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싶습니다
- 작성일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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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중앙의 헌병에게 일 보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어디에서도 헌병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처음 우리를 감시한 헌병은 이목구비가 꼭 모아이 석상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아 해병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높은 기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물론이거니와 1호 창과 5호 창의 수감자들도 입 열 생각 못하고 조용했다. 모아이는 근무 내내 삶의 의욕을 모두 잃은 사람처럼 공허하게 허공만 봤다. 우리가 있다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러다 혼잣말하듯 이런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다.
“북한군··· 안 쳐들어오나.”
이상하게도 그건 농담이나 그냥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 북한군이 쳐들어오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 같았던 것이다. 마치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어느 신도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헌병은 북한군이랑 싸우나? 아님 그때도 여기를 지키려나? ··· 그런데 그땐 대체 무엇을 지킨단 것인가?
수감자는 취침 시간을 제외하곤 누워 있거나 편히 있을 수 없었다. 운동을 할 수도 책을 볼 수도 없었다. 모아이의 존재감 때문에 말도 한마디 못 했다. 오로지 정좌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그게 영창에서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내 삶 전체를 돌아보기로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봐 온 것처럼. 15일쯤이야 금방 가리라. 그런 기대를 가지고서 짐짓 경건하게 눈을 감은 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인생 궤적을 꼼꼼하게 짚어 나갔다.
내 이름 도치성. 이름 때문에(아주 조금은 얼굴 때문에), 별명은 둘리에 나오는 또치였다. 하지만 별명으로 불릴 일은 많이 없었다. 별명은 원래 누군가가 불러 줘야 하는 거니까. 사진 찍을 친구가 없어 초중고 졸업식 때마다 부모님에게 별거 없으니 오지 말라고 했다. 왕따는 아니고, 그냥 다들 내가 교실에 있는지 잘 몰랐다. 한 번은 체육 선생이 반 전체 벌로 운동장 15바퀴를 뛰라고 했다. 애들 다 자기가 뛴 바퀴를 속였고 체육 선생도 그걸 중요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만 15바퀴를 뛰었다. 나는 안다. 나만 정직했다. 그렇지만 그걸 나만 알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인생의 긴 여정을 마친 나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나 확인했다. 딱 13분 지나 있었다.
잠깐. 이게 아닌데. 다시 눈을 감았다. 좀 더 진득하게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하니 7분 지나 있었다.
총 20분짜리 인생이었다. 갑자기 허무함이 밀려왔다. 나는 나를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중 기억에 남는 이들을 떠올려 봤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일을 저지르는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정해진 규칙을 어기고 불쑥 선을 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저지른 걸 수습하는 사람이었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고, 참는 유형이었다. 지하철에서 노인들이 내 몸을 함부로 툭툭 치고 갈 때도. 카페에서 한 커플이 뒤에 줄이 긴 걸 알고도 주문대 앞에서 메뉴 고른다며 한참 주접떨 때도. 대학 동기들이 수업을 빼먹고 시위하러 간다며 과방을 엉망으로 만들고 우르르 몰려 나간 통에 혼자서 청소할 때도. 나는 화난 티조차 낸 적 없었다. 참았고, 수습했다. 나는 어지르지도 저지르지도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러면 안 되니까.
그러면 안 되니까, 그래서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지켜야 할 건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지금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 거지. 지키는 사람이, 갇히다니. 이건 부당한 일이다.
그때 모아이의 그 혼잣말이 기도문처럼 들려왔다.
“북한군··· 안 쳐들어오나.”
그 말에 왠지 풀이 죽었고 치솟던 화도 가라앉았다.
차라리 벌을 받고 싶었다. 벌을 받고 회개하고 싶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걸 차례로 꺼내 놓는 상상을 했다. 뚜껑을 열 듯이, 예컨대 K2 총기 손질할 때처럼 몸체에 해당하는 총열 덮개를 열고, 그 속에 부품들을 빼내어, 녹슨 부분이 있다면 닦는 상상을 했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시원스레 발사될 수 있도록.
하지만 텅 비어 있었다. 나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엔 꺼낼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헌병인 재수가 등장하며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휴가에 막 복귀했다면서 모아이와 근무 교대를 한 재수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정갈한 이목구비, 그리고 항상 빙글빙글 웃는 상이었다. 대개 남자들이 기를 쓰고 미남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실은 사회에서 가장 인기 많은 그런 유형이랄까. 나는 그를 보며 느낀 나의 ‘재수 없다’라는 본능적 감정이 좀 못난 것처럼 느껴져 그중 ‘없다’는 빼고 ‘재수’라고 (나 혼자) 부르기로 했다.
“필승, 1113기입니다.”
상병인 재수는 모아이가 나가자마자 우리에게 기수 경례했다. 그는 우리를 처음으로 인간처럼 대해 준 셈이었다. 이에 제일 먼저 내 왼쪽, 1호 창 쪽에서 설렘과 자부심이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나 1108기.”
모아이보단 낮지만 지금 이곳에선 가장 높은 기수의 병장이었다. 뒤이어 내 오른쪽, 5호 창 쪽에서도 기수 경례가 나왔다.
“필승, 1115기입니다.”
상병 5호봉 기수였다. 그리고 그다음 내 차례였다.
“필승, 1122기입니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오른손을 관자놀이 쪽에 올렸다. 물론 1호 창과 5호 창에 내 모습이 보일 리는 없지만(또 나 역시 그들을 못 보지만)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그건 다름 아닌 중앙에 있는 그 재수의 존재 때문이었다. 재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이자, 우리를 보는 눈이며, 동시에 우리의 눈 그 자체이기도 했다.
재수는 빙글 웃으며 말했다,
“지금 보니까 아직 다들 서로 인사도 안 한 건지 아슴니다.”
그러자 1호 창 쪽에서 대답했다.
“응. 아까 그 병장 선임이 엄청 빡세서.”
재수가 끄덕이며 화답했다.
