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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 작성일 2025-03-01

   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안지영



   1.


   그날 광화문에서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너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사관이 여기 있었네”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고 너는 그것이 팔레스타인 대사관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옆에서 너의 말을 들은 친구는 말했다.

   “아 여기, 그 우크라이나 대사관이야. 그, 전쟁 난 곳 있잖아.”

   너는 “아” 하고 잠시 멈칫하다 말 잇기를 그만두었다. 사실을 정정하는 너의 말이 친구를 비난하는 투로 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쌓여 왔던 너의 분노를 잘못된 대상을 향해 터뜨릴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래도 말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팔레스타인에 대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면 이 이야기를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비극의 무게를 함부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1)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집단 학살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느린 죽음(slow death).2) 트위터에 팔레스타인 관련 소식을 팔로잉하며 너는 거의 매일 폭격받는, 울면서 호소하는, 폭탄에 맞아 피 흘리는, 기아로 온몸에 거죽밖에 남지 않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신생아에 가까운 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하얀 천에 쌓인 시신들. 학교, 병원, 재활센터를 공격하며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도 제지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의 절망.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며 경악하다가 어느 때는 담담하게 스크롤을 올리다 어느 순간에 울음이 터져서 창을 닫고. 그러다 다시 켜서 그걸 다시 보고 기도했지만 결국 깊은 무력감에 빠졌었다. 

   어쩌면 팔레스타인에 대해 일상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바닥, 절대 악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의 막막함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에 꺼내고 난 이후 다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너의 입을 닫게 만든 것이다. 아니, 너는 그저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영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너는 그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학하듯이 그것들을 보며 끊임없이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팔레스타인 문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2. 


   계엄이 선포된 이후,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밤중에 자다가 깨어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 영상을 보았다. 헤드폰을 끼고 바닥에 누워 네, 다섯 번을 반복해서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죽은 자들과 산 자를 함께 위무하는 듯한 한강의 행위는 하나의 퍼포먼스였다. 투명한 유리잔에 물을 따르고 마시지 않은 행위조차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어느 순간 마지막 문단과 벼락같이 마주쳤다. 강연 앞부분에 집중하다가 놓친 부분이었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 주었고, 연결되어 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강의 노벨 강연–빛과 실」)


   이 부분은 한강의 연설문에서 여러 번 회자된 부분은 아니다. 너 역시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문장에 매료되어 몇 번이고 작가의 연설을 들은 것이었지만, 마지막 문단에서 작가가 다시금 ‘나’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러니까 신체, 육체, 몸의 자리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이 문단 바로 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5‧18과 4‧3 사건을 다루며 공적인 차원의 문제를 다뤄 온 작가가 여전히 자신은 “필멸하는” 육체를 지닌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역시도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지닌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은 너에게는 어떤 징후처럼 보였다. 상념은 다른 글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경희대학교와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연구자 226명이 낸 시국 선언문이었다. 시국 선언문답지 않은 문체로 주목받은 이 글은 지난 11월 13일에 발표되었는데, 그 독특한 문체를 출현시킨 것 역시 몸을 가진 취약한 ‘나’였다.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탄식의 문장들을 짧게 이어 가다가 김수영의 시 구절을 전환점으로 “나는 당신과 함께”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우리”라는 주체가 출현하여 도래한 공동체를 출현시켰다. ‘나’가 글이라는 실(“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한강의 노벨 강연–빛과 실」)에 접속해 누군가와 연결되는 경험을 만들어 냈다. 


   어느 시인은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앞자락에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리라는 미약한 소망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두었다.

   나는 반성한다. 시민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나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나는 취약한 사람이다. 부족하고 결여가 있는 사람이다. 당신 역시 취약한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취약하기 때문에, 함께 목소리를 낸다.

