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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매틱 블루베리

  • 작성일 2025-03-01

   오토매틱 블루베리


구소현



   1


   치와와를 닮은 거대한 구름이 서서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움직이는지 모를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지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귀에 꽂혀 있던 에어팟을 뺐다. 빠른 비트로 귓가를 울리던 테크노풍의 음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차단됐던 주변 소음이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철근 골조와 청록색 유리,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진 초대형 백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는 뼈대와 같은 구조물을 외부에 노출한 하이테크 스타일의 건축물이었다. 그녀는 콘택트렌즈나 안경을 끼지 않았는데도, 시야가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백화점 정문 앞은 붐볐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6월 15일 토요일, 오후 1시 20분. 택시 앱이 켜져 있어 확인해 보니 택시를 이미 부른 상황이었다. 지한은 어깨에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크기가 다양한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있었다. 

   택시는 6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그녀는 잠시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구글을 켜 도착지로 설정된 장소를 검색했다. ‘다이버’라는 가게였는데, 검색해 보니 마포구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그녀는 최근 주고받은 문자와 메신저 대화창을 훑어보며 ‘다이버’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상대를 찾았다. 남자 친구였다.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택시가 그녀 앞에 도착했다. 차가 오래 정차할 수 없는 장소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바로 탑승했다. 그녀는 택시에 타자마자 창문부터 내렸다. 내부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도착 예정 시간을 보니 15분 뒤였다. 택시 기사는 핸드폰에 사이버 렉카 유튜버가 악의적으로 편집한 가짜 뉴스 영상을 틀어 놓고 운전을 했다. 

   지한은 에어팟을 다시 끼려다 말고 잠시 바라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뒤졌는데, 일회용 알코올 솜을 발견했다. 그녀는 일회용 알코올 솜 포장지를 뜯어 곧장 에어팟과 자신의 귀를 닦기 시작했다. 에어팟에서 더러운 게 묻어 나온다거나,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가방 안에 있던 알코올 솜을 모두 사용했다. 



   2

 

   지한이 도착한 곳은 벽면이 거대한 수족관처럼 물로 채워져 있어, 마치 수중에서 식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블루베리가 가득 올려진 피자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이 가게의 주메뉴라며 남자 친구가 미리 주문해 둔 음식이었다. 하얀 모차렐라 치즈에 콕콕 박혀 있는 보라색 과일을 보자마자 그녀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음에도 입맛이 뚝뚝 떨어졌다. 

   “지한아. 무슨 생각해?”

   “어?”

   “딴생각하는 것 같아서.”

   “미안, 미안. 집중할게.” 

   “왜 이렇게 못 먹어. 어디 아파?” 

   남자 친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말해도 오빠는 모르잖아.’

   그는 그녀가 왜 기분이 안 좋아졌는지 알 수 없었다. 지한도 남자 친구에게 자신의 기분이 상한 이유를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의 대화도 듣는 둥 마는 둥, 피자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몸이 안 좋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지한은 들고 있던 쇼핑백부터 내팽개쳤다.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구역질을 했다. 곧 보라색 토사물이 그녀의 입 밖으로 쏟아졌다.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온 그녀는 목이 늘어난 노란색 반소매 티셔츠와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입었던 남색 반바지를 찾아 입었다. 그러고 나서야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몸이 무척이나 가볍고 개운했다. 마치 오랜 시간 바다의 깊고 깊은 구간까지 내려갔다가 이제 막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따사로운 햇볕을 느끼는 물개처럼 얼굴이 반질거렸다. 옷장 서랍에는 옷과 속옷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그녀는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집 안을 둘러보며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는지 살폈다. 

   하늘색과 붉은색 줄무늬 패턴의 이불과 베개는 그대로였다. 싱크대도 그대로임을 알고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체감상 8~9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듯했다. 실제로는 1년 6개월이 지나 있었다. 그녀가 경험한 최면 중에서도 가장 긴 시간이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있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침대에 엎드려 누워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 안에는 1년 6개월 치 일기가 적혀 있었다. 그날 있었던 일과 그날의 생각과 감정, 다음날 해야 할 일 등이 일목요연하게 쓰여 있었다.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 쓴 일기라 그런지 군더더기가 없었다. 

   예를 들어 ‘라식수술을 했다’고는 적혀 있어도, 어떤 이유로 라식수술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생략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불친절할 정도로 상세하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라식 수술을 포함해 일기에 적힌 모든 내용이 지한의 기억에는 없는 일들이었다. 

   ‘진짜? 정말?’

   그녀는 휙휙 일기장을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서 멈칫했다.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니,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최면에 걸린 자신이 무슨 일을 했어도 모두 받아들여야 했다. 규정에 있던 내용이었다. 지한은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든 페이지를 우선 반으로 접어 두었다.

   “네, 선생님. 지금 깨어났어요. 정말 선생님 말씀대로네요. 원래 예상했던 날짜보다 6개월을 더 늦게 깨어난 거 맞죠?”

   통화를 하는 동안 지한은 은행 계좌를 확인했다. 적금 통장에 상당한 금액이 쌓여 있었다. 기억이 없는 18개월 동안 매달 일정한 액수가 자동이체된 내역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동 전투, 건너뛰기 등의 기능이 있는 방치형 게임이 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 상태는 아주 좋아요. 잠을 정말 잘 자고 일어난 기분이에요. 라식 수술을 했더라고요. 안경을 쓰지 않아도 잘 보이니까 좋아요···. 라식 수술 외에는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요. 회사도 계속 다니고 있고, 남자 친구와도 계속 만나고 있는 것 같아요···. 네, 다음 주 토요일 낮 2시요? 좋아요. 네, 네.”