“맞습니다. 좀 빡세긴 합니다.”
이번엔 재수보다 두 기수 낮은 5호 창 쪽에서 재수에게 물었다.
“지금은 말 좀 해도 괜찮은지 아슴니다.”
“나 근무할 땐 괜찮지. 편하게 말해. 자, 고해성사하듯 나한테 다 털어놔 봐.”
당연히도 서열은 기수대로 1호 창이 제일 위고, 그 아래로 재수, 그리고 5호 창, 가장 밑이 나였다.
“이제 좀 해병대 같네.”
1호 창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아슴니다’를 들으니 나도 왜인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 감옥에 있는 게 아니라 군대에 있을 뿐이라는 그런 안도감이.
‘아슴니다’의 본 표현은 원래 ‘알고 싶습니다’였다. 해병대에선 선임에게 뭔가를 물을 때 다른 군대처럼 ‘까’를 붙이면 안 됐다. 대신 ‘알고 싶습니다’라고 해야 했다. 예를 들어 ‘식사하셨습니까’가 아니라 ‘식사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였다. 그러다 보니 의문형과 평서형 그 중간에 걸친 애매한 표현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잘 주무셨는지 알고 싶습니다(잘 주무셨습니까?). 제가 대신 해 드려도 괜찮으신지 알고 싶습니다(제가 대신 해 드립니까?). 안마 필요하신지 알고 싶습니다(안마 필요하십니까?).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선임한테 감히 ‘까’를 붙이는 건 선임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무척 건방진 일이고 그 대신 자신이 지금 알고 싶다는 상태를 겸손히 전하는 게 후임의 도리이기 때문인데,
물론 순 개소리다. 근데 사실 군대에서 안 그런 게 있나. 일병 5호봉 전까지는 양손을 앞으로 모으는 앞짐을 못 지고, 반대로 상병 5호봉 전까지는 뒷짐을 못 지는 것처럼. 나도 해병대 오기 전까진 손의 위치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었다. 그렇듯 규칙은 외국어 문법을 배울 때처럼 우리를 개조시키는 한편 머리는 텅 비게 만든다. 어째서 ‘알고 싶습니다’인지, 알고 싶다는 게 뭔지를 궁금해하는 이도 없었고, 사실 궁금해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뭐랄까. 그건 그냥 일종의 세계관이었다.
그렇듯 ‘알고 싶습니다’란 표현은 너무나 자주 사용하다 보니 흡사 이리저리 굴러 모서리가 마모된 돌멩이처럼 본래 모습을 잃었고 이내 (말하기 편하게) ‘아슴니다’로 발음되곤 했다. 아슴니다, 아슴니다.
그 ‘아슴니다’의 영역이 우릴 편안하게 했다. 재수 덕에 우린 그 영역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재수는 서로를 볼 수 없는 우리에게 각자의 외모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풍채가 장난 아니십니다. 운동 많이 하신 거 아닌지 아슴니다.”
1호 창의 병장에 대한 설명이었다. 무릇 재수처럼 생긴 남자들은 재수 없게 성격도 좋은 법, 즉 외모를 최대한 좋게 표현하는 것임을 감안해야 했다. 나는 1호 창의 병장이 목소리도 그렇고 대충 어떻게 생겼을지 짐작 갔다. 좋게 쳐줘도 멧돼지처럼 생긴 놈일 것이다.
“넌 참 스타일이 스마트하다.”
이번엔 5호 창의 상병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냥 간잽이처럼 생겼단 소리군. 나는 다 알지.
“그리고 도치성 너는 정말···.”
그러던 재수는 날 보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흠, 착하게 생겼구나.”
흠.
멧돼지와 간잽이와 착하게 생긴 내가 영창에 온 사유는 모두 대동소이했다. 후임을 향한 폭행, 가혹 행위, 뭐 그런 거.
멧돼지는 자신이 얼마나 후임에게 무자비했는지 떠들었다.
“장난 아니었지. 그, 좆 됐지, 아주.”
그는 후임 한 명이 너무 기합 빠져서 교육 좀 시키다 운이 안 좋았다며, 말년에 무슨 고생이냐며 우는 소릴 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그에게 있어 영창에 온 건 훈장과 마찬가지 같았다. 진짜 해병이라면 영창엔 한 번쯤 다녀와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따라서 지금이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항상 어딘가 들떠 있는 채 특유의 돼지 울음 같은 목소리로 떠들고 싶어 했는데 어휘력이 부족한 나머지 자주 말을 더듬거렸으며 결국 수많은 형용 표현들을 그 ‘좆 된다’는 단일어로 대신했다.
“그, 그 내가 있던 15중대가 원래 기합 좆 되지. 응, 좆 됐어.”
사실 멧돼지처럼 꼴통 같은 타입은 해병대에선 흔했다(그런 타입이 아니고서야 해병대에 올 이유도 딱히 없지 않은가). 다만 그는 그 꼴통력의 순도가 너무 높은 나머지 반감이 느껴질 수준을 넘어섰다. 오히려 왠지 안쓰러웠다.
나는 내가 아는 남자들 유형 중 하나를 떠올렸다. 꽤 큰 덩치와 거친 태도로 인해 첫인상으론 남자들 무리에서 우위를 점한다. 금방 우두머리 행세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밝혀진다. 그의 순진함, 그리고 아둔함이.
눈치 없이 아무도 안 웃는 농담을 하다 누군가 날 선 지적을 유머 섞여 날리면 반격할 재치도 없이 같이 헤헤 웃는. 기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보다 덩치도 작고 약하지만 교활한 남자들에게 무시 받고 웃음거리가 된다. 서열에서 밀린다. 힘과 덩치 덕에 간신히 우두머리의 오른팔도 아닌 왼팔 자리를 유지하긴 한다만 결국 이용당할 뿐이다. 그러니 남자들의 세계관을 그저 약육강식으로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것의 반대편, 사과의 나머지 반쪽에는 그런 ‘좆 되는’ 면모가 있는 것이다.
