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한가운데
- 작성일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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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한가운데
정이현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낳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안희는 몇 해 전 이토록 모순적인 마음을 미령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은 미령에게만 할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미령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진심, 나도.
어깨에 얹힌 타인의 무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안희와 미령은 경쟁하듯 토로했다. 그들은 한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안희의 아들과 미령의 딸은 동갑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그와 상관없이 가까워졌다. 비슷한 일들이 어디서나 일어난다.
아이들이 진급할 때마다 안희와 미령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제 몇 년째, 라고 헤아리곤 했다. 10년이 되던 해에 내년엔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겠다고 안희가 말하자 미령이 그럼 발가락으로 세면 된다고 말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올해 초, 안희의 집에 놀러 온 미령이 귤을 까려다 말고 갑자기 한쪽 양말을 벗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부터 카운트를 시작하자면서 맨발을 꼼지락댔다. 그녀만큼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희를 웃겨 준 사람은 없었다. 또 없을 것이다.
언니가 늘 귀엽게 봐 주니까.
미령은 안희를 언니라고 불렀고, 안희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령과의 관계에서 안희는 어떤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나이가 몇 살 어린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미령이 상대방에게 지금 친구랑 노는 중이라고 말했던 때부터인 것도 같았다. 그런 말들은 연장자가 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이가 어린 쪽에서 하면 꽤 근사하게 들린다. 안희가 보기에 미령은 근사한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같이 노는 사이가 친구가 아니면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
안희는 미령을 처음 본 순간을 기억했다. 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학교에서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가 열렸다. 3월 초, 아직 스웨터 아래 히트텍을 벗기 힘든 날씨였다. 안희는 두꺼운 머플러를 동여매고 그 속에 얼굴 절반을 파묻은 채 강당으로 갔다. 교장과 교감, 교무부장으로 이어지는 긴 인사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학생부장이 연사로 나와 학교 폭력의 사례에 대해 설명했다. 휘말리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그가 열변을 토했다. 행사가 끝나자 안에 있던 학부모들이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참석자는 전원 여자였다. 그런 곳엔 언제나 엄마들뿐이었다.
교정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느슨한 원들이 여럿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희는 곤혹스러웠다. 동네에서 유치원에 보내는 동안 알게 된 얼굴들도 꽤 눈에 띄었지만, 그들과 자신이 정말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막 형성되고 있는 그 원에 쓱 끼어들 만한 숫기도 의지도 없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바쁜 일이 생긴 양 잰걸음으로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와 비슷한 속도로 운동장을 혼자 횡단하는 여자가 보였다. 후리후리하게 키가 크고 마른, 종아리까지 오는 검정 더플코트를 걸친,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휘날리며 걷는 여자. 가까이 갔을 때 안희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처음 봤지만 아는 얼굴, 언젠가 알았던 듯한 사람. 미령이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던 미령은 억울해했다.
진짜 바쁜 일 있었던 거 맞거든요. 하필 날이 딱 겹쳐 버려서.
그날은 미령의 이혼소송의 두 번째 조정 기일이었다.
오후 2시 시작인데 법원에 1시 58분에 도착해서 우사인 볼트처럼 뛰었다니까요.
하마터면 못 들어갈 뻔했다고 했다. 왜 설명회 중간에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간 큰 엄마가 대걸레 사건 듣다 끊고 일어나요.
대걸레 사건은 그날 학생부장이 실제 일어났던 학교 폭력 사례라며 들려준 일화였다. 두 아이가 청소 시간에 대걸레 마대를 거꾸로 휘두르며 다투었는데 그중 한 명이 중요 부위를 터치 ‘당’했다면서 성폭력으로 고발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부장 교사는 두 아이의 성별이나 중요 부위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선입견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만 가격이 아니라 터치임을, 그조차 터치 호소임을 재차 강조했다.
그냥 외우시면 됩니다. 일반 학폭이 백번 낫지 ‘성’이 붙어서 올라가면 해결이 백배 복잡해진다는 사실을요.
그 교사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었다. 그런 이들이 대개 그렇듯 세간에서 주워 모은 이야기들을 편의대로 각색하여 좌중의 흥미를 돋우는 땔감처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희는 대걸레 사례를 오랫동안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했다. 혁이 기숙사형 자사고에 입학하게 되었을 땐 ‘그런 문제’에 대해 단단히 주의를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남편에게 부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가 이 집에 부모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안희의 남편은 비교적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이율배반적 자세를 보였다. 마땅히 신경 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별것 아니라는 듯 굴었는데 그런 이중적 태도를 안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혁과 이야기 나누고 와서 남편이 한 말은 이랬다.
여자 조심하랬더니 자기도 이미 알고 있다던데?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이라고 안희는 생각했다.
무슨 소리야? 스스로를 조심하라고 해야지. 본인 자신을.
그게 그거라면서 남편은 짜증을 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안희가 하려던 말을 도리어 그가 먼저 했다.
당신은 왜 항상 본질을 흐리는 거야?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 아이에게 당신이 자꾸 예비 가해자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고 남편은 안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걱정이 정말 혁 때문이야, 아니면 내 자식이 남한테 피해를 줄까 봐 그러는 거야? 그러면 당신이 비난받을까 봐 불안한 게 아니고?
그는 안희가 내면의 불안감을 공연히 아이에게 투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교 측에서 남녀를 엄격하게 분리한다는 말을 듣지 않았느냐면서, 시스템을 신뢰하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혁은 당신이 크게 걱정할 만한 녀석이 아니야.
