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프리카로 갈게
- 작성일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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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프리카로 갈게
박정현
1
거울은 화장실에 있다. 거울은 단 한 개뿐이다. 여진은 화장실로 가 거울 속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기다랗고 보기 흉한 상흔이 있다. 미간 좌측에서 시작된 상흔이 콧등을 거쳐 움푹 파인 오른쪽 볼로 강처럼 흐른다. 상흔의 끝부분은 둘로 갈라져 오른쪽 얼굴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하다가 자연스럽게 피부로 녹아든다. 그는 중지로 상흔을 흐르는 방향 따라 매만졌다. 이미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어쩌면 수십만 번 무의식중에 했던 행동일지도 모른다. 상흔은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피부 위로 볼록하게 올라와 있으며, 두께는 일 센티미터 정도에 별다른 감각도 없다.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상흔 주위의 멀쩡한 피부가 가려움증을 동반하며 열이 오르는 것만 같다. 동시에 상흔이 벌어지고, 끊어졌던 두 갈래 길이 이어져 귀와 목뒤로 향하는 듯한 착각도 든다. 여진은 거울을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거울은 이미 그가 일전에 주먹을 뻗었던 곳을 중심으로 금이 간 상태다.
비교적 조명이 얼굴 위로 잘 내려앉는 위치를 찾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명이 거의 다해 끝이 검게 변한 형광등이 진동하듯 깜빡였다. 셔터를 누르고, 사진을 확인하고, 몇 차례 더 각도와 표정을 바꿔 사진을 찍었다. 변기에 앉아 지금껏 찍은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해 가며 살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원히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화면 속의 상흔을 지우는 건 쉽다. 사진 보정 어플리케이션으로 조금만 매만지면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흔을 지울 수 있다. 그러나 거울 속의 상흔을 지우는 건 어렵다. 불규칙한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에게 매달 나가는 각종 생활비를 제하고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은 절망에 가까운 일이다. 여진은 이해할 수 없다. 얼굴의 상흔을 없애는 것이 어째서 코를 높이거나 눈을 키우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을 뿐인데 어째서 누군가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척력이 느껴지는지.
거울 속의 상흔을 지울 수 없다면, 화면 속의 상흔 역시 지워서는 안 된다. 솔직해야 한다. 적어도 사만다에게만이라도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왓츠앱을 켜서 사만다와 나눴던 지난 2주간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그녀와 나눈 대화를 반복해서 읽는 것은 상흔을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이미 무의식적인 습관이 되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아마 그곳은 저녁 무렵일 것이다. 스크롤을 올려 어제 나눴던 대화를 살폈다.
고백하고 싶어.
무엇을?
예전에 올렸던 사진, 사실 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어.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요.
나는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큰 흉터입니다. 보는 것은 소름 끼칠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아니.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해.
이후 여진은 답장하지 않았다. 두 갈래로 나뉘는 길목에서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한 번 더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앞으로 48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면서,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진은 화장실에서 나와 스탠드 조명을 천장을 향해 쏜 채 어두운 방 침대 귀퉁이에 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사만다를 위해 기도했다.
여진은 사만다와의 대화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둘만의 비밀을 공유했다. 둘의 삶 속에서 여러 공통점을 끌어냈다. 물론, 사만다의 상처는 가슴 속에 있고, 여진의 상처는 얼굴 위에 있다. 사만다는 지금껏 그의 상처를 은유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여진 역시 그것에 대해 특별히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둘 다 아버지가 입힌 상처를 가지고 있고, 녹록지 않은 성장기를 보냈다는 거니까.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그는 결국 자기 삶을 상흔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여진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지난날을 복기해 가며 상흔에 대한 글을 쓰고 사진을 첨부해 사만다에게 보냈다. 침대에 누웠을 때 창문 블라인드 틈새로 층층이 코발트색의 여명이 새어 밝아 오고 있었다. 일주일 전 수락한 출장 행사 아르바이트 약속이 있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고백이 손끝을 떠나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고 팔다리의 근육이 느슨하게 이완됐다. 그는 알람을 줄지어 맞춘 다음 늪에 빠지듯 잠들었다.
탕
차가 방지턱을 넘는 순간 여진은 발작하듯 잠에서 깼다. 몇 시간 뒤 뒤집어써야 할 곰 인형 탈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흡사 꿈속에서 총격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총소리가 들렸는데‧‧‧.
스타렉스에 타고 있는 여섯 중 아무도 여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도 실장이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려 창문이 열려 있으면 닫으라고 명령했다. 50미터 전방에 간이 컨테이너와 커다란 푸른색 플라스틱 탱크가 보였다. 바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에서 탱크에 담긴 소독약이 하얗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고글과 마스크로 얼굴을 모두 가린 채 하얀 방호복을 입은 공무원 몇몇이 경광봉을 흔들었다. 전봇대 위쪽으로 돼지 열병 방역에 협조를 부탁하는 방역 당국의 플래카드가 바람 따라 펄럭이고 있었다.
여진은 뒤늦게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깨닫고 닫으려 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닫히지 않았다. 스프링클러는 차량 선두부터 차체를 천천히 소독약으로 적셨다. 꼭 창문을 열고 세차를 하는 것처럼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소독약을 맞았다. 독한 농약 같은 냄새가 불쾌했다. 차창 뒤로 방호복 차림의 사람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내레이터 모델 셋 중 수영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완전 깡촌이네.
실장님, 여기가 어디예요?
또 다른 내레이터 재희의 물음에 도 실장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마래라던가‧‧‧. K군 근처지.
여진은 돼지 열병 관련 뉴스에서 K군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친구 하준이 고개를 돌려 여진에게 물었다.
K군이면 우리 부대 있던 데 아니냐?
응.
자대 배치 받을 때 생각나네.
하준의 말에 재희가 또 군대 얘기를 한다며 타박했고,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여진의 뇌리에 지난 군 생활에 대한 기억이 달려 나왔다. 부대 전입 이후 여진은 내무반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흉터가 왜,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사람들의 반복된 물음을 거치며 이야기는 점차 간략해졌고 거기에 얽힌 감정도 많이 떨어져 나갔다. 상병 진급 이후에는 직접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담배를 태우며, 위병소 근무를 서며, 사격 순서를 기다리며 그의 흉터를 가십으로 소비했다. 여진은 제멋대로 변해가는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었다. 나중에는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편했다. 나가면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려고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는 말이니까.