   (중략)

   우리는 이제 폐허 속에 부끄럽게 머물지 않고, 인간다움을 삶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말과 현실을 발명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관심하며,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무지와 무책임으로 제멋대로 돌진하는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


   주디스 버틀러는 팬데믹을 거치며 “지금 현재의 ‘나’는 또한 어떤 면에서는 ‘우리’이기도 하다”라고 1인칭으로서의 ‘나’를 재정의한 바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리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도 전에 이미 여러 다른 존재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다른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 체계 및 네트워크와 공유하고 있는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3) 취약하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삶이 상호 의존해 있다는 사실과 관련한다. 취약한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동시에 ‘우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나=우리’라는 것은 아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취약한 신체가 발화하는 것을 가로막는 투명한 신체로서의 ‘우리’는 공과 사의 이분법적 대립 속에서 ‘신체’가 출현하는 것을 방해한다.4) 자신이 취약한 자들을 위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발화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구분선이 유지된다. 

   버틀러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라는 구분에 의존함으로써 정치 영역을 남성의 것으로, 재생산 노동을 여성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고 아렌트를 비판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타당해 보인다. 공적 영역에 있는 신체와 달리 사적 영역에 존재하는 신체는 “여성, 노인, 외국인, 혹은 아이들이며, 언제나 선정치적인 존재”일 것으로 가정된다.5) 공과 사, 정치와 비정치의 위계적 구분선을 무너뜨리는 말하기야말로 정치적인 것이다. 한강이 취약한 신체를 가진 ‘나’로서 발화한다는 점을 힘주어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였던 것은 아닐까. 



   3.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취약한 몸이라는 것이 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결코 긍정되지 못한다는 것을.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이 사회의 규칙은 취약함을 드러내 보일 수 없게 만든다. 진태원은 신자유주의의 근본적인 특징 중 하나로 “(자율적) 주체화의 조건이 부재하거나 약화된 상황에서 더욱 더 (자율적) 주체들로 존재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공포에 질린 개인들의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진단한 바 있다.6) 더구나 팬데믹 내내 우리는 서로의 몸이 열려 있다는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되뇌지 않았던가. 나의 몸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은 그 몸을 통해 바이러스가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몸은 바이러스를 매개하는 숙주가 되어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옮길 수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고립을 택하고 타자와의 마주침을 차단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우리는 정말로 고립되어 있었던 걸까? 오히려 우리는 이 시기에 비로소 인간이 완전히 고립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쓰인 시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들은 끔찍한 침묵 속에서 애도되지 못한 먼 곳의 죽음을 기록하려 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올리브나무로 기름도 짜고 묵주도 만들고 반찬도 해 먹는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 가야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이유는 딱히 없다 운이 좋으면 가장 오래된 올리브나무를 볼 수도 있겠지 그 나무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누구든 자신보다 오래 산 나무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한두 마디쯤 생길 수 있고 올리브 비누로 손을 씻고 너를 만나러 갔는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지는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요즘 같은 때에는 서로 조심해야지 요즘 같은 때라니, 이 장면 속에서 나는 너를 지우고 우리가 마주 앉아 있는 이곳 심야 식당을 지우고 가짜 벚꽃 인테리어 소품을 지우고 풋콩과 생맥주를 지우고 마스크와 손 소독제도 지우고 말씀과 믿음을 지우고 탱크와 대표를 지우고 올리브나무만 기억할래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올리브나무는 어쩌면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을 꺼내어 팔레스타인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찾아본다 비행기로 열두 시간 십오 분,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팔레스타인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만나지 못할 나무는 아무렇게나 상상해 본다 두꺼운 껍질과 줄기들 아무리 팔을 넓게 벌려도 품에 담기지 않는 나무 둥치 빼곡한 이파리들과 작은 연노란색 꽃들 푸른 앞치마를 두른 알바생이 하품을 하며 가게 안 텔레비전을 껐다 그래도 자꾸만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고 우리는 말없이 메뉴판을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 한여진, 「팔레스타인에서」,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25쪽.


