 이상하게 한다? 왜 내가 계획을 틀어? 애초에 변덕 부린 건 넌데. 어제도 와인, 오늘도 와인. 이게 출장이지 여행이야?”

   모양 빠지는 나의 처지를 생각하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와이너리 시음 비용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이유였지만 구차하게 돈 핑계를 대고 싶진 않았다.

   “이번 한 번만 오빠가 양보하면 안 돼? 응?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오빠 보기에는 다 거기서 거기인지 모르겠지만 와이너리마다 개성이 완전 틀리단 말이야.”

   “···말 좀 똑바로 해.” 

   “응?”

   “‘틀리다’가 아니고 ‘다르다’야. 매번 고쳐 줘도 모르냐? 초등학생도 아는 걸.” 

   팔짱을 푼 양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최동표. 어제부터 왜 그래?”

   “뭐가.”

   “자꾸 틱틱거리잖아.” 

   “내가 언제.”

   “언제?”

   숨을 크게 들이쉰 양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더니 “그래, 멀리 갈 것도 없지” 하고 참았던 말을 쏟아 냈다. 

   “아까 와인 시음할 때 오빠 태도 완전 개판이었던 거, 오빠도 인정하지? 에듀케이터가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옆에서 실실 비웃질 않나, 무례하게 보란 듯이 가래 돋우는 소리를 내질 않나. 오빠가 와인 뱉을 때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본 거 알아?”

   “옆 테이블?” 

   나는 실소를 참으며 되물었다.

   “내가 아니라 널 쳐다봤겠지. 누가 저런 헛소리를 하나 궁금해서. ‘오오, 와인에서 유칼립투스의 허브 뉘앙스가 느껴지네요.’”

   양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로 유칼립투스 향이 났다고! 에듀케이터가 나한테 ‘이그젝틀리’라고 칭찬한 거 못 들었어?”

   “너 유칼립투스 먹어는 봤냐?”

   “내가 코알라냐? 그걸 먹게?” 

   까무러치듯 반문한 양미가 미국인처럼 손가락 따옴표로 단어를 강조하며 덧붙였다. 

   “나는 표준화된 와인의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야. 그래야 내가 와인에서 받은 ‘느낌’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

   “표준화된 와인 언어? 그거야말로 고도의 사기 같은데. 맛이야 어차피 주관적인 거고, 뇌가 일으킨 환각을 자기들 마음대로 언어화한 것뿐일 테니까.”

   “와, 돌겠네.”

   양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돼? 입장 바꿔서, 내가 오빠 좋아하는 책 가지고 비아냥거리면 오빤 기분 어떨 거 같아? 독서니 뭐니 알고 보면 다 허세 아니냐고. 책 안 읽으면 큰일날 것처럼 구는 꼰대들 아주 우스워 죽겠다고.”

   나는 참았던 실소를 터트렸다.

   “허양미 씨, 예시를 댈 거면 제대로 대세요. 전혀 와닿지가 않잖아. 술이랑 책이랑 같냐?” 

   나를 보는 양미의 눈이 맹수처럼 가늘어졌다. 

   “···꽁표 맞네.”

   “뭐라고?”

   나도 모르게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얘가 그 별명을 어떻게 알았지? 의아해하는데 문득 어제 식당 화장실에서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본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해규 형과 양미가 뭐가 그리 웃긴지 몸을 들썩이며 멀리서 나를 곁눈질하던 장면이. 이 형이 돌았나.

   “네가 형한테 무슨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치미는 화를 누르며 말했다. 

   “그 형, 나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골수 문청 또라이야. 네가 우스워하는 지적 허세의 극한을 달리는 인간이라고. 오죽하면 학교 다닐 때 별명이 해광이었다니까. 해규랑 광인 합쳐서.”

   “광인? 멋있네. 그렇게 한 가지에 제대로 미치니까 성공한 거지.”

   “성공?”

   “미쉐린 레스토랑 총지배인 정도면 성공한 거 아니야?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그 말이 나의 뇌관을 건드렸다. 어제저녁, 장고인지 장독대인지에서 지불한 음식값이 떠올라서였다. “지배인님이 와인값은 받지 말라고 하셔서요.” 영수증에 적힌 가격을 보고 입이 딱 벌어진 내 표정을 잘못 해석한 종업원이 웃으며 내게 영어로 속삭였다. 한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그처럼 큰돈을 뜯어내다니, 정말이지 도둑놈이 따로 없었다.

