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아름다움
- 작성일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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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단어들을 낚아채듯이. 이 순간이 가장 좋았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속기의 기본이었다. 저 피고인은 잘못이 있는 거 같고, 저 피고인은 억울한 거 같고,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손가락은 느려지기 마련이었다. 기계가 되어야 했다. 잘 듣는 귀와 빠른 손가락을 가진 기계. 법에 대한 판단은 내 영역이 아니었다. 그건 검사, 변호사, 그리고 판사님들의 영역이었다.
첫 번째 사건이 지나가고 폭행죄인 두 번째 사건, 음주 운전 도주치상인 세 번째 사건도 지나갔다. 피고인들은 모두 변호사를 대동하고 있었다. 세 번째 사건의 피고인은 젊은 남자였는데, 변호사의 행색을 보아하니 꽤나 몸값이 높아 보였다. 다음으로 네 번째 사건의 피고인이 피고인석에 섰다. 젊은 여자. 변호사는 없었다. 검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벌금 500만 원을 구형했다. 그 후로도 모욕죄, 폭행죄, 성추행, 사기죄 등등 재판이 이어졌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맨 마지막에서야 호명되었다. 그는 그나마 변호사와 함께였다. 초라해 보이는 변호사기는 했지만. 검사가 그의 죄를 읊었다. 내용은 업무 방해와 도로교통법 위반이었다.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손을 움직여야 한다. 받아 적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말로 내용이 인식되지 않았다. 검사는 징역 6개월을 구형했고, 변호사가 증거를 제출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습니까? 판사님이 물었다. 없습니다. 휠체어에 탄 사람이 대답했다.
“선고 기일은 1월 18일 오후 2시로 잡겠습니다. 그날 반드시 출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났다. 판사님께서 먼저 퇴정하셨다. 검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나도 자료들을 모두 정리한 뒤 부속실로 돌아왔다.
정 판사님께서는 함께 교회에 다니는 다른 판사님들과 모임이 있으시다며 일찍 퇴근하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도 퇴근하셨다. 나는 부속실에 남아 오늘 공판을 녹음한 파일을 들으며 조서를 다듬었다.
저는 전 목사의 발언을 그대로 인터넷에 올렸을 뿐입니다. 이로 인해 전 목사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면 목사의 발언이 부적절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 사건의 피고인이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본인 입으로 자신이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했음을 인정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듯 당당했다. 반성한다는 말조차 안 하다니, 이 사건은 최고 금액으로 때리겠구나 싶었다. 목사가 한 말이 적절한지 부적절한지,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애초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이지 않은가.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재판, 법정 싸움이 옳고 그름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법정에서 다루는 것은 오직 하나. 법을 위반했는가 위반하지 않았는가이다. 법을 위반하면 유죄, 위반하지 않았으면 무죄. 법은 언제나 확실함을 요구한다. 불확실한 것들로 넘쳐나는 일상과 다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재판에서 이기고 싶다면 법률을 알면 된다. 법률에 적힌 단어를 알고 그 단어가 재판에서 어떤 뜻을 갖는지를 알면 된다. 이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법 앞에서 맴돌기만 하게 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문지기를 탓하면서. 이 여자도 그런 부류겠지.
삐-
귀가 울렸다. 이명이었다. 얼마 전부터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작년에 속기사 방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니 속기사들에게 흔히 생기는 병이라고 했다. 유영 님이 법원 근처의 야간진료를 하는 병원을 소개해 줬다.
퇴근 후에 병원에 들렀다가 저녁까지 해결하고 집에 돌아오니 9시였다. 이정은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고, 릴스를 보고, 다시 유튜브에서 숏츠를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자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이정이 말했다.
“누나, 대통령이 계엄 선포했대.”
12월 3일 오후 22시 23분경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두 시간 만에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고, 여섯 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되었다. 하지만 한 달이 넘도록 계엄이 적법했는지, 대통령을 탄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법원에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우리 법원에서 대통령에게 영장을 발부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기자들이 매일 같이 법원 앞에 모여 있고, 건너편에는 시위하는 사람들에 서 있고. 법원 안에는 이 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까 대통령 체포됐대요.”
유영 님이 말했다.
“결국 체포했네? 옷을 벗고 드러누워 있으면 못 잡아 가니 어쩌니 하더니.”
경수 님은 또 이상한 정치 유튜버의 방송을 본 모양이었다.
“설마 그러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채린 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웃었다.
“18일에 구속영장 심사한다고 하더라고요.”
유영 님이 카페를 둘러보며 속삭였다. 괜히 나도 따라 주위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일부러 판사나 검사들은 안 오는 외진 카페에 왔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카페 안에는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만 서넛 앉아 있을 뿐이었다.
“누가 하시는데요?”
내가 물었다. 몰라. 유영 님이 아는 사람 있냐며 물었다. 다들 모른다는 눈치였다. 또 시끄러워지겠네. 경수 님이 한숨을 내뱉었다. 시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말과 어떤 목사가 저항권을 운운하며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다는 말이 오갔다. 이러다 무슨 일 생길까 봐 겁나요. 채린 님이 말했다.
“근데 채린 님, 주말에 집회 다녀오셨어요? 인스타 스토리 봤어요.”
유영 님이 물었다.
“네. 그냥 친구들 따라서 다녀왔어요.”
채린 님이 멋쩍게 대답했다.
“조심해요.”
유영 님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집단행동만 아니면 공무원도 시위 참여해도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애초에 전 아직 공무원도 아니고.”
채린 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유경 님은 그래도 조심하라는 말만 덧붙이고는 더 캐묻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검사 중에 누가 대통령과 친하다고 한다, 검사 쪽도 라인이 다 나뉘어 있어 요즘 분위기가 장난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서부지검은 대통령 라인이 별로 없다더라, 그러니까 계속 중앙에서 하려는 거 아니냐, 등등. 유영 님이 영양가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동안 나는 다른 것이 신경 쓰였다. 채린 님은 집회에 다녀왔구나. 채린 님과 인스타 친구가 아니라서 몰랐다. 배짱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회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이 법원 안에 돌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채린 님은 나처럼 임기제이기도 하고,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집단 행위가 아니면 위법이 아니라고는 한다지만···
“민원 쪽만 아니면 좋을 텐데.”