여진은 습관처럼 왓츠앱을 켜서 사만다와의 대화창을 다시 열었다. 그가 보낸 메일에는 아직 ‘읽지 않음’ 표시가 있다. 여진은 혹시라도 그녀에게 위험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다. 사만다는 지금 예멘 사나에서 파병 생활을 하고 있다. 여진은 사만다와 연락하기 전까지 예멘이 어떠한 곳인지 전혀 몰랐다. 영화에 나오던 것처럼 미군과 테러리스트들이 도심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그런 장면만이 떠올랐을 뿐이다. 지금은 다르다. 사만다가 보낸 사진 중 한 장은 건물 옥상에서 지는 해를 배경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점호를 마치고 옥상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는 게 자기만의 루틴이라고 했다. 그 사진을 본 이후로 여진에게 예멘 사나는 노을이 아름다운 도시로 기억되었다.
은행나무 이파리가 노랗게 쌓인 공영주차장에서 스타렉스는 멈췄다. 높은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경사가 완만한 언덕 위로 수확이 모두 끝난 옥수수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근거리에 합판 슬레이트로 지붕을 엮은 게딱지 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공영주차장 반대편에는 오늘 행사가 진행될 초등학교 건물이 보였다. 10년 전에 이미 폐교해서 지금은 도시 사람을 대상으로 숙박을 비롯해 각종 행사, 수련회,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는 공간으로 새로 단장한 듯한 모양새였다. 학교 뒤로 푸른 대나무 숲이 펼쳐지다가 산을 뒤덮고 있는 원시림으로 자연스럽게 수종이 바뀌었다. 대나무의 푸른빛이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마치 불이 번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대나무가 바람에 서로 몸을 치대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도 실장은 오늘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점심시간 이후로 행사가 시작되면 방문객들이 찾아올 것이다. 여진과 하준은 학교 정문에서 인형 탈을 쓴 채 일정이 적힌 팸플릿을 나눠 주고, 차를 끌고 온 사람에게 주차를 안내한다. 내레이터 셋은 안에서 경품 추첨 및 각종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한다. 저녁 7시까지 이곳에 다시 모인다. 15분 이상 기다리지 않을 테니 절대 늦지 않을 것. 이상.
여진은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 짧은 상의와 치마로 갈아입고 나오는 여자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셋 다 시선을 받으며 일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훤히 드러낸 맨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는데, 그러한 에너지는 자기 겉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여진에게 그들은 이종(異種)이었다.
스타렉스 뒤편에서 여진은 속옷만 남기고 모든 옷을 벗은 다음 인형 옷을 입었다. 옷을 모두 벗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형 탈에선 고약한 냄새가 난다. 여러 명이 의상을 거치며 땀을 흘렸다.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역겨운 땀 냄새가 의상 깊숙한 곳 구석구석 퍼져 있다. 만약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인형 탈을 뒤집어쓴다면 자기 옷에도 이 구역질 나는 땀 냄새가 밸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는 조금 결이 다르다. 이건 여진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에게는 의상을 입는 과정이 하나의 진지한 의식과도 같았다. 축축하고 두꺼운 옷에 팔다리를 밀어 넣고 거대한 탈을 뒤집어쓰는 순간 자기를 둘러싼 모두의 시선이 달라진다. 어린아이들은 뛰어오고, 여자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여진은 이런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따뜻한 시선을 12살 이후로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는 냄새나는 의상에 몸을 들이미는 이 과정 전체를 사랑하게 됐다. 목이 아프고 시야가 좁아지는 것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냄새나는 껍데기에 불과할지라도, 이 껍데기가 그에게 새 삶을 준다.
두 시간쯤 지나 사람들이 몰려들고 행사가 궤도에 오르자, 도 실장은 사람들이 모두 입장했으니 점심을 먹으라고 했다. 여진과 하준은 정문 밖 울타리를 크게 우회해서 학교 체육관 뒤편 소각장으로 갔다. 먼저 식사를 시작한 재희와 수영도 있었다. 내레이터 셋 중 대장처럼 보이던 여자는 도 실장과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는지, 둘에게 인사를 하고는 후문 쪽으로 훌쩍 가 버렸다. 여진은 그들을 등진 채 곰 인형 탈을 벗고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았다. 편의점 도시락을 들고 구석에 가서 차갑게 식은 밥을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하준이 여자들 곁으로 갔을 때 왠지 모를 섭섭한 감정이 들었지만, 이런 대우에 익숙했고 연연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준은 고기반찬만 골라 먹더니 절반도 넘게 남은 도시락을 검은 재가 바닥에 눌어붙은 드럼통 안에 처박았다.
밖에 맛있는 거 존나 많던데 이딴 쓰레기를 먹으라고 하네. 담배나 피우자.
맞아. 존나 맛없어.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역시나 남은 도시락을 드럼통에 버리고 일어섰다. 여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사만다로부터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만다는,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게 여진의 기도 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또, 믿지 못할 여러 일을 겪었는데 여진에게만 알려 줄 테니 꼭 비밀을 지켜 달라고도 말하고 있었다. 여진은 도시락을 옆에 두고 떨리는 손으로 답장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안부부터, 지금 일하는 중이라 답장이 늦을 수 있다는 양해까지. 예멘은 아침 무렵일 것이다. 어쩌면 사만다는 막사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며 그와 대화를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놀라지 마세요. 작전 중에 우리 소대는 반군을 격파하고 무기와 돈이 담긴 은닉처를 발견했습니다.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여진은 자기 핸드폰이 훔친 물건이라도 된다는 듯이 주머니에 넣었다. 수영이 허리를 숙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진은 고개를 숙이며 얼버무렸다.
아니요‧‧‧.
무슨 친구가 저러냐. 혼자 밥 먹게 내버려두고.