   이 시는 서로의 손도 마주 잡지 못하는 ‘방역’의 상황이 어떻게 타자와의 연결을 금지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은 너무도 멀리 있다.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이 나라의 고통은 내가 가까이 갈 수도 없는 모호한 위치에 있다. 그런데도 시적 주체는 팔레스타인에 가야겠다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올리브나무”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시는 이 세계에는 아직 없는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쓰인 것이리라. 팔레스타인에서 올리브는 평화의 상징이니까. “자꾸만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이 땅에서, 다시 올리브로 기름을 짜고 묵주를 만드는 일상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땅에서 살았던, 살고 있는, 살게 될 이들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팔레스타인의 문제 자체보다 이에 괴로워하는 1인칭의 ‘나’가 전경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우리는 이 고통 앞에서의 멈춤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한다.


   “축구 잘하던 아이가 공습으로··· 친구 무덤 찾은 팔레스타인 소년들”

   (서울신문 2021. 05. 20. 13:15/ 사진: 동생 모하마드(10. 가운데)는 “시위 당일 형이 먹을 것을 주고 갔다. 형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혼자 울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슬퍼했다.)


   “‘이스라엘에 8천억 무기 판매’ 바이든 승인에 미 의회 제동 시도”

   (연합뉴스 2021. 05. 21. 01:30/ 사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곡사포 발사하는 이스라엘군)


   behave님 외 21명이 내 트윗을 마음에 들어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2021. 05. 21. 10:58/ 사진: 흰 작약꽃 송이들)

   ⤷LeeLea@lea1376 혹시··· 작약인가요?

     ⤷@crazy_huh 네 제가 환호작약하는 작약이랍니다 


   곡사포 연기구름이 피어오른다. 스크롤 다운. 작약이 우아하게 폭발하고 있다. 연기와 작약이 나란하다. 둥근 연기구름이 작약꽃을 닮았다. 아름답다. 생각한다. 아름다워도 될까. 아름답다고 느껴도 될까. 생각한다. 언제 또 이 생각을 했더라. 아름답게 써도 될까. 스크롤 다운. 고통을 그려 내는 문장이 아름다워도 되는가. 물음표가 새로운 이미지에 지워진다. 스크롤 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미얀마, 폭발물 터져 열한 살 어린이 숨져··· 여태 800명 사망. (광고) 돈 보는 퀴즈 풀고 캐시 적립하세요. 터치. 불발탄 위에 앉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자매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다. 신발이 내 아이의 것과 같다. 보라색 크록스. 냉장고에는 아이가 만들어 준 카네이션이 붙어 있다. 일주일 뒤가 벌써 생일이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봉쇄 조치가 있기 전까지 유럽의 주된 꽃 공급지였다. 터치. 스크롤 업.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열한 살한텐 뭘 사 줘야 하나. 남부의 라파와 북쪽의 베이트 라히야 등지에 100여 개 꽃 농가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카네이션과 장미를 길렀다. 생각났다. 그 생각을 언제 했는지. 하라 다미키를 읽으면서였지. 탭. 캘린더. 5/28-타피이었나 ‘여름의 꽃’이었나. 탭. 벌써 여름이네. 스크롤 업. 무슨 생각을 하, 21일 0시 기준 신규 확진자 561명 발생. 누적 확진자 13만 4,678명. 긴급재난 문자가 타임라인을 가린다

   ―허은실, 「타임라인―bombing: blooming: blooding」 전문(『회복기』, 문학동네, 2022)7)


