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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뫼의 방

  • 작성일 2025-10-01

   한뫼의 방


김병운


   1.


   준일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산호에게서 지난주 이사를 마친 한뫼 어머니 얘기를 듣는다. 삼십삼 년 가까이 한집에서 꾸려 온 살림을 옮기는 것이라 짐이 어마무시했다고, 웬만큼 추리고 나누고 버렸는데도 많아서 결국 1.5톤 트럭 다섯 대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잘은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니었겠구나 싶다.

   산호에 따르면 이사 당일은 순조로웠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으나 날씨는 줄곧 흐리기만 했고, 이주 일자 막바지까지 버티느라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도 어머니는 의외로 담담했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다. 이사비에 용돈까지 얹어 주며 고맙다던 어머니에게서 분실 신고가 잇따랐으니까. 어머니는 찾는 게 안 보인다 싶으면 곧장 산호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하는 모양이었다. 포장 이사이긴 했으나 애초에 남이 정리해 줄 수 있는 성격의 살림이 아니어서 일단 되는 대로 욱여넣게 됐는데, 어머니 입장에서는 뭐가 어디에 어떻게 들어 있는지를 몰라 애먹는 상황이었다.

   어제는 슈퍼집 여자가 선물해 주었다는 산토리니 마그넷, 그제는 십수 년 전 외상 대신 받았다는 시바스 리갈 양주 세 병, 엊그제는 당장 입으려고 보자기에 따로 싸 둔 여름 옷가지. 산호는 손가락을 접어 가며 분실 품목을 열거하더니, 지난 엿새 동안 단 하루도 그냥 넘어간 날이 없다며 질린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고는 다행히 오늘 신고 건을 제외하고는 전부 찾았다며 안도한다.

   오늘은 뭔데?

   신발.

   신발?

   어, 어머니 운동화. 한뫼가 사 준 거라 아낀다고 몇 번 신지도 않은 건데 아무래도 그 집에 두고 온 것 같다고. 혹시 모르니 시간 날 때 가서 확인해 줄 수 있느냐고.

   너무하시네.

   그지, 너무하시지.

   산호는 두 해 전 애인인 영근 씨와 함께 이사 일을 시작했는데, 주로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 같은 소형 가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이나 요즘에는 팀을 짜 큰 이사도 척척 해내는 중이다. 단골도 적지 않고 주력 플랫폼 평점 또한 5점 만점에 4.98점을 기록하고 있어 이제는 웬만큼 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게 산호의 자평이다. 최근 한 달간은 한뫼네 집뿐만 아니라 그 동네의 여러 집 이사를 도맡아 진행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바쁜지 지난주에는 산호답지 않게 만나기로 한 당일 점심에 약속을 파투 내기도 했다.

   혹시 다른 집 이사도 이렇게까지 AS가 되느냐는 내 물음에 살포시 웃어 보이던 산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 어머님이 말이야, 하면서 말머리를 돌린다.

   한번 놀러 오라고 하시네. 

   나?

   다 같이. 준일이도 지금 들어와 있다 말씀드렸더니 집들이 겸 보면 좋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준일이 오면 시간을 맞춰 보자고 대답한다. 준일이 일러 준 출국 일자가 당장 다음 주이기도 하거니와 준일이 한뫼 어머니를 뵙는 건 내켜 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건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일단 준일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준일은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카페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돌아보나 준일이 아니고, 전화와 카톡 모두 응답하지 않는다. 어느덧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 있다. 

   나는 준일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데, 산호는 또 그렇지가 않은지 태연하다. 오늘 지각은 지난주 자신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한 것에 대한 준일의 작은 응징이라는 것이다. 자칭 준일 전문가인 산호는 이후에 준일이 깜빡 잠들었다는 식으로 둘러댈 거라 예상하고, 어쩌면 지금도 근처에서 적당한 등장 시점을 가늠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러고는 자기 말에 신빙성을 더하려는 듯 두 달여 전 청계천 베를린 광장 인근에서 준일을 목격한 얘기를 다시 꺼낸다. 삼일빌딩에서 명동성당 사거리 방향으로 올라가다 준일을 봤다고, 반대쪽에서 걸어 내려오는 익숙한 얼굴은 분명히 준일이었다고. 불과 열흘 전에, 그것도 팔 년 만에 귀국했다는 준일을 그보다 한참 전에 봤다니‧‧‧. 지난번 통화로 전해 들었을 때도 이상하다 싶었으나 얼굴을 마주하고 들어도 이상한 건 매한가지다. 차 안에서 스치듯 본 거면 착각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내 말에 산호는 오늘도 단호하다.

   내가 설마 걔를 잘못 보겠냐. 딴 사람이라면 몰라도 준일이는 아니지. 

   잠시 후 산호가 준일이 오든 말든 일단 뭐라도 먹자며 시간을 확인하고, 우리는 자리를 옮기기 전 준일에게 한 번 더 연락해 본다. 그리고 당장 생존을 알리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라는 내 채근이 먹힌 건지, 아니면 산호의 말마따나 이쯤 하면 됐다 싶은 타이밍이 된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준일에게서 여러 개의 답장이 연이어 온다.

   [미안 지금 택시 탐 ㅠㅠ]

   [미쳤나 봐 잠깐 눈 붙인다는 게 지금 일어났음]

   [아직도 시차 적응이 안 되네 빨리 갈게 ㅠㅠ]


*


   우리 네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두 해를 한 반에서 보냈다. 준일과 한뫼는 중학교 때부터 줄곧 가까웠고, 준일과 산호는 1학년 때 같은 반, 한뫼와 산호는 반은 달랐으나 준일의 소개로 함께 어울려 친분이 있었다. 나는 먼저 친해진 셋으로부터 초대와 승인을 받은 경우였다. 무리 짓기가 이루어지는 학기 초, 나는 인근 교회 목사 아들이 이끄는 무리와 한때 이름난 아역배우였던 아이가 이끄는 무리 사이에서 방황 중이었는데, 어느 날 세 사람이 다가와 우매한 자여 너는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노라, 하고 일깨우듯 손을 내밀어 주었다.

   체육 시간이 되면 운동장보다는 축대나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는 아이들, 땡볕 아래서 공을 쫓아다니는 급우들을 불가해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이들, 베스티즈에 올라온 연예인 얘기와 버디버디로 주고받았던 웃긴 썰을 재탕 삼탕하며 비밀스럽게 웃는 아이들, 짬이 나면 노래방으로 달려가 이효리, 보아, 이수영, 장나라를 선곡하고 쥬얼리, 슈가, 샤크라 안무를 따라 하던 아이들. 그게 우리였다.