소심한 데다 현실적인 아이라 큰 사고는 치지 않을 거라고, 다만 이상한 세상이니까 재수 없게 휘말리는 일만을 요령껏 피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휘말리는’이라는 표현이 언젠가처럼 안희의 귀에 불편하게 감겨 왔다.
얼마 뒤 미령을 만나 스몰토크를 하다가 안희는 무심코 남편과의 대화를 언급했다. 안희의 기준에서 그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자주 하는 사이였으므로 아마 그날 역시 남편을 가볍게 흉볼 요량이었을 것이다. 미령은 안희의 의도와 달리 불안감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불안감을 주제로, 고등학생의 엄마가 되는 일의 불안에 대하여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은 아들이라서 불안하고, 딸은 딸이라서 불안하고, 집에 데리고 있으면 그래서 불안하고, 기숙사에 넣으면 또 그래서 불안하다는 결론 없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그냥 그런 존재인 것 같다고, 끝나는 날이 언제 오려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미령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말했다.
세상 모든 아들들 엄마가 언니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안희는 골똘히 그 말을 곱씹었다. 혹시 미령은 딸의 엄마이고 자신은 아들의 엄마라고 선을 긋는 의미일까. 자신이 무심히 꺼낸 화제가 미령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 기분 상함의 정확한 지점을 안희 자신이 영원히 모르는 채 넘어가 버릴지도 몰랐다. 어떤 얘기를 꺼낼 때 상대에 따라 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젠 그 기준을 미령에게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아니 진즉에 그랬어야 한다고 안희는 깨달았다. 그러자 한층 서글퍼졌다.
*
미령이 조금 멀리, 기도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안희에게 제안했다. 안희와 미령은 둘 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즈음 안희는 역류성 식도염 환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울컥 치밀어 오르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네 내과에서는 소화기 문제는 아니라고 했고 산부인과 예약 후 여성호르몬 검사를 진행하라는 소견을 받았다. 갱년기의 증상과 유사하다면서 의사는 무성의하게 설명했다.
의외로 모든 게 호르몬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밝혀진다면 행운에 가깝죠. 쉽게 해결 가능하다는 뜻이니까요.
미령의 말 중에 ‘기도’라는 단어보다 ‘조금 멀리’가 안희에게 더 절실했는데, 통화를 하면서 미령은 기도에 대해서만 자꾸 설명했다. 아주 오래전에 알던 분이 있다고, 그분이 기도드릴 만한 좋은 곳을 소개해 주었다고 미령은 말했다.
거기 가면 마음이 씻은 듯이 평온해진대요. 언니, 우리한테 평온, 진짜 필요하잖아.
미령이 킥킥 웃었다.
그분은 내가 한때 많이 믿었던 분인데, 좀 뭐라고 하지, 기도를 자주 하는 분이에요. 내가 언니한테 얘기한 적 없었나?
없었다. 안희는 얼마간 쓸쓸한 심정이 되었는데 섭섭함과는 다른 결의 마음이었다.
종교인도 아니고 무속인도 아닌데 신기하게 꿈도 잘 맞고 앞날을 기막히게 맞추는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분이 얼마 전에 새벽 기도를 하시는데,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내 모습이 환하게 떠오르더래요.
미령이 활짝 웃고 있더라고 했다. 색이 옅은 분홍-페일핑크와 인디핑크 사이의, 아무튼 그렇게 ‘잔치할 때 입는 한복 같은’ 옷을 입고서 말이다. 거기까지 전하고 미령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안희는 페일핑크와 인디핑크 색을 차례로 떠올려 보았다. 두 색 사이의 색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무엇이든 피부색이 희다 못해 창백한 미령에게 무척 잘 어울릴 터였다.
어떤 일, 아마도 새로운 일이 있을 징조라고 하더라고요. 괜한 소리 하실 분은 아니라서 뭐가 있기는 있을 건가 싶고. 그런데 꼭 정성을 바쳐서 기도를 하라고 하네요? 보시? 그걸 하라고. 아끼는 걸 바치며 기도하는 건데, 이럴 때 하면 운이 더 좋은 쪽으로 풀린대요.
미령은 토요일 아침을 고집했다. 안희가 아는 그녀의 평소 패턴과는 달랐다. 안희가 아는 미령은 ‘반드시’ 같은 부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미령은 누구보다 유연했으며 종종 그 지나치게 풍부한 융통성 때문에 문제를 만들고는 했다. 오늘 아니면 내일 하면 되고, 사는 동안 언젠가 또 기회가 있겠지, 그것도 아니면 인연이 아니겠지, 라는 게 미령의 방식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며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후다닥 일을 추진해 버리고, 이내 후회하고, 잠시 낙담했다가는 곧 털고 일어나기도 잘했다. 그런 면모야말로 안희만 아는 미령의 고유한 매력이었다.
토요일 아침은 안희에게 썩 편한 시간은 아니었다. 기숙사형 자사고에 다니는 혁은 매주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외출을 나와 집에 머물렀다. 혁이 그곳에 합격했을 때 미령은 제 일처럼 기뻐했다.
세상에, 3년간 기숙사라니, 언니, 정말이지 이젠 자유네! 와, 부러워서 입이 안 다물어져요.
미령이 자신의 부러운 기분에 관해 안희에게 그렇게까지 말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금요일 오후 집에 온 혁에게 안희는 학교에 별일 없는지를 물었다. 혁이 안희를 쓱 쳐다봤다. 감정이라곤 없는 눈빛이었다. 안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에? 뭐라고 했어요?
