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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 작성일 2005-11-15

 

백가흠


1


방 안에 서서히 검푸른 빛이 돌기 시작했다. 십 센티쯤 열려 있는 창틈으로 순식간에 환한 빛이 빠져나갔다. 검푸른빛. 그것은 어둠이 방 안에 내려앉기 직전에 아주 잠깐, 아이의 성장을 확인하는 희망의 빛이었다. 하루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다. 천장과 맞닿아 있는 창문은 아이의 머리가 겨우 빠져나갈 만큼 열려 있었다. 아이는 빈 과자봉지를 더 꽉 움켜쥐었다. 침대에 서서 발끝을 세우면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신발이 겨우 보였다. 아이는 발끝을 세우고 창밖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이는 빨리 자라야 했다. 창문에 손이 닿을 만큼, 창문으로 반지하방을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빨리 자라나야 했다. 아이가 반지하방을 스스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문이 잠겨 있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서는 쉽게 문이 열렸지만 아이는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이는 빈 봉지 안에 은밀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봉지 안에 손을 넣었다가 조심스럽게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는 진짜 과자라도 먹는 것처럼 입을 오물거렸다. 비어버린 과자봉지 안을 아이는 아쉬운 듯 한참 들여다봤다. 아이는 빈 과자봉지를 작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다시 열면 그곳엔 맛있는 과자가 꽉 차 있을 것만 같은, 벌써 그런 것을 믿어버릴 만큼 아이는 컸다. 그러나 아이는 적당히 남겨서 다음 끼니를 해결할 줄을 몰랐다. 그러니 굶을 수밖에. 이젠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굶어야 했다.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며 배고픔을 참았다. 그런 기다림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아이는 자랐다. 방안은 금세 어둠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이는 큰 눈을 천천히 껌벅이며 방 안을 멍하니 둘러봤다. 이때 아이의 눈은 세 살 혹은 네 살짜리 다른 집 또래와는 확실히 달랐다. 방 안이 금세 깜깜해졌다. 아이가 좁은 틈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가만히 어둠을 응시한다. 곧 아이는 방 안의 쓰레기와 뒤섞여 잠이 들었다. 불 꺼진 반지하방의 어둠은 무엇이 쓰레기이고, 살아 있는 아이인지 구별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아이는 침대와 벽 사이 좁은 틈에서 쓰레기처럼 구겨져 잠이 들었다.

아이는 자신이 왜 홀로 이곳에 남겨져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무서움을 달래려 아무리 악을 쓰고 울어봐야, 아무도 자기를 돌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 만큼 아이는 커버렸다. 아이의 엄마도 이제 다 컸으니, 빈집을 홀로 지키라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아이는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밤이 가고 아침이 오는지 알지 못했다. 한밤중에 깨게 되면 어둠과 놀고, 날이 환할 때 깨면 창밖으로 가끔 지나다니는 사람의 발을 보며 놀았다. 가끔 널려져 있는 쓰레기를 뒤적거리기도 했다. 아이는 아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갇혀 있을 수밖에. 창에 대고 갇혀 있다고 소리치면 될 것을. 아이는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빨리 자라나야만 했다.

아이는 자기가 얼마나 혼자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니 자기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이의 엄마도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혼자 내버려두는 것이다.

아이의 집 위로, 그러니까 지상에는 한 층에 두 가구씩 총 여섯 가구가 세들어 살고 있었다. 지상의 집들은 지하의 집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곳에 집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같은 층에 살고 있는 이웃조차도 누가 사는지 모르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고가 난 다음에야 이웃들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난 후에 지상의 이웃들은 지하에 집이 있는 줄만 알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2


남편과 살 만큼 살았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박진숙. 그녀는 서른아홉에 가출했다. 인터넷 채팅으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남매와 남편을 두고 집을 나온 지는 일 년이 되었다. 진숙 씨는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이었다. 남편은 아내가 가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여자를 집에 들였다. 진숙 씨도 채팅으로 만난 자동차 영업사원과 동거를 시작했다. 진숙 씨와 남편, 두 사람 모두 아쉬울 게 없었다. 더 늦지 않은 나이에 서로의 사랑을 찾은 건 둘에겐 오히려 축복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재산을 분할하는 것이었는데, 진숙 씨가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현금이 문제였다. 자리를 잡은 두 개의 고깃집과 강남의 아파트를 가족들 몫으로 남겨놓았으니, 10억쯤 되는 현금은 자신의 몫으로 충분하다는 게 진숙 씨의 생각이었다.

진숙 씨는 무료할 때면 가끔 채팅으로 남자를 만났다. 그녀의 오랜 취미였다. 초등학생인 두 아이들은 밤늦도록 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돌았다. 가출할 무렵 아이들이 잠깐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학원이 아이들을 잘 길러줄 것이므로,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채팅으로 만나는 남자들은 진숙 씨를 보자마자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버렸다. 여러 번에 걸친 성형수술로 얼굴과 몸은 주말연속극에 단골로 등장하는 미시 연예인을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피부 또한 서른이 되면서부터 꾸준히 받은 스킨케어 덕분에 삼십대 초반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예뻤다.

진숙 씨가 만났던 그 많은 남자 중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는 평범한 자동차 영업사원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재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진숙 씨가 더 적극적이었다. 남자는 돈도 많고 아주 예쁜 그녀가 평범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진숙 씨는 고급 세단을 남자에게 주문했다. 남자에게도 고급 세단을 선물했다.

