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 작성일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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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김설원 「팔월극장」
김유림
1. 불가능한 연출
정상과 비정상 사회를 구분하긴 사실상 어렵다. 기준을 찾는다면 역사일 것이다. 역사란 과거이며, 과거는 현재 시점으로 소환될 때 의미가 있다.1) 역사에 내재한 의미는 비정상과 정상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하다. 헤겔은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 집적된 현상을 추론하고 검증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 ‘절대정신’에 이르기를 주문한다.2) 절대정신은 역사 변증법을 거쳐 ‘앎에 이르는 자기 인식’이다. 자기 인식은 ‘자유의지’와 동일한 의미로 억압을 벗어날 때 실현된다.3) 문학을 포함한 예술, 철학 등 인문학이 역사를 검증하려는 노력도 자유의지, 주체적인 인간의 실존을 강화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김현 평론가는 ‘문학이 억압하지 않지만,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4)라고, 적시한 바 있다. 이는 문학이 결코 유희적이거나 감상적 산물이 아닌 억압당하는 인간의 실존을 복기하는 장르임을 알린다. 김설원5) 작가의 단편소설 「팔월극장」6)은 2024년 현진건 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비정상 시대를 밀도 있게 다루면서도 미학적인 감응이 풍부한 작품이다. 특히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4‧19 역사를 덧입혀 주목된다.
「팔월극장」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는 화자 영진을 중심으로 연기자를 꿈꾸는 윤희,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영진의 엄마와 여동생이 등장한다. 영진은 엄마, 여동생과 함께 지방 도시에서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홍보 인쇄물 제작업체에 취업하지만 ‘생존 활동’에 불과한 일에 회의를 느끼고 직장을 그만둔다. 직장을 그만둔 영진의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 여부가 물음으로 확증된다고 밝힌다.7) 영진은 육체 보존 목적뿐인 삶에 왜? 라는 물음을 던진 것이다. 푸코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구현하는 행위를 심지어 ‘예술 행위’로 규정했다.8) 영진은 육체만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 세계를 찾아 고향을 떠난다. 학원에서 연출 전공 강좌를 수강하고 운 좋게 영화제작사에 들어간다. 영화(제작, 연출)에 매진하지만, “성질이 더욱 고약해진 ‘가난’과 마주쳐야 했다.” “자부심이랄지 성취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한숨과 카드 빚만 늘어 가는 생활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25쪽) 영진은 물질이 지배하는 비정상 시대에 억압당했다. 생활고에 엄마의 죽음이 포개지면서 영화감독의 꿈은 와해 될 상황에 직면한다.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여동생이 문자메시지로 임종 소식을 알렸다. 새벽 한 시가 막 넘어선 때였다. 휴대전화에 찍힌 부고를 보는 순간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맥주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공연히 신경질을 부렸다. 부주의로 내 어깨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가는 여자에게 눈을 부라리다 싸울 뻔했다. 침착하자고 마음을 다잡을수록 악의가 솟구쳤다. (팔월극장, 18쪽)
영진이 클럽에서 추는 춤은 유희가 아니라 생존 투쟁이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 생존 투쟁은 악의가 솟구칠 만큼 절박하다. 영진은 클럽에서 나와 영화 시나리오 한 편을 구상하고 피시방으로 간다. 피시방에서 고스톱 게임을 하지만 첫판에서 깨지고 게임에서 퇴장하고 만다. 게임에서 번번이 졌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고향의 엄마 장례식장이 아닌 영화 촬영 장소로 내몬다. 엄마의 육신이 불에 태워지는 순간 영진은 “감독 뒤에 바싹 붙어 앉아 모니터를 보며 남자 배우가 어느 쪽 손으로 여배우의 뺨을 때렸는지, 여배우가 무슨 색깔의 립스틱을 발랐으며,”(19쪽) NG가 몇 번 났는지 등을 꼼꼼하게 적는다.
영진의 행위는 삼십 중반의 보편적인 여성의 사고라고 보기에는 상식에 어긋난다. 코너에 몰린 영진에게 삶은 죽음과 같다. 그녀는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죽음이 엄마의 것이든, 영진의 것이든, 우리 모두의 것이든, 생존 본능은 죽음을 거부하기 마련이다. 죽음 앞에서 상식과 윤리보다 앞서는 가치가 생존 본능이라면 영진의 행위는 설득력을 얻는다. 즉 영진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격렬한 투쟁 중이다. 춤을 추고 고스톱 게임을 하고, 촬영장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NG 장면을 기록하면서 버틴다. 그녀는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삶이라는 촬영장에서 자신의 NG 장면을 보았다. 엄마의 죽음과 함께 영진이 꿈꾸던 삶의 시나리오도 미궁에 빠진다.
