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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 작성일 2025-10-01

   누군가


윤단


   복합 상업 시설과 연결된 M역은 도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날씨는 덥고, 광장은 소란스럽다. 이보는 보도를 건너 역 앞 광장에 들어선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캐리어를 가까이 끌어당긴다. 이보 앞에서 걷던 여자아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엄마, 하늘이 너무 가까워.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아끈다. 하늘에는 낮게 깔린 잿빛 구름이 무거운 이불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보는 그러게, 하고 속으로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보다 가까워진 것도 같다. 최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 목이 뻐근하다. 뒤에 있던 누군가가 짜증을 내며, 잠시 멈춰 선 이보의 등을 밀치고 지나간다. 아이와 아이의 엄마도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광장을 가로지르던 즈음 주미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열차를 탔느냐는 물음이다. 이보는 나중에 답장하기로 한다. 예매한 열차는 놓쳐 버렸다. 도로가 군데군데 통제되어 여기까지 걸어 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제 주미는 가족과 함께 열차를 타고 친척이 사는 지역으로 갔다. 그리고 이보는 주미가 있는 곳으로 간다.

   이보에게 친구는 주미뿐이다. 다른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보는 이따금 주미를 찾는다. 전화를 걸고, 만나자고 하고, 딱히 할 일이 없는데도 같이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스무 살에 만나 십오 년을 알고 지냈다. 나이가 들며 달라진 점도 있지만 어쨌든 만나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보와 달리 주미는 다른 친구들이 있다. 무엇보다 가족과 무척 끈끈하다. 그것이 이보는 언제나 신기하고, 부럽다.


   잠시 후, 하늘에서 붉은 방울이 두둥실 날아오듯 떨어진다. 자두 크기의 붉은 방울은 비눗방울 모양으로 둥글고 윤이 난다. 곧 광장에 있는 모두가 어수선하게 흩어진다. 이보도 사람들이 달아나는 방향을 따라 뛴다. 캐리어 바퀴가 덜커덩거리며 어긋난다. 얼마 안 가 이보는 뒤를 돌아본다.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붉은 방울이 한 남자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방울이 터지고, 이보는 남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광경을 본다. 가벼운 폭음이 지나간 뒤 잠시간 고요가 흐른다. 사람들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불안한 얼굴로 하늘을 흘끗거리며. 이보도 아무 말 없이 캐리어를 끌며 M역으로 향한다. 가슴이 울렁이지만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알지 못한다. 두려움도, 불안도, 슬픔도 아닌 기묘한 감정이다. 어쩌면, 그새 조금 익숙해진 걸지도. 붉은 방울은 우연히 떨어지는 우박처럼, 예고 없이, 간혹가다 내려온다.


   인파를 비집고 매표창구에 다가가자 대기 줄이 지그재그로 길게 늘어서 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보의 차례가 온다. 그녀는 목적지를 말하고, 가장 가까운 시간대 열차를 묻는다. 역무원은 지친 어조로 저녁 출발 열차를 알려 준다.

   그게 제일 빠른가요?

   네. 다른 건 입석도 전부 매진이에요.

   이보는 여섯 시간 뒤 출발하는 열차의 입석 표를 구매한다. 전광판에는 여러 행선지의 출발 시간과 번호가 떠 있다. 십 분 남짓 지연된 열차가 있는가 하면 두 시간 넘게 지연된 열차도 있다. 이보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며 어떻게 할지 고민한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M역 대합실은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혼잡하다. 어쩔 수 없이 집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대화와 통화 소리가 들린다. 붉은 방울이 떨어져 중간이 끊긴 철로가 있다. 표 없이 열차에 오르려던 사람이 역무원에게 제지당했다. 누군가 쓰러졌지만 아직도 구급차가 오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이보는 가만히 듣는다. 어떤 이는 신의 노여움으로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개 짖는 소리와 고양이 울음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대합실 TV에선 속보가 나온다. 수많은 실종자 목록과 사라진-혹은 죽은 이들의 신원을 찾고 있다.

   붉은 방울이 처음 떨어진 건 보름 전이었다. 토요일 한낮, 거리를 걷던 소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붉은 방울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방울에 닿자마자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당시 주변의 몇몇 목격자들은 어리둥절한 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건물 CCTV와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이 퍼지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후 붉은 방울은 종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하루에 한 번 떨어지는 날도 있었고, 도시 곳곳에서 수십 개가 떨어진 날도 있었다. 정부는 이를 ‘정체가 불분명한 위험 물질’이라고 발표했을 뿐, 실질적인 대책은 내놓지 못했다. 보상금과 지원금은 거의 무의미했다. 며칠 뒤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도시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나무, 자동차, 건물과 대교. 땅 위의 모든 것이 붉은 방울에 닿으면 반경 1~2미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 그건 매번 운에 달려 있었다. 모두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던 중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거대한 장막 같은 구름이 도시를 덮은 채 줄곧 머물러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붉은 방울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하나둘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새와 날개 달린 벌레들은 대부분 사라졌거나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아무도 이 기이한 현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일주일 전, 주미는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디로?

   이보가 물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야지.

   주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


   대합실 의자에는 빈자리가 없다. 식당과 빵집, 카페도 마찬가지다. 이보는 잠깐쯤 돌아다니다 근처 기둥 벽에 기대앉으며 옷과 생필품이 든 캐리어를 곁에 둔다. 여섯 시간. 이보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열차를 타고 또 두 시간. 그럼 주미를 만난다‧‧‧‧‧‧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 이후를 더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기만 한다.

   때마침 주미에게서 전화가 온다. 이보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 야! 왜 답장을 안 해?

   미안해. 기차를 놓쳐서 정신이 없었어.

   ― 걱정했잖아.

   난 괜찮아.