그는 에어팟을 빼지 않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별일 없는데, 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혁의 학교 남학생들 몇이, 동급 여학생의 얼굴을 딥페이크로 합성한 이미지를 만들었다가 적발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며칠 전이었다. 안희와 약간의 친분이 있는 여자아이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가해자들이 확실히 특정되지 않았다면서, 학교 측에서 무조건 비밀에 부치고 있는데 혹시 안희가 특별히 아는 바는 없는지 물었다. 안희가 그 사건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다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어, 남자애들은 집에다 그런 얘기를 잘 하지 않아서요.
전형적인 핑계를 댈 의도는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그걸 깨닫자 안희는 못 견디게 면구스러웠다.
피해자가 한 명은 확실하고 더 있을 수도 있대요. 음, 일단 저희 애는 아니지만. 여학생 엄마들 다 부들대고 있어요. 학교에서 저렇게 미온적으로 나올 줄 몰랐고. 피해자는 학폭위도 진행하면서 동시에 형사 고발할 것 같아요.
전화를 끊자마자 약통을 뒤졌다. 진통제를 입에 넣고 삼켰다. 관자놀이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대화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걸린 게 몇 명인 거지, 기숙사에 다 같이 있는데 누군 보고 누군 못 봤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충분히 신빙성 있는 말이었다. 학부모 전체가 모인 단체대화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다들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보았다. 혁은 책가방만 바꿔 들고 학원으로 갔다. 기숙학교의 아이들은 주말이면 경쟁적으로 오랜 시간 학원에 머물렀다. 금요일은 밤늦게까지, 토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밤 열 시까지 수업이 있었다. 금요일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귀가해 야식으로 컵라면을 먹는 혁의 뒤통수를 안희는 한참 바라보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일 아침 뭘 먹고 가겠느냐는 말만 겨우 나왔다. 혁은 대답이 없었다.
야 귓구멍에 그거 좀 빼고.
지나가던 남편이 소리쳤다. 혁이 느린 동작으로 한쪽 귀에서 에어팟을 빼냈다. 뭘 먹겠느냐고 다시 묻자 작게 웅얼거렸다. 아무거나,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안희의 예상에서 한마디도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었다. 혁은 언젠가부터 선택의 순간에 ‘아무거나’라고 했다. ‘귀찮으니까 말 시키지 말아요’를 축약한 것이었다.
뭐 제대로 된 걸 먹고 가야지. 뜨거운 것 중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남편이 이런저런 음식 이름을 댔다. 떡국, 불고기전골, 황태미역국, 순두부계란탕. 안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차려 주는 거 꼭 먹고 가. 공부는 체력이다.
혁이 고개를 까딱했다. 남편의 말속에서 ‘차려 주는’의 주체는 안희였다. 자기 손으로 차리는 게 아닌데 그는 왜 주어를 생략하는 어법을 사용하는가. 그러나 안희는 그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런 곳에 낭비할 에너지와 시간이 없었다. 기계적으로 냉동칸을 열었다. 내일 아침을 위해 녹여 둘 무언가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꽝꽝 언 검정 비닐봉지들은 원래의 내용물이 무엇이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투명 비닐에 싼 두툼한 고체 덩어리가 만져졌다. 꺼내어 한참 들여다보았다. 멸치였다. 아주 오래전, 미령에게서 받은 멸치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안희와 미령이 친해지기 전의 일이었다. 혁을 등교시키고 돌아서는 교문 앞에서 미령을 만났다. 미령은 안희에게 멸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멸치에 대해 안희는 특별한 입장을 가져 본 적 없었다.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혹시 제가 나눠 드려도 될까요, 라고 묻는 미령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때 그들은 2,000세대가 넘는 대단지의 끝과 끝에 살았다. 미령의 집은 안희의 집과 같은 구조였다. 현관에 크고 작은 몇 개의 신발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지비츠가 붙어 있는 아이의 크록스, 지비츠가 붙어 있지 않은 어른의 크록스, 아이의 운동화, 어른의 스니커즈. 주방 싱크대 앞에 성인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창문이 서쪽으로 나 있었다. 안희의 주방 창문에서는 앞 동 건물이 보이는데 미령의 창문에서는 멀리 산등성이가 보였다. 커다란 종이 상자가 주방 바닥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안희와 미령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미령이 상자를 열었다. 알이 굵은 국물용 멸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혹시 전부 다 필요하진 않은지 미령이 물어 왔다.
이걸 전부요?
네. 만약 필요하시면요.
눈빛에 깃든 이상한 절박함을 안희는 알아챘다. 말을 돌리기 위해 멸치가 싱싱하다고 말했다.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아이 친할머니가 보냈다고 미령이 말했다. 멸치가 많이 잡히는 곳에 산다고 했다.
아이 아빠랑 헤어지고 나서, 못 찾을 만한 데로 도망 왔거든요. 그런데 이사 축하 선물이라면서 어제 보냈더라고요.
미령이 하는 말을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멸치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든 안희가 결정해야 할 사안은 상자째 가져갈 것인가 일부만 가져갈 것인가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왜 나인가에 대해서는 한동안 궁금했다. 미령이 왜 하필 잘 모르는 자신을 택했는가 하고.
내가 가져갈 수 있어요.
안희가 말하자 미령이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미령은 상자 뚜껑을 여몄다.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 움직임을 안희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나눠 줘도 되고 그냥 버려도 된다고 미령이 말했다.