   달력에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적었다. 통화를 끝낸 지한은 곧장 유정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유정은 지한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녀에게 선생님을 소개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어때?”

   “뭐가?”

   “괜찮냐고.” 유정은 따로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지한도 무언가 말하려다 말았다. 바로 전에 지한이 접어 둔 페이지에는 유정과 있었던 일이 적혀 있었다. 지한은 당장에라도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규정상 일기장에 적힌 내용의 진위를 파헤치고 다녀서는 안 되었다. 쉽게 말해 최면에 걸린 자신이 한 일은 모른 척해 주어야 했다. 

   “···응 좋아. 밥 같이 먹을래? 점심 안 먹었어.” 지한은 거짓말을 했다.

   “지금은 좀 바쁜데.” 

   유정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요즘은 뭐 팔아?” 

   지한의 말에 유정은 아디다스, 나이키 같은 브랜드 운동화를 판다고 답했다. 유정은 생산된 지 여러 해가 지나 가치가 떨어진 재고 상품을 매입해 할인된 가격에 파는 사업을 했다. 등산복, 속옷, 양말, 이불, 완구류, 생활용품 등 시기마다 판매하는 상품이 달랐다. 빈 상가 건물에 1달 월세를 주고 소위 말해 떨이, 땡처리 판매를 했다. 지금 지한이 배를 깔고 누워 있는 이불도, 유정이 이불을 팔았을 때 받아 온 상품이었다. 

   “너 지금 어디서 운동화 팔고 있는데?” 

   지한은 기어코 유정에게서 주소를 받아 냈다. 지금은 정말 바빠서 올 거면 내일 오라는 유정의 말에 지한은 알겠다고 답했다. 

   유정과 전화를 끊고 지한은 다시 남은 일기를 읽었다. ‘약을 먹어 졸리다’는 문장이 자주 눈에 보였다. 그녀는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 사이에 자살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다. 

  

 

   3


   이번이 세 번째였다. 최초의 최면에서는 1개월을 잠들어 있었고, 두 번째 최면에서는 3개월이었다. 기간이 월등히 늘어나자 지한은 각종 부작용 사례가 적힌 주의사항 자료를 모두 읽고, 추가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선생님은 지한에게 붉은색 벽돌집 사진을 보여 주며 장기 최면을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려 했다. 그는 이 과정을 잘 쌓아 둔 벽돌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딱딱하게 굳히는 작업과 같다고 말했다. 

   흐물흐물해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떤 벽돌은 모양이 달라져, 나중에 다시 굳혀졌을 때 맞지 않는 퍼즐처럼 억지로 끼워져 있거나,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또 접착제 역할을 하는 벽돌 사이사이에 발라 둔 줄눈 시멘트가 녹아, 기존의 유기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지한은 여기 온 사람 중 몇 명이나 1년 이상의 장기 최면을 원했었는지 물었다. 선생님의 답을 듣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최면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전부 장기 최면을 원했고, 전부 진행했다고 답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을 삭제시켜 준다는데 누구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한은 망설이다 유튜브에 ‘블루베리’를 검색했다. 그녀가 찾는 영상은 과일 블루베리가 아닌 명품 브랜드의 광고였다. 최면에 걸리기 직전까지 그녀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였다. 당시 100주년을 맞이한 명품 브랜드는 한정판으로 아이섀도, 립스틱, 매니큐어, 향수를 동시에 출시했다. 이 제품들의 컬렉션 이름이 블루베리였다. 나라별로 다르게 광고를 제작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지한이 일하는 광고대행사는 업계에서 트렌디한 광고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들어오는 곳이었다. 지한은 미디어 제작부서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한이 유튜브에서 보려는 영상은, 그녀가 직접 담당한 광고였다. 

   영상은 현재로부터 1년 4개월 전에 업로드되었다. 영상을 재생하자 보라색 모래가 깔린 해수욕장에 몸 전체에 보라색 글리터를 바르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 모델이 나와 워킹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라다, 디올, 캘빈 클라인 등의 쇼에 섰던 한국 모델이었다. 그 뒤로 파도를 가르며,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 한 명이 서프보드를 타고 등장했다. CG로 만든 거대한 블루베리 행성에서, 보라색 가스 구름이 폭발하는 시점부터는 스펙타클하고 다이나믹한 장면이 이어졌다. 각각 보라색 아이섀도와 보라색 립스틱, 보라색 매니큐어를 바른 세 명의 여자 모델들이 목표 지점에 있는 보라색 향수병을 차지하기 위해 달리기를 했다. 자동차의 표면처럼 광택감이 돌고, 매끈한 영상이었다.

   우주의 카우보이와 카우걸들이 블루베리 행성의 해수욕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는 콘셉트의 광고였다. 하지만 지한은 제작 과정 절반을 기억하지 못했다. 최면에 걸린 자신이 담당했던 광고를 보는 기분은 묘했다. 프로젝트를 맡고 있던 당시, 그녀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우울증 증상과 어머니의 치매가 악화된 시기였다. 설상가상으로 오피스텔 싱크대 벽면에서 개미가 자꾸 나왔다. 표면이 아닌 내부에서 나오고 있어, 박멸하려면 외벽을 전부 뜯어내야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에는 싱크대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개미가 보일 때마다 개미 약을 뿌렸다.

   그녀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 틈 사이로 깨알만 한 개미들이 지나다녔는데, 회사에 가서는 흠이 없는 번쩍거리고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몰두해야 했다. 모델 선정부터 시작해, 패션, 촬영 기법, 영상의 색감, 조명, 미술, CG, 사운드 등 모든 부분이 빠짐없이 세련되고 신선해야 했다. 현재 시점에서 사람들이 예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 유행하는 것, 새롭다고 생각하는 것 등을 빠르게 감지하고 선점해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 하긴 했네.’ 

