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딜레마
- 작성일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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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딜레마
― 이론과 문학, 삶의 거리
최진석
1. 이론에 대한 저항
문학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나 스스로도 매번 고민하고 학생들과도 자주 토론하게 되는 주제 중 하나는 이론의 효용에 관한 물음이다. 이를테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신비평, 맑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등, 문학비평 개론서나 문학 이론 입문서를 펼쳐 보자마자 쏟아지는 수많은 이론의 홍수에 당황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듯싶다. 더구나 읽기도 어려운 외국 이론가들의 이름이나 전문용어, 특수한 개념 등은 몇 글자 읽기도 전에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얼른 이 ‘수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설마 이 많고도 복잡한 이론을 다 섭렵해야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일까?
다른 한편, 저 무겁고도 쓰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칼에 매혹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쉽게 이해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멋져 보이는 용어나 개념은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듯싶고, 단순한 감상을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니까. 실제로 어느 정도 길이 들고 나면, 마치 샐러드 먹을 때와 고기를 썰 때 사용하는 칼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어떤 작품에는 이런 이론이 맞고 어떤 작품에는 저런 이론이 적절하다는 판단도 제법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문학비평에서 이론의 효용과 용법을 조금씩 알게 되면, 이론이라는 도구가 손에 맞는 독서의 무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비평에서 이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문학 독서의 오랜 금언은 역시나 작품 자체에 대한 꼼꼼한 읽기에 있고, 작품 자체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이나 통찰에 있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충실한 보조가 되어야 할 이론이 어쩌면 독서 자체를 집어삼키거나, 난해한 곡예에 올려놓는 역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그래서 어딘가에서는 이론을 멀리하고 작품에 충실하라는 충고도 곧잘 듣지만, 그것이 문학 독서와 비평, 연구에 다가서려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론이라는 무기를 어디까지 신뢰하고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을까? 아니, 문학비평과 연구에서 이론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론은 꼭 필요할까?
아마도 비평과 연구라는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이 같은 의문은 종내 풀릴 것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한 번쯤 다시 돌아보는 것은 여러모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비평과 이론의 딜레마에 대한 자기 정리이자 설득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2. 형식주의와 리얼리즘의 역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1896~1982)은 청년 시절인 1910년경 ‘모스크바 언어학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시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젊은 시인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같은 시기에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시어연구회(OPOYAZ)’가 결성되었으며, 두 학술 모임은 후일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학파로 통합되었다. 테리 이글턴은 19세기까지 단순한 ‘담화(閑談)’에 불과했던 문학비평이 본격적으로 학문적 위상을 갖춘 시점을 러시아 형식주의의 등장으로 비정했다.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본질을 사상이나 이념적 내용이 아닌 언어적 형식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철학이나 역사, 심리학과 구별되는 문학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규명하려 했다. 20세기를 ‘문학 이론의 전성기’라 불러도 좋다면 그 출발점에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있으며, 야콥슨 등이 주도한 현대 언어학의 성과와 나란히 놓고 비교할 때만 그 가치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다.
문학 이론이나 비평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자료를 찾아봐도 이런 내용은 금세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주의자들이 단순히 ‘형식’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1930년대 소련 사회가 급격히 경직되면서 문학의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러한 변화가 단순히 외부적 압력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문예학 내부에서 이미 내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야콥슨이 1921년에 집필한 「예술적 리얼리즘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이러한 흐름을 알려 주는 중요한 논점을 제공한다.
형식주의자들에게 문예사조의 변화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창작 경향을 지배하는 언어적 표현의 규칙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낭만주의는 운문과 은유적 표현의 결합으로 이해되었고, 19세기 리얼리즘은 산문과 환유적 표현의 결합으로 인식되었다. 흔히 문예사조라 부르는 특정한 표현의 양식들은 비단 그 표현의 내용만이 아니라 표현의 방법에 의해서도 규정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야콥슨은 이러한 형식적 변화만이 문예사조의 변화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점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작가들의 창작적 지향 또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핵심은 단순한 형식의 변화에 있지 않다.