   이보는 다음 기차 시간을 알려 준다. 주미는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쉰다. 이보가 그곳은 좀 어떠냐고 묻자, 주미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답한다. 주미의 가족은 우선 친척 집 근처에 숙소를 구한 상태다.

   주미는 어머니와 오빠, 여동생과 함께 지낸다. 극작가인 주미가 공연을 올릴 때면 가족들은 다 같이 보러 온다. 그들은 집안일을 분담하고, 빵과 과자 같은 군것질을 좋아하며, 매년 여름마다 국내 여행을 다닌다. 주미는 사소한 일화들을 이보에게 들려주는데, 이보는 그중에서도 주미의 가족이 서로에게 짜증 내거나 화를 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함부로 그런 것을 화목이라고 여긴다. 이보는 가족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보는 생각한다.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르니까. 사실 그녀는 화내는 방법을 잘 모른다. 사람들은 그런 이보가 바보 같고 어리석다고 말하곤 했다. 올 초에는 회사에서 비슷한 말을 들었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으러 식당 앞에 갔을 때, 어떤 남녀가 키와 체구가 자그마한 이보를 밀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팀원들은 단숨에 따졌고,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팀원들은 이보에게 왜 화를 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밀쳐져 휘청거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보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상사에게 모욕적인 농담을 듣거나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때조차 이보는 화내지 않았다. 분노와 환멸이 불쑥 치솟으면 조용히 삭이거나 혼자 몸을 떨 뿐이었다. 화를 내는 건 방법의 문제다. 이왕이면 좋은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이보는 여기고 있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내는 것이 다른 것처럼, 화를 내는 것도 비슷하다. 어쩌면 모든 일에는 저마다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언젠가 주미는 그 말에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미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이번에 도시를 떠나면서도 함께 가겠느냐고 물어 왔다. 이보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그러다 결국 뒤늦게 출발하게 됐다. 전날 짐을 꾸리며 이보는 곱씹었다. 어차피 따라갈 거면서 왜 생각해 본다고 했을까. 

   ― 밥은 먹었어?

   이보는 아직이라고 대답한다. 걱정하는 주미를 안심시키듯 이보는 말한다. M역과 연결된 쇼핑센터를 둘러보다가 식사도 하고 열차를 탈 것이라고.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말을 뱉고 나니 그 계획이 마음에 든다.

   ― 조심해.

   주미는 신신당부한다. M역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붉은 방울이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통화를 마친 이보는 한동안 숨을 돌린 뒤 물품 보관함 쪽으로 향한다. 모든 함이 차 있다. 하는 수 없이 캐리어를 끌며 쇼핑센터와 연결된 길목으로 걸어간다. 수많은 사람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중이다.


*


   아까부터 이보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 바깥의 위험과 쇼핑센터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때문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사라졌고, 또 수많은 사람이 도시를 떠났지만, 역무원이나 쇼핑센터 직원들처럼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쇼핑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시를 떠나려는 이들일 것이다. 열차든 비행기든, 어딘가로 떠나려면 어느 장소에서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녀는 몇 층의 매장을 둘러본다. 절반쯤은 텅 비어 있고, 열려 있는 매장에는 살 만한 것이 없다. 사람들이 덜 북적이는 방향으로 걷다가 다른 구역으로 이어지는 야외 정원에 접어든다. 정원에서는 부모와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웃음소리가 떠돌고 활기가 감돈다. 이보는 그 속에서 어색하게 걷는다. 빨갛고 노란 튤립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튤립들, 튤립들, 튤립들.

   정원을 통과해 이보는 다른 출입구에 들어선다. 사람들이 매장 안을 들여다보거나 복도를 오간다. 낯선 냄새와 사람들, 밝은 조명. 차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위험해. 캐리어를 잃어버리지 않게 손아귀에 힘을 준다. 어느 틈엔가 그녀는 방향을 잃고 사람들 속에 섞인다. 복도를 걷고,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고, 내리고, 또다시 걷자 불쑥 승강장이 나타난다. 이보는 잠시 망설인다. 사람들이 열차에 차례로 오른다. 열차는 가득 차 있다.

   다시 한참을 헤매던 이보는 문득 지하도 같은 공간에 혼자 있음을 깨닫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다. 어둠 속 주홍빛 조명들만 자동차 전조등처럼 희미하게 깜빡인다. 그녀는 당혹스럽다. 휴대전화를 켜 위치를 확인하지만, M역 건물 내부로 표시되어 자신이 있는 곳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그녀는 새로운 길이 나타날 때까지 막연히 걸음을 옮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객 차림의 남자 셋을 마주친다. 그들이 먼저 친절한 어조로 말을 건다.

   어디로 가세요?

   이보는 길을 잃었다고 대답한다.

   그래 보였어요.

   남자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한다.

   이보는 뜸을 들이다가 대합실 위치를 묻는다. 그들이 방향을 자세히 알려 주는데 말이 겹치고 경로가 복잡해서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근처까지 같이 가죠.

   또 다른 남자가 제안한다. 이보는 그들과 동행하기로 한다. 그녀는 그들이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들과 이보는 걷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고, 다시 걷는다. 이보는 M역이 원래 이렇게 크고 넓었던가 의아하다. 여행이나 쇼핑을 위해 몇 번 온 적이 있지만 매번 전부를 둘러보지는 못했다. 친구 사이라는 세 남자는 M역에 자주 왔고, 어딘가로 떠나는 일이 익숙하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거처를 옮기는 상황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닌 것 같다고 덧붙인다. 집은 계속 바뀌는 거니까요. 안경 쓴 남자가 말한다. 이윽고 그들은 도시의 구름과 붉은 방울이 언제든 다른 곳으로 넘어가거나 부피를 키울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갑자기 없어질 수도 있을까요?

   이보는 묻는다.