   “그거 알아? 네가 생각이 그렇게 얄팍하니까.” 

   나는 일부러 한숨 고른 뒤 또박또박 이어 말했다. 

   “네가 하는 말도 그만큼 깊이가 없는 거야.”

   뭐래. 양미가 파리를 쫓듯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나는 오빠랑 떼루아 자체가 달라.”

  

*

  

   추위로 곱은 손을 움직여 구글 맵 링크를 확인했다. 해규 형과 만나기로 한 미술관은 우리가 묵는 숙소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있었다. 문제는 그 길이 온통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맞바람을 맞으며 비탈진 언덕을 오르던 양미가 “어떻게 캘리포니아가 한국보다 더 춥지?” 구시렁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거 입을래?” 내가 웃옷을 벗어 주려 하자 양미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떨어져 걷는 양미의 굳은 얼굴에서 ‘나 아직 화 안 풀렸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라는 구체적인 메시지가 읽혔다. 이런 기분으로 예술 작품 감상이라니 내키지 않았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딜 가든 너무 춥고, 너무 비싸고, 너무 가파르고··· 나는 이 도시가 벌써 지긋지긋했다.

   샌프란시스코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끝 공원에 다다르자, 고대 로마의 궁전처럼 웅장한 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과 만나기로 한 매표소 앞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뜻밖의 추위에 놀란 듯, 저마다 얇은 옷 위에 바람막이며 간절기용 머플러 따위를 급히 두른 모습이었다. 양미와 서먹하게 거리를 두고 그 풍경을 멀뚱히 보고 있는데, 입구 저편에서 러닝복 차림의 해규 형이 우리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 가슴팍에 배트맨의 표식 같은 땀자국이 진하게 번져 있었다. 

   “형 안 추워?”

   “이렇게라도 안 하면··· 하··· 운동할 시간이··· 하아··· 없어서···.” 

   달려온 형이 무릎을 짚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민소매 밖으로 드러난 형의 단단한 팔뚝에 3초 정도 머무른 양미의 시선이 뭔가에 붙들리듯 내게로 옮겨 왔다. 

   “동표 너도 시간 나면··· 하··· 한번 뛰어 봐··· 하아··· 내가 좋은 코스 알려 줄게··· 하아··· 샌프란시스코만큼··· 하··· 러닝하기 좋은 도시가··· 하아··· 없거든···.” 

   헐떡이던 형이 갑자기 훅훅 입소리를 내며 제자리 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라토너처럼 몸을 빙글 돌려 매표소 방향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우리 몫의 티켓을 들고 돌아온 형이 불쑥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사랑하는 우리 동표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게” 하고 웃었다. “사랑? 그 정도예요?” 양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르셨구나. 한때 동표가 제 소울메이트였어요.”

   “아우, 징그럽게 왜 이래.”

   진저리 치는 내 모습에 양미가 표정을 풀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미술관은 예상대로 규모가 상당해서, 초입에 전시된 흉상과 고대의 유물만 훑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고풍스러운 도자기와 가구가 전시된 방을 지나자 이번에는 성직자, 군주, 귀족 등 중세 유럽의 권력자들을 그린 초상화가 줄줄이 이어졌다. 하나 같이 아름답고 숭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들의 자태에 무심히 눈길을 던지는 동안, 얼었던 몸이 차츰 녹아 정신이 나른해졌다. 전후 맥락을 알지 못하는 미술품 감상에 지루함과 피로가 몰려왔다. 소울메이트? 그렇게 각별한 동생이 찾아왔으면 밥이나 크게 쏠 것이지. 나는 투덜거리며 전시장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급격한 온도 변화 때문인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양미와 해규 형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다음 전시장으로 향했다. 주요 소장품이라는 로댕의 조각과 모네의 수련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폐장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렀다.

   미술관을 나섰을 때는 해가 뉘엿이 기울 즈음이었다. 입구 앞에 우뚝 솟은 거대한 조각상 앞에서 해규 형과 양미가 서로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오는 길에 무심코 지나친 조각상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지뢰를 밟은 군인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불안한 자세로 조각상의 포즈를 흉내 내던 양미가 이내 능숙하게 중심을 잡았다. 