2. 균열의 심층
영진은 이성을 찾으려 하지만, 엄마의 장례식이 지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흔들리고 만다. 일자리를 주겠다는 송 피디의 연락을 받고 여행을 떠나겠다며 거절한다. “여행 때문에 일자리를 포기한다고? 너 같은 억척꾸러기가?”(20쪽) 송 피디의 말처럼 영진은 억척스럽게 삶이라는 시놉시스를 다듬어 왔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은 그녀가 빚어내고자 하는 세계에 균열을 낸다.
오늘 오전 열한 시쯤 등기 소포를 받았다. 유별나게 누리끼리한 박스 상단에 고향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여동생이 보낸 거였다. 빈틈없이 붙인 테이프를 쭉 뜯어내는 순간 뭔가가 불쑥 튀어나오거나, 아니면 인체에 치명적인 어떤 기체가 확 퍼져 기절할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을 대기가 꺼려졌다. 엄마가 저승길을 밟은 상황에서 여동생이 무슨 먹거리를 보내기야 했을까. 분명 망자와 관련이 있는 등기 소포일 터였다. 말하자면 유품.
내 짐작은 맞았지만 그 유품이 성경책일 줄은 몰랐다. 손때가 묻다 못해 흐물흐물해진 성경책에 편지 한 통이 부록처럼 달려왔다. 글씨에서 이토록 뜨거운 감정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20, 21쪽)
등기 소포에 적힌 고향집 주소는 영진의 죄책감을 부추긴다. 병든 엄마를 여동생에게 맡기고 장례식도 외면한 장녀, 소포에서 기체가 나와 기절하고 싶은 영진의 심리가 바로 죄의식의 산물이다. 엄마는 영진이 겪게 될 심리적 고통을 간파한 듯 성경을 유품으로 남긴다. 신이 인간의 죄를 대속했으니 성경 유품은 영진의 죄의식을 덜어주려는 엄마의 마음이 배어 있다. 하지만 영진은 초월적 존재에 불신감을 드러낸다. 엄마는 신앙심이 깊었다. 그런 엄마의 삶에 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복한 팔자로나마 오래 살게 해주지도 못해요?”(21쪽) 영진은 신을 허상이라고 느낀다.
영진의 엄마는 고향 재래시장에서 십 년 가까이 생선 장사를 했으나, 생계유지가 힘들어 식당을 차렸다. 식당은 인건비조차 나오지 않았다. 학원에서 수학 강사를 하는 영진의 여동생이 짬짬이 일을 도왔다. 영진 가족은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도 삶을 지탱할 수 없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엄마는 혼자 몸으로 두 딸을 키우며 생활고와 질병에 시달리다 생을 마쳤다. 영진 가족의 고통은 지역 경제의 파탄이 원인으로 제시된다. “엄마의 오랜 생활 터전이자 내 고향인 항구도시는 변모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결국 쇠락했다. 물론 엄마도 그 불화의 피해자였다.”(22쪽) 로컬 회생의 현실적 대안 마련은 사회 정치 영역이다. 이 시대 정치는 진영논리, 계파 싸움, 권력욕에 취해 영진 가족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 영진의 영화 연출은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남는다.
