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양의성(Ambiguity)
- 작성일 2025-10-01
- 댓글수 0
한강의 양의성(Ambiguity)1)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2)
한국어 번역: 정창훈
1.
우선 한 가지 밝혀 두자면, 나는 한강의 열렬한 독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가 주제화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한강의 서술 방식 또한 종종 암시적인 측면이 있기에 읽어 나가다 보면 구름을 잡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그녀가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이며 그것이 문장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모든 작품에서 소재나 주제에 적합한 서술 방식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그녀의 문학이 일본에서 수용되는 방식을 보면, 전반적으로 비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위화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시적(詩的)’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녀의 문체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않고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그러하다. 그러한 평가를 하고 싶다면, 글쓴이가 먼저 ‘시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히 꾸밈만 있고 내용이 없는 문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책임을 갖고 확실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한강을 둘러싼 일본 독서계의 분위기는 ‘아픔’이나 ‘상처’나 ‘회복’과 같은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누구나 안심하고 입에 담을 수 있는 클리셰를 동반할 뿐이며, 개별성・비판성을 결여한 채 모호한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 관한 일본인들의 비평은 대체로 판에 박힌 듯이 이러한 클리셰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현재 일본에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이 빈번히 언급되는 반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구의 독자들이라면 그래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독자들이 한강이 묘사하는 ‘아픔’을 그토록 쉽게 일반화해도 괜찮은 것일까? 애초에 근현대 한국의 ‘아픈 역사’의 원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카터 에커트의 방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군사주의의 뿌리는 일본 육군의 사관 교육에 있었다. 군사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본래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규율과 가치관을 주입받은 군인이었다. 따라서 ‘개발 독재’를 기축으로 하는 그의 국가 형성 사업은 “항상 현저한 군사적 색채”를 띠었고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국가 프로젝트가 군대식으로 행해졌으며, 그 영향은 한국 사회 곳곳에까지 미쳤다”고 한다.3)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에서 다뤄진 1980년 광주 항쟁도 한국의 군사주의적 정신 풍토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전두환의 계엄령 아래 북한의 공작에 의한 치안상 위협을 구실로 삼아 일어난 이 학살에는 일본 통치로부터 이어지는 군사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당시의 고문과 학살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그 이후에 일어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보다도, 군을 미화하고 특권화하도록 부추긴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2.
요컨대, 한강의 작품에 대해 “인간은 인간에게 어떤 잔학한 일도 할 수 있다”는 식의 일반론을 일본인 평론가들이 말하거나, 그 잔학성을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에 무작정 겹쳐 놓는 것은 안이한 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류가 혹은 군인이 일반적으로 잔학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현저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고통이나 상처로부터의 회복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안이한 감상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도한 일반화가 발생하는 것은 한강의 서술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녀의 소설은 대체로 암시적이기 때문에 ‘누가’ 폭력의 주체인가, 라는 책임과 관련된 질문은 종종 애매해진다. 그 때문에 역사적, 구체적인 맥락을 배제하고 그 ‘누가’에 누구를 대입해도 허용되는 듯한 자의성의 풍토가 조성되곤 한다. 한강의 소설에 대한 비판이 어려운 것은 이러한 텍스트의 애매성(ambiguity)이 양의적인(ambiguous) 평가,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끌어들이기 때문이다.4)
한강의 소설은 강하고 요란한 소리에 지워져 버릴 듯한 희생자들의 섬세한 감정을 구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기에는 현대 사회를 뒤덮은 참사가 더 이상 국가적인 기념 사업으로는 충분히 전달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엿보인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형적인 이야기를 가공하여 그 안에 사건과 인물을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에 얽힌 비선형적인 감정의 태피스트리(tapestry)5)를 짜서 독자를 그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이로 인해 ‘누가’라는 특정 고유명사보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수난이 강조됨과 동시에,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사건들이 평행하게 펼쳐진다.
