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 작성일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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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신종원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На дне)』의 주연 인물 루카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번호 1번은 작가가 1970년대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던 타지크인 유랑 극단 소속 무대 미술가로 근무하던 시절 처음 제작한 연극 인형이다. 작품 활동 후기에 만들어진 인형들이 책장을 넘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은 물론 짧은 거리의 보행 기능까지 수행했던 반면, 루카는 그 자신의 하중마저 오롯이 떠받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앙아시아학회 김정훈 교수는 회고전 기념 비평문에서 보조 지지대 없이는 잠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이 인형의 원본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슬라브족 순례자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 성 루가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의 타계 이후 수집된 경력 초기 작업 노트들에서 복음서 속 의료 기록들을 전사한 문구가 몇몇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각재를 마름질하고 합성수지를 꿰매어 붙이는 과정이 전부인 기초 목공 기법을 영적 외과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천 번의 조각과 천 번의 봉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형의 눈구멍을 파내고 팔다리를 끼워 맞추는 행위와 생명이 떠난 몸에 다시 한번 ―또는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는 행위 사이에 도상학적으로 상응하는 궤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기체 상태의 영혼이 별안간 붙잡혀 숨통 깊숙이 하강할 때, 좁고 어두운 기도에 울려 퍼지는 연식음은 어떤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형성하는가? 몸은 시시때때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나선형 회전체를 가두어 두기 위해 설계된 파라볼로이드 모양의 감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브람체보의 특산 공예품이자 텅 빈 통으로서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어떻게 인체를 조롱하는지 상기하라. 1970년대 후반, 연방의 중앙기관에 고용된 이후 주문 생산된 작품들이 공산 혁명식 테일러리즘의 입김 아래 무거운 덩어리와 앙상한 구동부만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루카는 원본 인물을 존중하려는 조형적 표현으로서 삭풍에 일그러진 주름 하나하나를 실리콘 피부 위에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루카는 작가가 일생 동안 폐기하지 않은 하나뿐인 인형으로서, 작품 목록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품 관리인의 주기가 남아 있었다. 이어지는 괄호 안의 문장이다. (수탁자는 표제를 혼용하거나 임의로 변형하는 등의 오기입으로 보존 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전 수탁자들도 작품 번호 1번의 이름이 루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전고 168센티미터, 전폭 52센티미터, 중량 24.5킬로그램 규격의 전신 인체상 및 부속 요소로 구성된다. 작품을 설치할 때는 상체를 전방으로 약 15도가량 숙여야 하며, 양손 관절 내부의 철사들을 지팡이 머리에 고정시켜 노화된 본체 프레임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한다. 지팡이는 조형물 본체와 일체형으로 결착되어 있으므로, 무리하게 힘을 주어 뽑으려 들거나 방향을 틀어서는 안 된다. 발끝은 바닥 면에 정확히 밀착되도록 놓아야 하며, 두 발의 간격은 또 다른 발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게 유지한다. 상체 블록은 허리 결합부에서 미세하게 비틀어 움직일 수 있으나, 회전 각도는 5도를 넘지 않도록 한다. 방향을 조정할 때는 목재 접합면에 마모가 발생하지 않도록 반드시 몸통을 들어 올린 상태에서 옮겨야 한다. 머리는 정면을 바라보도록 배치하되, 시선은 지면으로부터 약 1미터 높이의 약간 낮은 지점을 향하도록 맞춘다. 머리 블록과 상체 블록을 연결하는 목 결합부에는 굴절에 취약한 회전 핀이 삽입되어 있으므로, 머리 블록을 움직일 때는 두 손으로 머리 아랫부분을 떠받치도록 한다. 조명은 전면 상부에서 30도 각도로 비추는 단일 광원을 기본으로 하되, 직사광선이나 강한 열원은 피한다. 실리콘 피부 표면은 매우 얇은 도막(塗膜)으로 처리되어 있으므로 직접적인 접촉을 삼간다. 다만 설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접촉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니트릴 장갑을 착용해야 하며, 손가락 끝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작품 주변에는 최소 80센티미터 이상의 여유 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2미터 이내에는 다른 작품이나 장치를 배치하지 않는다. 작품을 이동시킬 때에는 머리, 팔, 지팡이, 의복 부분을 잡지 않는다. 이동 작업에 앞서 상체 블록 후면에 위치한 결합 소켓에서 금속 스탠드를 먼저 분리한 뒤, 양팔을 겨드랑이 아래로 넣어 몸통을 받치도록 한다. 단독 인원에 의한 이동은 금하며, 최소 두 명 이상의 작업자가 동시에 작업해야 한다[···].
