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아픔에 대해 말하는 어떤 일상적인 방식
- 작성일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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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아픔에 대해 말하는 어떤 일상적인 방식
김지윤
1. 치유라는 폭력
“모두가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할 거야 당신이 아프면··· 만일 당신이 낫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병에 걸린 것만 아니라면.” 다니엘라 올셰프스카의 시 「thirteenz」의 한 구절이다.
타인의 병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쉽게 던지는 말은 “빠른 쾌유를 빕니다”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은 가능한 한 빨리 치유되어야 하는 것,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병은 이상 징후이며,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상성과 수치심의 구조를 형성한다. 하지만 나을 수 없거나, 낫는 데 매우 오래 걸리는 경우라면 어떨까? 아픈 것이, 불완전한 것이 그냥 삶의 일부라면?
『눈부시게 불완전한』에서 장애 및 트랜스 활동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치유’라는 말에 숨어 있는 정상성에 대한 강박에 도전한다. 세상은 복잡하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눈부신 불완전함’도 충분히 가능하다. 불완전한 상태나 질병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 누군가의 삶이라면 ‘치유’에 대한 기대를 들이미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난치병이나 낫지 않는 병은 ‘치유’를 전제하는 기존의 ‘정상성’ 서사를 거부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고통과 한계 앞에서, 완전성과 진보를 추구하는 사회적 이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극복이라뇨, 받아들인 거죠.” 최은미 소설 『마주』에서 비활동성 결핵 판정을 받고 코로나 상황에 결핵 치료를 받는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극복이 아니라 수용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질병이 낫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은 삶을 선형적 발전 과정이 아니라 고통과 불완전성을 동반하는 상태로 바라보게 하며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청한다.
최근 ‘치유’ 서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들이 대두되고 있는데,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질병을 인식하기보다는 상처와 고통 자체를 존중하는 접근법이 강조되고 있다. 고통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존재를 깊이 사유하게 하는 계기로 인식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질병은 생존뿐 아니라 공감과 공존의 문제와 연결되며 인간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편견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다.
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구조,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하므로 사실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에 대한 성찰은 새로운 윤리적 책임과 공감의 계기를 제공하며 질병에 부과되곤 하는 낙인과 배제의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김은정의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후마니타스, 2022)은 한국의 역사, 정책, 제도, 문화 텍스트 등이 장애와 질병이 있는 몸의 현존을 부정하고 재활하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관점으로 서사화해 왔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김은정은 “타자를 소위 나아지게 해 줄 것이라는 명목으로 타자가 지닌 차이를 지우려는 힘의 행사를 묘사하기 위해서 ‘치유 폭력’(curative violence)이라는 말을 사용”1)한다. “장애와 질병을 삶의 다른 방식으로 보는 여지”를 없애며 병의 현실을 부정하고, 이를 삶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초고령 주체의 질병은 ‘낫지 않는 병’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문제시된다.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초고령 주체의 질병은 다른 질병 체험과 다르게 분류되곤 하기 때문이다. 하임 하잔은 초고령 주체에 대한 서사들이 고령자의 탈참여적 현존에 부여하는 클리셰들로 인해 왜곡될 수 있음을 지적2)했다. 병상에 있는 초고령자를 다른 가면(예를 들어 현명한 노(老)예언자)으로 대체하거나 반대로 유아화시키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초고령자의 병은 치유를 강요받지 않는 대신 또 다른 방식으로 배제되고 소외된다. 초고령자의 질병은 치유 서사 바깥에 위치하며, 이는 고령자의 삶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초고령자의 질병은 흔히 생물학적 노화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되며, 치유가 기대되지 않는 상태로 분류된다. 이는 고령자의 질병 경험을 무의미한 것으로 축소하고, 사회적 담론에서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낫지 않는 병을 앓는 젊은 세대는 치유와 재활을 강요받으며 그 과정에서 폭력을 경험하지만, 초고령자는 치유를 기대하지 않는 대신 돌봄의 대상으로만 취급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고령자의 질병은 단순한 건강 문제를 넘어, 인간 존엄성과 주체성의 문제로 확장되게 된다. 초고령자는 질병을 통해 스스로의 삶과 결정을 설계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다. 간병이나 의료적 판단에서 고령자의 목소리는 주변화되며, 이들의 의지와 감정은 무시된다. 초고령자는 종종 유아화되며, 돌봐야 할 존재로 축소되기도 한다.