여진은 사만다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음미하며 읽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수영이 자기에게 보이는 갑작스러운 관심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수영은 거리를 두고 옆자리에 앉았다. 여진은 초면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불편했다. 그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흉터에 말을 걸고 싶은 것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전부 상흔을 우회하고 있었고, 그 말을 모두 쳐내고 나면 말해지지 않은 부분은 결국 상흔에 관한 것이었기에, 차라리 그들이 상흔에 대해 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수영은 그의 옆에 놓인 반다비 탈을 보며 말했다.
따뜻하겠다. 그거 입고 일하면.
흉터, 궁금해서 온 거예요?
수영은 여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가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에 덴 것처럼도 보였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다.
아니요. 표정이 즐거워 보여서, 궁금해서 온 거예요. 흉터가 왜 생겼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요.
여자?
네.
오. 좋네. 유학생인가 봐요? 멀리 있다는 거 보니까.
그는 잠시 고민하며 말을 골랐다.
군인이에요.
여군? 멋있다.
미군이고, 지금 예멘에 파병 중이에요.
예멘?
수영의 얼굴에 아리송한 표정이 번졌다.
예멘‧‧‧.
수영은 말꼬리를 길게 늘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여자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었다고 하던가요?
여진은 흉터에 대해 잠시 잊고 수영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네.
그 여자가 조만간 한국에 돌아와 정착할 거라고 하던가요?
네, 그걸 어떻게‧‧‧.
그 여자가 테러리스트에게 빼앗은 현금과 자신의 짐을 그쪽에게 보낼 건데, 수수료가 필요하다고 하던가요?
수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진의 가슴팍에 다트처럼 박혔다. 수영은 마치 사만다와의 대화를 엿본 것처럼 그 내용을 읊고 있었다. 여진은 무릎 위에 올려 뒀던 도시락을 바닥에 내려 두고는 손등을 이마에 갖다 댔다. 이마가 불덩이 같았다.
아뇨‧‧‧ 지금 무슨 말을‧‧‧.
로맨스 스캠이에요. 사기에요. 전부 다 사기라고요.
여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뒤늦게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지만 정작 뭘 도둑맞은지도 모르는 멍청한 사람처럼 사만다와 나눴던 모든 대화를 머리 한가운데 위치한 공터에 쏟았다. 그는 고개를 모로 저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진 알겠는데, 이거 사기 아니에요.
뉴스에서 봤어요. 요즘 유행하는 대표적인 사기 수법이에요.
나도 알아요, 로맨스 스캠.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거 아니에요.
수영은 답답하다는 듯이 몸을 들이밀었다.
얘기 들어 보니까, 딱 로맨스 스캠인데요? 주로 아프리카 사람들이 벌이는 짓이라고 들었어요.
나는 이거 진짜 사기 아니에요. 더 듣고 싶지 않아요. 그만해요.
지금이라도 알아서 진짜 다행이에요. 주고받은 메시지 좀 볼 수 있을까요? 직접 보며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만!
여진은 바닥에 놓인 도시락을 발로 차 버린 다음 불같이 화를 냈다. 차갑게 식은 밥과 소시지 따위가 바닥의 검은 흙과 뒤섞였다.
나는 그냥 도와주려고‧‧‧.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어? 씨발, 그냥 내버려두라고,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둬!
담배를 태우고 돌아온 재희가 입을 틀어막고 소리 질렀다. 하준이 황급히 뛰어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진의 얼굴 위 상흔은 이리저리 굽은 길처럼 뒤틀려 있었고,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하준이 여진의 가슴팍을 밀쳤다.
미친 새끼야, 뭐 하는 거야?
여진은 숨이 차서 아무런 말도 쏟아 낼 수 없었다. 너무 많은 말이 몰려와 목구멍을 꽉 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수영은 둘의 등장에 기세등등해진 얼굴로 항변했다.
아니, 사기당하는 것 같길래 도와주려고 그랬는데 갑자기 휙 돌아 버렸다니까. 그거 진짜 사기예요. 내 말 들어요. 메시지 주고받는 그 여자, 여자 아닐지도 몰라요. 아마,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남자일걸요?
여진이 수영의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쳐내고 다가서자, 다시 하준이 그를 막아섰다. 하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적당히 해, 미친 새끼야. 진짜 뭐 하자는 거야?
여진은 멀찍이 떨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셋은 여진이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밑바닥 저 언저리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수치심에 여진은 바닥에 놓인 곰 인형 탈을 뒤집어썼다. 이제 그의 두 눈은 텅 비어 버렸고 곰은 웃고 있다. 여진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셋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조심스레 뒷걸음질 쳤다. 여진은 수영을 지나쳐 대나무 숲속으로 걸어갔다. 셋은 여진이 자신들에게 멀어지자 들으라는 듯이 방금 소각장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에 대해 떠들어 댔다.
‧‧‧정말 그랬다니까.
‧‧‧괴물 같은 새끼.
그들의 말은 여진의 귀에 가 닿았다. 하지만 여진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말이 모양을 잃고 먹먹하게 바람 따라 흩어질 때까지 걸었다. 여진은 계속해서 어두운 숲속으로 걸어갔다.
2
멀리서 총성이 들렸다. 총성은 마주하고 있는 높은 산을 두고 짧은 간격으로 번갈아 메아리쳤다. 정신을 차린 여진은 대나무 숲을 지나 원시림 깊숙한 곳까지 와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산마루에서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서늘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고, 색색으로 물든 낙엽이 좌우로 불규칙한 호를 그리며 떨어졌다. 여진은 인형 탈 속 좁고 어두운 시야로 이 풍경을 보며 심호흡했다. 찬 공기가 몇 차례 머리를 휘감자 정신이 들었다. 방금의 어지러운 기억을 떠올리니 언제나처럼 모든 걸 망쳐 버린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그렇다고 화가 풀린 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수영이 무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그가 먼저 사과를 건네야만 한다. 어떤 사과를 하든 마지막에 그들의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속마음은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수영은 여진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진은 여전히 수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자기가 직접 판단을 내리고 싶었다. 수영이 넘겨짚은 것은 사만다와 나눴던 수많은 대화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도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던가? 여진은 커다란 바위에 등을 대고 앉아 탈을 벗고 미처 읽지 못한 사만다의 메시지를 살폈다.