   어떻게 한 반에 이쪽이 둘이나 셋도 아니고 넷이나 있었는지, 어떻게 우리 넷이 한 해도 아니고 두 해나 같은 반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희박한 일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몰려다니기에 바빴다. 함께여야만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기에 쉬는 시간마다 서로를 찾았고, 함께 있을 때만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늦췄다. 스스로를 게이로 정체화하거나 그 사실을 공유한 건 그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때부터 우리의 미래가 세상이 권장하는 각본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을, 경로 이탈과 오작동의 경고등이 뜰 때마다 서로의 삶을 참조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던 게 아닐까 싶다.


*


   그 시절 우리에게는 준일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어느 무리나 그렇듯 우리에게도 구심점은 있었고 그건 언제나 준일이었다. 준일은 우리 중 유일하게 전교권에 들 정도로 높은 성적을 유지하는 데다 교우 관계 또한 원만해 인기가 있었다. 그런 준일의 약점이라 하면 중학교 시절 한뫼와 사귄다는 소문으로 한차례 내홍을 겪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산호가 가세하고 그 이후에 나까지 더해지자 그런 의혹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의 준일이 이미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러한 노력에는 효과가 있었다.

   중학교 시절 준일의 단짝이 한뫼였다면, 고등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는 산호였다. 산호를 챙기는 준일의 모습에는 지금 생각해도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산호는 가끔 자신의 생활환경을 숨기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준일은 그런 산호를 위해 항상 여벌의 수저와 젓가락, 체육복을 가지고 다녔고, 산호는 그것이 호의든 동정이든 준일에게서 비롯된 것이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공고해 보였고, 어쩌다 두 사람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해서 그 자리를 다른 누구에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늘 그들 곁에 있었던 한뫼에게조차도.

   따라서 내가 나도 모르게 이루어진 다면적 심사를 통과해 무리의 일원이 되었을 때 세 사람 중 나를 가장 반겼던 건 한뫼였다. 한뫼는 잃어버린 조각을 드디어 찾은 것처럼 자꾸 내 곁으로 다가왔고, 우리 두 사람이 준일과 산호만큼 돈독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내게 헌신적이었다. 나는 그런 한뫼가 다소 부담스럽기는 해도 싫지는 않았는데, 누군가와 특별해지고 싶은 갈망을 나 역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한뫼에게 너는 왜 나여야 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단둘이 있어도 한뫼가 준일과 산호 얘기만 해 왠지 넷이 함께 있는 것만 같았던 어느 날, 우리가 준일과 산호의 관계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별로이기도 하고, 한뫼에게는 누구든 상관없는 게 아닌가 하는 삐딱한 마음이 들기도 해 투정을 부리듯 건넨 질문이었다.

   그때 한뫼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너여야 하느냐니 그게 무슨 뜻이냐며 설명을 바랐고 설명은 또 원치 않는 나를 어려워하며 웃어넘기려고만 했다. 한뫼는 진지해지는 건 참을 수가 없는 것처럼 농담으로 숨어 버리곤 했는데, 그래도 그에 대한 한뫼의 진심 어린 대답을 아예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러니까 우리가 더는 우리가 아니게 된 시절에 한뫼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으니까.

   준일이 걔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어. 같이 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한순간에 나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거든. 근데 너는 안 그랬어. 너랑 있을 때 나는 그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너한테 고마웠어.



   2.


   오랜만에 마주한 준일은 예전의 마른 몸으로 돌아온 듯하다. 그간 생존을 위해 죽기 살기로 키웠다던 근육은 다 빠져 버린 것 같고, 살짝 처진 어깨에 구부정한 자세까지 더해져 입고 있는 셔츠가 헐렁하게 남아 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 고생이라는데 안색을 보아하니 단지 시차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염려스러운 시선이 처음은 아닌지 준일이 어디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니라며 웃어 보이고, 눈치껏 걱정은 말아야겠다 싶은지 산호가 이제는 제법 교포 느낌이 난다는 말로 화제를 돌린다.

   교포? 발음이 어눌해졌나?

   그런 건 아니고 뭔가 분위기가‧‧‧ 때깔이 좀 다르달까.

   산호가 말하는 교포 느낌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준일에게는 이방인의 분위기가 흐른다. 우리가 나고 자란 동네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이 가게를 둘러보는 표정에도, 떡과 어묵과 쫄면이 검붉은 소스와 함께 끓어오르는 냄비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과장된 감상이 묻어 있다. 교환학생 시절까지 더하면 올해로 미국 생활이 십오 년째라는데, 결혼을 기점으로는 시민권자가 됐으므로 이제 준일에게 이곳은 더욱 아련하고 그리운 곳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다 익은 떡볶이를 앞접시에 옮겨 담으며 근황을 나눈다. 준일은 부업으로 하는 수학 과외가 잘돼 한인이 많은 퀸즈 쪽에 아예 학원을 차려 볼까 고민 중이라 하고, 산호는 지금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사다리차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 모두 열심이구나 싶어 나도 내 일상 가운데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부분만을 꺼내 놓게 된다. 작년 이맘때쯤 이직한 회사와 얼마 전 육 년을 꽉 채우게 된 연애, 그리고 이번 계약 기간이 끝나면 함께 살기로 한 약속까지. 어째 말하고 보니 실제보다 더욱 그럴듯하게 들렸겠다 싶지만, 준일에게는 그랬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했을 때 대화는 뚝 끊기고, 우리는 한동안 먹는 데 집중하는 척을 한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 얘기를 하고 나니 빈자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점점 무거워지는 게 정적인지, 아니면 한뫼 생각인지 모르겠다 싶어지는 찰나,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2 때 담임 얼굴이 떠오른다. 모두가 싫어했던 담임 얘기라면 분위기 전환용으로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다.

   담임을 봤다고?

   준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보이고, 나는 담임이 무려 교장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내 이름은 끝내 기억하지 못하는 낌새였다고 전한다.

   맙소사, 교장이라니. 학교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는데.

   개새끼였지.

   나는 대답한 다음 산호 쪽으로 눈길을 던진다. 담임은 평소에는 온화하나 한 번씩 눈이 뒤집히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의 무자비한 폭력성에 희생된 피해자 중에는 산호도 있었다. 수업 도중 뭔가를 노트에 끄적이다 호명을 놓친 것이 화근이었다. 절대로 들키면 안 되는 내용이었는지 그때 산호는 당장 가지고 나오라는 담임에게 항명하다 돌연 노트를 찢어 삼켰는데, 그 행동이 담임을 더욱 자극하는 바람에 결국 고막이 찢어질 때까지 맞았다. 그때는 죽지만 않으면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시절이었다.