하잔은 “초고령기 인생의 종말 상태를 안팎에서 모두 인격을 박탈당한 초도덕적 범주로 성찰하도록 권유하는”3) 탈근대문화와 그 구성주의적 장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하였다. 소위 ‘제3의 인생’이라고 하는 구성물로 인해, “‘정상적’, ‘성공적’, ‘최적의 노화’라는 보편자를 옹호”하는 문화가 널리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안티에이징’ 등을 통해 스스로를 관리하는 “연장된 중년(extended mildifers)”이 상상되며 이와 같은 이미지가 노인에게 이상적으로 부과된다. 그러나 이는 실제의 노인의 삶을 왜곡하며, 이상적 노년의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능력하다고 간주되며 요양원과 노인시설에 수용된 이들―은 ‘제4의 인생’으로 분류되어 주체성을 잃게 된다.
젊은 사람들의 낫지 않는 병, ‘연장된 중년’의 이상적 이미지를 벗어난 초고령자의 질병은 우리 사회가 질병에 대해 부과하는 많은 편견을 직시하게 하고, 현대 사회가 당면한 복합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치유 불가능성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인간의 연약함과 용기, 그리고 인간존재의 근원적 고독을 성찰하게 한다. 이 글은 아픔을 극복하거나 끝내야 한다는 치유 서사를 버리고 계속해서 나직하게 아픔을 말하는 일상적인 목소리를,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생각해 보려 한다.
낫지 않는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병상의 초고령자는 고통이나 소멸의 과정 속에 갇혀 있는 평면적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방식으로 삶을 지속해 나가는 능동적이고 입체적인 존재다. 병이 있는 몸은 단순히 고통받는 몸이 아니며 아픈 삶도, 그저 삶일 뿐이다.
2. 제4의 공간
노년 문학에 대한 류종렬의 정의4)(류종렬, 2008, 531쪽)를 빌려와 말하자면, 노년 문학은 “1970년대 산업화 시대 이후의 현대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생겨난” 새로운 유형이며 노년의 작가가 생산한 작품이나, 노년의 삶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고 서술의 측면에서 노인을 화자로 삼은 작품에 해당된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되며 노년기에 접어든 문인들도 늘어났고, 노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작품들도 증가했다. 노년의 삶, 늙어감에 대한 사유가 이미지, 상징, 비유 등으로 나타난 예도 다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서정적이거나 회고적 태도로 그리고 있고, 노인을 무기력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거나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흔하다.
정성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예미, 2024)는 기존의 경향을 벗어나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작품은 만 65세 이상의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이 등장한 상황에서 노인의 대중교통 탑승이 금지된 30년 후의 미래를 그린다. 혼인 정년제, 상품화된 안락사 등 논쟁적인 설정을 가져와 노인의 성(性), 노인복지, 노인 빈곤, 존엄사 등 노인 문제를 매우 예리하게 다루었다. 급진적인 상상력을 통해 노인 문제를 사회 구조적, 정치적 맥락에서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기존 노인 서사가 노인의 내면적 갈등이나 세대 간 단절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소설은 제도적 변화와 정책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여 노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사회 구조 속에서 재조명하며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기존의 노인 서사가 노인의 삶을 과거에 묶여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경향이 강했다면, 이 소설은 노인을 현재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탐구한다. 황혼 연애와 황혼 이혼을 다루며 노인의 성을 전면적으로 다루며 노인을 욕망의 주체로 그리는 등 노인의 삶은 구체성을 띠며 현실적이다.
이 소설은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 폐지나 노인의 대중교통 이용 금지와 같은 급진적 가정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현재의 제도적 문제를 극단적으로 상상해 보게 만드는데, 이런 방식도 독자들이 노인 문제를 단순히 감정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인들이 제도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립되게 만드는 사회 구조와 정책의 불합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 소설은 또한 안락사가 상품화되는 사태를 가정하면서 노인의 죽음이 통제되는 상황을 가정한다. 노인의 고독이나 소외를 감정적이고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근원에 있는 사회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본다. 정성문이 소설 속에서 배경으로 제시하는 30년 후의 미래는 단순한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아니라, 현재의 정책과 사회적 태도를 바탕으로 구성된 확장된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학적 시도는 노인들을 주변화된 객체가 아닌 사회 내 주체로서 바라보도록 하는 효과를 갖는다.