   곡사포의 연기구름은 작약꽃을 닮았다고 한다. 꽃처럼 피어오르는 폭탄과 그 폭탄을 맞은 이들이 피를 흘리는 끔찍한 연쇄는 이 시의 부제 그대로다. 시인은 “고통을 그려 내는 문장이 아름다워도 되는가.”라고 물었지만, 사실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끔찍스러워하는 감각이 이 질문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팔레스타인에서 미얀마까지. 너무나 많은 전쟁이 있고 그 속에서 고통을 감각하는 신체적‧심리적 반응은 점점 무뎌진다. 이 시는 시적 주체가 영위해야 하는 일상과 애매한 위치에 있는 타자의 비극을 병치함으로써 묘한 갈등 상황을 만들어 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을 보면서도 “카네이션과 장미를” 기르는 꽃 농가가 있었다는 팔레스타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시적 주체의 마음은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 고통을 끝장낼 방법을 묻지 않으면 고립된 개인이 당도할 최종 목적지는 무력감일 뿐일 터이다. “‘이스라엘에 8천억 무기 판매’ 바이든 승인에 미 의회 제동 시도”라는 기사 제목을 시 중간에 배치한 것은 이러한 구조를 보여 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팬데믹 시기 우리는 타자와의 연결을 확진자 사망 소식으로 확인했다. 팬데믹이 종식되었다고 해도 우리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자본이 생명보다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생명을 위한 안전장치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세월호와 이태원을 비롯한 대형 참사가 일어난 이후 광장에서 마주해야 했던 영정 사진을 떠올린다.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나’의 지옥은 아니어서 죄책감과 동시에 안도감이 찾아왔고 그 사이에서 끔찍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았던가. 이 분열증을 일으키는 연결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할 수는 없을까? 온정주의적 연대를 넘어서 타자의 고통을 납작하게 뭉뚱그리지 않기 위해 고통은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하는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끔찍한 비극으로만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에 대해 질문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존엄을 잃고 죽어 가는 이들의 사진과 영상을 보는 데 ‘익숙해지지’ 않으려면 고통을 ‘구경’하지 않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다가”8)갈 수 있는 길을 계속 찾아 나서야 한다. 


 

   4.


   팔레스타인을 광주와 연결한 오카 마리의 글을 읽는다. 아랍 문학과 제3 세계 페미니즘 사상을 연구해 온 오카 마리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을 식민주의에서 찾는다. 


   서안지구는 팔레스타인 ‘자치구’라고 불리지만, 그 실태는 틀림없는 식민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빼앗아 이 서안지구에 정착지를 마구 만들어 이스라엘의 유대계 시민들을 정착시키고 있습니다. 국제법 위반입니다. 그 정착민들이 무장을 하고 서안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습격하는 거죠. 집단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이나 차에 돌을 던지는 것을 일상다반사입니다. 팔레스타인 농가의 삶의 양식인 올리브나무 밭을 태우거나 집에 불을 지르거나 경우에 따라 죽이기도 합니다. 이런 짓을 그들은 이스라엘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하고 있습니다. 2023년 1월부터 6월까지 반년 동안 무려 600건에 달하는, 이러한 정착민에 의한 폭력이 일어났습니다.9)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진 시초에 이미 식민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살아남은 유럽의 25만 유대인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7년 유엔 총회에서 투표가 진행되었고, “팔레스타인을 분할하여 거기에 유대인들의 나라를 만든다”라는 안이 가결되었다. 그 이후 이스라엘 건국 사이에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인종 청소가 벌어졌다. 그렇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인종 청소함으로써 유대인에 의한 유대인을 위한 유대인 지상주의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만들어”10)졌다. 유럽과 미국은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팔레스타인에 전가하고 팔레스타인에서 행해지는 폭력에 눈을 감았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기억이다. 오카 마리가 “우리는 지금 ‘가자’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번 ‘가자’ 앞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5‧18의 기억을 담은 책에 나오는 “망각이 다음 학살을 준비한다”라는 문부식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다.11) 그러니까 우리는 광주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번 광주 앞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혁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역사와 기억의 박물관 속에 ‘전시’된 지 오래”인 광주가 아니라 “유신 체제 속의 인민 형상이 극한적으로 현현한 상황”으로서, “국민 대 비국민 사이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살육”, 즉 내전의 현장으로서 광주이어야 한다.12) 인간적 삶을 박탈하고 그에 저항하는 이들을 폭도, 괴물, 짐승이라고 부르며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혐오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광주와 팔레스타인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1980년대 초에 팔레스타인 시인의 시집이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것 역시 두 장소의 연결을 보여 준다. 시집을 번역한 박태순의 후기에 따르면 1980년 4월 『실천문학』에 팔레스타인 시인들의 시 14편이 번역되었고 좋은 반응을 얻어 시집으로 묶여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13) 이 시선집에 시가 실린 팔레스타인의 대표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김지하가 1975년 수상한 로터스 상을 그보다 앞선 1969년에 받았다. 다음은 로터스 상 수상 기념으로 펴낸 시선집에 실린 다르위시의 시이다. 