   “제수씨 예쁘게 나왔다.” 다가온 해규 형이 핸드폰에 찍힌 양미의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설마 보여주고 싶다는 작품이 이거였어? 나는 답을 구하듯 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형은 추억에 잠긴 얼굴로 석양에 물든 조각상을 말없이 올려다볼 뿐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옆으로 넘기자 양미가 찍은 형의 사진이 나왔다. 양미와 마찬가지로 조각상의 포즈를 따라 한 사진이었다. 안정적인 자세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양미와 달리, 형은 주먹을 입에 물고 장난스럽게 인상을 구기는 데 집중한 탓에 몸이 한쪽으로 불안정하게 기울어 있었다. 

  

*

  

   우리는 다 같이 불콰한 얼굴로 식당 문을 나섰다. 남은 음식이 아깝다며 주문한 마지막 와인이 화근이었다. 점심 내내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깨작거린 탓에 몹시 배가 고팠던 양미와 나는 4인용으로 나온 대게 튀김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것도 모자라 사이드로 나온 조개 수프까지 말끔히 비운 우리를 본 해규 형이 ‘오늘은 내가 쏠 테니 마음껏 먹으라’며 엄청난 양의 해산물 플래터를 추가로 주문한 거였다.

   2차 하기 좋은 술집이 근처에 있다며 형이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잠시 후 UFO를 닮은 기계를 지붕에 얹은 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모양새가 하도 괴상해서, 그러잖아도 시내에서 마주칠 때마다 정체가 궁금했던 차였다. 

   “실리콘 밸리의 중심, 샌프란시스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조수석에 탄 해규 형이 뒤에 앉은 우리를 돌아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양미와 나는 엘에이와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만 탈 수 있다는 자율주행 택시의 내부를 얼떨떨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운전자 없는 차에 시동이 걸리자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자, 출발할게요.” 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가 스르륵 앞으로 나아갔다. 대박. 쩐다. 앞으로 몸을 숙인 양미가 저절로 움직이는 운전대를 동영상으로 찍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횡단보도 신호를 감지한 택시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순간, 노숙자로 보이는 남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우리가 탄 택시의 보닛에 몸을 부딪쳤다. 자율주행 택시의 허점을 노려 고의로 사고를 낼 심산이었던 듯했다. 다행히 택시의 반응 속도는 사람보다 빨랐다. 자신보다 한발 앞서 급제동한 차를 확인한 남자가 멋쩍은 듯 얼굴을 긁적이더니, 휘적휘적 길을 건너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개무섭다. 마약 중독자인가?” 

   내 말에 양미가 겁에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오빠. 여기 혹시 텐더로인 거리 아니야? 유튜버들이 절대 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텐더로인은 전부터 그런 동네였어요.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거예요.”

   단호하게 말을 자른 형이 뜻밖에 서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급식 봉사 하면서 만나 봤는데요. 저분들, 알고 보면 사회에서 내몰린 가엾은 사람들이에요. 그저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죠.”

   “그렇지만 위험한 지역인 건 맞잖아? 유튜브 보니까 심각하긴 하던데.”

   나는 소심하게 반문했다. 

   “유튜브? 인마, 요즘은 뉴스도 믿을 게 못 돼. 이런 때일수록 사태의 행간을 읽어야지. 너는 문학 했다는 애가···.”

   허탈해하며 말을 삼킨 형이 갑자기 마이크를 든 시민처럼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텐더로인에 새로 유입된 중독자들 중 상당수가 팬데믹 때 정리해고 당한 이주민들이야. 재택근무가 보편화되면서 실리콘 밸리 사람들이 임대료가 낮은 지역으로 옮겨 가니까, 빈 도심을 노숙자들이 채우면서 마약 문제가 불거진 거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기는커녕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고 있어. 좌파 정부의 지나친 관용이 지금의 지옥을 만들었네 어쩌네 하면서. 한심한 새끼들.”

   갑자기 웬 급발진? 양미가 입 모양으로 소곤거렸다.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고였다.

   “이야, 해광이 형 아직 안 죽었네. 이제야 좀 내가 아는 형 같네.”