하종오의 『노인류』(b, 2024)는 이제 70대에 접어든 시인의 43번째 시집으로, 시인의 말에 따르면 “‘노 인류(老 人類, 늙은 사람들)’, ‘노인 류(老人 類, 노인의 무리)’라는 중의적 표현을 의도했다고 한다. ‘노인류’는 ‘고령 사회를 살아가는 노인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세태 속에서 노인들에 집중하여 성찰하기 위해 만든 조어다.
하종오는 노인 당사자로서, “한국 시단에 노시인이 적지 않은데도 노인에 관한 시가 별반 없다. 노시인이 왜 노인을 시의 주체, 시의 주제로 시를 쓰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시집을 내놓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대도시에서 청년기, 중년기를 보내고 시골에서 노년의 삶을 마무리하려는 노인들에 주목한다. 시인은 “지혜롭다고 자긍하고 궁상맞다고 자탄하고 간교하다고 자조하는 노인류의 특성”(「노인류의 출현」)을 말한다. 노인에게 ‘노현자’와 같은 가면을 씌우지 않고, ‘연장된 중년’의 이상적 노년의 이미지도 걷어 내며 ‘현실 노인‘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점이 주목된다. 사실 노년이 이상화된 형태인 소위 ‘로맨스그레이’는 건강과 경제적 독립, 여유로운 삶을 전제로 하지만, 초고령자의 대다수는 만성질환에 시달리며, 생존 자체가 과제가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노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노인 혐오적인 태도도 문제이지만, 노인을 이상화하는 태도도 노인의 다층적 현실의 어려움들을 은폐하거나 희석시키는 문제를 야기한다. 특히 지혜롭고 관대하고 초월적인 ’노현자 이미지‘는 노인을 하나의 집단적이고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 개인적 차원의 고유성과 다변성을 지워 버린다. 노인을 복잡한 욕망과 갈등의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 태도는 사실상 노인의 개별성과 그들의 목소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하종오는 『노인류』에서 노인들을 개별 주체로 그리며, 인간적인 문제를 그대로 노출하는 노인들을 ‘노인류’로 지칭한다. 홍승진은 이 시집의 추천사에서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없었던, 고령 사회에 매우 절실한 ‘노인 문학’ ‘노인 시’라는 특별한 장르, 어쩌면 기존의 문학과 시와는 달리 ‘고령자 문학’, ‘고령자 시’로 특화된 분류를 해야 할지도 모를 전복적 장르가 한국 현대 시에 출현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시들”이라고 쓰고 있다.
노인류의 인사, 식욕과 물욕, 동년배, 궁상, 간교, 결여, 불평불만, 행불행, 실랑이, 무관심, 일머리, 호불호, 골병. 헛꿈 등 다양한 삶의 면모를 다루는 이 시집은 노화의 비애, 죽음의 공포를 그려 내는 노년 문학의 한정적 방식을 벗어나 노년의 삶을 복잡다단하고 현실적으로 나타낸다. 노인을 타자의 시선에서 왜곡되거나 피상적으로 그리는 경우 노년기의 삶을 단일한 이미지로 고착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노년기의 삶을 살고 있는 시인의 당사자성은 고독, 소외, 혹은 지혜 등으로 단순화되곤 하는 노년의 삶을 구체화하며 노인들의 다양한 경험과 감정, 다층적인 삶의 문제들을 드러내 준다.
그나마 고령 주체들은 한계적이나마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취할 수 있지만 초고령 주체들은 이조차도 어렵게 된다. 보드리야르는 근대의 노년을 식민주의적으로 인식해 ‘일종의 제3 세계’라고 부른 바 있다.5) 제3 세계가 자율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리듯 노인들의 주체성도 간과되기 쉽다. 중심부가 스스로를 정의하고 확립하기 위해 설정한 타자적 공간인 제3 세계처럼, 노년은 젊음과 생산성이 중심이 되는 현대 사회의 사회적 상징체계에서 변방에 위치하며, 타자로 간주된다.