3. 실존 가능성 타진
샐러리맨은 팔베개를 한 채 벤치에 드러누워 있었다, 너무나 피곤하다는 듯 혀를 쑥 내민 얼굴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측은했다. 넥타이가 반으로 접혀 가슴께에 늘어져 있었다, 구두는 벗어 던졌다. 왼쪽 무릎에 오른쪽 다리를 걸친 그의 머리맡에는 두툼한 서류 가방이 놓여 있었다. (25, 26쪽)
영진이 현실에 회의감을 안고 찾아간 샐러리맨은 인공 조형물이다. ‘제목, 제작자, 제작 연도’가 그의 정체지만 그것조차도 확인 불가능하다. 영진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듯이 샐러리맨의 고단한 일상을 지켜본다. 그의 양복 자락을 깔고 앉아 “오늘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지쳐 있는지”(26쪽) 묻는다. 급기야 운동화를 벗고 샐러리맨 팔에 머리를 기댄다. 그의 해쓱한 얼굴을 쓰다듬고 넥타이도 매만진다. 샐러리맨과 교감은 영진 자신이 인공 조형물과 다름없는 상태임을 알린다. 샐러리맨은 조직의 체계에 따라 움직이고 정해진 임금을 받는다. 틀에 짜인 일상을 영위하는 그들은 자유의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샐러리맨과 영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해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딸기 먹을래요.”(27쪽) 영진은 배낭에서 딸기를 꺼내 샐러리맨에게 말을 건넨다. 딸기를 치유제처럼 먹고 상처, 고통, 죄의식, 실패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새콤달콤 살맛 나는 딸기’ 플라스틱 투명 상자에 붙은 홍보 스티커의 문장은 매혹적이다. 영진은 딸기를 먹으면 정말 살맛이 나는지, 엄마를 살릴 수 있는지 샐러리맨에 묻는다. “엄마는 이런 생각이 든대요. 살맛 난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27쪽) 딸기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과일이었다. 샐러리맨은 어떤 답도 줄 수 없다. 조형물에 불과하니까. 영진은 샐러리맨 곁에 누워 나뭇잎 사이로 펼쳐진 하늘을 본다. “어떤 상처든 낫게 해주는 신비한 물이 가득 담긴, 옹달샘을 닮은 하늘이었다.”(27쪽) 자연은 생명이고 근원이다. 그러나 자연을 통해 시도된 삶의 의지는 꺾일 수밖에 없다. 영진도 샐러리맨처럼 조형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대학교 입학 선물로 사 준 손목시계는 흠집 하나 없다. 항상 차고 다녀서 신체의 일부 같았던 손목시계의 거처만큼은 분명히 해 두고 싶었다, 윤희라면 진심으로 끝까지 간직해 줄 것이다. (··‧) 내가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줄 수 있다면 엄마부터 살려내야지. 그런데 엄마는 이승에서 다시 살고 싶다고 할까? 얼마쯤 살아 보니 차라리 저승이 낫다고, 함부로 환생시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칠지도 몰랐다. (28쪽)
영진은 윤희에게 자신의 분신과 같은 시계를 넘겨주려 한다. 시계를 넘기려는 의도는 시간의 포기로 실존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시계는 엄마와 영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엄마를 살리고 싶은 욕망은 실현 불가능하다. 영화제작은 현실적인 꿈이지만 영진에게는 이룰 수 없는 욕망이다. 따라서 이승으로 환생하고 싶지 않아 손사래를 치는 사람은 엄마가 아닌 영진이 틀림없다. 그녀는 시계를 윤희에게 넘기기 전 ‘룩안경원’에 들린다. “오늘 나의 눈은 촬영 카메라인 만큼 어디 이상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28쪽) 자살을 결심한 영진이 세심하게 살펴보려는 것이 무엇일까. 안경사는 렌즈에 와인 색깔을 입혀 멋을 내 보라고 권하지만, 영진은 “그냥 물처럼 투명하게 해주세요.”(28쪽)라고 말한다. 상식이 통하고 열심히 일하면 기회가 주어지는 공정한 사회, 영진이 새 안경을 맞춰 쓰고 보려는 세계는 투명한 사회가 아닐까. 뒤르케임은 자살을 개인이 사회로부터 강한 제약을 받을 때 일어나는 사회 현상이라고 보았다.9) 사회가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면 영진이 죽음을 기획할 필요가 없다.
영진은 불투명한 미래에 무력감을 느낀다. 고갈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안경을 기다리는 동안 정수기의 물을 넉 잔이나 마셨다. 손바닥에 얽힌 손금을 들여다보며 살아야 할 필요조건을 찾는다. 영진의 눈에 비친 손금은 손바닥에서 자라나는 나무뿌리(희망)다. “우리는 너나없이 손에 나무 한 그루씩 지니고 산다. 단풍나무, 사과나무, 복사나무, 뽕나무, 바오밥나무···.”(29쪽) 나무는 ‘생존 무대’를 지키고 싶은 영진의 내면 심리를 표상한다. 샐러리맨/딸기/손금/나무 메타포는 김설원 작가 특유의 미학적 문법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새 안경을 맞춰 쓰고 영진이 바라본 사회는 살고 싶을 만큼 투명해졌을까. 의문이 든다.