   엎었다가 다시 만들기를 반복하며 오리무중에 빠졌던 프로젝트가, 하루 만에 완성된 결과물로 남아 있었다. ‘이걸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루 만에 완성된 결과물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영상을 다 본 지한은 메신저로 들어가 밀린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업무 관련 연락이 많이 왔는데, 맥락을 파악해 답장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지한은 대화창을 한참 위로 올리고, 서로 주고받은 파일을 본 후에야 답장할 수 있었다. 저장 유효 기간이 끝난 파일은 노트북에서 파일명을 검색하니 다행히 저장해 둔 게 있었다.

   1년이 지났지만, 업무량은 여전히 살벌했다. 동시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만 5건이었다. 캘린더를 확인하니 월요일에만 광고주 미팅, 모델 소속사 미팅, 외주 프로덕션 업체 미팅이 연달아 있었다. 실수를 피하려면 업무 내용을 꼼꼼히 숙지해야 했다.

   그녀는 아까 들고 있었던 쇼핑백의 내용물을 뒤늦게 확인했다. 월요일 미팅에서 입으려고 산 옷 같았다. 전부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공교롭게도 이 브랜드들의 대표는 모두 SNS에서 최소 30만 이상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들이었다. 지한은 그들이 올린 사진들을 쭉 훑어보고, 그들이 만든 브랜드의 패션 필름도 찾아보았다. 아까 본 블루베리 광고가 얼마나 촌스러워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회사에서 제작하는 영상들은 만들고 있는 와중에도 상해버려, 계속 다시 만들어야 하는 음식 같았다. 한 번 재밌게 보고 난 후 금방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눈사람 같기도 했다. 그녀는 눈사람을 계속 만들었다. 눈사람은 금방 녹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허무한 짓을 반복했다.

   한참 동안 현재 사람들이 트렌디하다고 생각하는 이미지가 무엇인가를 찾아다녔다. 끊임없이 ‘aesthetic’이라는 단어를 넣어 검색하고, 사진을 저장하고 또 저장했다. 한번 사진을 찾기 시작하면 눈이 아파도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너무 많은 이미지를 보다 보면, 자신이 꼭 사람보다는 빈 통, 물건을 담는 어떤 용기처럼 느껴졌다. 하얀색 플라스틱 원형 통에 어느 날에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채워졌고, 어느 날에는 파란색 가글액이 채워졌다. 또 어느 날에는 초코 쿠키 반죽이, 어느 날에는 찐득한 블루베리 잼이 채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 자신이 아닌 다른 물질들이 채워질 때마다 이물감을 느꼈다. 빈 통이 가득 채워지면 사람들이 찾아와 통에 담긴 것들을 푹푹 퍼 갔다. 그게 자꾸 반복되다 보니···.

   “일이 재밌고 즐거운데 슬퍼.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항상 슬퍼져.”

   “그게 또 무슨 말일까?”

   한번은 남자 친구에게 이 기분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귀엽다는 듯 볼을 꼬집었다. 그는 지한의 말을 종종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그녀를 더 슬프게 했다. 하지만 지한은 남자 친구와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헤어지지 못했다. 이 부분도 그녀가 우울해진 이유 중 하나였다.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게 되는 순간, 자신을 더욱 싫어하게 될 것 같았다. 

   “야옹”

   집 밖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녀는 무한 사진 스크랩의 굴레에서 벗어나 겉옷을 걸쳤다. 납작한 화면 대신 귀여운 고양이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한이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울음소리는 사라졌다. 나온 김에 그녀는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샀다. 하얀 통에 해로운 연기를 가득 채웠다. 이제야 좀 신체기관을 가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애초에 지한에게 맞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때 오랜 기간 백수로 지냈다.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지한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유정의 곁에 함께 앉아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유정의 사업은 사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그녀는 길바닥에 은박 돗자리를 깔고 양말 열 켤레를 만 원에 팔았다. 길가에 간이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두 젊은 여자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쟤는 부끄럽지도 않나. 난 우리가 너무 부끄러운데.’ 

   지한은 자신과 유정이 어떻게 보일지 알았다. 확실히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어렵게 취업한 만큼 지금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다시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한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일찌감치 실직 후 재취업에 실패했다.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아직은 초기라 건망증이 조금 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점점 더 상태는 안 좋아질 것이다. 다시 좋아지는 길은 없고, 나빠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원하는 선택지가 없는 환경에서 지한은 암담해졌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데, 갈 곳이 없었다. 현재의 삶에서 문제점을 발견해 해결책을 생각해 보면, 더 나쁜 문제가 드러났다. 지한의 나쁜 생각은 더 나쁜 생각을 불러들였다.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채 서서히 말라 죽어 가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이 되었다. 

   어느 스포츠용품 브랜드 광고 촬영장에서, 지한은 갑자기 세상이 너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자체가 꼭 어렸을 때 자신을 이쑤시개로 찌르고 갔던 변태 새끼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는데도, 자신이 잘못된 곳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먹다 남긴 햄버거조차 잘못되어 보이는 곳에서 그녀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촬영이 끝날 때까지 촬영장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은 어두운 현장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은 까맣게 죽어 갔다. 