   그럴지도 모르고요.

   끔찍한 일이에요.

   이보는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았잖아요.

   이런 일들?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

   아아.

   이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별로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지 않은 게 이상하진 않나요?

   그냥‧‧‧‧‧‧ 끔찍할 뿐이죠.

   세 남자 중 안경 쓴 남자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키 큰 남자는 중간중간 말을 보탠다. 그들은 이보와 비슷한 또래거나 좀 더 나이가 많으리라는 짐작이 든다. 오랫동안 무언가를 견뎌 오며 굳어진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내심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그들은 상냥하다.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드문 이보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걷는다. 지금껏 다녀온 여행지,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것들, 오래 머문 사찰의 풍경, 무료할 때마다 푸는 스도쿠.

   스도쿠요?

   이보의 물음에 키 큰 남자는 숫자 퍼즐 게임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숫자가 겹치지 않도록 빈칸을 채워야 해요. 여러 방향에서 살피면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보이거든요.

   이보는 그를 향해 작게 미소 짓는다. 키 큰 남자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눈빛이나 태도에서 알 수 있지만, 그보다는 본능적인 감각이다. 이런 감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이보는 어린 시절 친구의 하얀 개를 떠올린다. 대체로 개들은 그녀에게 적대적이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개와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다. 개와 낯을 가렸다. 친구는 개와 낯을 가릴 수 있냐며 깔깔 웃었다. 친구의 집에 놀러 갈 때, 어느 날부터 친구의 하얀 개는 이보를 향해 사납게 짖었다. 이보가 그것에 못 이겨 친구의 집을 나갈 때까지. 거리에서 마주친 몇몇 개들도 그녀에게 돌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곤 했다. 이보는 아구, 예쁘다, 아이구, 사랑스럽다, 하고 중얼거리지만 개는 잔뜩 화난 얼굴로 왈왈 짖었다. 그러면 안 돼. 개의 주인이 개를 타이른다. 이보는 개의 주인에게 난처한 웃음을 보이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다. 반면 거리의 고양이들은 이보에게 다가와 머리를 부비고 배를 드러내며 눕는다. 고양이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 개가 적대하는 이유를 알 수 없듯이 고양이가 호의적인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이보는 이해할 수 없는 호의가 좋다. 작은 기쁨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건물 안 식당들을 지나면서 그들은 이보에게 식사를 했는지 묻고, 일식집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고―종업원들이 붉은 방울 소식을 떠들었지만 이보와 그들은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가게를 나와서는 키 큰 남자가 배낭 앞주머니를 열어 산딸기가 담긴 비닐봉지를 꺼낸다. 간식용으로 챙겨 온 것이라고 한다. 세 남자는 산딸기를 나눠 먹으며 걷고 이보도 붉은 산딸기 몇 알을 집어 먹는다. 새콤하고 진한 단맛이 입안에서 번진다.

   걸을수록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이보는 머지않아 그들을 떠나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떠나지 않았으면, 혹은 그들이 가는 곳으로 자신을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한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저녁 열차를 타야 한다. 주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주미에게서 연락은 더 오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서도. 내가 연락하지 않는다면, 이보는 불현듯 생각한다, 내가 사라졌다고 생각할까?

   그들과 이보는 3층 어느 갈림길에 선다. 이제 오른쪽 복도를 쭉 가서 통로를 지나면 바로 대합실이 나온다고 가리킨다. 열차 시간이 남은 그들은 다른 적당한 곳을 찾아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그녀는 세 남자를 바라본다. 그들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이보를 볼 뿐이다.

   만약 그들에게 저도 같이 갈까요, 라고 용기 내어 묻는다면 그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것임을 이보는 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하고 인사를 건넨다. 세 남자도 예의를 차리며 꾸벅 목례를 한다. 이보는 캐리어를 끌며 등을 돌린다. 입안에 산딸기 맛이 텁텁하게 남아 있다. 걸음을 이어 가다 문득 궁금해진다. 모두가 이렇게 떠나면서, 만나고 헤어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자신처럼 왠지 모를 서글픈 기분이 드는 것인지 그 기분을 어떻게 떨쳐 내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서글픔도 없이 만났다가 헤어질 수 있는 것인지. 이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녀도 그런 일을 반복해 온 사람답게 그들을 완전히 떠난다.


*


   가족을 만나는 거죠?

   그들과 헤어지기 전, 키 큰 남자가 물었다.

   아뇨. 친구요.

   이보가 대답했다.

   가족은요?

   이보가 머뭇거리자 체격이 큰 남자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라졌군요. 제 가족도 그래요.

   저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안경 쓴 남자가 덧붙였다. 연락 없이 산 지 꽤 오래됐거든요.

   그쪽은요?

   이보는 키 큰 남자에게 물었다.

   제 가족은 다른 도시에 있어요.

   그렇군요.

   그들과 이보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


   이보에게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애는 3년 전 사고로 죽었다. 새벽에 술에 취해 운전하다 담벼락을 들이박았다. 이보는 그 애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혼자서 죽었다는 사실이 슬프고 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슬프고 다행인 것을 잘못 전달하게 되면 오해를 사기 때문이다. 그 애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더더욱 위험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이보는 생각한다. 그녀는 그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도 그렇다.

   곰처럼 체구가 컸던 그 애는 중학생 때 괴롭힘을 당했다. 보잘것없는 용돈과 체육복, 운동화를 뺏겼고 몸에 멍이 든 채로 집에 들어온 날이 많았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 애는 남을 괴롭히는 쪽이 되어 있었다. 이보는 그 애가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살아남기로 했는지 알지 못한다.