채린 님이 말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화제가 곧 있을 부서 이동으로 옮겨져 있었다. 경수 님과 유영 님은 재작년에 우리 넷이 같이 일을 했으니 올해는 다들 부속실이나 형사과, 민사과 쪽으로 가지 않겠냐고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정은 요즘 뭐가 바쁜지 자꾸만 밖으로 나돌았다. 피곤하다며 아침도 먹지 않겠다는 걸 억지로 깨워 밥상 앞에 앉혔다. 방학이라고 밤새 게임만 하지 말고, 토익 학원도 다니고, 엄마 아빠 전화도 좀 받으라고 잔소리를 하니 알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엄마가 너 걱정 많이 해. 탄핵 집회 같은 거 나가는 거 아니냐고.”
“내가 그런 데 나갈 거 같아?”
이정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래도 엄마가 걱정하니까 네가 전화 좀 드려.”
“엄마는 쓸데없이 이상한 걱정하는 거고. 누나도 알잖아.”
이정의 말이 맞기는 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날 밤,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밖에도 나가지 마.
엄마는 밖에 나가면 잡혀간다고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물론 나도 계엄이라는 게 무섭기는 했지만, 엄마는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엄마는 옛날부터 그랬다. 나와 이정이에게 위에서 시키는 말은 토 달지 말고 따르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안전하다고. 중학생 때는 그런 일도 있었다. 엄마 이름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가 연체를 했는데, 도서관에서 엄마에게 책이 연체되었다는 문자를 발송한 것이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너 때문에 엄마 잡혀가면 책임질 거야? 이거 다 전산에 남는 건데, 나중에 무슨 일 터지면 이렇게 나라에서 정한 거 어긴 사람들부터 잡아간다고!”
나는 엄마가 미친 줄 알았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심으로 하다니. 그것도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도서관에서 책 연체한 정도로 그런 일은 안 생긴다고 아무리 말해도 엄마는 듣지 않았다.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같았다. 나는 그냥 엄마를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엄마의 막내 외삼촌이 85년의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몇 년 후 이모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누나네 법원에서 18일에 영장 심사한다며.”
이정이 말을 꺼냈다. 어떻게 아냐고 묻자 이정은 이미 인터넷에 다 올라왔다고 답했다.
“어떻게 되는지 누나는 뭐 아는 거 없어?”
이정을 바라보았다. 이정이는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젓가락으로 반찬만 뒤적이고 있었다.
“그런 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니까.”
“아니, 그래도 궁금하잖아. 어딜 가든 다 그 얘긴데.”
이정이 중얼거렸다.
“나는 완전 말단이라 아는 거 없어.”
판사님들은 내 앞에서는 그런 얘기를 안 하셨고, 속기사들끼리 떠드는 것들은 믿을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계엄이 뭐라고 난리야.”
이정이 툴툴거렸다. 나도 계엄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 뭐라 대답할 게 없었다. 아는 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게 위법이라는 정도. 그나마도 뉴스에서 하는 말을 들은 것뿐이었다.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국가에 중대한 재난이 있을 때만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데, 지금은 국가에 중대한 재난이 있지 않으니 계엄을 선포한 것은 위법이라는 말들이었다.
“엄마가 정치 같은 거에 관심 두지 말라고 했잖아. 밥 다 먹고는 토익 학원이나 알아봐.”
나는 서둘러 밥을 먹고 싱크대 안에 그릇을 넣어 두었다. 설거지는 이정이의 몫이었다. 아직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이정을 두고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중대한 재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나라에 중대한 재난이 있는지 없는지로 다투고 있을 것이었다. 중대한 재난이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중대한 재난에 해당하는가. 사람마다 하는 말이 다 달라서 나로서는 뭐가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이런 걸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지하철이 움직이지 않았다. 앞칸 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휠체어를 탄 사람들과 무장한 직원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안내방송에서는 특정 장애인 단체의 시위로 인해 지하철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방송을 반복해서 내보냈다. 처음엔 차분하게 기다리던 사람들도 15분이 넘어갈 때쯤부터는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원래 4호선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5호선에서 해요? 여기저기서 출근이 늦어질 거 같다며 직장에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속기사들의 단체 카카오톡 방도 난리였다. 유영 님은 오전 공판이라 그냥 택시를 타고 가고 있다고 했다. 나도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시간까지 출근을 할 수 없을 거 같아 부속실에 전화를 했지만 아직 출근 시간 전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받지 않았다.
“씨발 장애인 새끼들이 왜 기어 나와서 지랄이야.”
한 중년 남자가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남자를 시작으로 사람들의 말이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장애인이면 집 안에 처박혀 있던가. 꼭 출근 시간에 이 지랄을 해? 불법시위 아니야? 이 새끼들 다 잡아 처넣어야 해! 회의에 늦었다며 고소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핸드폰에 ‘특정 장애인 단체의 시위로 인해 열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의 재난문자가 왔다. 이명이 들렸다. 사이렌 같은 이명 소리와 사람들의 언성이 한데 섞여 기괴한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재난. 이거야말로 재난이었다. 시위를 하던 장애인들은 결국 직원들에 의해 사지가 붙들려 끌려 나갔다. 사람이 저렇게 물건처럼 끌려 나갈 수도 있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체포권 없이 사람을 끌어내는 것은 불법이지 않나? 그래서 대통령도 한 달이나 손대지 못한 것 아닌가.
결국 출근 시간이 20분이나 지난 후에야 법원에 도착했다. 부속실에 도착하니 판사님들께서는 이미 다 출근하셔서 자리에 앉아 계셨다.
