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망
- 작성일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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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
손원평
도시는 언제나 빛났다. 낮이면 유리창마다 반사된 햇빛이 먼 산자락까지 닿았고, 밤이면 네온사인이 어둠을 밀어내며 깜박였다. 하나의 거대한 발광체처럼 도시는 스스로를 밝혔다.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혹한 속에서도 사람들은 꿋꿋했다. 더위와 추위가 무자비하게 덮쳐도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곳에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 여긴 허허벌판에 세워진 도시. 도시의 이름은 명함이었고 긍지의 상징이었다.
도시 한복판의 호수는 절반은 자연, 절반은 인공의 산물이었다. 여름에는 해수욕장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 태양을 즐기고, 겨울엔 얼어붙은 호수 위로 스케이트 날이 반짝였다. 애초에 이 분지는 물을 품도록 생긴 땅이었다. 오래된 지도를 펼쳐 보면 파란 선과 옅은 음영이 겹쳐져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 척했다. 하천 자리에 도로가 뚫리고, 논과 습지가 메워진 자리에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가 품은 희망도 높게 쌓여 갔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 도시는 단단한 땅이 아니라, 한때 분지였던 곳을 억지로 길들여 그 위에 세운 도시라는 걸. 그럼에도 사람들은 더 높이, 더 거대하게 쌓아 올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물 위에 도시를, 도시 위에 또 다른 미래를 약속하는 이름들을 붙여 가며.
도시로 향하는 길에는 경계가 하나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자와 빠져나가는 자를 가르는 협소한 목구멍 같은 톨게이트였다. 낮이면 끝없이 이어진 차량이 통로를 밀고 들어오다가 밤이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곳에 유리로 둘러싸인 작은 부스가 있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하루 종일 팔이 뻗었다가 돌아왔다. 팔을 뻗고, 카드를 거두고, 결제한 카드를 다시 내민다. 끊임없이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수하의 일이었다. 차들이 일정한 리듬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동안 창문 너머로 무표정한 얼굴들이 흘러갔다. 남는 것은 팔의 무게와 몸을 짓누르는 피로뿐이었다.
수하의 하루는 새벽에서 낮까지, 낮에서 밤까지, 밤에서 다시 새벽까지 세 토막으로 이어졌다. 화려한 도시의 입구에 앉아 그녀는 빛을 향해 몰려드는 차들을 감정 없이 맞이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배기음이 더 이상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도 오래였다. 그곳에서 수하는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냉기를 고스란히 느꼈다. 몇 안 되던 근처 자리 동료들은 차츰 사라졌고, 먼 곳에서 근무하는 동료들과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교대인과의 짧은 접촉, 오가는 차 안의 사람들 외에 사람을 대면할 일은 거의 없었다. 드물게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을 때, 텅 빈 차도에 사람이라곤 자기 혼자라는 걸 섬뜩하게 자각할 때조차도 수하는 자신이 유일하게 이곳에서 버텨 낸 사람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특별히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놀랍도록 단조로운 직업생활을 영위하는 게 전적으로 운의 작용이라고 누군가 말해 줬다면 수하는 누구보다 빨리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행운과 불운의 줄다리기에 대해서라면,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수하는 비밀스럽게 생각하곤 했다.
지루한 목요일 오후, 퇴근 시간 직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간만의 비였다. 잔잔하게 시작된 보슬비가 점차 굵어졌다. 수하가 유리창 너머 대각선 방향을 흘깃거렸다. 도로 건너편으로 황톳빛의 원형 건물이 보였다. 15년쯤 전, 쇼핑몰로 만들어졌다가 왜인지 공사가 멈춰 버린 채 그대로 세월 속에 방치된 건물이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질까 봐 조바심이 일었지만, 다행히 아직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수하는 차오르는 흥분을 누르며 퇴근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곧장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봤다 한들 누군가의 뇌리에 각인될 만한 장면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의 익명을 자신했다. 수하는 어두운 로비를 지나 문 뒤에 숨은 가파른 계단으로 향했다. 불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일정하게 뚫린 창으로 스며든 미약한 빛이 그녀의 발걸음을 비췄다. 수하는 허기도 잊은 채 계단을 올랐다. 돌고 도는 나선의 계단을 따르느라 찡한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숨이 찼지만 곧 느끼게 될 감각에 대한 기대감이 발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마침내 20층에 오른 수하가 무거운 방화문을 밀었다. 이제 그녀는 건물의 꼭대기 층에, 실패한 청사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수하는 창을 향해 다가갔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기둥 사이사이가 비어 있어 세찬 바람이 불어 들었으나 층 전체를 감싼 통창이 파노라마처럼 원형 건물을 감싸고 있어 위치를 옮길 때마다 눈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자신이 일하는 작은 요금소가 구획 지어 놓은 좁은 병목을 통과하려는 자동차들,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먼 곳의 네온사인과 아파트의 야경이 점멸했다. 강도를 더해 가는 빗줄기 속에 차들의 속도가 줄어드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느껴졌고 차들이 뿜어내는 붉은 빛이 번져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었다. 수하는 작게 숨을 토했다. 공기에는 먼지 냄새가 짙었지만 수하가 내뱉는 숨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개운했다. 이러한 감응을 느끼기 위해 비를 기다린 것이었으므로 당연했다.