4. 다시 쓰는 시대의 시놉시스
윤희는 전형적인 소외계층으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중학생 때부터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꿈을 지니고 사는 여성이다. 팔월극장에서 배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영진이 속해 있는 극단을 찾는다. 극단 재정이 좋지 않아 재능 기부자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윤희가 자원한 건 ‘자기 배려’, 즉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영진과 윤희는 연기자와 연출자로 만나 동갑, 여성이라는 동질감으로 뭉친다. 영진은 일상적인 고통이나 투자자가 변심하여 영화제작이 무산될 때 윤희를 생각했다. 윤희는 속이 허할 때 영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정신적인 지주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극단이 문을 닫게 되면서 영진과 윤희가 꿈꾸던 무대도 위기를 맞는다.
“너의 꿈은 유효기간이 없는 거지?”(···)
“뭐가 되는 것 같다가 어그러지고, 어그러지고··· 우리는 만년 대기 상태야.”(34쪽)
‘우리’라는 포괄적 어법은 청년 세대가 미래를 기획할 수 없어 ‘만년 대기 상태’라는 엄중한 항의가 분명하다. 빛이 바래지는 꿈 때문에 다 내팽개치고 싶냐는 윤희의 물음에 영진은 답을 유보한다. 영진이라는 개별 주체는 비정상이 춤추는 사회의 가학성을 피할 수 없다. 이 시대 정치는 기득권 유지, 권력 지키기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청년실업, 양극화, 고독사는 한국 사회의 짙은 그림자가 되었다. 영진에게 있어 버팀목이던 팔월극장은 회생 불가능 상태다. 엄마의 죽음까지 겹치면서 답을 낼 수 없는 현재만이 영진 앞에 존재한다. 꿈을 버리고 싶냐는 윤희의 물음은 곧 영진이 자신에게 물음이며 사회 공동체 모두의 자조적인 물음과 같다.
“너희들이 ‘팔월극장’을 앞세워 광고를 냈잖아. 생각나지? 어떤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라 좋았거든.”
“그럼, 기억하지, 팔월극장. 학원 선배가 지은 이름이야. 팔월극장은 4.19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생긴 극단이래. 1960년 봄 공연이 엿새 예정으로 막이 올랐는데 4‧19 때문에 도중하차했대. 극단도 사라졌고. 그 시절의 팔월극장은 운명이 짧았지만 우리의 팔월극장은 오래오래 숨을 쉬자고 포부가 대단했어.” (37쪽)
영진은 “시대적 정치적 상황으로 막을 내린 ‘팔월극장’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들과 다시 ‘팔월극장’을 만들었지만, 그것도 허망한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10) 영화를 제작하여 시대상을 알리려고 뜻을 모았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팔월극장’은 젊은 세대의 팍팍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었다. 영진은 영화를 포기하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의 부고를 듣고, 엄마 얼굴을 지워 버리려 애썼다. 장례식장이 아닌 영화 촬영장으로 달려갔고, 자양강장제, 수면제를 복용하며 무섭도록 한길(영화)만 보고 질주해 왔다. 영진에게 팔월극장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소망, 절망, 미련이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간, 백지상태의 공간.”(24쪽) 짐이 빠져나간 원룸은 삶을 지워 버리고 싶은 영진의 무의식이다. 영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놉시스’를 쓰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시대상을 영화로 제작하겠다는 꿈’ 영진이 무대에 올리려는 시대는 1960년 4·19 혁명의 역사다. 4·19는 국가 주권 권력의 부패와 장기 집권, 권력 강화를 위한 부당한 무력행사에 학생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청년들이 팔월극장의 공연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한 원인이 비상계엄이라는 얘기다. 말하자면 부패 권력이 청년들의 꿈을 찬탈한 것이다. 1980년대 신군부의 계엄 선포에 이어 공교롭게도 2024년 12월 비상계엄 사태가 우리 앞에 다시 실체를 드러냈다. 이는 4.19 이래 60년이 넘는 동안 국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는 주체가 사회 주권 권력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과거나 현재나 청년들은 죽음을 기획할 만큼 고통스러운 현실에 내몰려 거리로 나가 호소한다. 살고 싶다고. 부활을 꿈꾸다가 다시 해체된 ‘팔월극장’은 희망 없는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청년의 미래가 없는 시대는 죽은 시대다. 영진이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잔혹한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가해 주체가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굴까. 가해 주체를 모르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권력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삶으로의 전회
1970년 후반 미국에서 구체화 된 ‘공공 역사’ 개념은 정부와 민간, 역사 유관 단체, 나아가 개인의 활동까지 “역사 연구와 실천을 장려하는 운동이자 방법론이며 접근법이다.”11) 한국 학계의 공공 역사 논의는 ‘역사 대중화’가 기치다. 역사 대중화 프로젝트는 ‘계몽’이 핵심이다. 민중/대중/시민/일반인의 삶에 밀착되어 역사에 관심을 촉발하자는 의도다.12) 이러한 움직임은 역사가 인류의 실존에 해답을 쥐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역사철학이 지향하는 가치는 자유다. 문학의 역사 재현도 가해 주체조차 가려보지 못하는 맹아적 단계에서 탈출하여 자유의지를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발전해 왔다. 「팔월극장」도 이러한 맥락으로 읽힌다.