   그 대목에서 나는 산호가 한마디 거들어 주기를 기다린다. 언젠가 산호로부터 요즘도 몸이 안 좋을 때면 담임에게 지압 슬리퍼로 맞는 꿈을 꾼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으므로. 하지만 산호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하려다 말면서 입술을 비죽이기만 한다. 아무래도 한뫼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싶고 역시나 머지않아 한뫼 이름이 나온다.

   이건 한뫼가 해 준 얘긴데‧‧‧ 오륙 년쯤 됐을 거야. 어플로 어떤 애를 만났다고 하더라고.

   누가? 한뫼가?

   어, 한뫼가. 상대는 군인인가 대학생인가 그랬고 부모님 여행으로 집이 비었다 해서 갔대. 여기 옆에 하이츠 아파트였을 거야. 근데 다 끝나고 나오는데 거실 한편에 걸린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거지. 어디서 많이 봤다 싶은 아저씨가 근엄한 자태로 그 안에 있었고‧‧‧.

   ‧‧‧.

   ‧‧‧.

   누구? 담임?

   내가 입 모양으로 묻자 산호가 잇새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끄덕인다. 

   미친, 아들이랑 그랬다고? 이쪽인 거야?

   아마도? 근데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쌤통이다 싶더라고. 앞으로 마음고생깨나 할 텐데 좀 안됐다 싶기도 하고. 

   산호는 그때부터 원한은 눈 녹듯 사라졌다며 조금은 연극적인 한숨을 내쉬고, 나는 이 무슨 막장 게이 드라마에 도시 게이 괴담 같은 전개인가 싶어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때 잠자코 있던 준일이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르다 뾰족한 것에 찔린 것처럼 갑자기 빵 터지더니 다행이네, 다행이야, 한다.

   뭐가?

   한뫼 말이야. 나는 한뫼가‧‧‧ 누굴 만난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근데 나한테만 안 한 거였네. 걔도 할 거 다 하고 살았던 거네. 왠지 마음이 놓인다.

   ‧‧‧.

   그 순간 나는 한뫼가 산호에게 들려주었다는 담임 아들 이야기가 거짓임을 직감하지만, 그건 순전히 산호를 위해서, 산호의 환심을 사려고 한뫼가 꾸며 낸 이야기임을 거의 확신하지만,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이제 와 그건 한뫼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으니까. 한뫼가 산호와 준일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고 또 남기를 바랐는지 나는 알 수가 없으니까. 한뫼가 실재한 적도 없는 일을 잘도 지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그럴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은 거짓말로 누군가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


   우리는 학창 시절을 지나자마자 와해됐다. 한때는 대신 죽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으나 졸업을 기점으로 점점 소홀해지는 관계의 전형을 피하지 못했고, 학교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실은 서로를 지긋지긋해하며 견디고 있었던 것처럼 빠르게 흩어졌다. 

   내 판단이 맞다면 우리로부터 가장 먼저 돌아선 건 준일이었다. 복수 전공에 동아리 활동, 어학 자격증 공부, 인턴십까지 모두 해내느라 준일은 항상 바빴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과 자기 개발에 대한 의지 속에서 우리에게는 흥미를 잃은 듯했다. 준일은 미국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을 다녀온 이후로 그곳의 자유로운 문화에 매료됐는데,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유학 준비에 매진하는가 싶더니 결국 학부 졸업과 동시에 탈한국에 성공했다.

   산호는 우리 중 가장 부침 없이 게이 커뮤니티에 안착한 케이스였다. 집안, 학벌, 재력보다는 얼굴, 키, 몸매, 사이즈가 매력 자본의 핵심인 이쪽 세계에서 산호는 수요가 많았고, 클럽과 술집에서 만나 새로이 무리를 이룬 이쪽 친구들 역시 많았다. 산호는 준일처럼 우리를 대하는 온도가 급격히 달라진 건 아니었으나 만나도 피곤해 보일 때가 많았는데, 사귀는 남자만큼이나 하는 일도 자주 바뀌어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준일과 산호가 각자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부단히 나아갔다면, 한뫼와 나는 모든 것에서 늦된 이십 대를 보냈다. 부모님 집을 떠나지 못했고,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찾지 못했으며, 연애다운 연애는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산호를 따라서 서너 번 클럽에 가 보기도 하고 술 번개에 나가 보기도 했으나, 어쩌면 나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놓지 못했다. 선섹후사가 일반화되어 있는 이쪽 생태계에 나는 영영 적응하지 못할 것만 같았고, 그래서인지 남자 얘기나 정체성 얘기는 일절 하지 않는 한뫼가 오히려 편했다. 한뫼는 여전히 학창 시절에 머물러 있었고, 만나면 노래방과 피자헛, 레드망고로 이어지는 코스를 돌다 수순처럼 준일과 산호에게 연락했다.

   한번은 억지로 노래방으로 불려 나온 준일이 너희는 아직도 이러고 사느냐며 성질을 낸 적도 있었는데, 한뫼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아니, 실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순순히 사과하며 준일의 마음을 되돌리려 노력했다. 그러고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우리 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자인하듯 준일을 다시 찾았다.

   얘는 벨도 없는 건가. 은근히도 아니고 대놓고 싫다는데도 괜찮은 건가. 나는 준일에 한해 어김없이 아쉬운 사람이 되는 한뫼가 답답했고, 우리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한뫼는 물론, 그런 한뫼와 어울리는 나까지도 얕잡는 듯한 준일에게 서서히 정을 뗐다. 그리고 우리의 이십 대가 끝날 무렵에는 준일이 이제 과거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뫼는 아니었을 테지만 나는 그랬다.


*


   그래서일까. 몇 해 뒤 휴가차 잠시 귀국한 준일이 남자 친구인 존을 소개해 주고 싶다며 우리를 한자리로 불러 모았을 때 나는 좀 삐딱했다. 우리가 서로의 애인을 보여 줄 만큼 친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준일을 향한 해묵은 감정은 모두 부차적으로 되어 버렸는데, 왜냐하면 준일이 존과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자랑하며 그해 가을로 예정되어 있는 결혼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동성혼이 미국의 모든 주에서 합법화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게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구나. 남의 나라 일이기는 해도 남의 일인 것만은 아니구나. 우리는 한동안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고, 준일이 존에게 프러포즈를 받는 사진과 준일이 존의 부모님과 누나, 형 가족과 함께 추수 감사절을 보내는 사진을 천천히 넘겨보며 조금씩 현실감을 되찾았다. 이윽고 벅차오른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 듯 산호가 눈물을 터뜨렸고, 울긴 왜 우느냐며 산호를 타박하던 준일 역시 덩달아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한뫼는 준일을 한껏 축하하면서도 그늘져 보였는데, 그건 아마도 준일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궤도에 진입했다는 실감 때문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결혼이라는 이벤트는 준일과 우리 사이에 국경만큼 길고 높은 벽을 세우며 어떤 결절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했으니까. 