수하가 이 건물에 처음 올랐던 날도 비가 쏟아졌다. 퇴근 전부터 비가 오고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한시바삐 그 좁은 공간을 탈출하고 싶었다. 설령 비를 흠뻑 맞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요금소 밖으로 발을 디뎠을 때 수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늘 그곳에 있던 황톳빛 건물을 왜인지 길게 바라봤다. 건물은 풍경의 일부처럼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누구도 범접하지 않는 그림 속의 성역 같은 곳이었다. 수하는 그곳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그곳이 그녀의 인생에 대한 답을 내려 줄 공간으로 적당해 보였다.
그날은 유독,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새벽 출근길에 들은 상사의 한마디, 통장에 남은 숫자, 일 년 넘게 미뤄 온 치과 진료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한꺼번에 무게를 늘려 가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조금은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대로 몇 해가 더 지나면, 자신이 오늘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날들을 견딜 힘조차 남지 않을 거라는 걸 수하는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 발을 떼어 버릴 수만 있다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날, 수하는 삶을 대신할 만한 게 있다면 어떤 것이든 택할 각오가 돼 있었다. 그녀는 바닥으로 던져지기 위해, 중력을 이용해 중력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일념을 품고 계단을 하나하나 밟았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하나하나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삶이 자신을 이곳까지 몰아온 것뿐이었다.
1층에 들어서자 해묵은 시멘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건물이 뿜어내는 냄새는 비의 습도로 인해 무겁게 내려앉아 차라리 안온했다. 수하는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지나 뻥 뚫린 비상구 계단으로 몸을 틀었다.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를 때까지 그녀는 한 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자동인형처럼 일정하게 걸었다. 어느새 다리에 빗물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꼭대기 층에 서 있었다. 아마도 멋진 레스토랑이나 연회장을 염두로 두고 설계된 층인 듯했으나 눈에 보이는 건 녹슨 공구와 건축 자재뿐이었다. 수하는 천천히 통창 앞에 섰다. 하지만 이내, 실행하려던 계획을 잊고 아래로 시선을 빼앗겼다.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수하는 자신이 일하는 공간과 그를 향해 몰려드는 차들의 행렬을 바라봤다. 걸음을 옮기자 도시가 나타났다. 쭉쭉 뻗은 아파트와 빌딩 숲이 각자 황금빛으로 일렁이며 시야를 어지러이 메웠다.
거리 안의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림책 속의 삽화처럼 그들은 힘겨운 걸음을 내디디며 우산을 방패 삼아 허둥지둥했다. 강풍에 누군가의 우산이 뒤집히는 걸 본 수하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영화보다도, 언젠가 딱 한 번 탄 비행기에서 본 풍경보다 더 짜릿하고 실감 났다. 비행기의 풍경은 세상을 장난감처럼 보이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기체가 구름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하얗고 지루한 풍경이 조금 전의 재미를 앗아 갔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수하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까지고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수하는 걸음을 옮기며 눈에 들어차는 것들을 천천히 감상했다.
삽시간에 비가 강해졌다. 시작하자마자 절정으로 치달은 곡처럼 비는 거센 빗금을 그으며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나무들이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어지럽게 흔들렸고 자동차들은 우물쭈물했다. 수하의 요금소도 말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머물렀을 때처럼 답답하지 않았다. 비는 무언가를 무화시키고 있었다. 눈 아래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똑같이 낮고 보잘것없었다. 비가 거세질수록 폭풍 같던 마음은 반대로 사그라들었다. 수하는 예상치 못하게 잔잔해진 마음으로 건물을 내려왔다. 그날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무언가가 조금쯤 해소된 기분이었다.
그 뒤로 수하는 종종 건물에 올랐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원하는 게 단지 내려다보는 감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화창한 여름날 건물에서 보이는 풍경은 지루했다. 모든 게 부드럽고 원활할 뿐이었다. 한동안 건물에 발길을 끊었던 수하는 자신이 기대하는 조망의 감각이 거센 비를 동반할 때만 작동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뒤부터 수하는 비를 기다렸다. 보슬비는 답답했다. 내리다 마는 비로는 성치 않았다. 장대비, 모든 걸 지워버리는 커다란 비. 수하는 언젠가 경험했던 그 끔찍한 기억을 자신이 되새기고 싶어 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도 이해하지 못할 비밀이었다.