“그치! 좆 되지, 좆 돼.”
나는 말만 들어도 전해지는 그의 저급한 면모들로부터 혐오와 연민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한편 간잽이는 연세대를 다니다 온 자로(이에 멧돼지는 또 “와, 그, 엘리트, 좆 되네!” 했다) 멧돼지와는 딴판이었다. 간잽이는 본인 말에 따르면 ‘대가리에 똥만 가득한 후임 한 명을 교육시켜 주다가’ 영창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교육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멧돼지와 같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달랐다.
전말은 이랬다. 한 후임이 고향이 전라도인 자신의 맞후임에게 빨갱이라고 놀리는 광경을 간잽이가 목격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간잽이는 빨갱이란 말을 입에 올린 후임을 데려다가 빨갱이가 무슨 뜻이냐고, 네가 아는 빨갱이가 뭐냐며 물었다고 한다. 후임이 더듬더듬 대답하자 그걸 꼬투리 잡아 다시 또 질문했고, 결국 모른다고 하자 그날부터 매일 밤 불러 대서 역사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간잽이는 꽤 억울해했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후임이 고등학교 근현대사 문제집을 절반밖에 못 맞춰서 매일 잠을 2시간밖에 재울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야. 또치, 그게 가혹 행위냐? 엄연히 말하면 계몽시켜 주는 거지, 아냐?”
간잽이는 말끝마다 ‘아냐?’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그 말은 ‘그거 아니냐?’라며 동조를 구하는 표현처럼 들리는가 하면, ‘네가 그걸 알기는 하냐?’라며 나의 지식을 무시하는 표현으로도 들렸다. ‘아냐?’ 둘 중 어떤 뜻이건 간에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래서 결과적으로 빨갱이가 무슨 뜻이란 말인가. 간잽이는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다. 아무튼 하나 확실한 건 간잽이 그도 정상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근데 실은 모두 그랬다. 다 정상이 아니었다. 멧돼지는 물론이고, 어쩌면 나도 그럴지도 몰랐다.
“또치, 근데 너는 어쩌다 영창 왔냐?”
멧돼지가 물었다. 나는 답했다.
“마이콜···을 때렸습니다.”
“마이콜? 아기 공룡 둘리에 나오는 마이콜?”
“아, 제가 때린 후임의 별명이 마이콜이었습니다.”
“그, 그 또치와 마이콜? 좆 되는 콤비인데? 왜 때렸어?”“
”··· 꼰티를 내서 때렸습니다.”
“그치, 꼰티 내면 맞아야지! 또치, 좆 된다!”
멧돼지에게 그 좆 된단 칭찬을 받으니 역시 나도 정상은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해병대에 있는 이상 당연할지 몰랐다. 여긴 정상이 아닌 게 정상이다. 사회에선 한번 마주칠까 말까 하는 괴인을 숱하게 접하게 된다. 그 왜 만화를 보면 악당 편이면서 코믹 엽기를 맡은 캐릭터들 있지 않은가. 혹시 해병대에 있으면 다 그런 괴인이 되는 걸까. 나는 내가 어째서 해병대에 오게 된 건지 새삼스레 돌이켜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소년 만화를 좋아했다. 학교에선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지만 만화책을 넘길 때만큼은 동료를 찾아 나서는 전형적인 소년 만화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밤새 만화를 보다 보니 일상의 현실도 점점 그 만화 속 형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배경으로 두둥! 하는 만화 속 단골 효과 표시가 스쳐 지나갔다. 내 머리 위론 명대사가 들어갈 만한 말풍선이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정작 현실의 사람들은 나를 로봇 같은 NPC로 대했다. NPC는 누가 말 걸어 주기 전에는 아무 말도 못 하는데, 이런 제길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내 말풍선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내용물 없는 껍데기처럼. ( ). 채워지지 않은 괄호 같았다.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린 듯 헛헛했다. 일상은 어제처럼 오늘이 흘러갔다. 내 삶은 두둥! 이 아니라 밋밋한 쓰으윽- 으로 이어졌다. 만화책을 덮고 나면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에 몸을 웅크렸다. 무릇 소년 만화가 소년들의 꿈을 키워 주기는 하다만 그게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종류의 꿈이란 게 문제다. 나는 키운 꿈의 크기만큼이나 결핍이 생겼다. 차라리 애초에 그런 말풍선들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으면 이러지도 않았을 텐데. 내용 없는 형식이 나를 고독하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그런 줄 전혀 몰랐다. 당연하다. 나는 나의 세계관에서만 주인공이었으니까.
남중, 남고를 나온 내 주위는 온통 남자애들뿐이었고, 그들은 축구 아니면 게임 아니면 섹스에 몰두해 있었다. (축구, 게임, 섹스)! 그들은 그 삼위일체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만 이상한 거였다.
그럼에도 나는 만약의 사태를 나름대로 대비했다.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언젠가 내게도 두둥! 의 순간이, 그러니깐 나한테 정말 소중한 뭔가를 지켜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며 혼자만의 수련에 몰두했다. 얍얍! 허공에 주먹을 지르고 발차기도 했다.
나의 소년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도 내 괄호를 뭔가로 채우고 싶었다. 나도 의미를 가지고 싶었다.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젠 이런 말이 소름 끼칠 정도로 촌스러울지언정 소년을 막 벗어난 나이였던 내겐 만화 속 명대사처럼 느껴졌다. 이를테면 이런 말도,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선택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뭐든 사람들이 택하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인천에서 배로만 4시간 걸리는 백령도는 북한이 옆 동네 섬처럼 가깝게 보였다. 그래서 더 실감 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보고 있다 보면 대한민국이건 북한이건 다 다른 세상 얘기 같았고 나는 그저 거대한 세트장에 있는 것 같았다. 소년 만화의 무대 그 뒤편, 철골이 튀어나와 있고 소품이 나뒹구는 세트장에. 폐업한 놀이공원, 혹은 모두가 추방된 에덴동산처럼. 여기는 ‘까’ 대신 ‘알고 싶습니다’를, 아니 그것도 아닌 ‘아슴니다’를 말하는 남자들의 세계관 속이었다. 대항해를 떠나는 모험 따윈 없었다. 백령도 해안가로는 육지에서 버린 쓰레기들이 몰려왔다. 축구와 게임과 섹스의 빈 껍데기들이었다.