   그날 우리는 2차에 3차까지 자리를 이어 가며 준일과 존, 두 사람이 지난 오 년에 걸쳐 서로를 확신하게 된 여정을 흥미진진하게 전해 들었다. 존이 준일보다 열여섯 살이나 많다는 것과 이제껏 만났던 모든 사람이 아시아인이었음을 자랑스레 얘기하던 것이 내게는 왠지 모를 불씨처럼 감지되기도 했지만, 그 역시도 두 사람이 주고받는 애틋한 시선과 과감한 애정 표현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는 것 같았다. 준일은 행복해 보였고, 아마도 얼마 뒤에 한뫼가 전화를 걸어와 수상한 소리를 하기 전까지는 실제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한뫼가 긴히 상의할 게 있다며 산호와 나를 소집한 건 그날로부터 일주일쯤 뒤였다. 준일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지 이삼일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한뫼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그날 존이 자기한테 미심쩍은 행동을 했다고. 고깃집에서는 괜찮았으나 이자카야로 넘어간 다음부터 계속 테이블 밑에서 자기 발을 건드렸는데, 한두 번이면 실수겠거니 했겠지만 여러 번, 그것도 나중에는 몇 초간 지그시 밟으며 빤히 쳐다보기까지 했다고.

   모르겠어. 많이 마셨으니까. 나도 그 사람도, 아니, 그날은 우리 다 그랬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그랬다는 게 안 믿긴다는 거 아는데, 그래서 나도 내가 무슨 착각한 건가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닌 것 같아. 그건 착각일 수가 없는 것 같아. 어때? 나한테만 그랬어?

   한뫼는 준일에게 알려야 할지 말지 고민이라며 의견을 구했고, 산호와 나는 충격과 혼란 속에서 마치 이재를 따지듯 언쟁을 벌이다 그래도 알리는 것이 낫다는 데 동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준일이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들이니까. 준일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친구 된 도리일 테니까. 준일은 언제나 우리 중 가장 지혜롭고 현명했으니까.

   그러나 준일은 한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준일은 존의 결백과 더불어 한뫼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한뫼의 집착과 망상, 자격지심, 열등감, 질투심을 폭로하듯 늘어놓으며 그동안 자신이 한뫼로 인해 얼마나 큰 정신적 피해를 감수해 왔는지를 토로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절교를 선언했다. 어디서든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이런 식으로 인연이 다해 유감이라고도 했다.



   3.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부터 우리는 한뫼 이야기를 좀 더 편히 한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한뫼 쪽으로는 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뻗댔으나, 어색함이 가시자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가 하나둘 튀어나온다. 얼마쯤 지났을까. 떡볶이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만 맥주는 물처럼 쉽게 넘기던 준일이 혹시 한뫼가 꿈에 나온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한뫼 꿈이라‧‧‧.

   산호와 나는 얼마간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별 소득은 없다. 원체 종잡을 수 없는 개꿈만 많이 꾼다는 산호도, 깊은 잠을 자는 것도 아니면서 꿈은 잘 꾸지 않는 나도 아직은 한뫼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준일은 다르다. 준일의 꿈에는 한뫼가 이따금 출몰하고 심지어 어떤 꿈은 여러 번 되풀이되기까지 한다.

   겨울밤이고 한뫼와 나는 거리에 있어.

   이윽고 준일이 며칠 전에도 꿨다는 한뫼 꿈을 얘기해 준다.

   둘 다 좀 취한 것 같고 아마도 집에 가는 중인 것 같아. 근데 앞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게 한뫼가 자꾸 신발을 벗는 거야. 그러더니 나중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막 울어요.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확신에 차 끼어든다. 그건 꿈이 아니라고. 실제로 벌어진 일이고 그때 우리 넷은 함께 있었다고.

   꿈이 아니라고?

   준일이 이마에 이랑이 패도록 찡그리며 묻고,

   어,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다른 날의 한뫼라면 몰라도 그날의 한뫼만큼은 한낱 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졸업식을 무사히 마친 우리는 우리만의 조촐한 파티를 위해 저녁 무렵 다시 모인다. 무슨 날이 돌아올 때마다 즐겨 찾던 시장 끝 곱창집이고, 그날은 우리 테이블 위에도 소주와 맥주가 당당히 올라와 있다.

   그 밤 한뫼는 너무 빨리 마시고 너무 빨리 취한다. 그날따라 유독 말수가 적고 침울해 보이더만 어느 기점부터는 펑펑 울기 시작한다. 맥락을 설명해 보이겠다는 열의도 적당히 하다 말겠다는 의지도 없어 우리는 한뫼에게 아주 고약한 주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하지만 한뫼의 기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게 밖으로 나선 다음부터는 자꾸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으며 귀가를 완강히 거부하기 때문에. 오른쪽을 신겨 놓으면 왼쪽을 벗고 다시 왼쪽을 신겨 놓으면 오른쪽을 벗으며 우리를 애먹이기 때문에. 그 순간 우리 중 누군가가 더는 봐줄 수가 없다는 듯이 한뫼의 운동화 한쪽을 걷어차 버리고, 운동화는 미끄러져 굴러가듯 육 차선 도로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내 달려오던 차바퀴에 짓밟히다 중앙선을 넘어가 버린다.

   동시에 굳어 버린 표정. 순간적으로 번지는 당혹감. 엇갈리는 눈빛.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로로 뛰어든다. 달려오는 차를 막아서고, 기함하는 운전자에게 사과하고, 도로 위에 나뒹구는 운동화를 낚아챈다. 그리고 무사히 반대편 인도에 안착했을 때, 갑자기 긴장이 풀리며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을 때 우리는 그제야 곁에 한뫼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한뫼를 남겨 두고 우리 셋만 건너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돌아보니 한뫼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고, 우리는 방금 구해 낸 운동화를 머리 높이 흔들어 보이며 소리친다. 한뫼야, 거기에 있어, 우리가 갈 테니까 그대로 있어.

   그날 한뫼는 어째서 그토록 서럽게 울었을까. 뭐가 그렇게 속상하고 아쉬워 생떼를 썼던 걸까. 아니, 한뫼는 어떻게 그렇게 일찌감치 알았던 걸까. 오늘이 지나면 끝이라는 것을, 함께 있어도 그때 그 마음일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우리를 붙잡으려 했던 걸까.