일반적인 문학사적 서술에 따르면, 리얼리즘은 19세기에 유행한 문학 경향으로서 현실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다. 진리이자 실재인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성 있는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다소 이상한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즉, 19세기 리얼리즘 작가가 아닌 전(前) 세기의 낭만주의자나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현실의 진정성을 추구하지 않았거나,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겼느냐는 의문이 그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19세기 리얼리스트들만이 유일하게 현실의 진리를 포착하고자 했고, 다른 시대, 다른 유파의 예술가들은 현실의 본질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왜곡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말일까?
야콥슨의 대답은 명확하다. 실상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은 리얼한 것(the Real), 즉 실재를 욕망했고, 이를 형상화하려 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실재에 대한 충동’을 리얼리즘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특정한 시대나 유파에 한정되지 않는, 모든 시대의 모든 예술가가 공유하는 열정일 것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은 19세기 사실주의에만 독점적으로 부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결국 모든 예술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리얼리스트이며, 리얼리스트가 아니라면 예술가도 될 수 없노라 할 만하다. 자기가 속한 문예사조나 유파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자신의 예술적 작업이 ‘리얼한 것에 대한 진지한 탐구’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이 추구한 리얼한 것, 즉 실재란 결국 삶 그 자체이다. 삶에 대한 열망, 그것만이 예술을 예술로, 문학을 문학으로 성립시키는 유일무이한 기반이 된다.
3. 리얼한 것, 삶을 향한 충동
문학의 진정성은 삶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실재에 대한 열망과도 연결된다. 진정한 것, 참으로 현실적인 것이야말로 문학성의 본질이다. 이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은 어떨까? 비평의 진정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비록 비평이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문학 작품에 대한 ‘기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평은 창작과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창작이 진정성을 실현하는 한 방식이라면, 비평 역시 창작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궤적을 부지런히 좇아 그 의미를 밝혀내고 조형할 수 있을 때 비평의 의미와 진정성 또한 발견되리라는 소망을 거부할 비평가는 없다. 하지만 멋진 당위의 수사를 뒤따르다 보면 중간에 누락된 고리들이 있음을 종종 망각하게 된다. 진정한 삶을 추구한다는 저 신념과 달리 비평이 추구해 오던 것은 창작이며 작품이지, 삶 자체가 아니다.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가공하고 재현한 것, 형식주의자들의 말을 빌자면 ‘폭력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낸 결과가 창작이며, 작품이다. 요컨대 작품은 삶이 아니다. 문학 창작을 뒤쫓는 것이 삶이라는 실재를 추구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음은 이런 이유에서다. 문학 창작은 삶의 실재에 형식과 의미를 부여하여 작품(텍스트)으로 변용시키는 활동이기에, 비평이 창작과 삶을 동치시키는 것은 순진하다 못해 기만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20세기 문예학이 이론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경사되었던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법하다. 19세기의 역사적 사조로서 리얼리즘은 삶이라는 실재를 포착하여 드러내고자 했으나, 실상 그것이 포착한 것은 ‘일상’에 불과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갑남을녀(甲男乙女)가 밥을 짓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조용히 늙어 가는 세계, 혹은 혁명과 반동의 격류 속에 사람들이 휘말리고 죽어 가거나 생존하는 모습들. 이는 전 시대의 귀족적 낙관주의나 심미화된 비관주의보다 ‘현실적’이고 ‘사실적’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한국문학과 비평의 상황을 대입해 보면 꽤 생생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일상에 대한 천착이 삶 자체, 또는 실재의 충동과 똑같지 않음도 명백하다. 삶의 진리, 진정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잡다한 일상 전체를 향한 것이 아니다.