초고령자가 수용되어 있는 돌봄 공간을 일컬어 ‘제4의 공간’이라고 표현한 하잔의 표현에 따르면 이 공간은 “주체성, 가역성, 협상 가능성 등이 말소”되어 버린 “인문주의적 비인간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나을 수 없는 질병을 앓으며 병원, 요양원 등의 돌봄 공간에 수용되거나 가내 돌봄을 받으며 비인간 상태에 놓인 채 ‘제4의 인생’을 살고 있는 초고령자들은 그 정체성이 불가사의하다고 여겨지며 그들의 언어는 지워지고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덮이게 된다.
제4의 공간은 무시간적인 협소한 지평 아래 놓여 있고 도달하거나 개념화하기 어려운 층위에 있다. 그리고 그 내부 수용자들의 목소리는 “의문부호, 휴지, 단절, 깨어진 발화. 조각난 문장 등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해독되지 않는 언어로 간주되곤 한다.6) “금지되어 보이지 않거나 금시기되는 것들의 땅”인 헤테로토포스적인 제4의 공간 안에서 독선적 돌봄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들의 목소리는 종종 침묵된다.
고령화사회의 흐름에 따라 노년 문학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작품이 증가하고 있지만, 자립적인 생활이 가능한 ‘노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노인이 아닌, 돌봄을 받아야만 하는 초고령자의 관점에서 그들의 목소리와 관점을 담아낸 작품은 여전히 매우 드물다.
코로나 사태 이후 돌봄 노동의 문제가 자주 논의되었고 돌봄 주제의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지만 이 역시 대부분 ‘돌보는 사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돌봄 노동을 여성들이 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돌봄은 자주 젠더 문제와 관련해서 논의되고 작가들도 젠더적 관점을 보여 주곤 한다. 하지만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뿐 아니라 돌봄의 대상이 되는 환자의 입장에서도 젠더 이슈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돌봄 수혜자와의 위계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돌봄 대상에게도 위계가 작동한다는 사실은 그리 주목되지 않는다.
초고령자는 노년을 대상으로 한 학술적, 비평적 담론에서조차 소외되곤 한다. “의료화, 유아화, 후견 등 사회적 감시체제”7)가 작동하는 제4의 공간은 “모멸과 비방, 그리고 피해의 단계”를 포함하며 그 안에 거주하는 이들의 현존은 “체현된 자아로부터 몰수한 신체”로 축소된다. “자아 없는 나이(selfless age)라는 관념”은 초고령자에 대한 혐오8)로도 이어진다.
‘돌봄’ 주제의 문학에서 드물게 초고령자가 등장해도, ‘돌보는 사람’의 관점을 택하여 돌봄의 대상이 되는 초고령자들의 목소리나 시각은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 초고령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고 초고령자의 관점에서 서술하거나 문제의식을 보여 주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김륭의『나의 머랭 선생님』(시인의일요일, 2021)은 주목된다. 이 시집에서 상당히 많은 시편들이 ‘요양병원의 어머니’를 다루고 있지만 자신을 포함한 초고령 환자의 주변인들의 목소리와 어머니의 목소리를 교차시키며 다루고 있다. 「월간 벌레」에서는 나, 나의 딸뿐 아니라 병상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엄마”의 목소리까지 모두 등장한다. 「당신 또한 천사들의 장난감을 가졌지」에서는 “아프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라고” 쓰며 몸에 생긴 구멍이 자신의 몸에도,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니 두 뺨에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시 속에서 그는 코로나19로 출입이 통제된 요양병원 속에 고립된 어머니와도 대화한다. 「gone―박정임 한정판」에서는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연결점과 교차점을 보여 주고 「식물 합니다」에서는 “아파트에서 요양병원으로 주거지를 옮긴 엄마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식물 합시다”라는 말을 옮겨 놓고 치매가 시작된 어머니의 파편적인 음성을 “고사리 대사리 껑자 나무대사리 껑자”(「식물 합시다」)와 같이 그대로 담아내기도 한다.
침묵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 교감한다. 「몸에 비가 내리는 시」의 제목은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작품명을 빌려온 것인데,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를 돌보는 시적 화자와 어머니의 시선이 얽히며 서로의 생각이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처럼 겹쳐지는 장면을 보여 준다.