금속 바인더에 꽂혀 하나의 덩어리로 정리된 종이 뭉치들은 낱장일 때와 달리 좀처럼 구부러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종일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내는 까닭인지 매일 밤 한 묶음의 문헌 자료들과 함께 굴식 고분에 순장되는 꿈을 꾼다는 아키비스트 친구에 따르면, 정보 자체가 본디 모이면 모일수록 질량과 저항을 가진다는 것이다. 친구는 기록보관소의 전산망과 장서고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데이터 잠류들을 정보의 집적화 현상으로 규명했다. 그러므로 세계는 지진이나 흑점 폭발, 운석 충돌 따위의 장엄한 재난이나 기근, 전염병, 종교 전쟁 같은 묵시록적 풍경 아래 최후를 맞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항하사 또는 아승기 단위의 퀘타바이트 용량으로 팽창한 데이터 군집에 행성째로 붕괴되어, 중심부의 특이점을 향해 무한히 수렴하는 정보 과학적 구멍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한여름 밤 대흥역 인근의 어느 이자카야 술집에서 전해 들었던 이 광신론은 내내 불길하고 찝찝한 넋두리쯤으로 남아 있었지만, 윤경은 실제로 정보의 과밀 상태가 모종의 이상 현상을 초래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해 본다. 그도 그럴 것이 회고전에 나란히 출품된 스물여덟 점의 전신 인체상 가운데 작품 번호 1번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름이 얇은 쇠막대기 하나가 천장에서 내리쬐는 트랙형 조명을 받아 외따로 빛나고 있다. 붙잡아 세워 둘 작품이 없다면, 옷걸이로도 지렛대로도 쓸 수 없는 흉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설치 매뉴얼은 작품 번호 1번을 옮기는 방법과 요령을 까다롭게 기술하고 있지만, 작품이 제 발로 기둥에서 빠져나와 전시장을 걸어 나간 상황에 관해서는 놀랍도록 무관심해 보인다. 다시.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유가족이 지어 주었는지 연구자가 지어 주었는지는 몰라도 이름 한번 제대로 가져다 붙였다고 윤경은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반듯하고 때때로 구불구불한 우리 세계의 이름들이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천 년까지 제각기 굽이치고 저마다 전율하는 운명의 노선들과 어떻게 조응하며 미리 암시하는지 남몰래 실감하고는 탄복하며 남아 있을 시간은 없다. 윤경은 전시 하루 전, 직원 대부분이 퇴근한 늦저녁에 지금 같은 사달이 벌어지게 된 원인을 기어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기로 했다. 처음에는 작품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야간 경비원들을 탓했고, 그다음에는 기간제 노동자 신분인 자신에게 모든 뒤처리를 떠맡기고 귀가한 디렉터를 욕했지만, 결국 전시 기획사를 찾아온 스스로의 선택을 나무라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윤경은 마침내 두꺼운 설치 매뉴얼의 겉질을 손톱으로 긁는 일을 그만둔다. 작품 번호 1번을 제외한 스물일곱 점의 전신 인체상이 구 기차역 역사 곳곳에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서 있다. 한때 수천 명의 승객이 열차를 기다렸던 돔형 대합실이다. 만들어진 시기도, 국적도, 복식도 다른 인형들은 이역만리에서 이제 막 고토에 도착한 귀향민들처럼 배경은 물론 공기와도 도무지 어울리지 못하고 줄곧 전시장을 겉돌고 있다. 표상이 맥락과 동떨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위화감이 무거운 층운처럼 주위에 내려앉아 있다. 간단히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헌 국회가 폐허에서 대의제 민주정 국가를 일으켜 세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새롭게 형성된 민족적 정체성이 이 멸망한 제국의 유령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 모형들은 회고전의 형식을 빌려 잠시 현관에 머무르도록 용인되었을 뿐, 막이 내리면 또 얼마간 눈에 띄지 않게 치워질 것이다. 윤경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이하게도 윤경은 그 같은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윤경은 사고 경위서를 작성하다가 중단한 참이다. 한 줄 길이의 사건 개요를 작성하는 데만 무려 십여 분이 소요됐다. 작품 번호 1번 떠돌이 노인(루카) 1점이 지정 설치 위치에서 이탈하여 현재 소재 확인 불가 상태임. 처음에는 이탈 대신 분실이라고 적었지만, 빼돌린 사람도 잃어버린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분실 사건이 성립하겠는가? 단지 살아 움직이는 인형과 이 괴상쩍은 의사 신체에 의해 추동된 일련의 파행만을 사실로서 진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윤경은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동에 연루된 것도 모자라, 과실 책임을 일부나마 시인했다가 가뜩이나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위협받고 싶지 않았다. 뒤따라 이어지는 내용은 저녁 여덟 시부터 일어난 한 시간가량의 경과를 축약한 것이다. 현장을 최초 확인한 직원은 야간 순찰을 돌던 경비원 한병진 씨로, 1층 전시 구역 중앙에 처음 보는 쇠막대가 놓여 있어 무심코 바깥으로 옮기려다가 루카의 부재를 눈치챘다고 했다. 3분 뒤, 한병진 씨는 임시 사무실에서 전시 관련 서류를 검토 중이던 전시 담당 코디네이터를 찾아와 상황을 보고한다. 4분 뒤, 전시 담당 코디네이터와 경비원들이 현장에 도착한다. 작품 번호 1번이 전시 기획상 설치 지점인 중앙 대합실 북측 구역에서 완전히 실종된 상태임을 파악한다. 이후 5분 동안 전시장 내부 1차 수색을 실시, 전 직원이 인접 전시 구역과 대합실 주변 동선을 점검한다. 나머지 스물여덟 점의 전신 인체상은 모두 정상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8분 뒤, 관리실에서 CCTV 기록들을 재차 대조한 결과 작품 번호 1번이 금속 스탠드에서 내려와 스스로 전시장을 떠나는 모습이 녹화되었음을 확인한다. 이후 10분 동안 다시 한번 전시장 내부 점검이 이어지지만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안내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 장명석 씨는 출입구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노숙인 몇몇을 돌려보냈을 뿐, 누군가 건물 외부로 나가는 모습은 목격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21시 40분이다. 전시 담당 코디네이터, 현 상황을 전시 총괄 디렉터에게 1차 보고함. 윤경은 이 문장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다. 현 상황을 전시 총괄 디렉터에게 1차 보고해야 함.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됨. 공문서체 문장 구조는 폐쇄형 비음을 이용해 후두에서 순환하는 공기의 흐름을 폐색시키도록 짜여 있다. 관료들이 단조로운 서술 층위 사이사이에 의심이나 불확신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행간을 앞서 닫아 두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여력을 휘발시키며 그저 복종하기를 명령하는 문장들 앞에서 윤경은 펜대를 굴리다가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펜촉은 으레 사후 조치로 예정되는 몇 가지 항목을 게으르게 끄적이다가 연료가 바닥난 기계처럼 갑자기 움직임을 멈춰 버린다. 어떤 목소리가 윤경에게 또 다른 대안을 제안하는 까닭이다. 서류에는 차마 옮겨 적을 수 없는, 대담하고 예측 불가하며 어쩌면 더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종류의 모험 말이다. 윤경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본다. (이에 따라 우리의 시선도 인물의 주위를 살피게 된다. 책상 앞에 여자가 앉아 있고, 여자의 머리 위로 여자를 응시하는 비인칭 부감 시점 하나가 배치되어 있다. 물론 이 무대 장치를 조명에 노출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윤경은 그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높낮이로 귓가에서 사각거리는 음성을 낚아채 그대로 되묻는다.