남자는 진숙 씨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었지만, 일단 살림부터 차렸다. 모든 돈은 진숙 씨가 마련했다. 현금으로 가지고 나온 돈 이외에도 진숙 씨는 이런 날을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해온 또 다른 통장이 있었다. 남자는 돈도 많고 훌륭한 외모를 가진 진숙 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는 어쩌다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온 것인지 믿을 수 없었다. 남자는 진숙 씨가 가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일 년쯤 지나자 문제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랑의 절차, 당연한 수순이었다. 남자는 동거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서 진숙 씨를 자기 부모님에게 소개시켰다.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는 새끼손톱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로 청혼했다. 물론 진숙 씨의 카드로 산 것이었지만, 진숙 씨는 개의치 않았다. 진숙 씨는 생애 두 번째로 받는 청혼을 처음인 척, 감동스럽게 연기하느라 그런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결혼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면 자신의 과거가 밝혀질 것이 뻔했다. 진숙 씨의 고민은 늘어갔다. 남자의 가족들은 모두 로또라도 맞은 양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능력 없는 외아들이 노총각으로 늙고 있는 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아들이 의외의 행복을 몰고 왔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진숙 씨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칠까봐 항상 전전긍긍했다.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는 진숙 씨 때문에 불안했다. 그러나 절대로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놓칠 수 없었다.

진숙 씨는 남모르는 고민이 하나 더 있었다. 진숙 씨는 몇 년 전 오른쪽 난소에 문제가 생겨 자궁적출수술을 받은 상태였다. 남자는 동거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를 원했다. 결혼은 좀 미루더라도 둘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이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불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달리 피임을 하지 않는 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남자는 불안했다. 병원에 가기를 원했지만, 진숙 씨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루었다. 진숙 씨는 불안해하는 남자를 달래기 위해서 통장에 돈을 넣어 남자에게 건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둘은 서로 다른 이유로 상대방이 자신을 버릴까봐 두려웠다. 참다 못한 진숙 씨는 남자에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팔 개월 전이었다. 불안하기는 진숙 씨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채고 떠날까봐 진숙 씨는 두려웠다.

남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남자의 가족들이 몰려와서 왁자지껄 축하를 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보험임을 가족들도 알고 있었다.

진숙 씨는 거짓말을 하고 나서 안절부절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기도 싫었지만, 그 이유로 남자가 자기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숙 씨는 불안해졌다. 진숙 씨는 아이가 필요했다. 임신한 척 연기하는 것도 곤욕스러웠다. 진숙 씨는 가짜 임신 사 개월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넉 달쯤 전에 원정 출산을 핑계로 남자와 동거하던 집에서 나왔다. 남자는 불안했지만,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진숙 씨가 원정 출산 때문에 미국에 가 있는 줄만 알고 있었다. 진숙 씨는 지방의 작은 도시에 집을 얻어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진숙 씨는 갓난아이가 필요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야만 했다. 진숙 씨는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하고 광고를 냈다. ‘백일 안 된 갓난아이 구함’ 반응이 신통치 않은 채 넉 달이나 흘러버렸다. 몇몇 미혼모가 신중하게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진짜로 돈을 받고 자기 아이를 파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남자가 알고 있는 예정대로라면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진숙 씨가 사방팔방으로 아이를 구하려고, 갓난아이를 사려고 애쓰던 중, 어느 날 뜻밖에 메일이 왔다. 갓난아이를 팔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3


순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길을 걷고 있다. 새벽은 정신없이 흘러갔고 동이 트려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겨우 골반에 걸쳐진 청바지와 배가 살짝 드러난 탱크 탑. 통굽 구두. 긴 생머리. 순미는 손에 쥔 검은 봉지를 흔들며 아주 천천히 골목길을 걷고 있다.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몰래 갖다버린 쓰레기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백 미터쯤 되는 골목길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갔다가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낮에는 몇몇 애들이 놀이터 삼아 골목길을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이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누가 어느 집에 살고 있는지 그들끼리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순미는 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녀는 조그만 호프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제는 술에 취해 마지막까지 남은 손님을 따라 갔기 때문에 집에 올 수 없었다.

문을 열자 악취가 문밖으로 몰려나왔다. 순미는 코를 쥐고,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형광등에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순미는 얼굴을 찌푸리며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이를 찾고 있었다. 술 취한 순미는 방 안의 쓰레기와 아이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침대와 벽 사이 틈에 끼여 힘겹게 자고 있는 아이가 술 취한 순미의 눈에 들어왔다. 순미는 조용히 아이 이름을 불렀다.