사만다의 부대는 반군이 숨기고 있는 현금과 무기를 압수했다. 소대장은 노획물 중 일부를 팀원들과 나누기로 했다. 자기에게 할당된 돈과 가장 중요한 서류를 한국에 정착하기 전 누군가에게 보내야 하는데, 알다시피 한국에는 아는 사람이 여진 말고는 한 사람도 없다. 적십자사 동료를 통해 서류를 동봉해서 보낼 텐데, 그 비용이 필요하다. 지금은 계좌가 동결된 상태라 자기 돈을 쓸 수가 없다. 짐을 받고 나면 거기서 수수료를 떼 가도 된다. 이제 한국에 정착할 수 있게 됐다‧‧‧.
정확히 수영의 말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 사만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거기 있어요?
여진은 뒤늦게 로맨스 스캠을 검색했다. 아주 많은 뉴스와 피해 사례가 페이지를 뒤덮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서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대신 사만다에게 이렇게 보냈다.
내가 보낸 편지를 읽었나요? 내가 보낸 사진 봤어?
멀리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반복되는 총성에 여진은 불안해졌다. 사만다는 몇 분 뒤 답장했다.
잘 쓰여졌습니다. 그는 잘생겼어. 집 주소를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녁 식사 전에 보내야 해요.
여진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게 사기가 아닐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높은 확률로 사기일 것이다. 수많은 정황이 사만다가 사기꾼임을 지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지금껏 나눴던 대화 속 수많은 세부 사항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믿고 흉터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길게 써서 사진과 함께 보냈다. 자기를 정의하는 이야기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멍청하게 써서 팔아 버렸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패드 위 자음과 모음을 조합했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났다. 골짜기 따라 울리는 메아리의 방향도 달랐다. 여진은 깜짝 놀라 고개를 길게 뺐다. 개 짖는 소리도 훨씬 가까워졌다. 연달아 총소리가 들렸다. 그가 등을 대고 있던 바위 위쪽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바닥에 쌓인 낙엽이 갈갈이 찢기면서 튀어 올랐다. 그는 마치 솜으로 가득 찬 반다비 탈이 방탄모라도 되는 것처럼 뒤집어썼다.
저 멀리 빨간 조끼를 입은 포수의 모습이 굵은 나무 둥치 사이로 면봉만 한 크기로 보였다. 포수는 검은 엽총을 그에게 겨누고 있었다. 총성과 동시에 그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일렁이는 나뭇가지 사이로 조각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여진은 바닥에서 비비적대며 손을 인형 탈 이마에 갖다 댔다. 곰 대가리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총격을 당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삐져나온 따뜻한 솜을 매만졌다. 포수가 자신을 사냥감으로 착각하고 총을 쏘고 있는 것이다. 빨간 조끼 포수 옆에 다른 포수 한 명이 또 있었다. 둘은 앉아 쏴 자세로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여진은 네발로 기어서 숲 반대편을 향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절망감으로 나른했던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돌아 숨도 차지 않았다. 행여나 자신이 사람인 것을 모르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을까 봐 소리쳤다.
사람! 사람! 사람!
총성과 함께 그가 지나치던 단풍나무 밑동의 껍질이 둥글게 파였다. 총알이 귓전을 스치는 소리도 들렸다. 사냥개가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을 향해 힘차게 뛰어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진은 오르막길을 향해 도망치면 얼마 안 가서 잡히겠다는 판단이 서서 방향을 틀어 완만한 내리막길로 뛰기 시작했다.
사람! 사람! 사람!
여진은 목이 터지라 소리치며 이상한 점을 느꼈다. 지금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이 정도로 크게 들린다는 것은 저들 역시 여진이 외치는 소리를 들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집요하게 여진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어쩌면 그냥 재미로 여진을 사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죽는다면 한참 뒤에나 발견될 것이다. 저들이 시체를 훼손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들짐승이 시체를 파먹을지도 모른다. 자꾸 비현실적인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어디를 향해 뛰어가는지도 불분명했다. 이따 일곱 시까지 공영주차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서 너무 늦지 않게 사과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일단은 당장 생존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여전히 뒤에서는 총성이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물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면서 나무 사이로 비춰 오는 광량 역시 늘어 갔다. 이윽고 더 이상 헤쳐 나갈 나무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발밑으로 땅이 푹 꺼졌다. 2~3미터 정도 높이의 절벽이 있었다.
여진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 밑으로 추락했다. 자갈밭에 머리부터 떨어졌다. 옆으로는 거센 급류가 흐르고 있는 계곡이 있었다. 다행히 곰 인형 대가리가 푹신한 완충재 역할을 해 머리가 깨지거나 목이 부러지진 않았다. 다만 숲을 헤쳐 오며 이곳저곳 얻어맞아 몸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여전히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신음을 삼키면서 절벽 아래 사각지대로 기어갔다. 무릎에 충격이 갔는지 왼쪽 다리가 뻐근했고 발목이 욱신거렸다. 고통이 커질수록 살겠다는 욕망 역시 커졌다. 그는 자기를 짐승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 반다비의 의상과 거기에 잔뜩 밴 전임자들의 땀 냄새가 포수와 사냥개의 추격을 유도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꽉 깨물어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그제야 탈과 의상을 벗었다. 잠시 멀어졌던 개 짖는 소리가 다시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여진은 비틀거리며 속옷 차림으로 계곡을 향해 걸었다. 물은 얼음장 같았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자갈밭 위에 놓인 곰 인형 탈을 힐끗 흘겨보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급류에 몸을 실었다. 물살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차고 거세 여진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떠내려갔다. 발버둥 치며 고개를 최대한 높이 쳐들었다. 부서지고 꺾이는 급류 따라 혼란스러운 와중에 절벽에 나란히 서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빨간 조끼의 포수가 보였다. 사냥개 역시 그 옆에 서서 짖어 댔다. 희한하게 그 찰나가 영원처럼 흘러갔고 모든 게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사냥개의 품종이 도베르만인 것을 확인했다. 마치 그 정보를 이발소에 걸린 견종 다이어그램 포스터에서 본 것처럼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후 여진은 총에 맞을까 두려워 고개를 물속에 깊이 처박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포수들의 추격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맞은 편에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를 보지 못했다. 그는 바위에 크게 한번 부딪힌 다음 힘없이 물에 잠겼다. 급류가 꼬이는 소용돌이 위로 붉은색 띠가 금세 사라졌다.