내가 찾아오면?
그러자 윤경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또 다른 목소리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럼 아무 일도 아닌 거지. 작가나 보험사에 연락하지 않아도 되고, 경찰도 부를 필요 없지.
목소리가 웃음을 참으며 이어서 말한다.
물론 디렉터도 영원히 알 수 없을 테고 말이지.
윤경은 눈앞의 서류들을 내려다본다. 아주 잠시뿐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인물이 그대로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나기를 기대한다.) 윤경이 의자를 밀어 넣는다. 문이 열리고, 부분 소등되어 어두침침한 사무실 복도 내벽을 따라 발소리 하나가 짧게 울려 퍼지다 멀어진다. 암전.
인형이 살아 움직인다는 이야기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윤경은 학부 시절 교환 학생 신분으로 파리에서 한 학기를 머물렀는데, 그때 수강했던 불문학 수업 하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교수 이름이 프랑수아였는지 프레데릭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도시와 산책자라는 강의 제목만큼은 걷다 보면 한 번씩 떠오를 때가 있다. 강의실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던 필수 어학 수업들과 달리, 이 수업에서는 한 주 동안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작성한 관찰 기록을 발표해야 했다. 교환 학생들은 현지 재학생들과 둘씩 짝지어졌는데, 이 DELF A2 수준의 풋내기 화자들이 어쭙잖은 불어 실력으로 길을 묻고 다니다가 돌아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파리나 런던 같은 오래된 도시들은 복층식 건축물처럼 여러 겹의 평면 맵으로 층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시 지하로는 납골당, 채석장, 하수도, 서비스 터널 따위의 거대 지맥망이, 도시 상공으로는 트롤리선(線), 셀 네트워크, 전파 간섭대 따위의 자장이 지표층의 위아래에 아슬아슬하게 포개어져 있다. 이 수평 투상 시점의 입면도들은 실제로 시청 서재 어딘가에 고요히 잠들어 있지만, 평범한 투시법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그리드가 있다. 가판대와 지붕선을 따라 도시 전체에 걸쳐 야트막하게 들떠 있는 이 3D 맵은 방염 처리된 환등기 외부의 조광지처럼 왜곡된 도시의 영상을 끊임없이 투사한다. 발터 벤야민에 의해 판타즈마고리아로 번역된 이 가상의 레이어는 파리지엔들이 생각하는 파리다. 말하자면 파리지엔들의 머릿속의 파리. 마치 지하철에 실려 직장과 집, 이따금 본가만을 왕복하는 윤경에게 서울이 합정과 용산, 사당으로 측량된 삼각형 섬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벤야민은 파리 시내를 산책하며 풍경이 실체와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예컨대 마레 지구 상점가의 매장들은 원래 장인들의 공방으로 지어졌던 까닭에 내부가 낮고 비좁았는데, 쇼윈도 바깥에서 들여다보면 방들이 안쪽으로 무한히 이어지는 것 같았다. 외부로 돌출된 테라스의 영향으로 카페 건물들은 치수보다 몇 뼘은 더 깊어 보였고, 가두를 따라 널따랗게 늘어선 오스만식 주택들은 막상 현관을 지나면 높고 앙상한 나선형 계단만으로 가파르게 이어져 있었다. 센강을 가로지르며 도시의 밤을 밝히던 교각들은 낮에 보니 칙칙하고 울퉁불퉁한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았고,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내려다보였던 우아하고 질서 잡힌 격자형 도시는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골목 입구를 뱉어 냈던 것이다. 다시. 윤경은 뤼 드 리슐리외에 위치한 국립 도서관에 간다. 시선은 먼저 반원형 궁륭 내부에 수 놓인 팔각별을 향해 치솟은 다음, 금박을 입힌 굄돌들과 늑골의 네 귀를 따라 천천히 하강한다. 수직성과 가늘기를 과시하는 하얀색 다발 기둥들 사이로 젊은 남자 하나가 눈에 띈다. 시종 진지한 표정을 지울 줄 모르는 이 아슈케나짐 유대인은 부드럽고 따뜻한 라부르스트 열람실의 측면광 아래 타락해 가는 도시의 영혼을 면면히 확대해 보고 있다. 책상 위에 펼쳐 놓인 사진집은 외젠 앗제가 문화재 사진 관리국에 기증한 네거티브 컬렉션 가운데 일부다. 베냐민의 손끝은 상점가 쇼윈도 안쪽에 진열된 옷걸이 인형들을 지나고 있다. 사진사 자신과 촬영 장비가 노출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앗제는 이 사진들에 한해 반측면 각도로 경직되어 있다. 그럼에도 유리창에 반사되는 바깥 풍경만큼은 어쩌지 못해서, 두 세계가 한 프레임에 중첩되어 있는 듯한 일종의 다중 노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윤경이 줄리아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사진집을 가리켜 보인다.
Ces poupées font peur.
줄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Pfff. À l'époque, les gens croyaient qu'elles étaient vivantes. C'est dingue.
바깥 세계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는 인형들은 자케 드로즈 가의 오토마톤들과 다르게 내부가 텅 비어 있음에도, 밤만 되면 매장 문을 열고 나와 시민들 사이에 섞여 든다는 것이다. 윤경은 여느 파리지엔처럼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인형들이 홀로 또는 여럿이 무리를 이루어 걷는 광경을 떠올려 본다. 요컨대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도시를 배회하는 무인칭 플라뇌르 무리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새가 바람을 타고,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중과 어울려 종내에는 사라져 버리는 산책자들처럼 말이다. 이들이 인간들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거리를 거닐며 도시의 면면을 푹 빠진 채 감상할 수 있다면, 쇼윈도 안쪽에 있는 이들은 누구이고 바깥쪽에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얇은 창과 벽 안쪽에서 잠든 인간들을 인형들이 들여다본다. 현실과 환영이 착종되며 자라난 열주들이 파리라는 거대 아케이드를 떠받치고 있다.