순미는 아이가 측은하고 불쌍했지만, 그 마음은 곧 짜증으로 바뀌었다. 순미는 달려가서 아이를 틈에서 퉁명스럽게 빼냈다. 아이 몸에서 뭔가 썩는 냄새가 났다. 아이를 침대에 누이고 바지를 벗겨내자 말라비틀어진 똥이 아이의 사타구니부터 발까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순미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미는 열여섯 살 때 동갑짜리 남자애와 동거를 시작했다. 불러오는 배를 둘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임심한 사실을 엄마에게 들킬까봐 집에서 나와 버렸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아이를 지우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순전히 애들 생각이었다. 뒤늦게 순미의 엄마가 찾아왔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였다. 순미는 만삭이었다. 보통 산모들은 진통을 열 시간씩 겪으며 아이를 낳았지만, 순미는 아무 고통 없이 금방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서는 신기한 일이라고, 산모가 너무 어려서 진통이 찾아오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출산을 앞 둔 산모들은 순미를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둘은 막 입학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 순미는 애를 키워야 했고, 남자애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순미는 시장에서 젓갈을 파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고, 남자애는 형하고 둘이 살았기 때문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 다행이 순미의 엄마가 작은 월셋방을 얻어주어서 둘은 살림을 살 수 있었다. 남자애는 중국집에 취직해서 자장면을 날랐다. 칠십 만원이라는 돈이 아주 큰돈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당황했다. 생각보다 분유 값과 기저귀 값이 많이 들었다. 그래도 둘은 행복했다. 한참을 어른 흉내를 내며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둘 다 진짜 어른이 되고부터 시작됐다. 진짜 어른이 되고 나니 어른 흉내가 재미없어진 것이었다. 나이에 맞게 놀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게 아이가 스스로 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순미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벗겨낸 바지로 아이 몸에 달라붙은 똥을 대충 닦아냈다. 사 년이나 지났는데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순미는 벗겨낸 바지를 방구석에 집어던졌다. 구석에는 과자봉지, 먹다 남은 음식, 아이의 기저귀 같은 것들이 수북이 쌓여 썩고 있었다. 순미는 침대 위를 대충 정리하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아이와 멀찍이 떨어져 누웠다. 고단한 숨이 쏟아져 나오자 스르륵 밀린 잠이 찾아왔다.

동이 틀 무렵 아이가 잠에서 깼다. 엄마 순미는 웅크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아이가 천천히 다가가 순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배가 고픈데도 보채지 않고, 엄마가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렸다. 그 정도의 기다림은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 만큼 아이는 지난밤 큰 것이다.


4


먼저 돈을 부쳐주세요.

그쪽을 어떻게 믿고 돈을 줘요. 일단 만나서 아이를 보고…….

일을 진행하려면 착수금이 필요해요. 아이 엄마에게 진짜로 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니까.

그럼, 내가 그쪽으로 돈을 가지고 갈게요.

……전화 다시 할게요.

진숙 씨는 전화를 기다렸지만, 핸드폰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진숙 씨는 초조해졌다. 그들이 아이를 파는 사람들이 아니라, 경찰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숙 씨는 속으로 진짜 아이를 산 것은 아니니 괜찮을 거라고 자족하려 애썼다. 진숙 씨는 카페에 개설했던 방을 없앴다.

한밤중에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낮에 걸었던 번호와 다른 것이었다.

지금, 괜찮아요?

근데 그쪽은 뭐하는 사람들이세요?

저희야, 만나보시면 아는 거고. 지금 사무실로 와야겠는데.

사무실이라니요? 밤이 너무 늦었는데…… 여기 지방이에요. 서울까지 두 시간은 걸리는데.

당장 돈 가지고 오세요. 아니면 없었던 일로 할 테니까.

아침에 보면 되지. 돈도 찾아야 하고, 그쪽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알 수 없으니, 내일 아침 일찍 봐요.

……전화 다시 할게요.

이번에도 전화는 갑자기 끊겼다. 진숙 씨는 겁이 와락 났다. 자기가 있는 곳을 상대방은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진숙 씨는 아파트 현관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자물쇠를 확인했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내일 아침에 사무실 근처로 오세요. 다시 전화 줄게요.

전화는 뚝 끊겼고, 한참 후에 문자 하나가 왔다. ‘청량리역 9시’ 진숙 씨는 문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런 일을 하려면 자신이 먼저 강해져야 하는데, 발끝부터 올라오는 두려움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핸드폰으로 하지. 안 받을 뻔했잖아.

집에 일찍 들어왔나 확인해보려고 했지.

몸은 괜찮아? 걱정돼 죽겠네. 내가 들어갈까 봐.

아니야, 아니야. 그러지마. 여기 이모도 있고, 사촌들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근데, 애기 낳고, 좀 있다 가야 할 거 같아.

얼마나? 왜? 무슨 문제 있대?

아니, 서류랑 완벽히 되려면 좀 걸린대.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성수 씨. 많이 보고 싶어. 우리 행복하게 오래 살자.

무슨 일 있어?

아냐, 전화 또 할게.

거기 전화번호라도 알려줘. 답답해 죽겠어.

내가 할게.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 이해해 줘.

진숙 씨는 딱히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전화를 한참 동안이나 붙잡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자신이 정말로 이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순정을 바치기 위해서는 꼭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유산했다고 말할 참이었다. 어떻든지 진숙 씨는 남자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숙 씨는 약속한대로 청량리역에서 아이를 팔겠다는 사람을 기다렸다. 삼십 분쯤 지났을 때,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진숙 씨는 아직 어려 보이는 남자애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전화한 사람이 너니?

진숙 씨의 태도는 사뭇 어제와는 달랐다. 어린 남자를 보자 진숙 씨는 이상하게 걱정이 사라졌다.

아줌마 따라와.

짧은 스포츠머리에 작은 키의 남자가 앞장서고, 진숙 씨가 천천히 뒤를 따랐다. 이제는 문을 거의 닫은 청량리 사창가를 지나, 굴다리를 지나, 경동시장을 지나, 제기동 어느 골목길, 남자가 재빠르게 사라졌다. 남자가 들어간 곳, 허름한 건물 이층에 직업소개소가 있었다. 진숙 씨는 잠깐 망설이다가 남자가 사라진 건물 이층으로 올라갔다.

전화로 말했던 사무실에는 낡은 소파밖에 없었다. 가운데 놓인 탁자 위에 전화기가 두 대, 창가에 널어놓은 수건, 한쪽에 벗어놓은 구두, 벽에 기대 서 있는 스포츠형의 어린 남자애, 그리고 머리가 살짝 벗어진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것을 보니 구두의 주인은 대머리인 듯 보였다.