   간신히 던진 내 농담에도 형은 여전히 잠자코 앉아 있었다. 시내에 들어선 택시가 부드럽게 커브를 돌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운전대를 보고 반사적으로 창문 위 손잡이를 붙드는데 문득, 살면서 형을 별명으로 부른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규 형이 2차로 제안한 장소는 ‘JANGO’와 가까운 이민자 거리에 있었다. 지역 축구팀의 로고가 새겨진 깃발과 머플러 등으로 내부를 장식한 시끌벅적한 스포츠 펍이었다. “헤이, 션!” 해규 형을 발견한 바텐더가 얼굴 가득 주름진 미소를 지으며 바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주먹을 위아래로 맞부딪치는 두 남자의 손 인사가 매시의 드리블처럼 현란했다. 

   “친한 형님인가 봐?”

   “응. 라울이라고, 나 처음 미국 와서 일자리 구할 때 큰 도움 주신 분.” 

   스크린과 가까운 스탠딩 좌석으로 우리를 안내한 해규 형이 “근데 형님 아니고 동생” 하고 웃었다. 에? 양미와 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인디언처럼 눈 밑에 깊은 주름이 팬 라울의 얼굴은 백번 양보해서 봐도 우리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였다. “손님이 많네. 오늘 경기 있는 날인가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남미 축구 리그를 틀어주는 술집은 이곳뿐이거든.” 해규 형이 캔맥주 세 개와 나초 한 접시를 주문하며 말했다. 

   천장에 걸린 대형 스크린 위로 이제 막 골을 넣은 공격수가 동료의 유니폼을 잡아당기며 환호했다. 응원하던 팀이 득점 기회를 놓치자 앞쪽 테이블에서 탄식과 야유가 쏟아졌다. 아까부터 그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하던 양미가 캔맥주를 들고 스크린 앞으로 다가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 양미를 지켜보던 해규 형이 맥주를 따며 말했다.

   “제수씨 참 매력 있다. 호기심도 많고 겁도 없고. 나도 저런 성격이었으면 이민 와서 훨씬 덜 고생했을 텐데.”

   순간 동창 모임에서 들은 형의 근황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이삿짐을 나르고 트럭 운전을 한다는.

   “형은 어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 생각을 했어?”

   무심한 척, 맥주를 따며 벼르던 질문을 던졌다. “샌프란시스코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형이 “왤까―요” 하고 말을 늘이더니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왜 이래, 취했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책이 든 에코백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이반 부닌의 책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그의 유명한 단편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를 표제작으로 내건 소설집으로, 패브릭으로 감싼 양장 제본의 까슬한 촉감이 마음에 들어 해규 형에게 줄 선물로 특별히 챙긴 책이었다. 

   그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나는 대학 시절 우리가 한 학기 동안 함께 번역했던 그 짧은 소설이 의식 깊은 곳에서 형을 이 도시로 이끌었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동창 모임에서 형의 근황을 들었을 때부터, 형의 결정에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심오한 문학적 동기가 숨어 있을 거라고 내심 확신하던 터였다. 그 시절 해규 형이 가장 좋아했던 작가가 바로 부닌이었으니까. 모두가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들의 작품을 맹종할 때 형은 이상하리만치 부닌의 소설을 최고로 여겼으니까. 부닌처럼 인간의 허위와 오만이 현대 사회에 불러올 위기를 날카롭게 예견한 작가는 어디에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으니까.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의 신사가 왜 죽었더라? 

   “그러니까 너는 계속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는 거네?”

   형이 나초를 아작거리며 물었다. 

   “그런 셈이지. 직원이 나 하나뿐이긴 하지만.”

   나는 테이블에 상체를 기대며 말했다. 서서 마시다 보니 슬슬 다리가 저려 왔다.

   “동표야. 그거 아니? 내 주변에 전공 살려 일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나는 책 한 권 다 읽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사는 게 너무 바빠.”

   캔 하나를 단숨에 비운 형이 라울에게 손을 흔들며 맥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사는 건 다 바쁘지.”

   나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겨우 맥주 한 캔을 비웠을 뿐인데, 저녁에 마신 와인의 취기가 겹쳐 시야가 흐릿했다. 