“권 기사가 웬일로 지각이야. 무슨 일 있었어?”
강 판사님이 물으셨다.
“장애인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지연돼서요. 죄송합니다.”
장애인 시위? 정 판사님은 전혀 몰랐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오늘 차 없는 사람들은 다 지각했겠네.”
이 판사님이 웃으며 말했다. 나름 농담이라고 한 말인 거 같았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옆방 기사는 지각 안 했던데. 택시 타고 왔나?”
이 판사님의 말에 정 판사님이 “요즘 택시비가 얼만데, 늦을 수도 있지.”라며 핀잔을 주었다. 심장이 뛰었다.
“당분간 더 일찍 나와야지 어쩌겠어.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일해요.”
정 판사님의 말에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는 속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창밖에서 대통령의 불법 체포를 당장 철회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격적으로 집회용 스피커까지 동원한 듯했다. 저건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시위가 맞나? 아침에 지하철에서 본 광경이 생각났다. 사지가 붙들려 끌려나가던 사람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불법, 위법, 그런 것들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위에서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고, 시키는 일은 토 달지 말고 해. 그러면 안전해. 안전. 그건 법률 속에 있었다. 법을 위반하지만 않으면 안전할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내일모레 있을 선고를 위한 자료를 준비했다. 법원 네트워크에 접속해 정 판사님께서 12월 3일에 진행한 공판의 자료들을 찾았다. 우선 정 판사님을 위해 글씨 크기를 키운 자료를 먼저 인쇄했다. 프린터에서 글자가 인쇄되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반복적이고 일정한 소음. 인쇄가 끝난 후에는 보관을 위한 자료를 인쇄했다. 그동안 출력된 자료를 사건별로 분류해 포스트잇을 붙였다. 검찰 측에서 제출한 것과 피고인 측에서 제출한 것에는 각각 다른 색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프린터가 덜컥이는 소리를 내며 멈추고 알람이 울렸다. 안에서 종이가 걸린 모양이었다. 프린터 내부의 뚜껑을 열어 구겨진 종이를 빼내고 있을 때였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는 말에 장애인 단체 시위 때문에 지각했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엄마랑 아빠는 별일 없어? 내 물음에 엄마는 아빠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엄마가 대답했다.
“버스 일 하는 거 때문에 그렇지 뭐. 얼마 전에도 승객들끼리 싸웠대.”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아빠는 괜찮냐는 말에 엄마는 괜찮다고 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빠 때문에 싸운 거도 아니고.”
내 말에 엄마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렇지, 너희 아빠 때문도 아니고 너나 아빠가 다친 것도 아니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정이는 어떻게 지내.”
“방학이라고 맨날 게임만 하고 잠만 자고 말도 안 들어.”
“그래도 이정이 같은 애가 어디 있니. 학교 앞에 자취방 구해 달라고도 안 하고 누나랑 같이 지내고. 대학까지 가서 이정이처럼 누나한테 안 대드는 애도 없어.”
엄마는 집회 같은 데 가지 말고, 판사님 말씀 잘 들으라고 말했다. 나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프린터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누르자 다시 인쇄가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아 다시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곧 인쇄가 끝났고 자료를 분류하는 것도 마무리되었다. 자료들을 챙겨 부속실로 향하는 문에 노크를 한 후 문을 열었다. 부속실에는 정 판사님과 강 판사님만 계셨다. 정 판사님께 자료를 건네 드리고 속기실에 돌아왔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어제 있었던 공판의 녹취를 들으며 조서를 작성하고 있는 와중에 정 판사님에게서 호출이 왔다. 나는 다시 부속실로 나갔다. 정 판사님이 자료 묶음 하나를 들고 계셨다. 자료를 받아 사건 번호를 확인했다. 사건 번호 2025 고단 3272. 사실적시 명예훼손 건의 피고인 측 자료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정 판사님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 내가 그런 걸 다 읽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내용 좀 요약해서 가져다줄래요?”
나는 자료를 빠르게 읽어 보았다. 몇 장 읽어 보지 않았는데도 판사님이 그런 부탁을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논문이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무슨 법원에 논문을 내고 있어? 증거를 내야지.”
정 판사님께서 혀를 차셨다.
“그래도 피고인이 제출한 자료인데 아예 내용을 모르고 선고를 할 수는 없으니까, 부탁해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속기실로 돌아왔다. 판사님께서 직접 부탁한 업무부터 처리하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조서 작성을 멈추고 피고인이 제출한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다. 앞부분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 사회에 해롭다는 내용의 논문들이었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논문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는 법이 부당하다는 내용의 논문들도 있었다. 그 뒤로는 피고인이 목사의 발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후 교인들이 자신을 괴롭혔다는 내용과, 그로 인해 자신이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정신과 진료 기록과 수십 장의 탄원서도 첨부되어 있었다. 탄원서는 양식이라도 써서 돌린 것인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었다.
요약한 것을 정 판사님께 전달했다. 쯧. 판사님께서 혀를 차셨다.
“뭐 그래서, 법이 잘못됐다는 거야?”
판사님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다. 어쩐지 내가 잘못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국법을 왜 들먹여? 한국에서 한국 법을 어긴 거면서.”
판사님은 법이 우습냐며 화를 내셨다. 나는 판사님 말에 맞장구만 쳤다. 맞아요. 법대로 해야죠.
“아무튼 고마워요.”
판사님이 이만 돌아가 보라며 손을 드셨다. 판사님께 인사를 하고 속기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속기사들의 단체 카카오톡 방이었다. 미리보기로 힐끗 보니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을 심사하는 판사가 누구인지에 대한 말들이었다. 다들 팔자 좋네. 나는 핸드폰을 뒤집었다. 그리고 녹취를 듣기 위해 헤드셋을 썼다. 끊이지 않고 들리던 시위 소리가 멈췄다.