아줌마가 애 필요하다는 사람이야?

뭐야? 애는 어딨어?

좀 앉아봐. 앉아서 얘길 해야지.

진숙 씨는 볼 것도 없는 사무실을 계속 두리번거린다.

짧게 해. 구질구질한 거 싫으니.

아줌마, 돈 가져왔어요?

그런데 직업소개소에서 그런 일도 해요?

진숙 씨는 기죽지 않으려고 대머리가 내뱉는 말끝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대로 맞받았다. 반말을 하면 반말로 대답하고, 존대를 하면 존대를 붙였다.

여기 심부름센터야, 알고 있죠? 뭐하는 덴 줄.

대머리가 교묘하게 말을 섞었다.

돈은 얘기 잘 되면 오후에 부쳐줄게. 걱정하지 마요. 일만 잘되면 후하게 줄 테니.

대머리가 슬쩍 벽에 기대고 서 있는 스포츠형을 쳐다봤다.

딴 생각 마.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애기만 가져오면 서로 좋을 거야.

착수금 필요하단 말 잊었어?

진숙 씨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게 뭐야?

차용증이야. 일이 잘못되면 돌려받아야지 않겠어?

심부름센터 직원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 서로 믿자. 좋았어.

대머리가 도장을 찾아와 차용증에 도장을 찍었다.

언제 줄 수 있어? 시간이 얼마 없어.

곧 연락할게, 아줌마.

허튼 생각은 하지 마. 일이 끝나면 착수금의 열 배를 줄께.

진숙 씨는 탁자 위에 수표를 던져놓고 사무실을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들에게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나왔다. 모처럼 서울 하늘은 높고, 햇살은 맑았다.


5


아이에게서 나는 더러운 냄새 때문에 순미는 아이를 안을 수 없었다. 아이는 자꾸 밀어내는 엄마를 향해서 다가섰다. 순미는 잠이 덜 깬 채로 가만히 일어나 앉았다. 아이가 천천히 다가와 순미의 무릎에 앉았다.

더럽게, 진짜.

순미가 아이를 퉁명스럽게 밀쳐냈다. 아이가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아이가 엄마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손에 쥐고 있는 빈 과자봉지만 만지작거렸다. 지난밤,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볼 수 있을 만큼 큰 것이다. 아이는 마주앉아 있는 엄마가 자기를 안아주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순미가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아이는 엄마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에 쥐고 있는 빈 봉지를 쳐다봤다. 아이가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나가버린 엄마를 원망할 수 있을 만큼 아이는 큰 것인지도 몰랐다. 아이는 배가 고팠다. 어제 오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이였다. 아이는 먹을 게 없는지 방 안에 쓰레기들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네 살 된 아이는 이미 아이 같지 않았다.

순미가 음식을 사가지고 와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들고 온 봉지에서 만두와 김밥을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엄마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음식 앞으로 다가섰다. 아이는 배가 너무 고팠다.

어린 엄마가 만두를 집어 아이에게 건넨다. 뜨거운 만두를 들고 아이는 어쩔 줄을 모른다. 순미는 텔레비전 위에 있는 검은 봉지를 발견했다. 순미는 어제 사온 만두와 김밥을 기억하지 못했다. 순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이는 또 엄마가 없어진 것이 아닌지 먹던 만두를 입에 대고 엄마가 사라진 화장실을 멍하니 쳐다봤다. 곧 순미가 걸레 같은 수건에 물을 적셔 나왔다. 아이는 막 두 개째 만두를 집어먹었다.

순미가 물수건으로 아이 몸을 닦았다. 얼굴을 닦고, 손을 닦고, 바지를 벗기고 구석구석 똥딱지를 닦아냈다.

형수, 혼자 있을 수 있지? 착하지, 우리 형수.

아이는 만두 먹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혼자 내버려두어도 울면서 보채지 않았다. 혼자 집을 지키기 시작한 맨 처음, 며칠을 빼고는 아이는 웬만해선 울지 않았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터득한 게 체념이었다. 그런 것을 아이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는 먹을 것을 주면 엄마가 곧 집을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가 천천히 배를 채운다. 한 끼 식사가 끝나면 엄마가 집을 나간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다. 아이는 시간을 느낄 수 없으니 기다림이 긴지, 짧은지 알지 못할 것이다. 순미는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팔.

순미가 내뱉는 욕설을 알아들었는지 아이 눈이 뚱그레진다. 순미는 몇 년째 소식도 없는 남편에게 외마디 욕을 내뱉었다. 동갑내기 남편이 있다고 해도 형편이나 상황이 나아질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짐을 자신만 떠안은 것 같아서 억울했다. 순미에게 아이는 인생의 실수이자, 짐이고, 과거의 시간과 미래를 독식하는 흡혈귀처럼 생각되었다. 처음엔 아이를 들쳐 업고 사라진 남편을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어린 남편은 매번 잡혀주지 않았다. 그에겐 책임감은커녕 가족에 대해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순미는 매일 눈을 뜨면 사라진 남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아이는 만두와 김밥으로 배고픔을 달래고, 순미는 부족한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에 잠깐 방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뿐이었다. 쓰레기는 날이 갈수록 방 안을 점령해갔다.