   또 그녀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과 자신을 자꾸만 동일시했다. 최고 기온이 30도가 넘었던 여름날이었다. 이번에는 제로 탄산음료 광고 촬영 현장이었다. 그녀는 얼음물과 신제품 음료수 캔이 가득 든 파란 아이스박스를 보고 울었다. 폭염에 야외촬영 현장이라 스탭들을 위해 준비된 음료였다. 아이스박스가 바닥에 놓이자마자 사람들이 몰려와 박스에 손을 집어넣었다. 음료수 캔을 손에 든 채 얼음물을 휘휘 저었다가 빼 가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스박스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이런 부분마저도 아이스박스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아이스박스가 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이스박스는 아이스박스이기 때문이다. 아이스박스는 아이스박스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녀일 뿐이었다. 누군가 지한이 우는 걸 발견해도, 아마 '여기서 왜 울지?'라는 생각만 할 것이다. 

   왜 이렇게 즐겁지가 않고, 행복하지가 않은 걸까. 그녀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매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가 죽으면 가족들이 먼저 알게 되겠지. 그리고 회사 사람들도 알게 되겠지. 가까운 친구들도, 이제는 멀어진 사람들도 알게 될지 몰라. 모두가 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왜 죽고 싶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겠지.’ 그건 좀 열 받고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감싸 쓸어내렸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용기가 없어 그녀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흐지부지한 나날을 보냈다. 

   “도움이 될 거야.”

   지한의 우울증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유정이었다. 지한이 유정에게 뜬금없이 “그때 많이 아팠지? 너무 아팠을 것 같아.”라고 말했던 날이었다. 유정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지한에게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지한에게 죽지 않으면서도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남산타워 근처에 위치한 센터는 한 오피스 빌딩 건물 지하에 있었다. 내부 공간이 상당히 넓고 쾌적했다. 지한은 선생님을 만났다.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일정을 잡고, 센터를 나오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최면에 걸리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면 마취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지한은 유정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우선 이런 곳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어느 해, 몇 년 동안 최면에 걸려 있었던 건지, 혹시 지금도 걸려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유정을 만나면 입이 안 떨어졌다. 

   ‘내일 올 거야?’ 

   지한은 유정이 보내온 문자를 보기만 하고 답장은 하지 않으면서 담배를 한참 피웠다.



   4


   다음 날 지한은 유정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충동적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까지 살았던 동네를 찾아갔다. 보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동안은 감정 조절이 힘들 수 있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바로 보라는 말을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선생님은 일상에 큰 타격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충동을 충분히 해결해야 울퉁불퉁해진 벽돌벽이 조금은 평평해진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지한이 살던 아파트는 복도식이었다. 예전에는 베이지색, 하늘색, 갈색이 섞인 색깔이었는데, 지금은 회색, 레몬색, 살구색으로 새롭게 칠해져 있었다. 지한은 아파트 후문으로 나와 세 칸짜리 낮은 계단에 걸터앉아 맞은 편에 있는 느티나무를 바라봤다. 그리고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지한은 이곳에서 사람이 투신하는 걸 두 번이나 목격했다. 

   한 명은 현재 지한이 바라보고 있는 느티나무에 떨어져 살았고, 한 명은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처음 목격한 사람은 10층에 살던 모르는 여자였다. 중학교 3학년 10월 어느 하굣길이었다. 지한은 지금 앉아 있는 계단의 반대편에서 아파트 후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여자가 떨어진 위치와 가까운 곳에 베란다 창문이 있었는데, 여자의 피와 살점 일부가 창문에 튀었을 정도로 상황이 끔찍했다. 현실감각이 잠시 떨어졌다가, 곧 사람의 신체가 훼손되는 순간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포를 체감했다. 그리고 그 공포가 생각보다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한은 배탈이 났을 때처럼, 윗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시간으로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사람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한은 다시 어린 시절 이쑤시개가 손가락과 팔뚝을 뚫던 고통을 느꼈다.

   지한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한 성인 남성이 초등학생의 몸을 이쑤시개로 찌르고 다니다 경찰에 붙잡혔다. 피해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지한도 그중 하나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잠시 친구들과 모여 자전거를 타고 놀던 날이었다. 처음 찔렸던 부위는 팔뚝이었다. 두 번째로는 지한이 등을 돌리고 도망가려 하자 팔뚝을 꽉 잡아 쥐고 등을 푹 찔렀다. 세 번째로는 그녀의 왼쪽 손을 꽉 잡고 검지 첫마디를 가장 깊게 찔렀다. 손을 빼내려 애를 썼지만, 남자가 더욱 힘을 꽉 쥐는 바람에 빼낼 수가 없었다. 딱 그렇게 세 번을 찌르고 남자는 빠르게 달아났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살이 다 뚫려 있었다. 

   어른들은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이후로 살면서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마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고, 어디선가 이쑤시개가 날아와 자신의 몸을 뚫어 오는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투신자살한 여자를 목격했을 때도 그녀는 누군가에게 손을 꽉 잡힌 채 어딘가가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당일에는 밥을 아예 먹지 못했고, 다음 날 아침에도 구역질을 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지한의 별명은 포옹 귀신이 되었다. 그녀는 팔이 긴 편이었다. 긴 팔로 누군가를 안고 있거나, 안겨 있어야 했다. 그녀는 생일에 친구들로부터 안고 잘 수 있는 애착 인형을 선물 받기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녀는 한 번 더 같은 장소에서 투신자살하는 여자애를 목격하게 되었다.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가방 속에는 책방에서 빌린 만화책 스무 권이 들어 있었다. 가방이 너무 무거워 허리를 신경 쓰며 걷고 있던 도중이었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유정이 아파트 옥상에서 느티나무로 떨어졌다. 유정과는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아 등하굣길이 겹쳤다. 대화를 몇 번 나눈 적도 있었고, 체육복을 빌리러 갔던 적도 있었다. 