「여기까지가 외로움인가, 싶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에서는 시적 화자의 딸로 추정되는 소녀와 어머니의 대화가 등장한다. 출입이 금지된 요양병원 출입문 바깥에서 소녀는 마이크를 들고 울며 말한다. “할머니, 미안. 붕어빵 못 사 왔어. 문을 닫았지 뭐야. 다음에 올 때 꼭 사 올게.” 할머니는 “병원 출입문 안쪽에서 요양보호사가 갖다 대주는 마이크를 막대사탕처럼 빨”며 대답한다. “괜찮아, 괜찮아. 밥 잘 먹고 먹다 남은 과자도 많아.” 그 둘은 실제 만날 수 없지만 “소녀와 할머니 사이, 바람 한 점 끼어들 수 없는 그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가깝다. 시적 화자는 종종 출입할 수 없는 병실 안으로 스며들어 간다. 「비단잉어」에서는 “요양병원 침상에 누워만 있는” 어머니에게 간다.
“비단잉어에게 비단을 빌려/ 당신에게 간” 시적화자는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반짝”이는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는 “비단잉어에게 빌린/ 비단을 들고 서 있는 나를 쳐다”본다. “아프다는 것을 동선이 겹치는 그림자 가득 받아 적”(「당신 이야기잖아요 모르시겠어요?」)으려 하는 그의 시도는 계속 실패에 부딪치지만 그래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전유하지 않으려 거듭 시도한다.
3. 아픔에 이름을 붙이기
미국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앤 보이어가 2014년 41세의 나이에 삼중 음성 유방암을 진단받고 쓴 책 『언다잉』(양미래 옮김, 플레이타임, 2021)은 질병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는 책이다. ‘언다잉’이라는 제목은 죽음에 저항하며 동시에 죽어가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저자는 이 모순성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에 깊이 몰두한다. 질병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구체적인 현실이다. 저자는 “몸들의 자기 은폐적이고 벌거벗은 역사가 별안간 충만한 현존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다”9)고 썼다. 오히려 질병을 통해 자신의 몸과 역사가 더 뚜렷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충만한 현존”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다울은 『천장의 무늬』(웨일북, 2020)에서 “강한 욕망과 호기심이 침대 위에서 한없이 들끓고 있었”10)던 질병 체험을 술회한다. 작가는 진료실 의자에 앉아 의사에게 가능한 한 빨리 신체적, 감정적 변화를 설명해야 할 때 자신의 감정과 내면이 어떻게 추상화되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감정을 느끼게 된 맥락을 모두 삭제하는 추상화에 맞서 작가는 “이름 없는 통증과 감정의 기복에 이름을 붙이고 싶”11)다는 욕망으로 글을 쓴다.
‘아픔에 이름을 붙인다’는 말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 성동혁의 첫 번째 시집 『6』(민음사, 2014)이다. 총 4부, 총 67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시집으로 “시를 읽어 나가다 보면 느껴지는 기이한 슬픔에서, 그것이 들끓어 오르는 격렬함을 가라앉힌 손만이 쓸 수 있는 언어임을 알게 된다”라는 이원 시인의 평가가 매우 적절하게 들린다. 이 시집의 제목이 『6』인 것은 다섯 번의 대수술을 받으며 살아온 성동혁 시인이 ‘여섯 번째 몸’으로 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질병과 의료 경험에 대해 절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 있는 성동혁의 시는 그 자체로 독보적인 지평을 열어 가는 시적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개인적 서사에 머물지 않고 고통과 인간존재의 깊이를 탐구하는 고유한 미학과 통찰을 통해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선사한다.