   잠시 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느냐는 내 질문에 두 사람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 술기운에 눈이 좀 풀린 듯한 준일이 아무 생각도 안 한다며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조금은 뚱한 표정이던 산호 역시 마찬가지라는 듯 준일의 동작을 따라 해 보인다. 하지만 할 말이 아예 없지는 않은지 곧이어 산호가 물방울이 맺힌 술잔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말한다.

   나는‧‧‧ 신발 생각.

   신발?

   어, 신발. 

   한뫼 운동화?

   아니, 그거 말고‧‧‧ 어머니 신발.

   아‧‧‧.

   이건 또 무슨 소리냐며 미간을 좁히는 준일과는 달리, 나는 순간 뱃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짧은 웃음소리를 낸다. 평점 4.98점을 유지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구나 싶고, 한뫼 어머니가 이사업체 하나는 제대로 고르셨구나 싶다.

   그때 산호가 싫으면 말아도 된다고 먼저 운을 띄우더니 어색한 미소와 함께 이마를 긁적여 보인다. 그러고는 제법 진지하고도 차분한 눈빛으로 준일과 나를 차례로 바라보며 묻는다. 이따가 가는 길에 한뫼가 살던 집에 들러 보지 않겠느냐고. 여기서 금방이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고.


*


   준일과 한뫼의 절교를 기점으로 나는 한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절교는 두 사람의 일인데 왜 나까지 한뫼와 멀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나는 언제나 한뫼 편이었고 준일에게 한뫼보다 더 큰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한뫼의 거의 모든 면모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만나면 어김없이 어디 게시판에서 보고 들은 허황된 얘기를 퍼 나르는 것도 지겨웠고, 준일과 산호의 SNS를 성실히 염탐하며 비아냥대는 것도 불편했으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더니 연기 학원을 기웃거리고, 다시 엄마 가게 일을 돕는다더니 얼마쯤 뒤에는 그마저 말아 버리는 것도 식상했다. 한뫼는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면서도 하기 싫은 건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여유가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회사 일과 학업, 연애 따위를 핑계 삼았으나, 나중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정성도 없이 한뫼를 피했다. 그리고 한뫼를 향한 내 변심을 합리화하고 싶어지는 날에는 사실 우리 중 한뫼를 가장 먼저 떠나고 싶어 했던 건 나였다며 억울해했다. 내가 준일과 산호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저항감 때문에 한뫼의 곁을 지켰다고 생각했고, 그 둘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한뫼를 감당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내가 한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자기혐오였던 것 같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도 학창 시절의 인연에 연연하는 내가 한심해서, 서른이 되도록 나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사랑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내가 환멸 나서 나는 한뫼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눈에는 한뫼의 삶과 내 삶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한뫼가 그대로 되비추는 것 같았으니까. 그 시기의 나는 내가 나인 걸 어쩌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것뿐인데, 내가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한뫼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던 것뿐인데, 나는 한뫼 때문에 내가 공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뫼가 너무 길어진 내 유년이자 너무 비대해진 내 과거여서, 한뫼를 그만 끊어 내야만 내가 어른에 가까운 무엇이 되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한뫼는 몸과 마음이 모두 무너져 있었다. 내가 동네를 떠나고 이후에 팬데믹까지 장기화되면서 직접 얼굴을 본 건 햇수로 오 년 만이었는데, 얼굴도 체형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산호로부터 얼마 전 동네에서 마주친 한뫼가 자기를 모르는 척하더라는 얘기를 먼저 전해 들었음에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은 피할 수 없었고,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한뫼에게 거듭 사과하기도 했다.

   그 정도야? 봉지 쓸까?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나도 알거든.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내 물음에 한뫼는 맛있는 게 너무 많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좀 더 얘기를 들어 보니 복용 중인 약물의 부작용인 듯했다. 알코올과 수면 문제로 치료 중이라 했고, 약물이 뇌의 식욕 조절 중추에 영향을 주어 새벽에 폭식하는 식습관이 생겼다고도 했다. 낮밤이 바뀌고 원인 미상의 근육통까지 더해져 집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게 한뫼의 요즘이었다.

   한뫼는 그날따라 자기 얘기를 많이 했다. 한뫼가 내게 크게 달라졌다는 인상을 주었던 건 비단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한뫼는 그동안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게 많다고 했다. 모두가 당연하게 해내는 것들이 왜 자신은 고통스럽기만 한 건지, 어째서 익숙해지지도 수월해지지도 않는 건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는 대뜸 외롭다고 했다.

   호준아, 나는 너무 외롭다. 너무 외로워서 내가 무덤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 순간 나는 날카로운 못이 가슴팍을 밀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고, 그 말이 내 안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끄집어내는 것만 같아서 한뫼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제대로 만날 준비가 된 것 같았고, 비로소 서로에게 진실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뫼가 점점 더 자신의 아래로 내려가 길어 낸 이야기는 나를 다시 멈춰 세웠다.

   지난번에 너가 그랬잖아. 이제 다른 애들 얘기는 그만하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고.

   내가‧‧‧ 그랬나?

   나는 순간 머리끝이 쭈뼛 솟을 정도로 민망했으나, 이어지는 말들이 빚어내는 긴장으로 내 감정에 취할 수도 없었다. 눈 딱 감고 열 명만 만나보라는 둥, 그래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둥, 내가 몇 해 전 한뫼에게 조언이랍시고 했다는 그 말들이 무척 잔인하고 주제넘게 들렸다.

   한뫼는 다른 사람 말은 몰라도 호준이 너 말은 내가 잘 듣지 않느냐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얼마 전 그 열 명을 다 채웠다고 했다. 그걸 채우려고 여든 여덟 번, 아니, 여든 아홉 번 거절당했다고 했고, 그러는 동안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결론으로 내달았다. 나는 고장 난 사람이라고. 애초에 불량이고 불능이어서 누구도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늘 먼저 버려지고 남겨졌던 거라고.

    거기서부터 한뫼는 내 말은 듣지도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문도 동의할 수 없다는 항변도 제발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는 회유도 그 순간의 한뫼에게는 모두 무용했다. 자신이 수년에 걸쳐 가까스로 도달한 결론에 내가 함부로 끼어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가더라. 그때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호준아, 나는 있잖아, 걔를 망치고 싶었던 거야. 위하는 척했지만 실은 아니었던 거야. 왜냐면 오랫동안 기다렸거든. 걔가 구멍 나는 순간을, 나처럼 바람이 다 빠지고 쪼그라들어서 결국 멈추게 되는 순간을. 나는 그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던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좀 얘기해 봐.

   나는 한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못 알아들은 척했다. 그 와중에도 구체적인 맥락과 친절한 설명을 요구하며 이 대화를 내 통제 아래 두려고 했다. 하지만 한뫼는 내가 원하는 건 들어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훔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자신이 우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한뫼는 여기서 준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반복해 말했지만 한뫼의 이야기 속에는 어김없이 준일의 이름이 나왔다.