   “다 마음먹기 나름이지. 한가해서 책 읽는 사람이 어디 있어. 형은 오늘 한가해서 러닝 했어?”

   어둑한 조명 아래 나를 보는 형의 눈동자가 잘 닦은 구슬처럼 반들거렸다. 

   “동표 넌 참 한결같다. 하나도 안 변했어.” 

   형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턱수염에 달라붙은 나초 가루를 손등으로 훔치더니 갑자기 스크린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 “저 자식들 언제까지 헛발질만 할 거야? 제발 생각 좀 하고 차라. 엉? 띵크, 가이즈! 띵크!”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라울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빤히 바라보던 형이 내 손에 들린 나초 조각을 거칠게 낚아챘다. 

   “인마, 소스를 잘 묻히려면 거친 면을 이용해야지.” 

   “거친 면?”

   형을 따라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나초의 표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매끄러운 안쪽 면과 달리 과자의 바깥 면에 미세한 홈이 여러 개 패어 있었다. 나는 취기에 무릎이 꺾여 테이블 끝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기울어 에코백 안에 있던 책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부닌? 이게 한국어로 번역이 됐어?” 형이 흥미를 보이며 책을 집어 들었다. 

   “난 이제 부닌 못 읽겠더라. 단편은 특히 더.”

   형이 과자 기름이 묻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꼬부라진 혀로 말했다. 

   “이 표제작만 봐도 그래. 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신랄한 비판? 부와 향락에 취한 신사의 허무한 죽음? 동표야, 생각해 봐. 지금 시각으로 보면 너무 단순하고 속 편한 결말 아니니?”

   새로 딴 맥주를 꿀꺽꿀꺽 넘긴 형이 캔의 밑면을 테이블 위에 대고 비스듬히 뉘었다. 

   “노벨상까지 받은 작가인데 평가가 박하네.”

   나는 형을 로댕 동산으로 끌고 가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샌프란시스코의 신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허위와 오만을 누구보다 일찍 경고한 작품이야. 지금도 유효할 만큼 현대적인 주제 의식을 다룬 단편이라고. 잊었어? 이거 형이 한 말인데.” 

   쥐고 있던 캔에서 한 손을 신중하게 떨어트린 형이 “허―위?” 하고 다시 조롱하듯 말을 늘였다. “오―만?” 형이 한 손을 마저 떼자, 피사의 사탑처럼 기운 캔이 테이블 위에 섰다. 형이 캔을 손끝으로 톡 건드리자 캔이 모서리를 축으로 느릿느릿 회전했다. 

   “오, 대박.” 

   테이블로 걸어오던 양미가 그 모습을 보고 짝짝 박수를 쳤다. 뭐야. 사람 놀리나. 나는 새 맥주를 딴 뒤 벌컥 들이켰다. 오늘같이 추운 날 팔뚝이 다 드러나는 차림으로 나타난 것도 그렇고 매사가 은근히 자랑질인 게, 못 본 사이 사람이 좀 뒤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자들이 버글거리는 펍으로 우리를 데려온 것도, 구태여 자율주행 택시를 부른 것도, 거리의 중독자들을 옹호하며 이 도시에 따라붙은 오명을 부정하는 것도, 모두 타향살이에 찌든 형의 자격지심을 보여 주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미국 살아서 그런가. 소식이 느리네. 맥주 캔 세우기 유행 지난 지가 언젠데.”

   피식 웃은 나는 마시던 캔의 모서리를 테이블 위에 세웠다. 내용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캔이 손안에서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맥주를 한 모금 넘기고 다시 신중하게 캔을 세웠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해규 형이 나를 찍으려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내가 캔에서 한 손을 떼자 양미가 샴페인 세례를 피하듯 몸을 뒤로 젖혔다. 나는 남은 한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됐다!” 나의 외침과 동시에 1초 정도 바닥에 선 캔이 덜러덩 나동그라졌다. 쏟아진 맥주가 테이블에 놓인 부닌의 책 위로 흥건하게 스며들었다. “홍상수 영화가 따로 없구만.” 혀를 끌끌 찬 양미가 냅킨을 가지러 바로 향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잘 때 입은 복장 그대로 얇은 패딩 재킷 하나만 걸치고 숙소를 나섰다. 양미가 잠든 사이 가볍게 러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침으로 먹을 만한 무언가를 사 올 계획이었다.