한편 도시는 연초부터 술렁였다. 올해 역시, 호수 일대에서 빛과 물의 축제를 연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작년에 처음 열린 축제의 테마는 물과 빛이었다. 도시 전체를 반짝이는 빛으로 장식하고 그 모든 것의 중심을 호수로 집중시킨다는 것이 축제의 개요였다. 물론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허허벌판 위에 들어선 이 젊은 도시에 그렇게 큰 예산과 인력을 쏟아붓는 건 과하다는 여론, 행사와 관련된 기관 관계자 중 절반이 이 도시 주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수군거림은 결국 불꽃의 도화선처럼 관심을 더 부풀렸을 뿐이다.
수하는 지난해의 인파와 그날의 혼잡을 생생히 기억했다. 차들은 파도 속의 모래처럼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톨게이트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들떠 보였지만 수하는 그들의 즐거움을 단 한 조각도 나누어 받을 수 없었다. 도시는 그녀에게 위화감을 안겼다. 딱 한 번, 도시 안쪽으로 들어갔던 날을 생각하면 수하는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곤 했다.
그날은 해가 찬란하게 빛나는 초여름이었다. 예고치 않은 빠른 퇴근으로 한낮에 요금소를 나선 수하의 가벼운 발걸음은 목적도 없이 낯선 곳으로 향했다. 도시의 입구에서 시작되는 작은 구릉을 넘자, 아래로 아늑한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고르게 깔린 잔디를 곁에 둔 호수 위에는 백조와 청둥오리가 떠다녔다. 세일러 모자를 쓴 아이가 젊은 엄마와 함께 빵을 뜯어 새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햇빛은 온화했고 구름이 한가로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림엽서처럼 완벽한 풍경 속에서 수하는 불편을 느꼈다. 삽화로 그려진 세계에 혼자 남루한 실사로 들어온 듯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이곳에는 아우성도 싸움도 불화도 없을 듯했다. 수하는 뒷걸음질 치듯 서둘러 요금소로 돌아왔다.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난 순간, 그녀는 사방을 에워싼 작은 벽이 자신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자각했다. 갑갑함이 밀려드는 동시에 마음이 놓였다. 수하는 도시로 향하는 차들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그 세상에 머무는 사람들과 같아지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뿐이라고. 그들만큼 행복해지거나, 그들이 자신만큼 비참해지거나. 전자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사실 그 생각의 씨앗은 아주 오래전 심어졌다. 아이였을 때, 수하의 집은 산등성이에 있었다. 작고 기울어진 집 안에서 부모는 매일 다퉜다. 이유는 수없이 많았지만 대개 돈 때문이었다. 가난이 선량한 본성을 어디까지 해칠 수 있는지 아이는 두 부모를 통해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비가 올 때면 낡은 천장에서는 물이 샜고 벽지의 검은 자국은 소리 없이 번져 나갔다. 어린 수하는 똑바로 누워 천장의 검은 자국이 후퇴하기를, 아니, 적어도 그 자리에서 멈추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검은 자국이 천장의 절반을 넘어서자 조마조마했던 마음은 체념 섞인 절망으로 바뀌어 갔다. 비가 몰아칠 때마다 자국은 조금씩 번졌고, 사나운 비와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로도 부모의 고성과 흐느낌을 가릴 수 없었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이었다.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다 잘될 거라고,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던 연약한 다독임. 수하는 현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어디까지 거짓을 말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눈도 깜짝 않고 달콤한 말을 뱉는 그들의 갈라진 입술을 집요하게 올려다봤다. 그러고 나면 으레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부모는 심판이 된 아이를 견디지 못했다. 수하는 벽으로 밀리거나 부딪혔고 몇 차례 버티다 결국은 나동그라졌다. 끝끝내 굴복하며 배 아래에서부터 나오는 거짓, 즉 잘못했다는 말을 기계처럼 욀 때 수하는 검은 천장을 노려봤다. 이미 검게 번진 벽은 절대로 하얗고 깨끗해질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도 비는 계속 내렸다. 물을 받기 위해 세워 둔 양동이 위로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무심하리만큼 규칙적이었다. 어린 수하는 천장을 보며 빌었다. 무너져라. 무너져라. 차라리 싹 다 무너져 버려라.