『몸이 말이 될 때: 우리의 세계를 넓히는 질병의 언어들』(동녘, 2022), 90년대생 만성질환자들의 목소리를 서간체로 담아낸 책이다. 아픔을 드러내는 일이 또 다른 낙인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젊은 환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과학기술이 몸을 대하는 방식, 질병의 당사자성 등이 대화 속에서 치열하게 사유된다. 이다울은 질병을 겪는 동안 병상에서의 “상상이 불안을 자아내고, 떠오른 불안이 또다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
견딜 수 없게 숨이 차고 괴로운 감각을 느끼는 그의 몸은 시 속에 진실한 경험과 절실한 감정들을 담아낸다. 그 경험의 진정성으로 인해 “도자기는 자주 깨지는 가구다 / 고정된 가구는 없다”(「창백한 화전민」)라면서 도자기를 인간의 몸으로 치환시키는 감각이 만들어진다. 인간 육체의 취약함과 필멸성, 그 안에서 오히려 더 높아지는 인간의 가능성과 고양된 정신이 강렬하게 인지된다.
성동혁이 2011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을 때 성동혁의 시 세계에 대해 서동욱은 “병실의 난간에서 천천히 건조해져 가는 수건 같은 이 고통의 세계”라고 평가했다. “병원에서 병을 고쳐 나가는 사람이 있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그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병원의 엘리베이터와 복도와 방들을 허깨비처럼 평생 떠도는 사람 말이다”는 심사평은 흥미롭다. 지금까지 의료 문학은 ‘투병기’나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한정적으로 그려 낸 면이 있었지만 질병을 일상으로 안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위 서동욱의 심사평 다른 부분에서 성동혁의 시를 “병과 병원의 세계에 침잠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1
엑스레이 기계를 안고 웃는다
의사는 모르겠지 내가 어떻게 웃는지
2
지옥은 내릴 수 없는 회전목마였다
나는 여러 번 어지러웠는데
의사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
나는 내 등이 보인다
3
나는 나를 다섯 번 허물었다
그때마다 가볍고 하얀 얼굴들이 지나갔는데
모두들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성동혁, 「수선화」 일부
“엑스레이 기계를 안고 웃는” 모습을 의사는 알지 못한다. 그의 “내릴 수 없는 회전목마”와 같은 마음의 지옥에서 느끼는 어지럼증 역시 “의사는 아는 척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다섯 번 허물었”던 수술과 일생을 관통하는 질병 체험은 그에게 전혀 다른 감각을 가져다준다. 그의 체험의 날물질성은 ‘환자’에 부여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인식을 벗어난다.
고통과 죽음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 속에서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여름 정원」)고 느끼면서도 그는 미래를 꿈꾸며 계속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눈을 기다리고 있다
서랍을 열고
정말
눈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도 미래가 주어진 것이라면
그건 온전히 눈 때문일 것이다
(···중략)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
화병에 단 한 번 꽃을 꽂아둘 수 있다면
-성동혁, 「리시안셔스」 일부
시인은 불안과 위기감 속에서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여전히 모든 것을 덮어 새롭게 하는 “눈을 기다리고”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쓴다.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이 느끼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관절을 잊어 가는 뱀 / 내 안에서 혈액이 쏟아져 나올 때 / 차분하게 빨라지는 것들 / 날카롭게 하늘”(「기둥 안에서」)이라는 구절처럼 삶을 느끼는 순간이 더 예리하고 강렬할 수 있다. 혈관확장제인 페르산친(persantin)을 제목으로 삼은 시 「페르산친」에서 “태양을 가질 수 없어 태양을 만들어야 했다”고 쓰며, 시인은 “커튼을 걷고 / 주황 기침”을 쏟아놓는다.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는 시처럼 느껴지는 에세이집으로 그의 시적 사유를 산문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소아 난치병 환자로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 보냈고 여전히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는 “많은 불가능”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수술대 위에 누워 그는 신의 존재를 느끼고 다른 환자들을 보며 감정의 전이를 경험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했다. 쓸 것이 병밖에 없냐고. 나는 아직, 함께 병을 재우고 깨우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부족하단 생각이 든다. 내 시가 파생된 곳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던 곳이다. 그곳에서 비슷한 기도를 하던 아이들이 나의 시를 쓴다.12)
그의 시는 자신의 병뿐 아니라 “함께 병을 재우고 깨우던 아이들”의 질병 경험을 나누면서 더욱 깊어진다. 그의 시는 질병 경험에서 파생된다. 장애와 질병 속에서 살아가는 ‘나와 우리의 삶’은 그에게 글을 쓰는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쓰는 이유는,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이렇게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13)라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병실에서 의지를 갖기는 어렵다.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지만 뭘 어떡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아지는 기분이 들지 않는데 애써야 하는 일이 있다. 바늘은 얇은데 불안은 두껍다”14)는 심정은 사실 질병뿐 아니라 버티기 어려운 삶의 고난 앞에서 좌절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이다.