어쩌면 나는 정말 로봇이 맞을지도 몰랐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깨닫자 나는 내 전원을 OFF로 내렸다. 예전처럼 NPC가 되었다. 해병대엔 수많은 우스꽝스러운 규칙들이 있었지만 그걸 따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난 그런 것에 전문이었다.
간단했다. 마치 건널목에서 검은색 아스팔트 바닥은 밟지 않고 오로지 흰색 횡단보도 표시만 밟는 유치한 놀이처럼. 검은색을 밟으면 죽는 것이다. 흰색만 밟아야 한다. 왜냐고? 이유는 없다. 그냥 규칙이다. 그렇다, 세계관이다. 만화로 따지면 만화가의 그림체처럼, 또는 어떤 열매를 먹으면 특별한 능력을 얻는단 황당한 설정처럼, 한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담겨져야 하는 형식-빈 괄호 ( )였다.
그러니 그저 밟아야 할 곳만 밟으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흰색을 향해 발을 뻗으며 뚜벅뚜벅. 아니, 보폭이 좀 넓으니 뚜우벅 뚜우벅.
그렇게 군 생활에 누구보다 충실했지만 쓸데없이 후임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많이 하는 악습들, 예컨대 악기바리라는 이름으로 컵라면 14개를 억지로 먹게 한다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게 아무리 악습이라도 받아들였다. 샌드백이 되어라! 하면 묵묵히 맞았고, 내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선임에게 대들지도 않았다. 모든 걸 따랐다. 해병대 규칙이 인간으로 의인화된 게 바로 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진짜 해병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왜지? 알 수 없었다. (선임은 물론이고) 그런 나를 따르는 후임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다 날 멀리했다. 나는 외톨이었다.
재수는 아버지 때문에 해병대에 왔다고 했다.
재수의 아버지가 바로 해병대 출신이었는데 예전부터 재수가 남자답지 못한 걸 탐탁지 않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재수가 해병대 가길 바랐느냐 하면, 아니다. 되려 재수의 아버지는 인맥을 써서 재수를 공익에 보내려 했다. 재수는 내게만 조용히 말했다. 아버진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아예 군대를 면제시키려 했다고. 하지만 재수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무시한 채 자진해서 해병대에 온 것이었다.
재수는 자신이 헌병으로 근무하는 게 좋다고 했다.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영창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모아이와 6시간씩 교대 근무를 했고, 우리는 모아이가 있는 6시간엔 침묵을 지키다가 재수가 오면 참았던 말들을 터트렸다. 그는 가끔 담배도 한 대씩 피게 해 줬다. 그땐 꼭 따 먹어선 안 되는 사과를 따 먹는 기분이었다. 그는 신의 감시를 벗어나 우리를 현실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셈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현실에서 열외된 허깨비 같은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는 사람의 말을 끌어내는 데 천부적인 능력이 있었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이야기도 잘 들어주었다. 정작 진짜 소년 만화 속 주인공처럼 생긴 그에게선 구김살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히려 구김 하나 없기에 구김 가득한 남자들을 내려다보는 걸 즐겼던 걸까. 나는 그가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복수를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심은 우리가 영창에 있은 지 일주일 즈음 되었을 무렵에 더 커졌다.
멧돼지가 한창 자기가 전역하면 해병대 전우회에 가입하겠다 어쩐다 떠들 때였다. 나는 정말 멧돼지답다고 생각하며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돌연 재수가 어째선지 가만히 있던 간잽이의 생각을 물은 것이었다.
“넌 어때? 전역하면?”
“저는 해병대 나왔다고 말 안 할 겁니다. 선‧후임 만나도 모른 척할 겁니다.”
간잽이가 냉소를 담고 답했다.
“왜 모른 척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몰라?”
멧돼지가 이해 안 간다는 식으로 물었다. 간잽이가 답했다.
“아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모두···.”
간잽이는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덧붙였다.
“쪽팔리지 않은지 아슴니다.”
정적이 흘렀다. 멧돼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간잽이도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 이후로 대화는 뚝 끊겼다. 재수는 조금은 난처하다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그 구김살 없는 맑은 얼굴을 한 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때 위화감을 느꼈다. 재수가 주던 사과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소리 없이 과실 속을 파 들어가는 애벌레에 관한 상상과 함께.
그날 밤 늦은 시각이었다. 모아이가 근무였는데 잠깐 담배 피우러 자리를 비웠다. 멧돼지는 잠들었는지 1호 창 쪽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야, 또치.”
5호 창 쪽에서 간잽이가 조용히 날 불렀다.
“내가 있잖아, 아냐? 영창 오기 전에 옆 부대의 한 찐빠에 관해 들은 적 있는데.”
‘찐빠’는 어떤 일을 할 때의 실수나 구멍을 뜻하는 해병 언어 중 하나였는데, 동시에 누군갈 비하하는 멸칭으로도 자주 쓰였다. 그럼 누구를 찐빠라 부르냐 하면, 한마디로 해병대답지 않은 사람을 찐빠라 했다. 해병대답지 않다는 게 뭐냐고 물으면 그게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해병은 거의 없겠지만, 또 해병이라면 누가 찐빠인지만은 귀신처럼 알아맞힐 수 있었다. 원래 찐빠의 어원은 일본어로 절름발이라는 뜻의 단어라고 했다. 세상에 보폭을 맞추지 못한 채 절뚝이는 사람. 그처럼 찐빠란 척하면 척 보이는 것이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
간잽이의 옆 부대에 있던 어느 병장이 그런 찐빠였다고 한다. 맨날 해병 정신만 운운할 뿐 부대에서 인정하지 못하다 결국 기수에서 열외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후임에게도 선임 취급받지 못하던 중, 참다못해 자기를 무시하는 후임 하나를 때렸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다른 후임들은 그 병장을 낄낄대며 비웃었다고 했다.