거리끼지 않으면요.
내 거리낌까지 왜 신경을 써요.
안희의 말에 미령이 조금 웃었다. 안희는 짐짓 쾌활한 척 말했다.
이제 내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미령이 아까보다 조금 더 활짝 웃었다. 안희는 멸치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일어섰다. 가볍지 않았는데 예상보다는 덜했다. 그 무렵 안희는 삶에서 예상과 다른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알아 가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힘이 왜 이렇게 세세요.
미령이 상자의 한쪽을 떠받혔다. 그때였다. 미령이 갑자기 자신은 멸치를 만지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이. 눈 때문이라고 했다. 멸치의 눈. 그 순간 안희는 미령이 말하려는 바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초점 없이 박제된, 깨소금 한 알 같은 동공.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을 자신은 그때껏 가져 본 적 없으면서도.
멸치 상자를 집에 가져와 비닐백 여러 개에 대충 나눠 담은 뒤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냉동실이 죽은 멸치로 꽉 찼다. 그 한 봉지가 11년이 지난 지금껏 남아 있는 줄을 미령은 알지 못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혁은 속이 안 좋다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안희는 파자마 위에 면 원피스를 풍덩 뒤집어쓰고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혁이 터덜터덜 따라왔다. 학원까지 태우고 가는 십여 분 동안 혁은 고개를 잔뜩 수그린 자세로 핸드폰만을 보았다. 안희에겐 익숙한 모습이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췄을 때였다. 뒷자리의 혁이 별안간 커다란 소리를 뱉으며 하품을 했다. 애니메이션 속 켄트로사우루스가 낼 법한 괴성 같기도 하고 부주의한 술꾼의 트림 같기도 한 소리였다. 안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잠시 후 신호가 바뀌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 단 한 번뿐인 일이었다. 왜인지 안희는 겁이 났다.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자꾸 눈앞이 뿌예졌다.
밤 열 시에 데리러 올게.
암기한 주문처럼 겨우 중얼거렸다. 아들이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빨리 출발하라고 뒤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집에 돌아와 기계적으로 남편을 위한 간단한 아침을 차리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미령의 집까지는 십여 분 거리였다. 안희가 미령을 픽업하여 도시고속화도로를 탄다는 약속이었다. 눈이 계속 흐려서인지, 좀 전까지 보이던 자동차 키가 눈에 띄지 않았다. 한쪽 팔에 외투를 든 채로 온 집안을 헤집으며 열쇠를 찾아야 했다. 식탁에서 오트밀을 시답잖게 떠먹던 남편이 아침부터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기도라는 단어를 듣자,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비웃는 시늉을 했다. 미령이 이젠 전도도 하느냐고 물었다. 안희는 대답하지 않고 주방 찬장을 열어 보았다. 국간장과 굴소스, 비니거 오일과 요리용 청주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칸이었다. 사흘 전엔 잃어버린 줄 알았던 카드 지갑이 후추통 옆에서 발견되었다.
사이비 아니야? 누구 하나 데리고 가면 인센티브 받고 막.
남편이 삶은 달걀을 우물거리면서 이죽거렸다. 찬장 안에는 국간장과 굴소스, 비니거 오일과 요리용 청주 같은 것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근데 진짜 거기는 요새 뭐 먹고 살아?
잘 모른다고 대꾸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난 11년간, 미령은 여러 차례 직업을 바꾸었다. 커피숍, 키즈카페, 샤브샤브 체인점 등을 창업하거나 동업의 형식으로 참여했다. 한때는 친구가 한다는 모델 에이전시에 근무한 적도 있고, 부동산 대행사에도 잠시 출근한 적이 있었다. 애쓴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시간들이었다. 안희가 알고 있는 미령의 마지막 직업은 아이스크림 할인판매점의 사장이었다. 코로나 비대면 시대에 야심 차게 연 무인점포가 문 닫은 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가게에 종일 앉아 있는 편이 낫지, 계속 CCTV 모니터만 지켜보게 되는 일은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미령은 불만을 토로했다.
언니, 제일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언젠 줄 알아요?
실제라면 그냥 넘길 수 있을 만한 일인데 집에서 화상으로 보고 있자면 화가 치솟아 못 참겠을 때라고 했다.
며칠 전엔 어떤 손님이 아이스크림을 잔뜩, 5만 원어치도 넘게 샀거든요. 그런데 냉장고 슬라이딩 문을 조금 덜 닫고 간 거예요. 마침 근처에 아이가 있어서 얼른 닫으러 가라곤 했는데 하마터면 어쩔 뻔했어. 생각할수록 분이 안 풀리는 거예요. 언니, 언니는 알잖아요. 내가 원래 억울해도 막 원한 갖고 그러는 사람 아니라는 거.
그랬다. 미령은 툭툭 잘 털고 일어나는 사람, 억울하게 만든 이를 진심으로 용서하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편히 살려면 잊어야겠다 마음먹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화면만 보고 앉아 있으니까 인간이 점점 변해 가요. 결국 카드사에 전화해서 그 손님 번호 알아냈잖아요.
카드사가 알려 주더냐고 안희가 물었다.
그냥은 안 알려 주죠. 계산이 잘 못 되어서 급히 연락해야 된다고 했지.