어느 여름 끝, 가을 초입에 비가 내렸다. 수하는 산등성이의 작은 동산에 올라 비를 맞다가 동산 위, 기울어진 컨테이너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건 물이 발목을 적셨을 때쯤이었다. 비는 멈춰 있었고 바람은 습했다. 수하는 눈을 비비며 바깥으로 나와 동산 위에 섰다. 마을이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젖은 판자들이 누워 있었다. 사람과 개, 오토바이와 리어카가 떠다녔다. 부모가 화를 못 이기면 서로를 향해 던지던 목각 베개가 물 위로 유유히 흘렀다. 수하는 넋을 잃고 그 광경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잠든 사이 내린 엄청난 비가 만든 작품을, 모든 것이 같은 표면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을 끝없이 바라봤다. 공평하다는 단어를 눈으로 실감한 것은 그때였다. 비는 높낮이를 지웠다. 남은 건 모두가 함께 맞이한 한 줄의 바닥뿐이었다. 수하는 이제까지의 삶이 깨끗하게 제거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수하의 인생은 다시 출발선상으로 돌아갔다. 많은 이들이 집과 부모를 잃은 아이를 동정의 눈으로 대했지만 수하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도움과 지원이 결코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희망이란 걸 송두리째 앗아 가던 지긋지긋한 손길, 천정의 검은 자국은 영영 사라졌다. 손과 뺨이 시렸지만 때때로 맑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설령 그 종착지가 고작 현재의 작고 좁은 요금소라고 하더라도, 어린 날의 그 비가 아니었다면 이곳에조차 도달할 수 없었을 거라고 수하는 확신했다. 검은 곰팡이가 하늘을 좀먹는 곳에서 끝내 완전한 어둠에 잠식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하는 그 비에,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한 비에 감사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다시 비를 기다렸다. 어린 시절은 이미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고 수하의 삶은 한때 그녀가 그렸던 것에서 점점 더 궤도를 이탈하고 있었다. 기울어진 세상을 바르게 만들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수하는 막연하고 강렬하게 그것을 기다렸다.
축제의 날이 밝았다. 무언가의 전조를 알리듯 도시 주변은 적막했다. 땅 아래에서 거대한 숨이 멈춘 듯한 정적이 공기 위에 옅게 번졌다. 새벽에 예고된 비 소식이 갑자기 호우주의보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자치단체는 호수 상류의 댐이 비를 충분히 저장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과 함께, 축제가 예정대로 진행될 것임을 알렸다. 추가된 공지는 기껏해야 드론 쇼가 강풍에 따라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 정도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들이 밀려들었다. 정오가 지나고 하늘이 저녁처럼 어두워졌을 때 수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호수 방면 진입로 2시 이후 부분 차단. 요금소 정상 운영. 요금소 앞에 멈춘 차창 너머의 얼굴들에는 피로와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이 지루한 정체만 지나면 환희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가 엿보였다.
하루가 길 것 같은 예감에 기지개조차 하지 못한 채 수하가 말린 몸으로 앉아 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곧바로 입구가 열렸다. 평소에 거의 볼 일이 없는 소장이 숱 적은 머리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손은 예닐곱 살쯤 된 아이의 어깨에 올려 있었다. 물기 없는 입술을 굳게 닫은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음울한 표정으로 큰 눈을 천천히 꿈벅거렸다.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왜인지 수하의 머릿속에 오래전 검은 천장의 얼룩이 떠올랐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약간 어지러웠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소장은 여러 번 얼굴을 문질렀다. 경위는 간단했지만 소장은 설명에 시간을 끌었다. 아이의 부모가 축제 주최 측 관계자라 급히 현장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이를 잠시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평소 안면이 있던 소장에게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소장은 자신이 혹시 모를 통제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 수하가 봐줬으면 한다는 말을 툭 덧붙이며 말을 맺었다.
-여기서요?
수하가 되물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축제를 주관하는 쪽에 더 적당한 아동보호 시설이 있을 것 같았다. 소장은 축제에서 아이를 맡고 있는 모양새가 썩 ‘예뻐 보이지는’ 않을 거라며, 해당 이야기는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공식적인 주최 측, 즉 아이의 부모가 남긴 의견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도 윗선의 청탁을 거절하기 곤란한 처지인 듯했다. 소장은 아이를 밀어 넣으며 한 마디를 남기곤 사라졌다.
-딱 두세 시간이면 돼.
아이와 둘이 남게 되자 공간은 더 협소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한동안 몸을 꼼지락대더니 어느 순간부터 수하가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하고 돌려 주는 모습을 집요하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재밌겠다.
마침내 아이가 말했을 때 수하는 언짢은 얼굴로 아이를 돌아봤다. 성가셨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 악의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고쳤다.
-해 볼래?
그러곤 아이에게 카드를 건네고 승인 버튼을 누르게 했다. 초록 불이 들어오고 자동차가 빠져나가자 아이의 입에서 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의 그늘진 기운은 완전히 걷혀 있었다.
-진짜 재미있어요. 커서 이런 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아이가 물었다. 이런 일이라. 답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수하가 답을 망설이는 동안 바깥의 비는 한 겹 더 두터워졌다. 요금소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는 동시다발적인 포탄의 소리를 연상시켰다. 수하는 보온병을 꺼내 아이에게 따뜻한 물을 건넸다. 아이는 컵을 두 손으로 받아 몇 모금을 마신 뒤 유리창에 작은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아이의 손 주변으로 하얀 띠가 생겼다. 따뜻한 아이구나. 아이의 체온이 만들어 낸 자국을 보며 수하는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날 이렇게 혼자 남겨지게 됐을까.