Tu as tort, Julia.
윤경은 서울역 광장을 가로지르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낮 동안 퍼부은 장맛비로 광장 바닥의 판석들이 조금씩 젖어 있다. 장소는 매우 넓고 안팎 없이 개방되어 있지만, 몇 가지 조건이 탐색을 도울 것이다. 예컨대 서울역 광장은 밤낮이 없는 곳이다. 수백 개의 가로등으로도 모자라 매립형 야간 경관 조명들과 높다란 투광등, 인근 건물 외벽의 미디어 파사드들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전광판 불빛 때문에 어느 길 잃은 개미가 화단 주변 마름돌에 달라붙어 페로몬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광경마저 들여다보일 정도다. 무엇보다 이 시간대 서울역 일대는 느지막이 귀가하는 직장인들과 무거운 여행 짐을 끌고 다니는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몇몇 노숙인들만이 주뼛주뼛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까닭에 루카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루카와 섞여 어울리고 있는 임시 체류자들의 행색도 물론 남루한 편이지만, 작품 번호 1번에 입힌 의복은 옷가지라기보다 거적때기에 가까운 까닭이다. 게다가 입바람만 불어도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이 넝마 조각 하나하나가 설치 매뉴얼에 면밀히 기록되어 있어(회색 모직 외투 1점. 흰 면 셔츠 1점. 올리브색 조끼 1점. 가죽 펠트 모자 1점···), 전시 담당 코디네이터라면 서울역 광장이 아니라 광화문 사거리에 던져 놔도 모르고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문제는 이것뿐이다. 고민이 깊어지면서 인형에게 다가가는 발걸음도 점점 늦어진다. 첫마디로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라든지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같은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의 권유가 적합할까? 아니면 누구 마음대로 나돌아다녀도 좋다고 했지, 라든가 괜히 여러 사람 고생시키지 마시지 같은 경고로 기선 제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넌 살아 있어선 안 돼, 라든가 인형이면 인형답게 주인 말을 들어 따위의 강요 혹은 겁박은 또 다른 도전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제발요. 당신이 돌아가 주지 않으면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이라고요. 애초에 인형과 말이 통할 거라는 기대부터 누그러뜨려야 할지도 모른다. 윤경은 별안간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발길을 돌려 평소처럼 지하철에 몸을 싣는 것이다. 온갖 책임과 결과 들로부터 네 몫의 자유를 쟁취해 내라며 부채질하는 충동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노신사가 먼저 말을 건넨다.
아, 미안하오. 나 하나 때문에 이만저만 난리가 아니었겠구려.
윤경은 놀라서 숨이 멎은 얼굴로 눈앞의 노인을 바라본다.
그새 서울이 또 어떻게 변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말이오.
윤경이 목소리를 떨며 어렵게 말머리를 연다.
여기 계시면 안 되는데.
노인이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알다마다. 믿든 안 믿든 여기 한 바퀴만 돌고 다시 돌아가려던 참이었소.
노인이 이어 말한다.
한데 늙으니 영 밤눈이 어두워서 말이오. 선생이 좀 도와주면 어떨까 싶은데.
윤경의 양쪽 눈썹이 올라가 이맛살을 밀어 올린다.
제가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다. 윤경은 얼떨결에 노인과 보조를 맞추어 걷게 된다. 두 사람은 광장 계단을 올라가, 복합 쇼핑몰과 역사 사이에 조성된 보행로를 건너간다. 늦은 밤이지만 여전히 매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입구를 지날 때 밝은 조명이 노인의 얼굴을 드러낸다. 노인이 노숙인들 눈앞에서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끝끝내 실체를 발각당하지 않은 건 운이나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시장 바깥에서 이 실리콘 껍데기를 맞닥뜨리게 되었다면, 상대가 형편없는 바느질로 피부가 기워진 인형이라는 사실을 곧장 눈치채기보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불행이 닥쳐야 사람을 이다지도 무시무시한 몰골로 망가뜨릴 수 있는지 궁리하며 몰래 경악하는 편이 좀 더 일반적일 것이다. 게다가 그런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면, 위로를 받았으면 받았지 쫓겨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은 아니오.
노인이 윤경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말문을 연다.
네?
노인이 이어 말한다.
인형사는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수십 구의 인형을 만들었다오. 뭐, 제대로 된 인형은 내가 처음이기는 하지. 그 전의 인형들은 죄다 눕거나 앉아 있었으니까. 인형사는 그 인형들을 습작이라고 불렀는데, 그것들도 좌우간 제 밥값은 벌어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었던 극단장의 성화로 연극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오. 선생은 혹시 『밑바닥에서(На дне)』를 읽어 보셨소?