   어느 날 그 애는 같은 반 아이의 배를 주먹으로 때리는 영상을 보여 줬다. 오락실 펀치 기계를 치듯 강한 스윙이었다. 배를 맞은 아이는 책상과 의자를 넘어뜨리며 쓰러졌다. 이보가 놀라서 그러지 말라고 하자 그 애는 장난이라고 말했다. 애들도 재밌어서 맞는 거라며, 자기도 똑같이 맞았지만 영상을 찍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 애는 갈수록 더 끔찍한 말을 내뱉었다. 친구 머리를 면도기로 밀었어, 이번엔 목을 졸랐어, 화가 나서 선생 뺨을 때렸어, 나도 맞았지, 근데 내가 더 세게 쳤으니까 괜찮아. 이보가 잔뜩 심각해지면 그 애는 농담이야, 농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믿어? 그 애가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보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웠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본가를 떠나 도시로 온 뒤에야 부모에게서 동생의 합의금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보는 대학을 중간에 휴학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았다. 돈 때문은 아니었다. 더는 학교에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퇴서를 냈을 때 주미는 이보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너는 화도 안 나? 그럼 네 삶은?

   어쨌든 그것은 오래전 일이다.


   이보의 부모는 섬유 공장을 운영했다. 이보가 열두 살, 동생이 열 살이 되던 무렵 공장이 부도가 났다. 친하게 지낸 거래처 사장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사람들이 집에 드나들고 아파트는 경매로 넘어가 이사를 해야 했다.

   처음엔 모든 게 믿기지 않아 얼떨떨했던 부모는 곧 분노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고성이 오가고, 집주인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집 안에서는 작은 일에도 울음이 터졌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부모는 난데없이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려 세상이 자신들에게 악의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루는 이보와 동생이 거실에서 여름방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개학을 앞두고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적어야 했다. 이보는 줄 공책을, 동생은 그림일기를 썼다. 먼저 매일의 날짜와 요일, 날씨를 채웠다. 날씨는 주로 해를 그렸지만 가끔 구름이나 우산 위로 내리는 빗방울을 그려 넣었다. 이보는 동생과 놀이터에서 놀고, 요리를 돕고, 수박을 먹고, 엄마 아빠와 놀이공원과 바다에 놀러 갔다. 이보가 가장 많이 쓴 글자는 ‘오늘은’과 ‘재미있었다’였다. 거짓말로 지어내는데도 지우개로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썼다. 동생이 쓴 글자를 지우기도 했다. 동생은 몹시 공들여 그림을 그렸다. 노란색 시소. 하늘색 선풍기. 보라색 식탁. 빨간색 의자. 연두색 창문. 파란색 소용돌이 바람. 사람들은 웃거나 울고 있었고, 색연필로 칠한 회색 눈물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베란다 식물에 물을 주던 어머니는 별안간 화분들을 하나둘씩 바닥에 내던졌다. 그 식물들은 전에 살던 집에서 어머니가 갖고 나온 것이었다. 비좁은 베란다는 흘러내린 물과 젖은 잎사귀, 흙덩이, 물뿌리개, 부서진 조각들로 난장판이 되었다. 습하고 진한 흙냄새가 진동했다. 한참 뒤 어머니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이보와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 흉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잠만 잤다. 잠에서 깬 뒤에는 개운한 얼굴로 일어나 먹고 싸는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이보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안방에 누워 잠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자주 일을 바꿨고 늦은 밤에야 귀가했다. 이보는 부모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안아 달라고 말했다. 잠에서 깬 어머니가 사랑한다고 답하며 입을 맞췄다.

   이보는 화가 났다.

   그러나 입술을 가만히 맞추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화를 내며 살아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 애는 스물다섯 살 여름에 집을 나가 자취를 감췄다. 그래도 간간이 소식이 들려오긴 했다. 누군가 그 애의 이름을 대며 전화를 걸어오거나 그 애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느 주말, 이보가 본가에 있을 때 낯선 사람들이 문을 두들겼다. 이보는 그 애가 이제 더 지독하고 질 나쁜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저희도 몰라요. 할 말 없습니다. 아버지는 힘없이 문을 닫았다.

   생각해 보니 일주일 후 동생의 기일이다.

   5년 만에 죽어서 돌아온 그 애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이보는 늘 그래 왔듯 부모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부모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했다. 그녀와 어머니는 뽀뽀를 했다. 어머니의 입술은 축축하고 보드라웠다. 이제는 누구도 화를 내지 않았다. 서로의 앞에서는 그랬다. 그들은 조각난 채 간신히 붙어 있었다. 이보의 생존은 사랑의 말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말. 어떤 시절이,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때 탄 지우개 가루들로 뭉친 덩어리처럼 그녀 안쪽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 애가 죽은 후 괴로워하는 부모를 생각하면 이보는 무척 슬프고 또 안도감을 느낀다.


*


   이보는 천장의 안내판을 올려다본다. 앞에는 대합실과 이어지는 통로가, 왼편에는 화장실이 있다. 그녀는 소변이 마려워 걸음을 옮긴다. 화장실 앞 복도에는 짐을 곁에 둔 사람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세면대 맞은편 벽에 캐리어를 두고 빈칸에 들어가 앉자, 왼쪽 옆 칸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보는 그대로 앉아 있다가 물만 내리고 나온다. 누군가 흐느끼고 있는데 그 옆에서 소변을 누는 건 왠지 안 될 것 같아서다. 그 칸과 떨어진 다른 칸이 빌 때까지 기다린 후 그곳에 들어가 볼일을 마치고 손을 씻는다. 울음이 들린 칸은 고요히 잠겨 있다.

   복도로 나서면서 이보는 울음소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 붉은 방울 때문에 소중한 뭔가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녀로서는 별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주미는 아마 달랐으리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래, 주미.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이보는 옆 칸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럼 주미는 정말이냐고 되묻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음, 어디 아프거나 문제 생긴 건 아니겠지?