“시계가 스포티하면서도 여성스럽다. 첫눈에 반할 외모야. 근데 이 멋스러운 시계를 왜 나한테 줘?”
“넌 시간이랑 친하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나 보네. 골동품 같은 시계를 나한테 주고. 나는 남방을 오래 입어서 특특해지면 염료를 사다가 물을 들여. 그럼 새것 못지않아져. 꿈도 그렇지 않을까? 빛이 퇴색하면 다시 색을 입히면 되잖아. 순전히 내 스타일로.” (36~37쪽)
영진은 엄마에게 선물 받은 시계, 자기 신체 일부나 다름없는 손목시계를 윤희에게 건넨다. 영진의 의식을 마지막까지 붙잡은 존재는 윤희였다. 윤희와 영진은 시계를 통해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는 동일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극장 안의 인물이 영진이라면 윤희는 극장 밖의 인물이다. 영진은 극장 안에서 실패했으나, 극장 밖의 윤희는 직장생활과 김밥 장사를 병행하며 현실에 맞선다. 영진은 죽음의 시놉시스를 썼으나 영화 밖 실제 세계에서 윤희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두 사람은 생존이라는 고단한 질서에 순응하면서도 자기 세계를 구축해 왔다. 김설원 작가가 「팔월극장」의 여성들을 통해 보여주는 ‘실존의 시놉시스’는 ‘자유의지의 존엄성’이다.
영진은 삶과 죽음이라는 양극단을 오가면서도 4‧19정신을 영화에 담아내려 했다. 「팔월극장」이 호명한 4‧19 역사는 인간의 실존과 자유를 억압하는 주체가 사회 권력의 비정상적인 통치 행위임을 밝힌다. 문학은 시대를 고민하고 억압에 저항하며, 미래 희망을 이야기하는 인간 실존의 무대다. 문학은 정상 사회를 지향한다. 김설원 작가와 영진, 윤희(청년 세대)가 다시 쓰는 ‘삶의 시놉시스’는 새로운 시대, 꿈의 무대에 오를 것이다.
1) 김기봉, 『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 문학과지성사, 2018, 140쪽.
2) 테리 핀카드, 서정혁 역, 『역사는 의미가 있는가』, 그린비, 2024.
3) 강순전, 『정신현상학의 이념』, 세창출판사, 2016.
4) 김현, 『한국 문학의 위상』, 문학과지성사, 2015, 29쪽.
5) 김설원 작가는 2002년 「은빛 지렁이」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별 다섯 번」으로 2009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상을, 2019년 『내게는 홍시뿐이야』로 제12회 창비 장편소설 상을 받았다. 단편소설 「팔월극장」으로 2024년 제16회 현진건 문학상 본상에 당선되어 작가의 역량을 다시 보여 주었다. 단편집 『은빛 지렁이』를 포함, 장편소설 『나의 요리사 마은숙』 등이 있다.
6) 김설원, 「팔월극장」, 김설원 외 6인, 『현진건 문학상 작품집, 팔월극장』, 화니콤, 2024, 18~38쪽.
7)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59~170쪽.
8) 푸코, 문경자, 신은영 역,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활용』, 나남, 1984.
9) 에밀 뒤르케임, 황보종우 역, 『자살론』, 청아출판사, 2019.