6


대머리와 스포츠형은 갓난아이를 찾아 나섰다. 벌써 보름째 허탕을 치고 있었다. 갓난아이를 주문한 진숙 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독촉전화를 해왔다. 진숙 씨가 다른 심부름센터에 의뢰해 두 사람의 신병을 확보해놓은 상태라 발을 뺄 수도 없었다. 동종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갓난아이를 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 있는 집에 들어가 몰래 훔쳐내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혹 누군가 버린 아이를 낚아챌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떤 엄마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디 갓난아이만 혼자 놔두겠는가. 그들만 모르고 있었다.

처음엔 산부인과 근처를 얼쩡거렸다. 그러나 그곳이 갓난아이들을 가장 특별히 관리하고 보호한다는 것을 일주일이나 지나고서야 그들은 깨달았다.

착수금으로 받은 이천만 원은 이미 쓰고 없었다. 대머리는 카드빚을 갚았고, 스포츠형은 경마장에 가서 하루 만에 돈을 날렸다. 돈을 모두 쓴 다음에 그들은 전화번호를 바꾸고 잠수를 탔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그들도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잠수탄 지 하루 만에 다른 심부름센터에서 그들을 잡으러 왔다. 진숙 씨가 고용한 직원들이었다. 보름이 지나면서 착수금으로 받은 이천만 원은 삼천만 원의 빚으로 늘어났다. 돈을 다시 되돌려줄 방법도 없거니와 아이를 구해다만 주면 이억이라는 돈을 벌 수도 있으니 대머리와 스포츠형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머리가 스포츠형에게 제안을 했다.

왜 그걸 몰랐지?

뭘?

애기 엄마랑 같이 훔치면 되는 것을.

납치 아냐?

어쨌든 인마.

엄마는 어떻게 하게?

……어떻게 되겠지.

아기 엄마와 아이 모두를 납치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들도 이런 일은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주로 빚쟁이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일이 대부분이었지, 사람을 납치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겁이 슬슬 나기 시작했다. 사람은 겁이 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계획했던 모든 일은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대머리와 스포츠형이 갓난아이를 찾아 서울 시내와 지방을 돌아다닌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빚은 오천만 원이 됐다. 이제 콩팥이라도 팔아야 했다. 그들은 해결사들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이 반도 안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심부름센터 직원의 협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진숙 씨의 전화도 매일 걸려왔다. 이 모든 일이 대머리와 스포츠형 때문인 양 전화에 대고 화풀이를 했다.

둘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대머리와 스포츠형은 낡은 봉고차에 몸을 싣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하게 날이 저물고 있었다. 대머리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왜?

쟤네 어떠냐?

스포츠형이 윈도우를 내리고 백미러를 보았다. 어떤 여자가 한 팔로 아이를 안고 한쪽 어깨엔 기저귀 가방을 멘 채, 우산을 들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하게? 차들이 이렇게 많은데?

누가 관심이나 있냐? 애가 어려 보였어.

그래도 좀.

빨리 차에 태워. 거의 다 왔잖아.

내가?

시팔, 콩팥 팔래?

에이, 진짜.

스포츠형이 일단 봉고차에서 내렸다. 슬쩍 애기 엄마를 쳐다봤다. 여자는 아이가 비를 맞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산을 앞으로 깊숙이 내리고 걷고 있었다.

스포츠형이 소리 나지 않게 봉고차 뒷문을 열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땅만 쳐다보며, 오직 아이가 한 방울의 비도 맞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스포츠형이 여자를 차에 태운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여자는 짧은 비명 한 마디도 내지르지 못하고 봉고차에 올라탔다. 아이를 손에서 놓칠까봐 상황을 파악할 정신이 없었다. 갓난아이를 가슴에 안은 여자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 동안 큰 눈만 껌벅였다.

스포츠형이 사시미 칼을 꺼내들었다.

가만히 있어. 애기고 뭐고 다 죽으니까.

여자는 아이를 더 꼭 가슴에 끌어안았다.

아이만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흥분한 스포츠형과는 달리 여자는 침착했다. 그것은 엄마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였다.

형, 이제 어떡해?

좀 있어봐. 일단 애기 좀 봐봐.

스포츠형이 아이를 감싸고 있는 담요를 들추려 하자 여자가 완강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갓난아이가 잠에서 깨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만 듣고도 아기가 백일도 안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가 스포츠형을 밀치고 정신없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대머리가 재빨리 도어락을 걸었다. 스포츠형이 얼른 일어나 여자가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끌어당겼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를 안은 여자는 필사적으로 달리는 차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스포츠형의 손아귀 힘은 세졌다. 필사적이던 여자가 천천히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봉고차 안을 가득 채우고, 아무 정신도 없게 만들 만큼 우렁찼다.

형, 이상해.

뭐가?

애기엄마가.

대머리가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쳐다봤다. 스포츠형이 천천히 아기엄마를 뒤집었다. 여자의 몸이 축 처졌다.

어쩌다 그랬어? 이 병신아.

아이를 가슴에 꼭 안고 죽은 애기엄마의 손에서 우는 아이를 빼내기가 쉽지 않았다. 스포츠형이 능숙하게 아이를 안자 아이는 곧 울음을 그쳤다.

대머리와 스포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탄 차는 고속도로를 타고 진숙 씨가 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스포츠형은 멍하니 죽은 애기엄마를 내려다봤다.

우린 좆됐어. 인마.

대머리가 속도를 높이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아이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한 번도 깨지 않고 순하게 잠을 잤다.


7


햇살은 점점 짧아져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졌다. 가을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혼자 있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졌다. 아이는 스스로,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여름이 지나는 동안 똥과 오줌을 한 곳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사타구니에 똥딱지를 붙이고 있는 일은 이제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다. 순미는 스스로 크는 아이가 대견하기만 했다. 아이는 점점 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는 이제 발끝을 세우지 않고서도 창밖을 구경할 수 있었다.