오늘도 지하철이 연착했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서 나온 덕분에 지각은 하지 않았지만, 딱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바람에 부속실 청소를 하지 못했다. 급한 대로 종이컵에 커피를 내렸다. 판사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도 장애인들이 시위하면 어떡하죠?
속기사 카카오톡 방에 글이 올라왔다. 자차로 출퇴근을 하는 경수 님만 여유로웠다.
-또 시위하면 진짜 단체로 고소라도 할까요? 손해배상으로ㅋㅋ
유영 님이 메시지를 보냈다.
-지하철 쪽에서 해결해 주겠죠ㅠㅠ
메시지를 보냈다. 채린 님도 재판하는 거 지켜보니까 할 일도 많아 보이고 힘들어 보인다며 동조했다. 유영 님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라고 넘기고는 경수 님께 카풀 안 되냐며 농담했다. 장애인, 재판. 문득 몇 주 전에 했던 공판이 생각났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피고인이었는데, 무슨 일로 기소가 된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피고인석에 있는데도 주눅 들지 않고 있던 모습이 기억났다. 마지막에 판사님께 말할 기회가 주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특이하긴 했다. 보통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형량을 낮추려 하거나, 억울함을 주장해 무죄를 이끌어 내려 하는데 말이다. 마침 내일이 선고 기일이었던가. 나는 내일 있을 선고의 자료들을 뒤적였다. 정 판사님께 호출이 왔다.
“권 기사 오늘 점심에 시간 괜찮아요?”
어제 지각한 것, 오늘 청소를 하지 못한 것 등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당황한 게 얼굴에 나타났는지 판사님께서 바로 덧붙이셨다.
“얼마 안 있으면 부서 이동하잖아. 같이 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가 밥 한번 안 사 준 거 같아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능하다고 답하고 점심 약속을 잡았다. 속기사 단체 카카오톡 방에 판사님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셔서 오늘 점심은 같이 먹지 못할 거 같다고 말했다.
-정 판사님이 점심 사 주신다고 하셨어요?
유영 님이 바로 되물었다. 정 판사님이신 거 어떻게 알았어요? 유영 님은 그냥 그분이 부서 이동철만 되면 속기사들에게 점심을 사 주신다고 들었다고 답했다.
-잘 다녀와요ㅎㅎ 파이팅!
유영 님이 메시지를 보냈다.
점심시간이 되어 정 판사님과 함께 법원 밖으로 나왔다. 정 판사님이 데려간 곳은 오래된 중식집이었다. 정 판사님께서는 여기가 진짜 맛집이라고 하셨다. 제대로 된 간짜장을 하는 곳이라고. 정 판사님과 나는 간짜장 두 개와 군만두 하나를 시켰다. 곧 음식들이 나왔다. 판사님은 나에게 고향이 어디인지, 가족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와 같은 신변잡기들을 물으셨다. 확실히 맛있는 간짜장이었지만 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권 기사는 종교 있어요?”
정 판사님이 물으셨다. 나도 모르게 교회에 다닌다고 대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역시. 이지는 교인일 줄 알았어. 매사에 올바르잖아.”
사람은 신앙이 있어야 해. 판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젊은이들은 신앙이 없어서 문제라면서.
“언제나 성경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해.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고, 율법에 순종하고,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나는 의미도 모르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님이 친근하게 대하며 이름을 불러주신 것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역시 교회에 다닌다고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지는 어디에 가서도 잘할 거야.”
그리고 식사가 끝났다. 판사님과 나는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씩을 들고 부속실로 돌아왔다. 나는 속기실에 앉아 정 판사님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진지하게 교회를 다녀야 하나 싶었다. 교회에 다니는 판사들 모임도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교회라는 게 출세의 발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교회라니. 내가 기독교에 대해 아는 건 사도신경 하나뿐이었다. 하느님, 예수, 마리아, 빌라도··· 빌라도가 누구지? 하느님과 예수, 마리아는 알겠는데 말이다. 매일 크리스털을 닦으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정말 나쁜 짓을 한 사람이겠거니 했을 뿐. 얼마나 나쁜 짓을 했길래 사도신경이라는 것에 적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인터넷에 ‘본디오 빌라도’를 검색했다. 어렵지 않게 관련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글에는 본디오 빌라도란 예수가 살았던 시기 유대 지방의 총독이었던 로마인으로 예수의 재판을 담당한 사람이라 쓰여 있었다. 예수가 재판을 받았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재판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것도. 좀 더 읽으니 다른 내용도 나왔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직접 형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의 처분을 유대인들에게 넘긴 뒤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는 의미로 손을 씻었다고 했다. 이상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이 내용대로라면 십자가는 범죄의 상징이라는 것 아닌가? 나는 인터넷에 십자가의 의미와 집 근처에 있는 교회들을 검색했다. 어떤 교회에 다닐지 고르기 위해 카카오맵에 쓰인 리뷰들을 읽고 있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평소처럼 나와 이정의 안부를 물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잠시 뜸들 들이던 엄마는, 아빠가 승객에게 고소당했다고 말했다.