있을 법한 일이었다. 기수에서 위면 절대적인 복종의 대상이 되지만, 또한 그러기 때문에 기수에서 열외 되어 이 세계에서 배제되는 순간 먹잇감이 되는 법이었다.
“근데 그 찐빠 병장이, 아냐?”
간잽이는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 저··· 1호 창 선임 같단 말이야.”
그날 밤 나는 먼젓번 재수가 했던 말, 이곳 영창에 있는 게 마음에 든다고 했던 그의 말을 곱씹었다.
훗날 전역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우연히 디시 같은 남초 사이트에서 ‘해병 문학’이라는 종류의 유머 글을 보게 되었다. 읽어 보니 뭐 해병대라는 특수 집단을 세계관으로 하여 선임이 후임에게 자신의 똥을 먹인다거나 서로 엽기적인 성관계를 맺는다는 식의 여러 밈들이 조합된, 유머와 조롱과 혐오가 섞인 글이었다. 나는 웃기지도 않았지만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뭐 음지 남자애들의 BL물인가 하며 픽 헛웃음만 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혹시 이런 ‘해병 문학’을 처음 만든 게 재수가 아닐까라는, 정말이지 근거 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뒤이어 알 수 없는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해병 문학’ 게시글을 올린 당사자는 물론이고 낄낄거리며 댓글 다는 이들 모두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감이 들었다. 비겁한 놈들. 비열한 새끼들. 누군갈 비웃는 것밖에 못 하는 역겨운 벌레들. 나는 내가 왜 분노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화를 냈다.
어째서일까. 어떤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일에 대해 알아 가기는커녕 점점 모르게 된다.
하나 분명한 건, 그들이 누군갈 모욕하고 있는 거 같았단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내가 아니었다. 바로 마이콜이었다.
*
내가 막 일병이 되었을 때 마이콜이 처음 우리 부대에 왔다. 그때 난 선임 심부름하러 흡연장을 지나가던 중 한 이질적인 표현을 듣고는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 알고 싶습니다.”
그곳에 마이콜이 있었다. 그는 둘리에 나오는 마이콜처럼 어두운 피부에 눈은 점처럼 작았고 두툼한 입술은 긴장한 듯 다물어져 있었다. 한창 선임들에게 신고식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온 건, 그가 내게 익숙한 그 ‘아슴니다’가 아니라 너무나 또박또박하게 ‘알고 싶습니다’라고 한 자 한 자 정확히 발음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마치 외국어처럼 낯설었다. 물론 그땐 그저 뭘 하든 어색한 신병 특유의 서투름 탓이라고 생각했다. 곧 그도 얼마 있지 않아 ‘아슴니다’라고 말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그가 일병이 되고 그에게도 후임이 하나둘씩 들어온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한 선임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어째 마이콜 너 말을 왜 그렇게 병신같이 하냐?”
그제야 나는 마이콜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는 제대로 형언할 순 없었지만 보통 사람 눈에 어딘가 묘하게 모자라 보였다. 일을 못 한다거나 실수를 한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의 말투처럼 모든 걸 똑바로, 시키는 대로 정확히 했는데 되레 그렇기에 안 좋은 방향으로 눈에 띄었다. 해병대 모든 규칙을 착실히 따르는 그의 모습이 그들의 내면 속 어떤 불편한 곳을 건드렸기 때문일까. 그들은 그가 성실하고 순수하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거슬린다는 듯 지켜보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선임은 물론이고 후임들도 그를 덜떨어졌다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찐빠가 될 조짐이 다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눈 건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당시 나는 주말 아침마다 혼자 연병장 구석에서 턱걸이를 했다. 10대 때부터 해 온 내 수련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그때 쭈뼛거리며 그가 다가온 것이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가 그를 외면하려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저도 도치성 해병님처럼 해 봐도 좋은지···.”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단춧구멍 같은 눈이 별처럼 빛났다.
“알고 싶습니다.”
그때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그에게 뭘 물어보려고 했던 건 기억난다. 그런데 나는 질문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그러니까 어미를 ‘-해?’라고 할지, ‘-냐?’라고 할지, ‘-니?’라고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슴니다’ 말고, 선임은 후임에게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 그런 규칙은 해병 언어에 없었다. 언제 내가 마지막으로 후임에게 뭘 물어봤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말만 내 입에 맴돌았다. 저도 도치성 해병님처럼 해 봐도 좋은지 알고 싶습니다. 그렇게 마이콜 앞에서 나는 내게 전부였던 해병 언어를 잃고 더듬거렸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대신 철봉에 매달린 채 팔을 파들파들 떨며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그의 등을 쓰으윽- 밀어 올려 주었다.
영창 건물 밖으로 폭풍우가 치던 밤. 재수가 근무 시간에 몰래 소주를 들고 왔다.
그는 최근 분위기가 좀 딱딱해졌으니 회포 좀 풀자고 했다. 그리곤 우리 감방 철창 바로 앞에 종이컵을 한 잔씩 놓고 소주를 콸콸 따랐다. 몇 잔 들이켜고 나자 멧돼지가 시키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어울리지 않게 감성에 젖어 촉촉한 목소리로,
자기가 때린 후임은 좋은 놈이었다고 했다. 바로 밑 맞후임이었는데 이병 때는 자길 무척 잘 따랐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모든 해병 언어를 인수인계해 줬다고 했다. 해병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후임이 변했다. 그러니 때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꼭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때린 건 아니었다. 무시해서 화가 나긴 했지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후임을 위해서였다. 그 말을 하는 멧돼지는 물론 무식했다. 정말이지 개소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그의 진심이라는 것이, 그는 적어도 진실하다는 것이,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는 좆 같았다.