순미는 오랜만에 아이에게 줄 선물을 들고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술도 마시지 않았다. 아이에게도 친구가 생겼으니, 뭔가 홀가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순미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이는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침대와 벽 사이 틈에 끼어 자고 있었다. 아이가 엄마의 따뜻한 품 대신 항상 의지하는 곳이었다. 넉넉했던 틈이 이제는 아이가 들어가서 자기에는 비좁아 보였다. 순미는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웠다.

형수야, 엄마가 선물 사왔어. 일어나봐.

아이가 좀처럼 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이는 언제나 배고픔과 어두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했기에 깊은 잠을 잤다. 순미는 이틀에 한 번 집을 찾았다. 어떤 때는 삼 일에 한 번 집을 찾았다. 순미는 집에 들를 때마다 아이를 위해 먹을 것을 넉넉히 사가지고 왔다. 과자나 우유, 빵 같은 것을 침대 위에 풀어놓으면 아이는 배고플 때마다 그것을 알아서 챙겨 먹었다.

 아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이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난여름처럼 엄마를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육장에 갇힌 동물처럼 주인의 손만 쳐다보았다. 아이는 일어나서 엄마의 손부터 확인했다. 엄마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엄마 손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아이에게는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다. 대신 생전 처음 보는 것이 아이 앞을 어정거렸다.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수야, 친구야. 사이좋게 지내야지.

검은 강아지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미니핀쳐. 크기는 아주 작았지만 도베르만을 닮은 새까만 개였다. 아이는 엄마와 자신 말고 살아 움직이는 것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순미가 아이에게 강아지를 선물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순미에게 남자친구가 생겨서 예전만큼 집에 자주 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도 클 만큼 컸다고 생각했다. 순미가 네 살배기 아들을 둔 엄마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소녀이기도 했다. 스무 살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기 힘든 나이였다. 순미는 미니핀쳐를 믿고 의지했다. 순미는 강아지와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자 흐뭇해졌다.

아이는 가을이와 단둘이 살게 됐다. 아이와 가을이는 서로 의지하며 지냈지만, 먹을 것을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대립했다. 가을이는 아이보다 빨리 성장했다. 가을이 먹을 것을 따로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이는 쓰레기를 뒤적거렸다. 먹을 것이 없는 가을이는 가끔 아이가 싸놓은 똥을 핥아먹거나, 상해서 못 먹는 음식찌꺼기 같은 것을 먹기도 했다. 몸집이 작을 뿐이지 이미 데려올 때부터 가을이는 성견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가을이의 몸은 날이 갈수록 날렵해졌다. 낙엽이 본격적으로 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지하방의 서열이 바뀐 것이다.

아이는 가을이의 이빨이 그렇게 날카롭게 변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는 가을이가 무서웠다. 순미가 있을 때는 먹을 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순미가 먹을 것을 던져놓고 집을 나가면 가을이는 먹을 것을 독식했다. 과자봉지나 김밥을 집는 손을 가을이는 사납게 물어뜯었다. 아이는 여전히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가 무섭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가능하면 엄마가 있을 때 많이 먹어두는 방법밖에 없었다. 가끔 아이의 몸에 나는 상처를 순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냥 둘이 놀다가 그러려니 생각했다.

방 안의 평화는 깨지고 침대 위에 먹을 것을 두고 아이와 가을이는 매일 생존을 위해 싸웠다. 가을이는 날로 사나워져서 아이는 결국 침대 위에서도 쫓겨났다. 아이는 예전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아졌다. 가을이는 동종보다 몸집이 컸지만, 다른 개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다. 작은 강아지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가을이는 눈치도 아이보다 빨라서 순미가 돌아오면 갖은 재롱을 부리곤 했다. 아이는 엄마에게서 가을이를 떼어놓으려고 애썼지만, 순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이는 점점 더 말라갔다.

순미는 가을이를 집에 데려다놓은 다음부터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남자친구와 따로 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자주 올 수가 없었다.

가을이는 아이보다 영리해졌다. 어린아이보다 개가 환경과 상황에 빠르게 적응한 것이다. 개라는 동물은 아량이라는 것이 없었다. 과자 부스러기 하나도 아이에게 뺏기지 않았다.

아이는 먹지 못해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졌다. 순미가 오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먹을 것을 먹어치웠다. 가을이는 쓰레기가 쌓여 있는 방구석에서 잠자코 아이를 지켜보았다. 순미는 아이가 쑥쑥 크려고 먹는 양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순미가 들고 오는 식량은 예전보다 늘어났지만, 아이는 예전보다 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순미는 이제 집에 와서도 자고 가는 날이 드물었다. 든든한 강아지가 있으니 걱정이 덜했다. 먹을 것만 내려놓고 다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이가 굶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알 리 없었다.


8


진숙 씨가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받아들었다. 비가 그치자 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반팔 옷을 입은 스포츠형의 이빨이 달그락거렸다. 진숙 씨가 리모컨으로 자기가 타고 온 차의 트렁크를 열었다. 시커먼 저수지가 그들을 묵묵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수지를 끼고 도는 도로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다. 스포츠형이 차 트렁크에서 돈 가방을 꺼냈다.

저기…….

담배만 피워대던 대머리가 말문을 열었다. 스포츠형이 낑낑대며 돈 가방을 봉고차에 실었다.

액수는 틀림없어.

진숙 씨가 뒤돌아 가면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게 아니라, 일이 좀 생겨서.