고객의 개인정보를 알아낸 자영업자보다 아이스크림을 5만 원어치 넘게 구매한 손님 쪽에 감정이입 되었기 때문에 안희는 스스로가 당혹스러웠다. 그 손님이 그 뒤에 다시 온 적 있는지 물었다. 미령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안 오네. 이제 안 오려나? 근처에 아이스크림 파는 데는 여기뿐인데.
안희는 자신이 그 손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다가 그만두었다. 가방 속을 한 번 더 뒤집어 보았다. 지갑과 화장품 파우치, 물티슈, 구겨진 영수증 등속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등 뒤에서 남편이 중얼거렸다.
설마 그새 또 재혼한 건 아니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남편이 간혹 농담이랍시고 던지는 저런 식의 말들이 무척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고 남편이 말했다. 작년에 상처한 자신의 거래처의 황 사장과 미령을 만나 보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듣자마자 안희는 소리를 빽 질렀다. 남편이 말하는 사람은 미령보다 한참, 어쩌면 띠동갑보다 더 연상이었다.
그 사람은 할아버지잖아.
일찍 결혼해 손자가 일찍 생겼을 뿐이라고, 실제론 환갑이 지나지 않았다고 남편이 반박했다. 그러지 않아도 얼마 전 황 사장에게 미령의 사진을 보여 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근데 그 형님은 누군지 모르더라고. 우리랑 세대가 달라서 그런가. 아예 처음 본대.
그들이 미령의 사진을 어떻게 볼 수 있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도촬이라도 했을까 봐? 검색하면 다 나오는 걸 뭐. 수십 년 전 얼굴이지만. 형님이 이쁘다고 좋아하기에, 실물은 세월 많이 흐른 걸 감안해서 봐야 된다고 했지.
언젠가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혁이 아직 저학년이었을 무렵이었다. 같은 반 남자아이들로 구성된 축구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그라운드를 뛸 동안 엄마들은 관람석에서 커피를 마셨다. 안희가 처음 얼굴을 비춘 날, 한 아이의 엄마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옆 반에 그 친한 분 있잖아요. 눈 크고 예쁘신 분. 옛날에 그 아이스크림 모델 맞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아 역시 맞구나. 긴가민가했어요.
악의는 없지만 딱히 선의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말들이 오갔다. 미령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던 한 여자가 그 자리에서 검색을 했다.
엄청 예쁘네. 이 모델이 진짜 그 엄마라고요?
그게 벌써 언제 적인데. 세월 흐른 건 감안해서 봐야죠. 우리 다 그럴 텐데요.
안희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미령에게 미안해서 기억을 잠시 정지시켰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은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선 것은 기억했다. 그 뒤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미령의 의사를 한번 타진해 보라며 남편이 채근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안희는 딱 잘랐다.
당사자는 당신하고 생각이 다를 수도 있잖아.
안희는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가방 속에 주워 담았다. 지갑과 화장품 파우치, 물티슈, 구겨진 영수증까지. 자동차 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미령이 안희를 태우러 왔다. 흰색 중형차의 차창 밖으로 미령이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멋지다거나 신형이라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는, 그렇다고 구식이라는 인상도 주지 않는 흰색 차였다. 안희가 미령이 운전하는 차에 오르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음에도 말이다. 안희는 미령이 운전을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미령은 안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차가 필요 없는 장소에서 만나 왔거나, 어쩌다 조금 멀리 가야 할 때는 자연스레 안희가 운전을 했다. 자신이 알게 될 기회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미령이 자신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걸까.
언니 뭐 좀 먹고 나왔어요?
미령이 언제나처럼 다감하게 물어 왔다. 안희는 자꾸 운전석에 앉은 미령의 옆모습을 흘낏거리게 되었다.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미령은 대부분의 운전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녀의 운전 솜씨는 무난했다. 운전 중에 신호를 어기지도 과속을 하지도 않았으며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길을 간혹 헛갈리기는 해도 갈림길에서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차는 외곽순환도로를 빠져나와 2차선 국도로 접어들었다.
이제 35분 남았어요, 언니.
미령은 오늘 은은하게 들떠 보였다. 연한 살구색 스웨터가 눈에 띄었다. 안희가 처음 보는 옷이었다. 새로 산 것일까, 아니면 그 오래전 알던 사람의 꿈에 나온 옷과 비슷한 색의 옷을 찾기 위해 온라인 사이트를 뒤지기라도 한 것일까. 미령이 카 오디오를 켰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단조로운 리듬의 트럼펫 연주를 따라 낮게 허밍했다. 무인점포를 정리하고 난 뒤에 그녀는 한결 이완된 태도를 가지게 된 것도 같았다. 차가 긴 커브를 돈 뒤에 미령은 음악의 볼륨을 조금 줄이고는, 새로 하게 될 수 있는 일에 대해 말했다. 라이브 커머셜의 쇼호스트라고 했다.
그러니까 네이버 같은 곳 있잖아요. 거기도 홈쇼핑이 있거든. 그걸 라이브로 진행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안희는 미령과 정말 잘 어울리는 일일 거라고 말하면서 조그맣게 박수를 두 번 쳤다.
고마워요, 언니. 만약에 일이 더 잘 풀리면 아예 홈쇼핑 채널에 출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어쩌면, 진짜 운이 좋으면요.
미령의 목소리에는 어떤 희망과 기대, 동시에 불안감과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지난번에, 기도를 권했던 분이 알려 준 ‘새로운 어떤 일’이 이것일 수 있다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긴 해요. 영 자신이 없네.
도로 바닥이 울퉁불퉁한지 차체가 좌우로 기우뚱 흔들렸다.