   택시를 타고 해규 형이 말한 러닝 코스로 향하는 동안(“초짜들은 골든게이트 파크가 최고인 줄 알아. 진정한 러닝 성지는 크리시 필드인데 말이야.”) 나는 어젯밤 잠들기 전 양미와 나눈 대화 내용을 순서대로 톺아 보았다.

   “해규 오빠, 여태 혼자 사는 이유를 알겠더라.” 

   “그래?”

   “응. 뭐랄까.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하다고 해야 하나?”

   양치를 마친 양미가 소매로 입을 훔치며 탁자에 놓인 이반 부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어? 이 사람 해규 오빠 닮았다. 수염도 똑같고.” 

   젖어서 두 배로 불은 책을 넘기던 양미가 책날개에 인쇄된 흑백 사진을 가리키며 웃었다. 

   “뭐야. 언제는 스티븐 연이라더니.”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허공을 지그시 노려보는 부닌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아, 피곤하다. 내일은 그냥 늦게까지 잘까 봐.” 침대에 누운 양미가 잠이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하다’라. 나는 차창 밖 풍경을 무심히 흘려보내며 생각했다. 어금니 사이를 파고드는 나초처럼 곱씹을수록 버성긴 말이었다. 그건 내가 대학생 시절 자주 듣던 기분 좋은 칭찬 중 하나였으니까. 바깥의 힘에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정신의 내력을 깨어 있는 인간의 표상처럼 여기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으니까. 

   금문교가 보이는 바닷길로 접어든 택시 기사가 “크리시 필드, 롸잇?” 하고 재차 목적지를 확인했다. 보아하니 그도 손님을 자주 태우는 장소는 아닌 듯했다. 어쩌다 샌프란시스코까지 와서, 어쩌다 남들 안 가는 곳만 골라 가고 있는 건지 의아했지만, 그래도 해규 형이 추천한 곳이니 믿을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풍경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규 형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한 셈이 될 테니까. 

   그러나 막상 눈으로 확인한 크리시 필드는 나의 덧없는 악의조차 좌절시킬 만큼 아무 감흥이 없었다. 드넓은 습지와 바다의 대비가 아름답긴 했지만, 이국적인 자연 풍경이라면 사흘간 여행하며 질리도록 보아온 터였다. 해변을 따라 펼쳐진 습지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데다 인적도 드물어서, 흡사 비무장지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습지와 해변 사이로 난 자전거 전용 도로를 따라 주민 몇몇이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자판기에서 생수 한 통을 뽑고, 금문교를 바라보며 발목을 차례로 돌렸다. 운동화를 반쯤 덮은 파자마 바지가 마음에 걸렸으나 가져온 하의가 죄다 청바지뿐이어서 다른 대안이 없었다. 파자마 색깔이 회색이라 멀리서 보면 추리닝처럼 보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에어팟을 끼고, 대학 시절 즐겨 듣던 오아시스의 〈Wonderwall〉 앨범을 찾아 틀었다. 얼마나 뛸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 고민하다가 ‘앨범이 한 바퀴 돌 때까지’로 마음을 정했다. 아직 뛰지도 않았는데, 바다를 훑고 올라온 찬바람에 벌써부터 귀가 얼얼했다. 아침 햇살에 비친 금문교는 금색이라기보다 오렌지색에 더 가까웠다. 

  

   세 곡. 앞으로 세 곡만 더···. 나는 손으로 무릎을 짚고, 남은 트랙 수를 헤아렸다. 머리칼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파자마 바지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사타구니에서 솟은 땀이 바지 앞섶을 적시며 위험한 크기의 얼룩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러다 죽지 않을까 싶을 만큼 호흡이 가빠왔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뜀박질을 멈추자 금세 몸에 한기가 들었다. 나는 뻐근한 가슴 통증을 느끼며 다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금문교만 지나면 곧장 시내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가파르게 휘어진 만을 따라 평평한 습지와 바다만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땀을 흘렸는데도, 생수 한 통을 다 마신 탓에 방광이 터질 듯했다. 채찍 같은 바람과 싸우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러닝복을 입은 남자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나는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익스큐즈 미! 웨얼 이즈 어 토일렛?”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남자가 내 손바닥을 철썩 때리며 소리쳤다. “행 인 데어!” 씨발 뭐야. 멈춰선 나는 다시 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추위에 숙취까지 겹쳐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그래. 택시를 부르자. 핸드폰을 꺼내 구글 맵으로 현 위치를 확인했다. 골프장처럼 넙데데한 녹지대 위에 찍힌 파란 점을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길을 잃었다는 게 분명해졌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멈추면 옷 속을 파고드는 바람과 뛰면 터질 것 같은 심장 사이에서 겨우 균형을 맞추며 나아가다가 그마저도 견딜 수 없다고 느낄 때쯤, 시야에 건물 하나가 들어왔다. 어제 해규 형과 갔던 미술관이었다. 