괜찮을 거야. 나는 엄마에게 말했듯 스스로에게 말했다. 괜찮을 거야. 고소를 당한 것이 유죄라는 뜻은 아니니까. 아빠는 규정대로 승객끼리 싸움이 났을 때 관여하지 않았고, 규정대로 계속 운전을 했을 뿐이다. 버스에서 싸우던 승객들이 넘어지고, 버스가 멈춰서 회의에 늦은 사람이 생긴 것이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머리로는 기소까지도 가지 않을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장은 계속 불안하게 뛰었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일이 나쁘게 되면 어떡하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나는 이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전화하라고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 판사님들은 모두 퇴근하셨다. 나는 속기실에 남아 내일 있을 선고 자료들을 읽었다. 음주 운전 도주치상 사건의 변호사는 피고인이 사고 현장을 이탈한 것이 고의가 아니었음을 주장했다. 차량의 후면에서 사고가 발생했으며 당시 피고인이 음주 상태였기 때문에 사고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증거 자료로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을 제출했다. 차는 사람을 치고도 속력을 전혀 줄이지 않았다. 과연 자신이 사고를 냈다는 것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고의성이라는 단어를 겨냥해 형을 낮춰 보려는 테크닉이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 사건의 피해자는 피고인이 인터넷에 작성한 글로 인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어 교회가 큰 손해를 입고 있다며 엄벌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피해자가 불면증에 걸려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진료기록서와 피해자에게 동조하는 교인들이 보낸 엄벌을 요청하는 탄원서들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피고인이 제출한 자료들과 수준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점은 피고인이 목사의 발언을 인터넷에 게재한 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사람들에 의한 사적인 복수라고 주장한다는 점 정도. 그리고 업무방해와 도로교통법 위반 사건이 나왔다. 그 장애인이었다. 이쪽 변호사의 대응은 생각 외로 모범적이었다. 변호사는 헌법에 보장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자유를 언급하고 있었다. 또한 피고인을 체포하고 구금한 과정이 불법적이었음을 지적했다. 역시 그 사람들 중 한 명이었구나 싶었다. 장애인 시위 단체. 변호사는 이런 재판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아주 능숙하게 대처했다.
괜찮을 것이었다. 설령 기소가 된다 하더라도 변호사를 구하면 된다. 법률에 쓰인 단어들을 하나하나 뜯어볼 줄 아는, 그 단어들을 자기 뜻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테크닉을 가진 변호사를.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정은 집에도 없었다. 나는 다시 이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시도를 한 후에야 이정이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너 어디 있어?”
뭐라고? 이정은 내 말이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정에게 다시 말했다.
“나 친구 동네 놀러 왔어. 오늘은 안 들어갈 거야.”
수화기 너머로 이정의 주변이 시끄러운 것이 느껴졌다. 이정의 목소리도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술집이라도 간 것인가 싶었다. 이정은 아빠가 고소를 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할 말 있으니까 빨리 들어와.”
“나 오늘은 안 들어갈 거야. 내일 말해.”
이정에게 늦어도 좋으니 집에 오라고 말했지만, 이정은 나중에 다시 연락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정을 기다리다 잠에 들었다. 잠을 자는 내내 이정과의 통화를 통해 들리던 소음과 이명이 섞여 들리는 듯했다.
아침이 되어도 이정은 집에 없었다. 나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은 장애인 단체가 시위를 하지 않아 지하철이 제시간에 왔다. 일찍 출근한 김에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청소를 했다. 모니터와 키보드의 먼지도 털고, 바닥도 물걸레로 닦고. 평소처럼 정 판사님 책상 위의 크리스털도 닦았다. 어제 그런 글을 읽어서인지 본디오 빌라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빌라도라면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라도가 판결을 내린 것도 아니라는데.
출근 시간이 되어 판사님들이 오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커피 한 잔씩을 드린 뒤 속기실로 들어왔다. 한창 일을 하고 있을 때 유영 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점심을 먹고 따로 볼 수 있냐는 것이었다. 마침 나도 아는 변호사가 있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기에 좋다고 대답했다.
구내식당에서 다 함께 점심을 먹은 후 유영 님과 둘이서 법원 밖으로 나왔다. 시위하는 사람들이 어제보다 몇 배는 많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피해 속기사들이 자주 가는 외진 카페로 향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유영 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 판사님이 뭐라고 하셨어?”
전혀 예상 못 한 화제였다.
“그냥 수고했고 다른 부서 가서도 잘 하라고만 하셨어요. 그런데 정 판사님이 왜요?”
유영 님은 말하기를 망설이는 것처럼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판사님, 좀 이상하잖아. 밥 사준다고 하고는 짜장면이나 사주면서 교회 다니냐고 물어본다며? 자기한테도 그랬어?”
유영 님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네. 그게 이상한 건가요?”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라니. 정 판사님은 좋은 분이셨다. 아랫사람에게도 친절하고, 무엇보다 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시지 않은가. 유영 님에게 그런 말을 들으실 분은 아니었다. 유영 님은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교회 안 다닌다고 하면 사람 대놓고 차별하니까 문제지. 계속 교회 다니라고 잔소리하고. 그거 인권 침해야. 예전에는 새로 사람 들어오자마자 그랬어. 그러다 한 명이 못 참고 노동청에 신고까지 했다니까? 그런데 판사라고 무슨 법 무슨 법 들면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더라고. 그 후로는 곧 나갈 사람들한테만 그러더라.”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유영 님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고는 속삭였다.
“그분 자기 마음대로 하기로 유명해. 주차도 아무 데나 하고, 속기사들한테 자기 일 떠넘기고. 판결까지 자기 기분대로 한다고 하더라고.”
유영 님은 내가 정 판사님과 함께 일하니 괜히 불편할까봐 지금껏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본 정 판사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유영 님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그런데 할 말 있다는 건 뭐야?”
유영 님이 물었다. 유영 님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정 판사님과 유영 님. 누구를 믿어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판사님은 법을 지키는 분이시고 유영 님은 평소에도 확실하지 않은 말들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더 이상 유영 님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명 때문에 그렇다고 둘러댔다. 우리는 커피를 반 이상 남기고 급하게 법원으로 돌아왔다.
재판장에 가야 했다. 10분 뒤면 선고 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속기용 키보드와 자료들을 챙겨 재판장으로 향했다. 매일 걷는 길인데 유달리 길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지도. 그러고 보니 지금 대통령의 구속영장 심사 진행되고 있다고 했던가.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재판장에 도착해 속기사석에 앉았다. 곧 검사들과 정 판사님이 들어오셨다. 선고가 시작되었다. 나도 귀를 열고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고인이 충분한 고의성을 가지고 폭행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피고인에게 벌금 삼백만 원을 처한다. 판사님이 두 번째 사건 번호를 불렀다.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판결을 선고만 하는 것인지라 빠르게 순서가 지나갔다. 무죄, 집행유예, 벌금, 징역··· 그리고 그 여자 차례가 되었다. 2025 고단 3272. 여자가 피고인석에 섰다. 판사님께서 먼저 선고의 이유를 말하셨다.