   그들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두 손을 묶어 처형장으로 끌고 가서

   “너는 살인자”라고 우겼다.


   그들은 그의 음식과 옷과 바나나를 빼앗고

   사형수 감방에 그를 집어넣고는

   “너는 도둑놈”이라고 우겼다.

   그들은 그를 얼씬 못 하게 내몰고 나서

   그의 젊은 애인을 가로채고는

   “너는 난민”이라고 우겼다.


   오,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두 손에 피를 묻힌 너,

   밤은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는다.

   유치장이 언제까지든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쇠사슬로 영원히 시간을 끌 수도 없다.

   네로는 죽었지만 로마는 그렇지 않았다.

   두 눈 똑바로 뜨고 그들은 싸웠다.

   말라비틀어진 밀 이삭으로부터 떨어진 씨가

   온 계곡을 채우게 되는 날이 온다.

   ―「사나이」 전문14)



   5.


   너는 전에 돌봄과 관련해서 읽었던 글에서 받았던 충격을 문득 기억한다. “용기, 사랑, 분노 같은 비슷한 복잡성을 가진 감정을 설명하는 단어에 비해 돌봄은 그에 걸맞은 존중과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면서, “심지어 신화적‧어원적 기원도 혼란스럽다”는 설명 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영어의 care는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caru에서 왔다. 단어의 이중적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적으로 돌본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연약함과 직면하는 것이 어렵고 지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직접적인 대인 돌봄은 보람과 보수를 떠나 우리를 가장 감당하기 힘든, 심지어 때로는 보기에 가장 혐오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육체적 면모와 맞닥뜨리게 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우리가 가장 역겨워하는 일,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배설물을 받고 치워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에 걸맞기’ 때문에 한다고 여기며 마을을 놓으려 할 것이다. 이는 돌봄 노동이 전통적으로 여성이나 하인, 또는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는 일로 치부되었던 또 다른 이유고, 동시에 열등함(inferiority)이라는 개념을 강화했다. 열등한 사람들은 바로 ‘비천한’ 육체를―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육체적 존재이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표징인―다루는 일에 적합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열등하다는 것이다(강조: 인용자)15)


   돌봄이 양면성을 지닌 행위라는 것을 너는 바로 이해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경험했던 양면적인 감정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얼마나 너를 지치게 했던가. 아이가 한밤중에 일어나 까닭 모를 울음을 멈출 줄 모를 때 너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얼마나 그 상황을 저주했던가. 너는 그 사실을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비밀처럼 숨기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 혼란스럽고 상충되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돌봄 선언』의 저자들은 이를 위해 충분한 인프라, 그러니까 더 많은 시간과 물질적 자원을 주장한다. 돌보는 정치를 구사하려면 자율성의 신화에서 벗어나 우리가 서로 ‘의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모성이데올로기라는 신화를 거부하고 돌봄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로 전환하지 않는 이상 혼자서만 그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아무 상황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우리가 서로를 해방하려면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약성과 더불어 말해야 한다.16) 해일이 오니까 조개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조개는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이니까 결코 ‘나중’으로 미뤄질 수 없는 문제라고 해야 한다. 지금 출현하고 있는 광장이 감동을 주는 건 바로 그러한 까닭이 아닐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몸들이 뒤섞이고 뒤엉키는 광장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의 광장에서 스피박이 던진 물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에 대한 답을 얻는다. 서발턴은 광장에서 말한다. 서발턴의 발화(speech)가 발화가 되는 공간, 그곳이 바로 광장이다. 광장에서 나의 몸은 다른 몸들과 만나 이전에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나의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서발턴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의 취약한 몸이 우리의 광장에 출현하길 바란다. 공적인 의제로 취급받지 못했던 ‘비천한’ 몸들이 출현하길 바란다.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말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웃으며 싸울 수 있기를.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든 품고 있게 마련인 공포, 고독, 안전과 정의에의 추구, 위엄, 자유와 평화에 대해”17) 함께 노래할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란다. 