   글쎄, 모르겠어.

   너 신경 쓰이지.

   조금.

   그럼 기다려 보자. 계속 안 나오면 혹시 괜찮으시냐고 물어보게.

   이보와 주미는 화장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거나 울음소리가 이어지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을 것이고, 만약 도울 일이 있다면 도왔을 것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이 열리면 이보와 주미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를 떴을 것이다. 주미는 매사 적극적으로 나서고 남을 걱정하고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간혹 선의로 한 행동이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주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보는 주미가 신기하다.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어도 자신은 결코 하지 못할 일을 하니까.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자신 역시 주미가 그런 방식으로 같이 있어 주는 존재일 수 있다는 것. 학교에 가지 않았을 때 이보를 찾아 연락한 유일한 친구가 주미였다. 삼십 대가 된 지금까지도 주미는 그런 마음으로 곁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아주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신이 주미와 같은 방식으로 동생을 대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순간 충동적으로 발길을 돌려 다시 화장실로 향한다.

   이보는 처음 들어갔던 칸이 비기를 기다렸다가, 캐리어를 끌고 들어간다. 옆 칸은 여전히 잠겨 있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귀를 기울인다. 울던 사람이 아직 있다면, 도움이 필요할 수 있었다. 이보는 옆 칸을 짐작한다. 도움이 필요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지 모르는 사람일 수 있다고. 아니면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그런데 칸 안에 서서 잠자코 귀 기울이고 있자니, 꼭 옆 칸이 울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무렵, 옆 칸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후 옆 칸 문이 열린다. 이보도 문을 열자 칠십 대쯤 된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의 눈두덩이 부어 있고 낯빛은 창백하다.

   저, 괜찮으세요?

   이보가 다가간다.

   노인은 이보를 흘끗 보기만 할 뿐, 말없이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고친다. 그런 다음 더딘 걸음걸이로 이보를 지나쳐 화장실을 빠져나간다. 이보는 우두커니 서 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 수 없다. 캐리어 손잡이를 움켜쥐지만 손바닥이 땀에 젖어 미끄럽다. 뒤이어 그녀는 깨닫는다. 괜찮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해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


   복도를 지나 이보는 대합실과 연결되는 통로에 다다른다. 아치형 지붕으로 덮인 연결 다리다. 바닥에는 초록색 인조 잔디가 깔려 있고, 몇몇 사람들이 저편으로 건너가는 모습이 보인다. 통로 입구에는 머리를 망사로 단정히 묶은 여자 직원이 서 있다. 이보가 통로로 들어가려 하자 직원이 가로막는다.

   꽃을 구매하셔야 들어가실 수 있어요.

   그제야 이보는 사람들이 모두 꽃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직원 옆에 진열대와 종이 박스,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보는 망설이다가 꽃을 사겠다고 답한다. 주미에게 선물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원은 진열대 뒤쪽으로 가 나무로 엮은 주전자 모양의 꽃바구니를 보여 준다.

   이런 건 어떠세요?

   꽃바구니는 너무나 못생겼다. 엉성하게 짜여 틈새마다 잔가시가 삐죽 솟아 있다. 선물하기엔 곤란한 모양새다. 꽃을 빼고 나서도 바구니는 쓸 만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건 없나요?

   이보가 묻는다.

   다 팔렸어요. 사람들이 워낙 많이 와서.

   곧이어 직원은 박스에서 장미 세 송이를 묶은 꽃다발을 꺼낸다. 포장과 줄기가 발에 밟힌 듯 짓눌려 있고, 붉은 꽃잎의 가장자리는 시든 상태다.

   이거라도 구매하시겠어요? 못 써서 버리려고 한 건데.

   안 살 수는 없나요?

   이보는 돈은 내겠다고 덧붙인다.

   그건 안 돼요. 직원이 답한다. 업장 규칙이에요.

   이보는 열차 사정을 털어놓는다. 직원은 고개를 짧게 끄덕인다.

   그래도 꽃은 사셔야 해요.

   이보는 울컥하는 마음이 솟는다. 지금 같은 상황에 규칙 같은 게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통로를 넘어가려는 것인데. 그녀의 기색을 읽은 직원이 입을 연다. 저는 그저 정해진 대로 일하는 거예요. 이보는 직원에게 묻는다.

   여기를 안 떠나세요?

   그렇죠.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아니, 이 도시요.

   전 집을 떠날 수가 없어요.

   침묵이 머무르고, 짧은 찰나 직원은 가만한 슬픔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이보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시들고 꺾인 꽃다발이라도 사야 할지 고민하지만, 주미에게 선물할 수는 없다. 주미에게는 이보다 좋은 꽃을, 차라리 싱싱한 꽃 한 송이를, 이를테면 노란 튤립이나 수선화, 분홍색 거베라 같은 것을 주고 싶다. 주미는 꽃을 좋아하니까. 이보는 주미의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꽃집에 들렀다. 주미는 보통 사람들보다 꽃을 많이 받았고, 그렇기에 더욱 꽃다발에 신경 쓰게 되었다. 막상 이보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디든 꽃집은 있었다. 매일 곳곳에 진열된 꽃다발들을 보며 꽃을 선물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이보는 놀랐다.

   그 놀라움은 주미의 희곡 대사가 되었다. 주미는 때때로 이보의 말을 작품에 쓴다. 작품 속 인물은 이보와 닮은 점이 있지만, 물론 이보가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녀보다 좀 더 나은 모습을 갖고 있다. 조금 더 용감하고, 조금 더 다정하고, 조금 더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고, 조금 더 아파하며, 조금 더 명랑하다. 거기에는 주미의 모습도 섞여 있다. 주미는 언제나 더 나은 이야기를 원했고 자기 작품에 관해서만큼은 자주 위축되었다. 이번에도 별것 아닌 이야기 같아. 그 말에 이보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보가 보기에 주미의 인물들에게는 늘 반짝이는 의지가, 그러니까 별것의 의지가 있었다. 이보는 주미의 희곡을 읽고 인물을 흉내 내기도 했다.