   “어떡해. 많이 아파? 조금만 참아.”

   “아파···.”

   “조금만 참아. 진짜 어떡해.”

   유정은 떨어지면서 다리가 제대로 꺾인 듯했다. 지한은 나뭇가지에 걸려 흐느끼고 있는 유정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곧 구급차가 올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유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가 허벅지를 관통해 있었다. 유정의 고통이 전이된 것처럼 지한은 얼굴을 찡그렸다. 

   “괜찮아. 진짜 괜찮아.”

   “너무 아파···.”

   구급차가 오고 소방대원들이 유정을 나무 밑으로 내려 줄 때까지 지한은 그 공간에 함께 있었다. 이날도 그녀는 밥을 먹지 못했다. 손을 너무 떨어 만화책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할 충격적인 일을 두 번이나 목격한 그녀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잠들어야 할 시간에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지한은 왠지 모르게 그 시간에 거기 있었던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았다. 하굣길에 만화책을 빌려서도 안 됐고,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러 나가서도 안 되었다. 운이 나빠서 생긴 일이 아니라, 자신의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입이 바짝 말랐다. 그만 생각하고 자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꺼지지 않는 라디오가 머릿속에서 뜨거운 열을 내뿜었다. 그녀는 새벽 5시까지 잠들지 못하다 겨우 잠들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은 ‘살아 있는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쑤시개로 살갗이 뚫리는 것과 단 한 번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는 것 중 어떤 고통이 조금 더 나을까’였다. 생각보다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그때 두 개의 다른 고통에 집중하다 자연스럽게 몸을 웅크렸었다. 

   지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느티나무 잎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지금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떨어지면, 나무로 떨어질지, 바닥으로 떨어질지 궁금했다. 나무로 떨어진 유정은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고, 아스팔트로 떨어진 여자는 죽어야 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나무가 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한 여자가 죽었고, 한 여자가 살았다. 그렇다면 저 나무는 죄책감이 클까, 억울함이 클까, 분노가 클까. 그녀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고팠다. 지한은 충동적으로 이곳을 찾아온 게 조금 후회됐다. 애초에 왜 왔는지도 알 수 없어서 짜증이 났다. 감정 조절이 잘 안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집에 다시 돌아가는 길에 남자 친구와 유정에게서 거의 동시에 연락이 왔다. 지한은 남자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유정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지한이 고등학교에 살던 동네에 다녀왔다고 말하자 유정은 알만 하다는 듯 왜 거기에 갔느냐고 더 묻지 않았다. 

   “너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

   “언제?”

   “나 나무에 걸려 있었을 때, 네가 계속 나한테 말 걸었을 때 말이야.” 

   지한은 그때 아무 말이나 해대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파서 울고 있는 유정을 달래기 위해 “괜찮아”라는 말을 제일 많이 했었던 것 같았다. 

   유정은 지한이 “야 너 정말 운이 좋았어. 너는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라고 말했었다고 했다. “내가?” 기억이 정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왜 그런 말을 한 거냐는 유정의 말에 지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유정은 지한의 말투가 진짜 웃겼다고 했다. 

   “그때 아파 죽겠는데도, 네 말에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었는데. 그 뒤에도 학교에 다시 갔을 때도 네가 날 찾아와서 다정한 말을 많이 해 줬잖아. 등하교도 같이하자 그러고.” 

   지한의 얼굴이 빨개졌다. 오늘 유정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그녀의 얼굴을 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그녀는 학교로 돌아온 유정을 찾아갔던 날을 명확하게 기억했다. 유정이 학교에 오지 않는 동안 소문이 돌았다. 전교생이 유정이 투신자살 시도를 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한은 유정의 가정사, 친구 관계, 학교 성적, 그녀가 먹는 약, 성적 지향, 평소 성격 등 그녀의 사생활을 전부 알게 되었다. 유정을 주제로 한 대화에서 한마디도 얹지 않고 잠자코 듣기만 했기 때문에 그날 유정과 지한이 같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한은 집에 다 도착해서야 유정과 전화 통화를 끊었다. 지한은 유정이 살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뿌듯해졌다. 지한은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는 유정을 직접 받아준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유정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유정도 자신을 살리고 싶어서 선생님을 소개해 준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죽여 주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양치질을 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최면에 걸리는 시간을 아주 길게, 대략 100년으로 잡는다고 치면, 사실상 최면에 걸리는 당사자에게는 안락사나 다름없었다. 당사자의 자아는 죽고 최면에 걸린 사람만 남게 된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깨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계속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 살아 있는 걸까. 그녀의 생각은 끊임없이 자가 증식했다. 깨어 있으면 끊임없이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까 생각 좀 그만하고 그냥 다시 자고 싶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최면에서 깨어나면, 바로 다시 최면에 걸릴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다. 적어도 2주 정도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다음 최면을 진행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때문에, 그녀는 내일 출근을 해야 했다. 졸음을 참고, 하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업무 파일을 열었다.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5


   1년 6개월 동안 트렌드가 많이 바뀌는 바람에 적응하는 데 며칠간 고생을 했다. 현재 유행하는 단어와 말, 인기 있는 음악, 영화, 드라마, 연예인, 패션, 올해의 컬러, 잘 팔리는 브랜드, 정치적, 사회적인 여러 사건 등을 섭렵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목요일에는 한 프랜차이즈 카페 브랜드의 광고 촬영이 있었다. 광고모델은 배우 김성전이었다. 지한은 연예인을 봐도 별 흥미가 없었는데, 김성전은 달랐다. 그가 과거 지한의 남자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치과의사였다. 회사 동료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외모도, 직업도 번듯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지한에게도 다정한 연인이었다. 그는 지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선뜻 큰돈도 빌려주었다. 지한은 아직도 그에게 그 돈을 갚지 못했다. 그는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지한은 돈을 갚아야 그와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와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대화하던 도중에 종종 그녀는 그의 말을 견뎌야 했다. 어딘가 서로 핀트가 안 맞았는데, 그는 그녀에게 맞춰 줄 수가 없었다. 그가 일부러 맞춰 주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고, 정말 불가능해서였다. 