10) 박상우, 「잘 여문 과일의 씨앗처럼 견고한 중심성」, 김설원 외 6인, 『현진건 문학상 작품집 팔월극장』, 화니콤, 2024, 8쪽.
11) 마르틴 뤼케, 이름가르트 췬도르프, 정용숙 역, 『공공 역사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20, 29~30쪽
12) 이하나, 「풍부한 현실, 이론의 빈곤」, 이하나 외 23인 공저, 『공공역사를 실천 중입니다』, 푸른역사, 2023, 30~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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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여성 + -향’이라는 함정‘남성/여성 + -향’이라는 함정 이융희 ‘남성/여성 + –향’ 분류의 형식과 한계 올해 초 X(구 트위터)에서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한 연구자가 ‘남성향’ 웹소설을 보는 여성 독자를 찾겠다며 연구 설문을 돌렸는데 다수의 유저가 연구자의 대상 텍스트가 ‘남성향’ 웹소설이 아니라 ‘여성향’ 웹소설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현재는 해당 글이 삭제되었으나, 해당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을 통해 어떤 웹소설이 ‘남성향 작품’으로 프레이밍 되었는가 확인해 볼 수 있다.1) 해당 논문에서는 예시 작품으로 , , , , , , , , , , , , 등을 제안한다. 리디, 네이버, 카카오페이지 등 대형 플랫폼과 달리 ‘문피아’는 각 소설에 대한 로우데이터를 제공하는데 상술된 소설의 남녀 통계를 살펴보면 은 남성 20.8%, 여성 79.2%,2) 3)는 여성 50.5%, 남성 49.5%, 은 여성 61.9% 남성 38.1%4) 은 여성 41.8%, 남성 58.2%5) 는 여성 51.9%, 남성 48.1%6) 등임을 고려한다면, 해당 작품을 ‘남성향’이라고 규정한 연구자의 이야기가 시장에서 거부된 까닭을 짐작게 한다. 일련의 사태는 시장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학계에 저항 없이 사용될 때 또는 시장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학계에서 다른 의미로 전유해 해석했을 때 발생하는 단절을 강하게 시사한다. ‘남성/여성 + –향’이라는 이분법이 업계에서 넘어와 학계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만큼 지금 여기의 웹소설을 제대로 분석하고 비평하기 위해선 ‘남성/여성 + -향’이란 이분법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구조에 대해서 고민하고 입법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남성향’과 ‘여성향’의 분류는 두 가지 축을 바탕으로 논의되었다. 한 축은 시장에서 널리 통용되는 서사의 내용과 형식 기준의 분류법이고 또 하나는 소비자들의 젠더적 욕망과 정치적 수행 행위로 보는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전자의 경우 좁게는 서사 내부에 존재하는 작은 기호부터, 넓게는 서사를 직조하는 각 시퀀스의 구조와 연출, 전개를 통해 인물이 획득하는 보상의 성향, 전체 작품의 주제 등에 따라 해당 서사의 종합적인 결과물을 남성적 구조와 여성적 구조로 나눈다. 이러한 분류는 통상 작법서를 통해 시장으로 재생산된다. 시장에서 요구되는 ‘좋은 웹소설’을 교육하기 위한 작법서에서는 웹소설 작가들과 독자, 그리고 유통망이 추구하는 ‘남성향/여성향’의 대상 텍스트를 판타지,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무협 등 하위 장르에 선행하는 상위 범주로 간주한다. 이 안에서 로맨스(판타지)라는 ‘여성향’ 장르와 판타지·무협(줄여서 &lsquo
- 이융희
- 2026-04-01
문장웹진 비평
비평하는 나비평하는 나 윤옥재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 - 롤랑 바르트 1. 최근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것들 # 1) 파편의 리스트 혹은 반(反)구조적 잡록 나는 이 글에 대해 반(反)구조적이라는 비평이 들어올 것을 상상한다.1) 이 문장은 나의 것이 아니라 롤랑 바르트의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저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 대한 메타적 인식을 표현한 이 문장은 바로 그 책을 구성하는 200여 편의 짧은 텍스트들 중 하나인 ‘잡록과 작품’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이 무수한 파편적 단상들의 모음을 “백과사전” 혹은 “이질적이고 잡다한 오브제들의 리스트”로 명명한다. 파편적 글쓰기의 구조적 취약성을 ‘반구조적’이라는 자평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는 그의 자조적 태도는 매혹적이다. 