   여기 참 좋다. 마음에 들어.

   좋은 방법이 있어요?

   난 약속하고 싶지 않아. 지킬 수 없을 때가 더 많잖아.

   아니야, 생각이 바뀌었어. 그래도 약속할게.

   마치 어떤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대사를 뱉으며 어색한 몸짓을 할 때면 주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는 그런 게 좋다. 글을 쓰는 시기의 주미는 희망과 절망을 반복한다. 그런 건 나쁘지 않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사는 것보다는. 그런데 최근엔 주미가 크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보의 고민이 길어지자 직원은 테이블 위에서 두꺼운 양장본을 펼친다. 꽃말 사전이다. 직원은 꽃말을 외우듯 나직하게 읊는다.

   축복, 사랑, 기쁜 소식, 그리움, 이별의 슬픔, 환희, 즐거운 추억, 밤의 열림,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관용‧‧‧‧‧‧

   이보는 직원이 꽃을 건네는 이유를 말해 주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도 굳이 묻는다.

   사람들은 왜 꽃을 살까요?

   직원이 이보를 슬쩍 보며 대꾸한다.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하지만 금방 죽잖아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는걸요.

   다소 의아한 말이었지만 어쨌거나 대답은 들은 셈이다. 이보는 더더욱 시들고 꺾인 꽃다발을 주미에게 선물할 수가 없다. 이런 꽃을 받으면 주미는 기분이 안 좋을 것이고, 이보는 주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꽃다발을 산 뒤 통로를 지나 어딘가에 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도 내키지 않는다. 꽃다발을 어디에 버릴지 고민하며 걷고 싶지 않고, 버리지도 누군가에게 주지도 못할 것을 내내 짐처럼 들고 다니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보는 통로를 건너다본다. 그 순간, 아치형 지붕이 부드러운 천으로 변한다. 인조 잔디는 초록색 압정으로 바뀐다. 잔디 속에 숨어 있던 곤충은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를 내고, 사람들이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한 아이가 쥔 꽃의 줄기는 가느다란 줄로 길게 자라고, 꽃은 빨간 풍선이 된다. 줄기가 아이를 굽어보는 것처럼 휘어지고, 빨간 풍선은 위태롭고도 탐스럽게 흔들린다. 부드러운 천이 너울거리다 수백 가닥의 실로 허물어지듯 갈라지고 있다. 이보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고개를 돌린다. 테이블 위의 시들고 꺾인 꽃다발을 바라본다. 그녀의 손끝이 빛바랜 장미에 닿자마자 붉은 꽃잎들이 와르르 떨어져 흩어진다.


*


   눈을 뜬 이보는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아 한동안 멍하다. 손끝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무릎이 욱신거리고 뒤꿈치는 상처가 났는지 따갑다. 그녀는 몇 사람이 모여 쉬고 있는 건물 안 벤치에 앉아 있다.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본다. 노인이 떠난 뒤 화장실에서 나와 대합실 통로에 다다랐을 즈음 뭔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천둥 같은 둔탁한 울림이 잇따랐다. 갑자기 통로에서 건물 안으로 다급히 달려오는 사람들과 부딪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위험해요! 누군가 소리쳤고, 서둘러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뛰지 마세요! 절박한 외침이 반복됐다. 혼비백산이었다. 붉은 방울이 통로 천장에 떨어져 구멍이 뚫렸고, 그 자리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메케한 연기가 지독했다. 가까스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반대편으로 걸었고, 도시 전역에 붉은 방울이 연이어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극심한 피로를 느꼈고, 그러다 벤치를 발견해 앉았었나. 기억이 어렴풋하다.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이 중간에 빠져나간 것처럼 훌쩍 지나 있었다.

   이보는 주위를 살핀다. 상점은 전부 셔터를 내린 채 닫혀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언가 사뿐히 떨어진다. 붉은 꽃잎 한 장이다. 이보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꽃잎을 줍는다. 연약한 피부나 깃털처럼 매우 부드럽고 얇아서 조심스럽게 집어야 했다.

   차라리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지쳐 보이는 중년 남자가 쇼핑센터라고 답한다. 5층, 아니 4층인가. 남자는 말꼬리를 흐린다. M역 맞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가다 이보는 캐리어를 잃어버렸음을 알아차린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캐리어를 끌지 않으니 걸음이 훨씬 가볍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길수록 뭔가를 더 내려놓고 싶어진다.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다시금 그녀는 생각한다. 너무 지난하고, 너무 위험하고, 너무 질기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장미 꽃잎들이 와르르 흩어지고 나서, 그러니까 어쩌면 꿈속에서, 그녀는 흩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예상과 달리 깨끗하고 평온하며 분명한 느낌이었다.

   사라지는 것. 사실 그게 정말 바라왔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그 애는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한 번도 갖지 않던 질문을 이보는 떠올린다.

   새벽에 술을 마시고 어디를 가려다 담벼락을 들이받고 말았을까. 집을 떠난 후 그 애의 삶에 대해 이보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저지른 잘못들만 고작 전해 들었을 따름이다. 1층까지 내려오는 사이 공간이 점차 낯익어지고 그녀는 전에 이곳에 온 일을 기억해 낸다. 그때도 길을 헤매며 동생과 안내판을 따라 걸었다. 그 애가 사라지기 며칠 전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연락이 왔고, 누나를 보러 도시에 오겠다고 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애는 혼자 M역에 도착했다. 쇼핑센터에서 이보와 그 애는 돈가스를 먹었다. 그녀가 무슨 일인지 물었을 때 그 애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동생이 한번 보러 올 수도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 애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형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주로 돈 얘기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있는지, 바보 취급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는 그 애의 이야기가 못마땅했다. 점점 선을 넘는 것 같아서 그만 좀 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 애는 농담도 못 하냐며 실없이 웃었다. 너 때문에 괴로워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미안하지도 않아? 이보가 작게 발끈하며 물었다. 그 애는 웃음기를 빼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겠어.