   가령 그녀가 남자 친구와 하고 싶은 대화는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달걀을 보여 주고, 자신의 소중한 달걀을 상대방의 마음속에 넣어 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달걀을 너무나 쉽게 깨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깨 버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대상, 어떤 사건, 어떤 생각에 대해 말할 때마다 마음속에서 두 대의 자동차가 충돌했다. 하지만 최대한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른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가 더 싫어지게 되었다. 남자 친구가 김성전과의 이야기를 꺼냈던 건 술집에서였다. 단둘이 있던 술자리는 아니었고, 사람이 대여섯 명 정도 모였었다. 당시에 김성전은 맥주 광고모델이었다. 그의 포스터가 술집 벽에 붙어 있었다. 남자 친구가 김성전과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은 지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는 무용담처럼 김성전과의 일화를 늘어놓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 지한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누가 들어도 남자 친구가 가해자이고, 김성전이 피해자인 학교 폭력 사건이었다. 

   술자리가 끝난 후 남자 친구는 그녀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숙박이 가능한 호텔을 찾아보는 그를 바라보며 그 순간만큼은 지한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속이 마치 휘발유를 들이부은 것처럼 불타고 있었다. 

   김성전은 시원한 인상을 가진 젊고 잘생긴 남자 배우였다. 지한은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각색한 스릴러 사극으로, 그해 흥행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광고 촬영 당일에 문제가 생겼다. 김성전이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오전 8시에 시작했어야 하는 촬영이 11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시작되었다. 김성전이 차에서 나오지 않는 3시간 동안 촬영 현장에 있던 스태프 전원이 손을 놓고 대기해야 했다. 촬영장 외부는 흡연자들로 가득했다. 지한은 화가 난 광고주 측에서 이날 촬영을 엎은 다음 그녀의 회사에 책임을 물게 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했다. 동시에 기획사 측과 소통하며 김성전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스크린 속에서 이마를 훤히 드러낸 채 힘 있게 활시위를 당기며 소현세자를 연기하던 김성전은 앞머리를 내리고 병든 닭처럼 촬영 현장에 나타났다. 차에서 간신히 나온 그는 촬영장에 있는 모든 스태프를 향해 고개 숙여 사과한 뒤 촬영에 들어갔다. 

   쉬는 시간, 김성전은 지한을 따로 찾아와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김성전에게 자신의 남자 친구를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그에게 선생님의 번호를 알려 주었다. 선생님을 소개하는 건 단 한 명에게만 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지한은 김성전이 가장 최근에 나온 영화를 찾아봤다. 그는 리플리 증후군이 있는 남자 승무원으로 나왔다. 그녀는 최면에 걸려 빈껍데기만 남은 김성전을 상상했다. 또 최면에 걸려 마음이 편안해진 김성전을 상상했다. 그가 최면에 걸리기 전 어떤 규정을 쓸지도 궁금했다. 

   최면을 진행하기 전 지한은 10개의 규정으로 된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최면에 걸리는 사람이 꼭 해야 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목록을 적는 서류였다. 지한이 왜 하필 10개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은 10개 이상의 목록을 주입시키면, 머릿속에서 혼선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7개의 목록은 이미 작성되어 있었다. 반인류적 행위, 범법행위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머지 3개만 당사자가 작성하면 되었다. 지한은 이 목록을 작성하는 데 한참을 고민했다. 선생님은 마지막에 적힌 문장을 읽고 의아해했다. 지한이 작성한 목록은 아래와 같았다.


   1. 매달 월급의 3분의 1을 저축하세요. 

   2. 남자 친구와 성관계를 하게 되면 피임을 철저히 하세요.

   3.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6


   선생님이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꺼내 왔다. 이제 이 일을 관두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센터를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계획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주 긴 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전에 지금까지 최면을 진행한 사람들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이번이 마지막이며, 결심이 선다면 원하는 시간만큼 진행해 주겠다고 말했다. 

“이제는 삶에 아무 보람도 느껴지지 않아서요. 즐겁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아요.”

선생님은 이 일을 시작할 때 나름의 사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명은 오래전에 엉망이 되어 버렸고, 지금은 왜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한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배워볼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재능이 있어 보인다며, 지한에게 이 일을 물려주고 싶어한다고 했다. 지한은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다. 결국, 재워주는 사람은 사라지고, 잠들고 싶은 사람만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넌 할 거야?” 지한은 유정이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그녀는 선생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유정과 함께 카페에 왔다. 최면에 걸리기 전 지한이 마지막으로 본 유정은 긴 머리였는데, 지금은 중단발 기장이 되어 나타났다. 

   “난 안 할 거야.” 유정이 깔끔하게 답했다. 지한은 당황했다. 그녀는 아직 고민하고 있었다.

   “아예 안 해? 1년도?”

   “응.”

   “왜 안 하는데?”

   “그냥 죽기 싫어서.”

   “죽는 건 아니잖아.”

   “그게 죽는 거지 뭐. 너도 알잖아.” 