진숙 씨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스포츠형은 여전히 이빨을 달그락거리며 차문 옆에 엉거주춤 서 있고, 대머리는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무슨 일인데?

그게, 일로 좀…….

진숙 씨가 아이를 덮은 담요를 추스르며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스포츠형이 봉고차 뒤로 가서 온몸을 덜덜 떨며 저수지에 오줌을 누었다.

업. 이, 이게 뭐야?

대머리가 황급히 진숙 씨의 입을 막았다.

어쩌다 그렇게 됐슈.

진숙 씨가 봉고 차에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생각 좀 더 해주슈.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진숙 씨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내, 내일 돈 부칠게. 난 모르는 일이야. 시킨 적도 없고.

진숙 씨가 자기 차로 뛰기 시작했다. 스포츠형은 천천히 쭈그리고 앉았다. 진숙 씨의 차가 황급히 저수지를 빠져나갔다.

재수 없게 고만 좀 떨어.

……오줌 싸면서 생각한 건데, 저수지에 빠칠까.

……그냥 묻자.

그게 더 간단하잖아.

배 타고 가운데까지 가야잖아. 인마. 가서 업고 와. 빨리.

대머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둘은 저수지 근처 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수지 둘레에 빙 둘러진 철망을 따라 산을 올라갔다.

사람들 안 다닐까?

모르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스포츠형이 자꾸 밑으로 처지는 시체를 연신 고쳐 업었다.

에이 모르겠다.

여기 묻게?

둘은 산 중턱쯤에 시체를 내려놓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둘은 미친 듯이 땅을 팠다. 땅을 파다 말고 대머리가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이쯤 하면 명당이다, 야.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산 능선이 겹쳐 보였다. 스포츠형이 삽을 놓고 같이 저수지 쪽을 바라보았다.

뭐하는 여자였을까?

그냥 재수 없었던 애엄마지.

둘은 말없이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동물들이 허튼 짓을 할 수 없도록 깊은 구덩이를 팠다. 가지고 온 침낭 안에 시체를 넣어서 매장했다.

땅을 메우자마자 스포츠형이 허겁지겁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야.

대머리가 스포츠형을 불러 세웠다.

절이라도 하고 내려가야지. 넌 싸가지가 없냐.

둘은 나란히 서서 두 번 절하고, 황급히 산을 내려갔다.

한 달 후, 진숙 씨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데리고 남자에게 돌아갔다. 남자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남자 쪽 식구들은 아이가 남자를 쏙 빼닮았다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컸지만, 모두 다 남자를 닮아서 그런 거라고, 귀골이 장대한 운동선수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저마다 칭찬을 늘어놓았다.

진숙 씨는 자신의 오랜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9


분명히 아직 가을이어야 했으나, 이상기온 현상으로 전국은 꽁꽁 얼어붙었다. 정말 이상한 날씨였다. 월동 채비를 하지 못한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했다.

아이와 가을이 살고 있는 집도 꽁꽁 얼어붙었다. 엄마는 일주일째 집에 오지 않고 있었다. 진즉에 먹을 것은 떨어지고 없었다. 아이는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간혹 가을이가 창에 대고 짖어댔다. 가을이가 짖을 때면, 골목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슬쩍 창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일주일이 또 지났지만, 아이는 침대 위에서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가을이는 더욱 사나워져서, 창밖으로 사람이 지나가지 않아도 계속 짖어댔다.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어느 집 지하방에 어린아이 귀신이 산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그 집을 알고 있는 아이들도 늘어났다. 골목길에 사는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창문으로 집 안을 엿보기 시작했지만, 미처 방 안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개 짖는 소리에 놀라 모두들 쏜살같이 흩어져 버렸다. 골목길에 사는 어른들도 지하방 창문에 무리지어 있는 아이들을 자주 목격하였다. 그중 하나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살짝 열려진 창틈으로 본 방 안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경찰이 문을 따고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아이의 몸은 부패해 있었다. 가을이는 얌전히 방구석 쓰레기더미 위에 앉아 먹을 것을 기다렸다.

사건의 전말은 엉뚱하게 밝혀졌다. 스포츠형과 대머리는 진숙 씨에게 끊임없이 돈을 요구했다. 이것을 눈치챈 남자의 가족들이 흥신소 직원들을 고용해 돈을 뜯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경찰에 고발한 것이었다.

순미는 집에 돌아올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유치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순미는 만나는 남자친구와 함께 마약을 투여하다 잡혀온 상태였다. 유치장에 갇히고서야 아이가 있다고,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사정했지만, 마약사범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경찰은 아무도 없었다.

납치 살인 사건과 방임으로 굶어죽은 아이에 대한 사건이 동시에 발생한 관할 경찰서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경찰서에서 순미와 스포츠형이 마주쳤다. 순미가 수갑을 찬 채로 스포츠형에게 달려들었다.

개자식, 다 너 때문이야.

스포츠형은 멍하니 순미를 쳐다봤다.

니가 여기 웬일이야?

진숙 씨와 대머리가 슬쩍 둘을 쳐다보았다. 경찰서 안에 있는 사람들도 무슨 일인지 눈이 휘둥그레져 둘을 쳐다봤다.

얘가 애아빠야?

경찰이 놀란 듯이 물었다.

저자식이 굶겨 죽인 거예요. 저는 잘못 없어요.

진숙 씨가 갖고 있던 돈은 원래 남편이 돌려받았다. 진숙 씨의 동거남이 아이를 경찰에 인계하고 사라졌다.