   걔만 아니었으면 나는 이렇게 되지 않았어. 이런 건 다 모르고 살 수 있었어. 사랑이 아니었대. 한 번도 아니었대. 매번 내가 다 봤는데, 그게 나한테는 너무 끔찍하게 소중해서 나는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그건 그냥‧‧‧ 장난이었대. 다들 그렇게 크는 거래. 정말 그래? 너도 그렇게 컸어? 

   ‧‧‧.

   호준아,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내 얘기를 좀 들어 봐. 듣고 싶은 대로 듣지 말고, 너가 어떻게 말할지만 생각하지 말고. 어? 너 듣고 있어?

   ‧‧‧.

   듣고 있냐고.

   그래, 듣고 있어.

   준일이는 문제가 아니야. 걔는 아무 것도 아니야. 문제는 나야. 내가 문제야. 나는 있잖아, 호준아. 잘 있다가도 한 번씩‧‧‧ 망가뜨리고 싶어져. 떨어뜨리고 싶고, 짓밟고 싶고, 부수고 싶어져. 그냥 다 못 쓰게 만들고 싶어져.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런 마음이 뭔지 알겠어? 

   나는 다 안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에는 무조건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한뫼를 진정시킬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래? 그걸 너도 다 알아?

   어, 알아, 한뫼야. 나는 알아. 그러니까─

   근데 어떻게 멀쩡해?

   ‧‧‧뭐?

   다 아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살아? 그걸 아는데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해. 어떻게 그 새끼들처럼 그런 눈으로 나를 봐. 어?

   ‧‧‧.

   나는 있잖아, 남자 좆 빠는 새끼들은 다 뒈졌으면 좋겠어. 나를 변기 취급한 새끼들, 나를 이렇게 만들고, 버리고, 잊고, 우스워하고, 그러고도 잘만 사는 새끼들은 다 죽었으면 좋겠어. 

   그때 나는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떤지 가늠이 되질 않아서, 한뫼를 집어삼킨 분노와 원한에 내가 질려 버렸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이 모든 건 한낱 통과의례일 뿐이고 결국 누구든 다 건너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거기엔 한뫼도 예외일 수 없다고 믿는 것처럼 심상하게 입을 뗐다. 한뫼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내가 아니라고 선을 긋듯 냉정하게, 하지만 네가 외롭지 않길 바라는 내 마음만큼은 진심이라고 강조하듯 다정하게 대답했다.

   한뫼야, 너 잘하고 있어. 그래, 여든아홉까지 했으니까 백까지만 더 참아 봐. 분명히 있어, 너를 사랑하는 사람 있어.

   ‧‧‧있어?

   어, 있어. 다들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만나. 여기에 다른 방법은 없어.



   4.


   한뫼네 집은 창문이 이면도로 쪽으로 나 있는 2층임에도 흡사 지하 같다. 공가 처리가 된 지 이제 일주일이 됐을 뿐이라고 하는데, 그간 환기가 전혀 안 된 탓인지 높은 기온에 발효된 듯한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 깊이 끈적끈적한 곰팡이가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이고,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준일과 산호도 입과 코를 가리며 연신 헛기침을 한다.

   지은 지 삼십오 년이 넘었다는 빌라는 가로가 긴 직사각형 형태다. 좁은 복도를 따라 방 두 개와 화장실이 딸려 있고, 거실과 부엌 옆으로 또 다른 방 하나가 이어진다. 우리는 각자 손에 쥔 휴대전화 불빛을 전등 삼아 집안을 둘러본다. 창밖에 가로등이 하나 서 있으나 새어 들어오는 빛은 미미하고, 서로의 숨소리와 발소리가 앞다투듯 이어지나 어쩐지 세상과 단절된 듯 고요하다.

   산호가 얼른 신발을 찾아보겠다며 집안을 살피는 동안, 준일과 나는 한뫼의 방으로 들어선다. 생각해 보니 한뫼는 단 한 번도 내게 자기 방을 보여 준 적이 없다. 우리 중 한뫼의 초대를 받은 사람은 준일이 유일하고, 준일은 이 방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던 중학교 시절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이듯 회상한다. 만화책과 판타지 소설이 되는 대로 어지럽게 쌓여 있던 책상, 카세트테이프와 음악 CD, 미니 컴포넌트를 진열해 두었던 서랍장, 접히지 않은 이불과 벗어 둔 교복이 늘상 한쪽 끝에 구겨져 있던 침대, 그리고 개봉 영화 전단으로 빼곡했던 벽면까지.

   준일에 따르면 중학교 시절 두 사람은 매주 토요일마다 학교를 마치고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일주일 용돈 만 원으로 그 주의 개봉 영화 한 편을 보고 캐러멜 팝콘을 나눠 먹는 게 두 사람의 리츄얼이었고, 관람 후에는 이 방으로 돌아와 극장에서 챙겨 온 전단을 함께 쓴 일기처럼 벽에 붙여 두었다. 명절과 시험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주도 쉬지 않았더니 졸업할 무렵에는 벽면이 온통 전단으로 뒤덮였는데, 그래서인지 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이 방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조금 옅어진 어둠 속에서 준일은 그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벽면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입을 뗐을 때는 그 시절로부터 기나긴 시간을 단숨에 건너뛴다. 

   한뫼가 맞았어.

   ‧‧‧응?

   한뫼가 맞았다고.

   뭐가?

   그 사람은‧‧‧ 쓰레기였어.

   ‧‧‧.

   나는 준일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만 준일은 자기 내부로 물러선 듯 조용해진다. 빈 벽이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그 말이 점점 자신을 옥죄어 오며 호흡을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숨을 깊이 들이쉰다.

   하지만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건 준일만이 아니다. 나는 준일아, 하고 굳이 부르지도 않던 이름을 불러 준일을 내 쪽으로 돌려세우지만, 어둠 속에서도 내게로 정확히 와 닿는 준일의 눈길에 그만 목이 메고 만다.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되묻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며 망연해하는 것 같기도 한 준일의 눈빛에 그만 머릿속이 하얘지고 만다.

   준일아, 너는 왜 그렇게 빨랐어? 뭐가 그렇게 급했어? 한뫼가 항상 널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 널 보면 널 미워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 왜 한 번 돌아봐 주지를 않았어? 나는 그건 준일의 잘못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준일을 탓하고 싶어지는 마음에 어지러워진다. 준일에게 내 지분의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충동이 내 안에서 붕붕 날뛰는 것만 같아 메스꺼워진다.