문득 붉은 불빛이 소리도 없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곧이어 펑 소리와 함께 구름 위로 불꽃이 새겨졌다. 멀리서 사람들의 탄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경보가 울린 건 그 바로 뒤였다. 도심 진입로 전면 통제. 요금소 차단.
도시로 들어가겠다고 고집하는 마지막 차를 보내고 나서 수하는 차단봉을 완전히 내렸다. 메시지가 짧게 울렸다. 진입로 전면 통제. 임시 바리케이드 설치. 현장 인원 직접 조치. 평소라면 도로 관리반이 나왔을 일이었지만, 오늘은 모두 호수 쪽으로 빠져 있었다. 수하는 우산도 쓰지 못한 채 매표 부스 옆에 세워 둔 플라스틱 방호벽과 삼각콘을 하나씩 끌어내 도로 한복판으로 옮겼다. 물은 벌써 신발의 목을 적시고 있었다. 방호벽이 빗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모래주머니를 끌어다가 밑동마다 올려놓는 동안, 상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뒤집어 넘겼다. 마지막 방호벽의 위치를 눈으로 한 번 더 훑어본 뒤에야 수하는 몸을 돌려, 흠뻑 젖은 채 요금소 안으로 돌아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무전이 또 울렸다. 비상 동선 가동.
수하는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를 뚫고 또다시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먹구름을 배경으로 하늘 높이 올라가는 불꽃은 유난히 검붉었다. 어둠을 품은 먹구름 앞에 수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저 불꽃을 도시 안에서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는 먹 대신 해가 보이는 걸까. 우리의 눈에 비친 하늘은 다른 모습인 걸까.
상류에서 비상 방류, 축제는 차질 없이 진행. 무전이 짧게 울렸다. 수하는 낯설게 주변을 둘러봤다. 우회시킨 차량이 빠져나간 텅 빈 도로를 빗줄기가 가득 메웠다. 수하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오래된 감각이 깨어났다.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렸다. 수하는 아이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는 요금소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먹구름을 믿었다.
문을 나서자 물은 이미 발목 위였다. 도로 표면이 사라지고, 차선은 흰 물뱀처럼 물속에서 흔들리며 물결쳤다. 수하는 아이를 안아 올려 건너편 건물의 야외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때리는 점도 높은 빗방울이 따가웠다. 겨우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 첫 모서리를 돌 때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야 해.
수하는 숨을 고르고 아이의 머리 뒤를 가볍게 감쌌다.
-잠깐만. 더 높은 데로 가자. 거긴 안전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수하는 아이를 안았다가 업었다가 결국은 함께 걸었다. 그렇게 20층에 다다랐을 때 바깥이 와락 열리듯 바람이 수직으로 올라붙었다. 젖은 시멘트와 눅눅한 폐허의 냄새가 숨을 더디게 했다. 360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미완의 공간에서 통창 사이마다 빗줄기가 칼처럼 드나들었다. 세상이 그들의 눈 아래에 있었다.
와. 아이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하는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장면이 자신의 작품이라도 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아이가 중얼거렸다. 아이의 손가락은 도시 한가운데 솟아 있는 높다란 빌딩 숲을 가리켰다. 도시를 대표하는 아파트였다.
-좋겠네. 좋은 데 살아서.
수하의 말에 아이는 잠시 침묵했다.
-예전에는 망아지가 있었어요. 이사 오기 전에는요.
-망아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퓨리예요. 털이 북슬북슬하고 귀여운 망아지였어요. 우리 집 마당이 엄청 커서 퓨리랑 같이 달리고 놀았었는데. 근데 퓨리를 팔고 여기로 왔대요.
-그렇구나.
수하가 천천히 대꾸했다.
-옛날이 더 좋아요. 옛날에는 엄마 아빠가 안 싸웠거든요.
아이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아이는 궁금한 걸 묻듯 수하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있잖아요. 빌린 걸 못 돌려주면 어떻게 돼요?
-응?
-엄마가 그랬거든요. 아빠가 뭘 빌렸대요. 근데 빌린 걸 잃어버려서, 다른 사람한테 또 빌렸대요.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한테 빌린 걸 또 잃어버려서 다시 다른 데서 또 빌렸대요.
-그래?
-네. 그래서 다들 아빠를 기다린대요. 집집마다 양말을 걸어 놓고 아빠가 빌려 간 걸 돌려주기를 기다린대요.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처럼요.
아이가 까르르 웃었지만 수하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거짓말인 거 알아요. 재미있는 얘기인데 아무도 안 웃으니까.
아이가 창밖을 바라봤다. 수하는 입을 꾹 닫은 채 아이의 작은 등을 몇 차례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그래, 재미있는 얘기가 아니야. 슬픈 얘기지. 끔찍한 이야기지.