삶의 체험은 세계와 인간과의 교호 작용을 통한 것이므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아 ‘정서적이고 실천적이며 지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사건들을 조직화하고 재구성함으로써 경험의 흐름을 의미 있는 연속성으로 직조하고, 현재의 의미를 파악하게 하는 능력은 다름 아닌 상상력15)이다. 상상력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창발적으로 생성되고 깊어지며 이러한 상상력은 공감의 매개체(medium of appreciation)16)가 될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은 보편성을 가지며, 질병은 인간과 삶에 대한 핍진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이다울의 표현처럼, 질병 체험을 쓴다는 것은 아픔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와 같다. 질병 체험을 쓴다는 것은 ‘삶의 일부’로서의 질병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져오게 하고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구체화해 준다.
현대사회는 질병을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개인의 문제로만 취급하며, 질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존재를 쉽게 간과한다. 아픔에 대해 ‘일상적’으로 말하는 방식은 치유 서사의 폭력을 넘어 병을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사유의 장으로 재의미화한다. 성동혁의 시는 질병과 고통 속에서도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문학적 여정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의 투병 경험을 문학적 사유로 확장하여, 아픔이 삶과 긴밀히 얽혀 있는 방식을 탐구한다. 이러한 작업은 치유와 정상성에 대한 기존의 서사를 해체하고, 누군가의 고통 자체를 존중하는 새로운 감각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성동혁의 시는 병원을 단순한 치료의 공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에게 병원은 삶의 또 다른 풍경이며, 고통과 치료의 반복 속에서도 새로운 일상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질병과 상처를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태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투병 과정에서 느낀 다양한 감각,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시선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의 시는 삶의 일상적 방식으로 고통을 사유하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존중하는 법을 보여 준다. 질병과 고통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축소하지 않고, 그것이 가진 잠재성을 드러내는 해방적 사유의 공간이 그의 시 속에서 펼쳐진다. 그렇게 그의 아픔에는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이름이 붙었다. 충만한 현존이 그 안에서 빛난다.
1) 김은정, 강진경‧강진영 역,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후마니타스, 2022, 38쪽.
2) 하임 하잔, 이진형 역, 『혼종성 비판』, 앨피, 2020, 125쪽.
3) 하임 하잔, 위의 책, 같은 쪽.
4) 류종렬, 「한국 현대 노년소설 연구사」, 『한국문학논총』 50, 한국문학회, 2008, 531쪽.
5) 하임 하잔, 앞의 책, 140쪽.
6) 보드리야르는 실제로 “초고령자는 해독할 수 없다”(1993: 163)고 주장했고, 상카르는 “의존적 궁 핍 상태를 점유한 것으로 간주되는 ‘살아 있는 죽음’”(1987)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위의 책, 141쪽)
7) 하임 하잔, 위의 책, 149쪽.
8) 청년 중심 문화에서 죽음과 병치되는 노년에 대한 사회적 망각과 혐오를 말한 보드리야르는 고령을 ‘잉여’로 파악하고 “주변적이고 궁극적으로 비사회적인 삶의 조각-게토, 집행유예, 죽음으로의 활강-” 으로 묘사했다. (위의 책, 95쪽)
9)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 플레이타임, 2021, 47쪽.
10) 이다울, 『천장의 무늬』, 웨일북, 2020, 28쪽.
11) 위의 책, 177쪽.
12) 성동혁, 『뉘앙스』, 수오서재, 2021, 73쪽.
13) 위의 책, 79쪽.
14) 위의 책, 47쪽.
15) Thomas Alexander, Jonh Dewey's Theory Of Art, Experience, and Nature, SUNY Press, 1987, p. 262 참조.
16) 이것은 존 듀이의 용어이다. 존 듀이는 “상상력은 모든 분야에서 공감의 매개체이다. 상상력의 참여는 모든 활동을 기계적인 것 이상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이다.”(John Dewey, Democracy and Education, Courier Corporation, 2004, p.226)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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