   유정이 지한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지한은 눈을 피했다. 그녀도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선생님이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일지가 궁금했다. 센터에는 방이 많았다. 예약 일정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유정이 말한 대로, 마지막 최면을 죽음으로 이해하게 되면,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는 집단 자살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안 해서 후회하면 어떡하지.” 지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후회하면서 살아야지. 넌 하고 싶으면 해. 난 안 해.” 

   “넌 내가 했으면 좋겠어?”

   “내가 하라고 하면 할 거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야? 왜 그런 중요한 선택을 나한테 맡겨.”

   “그냥 참고만 할게. 선택은 내가 할 테니까 답해 봐.”

   “말하기 싫어.”

   “왜 죽기 싫어졌는데? 아니 왜 살고 싶어졌는데?”

   “그냥이라고 했잖아.” 

   대화가 좀처럼 진전이 되지 않자, 지한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유정의 표정도 점점 안 좋아졌다.

   “나도 알려 줘. 나는 여전히 사는 게 버겁고 죽고 싶단 말이야.” 

   지한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유정의 눈이 커졌다. 

   “야 울지마.” 

   유정이 급히 지한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나도 이 세상이 너무 좋다거나, 막 너무 살고 싶다거나 한 건 아니야. 그냥 예전보다는 힘들고 재미없는 게 나아졌어.”

   “나도 그렇게 될까?” 

   지한이 물었다. 유정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기대 없이 던진 말이었기 때문에, 지한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 말이나 해 줄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유정이 입을 열었다.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한의 옆자리로 옮겼다. 

   “나한테 나도 안 할게, 라고 말해 봐.”

   “나도 안 할게.” 지한이 유정의 말을 따라 했다.

   “야 너 정말 운이 좋았어. 너는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유정이 지한이 했었던 말을 돌려줬다. 유정은 지한에게 뭔가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고, 느껴지는 게 없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유정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한은 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자신이 최면에 걸려 있는 1년 6개월 동안 유정도 최면에 걸려 있었느냐고 물었다. 유정은 아니라고 답했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유정은 침을 삼켰다. 한숨도 푹푹 쉬었다. 

   “일기에 적혀 있었지?” 

   “응.” 

   “다시 만나서 얘기할까?”

   “그래.”

   지한은 다시 유정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7


   “그만두면 되는데, 네가 못 그만두는 거잖아.”

   지한은 거대한 블루베리 립스틱에 자신의 몸이 짓이겨지는 꿈을 꿨다. 꿈이라 립스틱이 말도 했다. 립스틱은 아주 우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새롭게 리뉴얼된 블루베리 컬렉션 광고를 또 맡게 되었다. 은은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제품이 꿈까지 침범해 그녀를 괴롭혔다. 꿈에서 그녀의 뼈와 근육은 무자비하게 으깨졌다. 끔찍한 꿈을 꾸고 그게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크게 안도했다. 전기장판을 틀고 자 등이 땀으로 축축했다. 옆에는 유정이 잠들어 있었다. 유정도 땀을 많이 흘리며 자고 있었다. 

   어제 지한은 집에 사람을 불러 싱크대 하부를 다 뜯어냈다. 나무 합판에서 개미들이 번식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물에 젖어 삭아 버린 나무 합판을 모두 제거하고, 새로운 나무판으로 교체했다. 작업은 총 3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그녀는 더는 개미도 나오지 않고 새것이 된 싱크대를 한참 감상했다. 그리고 집에 유정을 불러 놀았다. 

   지한은 유정과 헤로인 중독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봤다. 영화를 꽤 감명 깊게 본 유정이 영화 속에 나오는 장소에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한은 다음 달에 성과금이 나오는데, 그 돈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캠코더도 사서 어설프게 영화도 찍어 보자는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쉬지 않고, 재밌는 대화를 많이 했다. 자기 직전에는 목이 아플 정도였다.

   지한은 팔을 뻗어 유정의 손을 잡았다. 손에 땀이 많이 나 있었다. 지한은 유정의 팔이 접히는 부분에도 손을 넣었다. 그곳에도 땀이 차 있었다. 머리카락 속에도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나 땀이 조금 나 있었다. 지한은 유정의 몸에서 땀이 난 그런 곳만 찾아 만졌다. 가슴이 뛰고 소름이 돋을 정도의 쾌감이 올라왔다. 유정의 몸에 난 땀을 몰래 쓸고 만지면서 지한은 소리 죽여 웃었다. 

   “나 이제 어떡하냐.”

   지한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용기도 없고 답도 없었다. 회피형에 비겁하고 속물이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지도 못했고, 회사도 그만두지 못했다. 하루빨리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선생님과 일정도 잡아 두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왜 이렇게 이 순간은 가슴이 뛰고 벅차는지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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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01
서브리미널