마이콜이 날 보는 시선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내가 소년 만화 속 주인공을 보는 것처럼 마이콜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함께 턱걸이를 하게 된 이후 마이콜이 슬쩍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나도 그가 눈에 밟혔다. 그는 매번 혼자 밥 먹었던 내 자리 대각선 쪽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그처럼 아는 척하진 않지만 곁에 있었다. 씻을 때도 담배 피울 때도 그랬다. 구보하며 부르는 군가에 그와 나의 목소리가 하나로 포개졌다. 헤이빠빠리빠- 싸워서 이기고 지면은 죽어라 헤이빠빠리빠!
이상한 콤비의 탄생이었다. 나는 나의 전원이 ON된 걸 느꼈다. 더 이상 오늘이 어제와 똑같이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NPC가 아니었다. 먹으면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열매가 내게도 주어졌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그의 행동이 이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엄숙한 표정으로 움직이는데 그게 꼭 깡통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연병장 구석에서 혼자 얍얍! 주먹을 내지르고 발차기도 했다. 뭔 또라이 같은 짓인가, 뭘 보고 저렇게 바보처럼 행동하는 거지, 하던 나는 아뿔싸, 깨달았다.
그는 나를 따라 하고 있었다.
뚜우벅 뚜우벅. 흰색만 밟으며 문제없이 잘 걷던 내 옆에, 나와 똑같은 자세와 보폭으로 다른 누군가 걷는 게 보였다. 스스로 나 자신을 해병대 규칙이 의인화된 인간이라고 자부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는 나의 몸짓을 따라 두 발을 옮기는 중이었다. 날 따라 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내가 규칙이 되고 있었다. 내가 그의 괄호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울을 처음 마주한 사람처럼 그에게서 보이는 내 모습에 멍해졌다. 그러자 (그 모습이 바보 같았다는 건 둘째치고) 난 문득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지금껏 내가 왜 저렇게 걷고 있었던 건지. 우리가 밟아야 하는 흰색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 건지.
규칙에 이유를 묻는 순간 규칙은 무너진다. 뚜우벅 뚜우벅 잘 걷던 나의 발이 꼬였다. 뚜, 뚜벅. 삐끗했다. 뚜뚜벅, 절룩거렸다. 기어이 뚜, 뚜, 뚜뚜,
찐빠였다.
놀고 자빠졌네. 그렇게 말한 간잽이는 곧바로 덧붙었다, 솔직히 밖에선 다 그렇게 반응할 겁니다. 낭만적 멧돼지를 타박하는 간잽이의 목소리에 취기가 가득했다. 어느새 우리는 모두 이성이 희미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영창 건물 밖으로 폭풍우는 더욱 거세졌고 천둥소리가 북한의 포성처럼 들려왔다.
간잽이는 이 군대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미개하고 덜떨어진 건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이야 상병 몇 호봉이니 그런 게 세상의 전부겠지만 당장 전역하고 사회에 나가면 그냥 뒤늦은 남자애들의 소꿉놀이 같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해병 언어니 뭐니 자기도 그런 규칙들 적당히 따라 주긴 하지만 그건 그냥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거랑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나는 간잽이의 전역 후 모습이 상상됐다. 그는 아마도 군대가 얼마나 부조리한 조직인지에 대해, 자기 혼자만 각성한 내부자를 자처하며 아주 지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제스처도 취하면서, 똥통을 경험해 봤다는 우월함과 그럼에도 자신은 똥이 묻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뽐내면서. 여자들은 그를 그나마 나은 남자로 볼 것이다.
실제로 그렇겠지. 똥 묻은 남자보단 낫겠지. 그럼 난 똥 피하는 방법을 몰랐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실은, 내가 똥이었나?
마이콜과 부쩍 가깝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마이콜에게 위 기수 대대로 내려오는 해병 명언들을 가르쳐 주려 했다. 그것은 다 커 버린 소년들의 명대사였고, 나는 이병 때부터 남몰래 써 온 소중한 수첩을 한 손에 꼭 쥔 채 그를 찾았다. 그 수첩 속 언어들을 인수인계해 준다는 명목에서였다. 하지만 사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반대로 그가 나의 수첩을 채워 주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에게 괄호가 되어 주었듯이 반대로 그가 나의 괄호 안을 채워 주길, 그가 나의 내용이 되어 주기를, 나는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흡연장에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 자기 소대의 다른 선임과 함께였다. 나는 우연히 그 선임이 마이콜에게 하는 말을 멀찍이서 듣게 되었다.
“마이콜이랑 또치. 대체 무슨 관계냐. 너 왜 걔 닮아 가는 거야.”
마이콜의 어깨에 친밀하게 팔을 두른 선임은 이죽거리며 물었다.
“병신 마이콜, 혹시 너 그 찐빠 새끼랑 ( )하냐?”
이, 이, 이, 좆 되는 씨발놈이! 취한 멧돼지가 간잽이를 향해 막 욕을 터트릴 때였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헌병 근무자용 전화였다.
자연스레 우리 셋은 입을 다물었고, 재수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내용을 들었는지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재수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다. 멧돼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재수는 한 부대에서 병사 한 명이 자살했다고 했다.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자길 괴롭히거나 때린 선임이 영창에 가게 되어서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대개 그런 경우 선임을 영창 보낸 후임은 마치 집단 보복당하듯이 부대에서 기수 열외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우리 셋 모두 각자가 불길한 상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나는 재수의 표정에 시선이 갔다. 어째선지 그가 이 모든 일을 다 꾸민 게 아닐지 의심이 됐다. 우리에게 그는 신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때 또 다른 벨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화 왔던 일반 전화기와는 다른, 군사 긴급 상황 시 쓰는 통신장비였다. 귀를 찢을 듯한 그 신호 소리에 재수는 깜짝 놀라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부대 전체에 떨어진 명령의 일종임은 분명한 듯했다. 재수의 표정도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천벌을 받은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뭐라 한마디도 할 틈도 없이 재수는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곤 황급히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나가면서 거칠게 열어젖혀진 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캄캄했다. 그 틈으로 세찬 빗소리에 뒤섞여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불안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강한 바람에 다시 문이 닫혔다.