윤경이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꼬스뜨일로프의 여인숙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라오. 문자 그대로 연옥 같은 곳이오. 여관 주인은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과객을 욱여넣으려고 널빤지로 벽을 댔다오. 그렇게 나누어진 엉터리 방마다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기약 없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행려병자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데, 이 곁다리 배경 인물 역할을 그 인형들에게 맡긴 것이오. 움직이거나 서 있을 필요도 없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침대맡에 앉거나 벽 쪽으로 돌아누운 채 가만히 자리나 지키면 될 일이니 말이오. 그런데 막무가내로 밀어 넣었던 재고품들이 예상 밖의 수익을 벌어다 주기 시작했소. 관객들이 이 가짜 환자들에게 매료되어 푯값에 돈 닢 얼마를 얹어 주었던 것이오. 하기야 무대 아래에서는 무대 위 배우들의 얼굴이 잘 구분되지 않는 법이지. 아니면 그것들이 실제로 죽거나 불구가 된 연기를 탁월하게 해냈을 수도 있고 말이오. 하여간 극단주는 돈 냄새를 맡자마자 성마른 욕심을 드러냈다오. 소품 노릇을 넘어, 진짜 배우처럼 연기를 맡길 인형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던 게지. 인형사는 그러려면 해부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극단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어렵겠다며 슬쩍 발을 뺐소. 그러자 극단주는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를 거쳐 페르가나 분지로 이어지는 극단의 오랜 순회 경로를 변경해 버렸소. 극단은 원래 발달한 옛 비단길 도시들을 따라 이동하며 관객들을 모았는데, 처음으로 평야 지역을 떠나 산맥 너머로 수레바퀴를 돌린 것이오. 험준한 산악 지대의 관문 도시 호로그에는 파미르 방면 교역로에서 가장 큰 장서고를 자랑하는 여관이 하나 있었소. 사실 도서관보다는 차라리 망루나 병영을 짓기에 더 알맞은 부지였는데 말이오. 여관 주인은 레닌그라드의 과학아카데미 회원들 못지않은 지식인이었소. 여관에서 취급하는 수만 권의 책들 가운데 읽지 않은 책이 단 한 권도 없어서, 어떤 책이든 주제만 대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내용을 줄줄 읊어 주겠노라 장담했지. 하지만 인형사가 그 많은 책들을 다 어디서 구했는지 물었을 때는 벙어리가 되어 한동안 눈물만 훔쳤다오. 늦은 밤, 여관 주인은 타임 잎사귀 몇 잎을 띄운 홍차를 두 잔 덥히고는 그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도서관을 서성이던 인형사를 휴게실로 불러내 음울하고 어두웠던 제국 말기의 비극 하나를 들려주기 시작했소. 여관 주인은 투르키스탄 변방의 한 귀족 가문 밑에서 삼십 년 가까이 저택을 관리했던 집사장이었소. 가문의 선조가 중앙아시아 정복 전쟁에 참가해 국경 지대를 하사받은 뒤로, 지역에서 누대에 걸쳐 명망을 떨쳐 온 집안이었다고 하오. 물론 로마노프 황가는 인정하지 않는 작위였지만, 그가 관리했던 직원들은 고용주를 변경백이라고 부르곤 했소. 허구한 날 중앙 정치 무대로의 복귀를 부르짖으며, 시골 구석에 틀어박힌 채 말라비틀어진 연줄이나 조물락거리는 귀족에게 그보다 잘 어울리는 별명도 없었을 것이오. 그래도 제국에 드리운 쇠락의 그림자가 기어이 그 산골까지도 기어들었던 모양이오. 변경백은 남은 가산을 모두 탕진해 하인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고, 저택마저 압류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소. 와중에 근친 교배로 누적된 열성 형질이 가문의 핏줄 말단에 뻗쳐, 변경백은 혈우병으로 세 자녀를 차례차례 잃고 말았다오. 변경백은 마침내 정신이 나가서 마을 외곽에 종종 나타나곤 하는 광인들처럼 쉭쉭거리고 쇳소리를 내며 저택을 돌아다녔다오. 고매하신 귀족들도 한평생 갈고 닦은 체면과 격조 없이는 길짐승들과 다를 바 없다는 증거였지. 그럼에도 여관 주인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어느 가을 아침 변경백이 생애 가장 명료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소. 변경백은 오랜만에 불이 밝혀진 벽난로 옆 기다란 연회용 식탁의 가주 좌석에 앉아 있었소. 가솔들이 남김없이 떠나간 이후 단 한 번도 드나들지 않았던 응접실에 말이오. 그가 넓은 저택에 울려 퍼지는 음성을 쫓아 주인을 찾아냈을 때, 그 우아한 남자는 맑은 정신으로 눈앞의 식탁보를 바라보고 있었소. 이 커다란 천 싸개가 바로 어제 씻기고 다려진 연미복 셔츠 깃처럼 하얗게 빛나는 까닭을 뒤늦게 알아보았던 게지. 변경백은 보석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제 그만 가도 좋다고 중얼거렸소. 일족의 저주가 문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는 예법 아래 온갖 서적과 공예품을 저택 안에 쌓아 두었지만, 이 탐욕스러운 조적조 제단이 세상 모든 비밀과 지식을 수집할 때까지 결단코 아가리를 닫지 않으리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던 것이오. 이제 남은 건 혼자서는 입고 먹지도 못하는 몸뚱이뿐인즉, 굶주린 무덤이 당신마저 집어삼켜 버리기 전에 서둘러 저택을 떠나 달라고 애원했소. 결과적으로 저택의 대서고와 그 책들을 운반할 마차, 그리고 투르크멘 품종의 말 네 필에 달하는 다소 과분한 규모의 퇴직금이 하루아침에 주어져 버린 것이오. 소장품에는 엘리자베타 시대에 인쇄된 슬라브어 성경 한 권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의 성 블라디미르 회중 앞으로 푸쉬킨이 직접 헌정한 시집 몇 권, 쇼팽의 《발라드(Ballade)》 파리 초판본 악보집들을 비롯해 정신분석학, 무기화학, 도해학, 문장학, 수비학, 기하학, 고고학, 민속학, 심지어는 금단의 서적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오. 죽은 사람을 되살리거나 저승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그런 사악한 종류의 마도서 말이오. 여관 주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주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소. 평생 저택에 갇혀 주변 지리에 어두웠던 그는 말들이 걸음을 멈추고 처음 물을 마시는 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는데, 그곳이 바로 호로그였소. 그렇게 마차에서 시작된 조촐한 대여점이 상인과 학자, 탐험가 들의 발길을 끌어당긴 결과, 거대 도서관 크기로 불어난 것이오. 손님들이 며칠 묵으면서 책에 푹 빠질 수 있도록 숙박업도 겸하고 말이오. 인형사는 그제야 이 여관이 세상의 끝(край света)으로 불리는 까닭을 이해하게 되었다오.