   이런 내 기분이 한마디 말없이도 모두 전해진 걸까. 아니면 준일을 자극하던 곰팡내가 더욱 역해진 걸까. 그것도 아니면 침묵이 살아 있는 심장처럼 맥동하는 이 방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진 걸까. 그 순간 준일이 입을 틀어막으며 뛰쳐나간다. 뒤따라가 보니 화장실이고, 바닥에 꿇어앉은 준일이 변기를 붙잡은 채로 오늘 저녁 내내 먹은 것을 게워 낸다.

   괜찮아? 밖에 있어도 된다니까.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산호가 준일의 등을 쓸어 주는 사이, 나는 주저하듯 문 옆에 서서 휴대전화 불빛으로 두 사람을 비춘다. 산호가 얘는 왜 이러는 거냐고 되묻듯 나를 올려다보기도 하는데, 나는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손에 들린 불빛을 준일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져갈 뿐이다.

   잠시 후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토악질 소리가 멈추고, 얼굴에 수분이 싹 빠져나간 듯한 준일이 변기 물을 내린다. 그러고는 그제야 민망함이 엄습하는지 멋쩍게 입술을 비틀며 말한다.

   아우, 안 되겠다. 더는 못 하겠다. 나 먼저 가 봐도 되지?

 

*


   준일을 태운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골목에는 다시금 익숙한 어둠이 내려앉는다. 후미등의 붉은 잔상은 빠르게 걷히고 희미하게 이어지던 엔진 소리와 바퀴 소리도 이내 밤의 적막 속으로 흩어진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준일만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 같고, 조금 전까지 준일이 우리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기이한 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많이 안 좋은 것 같지?

   산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한다. 그래도 얼굴을 보기 잘한 것 같다는 말은 삼키고, 우리에게 다음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은 옅은 한숨과 함께 흘려보낸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서서 한뫼의 집을 올려다본다. 세월에 바래고 삭은 듯한 적갈색 벽돌과 검은 구멍처럼 텅 비어 있는 창문들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한뫼의 방에 시선이 닿았을 때, 이 모든 게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는 생각에 살짝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을 때, 문득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다. 산호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뫼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매일 아침 등굣길에 내가 바로 이 자리에서 한뫼를 기다렸던 이야기. 한뫼가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자신을 향한 내 애정의 크기를 확인해 보려 했던 이야기. 나는 저기 저 창문 뒤에 숨어 나를 지켜보던 한뫼에 대해 말한다. 진작 준비를 다 마치고도 내가 얼마나 기다려 주는지 시험해 보던 한뫼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한뫼는 몰랐겠지만‧‧‧ 여기서 이렇게 올려다보면 다 보였거든. 특히 한겨울에, 해가 나기 전에는 오히려 방 안이 환하니까 커튼 뒤에 서 있는 한뫼 그림자가 다 보이는 거야. 한뫼야, 학교 가자.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딱 오 분만 기다렸어. 차고 다녔던 손목시계로 타이머를 켜고 오 분.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그러고 나서 저기 저 골목 끝까지 걸어가면 한뫼가 어김없이 등 뒤에서 달려오는 거야. 미안해, 빨리 가자, 하면서 내 팔에 자기 팔을 끼우고는 앞장서는 거야. 늦은 건 자기가 아니라 나인 것처럼. 웃기지?

   그 시절 어째서 나는 오 분은 됐으면서 십 분은 안 됐던 걸까. 한뫼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걸 주는 게 내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면서도, 어째서 나는 그토록 재고 따지며 한뫼에게만큼은 기득권이고 싶어 했던 걸까. 한뫼가 간절해 보일수록 외면하고 싶어졌던 내 마음은 무엇이었고, 한뫼가 절박함을 숨기지 못할수록 더욱 냉담해졌던 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 산호가 오래전 한뫼가 그랬던 것처럼 내 팔에 불쑥 자기 팔을 엮어 오고, 나는 그제야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생각을 멈춘다. 갑작스레 전해지는 체온에 어깨와 팔이 경직되었다 풀어지는 걸 느끼며 산호를 바라본다. 하지만 산호는 내 눈을 피하듯 발끝만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는다. 나만큼이나 겸연쩍어 보이는데도, 이런 건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팔짱을 풀지 않는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가늘게 떨려 오는 몸을 지그시 눌러 주듯이, 언제든 파도처럼 다시 밀려들 한뫼 생각에 내가 휩쓸려 가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듯이 도리어 팔에 힘을 준다. 어떻게 감히 한뫼를 그리워할 수 있느냐는 내 안의 목소리로부터 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여기 좀 더 있어도 되지?

   일이 초쯤 뒤에 산호가 묻고, 다시 일이 초쯤 뒤에 나는 대답한다.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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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로 꿰맨 사람 천선란 그녀에게서 답장이 온 건 3개월 만이었다. 답장이 늦었습니다. 그녀에게 여러 차례 메일과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희에게 달랑 저 한 문장 쓰인 메일 제목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희는 로그인된 메일이 업무용 메일이 맞는지, 실수로 개인 아이디로 로그인한 것은 아닌지 다시 확인했다. 아주 가끔 희의 핸드폰과 PC가 연동되며 PC의 로그인 정보가 희의 개인 정보로 전부 변경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개인 메일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연락을 간절하게 기다리지 않았기에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로그인은 업무용 아이디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광고성 메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희가 메일을 클릭했다. 고민이 길어져 답장이 늦었습니다. 업무에 지장이 생기진 않았을지요. 개인 메일로 연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담당자님이 먼저 읽으시고, 판단하시길 바라서요. 괜찮으시면 이 메일로, 담당자님 개인 메일 주소로 답장 주세요. 내용을 보자 당혹스러움이 더 짙어졌다. 메일의 미궁이 더 깊어진 기분이었다. 광고성 메일은 아닌 듯했고, 그렇다면 피싱 메일인가? 이런 식으로 지인인 척 혹은 중요한 메일인 척 개인 메일을 알아내려는 수단일 수도 있겠다. 이 시대의 피싱이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의심해서 나쁜 건 없었다. 이전에 주고받은 메일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면 편했겠지만, 데이터 용량 기준법이 시행된 뒤로 메일을 한 달에 한 번씩 전부 비워야 했다. 이전 내용이 없는 것을 보고 희는 제목의 ‘늦음’이 적어도 한 달 이상 되었다는 걸 그때야 알아차렸다. 정말 급한 일이었다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재차 독촉하는 메일을 희가 보냈을 것이다. 희는 그 메일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원칙대로라면 쓰레기통을 바로 비워야 했지만, 알 수 없는 찜찜함에 희는 ‘1’이 표시된 쓰레기통을 그대로 두었다. 메일의 출처가 떠오른 건 그날 점심시간이었다. 팀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칠 즈음 희는 오전에 왔던 의문의 메일을 대화 소재로 꺼냈다. 아무래도 신종 피싱 수법인 것 같다는 희의 말에, 팀원 막내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맞을 거라고 맞장구쳤다. 막내도 몇 달 전 이런 식의 피싱을 당했었더랬다. 자신이 ‘신체 포기자’인데 ‘자원소비세’가 독촉 메일이 자꾸 온다는 항의 메일이었다. 너무나도 옴 직한 내용의 메일이었기에, 막내는 의심 없이 답장했는데 머지않아 욕설이 가득 담긴 메일이 도착했다. 자원소비세를 내지 않기 위해 신체까지 포기했는데 독촉 메일을 받았다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고 공무원들의 안일함과 무능함을 정치 스트리머들에게 알릴 거라는 협박과 함께 이 사태를 막고 싶으면 개인 메일로 답장하는 끝말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개인 메일로 답장했느냐며, 동기가 묻자 막내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스트리머들에게 잘못 걸리면 안