   

   다급한 사정을 해결하고 미술관을 나서는데, 유리 천장이 드리운 입구 앞 광장에 등산복을 입은 한 무리의 노인들이 보였다. 단체로 여행 온 듯한 한국인들이 어제 본 로댕의 조각상 앞에서 돌아가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도중에 끼어든 서양인 커플이 카메라 앞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포즈를 장난스럽게 흉내 냈다. 그 모습을 본 노인들이 “저런 방법이 있었네?” 하면서 너도나도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오빠 어디야?

   그러게. 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양미의 문자에 답하려던 나의 시선이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조각상으로 향했다. 나는 양미에게 보낼 인증샷 촬영을 부탁하려 노인들에게 다가갔다.

   “저도 한 장만 찍어 주시겠어요?”

   그들의 시선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내 얼굴을 지나, 앞섶이 펑 젖은 내 바지에 멈췄다. 그중 가장 손아랫사람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더러운 걸레를 집듯 손끝으로 내 핸드폰을 받았다. 

   앞으로 걸어간 나는 조각상을 따라 머뭇머뭇 포즈를 취했다. 그렇게 하면 바지의 얼룩이 자연스럽게 감춰질 것 같았다. 양발을 모으고 오른쪽 팔꿈치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리는데,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근육이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 둘 셋 하면 찍습니다! 하나, 둘···.” 할머니의 구령에 서둘러 엉덩이를 낮추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할게요!” 웃으며 양해를 구하고 황황히 몸을 일으켰다. 왼쪽 허벅지 위에 오른쪽 팔꿈치를 올리고 다시 한번 신중하게 포즈를 잡았다. 무릎을 접고 등을 구부리자, 가뜩이나 힘이 풀린 다리가 갓 태어난 송아지 다리마냥 사정없이 후들거렸다. 손등으로 턱을 괸 순간 나는 또다시 균형을 잃고 힘없이 무너졌다. 

   “이케 이케 배에 힘을 딱 줘야지! 발꼬락을 칵 오므리고!” 

   할머니가 답답해하며 자기 배를 손바닥으로 땅땅 두드렸다. 지켜보던 노인들이 “젊은 총각이 와 저래 부실하노”, “원래 정력은 나이랑 상관없다카이” 하고 자기들끼리 농을 주고받았다.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 재차 조각상을 살폈다. 잔뜩 힘을 준 듯 흉하게 일그러진 발가락과 주름진 이마, 온몸에 불거진 핏줄 같은 세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는 분연히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발가락을 있는 힘껏 오므리고, 배에도 신경 써서 힘을 줬다. 안정적으로 포즈를 완성하고 손등으로 턱을 괴는데 불현듯 이게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생각하는 사람은 본래 주먹을 먹고 있지 않나? 방황하던 나의 오른손이 턱에서 입으로 옮겨 간 순간 깃발을 든 가이드가 “어르신들 모이세요!” 소리쳤고, 그와 동시에 몸이 휘청 뒤로 넘어갔다. 주저앉은 내게 던지듯 핸드폰을 건넨 할머니가 일행을 쫓아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화면이 비스듬히 기운 마지막 사진을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쓰러지고 있는 나를 간신히 붙든 프레임 위로 생각하는 사람의 머리가 사선으로 댕강 잘려 있었다.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해규 형의 문자였다.