두 사람은 만리동 광장과 옛 국립극장 부지를 지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차도 옆을 걷고 있다. 비탈진 구릉지를 따라 계단식으로 틀어박힌 서계동 언덕배기의 작은 가옥들이 어둠 속에서 점점이 불을 밝히고 있다. 이따금 마주 달려오는 차들이 전조등을 비출 때마다 이들 옆으로 높게 쌓아 올린 경사형 옹벽의 회백색 몸체가 드러난다. 머리 위 쇠창살 사이로 오랫동안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한껏 우거진 회양목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이 거뭇거뭇한 줄기들은 벽 안쪽에서 들려오는 고속철도의 날카로운 발차음을 피해 도로 아래로 손가락을 뻗고 있는데, 눈을 뗄 때마다 조금씩 자라나서 발목까지 내려올 것만 같다. 연석과 울타리가 보도 가장자리를 바투 죄어들어, 통로 전체가 목구멍처럼 좁다랗게 움츠러들어 있다. 그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오솔길이 비로소 숨통을 열어젖히는 어귀는 통일교 본부 앞 청파동 삼거리다. 사람 하나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윤경의 시선은 줄곧 지면에 머물러 있다. 평소에는 겨우 하나 찾아보기도 어려운 맨홀 덮개가 두 사람이 서 있는 길목 부근에서만 네 개나 발견되기 때문이다. 얇은 아스팔트 겉질 아래 서울을 꼭 닮은, 경련하고 순환하며 땅속에서 꼴록거리는 그림자 도시가 있다. 매일같이 늘어나는 도시 외곽의 경계를 향해 집요하게 돌기를 뻗치는 모종의 신경망을 윤경은 들여다본다. 도시가 배설하는 열기와 양분을 빨아들이며 하루하루 사세를 넓혀 가는 이 지하 세계 위에 서울이 있다. 윤경은 오래된 도시일수록 지표가 두껍게 퇴적되는 법이어서, 오늘날 많은 도시들 밑에 과거의 도시들이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 낸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누군가 쌓아올린 문화와 역사의 층위를 딛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선조들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윤경은 봉토 내부의 엄숙한 침묵 속에 파묻힌 채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왕릉과 분묘를 생각한다. 썩어서 토양이 된 제왕들과 장군들의 육신이 토질의 조성으로 확인되고, 이렇게 새로 밝혀진 지층이 한국사의 유장한 연표에 또 다른 눈금으로서 기워지는 과정을 상상한다. 살아 본 적 없는 과거 어느 지점에 명확한 좌표가 형성되어, 이 노드 위에 손끝을 가져다 대는 행위만으로 수백수천 년 전 누군가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감각 말이다. 하지만 지금껏 드러낸 유물들과 고적들이 지중으로 하강한 우리 역사의 전부이고, 남은 땅 밑 공간은 죄다 하수도와 전력망, 광케이블, 지하 철도뿐이라면 서울은 속이 비어 있는 껍데기일 따름이다. 또 다른 껍데기가 앞서 길을 건넌다.
선생은 이 근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윤경은 여기서 600미터 정도 떨어진 사립 종합 여자 대학교가 동생의 모교이고, 교정 중심부에 위치한 순헌관 옥상에서 남산과 한강은 물론 남영동에서 삼각지까지 이어지는 옛 기지촌 일대가 내려다보인다는 사실을 안다. 그밖에 군사 정부 시절에는 사상을 일소하는 항정신성 방역제가 밀실 바깥으로 누출되던 생물학적 위험 구역이었고, 식민지 시절에는 경부선 철도역으로부터 식량과 자원은 물론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부지런히 받아 내야 했던 대규모 집하장이었으며, 그보다 더 앞선 시대에는 효수된 머리들이 내걸렸던 도성 밖 처형장이었다는 사실도.
여기서 저 길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스테이크 골목이 있소.
윤경이 돌연 걸음을 멈춘다. (인형은 뒤돌아볼 수밖에 없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왜 내가 당신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죠?
이제 거꾸로 노인이 윤경을 설득해야 한다. (주도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산책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오.
노인이 한숨을 내쉰다. (인형의 내부에 멀쩡한 호흡 기관이 달려 있다고 믿어질 정도다.)
가끔 생각에 잠길 때가 있소. 내가 이전의 인형들과 다르게 만들어진 건 바로 그때 읽은 책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형사는 일 년에 한 번 일주일씩 극단과 함께 호로그에 머무르며 그 여관에서 시간을 보냈소. 여관을 떠날 때 최대한 많은 책을 빌려 일 년 뒤에 반납했는데, 그런 호사를 허락받은 손님은 인형사가 유일했다오. 인형사는 서방의 외과의들이 집필한 인체 해부학 교재 외에도 다양한 전문 서적을 탐독했소. 극단이 파미르 교역로를 드나들기 시작한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인형사는 처음으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는 인형을 만들어 냈소. 4막에서 퇴장한 뒤, 무대 안쪽 그늘 속에 남아 여인숙의 구질구질한 인생들이 기어이 고꾸라져 파멸하는 과정을 모조리 지켜볼 수 있도록 말이오. 그게 내가 루카라고 불리는 이유라오. 다소 자의적인 해석이 가미된 우리 연극은 놀랍게도 대중뿐 아니라 평단에서도 찬사를 받았소. 벽지에 처박힌 떠돌이 극단의 무대 상연 수준을 지나치게 낮잡아 보았던 게지. 소식이 당 중앙위원회까지 들어갔는지 민간인으로 위장한 시찰단이 몇 차례 공연을 보러 오기도 했소. 그들은 중앙위원회 간부가 직접 무대 연출가를 만나 보고 싶어 한다고 전했는데, 까닭에 극단장의 부아가 뒤집혔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인형사는 루카 이외의 모든 작품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간신히 계약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오. 극단에서 쫓겨나자마자 인형사는 미리 받아 적어 둔 모스크바 중앙행정구 건물을 찾아갔소. 공산 귀족의 일원이었던 중앙위 정치국원은 당에서 극비리에 추진 중인 문화 산업에 인형사를 고용하고 싶어 했소. 서기장이 직접 구상한 사회 실험이라며 입단속을 주문했는데, 요컨대 사람이 살지 않는 선전용 도시를 만들 계획이라고 했지. 