재수는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헌병이나 군인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고, 다시 오후가 되어 밤이 찾아올 때까지도 영창에는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리 셋은 꼼짝없이 갇혀 있는 채로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했다. 그러자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슬슬 실감이 났다. 이대로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가 여기 있는지 모두에게 잊혀진다면···.
바깥에는 비바람이 더 심해진 듯했고 밤이 되자 다시금 천둥번개가 쳤다. 불안한 기분 탓일까 간간이 들리는 뇌성이 꼭 포성 소리 같았다. 멧돼지가 혹시 진짜로 빨갱이들이 쳐들어온 거 아니냐고 말했다. 간잽이는 평소라면 터무니없게만 들릴 그 말에 아무런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씨발 빨갱이 새끼들···, 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북한과 전쟁이 났거나 전면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나는 초췌해진 정신으로 멍하니 창살 너머의 빈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술잔이 무언가를 뜻하는 것 같아 눈을 뗄 수 없었다.
멧돼지는 기어이 불안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울음 섞인 한숨을 연신 토해 냈다. 간잽이는 밀려오는 화를 꾹 참는 목소리로 조용히 있자고, 그만하라고 했다. 하지만 멧돼지는 이내 마음속에만 두던 말을 꺼내고야 말했다.
“어제 자살했다는 게 내 후임은 아니겠지? 난 정말 그 녀석을 진심으로 좋아했어.”
“그만 좀 하라고 했잖습니까!”
버럭 소리친 간잽이였다. 도를 넘어선 짜증이었다. 나는 멧돼지가 간잽이의 태도에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너 방금··· 말끝에 뭐라고 했냐? 까? 까?”
‘아슴니다’를 안 쓴 간잽이의 언어를 문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간잽이는 이제 더는 멧돼지에 대한 무시를 숨기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이 와중에 끝까지 지랄하네.”
“뭐? 이, 이, 완전 좆 되는 새끼네? 선임한테, 야, 너 해병 아니냐? 완전 찐빠 새끼네! 조, 좆 되네?!”
“찐빠는 너잖아.”
“응?”
1호 창과 5호 창 간의 긴장감이 가운데 내게 전해졌다. 간잽이는 냉소 섞인 목소리로 몰아붙였다.
“너 영창 오기 전에 니네 부대에서 기수 열외당했잖아, 아냐?”
“뭐? ··· 그, 그게.”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해병 규칙에 따르면, 기수 열외당하면 선임도 아니고 해병도 아닌데? 아냐?”
다시 그날이 떠올랐다. 마이콜, 혹시 너 그 찐빠 새끼랑 ( )하냐?
나는 그 빈 괄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마도 축구나 게임, 혹은 섹스일 것이었다. 무엇이든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에 대한 모욕이라는 점에서, 나아가 괄호에 대한 모욕이라는 점에서 똑같을 것이었다. 마이콜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뭔갈 착각했다는 것을. 둘리가 없는 마이콜과 또치 사이는 단무지랑 치킨 무의 만남밖에 안 된다는 것을. 우린 결국 괄호에 괄호를 겹친, ( ( ) )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음날 나는 마이콜을 불러 악기바리를 시켰다. 라면 14개를 억지로 먹였다. 그것은 내가 처음 해 보는 참으로 해병 선임다운 일이었다. 어떤 날은 샌드백이 되어라! 하곤 그에게 익살스레 주먹과 발차기를 날렸다. 장난이지만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시늉도 했다. 다 실제로 마이콜의 선임들이 마이콜에게 하던 일이었고, 마이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일이었다. 그런 걸 당하는 게 해병의 자격이자 특권임을 그도 나도 잘 알았다. 찐빠는 그런 것도 못 당한다. 다시 말해 나는, 그래, 기꺼이 멧돼지식으로 말하면, 나는 진심으로 그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의 마이콜은 나에게 내가 지금껏 본 적 없는 눈빛을 했다. 그의 그 작은 눈에서 나는 멸시와 동정, 그리고 배신감을 보았다. 그것이 날 무너뜨렸다.
왜 날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응?
마음이 무너졌다. 그 위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졌다.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나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 장소가 탁 트인 연병장이었고 간부가 막 지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전에도 후임을 때려보긴 했다. 하지만 그게 난 꼭 처음 같았다. 처음인데 마지막인 것처럼 잘 때렸다. 어쩌면 옛날부터 만약의 사태를 위해 준비했던 수련, 나에게 소중한 뭔가를 지키기 위해 했던 그 수련의 결과가 그때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담 그게 내 소년 만화의 결말일 것이었다.
그때 그 순간이 지나가지 않고 아직 여기 갇혀 있다.
“야 또치! 너도 1호 창 저 새끼한테 해병 언어 쓰지 마.”
간잽이가 내게 소리쳤다. 멧돼지는 해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럼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이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문득 지금 이곳은 헌병의 감시도 누구의 눈도 없는 진공 상태임을 깨달았다. 무중력의 우주와 다름없다는 걸 느꼈다. 뇌성인지 포성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두둥! 그 효과음이 이 공백을 진동시켰다. 나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간잽이는 내게 물었다.
“그래도 되는 거잖아, 아냐?”
“몰라.”
“응?”
간잽이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되물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아냐고 그만 물어라. 몰라. 모른다고, 이 대가리에 똥만 찬 간잽이 새끼야!”
침묵이 덮쳤다. 나는 덧붙였다.
“··· 이렇게 말해도 좋은지, 알고 싶습니다.”