   ―동표야, 오랜만에 얼굴 봐서 반가웠다. 제수씨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이윽고 띠링, 하는 신호음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어제 펍에서 찍은 동영상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찰나를 포착한 그 사진 속에서 나는 맥주 캔 세우기에 완벽히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갈 곳 잃은 나의 시선이 다시 광장에 선 로댕의 조각상으로 향했다. 기괴한 자세로 온몸에 핏줄을 세우고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근육질의 남자. 인상파 화가들의 아름다운 회화가 전시된 미술관 입구에 저렇듯 흉물스러운 인간이 버티고 선 모습이 문득 참을 수 없이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저 인간은 대체 누구지? 일단 로댕은 아니고. 아니, 이름도 없는 인간을 저렇게 거대하게 만들 이유가 있나? 생각하는 사람이라면서 몸은 왜 또 쓸데없이 좋은 건데? 심지어 저 조각상은 오리지널도 아니지 않나? 아니, 로댕이 가져왔으니 오리지널이라고 봐야 하나? 그나저나 쟤는 여기서도 주먹을 먹고 있네···. 생각이 싱겁게 이어지는데 찬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땀에 젖은 옷 탓에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제자리에서 훅훅 입소리를 내며 뛰었다. 뜀박질을 하자 얼어붙은 몸에 미약한 훈기가 돌았다. 나는 오아시스의 음악을 틀고, 몸을 돌려 시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이고 뭐고 일단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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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1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김인숙 그즈음 유자는 자주 암벽 공원을 찾았다.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다. 넓은 공원 한 곳에 높은 암벽을 세우고, 예쁜 색깔의 조약돌 같은 돌들을 색색이 박아 놓았다. 사람들이 그 돌을 손으로 잡고 발로 짚으며 올라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몇 달 가까이 그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즈음에는 거의 매일 공원을 산책했음에도 암벽은 늘 아무 방해 없이, 아무 매달리는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멈춰 서서 고개를 쳐들어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도 대체로는 그녀뿐이었다.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안전 요원 없이 등반을 금지한다는. 아마도 특정한 날에만 운영을 하는 시설인 것 같았다. 그녀가 그곳을 산책하는 시간은 그 특정한 때의 밖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시간이 특정했을지도. 그녀는 ‘특정’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즈음에는 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험한 말을 많이 듣게 된 탓일 수도 있었고, 그 말들을 그릇 씻듯이 좀 씻어 버리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암벽 접근을 막는 펜스 바깥에는 벤치가 있었다. 잔디밭 바깥에 있는 벤치가 아니라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평생 ‘밟지 마세요’라는 표지판만 보고 살아온 유자는 걱정 없이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그 벤치가 좋았다. 그게 실은 들어가 앉으라는 것이 아니라 조경용이라는 걸 몰랐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 후에도 가끔씩 잔디밭 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처럼 생각 없이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암벽 앞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암벽을 등지고 앉아 잔디밭 한가운데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잔디를 밟을 때의 폭신하고, 미끌하고, 심지어는 바삭하기까지 한 감촉이 그리움처럼 남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기억인지 금지된 것을 안 후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때때로 발밑이 아찔한 것을 보면. 가끔씩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암벽 앞을 지나갔다. 개도 사람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암벽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암벽 사진을 찍으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올렸던 사람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녀가 앉아 있는 벤치는 지나치게 좋은 자리, 혹은 지나치게 나쁜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녀가 그런 사람이거나. 그렇다고 해서 일어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일어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딱 그곳에 앉았을 때만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소박하고 희미한 저항. 낯간지럽고 귀여운 의지‧‧‧. 그렇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나 징그러운 사람이면, 아직도. 유자는 그 벤치에 앉아 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생각하다 보면 타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장기 말도 생각하게 됐다. 그녀는 말을 타 본 적이 없었다. 달리는 말을 본 적은 있었다. 제주 어디 해안에서였는데, 곧 폭풍이라도 몰아칠 듯 어둑한 해변을 말 한 마리가 달려왔다. 유자는

  • 문장지기
  •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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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판다곰젤리

    패스 오브 엑자일2보다 재미있는 듯.

    • 2025-02-12 18:40:11
    판다곰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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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냠냠념
    최고에요

    별거없는 인생이지만 누가보면 제 찰나도 꽤 괜찮아보이겠죠? 너무 잘 읽었습니다

    • 2025-09-16 15:17:19
    냠냠념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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