선생도 알다시피 당시 연방은 미국과 체제 대결을 벌이고 있지 않았소? 연방은 특히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사건을 계기로 우주 경쟁에서 밀려났기에, 적성국으로부터 기술 우위를 되찾아 오겠다는 선언이 필요했다오. 그래서 그들은 카자흐스탄 스텝 지역에 연구 및 훈련, 발사까지 모든 환경이 갖춰진 코스모그라드(Космоград), 이른바 우주 도시를 여럿 짓고자 했소. 하지만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와는 달리 시설부터 사람까지 내부의 모든 요소가 모형인 일종의 가짜 도시였지. 인형사는 1970년부터 1978년까지 학자들과 기술자, 노동자, 군인 들로 이루어진 특수 임무 집단과 함께 우랄 산맥 남단의 초원 지대를 떠돌았소. 물론 현장 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모든 도시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오. 중앙 광장에 우주 비행사 동상이 늠름히 서 있고, 그 뒤로 모형 발사탑과 모형 로켓이 세워졌소. 이 거대한 철골물을 구심 삼아 콘크리트 벽이 둘렸는데, 벽 안쪽으로 관제탑과 여객동, 조립소 및 격납고, 연료 창고 같은 부대 설비들이 구색은 갖추고 있었소. 한편 벽 바깥으로는 동심원 모양으로 조성된 순환 도로들이 켜켜이 회전하며 같은 범주에 묶인 시설들을 지구 단위로 흩뿌려 주었소. 훈련 지구에는 병원과 수영장, 운동장이 배치되고 교육 지구에는 학교와 박물관, 도서관이 몰려 있는 식이었지. 인력들은 대개 전문 분야가 정해져 있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작업했지만, 인형사만은 발사장과 도시의 여러 구역을 넘나들어야 했소. 주거 지구의 계획형 아파트 놀이터에서 뛰노는 어린이 인형부터 자동차 극장에 모인 가족 인형, 여객동에서 발사탑을 구경 중인 관람객 인형과 우주 생존 기술을 훈련받는 우주인 인형까지 도시마다 적게는 백 구에서 많게는 삼백 구에 이르는 모형 시민을 만들었다오. 처음에는 루카처럼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지만, 밭은 건설 일정을 뒤쫓으려면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법도 배워야 했소. 8년에 걸쳐 공들여 완성한 여섯 개의 도시가 이후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오. 다만 사람 하나 없는 황무지에서 목각이나 깎으며 흘려보낸 시간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던 듯하오. 1986년에 인형사는 다시 한번 당의 부름을 받고 모스크바행 열차에 몸을 실었소. 연방은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공산 정권을 또 다른 꼭두각시로 교체하려다 그만 힌두쿠시의 사이클론에 휘말리고 말았소. 1979년 침공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헤라트와 칸다하르, 잘랄라바드 같은 반군 거점들을 전략적 목표로 삼았소. 이 지역들만 장악하면 늦어도 3주 안에는 전쟁이 끝날 줄 알았던 게지. 그런데 점령전으로 예상되었던 전쟁은 점차 유격전의 성격을 띠어 갔소. 결국 소련군은 첩첩산중의 천연 요새에 갇혀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가운데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었소. 훈련받은 무자헤딘들을 오합지졸 군벌들로 오판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던 것이오. 인형사는 최전방 주요 격전지에서 소련군의 인명과 자산을 안전하게 퇴각시키는 작전에 투입되었다오. 소련군이 판지시르 계곡에서 고립되어 내륙의 주요 점령지로 이어지는 육로 통제권을 자주 빼앗겼던 까닭에, 인형사의 모형 군인들은 주로 헬리콥터에 실려 전장으로 옮겨졌소.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소. 배치 첫날부터 무자헤딘들은 소련군 육군 야전복을 입고, 전사자들에게서 수거해 여기저기 구멍 뚫린 철모를 턱끈으로 고정한 이 가짜 병사들에게 볼트액션 소총탄을 퍼부어 댔다오. 이 불굴의 혁명 동지들은 총격으로 쓰러졌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감쪽같이 일어나 소초를 지켰소. 실탄 하나 들어 있지 않은 AKS-74 소총의 총부리를 들어 올려 높고 가파른 산중 어딘가를 겨냥하는 모습으로 말이오. 인형사는 여느 장교들처럼 직접 전방에 머무르며 지세와 전술을 학습했소. 배치된 전선의 특성을 고려해 장비와 복식을 신중하게 선택했고, 그 정교한 솜씨에 마수드 휘하 타지크인 저격수들마저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였지. 점조직 형태로 편제된 게릴라군은 열악한 통신 장비 탓에 자신들이 상대하는 적병들이 인형이라는 사실을 교차 확인하지 못했다오. 인형들은 전쟁 막바지에 연방과 이슬람 세력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1989년 마지막 부대가 아프간 밖으로 철수하며 마침내 종전이 선언된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소. 무자헤딘은 아프간 공화국 정부군과 수도 카불을 두고 얼마간 내전을 이어 간 끝에 정국을 장악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인형사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작품이 사라진 뒤였다오. 파괴되었거나 지역 주민들에게 탈취당한 것으로 여겨졌던 인형 병사들은 수 년 뒤 뜻밖의 장소에 나타나 인형사를 놀래켰소. 1996년 마수드가 조직한 북부 동맹이 판지시르 계곡 일대를 굳건히 방어하는 가운데, 파슈툰식 복식을 착용한 일단의 유격대가 카불 외곽의 탈레반 거점을 공격해 무너뜨리고는 전장의 안개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곤 했던 것이오. 탈레반 병사들 사이에서 아쉬바흐(أشباح)로 일컬어지는 이 유령 전사들이 북방의 와한 회랑 지대부터 남방의 시스탄 분지에 이르기까지 망상(網狀)으로 조직된 지휘 통제의 경로들을 일주하며 모종의 다이어그램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 그 거대한 판형 도상은 곡도의 칼날처럼 휘어진 힌두쿠시산맥 등줄기에 부착되어, 침입자 술탄과 샤, 바실리우스는 물론 강대한 왕국과 제국의 목을 절단해 왔다오. 전쟁은 산불 같은 것이오. 역사는 실로 되풀이되기 위해 쓰이고 읽힐 따름이라오. 연극처럼 말이오.