-괜찮을 거야.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온 순간, 수하의 머릿속엔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하던 지친 부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래전,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뱉었을지를 갑자기 깨닫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정말이에요? 정말 괜찮아져요?
아이가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수하는 창밖을 바라봤다. 비 사이로 아름다운 조명이 비치는 도시가 번지고 있었다. 아니. 안 괜찮을 거야. 네 인생은 움푹 파인 곳에 위치한 저 도시처럼 아래로 폭삭 주저앉고 말 거란다. 그 속으로 고이는 건 우리가 피하고픈 모든 것이겠지. 저렇게 눈을 속이는 화려한 빛 대신, 질척한 빗물과 갚을 수 없는 빚이 그 안을 채울 테고. 그리고 너는 늪에 빠진 것처럼 가망 없이 허우적댈 거야. 그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그 순간, 그러니까 수하가 마음속의 말을 맺기도 전, 엄청난 소리와 함께 도시가 내려앉았다. 누군가가 거대한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낸 자리처럼, 도시 중심부의 지반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번에 꺼졌다. 강렬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척추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건물은 멀쩡했고 수하와 아이는 영화관에 앉아 스크린 속의 화면을 감상하듯 그 감각을 전해 받았을 뿐이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수하가 반문하는 사이 눈앞의 광경은 빠르게 변해 갔다. 범람한 호수의 물이 분화구처럼 파인 중심부로 폭주했고, 도로의 물길은 마치 기억해 둔 길을 찾듯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건물의 지붕들이 낮아지고, 광고판들이 물의 소용돌이치는 포말 아래로 사라졌다. 도시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처럼 짧고 강한 외침이 한 번 울렸다. 그러고는 적막이 찾아왔다.
도시의 빛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물속에서 더 또렷해졌다.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너무 조용했다.
이 정도의 붕괴라면 분명 더 많은 소리가 들려야 할 텐데,
고요가 모든 소음을 앗아간 자리에는
비와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비는 계속 내렸다.
노크하듯
.
.
.
.
똑
똑
똑
똑
.
.
.
.
수하는 한순간, 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와 물 아래 잠긴 도시의 윤곽이 흐릿하게 중첩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까지가 실제 풍경이고 어디부터가 유리 위로 번진 무늬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뜨면 모든 게 제자리로 되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녀는 지금 보이는 광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보다 중요한 건 이 순간 이토록 생생하게 전해지는 감각이었다.
네온사인은 수조 속 열대어처럼 알록달록하게 반짝였다. 신호등은 초록과 빨강 빛을 교차로 물 위로 띄웠다. 높은 건물들이 장난감처럼 힘없이 누워 있었다. 수하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잊고 이 모든 광경에 압도당한 채 서 있었다. 수하의 심장 깊은 곳에서 오래된 박자가 살아났다. 물이 표면을 만든다. 균등하고 납작한 시작.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세울 수 있게 만드는 바닥. 아이의 눈동자 위로 새로운 수평선이 번져 나갔다.
-퓨리는 어디 있을까?
아이의 목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수하는 자기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있던 아이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아이가 떠올리는 것이 망아지 한 마리가 아니라 그 애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췄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니까. 다 같이 처음 서 있던 자리로.
아이의 눈동자에 물에 잠긴 도시의 불빛이 작은 별처럼 박혔다.
-다 같이 처음으로.
아이가 읊조리듯 따라 한 말에 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같이 처음으로.
그렇게 말하며 수하는 자신의 마음을 진득하게 채운 게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기다려왔는지를 동시에 알아차렸다. 수하가 바란 건 파괴가 아니었다. 그저 재정렬일 뿐이었다. 기준선은 다시 그어졌다. 뒤에 있던 것과 앞에 있던 것이 조용히 섞였다. 옳은 일이 벌어진 것뿐이었다.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치만 무서운데.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공포가 마음의 문턱을 넘은 듯 아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수하는 깨달았다. 아이의 세계가, 아이의 부모가 맹렬하게 좇던 작고 안온한 것들이 아프게 해쳐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하는 할 수 있는 만큼의 진심으로 말했다.
-괜찮아.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재미난 광경일 뿐이야.
아이를 끌어안자 아이의 등뼈가 가볍게 떨렸다. 도시는 물속 어항이 되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부드럽게 유영했다. 간판이, 자동차가, 값비싼 소파가, 어린 시절 수하의 마을에서 떠내려오던 목각 베개보다 더 크고 값비싼 것들이 반짝이며 가라앉고 있었다. 수하는 빗소리 너머 낮고 둔탁한 울음 같은 것을 들었다. 그것이 도시가 빚어내는 절규인지, 자신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의 눈이 수하를 올려다봤다.
-이제 어떻게 돼?
아이가 목소리는 또랑또랑했다. 이 도시에 남아 있던 모든 질문이 아이의 물음으로 모였다. 수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걱정 마. 고민하지 않아도 계속 흘러가. 그냥 살아져.