일상을 이루는 낱낱의 사실 자체, 가령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바라보는 창밖의 모습 전체가 실재를 향한 충동과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삶의 본질과 진정성에 대한 열망은 개별적인 일상의 장면들에 맞붙어 있지 않다. 일상이 현상의 층위에 고착될 때, 그것은 도리어 지금-여기의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시공간을 상상하는 능력을 가로막는다. 눈앞의 현실과 그 조건만을 바라보게 될 때, 지금-여기를 초월하는 가능성은 비현실적인 것이 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현재의 사실만이 절대적 진실로 간주될 때, 문학은 박물관의 박제품에 지나지 않으며, 권력과 자본에 종속된 글쓰기는 변혁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불가능의 벽 속에 갇히고 말 것이다. 19세기의 리얼리즘은 실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삶을 일상의 사실들로 환원시키는 과정이었으며, 이를 충실히 재현하는 ‘사실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렇다면 이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론(theoria)의 먼 어원은 세계에 대한 관조를 뜻한다. 이를 곰곰이 되새겨 본다면, 이론은 단순히 현실을 분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고립된 현실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차원의 비전을 열어 주는 것이다. 다소 과장된 표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론은 단순히 현실을 멋지고 정확하게 분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지금-여기와는 단절된 사건, 낯선 시공간을 창안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것이야말로 이론이 본질적으로 수행해야 할 역할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만, 20세기 문학 이론과 비평이 복잡한 철학적 논리를 전개하고 정치·사회적 선언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이유를 다소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주의로서의 문학은 결국 일상의 반복 속에 정체될 위험이 있으며, 이러한 문학이 본질적인 삶을 향해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단절과 전환의 충동이 필요하다. 이론은 바로 그러한 충동을 촉진하고, 인식하며 수행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다시 형식주의로 돌아가 보자. 야콥슨을 비롯한 언어학자들이 당시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토론했던 이들은 바로 미래파와 아방가르드, 그리고 혁명기의 예술가 집단인 레프(Lef, 예술좌익전선)였다. 만약 문학이 단순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그것은 결코 혁명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부르주아적 질서에 얽매인 현재를 뛰어넘어 새로운 시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 현실을 해체하고 새로운 문법을 구성하는 비평적 실천이 필수적이었다. 이론 자체가 아니라 이론에의 충동은 곧 리얼한 것, 실재의 열망으로서 삶을 향한 비평이 될 때 현실적인 것이 된다. 이론의 유일한 가능성은 문예사조나 이론적 내용으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삶을 향한 비평을 가동시킬 때 성립한다.
4. 비평, 사실 너머의 사건
물론, 이런 이야기는 이론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비평적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이론의 범람과 남용이 극심해진 결과, 이론 자체가 문학과 비평을 옭아매며 그 숨통을 조이고 있으며, 이제는 그 자체로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이론이 과도하게 비대해진 탓에 문학뿐만 아니라 비평 자체마저도 함께 심연 속에 가라앉는 형국이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비평가가 대학에 적을 걸어 두고, 연구와 평론에서 이론의 칼을 똑같이 휘두르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문학과 삶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 없이 작품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사고하면서, 비평을 연구의 부업으로 삼는다는 지적은 그래서 뼈아프다. 삶에 대한 비평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에 대한 비평조차 희소하고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이다.
당연하게도, 일상의 비평이 불필요한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존재와 현상, 삶과 일상의 이분법 자체가 이론적 구분에 불과하며, 사고의 전개와 확립을 위해 동원된 개념적 장치임을 모르지 않는다. 둘은 함부로 떨어뜨려 논의할 수 없고, 실제로 명쾌하게 구별될 수도 없는 범주들이다. 정신분석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그런 것처럼, 일상의 다종다기한 기호들이 없다면 삶이라는 실재적 차원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에 붙박인 일상의 완고한 불변성을 고찰하지 못한다면, 어떤 식으로 삶이라는 거대한 유동을 예감할 수 있을까? 현상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분석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존재에 대한 광대무변한 성찰의 힘도 얻을 수 없을 일이다. 이런 점에서 20세기 문예학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방법론으로서 기호학적 분석은 필수 불가결한 지위를 갖는다. 소련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와 비슷해서, 명확히 분절된 기호들을 통해 사유라는 창조적인 연산 과정을 실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호들의 관계가 노정하는 유사성과 차이, 결합과 대립의 법칙들로써 우리는 지금-여기의 현실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그 운동과 결과로서 실재로서의 삶도 직감하게 될 것이다.
일상의 차원에서 삶을 포괄하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문학적 실험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1920년대 소련에서 시도된 삶과 일상의 분리를 회복하고 연결 지으려는 실험이 그것이다. 레프는 문학적 허구를 통해서는 삶이라는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삶의 차원을 되돌릴 방법으로 사실들(facts)을 수집하고 몽타주하여 새로운 문학예술을 구축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팩토그래피’(factography)가 그것이다. 진정성의 예술을 수복하려는 지향에서 이는 리얼리즘적이라 불릴 만한 시도지만,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깨뜨린다. 이에 따르면 혁명 전 러시아의 ‘위대한 리얼리즘’, 우리의 맥락에서 ‘사실주의’라 불려야 할 문학적 관성은 부정되어야 할 인습에 다름 아니다. 레프의 작가들은 문학의 본령처럼 취급되던 소재와 제재, 플롯 구성의 방식들을 ‘허구’라는 거짓을 양산하는 방법으로 간주하며 비판했다. 그들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서 일상을 기호적으로 재현하는 것만이 문학의 진리라고 믿었다. 이에 따라 편지와 일기, 전기, 르포르타주, 신문과 뉴스, 각종 공지문과 게시물 등을 몽타주하여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는 단순히 문학 장르의 창안에 그치지 않고, 실재로서의 삶에 대한 예술적 육박이라 불릴 만하다.