윤경은 가만히 동조하는 대신 부리나케 쏘아붙인다.
이 이야기들이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예요?
노인이 윤경을 뒤돌아본다.
날 보시오.
노인이 이어 말한다.
루카는 원래 슬라브인이어야 하지만, 보다시피 인형사는 제 동포의 얼굴을 본떠 나를 만들었다오. 인형사는 연방 자체가 거대한 고려인 박물관처럼 보이기를 바랐던 것 같소. 옹색한 방구석에 갇혀 천천히 죽어 가던 행려병자들도, 코스모그라드의 가족 단위 우주인들과 힌두쿠시산맥 소련군 주둔지에 쓸쓸히 남겨진 초병들도 모두 같은 민족의 생김새로 만들어졌으니 말이오.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해야 할 일을 이미 정확히 일러주고 있다오.
노인이 지팡이를 들어 올려 휘휘 가로젓는다.
주위를 둘러보시오.
윤경의 머리가 나무 막대의 궤적을 쫓아 어깨 위에서 회전한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금속 조형물 하나가 나타나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장대에서 분리된 창부리 내지는 포금을 입힌 탄두의 형상으로 빚어진 원추형 기념물은 이내 추모탑으로 파악된다. 약간 뒷걸음쳐 물러나다 보면 엉덩이 높이로 마름질된 화강암 기단 위에 풀썩 앉게 되는데, 앞으로 구부러져 발등을 눌린 군홧발들이 양옆에 놓여 있다. 윤경이 고개를 들자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청동 군인들이 올려다보인다. 소총을 들고 수류탄을 거머쥔 채 전방으로 허리를 숙인 장병들은 엎드리고 넘어지면서도 그들을 따르려는 민간인들과 어우러져,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대각선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윤경은 전시품에 몸이 닿았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나 묻겠소. 선생은 지금 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시오?
윤경이 손바닥에 박힌 작은 돌멩이들을 털어 내며 되묻는다.
무슨 말씀이시죠?
노인이 추모탑을 벗어나 넓은 광장으로 이동한다.
어쩌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꼴이 그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건 아닌지 묻고 있었소.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 일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되는 대로가 아니라 결연한 의지로 그 일을 택했다면 있는 그대로 말해도 좋소. 정답을 정해 놓고 묻는 것은 아니라오.
윤경은 노인을 뒤따라 움직이면서도 노인이 이끌어 가는 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거 없죠.
노인의 새까만 눈구멍 안으로 아직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머무른다. 노인과 가까워질수록 빈 병 안에 입김을 넣거나 휘파람을 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진동음이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바람은 예술가의 조각칼 무늬가 아직까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눈구멍 내벽의 나뭇결들을 한동안 어루만지다 자장가처럼 낮고 조용한 허밍을 남기며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만약 누군가 선생 앞에 나타나서 지금 하는 그 일을 영원히 그만두어도 된다고 말해 준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세상이 하나의 놀음일 뿐인즉,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일이든지 중단할 수 있다고 말해 준다면 말이오. 지금 하는 그 일을 사랑한다면 그리 어려운 물음은 아닐 거요.
코웃음 소리가 사람 하나 없는 전쟁 기념관 광장 위에 울려 퍼진다.
그럼 매달 관리비랑 월세로 나가는 돈은 누가 내주고요?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두 번 묻지 않겠소.
윤경이 대답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면 누가 마다하겠나요?
(노인, 기다렸다는 듯 한숨 내쉰다.) 숨결에 손이 닿았다면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내가 길 잃은 동포들에게 같은 일을 해 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윤경이 잠자코 묻는다. (인물의 시선은 상대역이 아니라 무대 가장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는데요?
노인이 지팡이 끝으로 발치 부근의 포석을 가볍게 두드린다.
간단하오. 여기 가만히 앉아서 내가 떠나 없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오.
노인이 이어 말한다.
그리고 날이 밝기 시작하거든 선생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되오. 이대로 집으로 가도 좋고,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가도 좋소. 가서 오늘 일어난 일들에 대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도 좋고, 살아 있는 인형과 서울을 산책한 끝에 제 갈 길을 가도록 순순히 놓아 주었다고 거짓 없이 증언해도 좋소. 중요한 건 오늘 이 선택으로 선생이 선생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오. 당장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말이오.
윤경은 등 돌려 떠나는 노인을 붙잡지 않는다. 윤경은 노인의 뒤에 (오롯이 혼자) 남겨진다. 윤경은 양팔로 무릎을 감싸안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웅크려 앉는다. 보조 지지대 (배역의 지팡이를 말하는 것이다.) 없이는 혼자 서 있을 수조차 없다는 설치 매뉴얼 상 지침은 과장이었거나 숫제 허위로 판명된다. 어느 누구보다 가벼운 걸음걸이로 광장을 떠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와 멀어지는 노인의 콧노래 소리를 한 움큼 거두어 간다. 희미한 비모음만이 남아 바람의 목소리라도 되는 양 음음 허밍을 한다. 윤경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다. 별안간 붉은 해가 떠올라 목덜미를 비출 때까지 가만히 숫자를 외워도 좋을 것이다. 하나, 둘, 셋··· 눈 감으면 얼룩 하나 없이 표백된 계단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계단참의 석재 평판 위에 발을 올릴 때마다 깨끗하고 경쾌한 마찰음이 울려 퍼진다. 올려다보면 아득하기만 하지만 작은 몸짓들 속에서 천천히 깨어날 것이다. 동이 트면 윤경과 닮은 사람이 사뿐사뿐 곁으로 다가와 윤경을 닮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일 것이다. 꿈에서 우린 모두 껍질을 깨고 나온 새였어.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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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사르트르가 실존적 관념론자라면 신종원은 실존적 유물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