  • 관리자
  • 2025-11-01
미라의 바다

미라의 바다 유영은 0 참 까맣고 짧다. 정숙은 갓 태어난 미라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 말을 생각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너 꼭···, 하면서 말을 고르던 정숙은 드디어 딱 맞는 말을 찾아냈다. 너 꼭 미라 같구나! 시간이 갈수록 검고 바삭바삭해지는, 살점이 까맣고 얇은 조각이 되어 손을 대면 후두두 떨어져 나가는 미라. 그렇게 미라는 미라가 됐다. 미라라니, 잔인한 이름이라고 언젠가 지희는 말했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였다. 미라가 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정숙은 그때 미라를 보고 그러니까 너 꼭···, 시체 같구나! 외칠 뻔했으므로. 시체보다는 미라가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시체는 완전히 끝난 거지만, 미라는 이어진다. 미라는 평생 검었으나 열여섯 살부터 더 이상 짧지는 않았다. 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열네 살까지 백사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던 미라는 열다섯 살, 열여섯 살, 두 해 동안 삼십 센티가 넘게 컸다. 하룻밤 새 일 센티가 자랄 때도 있었다. 그 시기 미라는 아침마다 갈색 개털 무덤을 빠져나와 똑바로 서서 양팔과 다리를 쭈욱 뻗고 그 끝의 손과 발을 쳐다봤다. 손과 발은 미라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팔과 다리는 길고 가늘어졌다. 부슬부슬한 갈색 털이 꼭 같은 개 세 마리가 아침마다 가늘어지는 미라의 발목을 핥았다. 미라는 키가 자라고 난 후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자란 팔다리의 피부가 얇아지다 못해 모두 벗겨져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내리꽂듯 떨어지는 소나기, 동네 뒷골목의 쓰레기 냄새, 더위, 추위, 바람, 햇살, 살에 닿는 모든 것이 따가워서 마당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엄마. 정숙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라가 집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어미 새가 되는 것은 정숙의 오랜 꿈이었다. 정숙은 월, 수, 금요일에는 17층짜리 오피스 건물에서, 화, 목, 토요일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청소일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갔다가 두 시쯤 대낮의 길을 걸어 미라가 개들과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며, 정숙은 자신이 둥지로 돌아가는 어미 새라고 생각했다. 아기 새들이 바글바글 들어 찬 둥지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목젖이 보이게 입을 벌리고 삐악삐악 울며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라를 위해 정숙은 퇴근할 때마다 집 앞 빵집에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사 갔다. 비슷하게 생긴 조각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조각을 고르는 시간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미라는 크림만 떠서 먹었다. 딸기와 빵은 흙 마당에 던져두면 가장 날쌘 개들이 달려와 먹어 치웠다. 잠깐, 그 애들 이름이 뭐였지? 몽글이, 구름이, 별이···. 미라는 매일 부대끼는 개들의 이름을 헷갈렸다. 미라의 개들이 아니라 모두 정숙의 개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숙의 개들은 처음에는 아홉 마리였다가 곧 서른세 마리, 스물여덟 마리, 마흔두 마리, 마흔

  • 관리자
  • 2025-11-01
굴은 구르지 않는 돌

굴은 구르지 않는 돌 함윤이 함윤이의 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위한 사운드트랙 ⓒ 이해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영어 속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 두보의 시 「팔전도」 중 그 동굴에 관한 말 중 열에 여덟은 거짓이다. 내가 사실을 알려 주겠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을 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걸 얘기하려 한다. 동굴은 2019년 7월 말, 뼈까지 침식되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장차 미술관이 될 부지를 측량하던 일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미술관을 ㅂ기업의 새로운 문화적 간판으로 삼고자 한 용 회장은 동굴의 소식을 듣고 긴긴 고민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을 나는 어쨌거나 지지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들인 광막한 땅에 난 균열의 시작점처럼 보이던 공동(空洞)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곧 동굴을 개조한 미술관 ‘별관’을 만든다는 소식이 ㅂ기업 산하 문화재단에 퍼졌다. 당시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느낀 암담함이야 추측할 수 있을 뿐, 여기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별관 설립을 곁들인 공사가 시작된 2020년에는 모두가 알 전염병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열을 앓았고, 연달아 기침했으며, 멍한 얼굴로 집안에 갇혀 있었다. 한번 몸에 깃든 병증은 다른 몸들로 옮겨 다녔다. 죄지은 마음이 곳곳에 퍼졌다. 용 회장은 늘그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시기를 주름잡을 지렛대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여러 겹의 우연에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의 교차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려 지금이야말로 별관의 공사를 진척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차피 동굴을 다듬는 작업자들은 모두 두터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산업용 방진 마스크가 코비드 바이러스를 막기에 적절치 않다는 연구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여름의 굴속에서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해도 용 회장은 그저 밀어붙였다. 시대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어도 공사장 인부들은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인부들은 매일 땀 흘리고 번갈아 기침하며 동굴을 파고 들어갔다. 굴은 외부의 빛과 습기 속으로 서서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4년 후에야 이 흐름에 끼어들었다. 전염병이 지나가고, 지나갔다, 는 표현과 상관없이 외상과 내상을 받은 이들이 남고, 무수한 마스크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우리가 모를 곳에 묻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의 예술지원사업에 모두 떨어졌다. 국가나 서울시, 민간이 운영하는 지원사업의 선정자 목록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각종 웹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뒤늦게라도 창작자를 모집하거나 후원한다는 재단 또는 기관의 공고를, 아니면 카메라를 다룰 줄만 알아도 곧장 일자리를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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