지난 세기말 미령은 소녀 잡지의 뷰티 모델로 방송 연예계 경력을 시작했다. 잡지 커버나 지면광고 위주로 평범한 커리어를 쌓다가 이천년대 초반 한 제과 회사의 광고 모델로 발탁되면서 지명도가 높아졌다. 포니테일로 머리칼을 치켜 묶고, 눈꼬리를 적당한 각도로 내리고 입꼬리를 적당한 각도로 올린 채 입술에 아이스크림콘을 막 갖다 댄 미령의 앳된 얼굴이 종로의 대형 옥외광고판에 몇 해 간 붙어 있었다. 카피 문구는 ‘당신을 위하여, 감미롭게’ 였다. 안희는 출퇴근길마다 그 앞을 지나쳤다. 광고판을 쳐다볼 때도 있었고 그냥 지나칠 때도 있었다. 언젠가, 당시 남자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과 함께 남쪽 도시에 갔을 때 기차역 앞 광고판에 같은 사진이 붙은 것을 보았다. 외국의 낯선 슈퍼마켓에서 국내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을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반가움이 들었다. 안희가 그 말을 하자 남편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본주의의 그림자가 이 세계 전부를 집어삼켰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그는 빈정댔다.
아무튼 이놈의 세상 어디로든 도망칠 곳이 없다니까.
자신에게 한 말도 아닌데 안희는 기분이 상했다. 그 뒤에 이어진 미령의 행보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크지 않은 배역으로 두어 번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결과적으로 흐지부지되었다는 정도는 알았다. 종로의 광고판 사진이 다른 모델의 얼굴로 교체된 게 언제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뒤로 미령의 공식적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에 관해 안희는 미령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언니, 이제 9분. 다 와 가요. 생각보다 금방이죠?
그러네, 금방이네.
미령의 차는 길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비게이션이 알려 준 목적지는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서야 나왔다. 창고 같은 단층 건물의 뒷마당이었다. 좁은 마당에 몇 개의 가스통과 대형 음식물 쓰레기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미령은 차를 돌리기 위해 몇 번이나 후진과 전진을 반복해야 했다.
내비가 가끔 이러더라고요. 제멋대로야, 못 믿어.
미령이 툴툴거렸다. 언덕 아래쪽으로 이어진 좁다란 길을 따라 얼마를 내려가니 갑자기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그 중턱에 진짜 목적지가 있었다. 양기와로 지붕을 올린 작은 집이었다. 절이라는 뜻으로 ‘卍’이 적힌 표지가 있었으나 안희는 그곳이 진짜 절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집 바로 앞에 대형 유리 수조가 있었다. 그들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수조는 더러웠다. 유리의 청소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물을 갈아 주지 않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차이를 알아낼 만큼 자세히 쳐다볼 수 없었다. 그 안의 물고기들 때문이었다. 눈을 부릅뜬 물고기 여러 마리가 물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횟집 수조와 다를 바 없었다. 바로 옆에 붙은 종이 한 장이 바람에 펄럭였다. ‘우럭 1마리 만 원, 잡어 3마리 만 원. (카드 불가)’
미령은 잡어 3마리를 골랐다.
같은 값이면 여러 생명을 구하는 게 낫잖아요.
그녀가 안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무장화를 신은 사내가 개중 작은 고기를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뜰채로 건져 양동이에 담았다. 고기들이 양동이 속에서 퍼덕거렸다.
이쪽 보살님은요?
안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안희는 우럭으로 결정했다. 가격이 비싸게 매겨졌다고 살아날 기회를 놓치는 것도 억울한 일이니까. 남자의 뜰채가 이번에는 더 크고 넓적한 고기를 겨냥했다. 그는 우럭 한 마리를 휙 건졌다. 안희의 물고기는 안희의 양동이에 담겼다. 우럭은 양동이 안에서 연신 소스라치며 파닥였다. 분명코 살아 숨 쉬는 생명이었다. 장화 신은 남자가 손가락으로 바다 쪽을 가리켰다. 저 아래 내려가면 방생터가 바로 있다고 했다.
거기 놓아주시면서 극락왕생을 빌어 주면 됩니다.
남자가 가리키는 곳에 쭈그려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곁에 바닷새들 몇 마리가 낮게 날았다. 바닷가로 이어진 흙길에는 계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사방이 고즈넉했다. 안희는 안희의 용기를, 미령은 미령의 용기를 각각 들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방생터라 부르는 곳은 모래톱과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여, 마치 바닷물이 좌우로 가둬진 듯 보이는 자리였다. 그들은 큼지막한 바위 위에 올라섰다.
언니.
미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안희를 불렀다. 안희는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엉거주춤 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미령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난 도저히 못할 것 같아요. 언니가 대신 좀 어떻게.
안희는 자신의 양동이를 내려놓고 미령의 것을 받아 들었다. 미령이 멸치를 만지지 못하는 걸 잠시 잊었다. 미령이 왜 자신에게 같이 오자고 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안희는 미령의 물고기들을 바닷물에 천천히 흘려보냈다. 미령은 눈을 감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마치 묵념이라도 하는 듯 안희 옆에 꼭 붙어 서 있었다. 저토록 정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는 무얼 기원하는 걸까. 안희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였다. 나지막하게 하늘을 빙빙 돌던 갈매기가 바닷속에 부리를 집어넣어 순간적으로 고기를 낚아챘다. 방금 안희가 방생한 그 새끼 잡어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령이 헙, 숨을 들이마시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늘은 흐리고, 바다는 마냥 검푸르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미령이 말했다.