3
여진은 유속이 느려진 계곡 근처 모래톱 위에 늘어져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잠잠해진 계곡물이 둥글둥글한 자갈 위를 훑고 흘러가는 소리가 귓가에서 쟁쟁거렸다. 하늘은 쪽빛으로 층층이 물들어 가고 있었고, 골짜기를 기점으로 양쪽에 높게 솟은 산은 전부 누군가 검게 칠해 버린 것처럼 어두웠다. 기억할 수 없는 끔찍한 악몽을 꾼 것처럼 위축되어 있었지만, 그 두려움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각종 산새와 짐승의 울음소리가 단조로워진 풍경을 대신해 정신없이 귓전을 때렸다.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몸은 정신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주면, 이내 접질린 왼발에 힘이 풀려 다시 모래톱에 처박혔다. 하체가 마비된 사람처럼 두 손으로 몸을 질질 끌어 계곡을 벗어났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다 보니 몸에 열이 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짐승처럼 두 팔을 이용해 길 수 있었다.
여진은 지금 이 상태로 어두운 숲을 헤매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살기 위해선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몸을 따뜻하게 해야 했다. 차가운 산바람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그는 거대한 바위와 주위 나무들이 외풍을 막아 주고 있는 자리 한구석을 찾았다. 부드러운 부식토라 깊게 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진은 개처럼 두 손으로 땅을 팠다. 손톱 사이로 솔잎이 파고들기도 하고 모난 돌에 손톱이 통째로 들리기도 했지만, 그 모든 고통은 지금껏 그가 뚫고 지나온 고통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살고 싶다는 열망과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추위가 그를 쉼 없이 움직이게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여진은 일 미터 남짓한 깊이의 구덩이를 완성했다. 그는 손 닿는 대로 주위의 낙엽을 긁어모아 구덩이가 넘칠 정도로 가득 채웠다. 그다음 자기 무덤을 찾은 시체처럼 누웠다.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낙엽은 전혀 한기를 막아 주지 못했다. 몸은 쉴 새 없이 떨리기 시작했고, 딱딱 부딪히는 이 사이로 잘게 조각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준이 실종 신고를 해 주지 않았을까. 그러한 막연한 기대가 자신을 더 절망스럽게 만드는 것만 같아 눈을 질끈 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들은 떠났을 것이다. 아니, 떠났다. 여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기서 날이 밝을 때까지 버티고, 근처 민가로 내려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전부 헛된 망상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사만다의 존재처럼.
여진은 살고 싶어서 구덩이를 파 놓고, 막상 구덩이에 들어오니 죽고 싶었다. 장장 열 시간 동안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쏟아 낼 울분도 남지 않을 때까지 여진은 소리 지르면서 울었다.
동트기 직전의 짧은 십 분여의 시간, 블루 아워의 고요 속에서 여진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두 눈을 가지고 깨어났다. 정적을 깨고 새들이 다시 지저귀기 시작했을 때, 그는 계곡으로 내려가 골짜기 사이로 동트는 하늘을 보았다. 점차 어두웠던 모든 게 채도를 더해 가며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골짜기 내리막길을 따라 걸은 지 불과 삼십 분도 안 됐을 때, 안내판을 끼고 있는 등산로를 만났다. 그렇지만 이것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일진 않았다. 어찌 됐든 어제 그 몸 상태로는 결코 만나지 못했을, 뒤틀린 길이다. 그 뒤로도 한 시간여를 더 걸어 하산했다.
여진이 처음 마주한 것은 간이 울타리가 둘러쳐진 널따란 공터였다. 불이 꺼진 컨테이너가 공터 한가운데 있었고, 주위에 팔을 높게 든 채 그대로 시동이 꺼진 굴착기 두 대가 있었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인지, 뒤쪽 빨랫줄에 새벽이슬에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여진은 발소리를 죽인 채 빨랫줄에 걸린 옷을 전부 다 껴입었다. 외벽에 모로 세워진 슬리퍼까지 챙겨 신었다. 그는 어둑한 컨테이너 내부를 훔쳐보다가 공터를 거닐었다. 비닐하우스 한 동이 들어갈 크기의 부지 경계 따라 땅 위로 비닐이 삐져나와 있었다.
땅속에서 누군가 울부짖었다. 여진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미약하지만 분명히 울부짖는 소리였다. 그가 비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땅 위에 서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시 비명이 들렸다. 여진은 홀린 듯 공터를 헤맸다. 그는 툭 불거져 나온 파이프 앞에서 멈췄다. 땅속 깊은 곳 어딘가 연결된 파이프에서 가장 큰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질은 피가 꿀렁꿀렁 솟구쳤다. 기이한 광경에 깜짝 놀라, 여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 뭐야?
맞은편에서 방호복 차림에 수건을 목에 건 남자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진 그는 극도로 피곤해 보였다. 여진이 파이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땅속에 사람이 있어요.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요.
돼지. 죽은 돼지들이다. 대체 넌 뭐냐.
여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민가에 잘못 내려온 야생동물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끝까지 노려보다가 다리를 절며 현장에서 벗어났다. 남자는 여진을 추격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대신, 한동안 발붙이고 서서 여진이 달아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진은 산을 끼고 있는 국도변을 걸었다. 이미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이 저절로 나갔다. 이른 아침 산골이라 그런지 도로는 적막했다. 여진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계속 걸었다.
등 뒤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진은 그게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히치하이킹하는 것을 넘어 거의 앞길을 막으려는 것처럼 그는 중앙선 한가운데 서서 다가오는 차를 향해 두 손을 절박하게 흔들었다. 파란 트럭은 속도를 줄이고 가볍게 경적을 울리며 그의 옆에 섰다. 두 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눈꼬리가 뱀처럼 날카로운 사람은 몹시 피곤한지 전혀 미동도 없이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고, 새치가 무성한 곱슬머리에 수탉의 부리처럼 날카로운 코를 가진 운전자는 여진의 행색을 유심히 살폈다. 여진은 정신없이 말을 쏟아 냈다.