“피고인은 피해자와 교회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그 주장에 따르면 피고인은 공익성을 가지고 복사의 발언을 인터넷에 게재한 것으로 보기 어렵게 된다. 피고인이 자신이 괴롭힘을 당한 것에 복수하려는 사적인 의도로 목사의 발언을 인터넷에 게재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피고인이 제출한 정신과 진료 기록도 피해자의 언행으로부터 받은 피해라 보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피고인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또한 피고인의 무죄를 청원하는 탄원서들로 보아 피고인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특정 단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판사님은 목사의 정신과 진료 기록서, 교회 사람들의 탄원서들을 언급하며 피해자가 피고인의 범죄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있어 엄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피고인에게 벌금 오백만 원을 처한다. 이 판결에 불복할 경우 7일 이내 서울서부지방법원에 항소할 수 있고 항소장은 이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여자는 뒤돌아 나갔다. 속기 중이라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유영 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 판사님의 말도. ‘그 판사님은 판결을 자기 기분대로 해.’ ‘목회자에게 순종해야지.’ 생각을 떨쳐내려 모니터와 키보드에 더욱 집중했다. 판사님이 다음 선고의 사건 번호를 불렀다. 두 번의 선고가 지나갔다. 판사님이 마지막 사건의 번호를 불렀다. 문을 열고 휠체어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검사가 구형한 것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이었지만, 그래도 유죄였다. 그렇게 마지막 선고가 끝났다. 판사님께서 재판장을 나가셨다. 검사와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나도 키보드와 자료들을 챙겨 자리에서 속기실로 돌아왔다.
삐-
속기실 의자에 앉는 순간 소리가 들렸다. 이명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재난 문자였다. 내용을 보니 집회 관련 인파 밀집으로 인해 지하철이 무정차 통과한다는 내용이었다. 창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법원 건너편 도로가 시위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두려울 정도로. 점심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속기사들의 단체 카카오톡 방에도 메시지가 올라왔다. 우리 오늘 집에 갈 수 있는 거 맞아요? 괜히 지나가다 봉변당하는 거 아닌가, 같은 말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사고를 주의하라는 재난 문자가 왔다. 대통령의 불법 체포를 철회하라는 구호도 점점 커졌다. 대통령의 불법 체포를 즉각 철회하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헤드셋을 썼다. 헤드셋이 모든 소리들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다.
6시가 되어 퇴근을 하기 위해 헤드셋을 벗었다. 불법! 불법! 불법! 헤드셋을 벗자마자 소리가 들렸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인원이 더 늘어난 듯 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외침이 속기실 안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뒤집어 놓았던 핸드폰을 보았다.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속기사들의 단체 카카오톡 방에 들어갔다. 집회 참여자 중 법원의 담을 넘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경찰들이 상해를 입었다는 말도. 나를 제외한 다른 속기사들은 이미 퇴근을 한 상태였다. 집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최소한의 인원만 남고 나머지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라는 말이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부속실에 나가보니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판사님들은 모두 일찍 퇴근한 모양이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저 아직 퇴근 못 했는데 어떡하죠.
어쩌다가 아직 퇴근을 못 했냐는 말에 일에 집중하느라 상황을 몰랐다고만 답했다.
-지금 혼자 나오면 위험할 거 같은데, 누구 데리러 와 줄 사람 없어요?
채린 님이 혼자 나오지 말고 동생을 불러 함께 나오라고 말했다. 곧장 이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아직도 친구들과 함께인가 싶었다. 집에 오라 해도 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고.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것인가 싶어 속이 탔다.
와아!
환호성과 함께 대통령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 한 대가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양옆으로 그 차를 경호하는 오토바이들과 경호원들이 붙어있었다. 대통령이 타고 있는 차인 듯했다. 장애인 단체의 사람들이 사지가 붙들려 끌려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대통령이잖아. 그 사람들은 장애인들이었고.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하려 노력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법이 다르게 적용되는 뭔가가. 법이라는 건 공정하고 확실한 것이지 않은가.
몇 시간이 지났다. 이정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위대는 해산하기는커녕 점점 규모가 커져가고 있었다. 속기사들은 경찰 통제선이 뚫렸고, 공수처의 차량이 공격당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는 시위대가 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불법 심문을 하고 폭력을 행했다는 말까지 올라왔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법원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정에게 전화가 온 것은 새벽 2시 50분쯤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법원 안에 갇혀서 오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보내 놓은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한 모양이었다.
“누나 지금 법원이야?”
이정이 다짜고짜 물었다.
“왜 아직도 거기에 있어.”
“시위하는 사람들 때문에 못 나가고 갇혔어.”
이정이 욕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말했다. 이정에게 위험하니 법원에 오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대통령님 당장 풀어 드려 개새끼들아!”
고함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창 밖에서 들리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고함 소리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귀 바로 옆, 핸드폰의 스피커에서. 그 목소리는 이정의 목소리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이정에게 물었다.
“너 지금 법원 앞에 있니?”
이정은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의 침묵 끝에 이정이 말했다.
“누나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이정의 말과 동시에 “구속영장 발부됐다고 합니다!”라는 외침이 들렸다. 창밖과 핸드폰에서 성난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정을 불렀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이정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통화가 끊어졌다. 다시 통화를 걸었지만 통신이 안 좋은 것인지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창밖에서 욕설과 고함 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폭발음 같은 소리도 들렸다. 경찰들이 시위대를 막았지만 시위대는 경찰을 뚫고 법원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저들을 시위대라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법원의 문을 부수고 창문을 깨트렸다. 온갖 소리들 사이로 대통령의 이름이 들렸다. 그들이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날뛰고 있었다.