비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하의 손에 아이의 차가운 손끝이 닿았다. 기둥 사이로 매섭게 스미는 바깥 공기는 여전히 칼날 같았지만, 이제 그 칼날은 둘만을 겨누지 않았다. 세상 전체를 같은 날카로움으로 베어 냈다. 새로이 축조된 세계에서 아픔이나 상처라는 말은 불가능했다. 이제 모두가 같은 무늬를 지니게 된 것뿐이었다.
-가자.
수하가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가 먼저 수하의 손을 잡았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수하는 다시 한번 아래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봤다. 물 아래 잠든 도시가 점차 빛을 잃고 있었다. 마지막 빛이 꺼지는 순간 수하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것이 전부 같은 높이로 눕는 광경을 이렇게도 조용히 내려다볼 수 있다는 건 참 재미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물은 평평했다. 그 위에서만, 다시 무엇인가를 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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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을 오르고 박현옥 기제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한 일은 산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에 기제의 아버지가 살았다. 거기서 차로 삼십 분을 더 가면 기제의 아버지가 소유한 선산이 나왔다. 12월 중순, 눈이 내리기 전에 다녀오자며 기제의 아버지가 기제에게 말했고, 이어 기제가 내게 주말에 같이 아버지 댁에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따로 챙길 건 없으나 다만 밑창이 튼튼한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신발장엔 바닥이 얇고 발목이 드러나는 단화나 굽이 높은 구두뿐이었으므로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트래킹화를 하나 주문했다. 이튿날 저녁에 택배로 받아 본 신발은 정말로 단단했다. 뒤축이 특히 단단해서 기제가 차를 세워 둔 집 앞의 큰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벌써 뒤꿈치가 쓸렸다. 선산엔 산주였던 기제 고모의 산소가 있었다. 기제를 몇 년 동안 만났는데 고모 이야기는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해도 뜨기 전인 새벽에 뻥 뚫린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며 기제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십수 년 전에 남의 집 선산이었던 걸 고모가 7억을 주고 샀다고. 시장에서 방앗간을 하던 고모는 인근 광역시의 국제공항이 그 산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평생 모은 목돈을 죄다 털었다. 산주의 처가 쪽 친척이 도시개발과 과장으로 일한다는 말에 홀린 듯 산을 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뜬소문이 으레 그렇듯 이전이 거의 확정이라던 공항은 여러 번의 공청회 끝에 무산됐으며, 선산 역시 원래의 값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원래는 얼마였는데?” “6천만 원.” “세상에.” 누군가는 기제의 고모에게 선산에서 송이라도 나면 일 년에 한 달만 일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기제의 고모는 혹시나 하나는 마음에 몇 날 며칠 산을 헤집고 돌아다녔으나 산에는 소나무는커녕 상수리나무만 잔뜩 심겨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와 달리 속이 물러 목재로도 쓸 수 없고 숯으로도 못 만든다고, 기제가 말했다. 고모가 그 산에서 발견한 건 송이도 아니고 산삼도 아니라 지천에 떨어진 도토리뿐이었다. “근데 고모도 방앗간에서 도토리 가루를 팔았거든.” 앙금을 말려 가루 낸 것으로 킬로에 만 원을 받았다. 묵으로도 쒀 먹고 전으로도 부쳐 먹고, 효능도 모르는 채 매일 티스푼으로 한 숟갈씩 퍼먹는 사람도 있었다. 기제는 그러니까 고모가 도토리를 8억 원어치 산 것이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난 다음엔 그 이듬해 고모가 산 중턱에서 제초제를 먹었다고 말했고 그때는 웃지 않았다. 히터를 세게 틀어 놓아 겨드랑이와 등과 발가락에서 땀이 났다. 뒤꿈치가 쓸린 곳에 땀이 닿아 한층 더 따가웠다. 내가 자꾸 발을 꿈질거리자 기제가 발이 시리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기제는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며 히터를 더 올려 버렸다. 나중에는 엉덩이와 오금에도 땀이 났다. 짧게 깎은 기제의 옆머리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 관리자
- 2026-01-01
잊고 있고 잇는 진연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지냈다. 한 칸짜리 방.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책장과··· 새 둥지가 있는. 2년 전의 새는 죽었다. 좁은 방범창 안에서. 이틀을 울다가.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면서. 약해지면서. 나는 소리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안전해질 때까지. 며칠 더 기다렸다가. 숨이 죽을 때까지. 숨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당황하면 안 되니까. 당황이 수습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곤란한 일이니까. 며칠 더 기다렸다가. 딱딱해진 새를 치우고.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를 거둬 내고. 방범창의 패널을 깨고. 다시는 새가 갇혀 죽는 일이 없도록. 패널을 깨고. 새는 왜 나가지 못했을까. 들어왔는데 왜 나가지는 못한 것일까. 날개를 펴서 도움닫기를 할 만큼. 공간이 충분히 넓지 않았기 때문일까. 창문의 반을 가릴 만큼. 충분히 높았기 때문일까. 방범창이. 폴리카보네이트 방범창.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카. 나는 꿈을 꾸고 새가 죽고. 꿈에서 매번 새가 죽고.