물고기의 극락왕생을 빌어야 한다는데 나는 그냥 나를 빌었어요. 내가 잘되게 해 달라고. 웃기죠?
고개를 젓고서 안희는 흔들리며 멀어지는 차창 밖 풍경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자신이 구출한 우럭이 아까 그 바위 위에, 양동이째 그대로 남겨져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
핸드폰에 혁의 학교로 추정되는 발신자 번호가 떴다. 안희는 하나, 둘, 셋까지 세고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어쩌자고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마치 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상대가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말했기 때문에 안희도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고 통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최근 학생들 사이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기에 학교 차원에서 전수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안희는 학교 측이 이번 일을 ‘학생들 사이의, 개인적인, 불미스러운 사건’ 정도로 명명하여 처리하고 싶어 한다는 의사를 감지했다.
모든 학생들의 집에 다 전화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 모든 학생들은 아니에요. 아이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는 이미 끝냈고요.
이에 연루된 부분이나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아이들을 걸러 내 2차 조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했다. 이 연락은, 그 두 번째 조사가 예정된 학생들의 보호자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관련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할 테니 가까운 시일 내에, 가능하면 부모가 함께 학교로 나와 달라고 했다.
흰 방이었다. 담당자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편은 연거푸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가 완연히 느껴졌다. 남편은 여기 오기 전 변호사에게 유료 전화 상담을 받았다. 학폭 전문을 찾을지 성범죄 전문을 찾을지 한참 고민했다는 말은 눈치깨나 없는 농담처럼 들렸다. 변호사로부터 결정적 순간까지는 최대한 말을 아끼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했다. 이윽고 교감과 학생부장이 들어왔다. 투명 파일 케이스와 태블릿PC가 탁자 위에 놓였다. 그들은 여학생 A와 B의 딥페이크 합성 사진을 만든 범인은 동 학년 남학생 C와 D임이 밝혀졌다고, 특정할 수 없는 이니셜을 사용하여 말했다.
피해 학생 측에서 엄벌을 원하기 때문에 곧 학폭위에서 처벌 수위가 결정 날 겁니다. 동시에 경찰 조사도 진행이 될 것이고요.
한마디 한마디 들을 때마다 안희는 검지 손톱 끝으로 반대편 손등을 꾹꾹, 깊이 눌렀다.
문제의 합성 이미지를 직접 전송받고 전송한 경우는 범죄 혐의가 인정될 것 같고, 오며 가며 스치듯 보았다는 다수는 증거가 휴대폰에 남아 있지 않으면 적극적 가담의 혐의를 묻기가 어렵지 않을까 저희는 일단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혁도 그에 해당한다고 했다. 남편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교감이 먼저 말했다. 그런데 혁의 경우는 일이 그보다는 복잡하다고 했다. 그의 휴대폰에서 딥페이크로 추정되는 다른 합성 이미지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나체 사진이었다. 지금 그걸 저희 아이가 만들었다는 말씀이냐고,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고, 변호사의 조언을 까맣게 잊었는지 남편이 따지듯 물었다.
본인은 자기가 만든 게 아니라고는 합니다. 온라인 사이트에서 합성본을 우연히 발견하고 저장했을 뿐이라고는 하는데, 어쨌든 혁을 통해 친구들이 돌려 보게 된 것은 맞습니다.
같은 학교 여학생의 얼굴이 아니라는 부분은 판명되었으나, 누구의 얼굴인지 모르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도 나타나지도 않고 있었다. 우선은 음란물 소지 및 유포 혐의로 교내 생활교육위원회가 열리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들은 말했다. 유기정학을 받을 수도 있다는 설명까지 듣고서 안희의 남편은 그야말로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그러면 생기부에도?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저희 아이가 어딘가에 휘, 휘말렸을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남편은 기어이 휘말렸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래서 더 조사해 볼 예정이라고 교감이 대답했다.
혹시 나중에 피해자가 정말 나타나기라도 하면,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확대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안희는 그들의 말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똑똑히 듣기 위해 줄곧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피가 맺히도록. 혁이 가지고 있었다는 문제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느냐고 남편이 요청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안희는 구역질을 시작했다. 혁을 임신하고서 지독한 입덧을 겪었었다. 그때처럼 내장 전체가 목구멍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이 끔찍한 헛구역질이었다. 학생부장이 내려받아 놓은 그 합성 사진을 흘깃 보는 순간, 안희는 무너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것이 누구의 얼굴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그건 오래전 그 아이스크림 소녀 모델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빈 운동장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터무니없는 허공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남편의 목소리가 진공 상태에서처럼 귀에 웅웅거렸다.
모르겠어. 신고, 해야, 하나.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 안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미쳤어?
남편이 갑자기 소리쳤다.
네가 엄마야?
그렇지, 내가 엄마지, 그 사실을 안희는 몸서리치도록 자각했다.
봉준호 영화 못 봤어? 김혜자. 그게 엄마야. 살인자라도 자기 새끼면 끝까지 지키는 게 엄마라고.
남편이 자신의 공포를 이런 방식으로 터뜨리고 있다는 걸 안희는 느낄 수 있었다.
아니야, 나는 그런 엄마가, 아니야.
몸이 덜덜 떨려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따로 있냐. 신고하기만 해 봐. 진짜 다 죽여 버릴 거야.