숨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나는 서둘러 부속실의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그리고 속기실로 돌아와 불을 끈 뒤 책상을 밀어 속기실 문 앞을 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벽을 두들기는 소리, 대통령의 구속을 심사한 판사를 찾는 고함 소리. 쿵쿵. 벽을 두들기듯 맥박이 뛰는 소리가 귀 안에서 울렸다. 철과 철이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쾅!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그들이 부속실의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쾅! 쾅! 몇 번의 소리가 들린 뒤, 그들 중 한 명이 외쳤다.
“판사 새끼 어디 있어!”
외침은 속기실 문 바로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 던져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숨을 삼켰다.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그들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판사의 이름을 외치며 죽여 버릴 거라고 하고 있었다. 그건 분노라기보다 희열에 가까웠다. 쾅! 속기실 문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쾅! 다시 한번 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소리가 멈췄다. 잠시 뒤, 조금 먼 곳에서 다른 부속실의 문을 여는 소리와 물건들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함인지 환호인지 모를 목소리들이 울렁거리며 멀어져 갔다. 그 목소리들 사이에서 이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속기실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소리는 한순간 격해지더니 점점 줄어들었다. 경찰이 법원 안에 들어와 그 사람들을 진압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모든 소리가 창 너머에서 들리듯 뿌옇게 흐려질 때가 되어서야 속기실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부속실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무너져 있었다.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 자료들을 보관해 놓은 서랍, 판사들의 책상, 시계와 커피 머신까지 모든 것이. 핸드폰을 들어 불빛을 비춰보았다. 무언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조각난 크리스털이었다. 사도신경이 쓰여 있던 크리스털. 그것은 산산이 부서져 어떤 글자도 알아볼 수 없는 형체를 하고 있었다.
삐-
귀에서 소리가 들렸다. 재난 문자의 알림음 같기도, 사이렌 소리 같기도 한 소리.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지가 붙들려 끌려 나가던 장애인 단체 사람들, 재판장에서의 여자, 정 판사, 호위를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가던 대통령, 계엄, 그리고 이정. 내가 보지 않고 넘어간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나는 땀으로 젖은 손을 들어, 허공에서 손을 문질렀다. 손을 씻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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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기 연습그만두기 연습 차현지 올리브는 무언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마다 적외선 치료기의 빨간 불빛을 떠올리곤 했다. 훈련이 끝나면 이비인후과에 가서 대기실 벽 한쪽에 나란히 걸려 있던 길쭉한 원통형 기계의 전원을 켰다.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수화기를 들 듯 치료기를 한쪽 귀에 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염증으로 늘 귓구멍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뜨겁고 날카로우며 압력이 가득 차는 듯한 통증은 아직도 생생했다. 언젠가 잠수 훈련을 하던 날이었다. 손가락으로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씩 짚을 수 있을 만큼 수영장 바닥 가까이 내려가 잠영하던 중,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안 있어 수경 너머로 연한 선홍빛 액체가 서서히 퍼지는 것이 보였다. 올리브의 오른쪽 귀에서 난 출혈이었다. 몸을 밀어 올려 수면 위로 향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올리브는 생각했다. 이제 더는 지금처럼 수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즈음 올리브는 사춘기에 막 접어들었다. 하루에 많게는 반나절 가까이 물속에서 체력을 다 소진한 탓에 베개에 늘 침 자국을 잔뜩 내며 꿀잠에 들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잠에 드는 것이 어려웠다. 누우면 자꾸 잡생각이 났다. 하계 수련회에 갈 때 버스는 누구랑 같이 타지. 정혜는 짝을 구했나. 왜 나는 단짝 친구 하나 없는 거지. 이게 다 수영 때문이야. 아, 수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금세 자정이 가까워졌다. 훈련하느라 올리브는 늘 혼자였다. 친구들이 모닝글로리에 가서 샤프펜슬을 살 때도, 삼삼오오 모여서 만화를 그릴 때에도 올리브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심지어 같이 수영을 시작한 친구들이 샤워실에서 그녀를 못 본 척 짝지어 수영복 물기를 짜고 있을 때도. 넌 선수반 갔잖아, 이제 우리랑은 못 놀지. 그 애들이 샤워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올리브는 연신 샴푸질을 했다. 거품이 많아져 눈꺼풀에까지 흘려내려도 쓱쓱 닦아내면서. 그러고는 아무도 없을 때 수영복의 물기를 짰다. 너무 많이 짜서 손아귀가 얼얼할 만큼. 됐어, 혼자여도 괜찮아, 까짓거. 주문을 외듯 혼잣말을 하면서. 올리브는 물속에 있는 것보다 물 바깥의 생활이 더 갑갑했다. 레인 안에서 일렬로 쭉쭉 직진, 턴, 직진, 턴만 하면 되는 반복적인 훈련이 그리웠다. 오로지 숫자와 기록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사회적 교감 따위 없는 속 편한 물속이. 너무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면 올리브는 심야 라디오에 편지를 썼다. 직접 손 글씨를 쓰며 사연 받을 주소를 불러주던 디제이가 더듬더듬 영…등…포구…… 여의…도…동……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을 때면 올리브도 똑같이 편지지 봉투에 주소를 또박또박 적곤 했다. 사연이 채택되지는 않았다. 중학생은 너무 어리단 건가. 그래서 다음엔 대학생인 척 보내보았다. 봄이 되면 새내기 대학생들 사연을 자주 읽어주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올리브는 성별과 직업을 바꿔가며 계속 사연을 보냈다. 우푯값이
- 차현지
- 2026-05-01
문장웹진 소설