아이는 입을 실룩거리며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애가 깰까봐 경찰서 안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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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은 내게

그해 겨울은 내게 백가흠 방안에 어둠이 번지며 축축한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찬 공기가 몸 안에 가득 차며 퍼진다. 가스가 끊긴 지 두 달 전이다. 조금만 견디면 겨울은 가고 봄이 올 것이다. 나는 차가운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중이다. 내게는 겨울이 ‘가혹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겨울을 내 생에서 다시 맞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나는 혹독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매일 나는 마음의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마흔다섯 번째 겨울을 나는 강원도의 한 작은 도시에서 버티고 있다. 하루하루가 힘겹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원룸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 웬만한 추위를 견디는 데 불편이 없었지만, 며칠 전부터 엄청난 한파가 시작된 뒤로는 소름 끼치는 한기가 등에 붙어 나를 괴롭힌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갖은 애를 써도 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도서관은 따뜻하고 읽는다는 일거리가 있어서 좋다. 나는 휴대용 버너에 물을 올린다. 텐트 안에 습기가 차며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텐트 안에 누워 밤이 시작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지루한 삶의 권태와 살이 갈라지는 듯한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 사이 내 밤이 놓여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와 생의 존속을 위한 고통 사이 내 하루가 있다.1) 핸드폰은 정지된 지 몇 주가 지났다. 내게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 친구에게 안부를 전해야 하는 일 빼면 전화기는 내게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평생 내가 맺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나만 외롭고 쓸쓸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한동안은 그간 살아온 내 삶의 방향에 대해 곰곰 해질 수밖에 없었다. 금세 주전자가 울기 시작한다. 고요함이 물러간다. 가끔 이는 소란스러움이 내게는 퍽 소중하다. 나는 따뜻한 물을 한 잔 천천히 마신다. 추위가 잠시 녹는다. 뜨거운 물을 물통에 담아 꼭 껴안는다. 다른 하나는 침낭 안에 넣어 둔다. 얼어붙었던 하루의 고뇌가 녹는 것 같다. 온종일 먹은 것이 없으니 배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이런 허기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처한 어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 그제는 한 끼라도 먹었으니, 어제, 오늘은 굶을 수도 있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고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굶었다. 끼니를 때우는 대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지막 남은 돈으로 소주 두 병과 담배를 샀다. 마지막까지 나는 무얼 먹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배고픔을 견디기로 했다. 소주와 담배만큼은 쉬이 참을 수 없었다. 술이 없으면 한잠도 잘 수가 없고 담배가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다. 담배는 허기를 채워 주는 묘약이다. 소주는 내 안에서 끓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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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모텔 부흥회

[단편소설] 감귤모텔 부흥회 백가흠 1. 57회 기도회는 제주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이른 아침, 나는 제주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렌터카를 찾고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석윤 형, 그럼, 이번 모임에 참석자가 우리 둘뿐이라는 거예요?” 원희가 조수석에 앉으며 씩씩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신앙심이 없어서야.” 내가 차에 시동을 걸며 답했다. “우리처럼 모임에 간절하지 않은 거죠.” 그렇게 57회 모임은 열리지 못했다. 나와 원희를 빼고는 아무도 제주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 그럼 연락책인 나한테 먼저 얘길 했어야지, 일정을 취소하고 알려주지도 않으면 어떡해?” 찬일 형과 통화를 하다가 나는 버럭 화를 냈다. “흥식이가 얘기한 줄 알았지. 경수, 훈이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야. 이번에는 그렇게 됐으니까 둘이 잘 놀다 와. 그리고 네 말대로 연락책인 네가 미리 연락하고 챙겼어야지, 형한테 뭐라고 그러면 어떡해?” 찬일 형이 점잖게 나를 나무랐다. 찬일 형은 우리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고 멤버들의 구심점이었다. 의료기기 사업을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었는데, 근래 영역을 서비스업까지 확장해서 사업을 더 키우고 있었다. “……그러게 형에게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요. 흥식이가 연락을 나한테 해야 했는데, ……어쨌든 알았어요. 여기까지 헛걸음한 거 같아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세요, 형.” 나는 어느새 풀이 죽어 찬일 형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통화한 내용을 원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번 모임이 무산된 게 내 탓 같았다. 다행이라면 급할 일이 나도 원희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은 제주에서 예정되어 있던 사흘을 함께 지내기로 했다. 회비로 예약한 스위트룸은 취소한다고 환불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정이 쉬웠다. “사람들이 약속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 그러다 큰 화가 내릴 거야. 우리는 복을 받을 거고.” 원희가 말하며 ‘커커컥’ 하고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독특했다. 웃을 때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 웃음소리가 웅장했는데 웃음의 마무리가 언제나 확실했다. 그는 키가 190cm, 몸무게는 110kg을 훌쩍 넘는 거구였다. 그는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땀을 흘렸다. 겨울에도 반소매만 입고 다닐 만큼 열이 많았다. 생김새는 우락부락했지만 성정이 순한 사람이었다. 아니, 나는 그를 그렇게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모임이 있을 때만 가끔 보았고 따로 단둘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그를 십여 년 동안 56회 만났지만, 개인적인 얘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해안가를 뒤로 하고 우리는 숙소까지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중산간 도로를 타고 한라산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 속력을 내자 제주라는 공간이 주는 흥분이 나도 모르게 일었다. “그런

  • 백가흠
  • 20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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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기태에게 형님이 있는데, 집안의 장손이 될 수 있나요? 사촌이라해도 서열이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데요~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 2007-12-03 18:02:4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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