   그 말뿐이었다.

   밥을 먹은 뒤 두 사람은 쇼핑센터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 애가 신발을 사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러 매장을 돌며 그 애는 새 신발을 몇 번이고 신어 봤다. 선뜻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애는 검은색 운동화를 골랐다. 이보가 보기엔 여태 보러 다닌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신발이었다. 그 애는 신발을 사 줘서 고맙다고 하는 대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누나, 이런 식으로 착한 척하면서 살아.

   넌 제발 착한 척 좀 하면서 살아.

   겉으로는 가벼운 대화처럼 지나갔으나 이보는 그 애가 진심으로 한 말임을 알았다. 그 애는 어릴 적 친구의 하얀 개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이보는 개들이 짖을 때마다, 남들은 모르는 자신의 흉한 기운을 알아채는 것처럼 느껴졌고 내심 미묘한 반감이 일었다. 그리고 수치심. 예전에 그 애는 말했다. 착한 척하지 마. 누나는 누나밖에 모르잖아.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 애는 그날, 무언가를 원했을 것이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그러니까, 그 애는 어떤 마음으로 어디를 가고 있었을까? 이보는 질문을 거듭하고 또 거듭하다, 화장실 밖을 나서던 노인의 표정을 떠올리곤 아득히 이런 것을 가늠해본다. 어쩌면 어딘가로 향하던 노인을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도시에 온 그 애에게 정말 왜 왔는지 끈질기게 물어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애가 농담이라 말하는 이유를 골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런 게 가능할까?

   이건아.

   그녀는 열차를 타러 가는 동생을 불렀다. 그 애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히 가.

   그 애는 손을 흔들었다.

   응, 누나도.


*


   밖으로 나오니 잿빛 구름은 여전히 무겁게 드리워져 있고 거리와 광장에는 사람들이 오간다. 피곤한 표정으로, 서두르는 듯하면서. 이보는 느리게 걷는다. 건물 안에서 너무 오랜 나날을 보낸 기분이었다.

   건물 외벽과 기둥에는 날짜와 이름, 짧은 메시지들이 적혀 있다. 그녀는 어느 글자 앞에 멈춰 선다.

   저기요.

   누군가 이보의 어깨를 툭 건드린다. 여자는 이보가 떨어뜨렸다며 지갑을 건넨다. 이보는 지갑을 열어 본다. 신분증. 체크카드 두 장. 신용카드 한 장. 빨간 꽃잎 한 장.

   이보는 갈 길을 정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긴다. 다리는 무겁고 뒤꿈치는 쓰라리다. 저 멀리 먼지만 한 붉은 방울이 흩날리듯 떨어지고 있다. 그녀는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싶고, 걸으면서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낸다. 추운 겨울날 어머니와 동생과 셋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어린 이보는 어머니의 긴 코트 자락을 헤치고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동생도 코트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머니는 코트 자락을 가운데로 모아 단단히 여미며 물었다. 이대로 건널까? 코트 안은 장롱 속처럼 어두웠고, 이보는 바깥의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 세 사람은 사뿐사뿐 보폭을 맞추며 조심히 걸었다. 조마조마하고 행복한 기분,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지던 횡단보도. 이보는 또 다른 기억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아마 더 있을 텐데도, 그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광장 근처 보도에서 어떤 이가 고개를 숙이고 빈 땅을 응시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하늘을 힐끔거리며 걷는다.


   이윽고 그녀 위로 붉은 방울이 내려온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본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붉은 방울은 생각보다 맑고 투명하다. 이보는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린다. 이보는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있는 힘껏 달아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바닥엔 누군가의 짐들이 나뒹굴거나 놓여 있다. 먼 거리에서 이보가 있는 곳을 주시하는 몇 무리의 사람들도 보인다. 그중 한 여자가 그녀 쪽을 향해 무어라 소리치고 있다. 언뜻 보기에 무척이나 화가 난 것처럼. 이보는 단 몇 초 만에 그 풍경을 감각한다.

   한순간 두려움이 덮친다. 주춤거리던 그녀는, 이내 달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달아나고 있는 방향으로. 붉은 방울과 최대한 멀어지는 방향으로. 죽을힘을 다해 뛰는 동안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지고 불시에, 광장 가운데서 사라진 남자의 얼굴, 겁에 질린 얼굴이 떠오른다. 곧바로 폭음이 울린다.

   이보는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본다.

   광장 스피커에서 안내 음성이 반복적으로 울려 퍼진다.


   안전을 위해 침착하게 대기해 주십시오.

   안전을 위해 협조해 주십시오.


   잠시 후 그녀 안의 응어리가 북받치며 갑작스레 울음이 터져 나온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그녀를 휘감는다. 모든 비겁함과 초라함 때문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리듯 욕을 내뱉지만, 꺽꺽거리는 딸꾹질이 섞여 나온다. 이보는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른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린다. 그 찰나에 누군가, 그녀의 조그만 어깨를 감싸고 느리게 토닥인다.

   그리고 이보는 어떤 놀라움도 없이 한참 동안 안겨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는 땀 냄새와 지저분한 냄새가 난다. 끈적한 열기가 고인다. 근처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보는 누군가의 느린 손길과 옅은 숨결을 느낀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울려대고 있다. 누군가 계속해서 어깨를 다독이고 이보는 조금씩,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러면서 이보는 건물 외벽에서 본 작은 글자를 떠올린다―살아 있어. 사랑해. 