그러나 팩토그라피는 예술의 역사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일상을 있는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 곧 예술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매일 바쁘게 회사에 출근하는 것, 우연히 카페에 들러 차를 한 잔 마시는 것,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친구와 통화를 나누는 것··· 이는 흔하디흔한 일상의 풍경이며 삶은 그런 것들로 꽉 채워져 있지만 그 자체가 예술적이라 할 수는 없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현실의 온갖 이미지들이 그 자체로는 정적인 상태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것이 움직이고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은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되거나 충돌할 때이다. 즉, 단순한 사실들의 열거가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구성하는 방식 속에 예술적인 것이 작동한다. 일상의 이미지들, 사실들의 (재)배치는 그것이 낯설고 이질적인 효과를 생산하는 한, 단지 헐벗은 사실들의 열거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효과를 산출하는 사실들은 현존하는 일상을 그저 자리바꿈해서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론은 그러한 변형된 일상, 그 너머를 예시하고 조직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며, 그것이 몽타주라는 표현의 형식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론은 거대한 사상 체계를 구축하거나, 형이상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초월하는 상상력을 가동시키며, 이를 통해 현재를 파열시키고 지금-여기로부터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론이 비평의 도구로서 작동하려면, 그것은 현재에 대한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를 넘어서려는 비평적 실천과 연결되어야 한다.
5. 다시, 체화된 이론을 위하여
꽤 복잡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는데 이제 결론으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우리는 단순히 비평의 위기를 논하는 단계조차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한때 ‘문학의 죽음’이 선언되었듯이, 이제는 ‘비평의 죽음’조차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이제 비평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을까? 그저 죽어 버린 비평을 애도하며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비평이 아직 살아 있음을 주장하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야 할까? 그런데 사망진단서를 발부하려면, 눈앞의 대상이 실제로 죽었는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비평은 과연 죽었는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무엇이 비평을 죽이고 있는가? 역으로, 무엇이 비평을 기사회생하게 만들까?
여러 가지 답변들이 있겠지만, 우리의 주제에 집중하자면, 이론에 대한 과도한 편향과 남용이 문제일 것이다. 삶이라는 실재를 추구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론을 우리는 어떻게 잘 사용할 수 있을까?
물론, 이론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다. 제대로 사용하면 전방위적인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무분별하게 휘두르면 오히려 대상의 본질을 훼손하고 만다. 적절히 다루면 비평적 시야를 열어 주지만, 남용되면 비평을 난해한 담론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확실히, 채 소화하지도 못한 이론을 아전인수 격으로 사용하는 것은 정말 단절해야 할 인습이 되었다. 전문적인 비평가 집단에서나 공유될 논의라면 그나마 나을 테지만, 그조차도 아니라서 글쓴이 자신을 제외하면 (때론 그 자신조차!)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비평문은 추방당해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게 남용된 이론, 오용된 이론을 이론 자체의 무용함이나 해악으로 곧장 단정하는 태도는 건강하지도 않고 무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유해할 수 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론은 현상을 그저 설명하는 기술어로도 사용되지만, 현상 너머, 혹은 그 이상의 또 다른 현실을 통찰함으로써 지금-여기로부터의 도약을 감행하도록 추동하는 명령어가 되기 때문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섬세하게 구별하고, 필요에 따라 전자나 후자를 정확히 이끌어 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론의 끈을 잘라 내지 않고 집요하게, 그러나 성실하게 연마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관건은 이론이라는 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다.