산에서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맸습니다. 어디라도 좋으니 제발 시내까지만 태워 주세요. 어떤 식으로든 은혜는 갚겠습니다.
수탉은 팔꿈치로 보조석의 뱀눈을 깨웠다. 그는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한 표정으로 여진과 수탉을 번갈아 보았다. 수탉은 여진에게 물었다.
지금은 자리가 없는데. 짐칸이라도 괜찮나? 시내까지는 아니더라도 버스 타는 데까지는 데려다줄게. 그런데 너, 괜찮냐?
여진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린 지금 밥 먹으러 간다. 아침이나 같이 먹자.
여진은 허겁지겁 짐칸 위로 올라타려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총에 맞고 죽은 멧돼지 사체가 놓여 있었다. 멧돼지뿐이 아니다. 머리가 터져 죽은 고라니와 삵, 그리고 목줄이 풀린 개도 모조리 총에 맞은 채 죽었다. 바닥에는 동물들의 사체에서 흐른 피가 구분 없이 섞인 채 한데 고여 있었다. 수탉이 얼른 타라고 보채듯이 클랙슨을 울렸다. 여진은 심호흡한 다음 짐칸에 올라탔다. 움직일 때마다 슬리퍼 밑창에 피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여진은 간신히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이미 죽은 동물과 눈이 마주치는 게 불편해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곰 인형 탈이었다. 여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엉금엉금 기어가 곰 인형 대가리를 들었다. 손가락으로 이마에 난 구멍을 짚어 보았다. 아래에는 피로 범벅이 된 인형 옷이 있었다. 옷 안주머니에는 핸드폰이 있었다. 그를 찾는 연락은 없었다. 도 실장은 물론이고 하준의 연락 역시 없었다. 오직 사만다에게만 몇 차례 메시지가 왔을 뿐이다. 여진은 사만다의 메시지를 읽었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답장하지 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뒤에 난 창을 통해 두 포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둘은 자기들끼리 뭔가를 바쁘게 떠들다가 갑자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바라보던 여진의 몸이 반사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트럭은 국도변의 허름한 백반집에서 멈췄다. 백반집은 단출했다. 메뉴판도 따로 없었고 식탁은 세 개뿐이었다. 등이 둥글게 굽은 노파가 쟁반을 들고 다가오자, 수탉이 익숙하게 밥과 술을 주문했다. 노파가 물었다.
어디 갔다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누?
뱀눈은 유리컵에 절반가량 소주를 따랐다. 여진에게 묻지도 않고 채워 건넸다. 수탉이 노파의 말에 답했다.
군청에서 멧돼지 좀 잡아 달라고 해서 종일 총질했지 뭐.
멧돼지는 왜?
할매, 뉴스도 안 보오? 돼지 열병 때문에 돼지들 다 땅에 파묻고 난리잖아. 야생동물이 그런 병균을 옮긴다고. 민가 가까이 내려오는 놈들은 보이는 대로 죽이는 거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국밥이 나왔다. 둘은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가볍게 건배하더니 잔을 비웠다. 여진이 망설이자 뱀눈이 국밥을 뜨다 말고 물었다.
왜 안 마셔?
몸이 안 좋아서요.
마셔. 마시면 좀 나아질 거다.
여진은 절반만 마셨다. 두 포수는 그런 여진을 탐탁잖게 보고는 바쁘게 국밥을 퍼먹었다. 계속해서 사만다의 메시지로 핸드폰이 울렸다. 여진은 확인하지 않고 수저로 국밥을 몇 차례 저었다.
깨작거리지 말고 퍽퍽 퍼먹어라, 젊은 놈이.
여기서 버스 정류장이 많이 머나요?
뱀눈은 자작한 뒤 술을 한 호흡에 비우고는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너 혼자서 못 가. 엄청 멀거든. 첫차 시간도 아직 멀었고.
공기가 얼어붙자, 수탉이 여진의 어깨를 팡팡 쳐 댔다.
걱정 마라 친구야, 삼촌들이 밥도 사 주고 차도 태워 줄라니까.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여진은 상흔을 매만졌다.
‧‧‧이거요?
흉터가 신경 쓰이나.
네. 저는 제 흉터가 싫어요.
수탉은 대뜸 소매를 걷으며 자기 흉터를 보여 줬다.
부끄러워 마. 흉터는 이야기야. 나는 내 흉터가 좋아.
뱀눈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꼴이 왜 그래? 산에서 뭔 일이 있었길래.
여진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둘 다 얼굴에 미소가 맴돌았지만, 눈은 교활했다. 실내는 적막했다. 노파가 설거지하면서 내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전부였다.
길을 잃었는데, 쫓겨서 도망치다가 넘어졌어요.
뭐에.
여진은 절반쯤 남은 술을 비우고 속 트림을 삼키며 말했다.
멧돼지요.
멧돼지?
네. 전역한 이후로 처음 봤는데, 무서웠어요. 미친 듯이 저를 쫓아왔어요.
우리가 근처에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담배?
여진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멧돼지를 쏠 때‧‧‧ 기분이 어때요?
두 포수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픽 하고 웃었다. 수탉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윽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기분? 그냥 일이지 뭐, 기분은 무슨. 한 방에 죽이면 좋지.
별 느낌이 없는 거네요.
그렇지.
짐칸에 다른 동물도 많던데요‧‧‧. 걔네는 왜 죽인 거예요?
수탉이 이상한 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눈에 띄었으니까. 한번 당겨 보는 거야.
뱀눈은 그의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끼어들어 부연했다.
우리가 무슨 멧돼지만 쏘랬다고 멧돼지만 쏘는 사람은 아니니까.
실력이 좋으시네요.
여긴 우리 나와바리지.
죽인 동물 중에 기억에 남는 동물이 있어요?
포수들은 이제 그의 질문을 즐기는 듯했다. 뱀눈은 자기는 없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얼굴이 불콰해진 수탉은 해 줄 이야기가 있는 듯 잔을 비웠다.