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고. 약해지고. 꿈을 꾸고 새가 죽고. 매번. 나는 그 새가 알을 밴 상태였고 새가 죽으면서 알도 함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슬퍼졌지만 그러한 조금 더의 슬픔이 죽은 새에게는 약간의 좋은 일이겠거니 했다. 그렇더라도 내게 그 새의 죽음은 시간의 궤도 바깥에서부터 시작된 파열음처럼 당혹스럽고 얼떨떨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마주한 삶의 필연적 결말.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였을까. 처음부터 죽음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새가 마침내 남은 삶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라고, 구구 쿼쿼 우는 소리가 그러한 안간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켜보거나 지켜보지 않는 일만이 나의 것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그 새의 삶에 또는 죽음에 개입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어야 하나. 나는 한동안 가장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허둥대고 우물쭈물하고 두려워하고. 새로운 새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여름이었다.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반쯤은 정신이 나간 듯 갈팡질팡하며. 나는 새가 나뭇가지와 나뭇잎과 비닐 같은 것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새는 한동안 가만히 앉았다가 황급히 목을 빼 주변을 둘러봤고 부리로 털을 고르거나 몸을 움직여 자리를 고르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떠나지 않다가 돌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멈추고 날아오르는 일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곳에서 작은 알 두 개를 발견했다. 덧문 밖의 햇살처럼 뽀얗고 눈부신 데다 아주 정교하게 빚어진 도자기처럼 매끈한 것, 완벽한 형태의 생명이 그야말로 덜컥, 거기 있었던 것이다. 철골조와 앙상한 밑바닥만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방범창의 한구석에 말이다. 하나의 존재와 하나의 장소, 그 둘의 대비가 너무도 강렬해서 섬뜩하게 느껴질
- 관리자
- 2026-01-01
태양에서 멀리 김채원 지금부터 아침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질 것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솔지에게도 주어질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어떠한 저항도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름의 궤적을 그리며 부지런히 그 시간을 사는 일. 솔지에게 그것은 꽤나 쉬운 일이었다. 그치만 어려운 일인데? 솔지는 생각했다. 꽤나 쉽고, 그치만 어려운 일이라고. 알겠습니다, 솔지는 늦저녁에 창문을 열어 두고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선과 악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잘못 걸렸다, 하면서도 끝까지 읽기는 다 읽었다. 치워 없애야만 하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됐다. 누가 보아도 선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야기.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것들. 에구, 눈부셔라. 에구, 싫어라. 솔지는 이 모든 것에 필요 이상의 적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지의 약점을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솔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거였다. 솔지는 배신하기를 잘했다. 그러니까 배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정도의 배신을 참 잘했다. 최근에 솔지는 세 사람의 친구를 배신했다. 세 사람의 친구에게 차례차례 합성 마약을 권하였다. 세 사람의 친구 민지, 차은이, 가영이가 고등학교 건물 5층 화장실 맨 끝 칸에 모여 차례차례 그것을 받아 보았다. 처음이니까 그냥 줄게. 이게 뭔데? 알지만 한번 물어볼래. 그럼 알려 줄게. 몸에 좋은 약이야. 약의 이름은 해마야. 네가 지었어? 응, 내가. 이름이 영 징그럽고 별로다. 거절해도 돼? 왜? 귀여운데···. 원래 이름은 뭔데? 나도 몰라. 요즘 입시 준비하느라 머리가 아프다며. 생리통도 심하다며. 그런데 나 지금 진짜 돈이 없어···. 괜찮아, 내가 돈이 많아! 내 지갑을 보여 줄게! 솔지의 암호 화폐 지갑은 영단어로 된 열두 개의 암호를 입력해야만 열어 볼 수 있었다. 지갑의 암호는 솔지가 좋아하는 영단어의 단순한 나열이었다. 첫 번째 단어는 window였고 두 번째 단어는 forest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mountain, 산이었다. 겨울 산을 잘게 부순 듯한 흰 알갱이들을 솔지는 차분하게 소분해 가지고 다녔다. 합성이라는 게 둘 이상의 것을 합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인데··· 정확히 무엇과 무엇과 무엇이 기타 등등 합쳐져 마침내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인지는 제조하는 역할이 아니라서 몰랐다. 예전에는 약의 성분이 비교적 단순했는데 이제는 좀 복잡해졌다고들 했다.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면 약의 성분이 계속해서 복잡해져야만 한다고들 했다··· ···전부 주워들은 이야기였다. 솔지의 역할은 제조된 물건을 가져다가 주변에 판매한다고 해야 하나 일
- 관리자
- 2026-0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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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1건
역시 아몬드 작가! 존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