서브리미널 안종성 여러 대의 카트가 교차 레일 지점을 충돌 없이 지나갔다. 높은 위치를 누비면서도 질서 정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출로에 다다를 때쯤 천천히 감속하더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눈동자는 천장 주행 장치의 행렬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슬픈 기분을 느끼고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가? 그러나 기록할 도구를 찾지 못한 윤무는 걷기로 했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벽과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흰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소리와 냄새, 온도, 어떤 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 윤무는 이곳을 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필경사와 무한한 흰 공간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권면에 들기 전 미리 가서 둘러볼 것을 권했다. 깨어날 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테지만 영원히 망각한 게 아니라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권면 전의 삶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필경사는 뇌의 저장 용량을 컴퓨터 저장 단위로 환산하면 2.5페타바이트에 달함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쉼 없이 활동하므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인간의 신체가 권면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기억 편람의 업로드가 끝나면 직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십 년 뒤에나 조회할 수 있다고 했다. 필경사는···. 구축 아파트에서 볼 법한 편복도를 지날 때 윤무는 재건축 직전의 폐허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마다 잡동사니가 나뒹굴거나 무가지가 쑤셔 박혀 있었다. 앞바퀴 없는 자전거도 복도를 비좁게 만들었다. 윤무는 그중 현관문이 열린 곳에 서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곳에는 회색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있었다. 그 역시 깨어난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윤무에게 여러 번이나 같은 내용을 물었고─여기 당신의 집인가요? 다른 누가 또 살고 있습니까? 식사했습니까?─결국 이들은 임장하러 온 일행처럼 나란히 집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내부는 따로 특별한 게 없는 가정집이었다. 통유리에 붙은 주먹만 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휠을 돌려 보거나 싱크대 위에 널브러진 여러 가재도구를 들춰 보던 윤무는 커피믹스를 발견하고 남성을 향해 들어 보였다. 포장 비닐이 아침의 배경 앞에서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스스로 마토메라 밝힌 남성은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를 다니고 있지만, 서울 출장 경험이 잦아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윤무는 소파에 앉은 마토메의 다부진 체격,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외형만큼이나 독특한 건 마토메의 상태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는데 호흡이 불규칙했으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윤무와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업무차 여기에 온 건가요? 윤무는 낯에 익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무대를 오며 가며 보았을 조

  • 관리자
  • 2026-03-01
우주의 영향 아래

우주의 영향 아래 임수지 언젠가 우주에게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함께 가 보자고 말한 적 있다. 거기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방을 보게 될 거야. 팅커벨은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화장실에 다녀오면 문 앞에서 두꺼비가 널 지키고 있을 거야. 두꺼비들은 착하다. 두꺼비들은 두껍두껍 울지 않아. 걔들이 울면 동그란 구슬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정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우주는 그곳은 꿈과 환상의 나라네, 하며 웃기도 했었는데. * 기사는 나를 미림슈퍼 앞에 내려 주었다. 멀어지는 택시의 후미등을 잠시 바라보다 미림슈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을 두 번 꺾어 집 앞에 서서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바다 냄새가 몸속 깊이 들어왔다. 버스터미널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분명 전화를 했는데도 할머니는 정말 내가 곧장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문을 열어 준 할머니의 짧은 파마머리가 멋대로 눌려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짜증을 조금 부리다가 곧 이불을 내어주었다. 날 밝을 때 오지, 뭐 하러 이 늦은 시간에 와.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았다. 보일러를 안 틀었나? 얼굴과 손발을 대충 씻고 작은방에 깔아 둔 이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불이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안방에서 자는 할머니를 깨워 물어볼까 고민하는 동안 내 체온에 맞춰 이불이 천천히 데워졌다. 이불을 코까지 덮은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데운 이불이 다시 나를 데우며 조금씩 따뜻해졌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가 지나 있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늘은 우주의 기일. 오늘 나는 우주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잠들 것이다. * 우주가 내 방에 머물 때 입던 품이 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는 잘 개켜 종이 가방에 넣고 옷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두었다. 나는 그걸 다시 꺼내 본 적 없다. 우주가 쓰던 면도기나 낡은 양말 같은 것들도 진작 정리했다. 이제 내 방에 우주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용 기한이 지난 음식점 할인 쿠폰 같은, 우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쓸고 닦아도 계속 생겨나는 먼지처럼 어딘가에서 자꾸만 하나씩 발견되었다. 청소를 하다 그런 것들을 찾아낸 날이면 나는 자꾸만 골똘해졌다.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있다니. 그런데 2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 2년이라는 시간은 하루이틀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사실은 하루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2년이 흘렀다고 누군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서 영화 티켓을 발견했다. 어쩌다 여기에 티켓이. 영화 제목을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그날 관객은 다섯 명뿐이었다. 재미가 없는 영화인가. 영화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므로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옆에 앉은 우주에게 작게 말했다. 전세 낸 것 같고 좋은데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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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독갤빌런

    잘 읽었습니다.

    • 2025-03-02 19:33:21
    독갤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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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다곰젤리

    불안한 현실에 표류하는 화자에게 자살이라는 키워드는 하나의 존재적인 해방구이다. 하나 최면이라는 걸 유정을 통해 알게 되면서 현실을 망각하는 동안만은 자살을 잊게 되었다. 최면의 시간이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곤 하는 현실의 시간. 그렇다고 존재의 흔적이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주체적인 발화가 연계되는 지점인 일기를 통해 1년 6개월 동안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면서 자살에 대해 재고해보는 화자는 최면을 통한 해방이 결국엔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반전의 묘미가 읽혀졌는데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의 시간이 이제는 살아있는 동안은 실제로 죽을 수 없다는 초현실적인 시간으로 지양된다는 점이다. 무의식의 시간과 의식의 시간이 서로 섞이며 반전되다가 하나의 시간적 합일을 이루면서 화자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과거의 기억과 부조리한 단면들을 그저 꿈으로,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로 생산한다는 건 그야말로 주체성의 극치가 아닐까? 신이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하듯이 말이다. 고로 이 소설의 제목이 오토매틱 블루베리라는 건 자못 의미심장하다. 결말부에 지한은 일부러 유정의 신체 부위 중 땀이 찬 곳만 찾아서 만지는데 성애적 긴장감이 느껴진다기보다 무의식적 공간의 탐색으로 비쳐졌다. 눈으로 볼 수 없어 감촉으로만 그런 곳들을 찾아내는 건 상기한 내용을 압축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아직 현실은 암담하기 그지없지만 그 탐색의 순간만큼은 황홀하다.

    • 2025-04-01 00:54:07
    판다곰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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