간잽이도 멧돼지도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때, 기다려 왔다는 듯 영창 건물 문이 거칠게 열렸다. 건물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재수가 아니었다. 검은 민무늬 판초 우의를 입은 어느 군인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는 빗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우리를 둘러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둘러싼 판초 우의 때문에 계급이나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군복도 잘 보이지 않았다. 돌연 어쩌면 백령도에 상륙한 북한군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는 보장이 없었다.
우리를 훑던 그의 눈이 어제 재수가 가져다 놓은 소주병들에 가닿았다. 나아가 우리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술잔도 보았다.
“쓰레기 같은 놈들.”
아무런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말씨였다. 그는 그저 헌병 간부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는 소주병을 들더니 술을 빈 술잔에 가득 따랐다.
“다 마셔.”
우리는 그의 명령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자 그는 술잔을 다시 채웠다.
“또 마셔.”
우린 술잔을 비웠고, 그는 또 술잔을 채우며 연신 마시기를 명령했다. 벌이라도 주듯이. 그것은 흡사 심판과도 같았다. 우리는 대체 그 술을 왜 마셔야 하는지, 또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인지 모른 채로 술을 마셨다. 빈속이 알코올로 가득 찼다. 내 괄호가 그런 식으로 채워졌다.
그러다 의식이 희미해질 무렵, 그 남자의 머리 위로 뭔가 아른거리는 게 보였다. 말풍선이었다. 쓰으윽- 나는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그 검은 판초 우의의 남자가 분명했다. 그가 TV 속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 15년 전 그때 잠이 든 이후로 어떻게 되었나 떠올려 보았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다음 날 눈을 뜨자 예의 모아이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신의 자리에 있었다. 군대에서의 일 처리가 그렇듯 모든 사건이 조용히 수습된 듯했다.
그 남자가 정말 북한군이었구나.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15년 전 있었던 일 중 어디까지가 진짜 현실의 일인지 판단하는 게 무의미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이 나의 현실이 된다.
언젠가 한 번은 휴가 나왔을 때인가, 나는 술자리에서 내가 겪은 일들을 들려주려 한 적 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다 멈칫했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입을 열면 나는 멧돼지 아니면 간잽이, 그 둘 중 하나인 남자가 될 수밖에 없음. 그게 이곳의 세계관이었다. 소년은 만화에만 있다. 나는 뭐랄까, 그냥 착하게 생긴 남자였다.
결국 기억 안 난다고 둘러대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나중엔 정말 잘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평범한 군 생활이었다. 알고 싶습니다. 이제 나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물간 또치와 마이콜은 소년 만화는커녕 명랑만화에도 더는 등장하지 않고,
나도 여기까지 왔다. 재수가 우릴 보았던 것처럼, 지금 나도 TV 속 그를 본다. 드론이 15년 전 나의 과거로 다가갔다. 작고 둥근 것 한 알을 툭 떨어트렸다. 나는 TV를 껐다. 캄캄해진 화면을 보며, 과거 그 술잔이 무언가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수류탄 투척! 서둘러 아내와 딸이 잠든 방으로 갔다. 그들에게 뛰어들어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듯 꼭 껴안았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남은 사과 속 애벌레는 어디로 가 버렸나?
딸의 머리는 동글동글했다. 그게 꼭 사과 같기도 하고 아기 공룡 같기도 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서글픈데, 잠꼬대하던 딸이 파키케팔로사우루스처럼 내 턱에 박치기를 날렸다. 너무 아프고 행복해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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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황새 양선형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네가 저질렀던 끔찍한 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쩌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초과할 만큼 오랫동안 작동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원통형의 한계 속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너였다. 배터리와 부품이 망가지면 너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너는 네 작동을 중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음은 물론 작동을 중지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형벌이 단호하게 집행되었고, 너는 눈을 감았으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너는 이후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줄곧 반복해야만 하는 한 줄의 기억 타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작은 파편으로서 오토마타로 개조된 네 머리통 안에 각인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드러누운 네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나른한 의식은 감은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박쥐 모양의 환영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기억 타래는 네가 과거에 살과 피를, 얼굴과 자의식을 가졌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인 너와 오토마타인 너를 잇는 개체로서의 동일성을, 속죄를 끝마치고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네가 감당해야만 하는 과오와 책임의 연속성을 말이다. 따라서 기억 타래는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극형에 처해진 바로 그 범인임을 증명하는 전자 신분증이자 영혼의 낙인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네가 죄수임을 공인하는 사법 기관의 서명, 특수한 일련번호, 기계의 머리통 안쪽에 새겨진 자아의 조각, 네 유한하며 어리석었던 시절의 잔류 데이터. 그러나 너는 네가 다른 기억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기억 타래를 골랐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각별했기 때문인지, 각별했던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무의미했기 때문인지. 너는 카메라처럼 무감하게 눈을 떴으며,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딸깍거리는, 앵앵거리고 번쩍거리는 전자 신호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네 머리통 안에는 한 줄의 기억 타래만이 남아 있었다.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효율적인 무력함이었고, 그 무력함 속을 공회전하는 짤막한 분량의 이미지 찌꺼기였다. 너는 스크린을 향해 강제로 조향된 인형의 냉담하며 거짓된 눈알처럼 기억의 이미지를 주시했고…… 주시하지 않았으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윳빛으로 들이닥치는 심신상실이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주위를 에워쌌다. 네 머리통 안의 암실에서는 언제나 한 줄의 기억 타래가 상영되었다. 너는 기억 타래를 출력하는 영사기이자 영사막이자 영사기사였으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세 가지 작동인 사이를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자율적인 엔진에 가담하고 예속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네 기억의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네 기억의 관객일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ON이었다. 너는 네 신경망에 폭포처럼 흐르는 전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수 없
- 관리자
- 2026-02-01
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 관리자
- 2026-02-01
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
- 관리자
- 2026-02-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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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2건
잘 읽었습니다!!
되게 재밌게 읽었어요 이 세계에 대한 우화로 읽히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