그가 일컬은 미친 ‘잡록(polygraphie)’2)에 착안해 이 글 역시 파편적인 방식으로 써 보려 한다. # 2) 에세이, 아마추어리즘, 자기이론 ‘비평적 에세이’ 혹은 ‘에세이적 비평’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평적 글쓰기’라는 구체적 방향성을 갖게 된 시점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에세이’라는 형식과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이 비평과 맺는 관계에 관한 생각들이다. ‘비평의 에세이화’에 대한 비판이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한 명의 문학 독자였던 나는 언젠가부터 비평 텍스트에 나타나기 시작한 ‘나’라는 일인칭 표현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비평은 쓰는 자의 주관과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 하는 장르라는 선입견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자신을 지칭해야 하는 경우 사용되던 ‘필자’라는 말에 나는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왜 ‘나’라고 하면 안 되는 거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평을 쓰는 ‘나’를 드러내는 문장을 발견할 때면 놀라운 동시에 반갑기까지 했다. 오늘날 비평 텍스트에서 쓰는 주체 ‘나’를 발견하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심지어 ‘나’의 비평적 자의식과 정동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니다. 에세이와 아마추어리즘 사이에서 비평적 글쓰기의 자리를 탐색하던 내게 최근 강력한 키워드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최근 문학 연구와 문화 비평에서 주목받고 있는 ‘자기이론(autotheory)’이 그것이다. 이로써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각각 ‘에세이’, ‘아
- 윤옥재
- 2026-04-01
문장웹진 비평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2]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2) 박서양 1. 앞서 1부에서 살펴보았듯 『자작나무 숲』을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을 거쳐 쓰레기 집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기존의 사회적 담론이 쓰레기 집을 단순히 개인의 병리적 현상이나 위생 문제로써 다뤄왔다면, 장편소설에서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는 쓰레기 집은 한 가문의 은폐된 기억이 귀환하는 실체적 장소로 탈바꿈한다. 그렇기에 이곳은 단순히 한 노인의 저장강박이 빚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쓰레기가 켜켜이 쌓이고 느리게 부패하는 이 공간은 공적 시스템의 신속한 망각에 맞서 기억의 소멸을 유예하는 지연의 장소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과거 배경이 1989년이라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며 규격 봉투 안에 모든 폐기물이 동질화되고 익명화되기 이전, 쓰레기는 그것을 배출한 자의 삶의 궤적과 정보가 선명하게 남겨진 물질이다. 즉, 1989년이라는 시간은 쓰레기가 아직 완전히 규격화되지 않은 채,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었다는 실명(實名)의 흔적을 지닌 채 공동체 내부에 머물던 시기다. 또한, 좁은 다리 하나를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는 곡교의 폐쇄적인 마을 구조 역시 이러한 쓰레기의 관계적 속성을 한층 강화시킨다. 쓰레기차가 드나들기 어려워 쓰레기를 각자 태우거나 묻는 비공식적 처리에 의존해야 했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변두리 마을에서 쓰레기의 출처는 서로에게 투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무엇을 버렸는지 훤히 알 수 있는 동네에서 타인의 쓰레기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수집이나 저장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가 서둘러 지우고자 했던 기억들을 자신의 공간으로 편입시키는 행위가 된다. 더욱이 할머니가 쓰레기를 쌓아 올리는 산1번지의 집이 본래 일제강점기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아버지 모칠성의 거처였다는 점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머니의 수집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은 이미 채무자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장물들이 켜켜이 쌓이던 공간이었다. 저당 잡힌 물건들은 누구에게서 어떤 연유로 빼앗아 왔는지 그 유래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그 어떤 폐기물보다도 비극적이고 선명한 서사를 품고 있다. 요컨대 이 집은 단순히 버려진 사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서사가 강제로 유입되고 축적되어 온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이러한 공간적 내력은 언뜻 산1번지의 쓰레기 집을 마을의 배제된 기억과 비밀이 축적되는 일종의 아카이브처럼 비치게 만든다. “할머니한테는 저 집이 뭐랄까…… 박물관 같은 거지요.”(124쪽) 하지만 할머니의 수집 행위를 ‘기억의 보존’으로 쉽게 낭만화할 수는 없다. 집 안으로 모여든 쓰레기들은 한데 뒤엉켜 부패하며 본래의 형태와 개별성을 잃고, 그것이 매개하던 고유한 서사 역시
- 박서양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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