몇 년 전에 표범을 쏜 적이 있어. 동물원에서 표범이 탈출했다고 연락이 왔거든. 크기가 이 정도 됐던 것 같은데‧‧‧. 아무튼. 연락받자마자 미친 듯이 밟아서 날아갔지. 내가 또 언제 표범을 죽여 보겠어. 그런 건 늦게 가면 안 되거든. 다른 포수들한테 뺏길 수도 있고, 동물 단체니 뭐니 미친년들 끼어들어서 훼방 놓기 전에 얼른 죽여 버려야지. 더운 여름이었는데, 표범이 가로수 위에 떡 하니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더라고. 아지랑이는 이글거리고, 응? 눈과 눈 사이를 겨눈 다음, 숨 고르고, 당겼지.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탕, 픽, 쿵. 그대로 떨어지더라고. 나중에 들어 보니까, 동물원에서 어릴 때부터 키웠던 놈이라고 하대. 말하자면 큰 집고양이였던 거지. 그래도 표범은 표범이야. 눈빛이 맹수였어.
여진은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여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오줌 좀 싸고 올게요.
어 그래, 시원하게 빼고 와라.
여진은 트럭으로 비틀비틀 걸어가서 짐칸에 놓인 죽은 동물들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고인 검붉은 피 웅덩이에 손끝을 담갔다가 뺐다. 차창 너머 운전석과 보조석 사이에 놓인 엽총을 확인했다. 창이 절반쯤 내려가 있었다. 여진은 팔을 집어넣어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케이스에 담긴 엽총을 꺼냈다. 이리저리 총기를 살피다가 중절 레버를 젖혀 탄환이 장전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케이스를 뒤져 탄환 집을 찾아낸 다음 엄지손가락으로 총알을 한 발 한 발 장전했다. 손이 떨려 제대로 쥐지 못한 총알이 줄줄이 떨어졌다. 그는 멍하니 백반집을 바라보았다. 짐칸에는 이마가 뚫린 곰 인형 탈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여진은 피 묻은 곰 인형 탈을 뒤집어쓰고서 바퀴 옆에 놓인 엽총을 들고 성큼성큼 백반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진은 문을 열자마자 두 포수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여진은 주저하지 않고 총을 들어 곧장 뱀눈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뱀눈은 수저를 든 채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수탉은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여진은 그의 등을 겨누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그 역시 바닥에 얼굴을 맞대고 쓰러졌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노파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가 피로 범벅이 된 현장을 보고 겁에 질려 벌벌 떨어 댔다. 여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 노파더러 두 손으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노파는 허리에 손을 짚고 절뚝이며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진은 노파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곰 인형 탈을 벗고 엽총을 바닥에 던졌다. 주방에서 냄비가 끓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바꾼 다음 쓰러진 두 포수를 피 묻은 자기 얼굴과 함께 프레임 안에 담았다. 셔터를 몇 차례 누르고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사진을 확인했다.
왓츠앱에 접속했다. 사만다는 여전히 그에게 주소를 묻고 있었다. 여진은 신중하게 사진을 골라 사만다에게 보냈다. 그다음 메시지를 입력했다.
내가 갈게, 아프리카로.
여진은 반다비 탈을 챙겨 터덜터덜 밖으로 나왔다. 트럭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차는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짜기 사이로 난 좁은 길은 안개에 휩싸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잠인지, 죽음인지 구분되지 않는 짙은 피로가 몰려왔다. 여진은 시야가 흐려지고 두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을 느꼈다. 안간힘을 써서 눈을 감지 않으려 했으나 눈꺼풀이 저절로 감기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이 수시로 빠졌다. 그는 라디오를 켰다. 새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눈앞의 텅 빈 길과 무관한 시내의 교통정보를 바쁘게 떠들어 댔다. 여진은 신청곡을 기다렸다. 차는 푸른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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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로 꿰맨 사람 천선란 그녀에게서 답장이 온 건 3개월 만이었다. 답장이 늦었습니다. 그녀에게 여러 차례 메일과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희에게 달랑 저 한 문장 쓰인 메일 제목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희는 로그인된 메일이 업무용 메일이 맞는지, 실수로 개인 아이디로 로그인한 것은 아닌지 다시 확인했다. 아주 가끔 희의 핸드폰과 PC가 연동되며 PC의 로그인 정보가 희의 개인 정보로 전부 변경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개인 메일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연락을 간절하게 기다리지 않았기에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로그인은 업무용 아이디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광고성 메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희가 메일을 클릭했다. 고민이 길어져 답장이 늦었습니다. 업무에 지장이 생기진 않았을지요. 개인 메일로 연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담당자님이 먼저 읽으시고, 판단하시길 바라서요. 괜찮으시면 이 메일로, 담당자님 개인 메일 주소로 답장 주세요. 내용을 보자 당혹스러움이 더 짙어졌다. 메일의 미궁이 더 깊어진 기분이었다. 광고성 메일은 아닌 듯했고, 그렇다면 피싱 메일인가? 이런 식으로 지인인 척 혹은 중요한 메일인 척 개인 메일을 알아내려는 수단일 수도 있겠다. 이 시대의 피싱이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의심해서 나쁜 건 없었다. 이전에 주고받은 메일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면 편했겠지만, 데이터 용량 기준법이 시행된 뒤로 메일을 한 달에 한 번씩 전부 비워야 했다. 이전 내용이 없는 것을 보고 희는 제목의 ‘늦음’이 적어도 한 달 이상 되었다는 걸 그때야 알아차렸다. 정말 급한 일이었다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재차 독촉하는 메일을 희가 보냈을 것이다. 희는 그 메일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원칙대로라면 쓰레기통을 바로 비워야 했지만, 알 수 없는 찜찜함에 희는 ‘1’이 표시된 쓰레기통을 그대로 두었다. 메일의 출처가 떠오른 건 그날 점심시간이었다. 팀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칠 즈음 희는 오전에 왔던 의문의 메일을 대화 소재로 꺼냈다. 아무래도 신종 피싱 수법인 것 같다는 희의 말에, 팀원 막내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맞을 거라고 맞장구쳤다. 막내도 몇 달 전 이런 식의 피싱을 당했었더랬다. 자신이 ‘신체 포기자’인데 ‘자원소비세’가 독촉 메일이 자꾸 온다는 항의 메일이었다. 너무나도 옴 직한 내용의 메일이었기에, 막내는 의심 없이 답장했는데 머지않아 욕설이 가득 담긴 메일이 도착했다. 자원소비세를 내지 않기 위해 신체까지 포기했는데 독촉 메일을 받았다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고 공무원들의 안일함과 무능함을 정치 스트리머들에게 알릴 거라는 협박과 함께 이 사태를 막고 싶으면 개인 메일로 답장하는 끝말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개인 메일로 답장했느냐며, 동기가 묻자 막내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스트리머들에게 잘못 걸리면 안