니체는 철학적 진리를 다룰 때 쉽게 빠지는 함정으로, 그것을 누가 발언하는지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지적했다. 아무리 훌륭한 금언이라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효과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다시 말해, 남녀노소의 구별이나 발화의 맥락에 따라 언표의 무게와 방향이 변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니체의 말을 받아, 발언의 공간이 어디인지 역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력자의 권좌인지 시민의 광장인지, 대학 강당인지 저잣거리인지 발화자의 장소가 구체적으로 지정될 때만 언표는 위력을 발휘할 수도, 무력하게 소진될 수도 있다. 이론이라는 칼을 받았을 때 우리가 통과해야 할 수련 과정에는 이러한 자기 지시적인 교훈들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즉 이론을 사용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그리고 그가 자리한 위치에 대한 성찰이 부단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론의 이러한 자기 참조적 특성은 우리가 이론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두 번째 이유가 된다.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할까?
‘체화된 이론’ 같은 표현이 실제로 실현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문학 작품이 계속 쓰여지고 비평과 연구가 그 과제로 언제나 주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체화된 이론에 대한 충동은 폐기될 수 없다. 지금 어떤 이론적 개념이나 범주가 우리에게 잘 맞는 옷처럼 어울리겠는가? 어떤 이론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근대의 모든 사변이 그랬듯, 아직도 우리는 이론의 질곡에 빠져 있고, 이론의 덫에 걸려 허둥대고 있으며, 이론에 대한 선망과 원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이론에 대해 우리는 한껏 저항하는 동시에, 이론을 향한 충동 또한 집요하게 붙잡아 볼 필요가 있다. ‘이론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극약처방’이란 것도 때로는 시험해 보아도 좋을 법하다. 낫기만 한다면야, 무슨 수를 못 써 보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강한 약도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마시는 것처럼, 이론에 대한 검토와 타진, 사용은 비평의 현재를 다른 식으로 바꿔서 살려 내기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론에 대한 우리의 매혹이나 거부는, 그것이 진정 삶을 위한 도약인지 따져 보는 면밀하고도 성실한 성찰을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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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1) 박서양 0. 연재에 앞서 본고는 김인숙의 장편소설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쓰레기라는 물질이 공적인 처리 제도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그리고 기억과 서사의 경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단계적으로 고찰하는 3부작 비평이 될 예정이다. 1부에서는 단편소설 「빈집」을 살피며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편입되기 이전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수행되는 분류 노동과 그 젠더화된 정동을 분석할 것이다. 2부에서는 쓰레기를 배제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는 배제의 원리가, 서사에서 개연성을 통해 사건을 정합적으로 배열하려는 충동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핀다. 3부에서는 지워진 여성들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쓰레기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며, 재개발과 쓰레기집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여성 고딕적 상상력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논할 예정이다.1) 1. 쓰레기집의 사회적 상상력 곡교동 산1번지의 쓰레기집은 소설 『자작나무 숲』의 공간적 배경이자 독자를 압도하는 오브제다. 개발과 투기의 욕망으로 들끓는 재개발 예정 구역 한복판에 우뚝 선 이곳은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흔히 ‘집’이라는 단어에서 안식과 보호, 정돈과 재생산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이 공간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집과 집 아닌 것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 이질적인 장소에서, 자본의 생리에 따라 버려져야 할 물건들은 한데 뒤엉켜 완강한 물질적 현존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단순한 불결함이나 미관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적 분류와 질서의 법칙이 멈춘 어느 공간에서 소설은 사물의 퇴적과 부패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집의 장소성을 ‘언캐니(uncanny)’하고 낯선 심연으로 변주시킨다. 집은 물리적으로 내부를 보호하고 외부를 차단하는 경계로 구성되며, 무엇을 수용하고 배출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분류 체계 위에 성립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하므로 ‘쓸모’를 다한 물질은 즉각 폐기되어 사라져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집이 수행하는 선별의 원리와 닮아 있다. 이때 집은 어떤 사물이 여전히 인간의 일상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로 존재한다. 산1번지에 위치한 그곳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러한 소비주의 시스템과 분류 기제가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무력화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물의 분류 체계도, 공간의 경계 논리도 더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오랜 시간 퇴적되고 방치된 사물들만이 거대한 물질 덩어리로 합쳐져 뒤엉킨 채 굳어간다. 이처럼 쓰레기 더미가 인간의 거주 공간을 잠식하는 장면 속에서 독자는 익숙한
- 관리자
- 2026-03-01