남편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나중에 기억할까. 그렇지 못하리라고 안희는 짐작했다. 안희는 자신의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자신을 진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임을 알았다.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안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남편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뼛속까지 이기적인 건 알았지만 진짜 너무 한다. 그 여자는 연예인이라고. 원래 그런 거야, 그럴 수 있는 거야.
아니야, 그럴 수 없는 거야, 그럴 수 없어, 미령은.
안희는 한사코 중얼거렸다. 뜨거운 볕이 정수리에 내리쬈다. 그들은 아직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빛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희미한 깜빡임조차 없는 어두움을 안희는 몰랐으나 거기서도 끝내 보아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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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서브리미널 안종성 여러 대의 카트가 교차 레일 지점을 충돌 없이 지나갔다. 높은 위치를 누비면서도 질서 정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출로에 다다를 때쯤 천천히 감속하더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눈동자는 천장 주행 장치의 행렬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슬픈 기분을 느끼고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가? 그러나 기록할 도구를 찾지 못한 윤무는 걷기로 했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벽과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흰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소리와 냄새, 온도, 어떤 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 윤무는 이곳을 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필경사와 무한한 흰 공간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권면에 들기 전 미리 가서 둘러볼 것을 권했다. 깨어날 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테지만 영원히 망각한 게 아니라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권면 전의 삶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필경사는 뇌의 저장 용량을 컴퓨터 저장 단위로 환산하면 2.5페타바이트에 달함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쉼 없이 활동하므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인간의 신체가 권면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기억 편람의 업로드가 끝나면 직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십 년 뒤에나 조회할 수 있다고 했다. 필경사는···. 구축 아파트에서 볼 법한 편복도를 지날 때 윤무는 재건축 직전의 폐허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마다 잡동사니가 나뒹굴거나 무가지가 쑤셔 박혀 있었다. 앞바퀴 없는 자전거도 복도를 비좁게 만들었다. 윤무는 그중 현관문이 열린 곳에 서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곳에는 회색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있었다. 그 역시 깨어난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윤무에게 여러 번이나 같은 내용을 물었고─여기 당신의 집인가요? 다른 누가 또 살고 있습니까? 식사했습니까?─결국 이들은 임장하러 온 일행처럼 나란히 집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내부는 따로 특별한 게 없는 가정집이었다. 통유리에 붙은 주먹만 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휠을 돌려 보거나 싱크대 위에 널브러진 여러 가재도구를 들춰 보던 윤무는 커피믹스를 발견하고 남성을 향해 들어 보였다. 포장 비닐이 아침의 배경 앞에서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스스로 마토메라 밝힌 남성은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를 다니고 있지만, 서울 출장 경험이 잦아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윤무는 소파에 앉은 마토메의 다부진 체격,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외형만큼이나 독특한 건 마토메의 상태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는데 호흡이 불규칙했으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윤무와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업무차 여기에 온 건가요? 윤무는 낯에 익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무대를 오며 가며 보았을 조
- 관리자
- 2026-03-01
우주의 영향 아래 임수지 언젠가 우주에게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함께 가 보자고 말한 적 있다. 거기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방을 보게 될 거야. 팅커벨은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화장실에 다녀오면 문 앞에서 두꺼비가 널 지키고 있을 거야. 두꺼비들은 착하다. 두꺼비들은 두껍두껍 울지 않아. 걔들이 울면 동그란 구슬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정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우주는 그곳은 꿈과 환상의 나라네, 하며 웃기도 했었는데. * 기사는 나를 미림슈퍼 앞에 내려 주었다. 멀어지는 택시의 후미등을 잠시 바라보다 미림슈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을 두 번 꺾어 집 앞에 서서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바다 냄새가 몸속 깊이 들어왔다. 버스터미널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분명 전화를 했는데도 할머니는 정말 내가 곧장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문을 열어 준 할머니의 짧은 파마머리가 멋대로 눌려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짜증을 조금 부리다가 곧 이불을 내어주었다. 날 밝을 때 오지, 뭐 하러 이 늦은 시간에 와.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았다. 보일러를 안 틀었나? 얼굴과 손발을 대충 씻고 작은방에 깔아 둔 이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불이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안방에서 자는 할머니를 깨워 물어볼까 고민하는 동안 내 체온에 맞춰 이불이 천천히 데워졌다. 이불을 코까지 덮은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데운 이불이 다시 나를 데우며 조금씩 따뜻해졌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가 지나 있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늘은 우주의 기일. 오늘 나는 우주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잠들 것이다. * 우주가 내 방에 머물 때 입던 품이 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는 잘 개켜 종이 가방에 넣고 옷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두었다. 나는 그걸 다시 꺼내 본 적 없다. 우주가 쓰던 면도기나 낡은 양말 같은 것들도 진작 정리했다. 이제 내 방에 우주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용 기한이 지난 음식점 할인 쿠폰 같은, 우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쓸고 닦아도 계속 생겨나는 먼지처럼 어딘가에서 자꾸만 하나씩 발견되었다. 청소를 하다 그런 것들을 찾아낸 날이면 나는 자꾸만 골똘해졌다.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있다니. 그런데 2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 2년이라는 시간은 하루이틀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사실은 하루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2년이 흘렀다고 누군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서 영화 티켓을 발견했다. 어쩌다 여기에 티켓이. 영화 제목을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그날 관객은 다섯 명뿐이었다. 재미가 없는 영화인가. 영화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므로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옆에 앉은 우주에게 작게 말했다. 전세 낸 것 같고 좋은데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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