- 관리자
- 2025-11-01
미라의 바다 유영은 0 참 까맣고 짧다. 정숙은 갓 태어난 미라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 말을 생각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너 꼭···, 하면서 말을 고르던 정숙은 드디어 딱 맞는 말을 찾아냈다. 너 꼭 미라 같구나! 시간이 갈수록 검고 바삭바삭해지는, 살점이 까맣고 얇은 조각이 되어 손을 대면 후두두 떨어져 나가는 미라. 그렇게 미라는 미라가 됐다. 미라라니, 잔인한 이름이라고 언젠가 지희는 말했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였다. 미라가 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정숙은 그때 미라를 보고 그러니까 너 꼭···, 시체 같구나! 외칠 뻔했으므로. 시체보다는 미라가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시체는 완전히 끝난 거지만, 미라는 이어진다. 미라는 평생 검었으나 열여섯 살부터 더 이상 짧지는 않았다. 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열네 살까지 백사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던 미라는 열다섯 살, 열여섯 살, 두 해 동안 삼십 센티가 넘게 컸다. 하룻밤 새 일 센티가 자랄 때도 있었다. 그 시기 미라는 아침마다 갈색 개털 무덤을 빠져나와 똑바로 서서 양팔과 다리를 쭈욱 뻗고 그 끝의 손과 발을 쳐다봤다. 손과 발은 미라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팔과 다리는 길고 가늘어졌다. 부슬부슬한 갈색 털이 꼭 같은 개 세 마리가 아침마다 가늘어지는 미라의 발목을 핥았다. 미라는 키가 자라고 난 후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자란 팔다리의 피부가 얇아지다 못해 모두 벗겨져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내리꽂듯 떨어지는 소나기, 동네 뒷골목의 쓰레기 냄새, 더위, 추위, 바람, 햇살, 살에 닿는 모든 것이 따가워서 마당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엄마. 정숙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라가 집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어미 새가 되는 것은 정숙의 오랜 꿈이었다. 정숙은 월, 수, 금요일에는 17층짜리 오피스 건물에서, 화, 목, 토요일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청소일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갔다가 두 시쯤 대낮의 길을 걸어 미라가 개들과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며, 정숙은 자신이 둥지로 돌아가는 어미 새라고 생각했다. 아기 새들이 바글바글 들어 찬 둥지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목젖이 보이게 입을 벌리고 삐악삐악 울며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라를 위해 정숙은 퇴근할 때마다 집 앞 빵집에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사 갔다. 비슷하게 생긴 조각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조각을 고르는 시간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미라는 크림만 떠서 먹었다. 딸기와 빵은 흙 마당에 던져두면 가장 날쌘 개들이 달려와 먹어 치웠다. 잠깐, 그 애들 이름이 뭐였지? 몽글이, 구름이, 별이···. 미라는 매일 부대끼는 개들의 이름을 헷갈렸다. 미라의 개들이 아니라 모두 정숙의 개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숙의 개들은 처음에는 아홉 마리였다가 곧 서른세 마리, 스물여덟 마리, 마흔두 마리, 마흔
- 관리자
- 2025-11-01
굴은 구르지 않는 돌 함윤이 함윤이의 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위한 사운드트랙 ⓒ 이해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영어 속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 두보의 시 「팔전도」 중 그 동굴에 관한 말 중 열에 여덟은 거짓이다. 내가 사실을 알려 주겠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을 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걸 얘기하려 한다. 동굴은 2019년 7월 말, 뼈까지 침식되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장차 미술관이 될 부지를 측량하던 일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미술관을 ㅂ기업의 새로운 문화적 간판으로 삼고자 한 용 회장은 동굴의 소식을 듣고 긴긴 고민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을 나는 어쨌거나 지지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들인 광막한 땅에 난 균열의 시작점처럼 보이던 공동(空洞)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곧 동굴을 개조한 미술관 ‘별관’을 만든다는 소식이 ㅂ기업 산하 문화재단에 퍼졌다. 당시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느낀 암담함이야 추측할 수 있을 뿐, 여기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별관 설립을 곁들인 공사가 시작된 2020년에는 모두가 알 전염병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열을 앓았고, 연달아 기침했으며, 멍한 얼굴로 집안에 갇혀 있었다. 한번 몸에 깃든 병증은 다른 몸들로 옮겨 다녔다. 죄지은 마음이 곳곳에 퍼졌다. 용 회장은 늘그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시기를 주름잡을 지렛대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여러 겹의 우연에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의 교차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려 지금이야말로 별관의 공사를 진척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차피 동굴을 다듬는 작업자들은 모두 두터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산업용 방진 마스크가 코비드 바이러스를 막기에 적절치 않다는 연구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여름의 굴속에서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해도 용 회장은 그저 밀어붙였다. 시대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어도 공사장 인부들은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인부들은 매일 땀 흘리고 번갈아 기침하며 동굴을 파고 들어갔다. 굴은 외부의 빛과 습기 속으로 서서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4년 후에야 이 흐름에 끼어들었다. 전염병이 지나가고, 지나갔다, 는 표현과 상관없이 외상과 내상을 받은 이들이 남고, 무수한 마스크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우리가 모를 곳에 묻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의 예술지원사업에 모두 떨어졌다. 국가나 서울시, 민간이 운영하는 지원사업의 선정자 목록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각종 웹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뒤늦게라도 창작자를 모집하거나 후원한다는 재단 또는 기관의 공고를, 아니면 카메라를 다룰 줄만 알아도 곧장 일자리를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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