방의 병리학 ㅡ 유선혜와 차현준의 시를 중심으로 송현지 1.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몸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내세운다. 이 요구는 여성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을 폭로함으로써 당시에도 강한 호소력을 가졌지만, 그 구체성과 상징성으로 인해 약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특히 ‘자기만의 방’이라는 표현은 독립을 위한 물질적 요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여성 창작자만이 아닌, 청년 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확장되어 활용되어 왔다.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 금융 자기 계발서의 제목이나 그들의 주거 형태를 분석하는 사회학적 키워드로 변주되는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울프가 제시한 이 조건은 단순히 경제적 여유를 갖추거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여성의 몸이 가사 노동과 돌봄을 위해 수시로 침범되며 공동의 재화처럼 사용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정기적 수입의 필요성은 생존을 이유로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양도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며, 독립된 방에 대한 요청은 몸이 침범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울프가 요구했던 저 경제적·물리적 조건이란 타인에게 뺏긴 자신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대어 오늘날 청년 세대의 거주 불안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만이 아닌, 신체의 주권 문제와 함께 살펴보면 어떨까. 고시원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하며 정민우가 그들의 불안정한 거주 자체가 아닌, 잦은 이동으로 인해 소유물을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그들이 삶을 ‘요약’한 채 살게 되었음을 포착한 것처럼 말이다.1) 이처럼 방의 문제가 주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게 되는지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방을 살펴보는 작업은 소재주의적인 탐색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임대된 방에 머무르는 유선혜 시의 화자와 내면의 방을 관리하는 차현준 시의 화자를 중심으로 청년 세대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을 상상하고 변형하며 자신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동시대 청년들의 인식 구조를 가늠해 보려 한다.2) 2. 임대된 몸과 구멍의 존재론: 유선혜의 경우 유선혜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청년 인물들은 주로 좁고(「흑백 방의 메리」), 어두운(「Nirvana」) 방에 머문다. “조립형 서랍장이 쓰러져가”는 방에서 “싸구려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종이컵에 섞”(「잡종의 별자리」)어 마시고, 여러 개의 방이 있는
- 관리자
- 2026-03-01
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ㅡ 김엄지론1) 안세진 1. 색소폰 연주와 살아남은 소설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 하천 굴다리에는 매일 저녁 색소폰을 부는 할아버지가 있다. 처음에는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있었다. 어제도 있었다. 당신은 테이프 반주에 맞추어 끈적한 유행가를 연주하는 중절모 쓴 노신사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풍경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벽을 보고 색소폰을 분다. 반주도 없고 관객도 없다. 중절모는 쓰고 있다. 한 이십 년쯤 들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가 대체 매일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프레이즈가 툭툭 던져지고 호흡을 고르는 듯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흐른다. 몇 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멜로디가 수십 번 반복되기도 한다. 아무리 들어 보아도 그것은 노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오래 연주하지도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면 색소폰을 케이스에 넣고 어딘가로 털레털레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매일 무엇인가를 연주하고 있다.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 모를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는 장인(匠人)일까, 아니면 광인(狂人)일까. 언제부터인가 김엄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색소폰 소리를 듣는다. 무엇인가가 소설 속에서 그저 미친 듯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엄지의 연주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겠다. 그때 데뷔 육 년 차의 소설가 김엄지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문학과지성사, 2015)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민음사, 2015)라는 두 편의 책을 거의 동시에 문단에 상재했다. 전자는 그의 등단작 「돼지우리」부터 시작해 비교적 ‘단편소설’의 통상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초기 작품들이 모여 있는 소설집이었고, 후자는 그가 최근 발표했던 각종 소설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만들어진 그야말로 괴이쩍은 장편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김엄지의 소설은 명백히 전자에서 후자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개념 상태로 널브러져 있”2)는 오피스 맨들의 기이한 무기력은 이미 그의 초기 소설이 잠시 펼쳐 보였던 ‘씹’, ‘뻑’, ‘좆’의 치기 어린 발랄함을 모조리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야흐로 - 이후 김엄지의 소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규정하게 될 - “삶의 무게, 아니 ‘무게 없음’을 형상화한 듯한 하나의 형식”3)이 발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엄지의 문체(style)는 사실상 그때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성의 없이 툭툭 끊어지는 문장, 몇 페이지를 채 이어 가지 못하고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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