   그녀가 수도 없이 말했던 사랑해와는 다른.

   짙은 슬픔이 내려앉고, 몇 번의 밤을 지난 뒤 이보는 누군가의 곁에서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낼 수도 있어.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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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미라의 바다

미라의 바다 유영은 0 참 까맣고 짧다. 정숙은 갓 태어난 미라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 말을 생각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너 꼭···, 하면서 말을 고르던 정숙은 드디어 딱 맞는 말을 찾아냈다. 너 꼭 미라 같구나! 시간이 갈수록 검고 바삭바삭해지는, 살점이 까맣고 얇은 조각이 되어 손을 대면 후두두 떨어져 나가는 미라. 그렇게 미라는 미라가 됐다. 미라라니, 잔인한 이름이라고 언젠가 지희는 말했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였다. 미라가 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정숙은 그때 미라를 보고 그러니까 너 꼭···, 시체 같구나! 외칠 뻔했으므로. 시체보다는 미라가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시체는 완전히 끝난 거지만, 미라는 이어진다. 미라는 평생 검었으나 열여섯 살부터 더 이상 짧지는 않았다. 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열네 살까지 백사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던 미라는 열다섯 살, 열여섯 살, 두 해 동안 삼십 센티가 넘게 컸다. 하룻밤 새 일 센티가 자랄 때도 있었다. 그 시기 미라는 아침마다 갈색 개털 무덤을 빠져나와 똑바로 서서 양팔과 다리를 쭈욱 뻗고 그 끝의 손과 발을 쳐다봤다. 손과 발은 미라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팔과 다리는 길고 가늘어졌다. 부슬부슬한 갈색 털이 꼭 같은 개 세 마리가 아침마다 가늘어지는 미라의 발목을 핥았다. 미라는 키가 자라고 난 후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자란 팔다리의 피부가 얇아지다 못해 모두 벗겨져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내리꽂듯 떨어지는 소나기, 동네 뒷골목의 쓰레기 냄새, 더위, 추위, 바람, 햇살, 살에 닿는 모든 것이 따가워서 마당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엄마. 정숙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라가 집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어미 새가 되는 것은 정숙의 오랜 꿈이었다. 정숙은 월, 수, 금요일에는 17층짜리 오피스 건물에서, 화, 목, 토요일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청소일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갔다가 두 시쯤 대낮의 길을 걸어 미라가 개들과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며, 정숙은 자신이 둥지로 돌아가는 어미 새라고 생각했다. 아기 새들이 바글바글 들어 찬 둥지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목젖이 보이게 입을 벌리고 삐악삐악 울며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라를 위해 정숙은 퇴근할 때마다 집 앞 빵집에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사 갔다. 비슷하게 생긴 조각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조각을 고르는 시간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미라는 크림만 떠서 먹었다. 딸기와 빵은 흙 마당에 던져두면 가장 날쌘 개들이 달려와 먹어 치웠다. 잠깐, 그 애들 이름이 뭐였지? 몽글이, 구름이, 별이···. 미라는 매일 부대끼는 개들의 이름을 헷갈렸다. 미라의 개들이 아니라 모두 정숙의 개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숙의 개들은 처음에는 아홉 마리였다가 곧 서른세 마리, 스물여덟 마리, 마흔두 마리, 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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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굴은 구르지 않는 돌

굴은 구르지 않는 돌 함윤이 함윤이의 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위한 사운드트랙 ⓒ 이해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영어 속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 두보의 시 「팔전도」 중 그 동굴에 관한 말 중 열에 여덟은 거짓이다. 내가 사실을 알려 주겠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을 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걸 얘기하려 한다. 동굴은 2019년 7월 말, 뼈까지 침식되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장차 미술관이 될 부지를 측량하던 일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미술관을 ㅂ기업의 새로운 문화적 간판으로 삼고자 한 용 회장은 동굴의 소식을 듣고 긴긴 고민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을 나는 어쨌거나 지지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들인 광막한 땅에 난 균열의 시작점처럼 보이던 공동(空洞)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곧 동굴을 개조한 미술관 ‘별관’을 만든다는 소식이 ㅂ기업 산하 문화재단에 퍼졌다. 당시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느낀 암담함이야 추측할 수 있을 뿐, 여기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별관 설립을 곁들인 공사가 시작된 2020년에는 모두가 알 전염병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열을 앓았고, 연달아 기침했으며, 멍한 얼굴로 집안에 갇혀 있었다. 한번 몸에 깃든 병증은 다른 몸들로 옮겨 다녔다. 죄지은 마음이 곳곳에 퍼졌다. 용 회장은 늘그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시기를 주름잡을 지렛대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여러 겹의 우연에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의 교차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려 지금이야말로 별관의 공사를 진척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차피 동굴을 다듬는 작업자들은 모두 두터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산업용 방진 마스크가 코비드 바이러스를 막기에 적절치 않다는 연구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여름의 굴속에서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해도 용 회장은 그저 밀어붙였다. 시대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어도 공사장 인부들은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인부들은 매일 땀 흘리고 번갈아 기침하며 동굴을 파고 들어갔다. 굴은 외부의 빛과 습기 속으로 서서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4년 후에야 이 흐름에 끼어들었다. 전염병이 지나가고, 지나갔다, 는 표현과 상관없이 외상과 내상을 받은 이들이 남고, 무수한 마스크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우리가 모를 곳에 묻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의 예술지원사업에 모두 떨어졌다. 국가나 서울시, 민간이 운영하는 지원사업의 선정자 목록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각종 웹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뒤늦게라도 창작자를 모집하거나 후원한다는 재단 또는 기관의 공고를, 아니면 카메라를 다룰 줄만 알아도 곧장 일자리를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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