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가자지구 폭격의 같음과 다름에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슬라보예 지젝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는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행보를 비판하며 “자신들이 야만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동방으로부터 유럽과 유럽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프레이밍하는”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전략이 “노예제, 식민주의, 파시즘 등등에서 유럽의 역할을 윤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무기 지원 요청에 적극 화답하는 서방 국가의 태도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소극적 무대응과 대비되는데, 이는 팔레스타인이 처한 특수한 어려움과 관련된다(슬라보예 지젝, 「우크라이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다」, 이종현 옮김. 웹진 인-무브, https//en-movement.net/478, 2024.1.18.). 하지만 이러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특수성이 연대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글을 번역한 이종현은 지젝의 글이 쓰인 맥락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한편으로 우크라니아-팔레스타인 연대 그룹 「팔레스타인 인민과 연대하는 우크라이나의 편지」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종현, 「우크라이나를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피침략국은 어떻게 피점령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가」, 『문화과학』 118, 2024.

2) “느린 죽음”이라는 개념은 자스비르 K. 푸아가 신체를 불구로 만들거나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하여 팔레스타인을 쇠약하게 만드는 전략을 지적하기 위해 로렌 벌랜트의 이론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푸아에 따르면 “팔레스타인들은 심지어 죽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아닌” 취급을 받는데, “부상자와 비교하여 사망자 수를 비교적 낮게 유지하는 한편, 사람들을 철저히 쇠약화시켜서 느린 마모를 통하여, 또 인간 형태의 불구화를 통하여 인구 감소를 가져온다.” 이는 이스라엘의 정착형 식민주의 체제에서 경제적으로도 이득을 가져다주며, 그 이득을 취하는 것이 팔레스타인에서 인도적 활동을 하는 NGO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재난 자본주의의 양상을 띤다. 자스비르 K. 푸아, 「불구화할 ‘권리’: 팔레스타인에서의 무력화(Disablement)와 비인도적 생명정치」, 김지영 옮김, 『오늘의 문예비평』 102, 2016, 261, 263~269쪽.

3)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김응산 옮김, 창비, 2024, 74~75쪽.

4) 김항, 『내전과 위생』, yeondoo, 2024, 26쪽.

5)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3, 112쪽.

6) 진태원, 「역량으로서의 장애, 관계로서의 돌봄」, 『문화과학』 115, 2023, 59쪽.

7) 이 시에 나오는 이모티콘의 일부를 옮기지 못했음을 밝혀 둔다.

8)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웨일북, 2023, 37쪽.

9) 오카 마리, 『가자란 무엇인가』, 김상운 옮김, 두번째테제, 2024, 42~43쪽.

10) 위의 책, 77쪽.

11) 위의 책, 138쪽.

12) 김항, 앞의 책, 216~218쪽.

13) 압델 와하브 엘 메시리, 『팔레스티나 민족시집』, 박태순 옮김, 실천문학사, 1981.

14) 「팔레스티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 로우터스 상(1970년도) 수상시선집」, 『실천문학』 3, 1982.

15)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56~57쪽.

16) 이와 관련해서 아이디어를 얻은 버틀러의 문장 일부를 옮겨 본다. “내가 올바른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그 삶이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 낸 삶, 그들이 없다면 어떤 삶도 아닌 삶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인 바의 이 나를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건 간에 나는 내가 타자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에 의해 변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에 대한 나의 의존성, 그리고 나의 의존 가능성은 사는 데, 그리고 잘 사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앞의 책, 307쪽.

17) 마흐무드 슈카이르, 「현대의 팔레스타인 문학에 대하여―패러다임으로서의 시」, 한강 옮김, 『천년의 시작』 3-3, 2004,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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