우릴 떠난 채식주의자와 불을 끄는 돼지들우릴 떠난 채식주의자와 불을 끄는 돼지들 김아인 1 산길의 고지를 넘자, 훅 안개가 끼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권은 전조등을 상향으로 바꾸고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밤 기온이 뚝 떨어지는 늦여름이면 곧잘 있는 일이었다. 권은 턱을 당기고 운전대를 단단히 잡았다. 좁은 2차선 도로에 굴곡마다 급커브를 도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늦은 새벽에 비까지 더해지면, 아무리 익숙히 오가는 길이라 해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권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시 반이었다. 이대로면 집에 들어가는 건 세 시나 되어서일까. 권은 어금니를 맞붙이며 나오는 하품을 흘려보냈다. 왠지 평소보다 몸도 찌뿌둥하고, 눈도 뻑뻑한 기분이었다. 권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걸어가든 기어가든, 일단 굴러가곤 있다는 게 중요했다. 회사 차량─주행거리 36만 킬로미터의 다마스 트럭이 말썽을 피우거나, 도로가 끊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권은 눈살을 찌푸렸다. 축축한 기억 하나가 머릿속 깊은 곳에 얽혀있는 배관 속을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지나갔다. 권은 그것이 뒤로 남긴 끈끈한 발자국을 되짚어 다시 한번 그 냄새와 습기를 떠올려냈다. 그리고 자신이 그걸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단지 그 무게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2 권의 별명은 권이었다. 권. 태극권. 영춘권. 북두의 권. 사실 그가 다니는 곳은 주먹질과는 거리가 먼 유도 도장이었지만, 또래 아이들에겐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권이었고, 전혀 다른 곳에 가도 권이었고, 유도가 뭔지 알 만큼 아는 이들 사이에 속해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권이었다. 권이 유도를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열여섯은 선수를 목표로 하고 운동을 시작하기에 이른 나이는 아니지만, 그에겐 소질이 있었다. 우선 신체적 조건이 좋았다. 체격이 크고, 힘과 유연성이 좋았다. 처음 찾아간 도장의 관장이 한 말에 따르자면 균형감각이 굳세고 순발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진짜 소질은 따로 있었다. 권은 상대 선수의 사전정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거나 여러 파훼법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아도, 본능에 따라 승리를 위한 최적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관장은 그걸 두고 재능의 영역에 있는 감각이라고 말했다. 머리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이 그런 본능적인 감각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거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너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굼떠져. 알겠어? 그 순간의 판단을 믿고 바로바로 움직이라고. 너는 그게 맞아.” 권은 그 말을 따랐다. 그는 반년 만에 청소년부를 떠나 성인부에 들어가게 됐고, 일 년이 좀 더 지나선 체급과 나이를 통틀어 지역 내에 붙을 만한 상대가 없게 되었다. 다른 학교나 시설,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할 때도 주목받을 만큼 두각을 드러냈다. 관장은 권을 자랑스러워했고, 권도 자부심을 느꼈다. 추천으로 체육대학에 입학한 후, 권은 더 많은 시간을 유도에 쏟아부었다. 자잘한
- 김아인
- 2026-05-01
문장웹진 소설
모래 유원지모래 유원지 김소라 할아버지는 나를 기다리고, 나는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매일 오후의 풍경이 그렇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발소리가 신호가 되었다. 저벅이는 소리가 가까워지면 할아버지는 낚시 조끼 주머니에서 투명한 아스피린 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동그란 알약 두 개를 손바닥에 덜어내 입안에 톡 털어 넣고는 물도 없이 삼켜버렸다. 아주 보란 듯. 때때로 입이 말라 단번에 삼키지 못하면 얇은 입술에 힘을 주고 한참을 우물거려 침을 모았다.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닿았다. 그다음엔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혼잣말을 닮은 이야기가 시작됐다. 귀담아들을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 대한 것. 그러니까 대부분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 나는 모르는 사람들. 영영 소식이 끊긴 아들이라든가 단골손님이라든가. 또는 이 동네에 관한 것, 그리고 저 동네에 관한 것. 전파사 문 앞에 놓인 접이식 철제 의자가 할아버지의 자리였다. 앙상한 다리를 꼬고 구부정하게 앉아 주절주절, 내가 탈 마을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중얼거렸다. 말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내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이 대화가 아주 일방적이라는 것을 본인도 아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 나는 늘 내버려두었다. 할아버지는 ‘결국’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그 사실까지는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 줄 알아? 그러다가 결국엔 말이야. 결국 이렇게 된다구. 그 말버릇 때문에 할아버지는 마지막을 다 아는 듯도 했고, 모르는 듯도 했다. 기대하는 듯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가 입을 뗄 때마다 나는 마지막을 기다리게 된다. 결국 어떻게 될까. 그 질문을 길잡이 삼아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를 기꺼이 따라가곤 했다. 천변을 따라 마을버스가 느리게 다가왔다. 이 버려진 동네는 물이 바짝 말라버린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알파벳 U자를 길게 늘여 놓은 모양으로 생겼다. 나와 할아버지는 가장 끝, 휘어진 부분의 막다른 곳에 살았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올망졸망한 단층 건물들을 굽어보는 유일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3층엔 내가 세 들어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에게 딱 알맞은,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이었다. 2층엔 건물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살았고, 1층엔 오래전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전파사가 문을 닫은 채 남아 있었다. 이 깊숙한 곳에서 마을버스를 타는 승객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푸쉬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열리고 내가 올라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오게 되어 있거든, 결국. 버스 유리창 너머로 할아버지가 뻐끔거렸다. 여전히 시선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 U자 모양의 천변길을 벗어나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지하철역이 나왔다. 단 두 정거장을 지나왔을 뿐인데 그 사이 풍경은 TV 채널을 돌린 것처럼 완벽히 바뀌었다. 고르게 망해버린 천변과 달리 지하철역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럴싸한 카페와 서점, 은행, 최신 휴대폰을 파
- 김소라
- 2026-05-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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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3건
정말로 법은 공정한가하는 문제의식이 드네요. 법도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집행하는지.. 사람인지라.. 라는 생각도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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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보고 감방에 간 석열이가 생각난다면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