기념비적인 서사나 공적인 추모에서 벗어나, 무명성(無名性)의 풍토 속에서 사건을 반복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 참사 주변으로 여러 평행한 사건들을 그러모으는 것--이러한 문학적인 시도는 분명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이러한 ‘무명성’ 때문에 평론가들이 트라우마나 회복처럼 유행하는 주제를 역사적 맥락 없이 비대하게 확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강의 소설은 얼핏 사회파처럼 보이지만, 일본의 서브컬처 비평에서 말하는 ‘세카이계’6)와 비슷한 면이 있어, 그곳에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과 같은 공인된 ‘희생자’의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대입할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의 이야기를 애매하게 확장해 나가는, 얼핏 보기에는 양심적인 비평이 한강의 문학을 편리하게 이용한 평론의 ‘언어 세탁(laundering)’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물론 이상의 난점들을 간과할 수 없다고는 해도, 한강의 소설, 특히 앞서 언급한 『소년이 온다』에는 본질적인 주제와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분명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 소설에는 한강의 반기념비적 문학에 대한 지향이 다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하에서는 그 점에 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3.
광주 항쟁을 주제로 하는 『소년이 온다』7)는 ‘너’가 “비가 올 것 같아”(7쪽)라는 예감을 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너’가 지금 여기의 시간보다 한발 앞서거나 혹은 한발 늦게 사물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이 이 첫 문장을 통해 우선 전달된다. 여기에는 이미 참사의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의 미묘한 어긋남(비동기성)을 부각하는 한강 소설의 특징이 짙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어긋남은 ‘너’의 존재 방식에도 작용한다. 군에 의해 살해된 많은 시민들의 관이 병원에서 옮겨져 합동 추도식 장소에 모이는 가운데, ‘너’는 “초를 태워도 아무 소용 없네” (11쪽)라고 느끼면서, 부조리한 정치적 폭력이 만들어 낸 지독한 냄새가 가득한 공간을 헤맨다. 즉, 죽음의 의례화・상징화의 장에 있으면서도 그곳에 완전히 동화(동기)되지 못하는 모습이 먼저 그려지는 것이다.
한편,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처참한 시신들이 ‘너’를 둘러싸고 있다. ‘너’는 이 무서운 광경에 오감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다(이때 ‘너’라는 2인칭은 시야의 좁음과 압박감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효과를 지닌다). 한강은 죽은 자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거나 묘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은 자들에게 주관을 빼앗겨 버린 ‘너’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눈이 더 나빠져 가까운 것도 흐릿하게 보이면 좋겠다고 너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명천을 걷기 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45쪽).
죽은 자들은 직접적으로, 유보 없이 ‘너’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기에서 시사되는 것은 한강의 소설에는 말하자면 중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세계는 오로지 ‘가까움’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점유되어 있다.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대규모 참사를 불길한 원경으로 두면서, 결코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 ‘가까운 것’, 즉 희생자가 주인공의 마음을 강하게 붙잡는 것이다. 한편, 사람들을 집단으로서 동기화시키는 공공적인 사건(중간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무대 장치에 머무른다.
한강의 양의성은 이 중간적인 것의 희박함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소설에서 참사 그 자체는 훨씬 멀리 떨어져 있고, 단편적으로만 가시화될 뿐이다. 한강이 즐겨 쓰는 수사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비나 눈의 커튼——즉, 몸을 찌르는 듯한 냉기를 동반한 ‘하얀’ 추상적인 이미지——의 저편에 있다. ‘너’나 ‘나’가 이 희고 먼 저편의 사건과 일치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 참사가 남긴 무서운 희생의 흔적은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선명하게 가까이 다가와 화자의 오감을 장악한다. “비가 올 것 같아”라는 불안감을 동반한 먼 예감을 바탕으로 희생자의 감각이 소설 내부로 끝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더욱이, 이처럼 가까움과 멀리 떨어져 있음이 나선형으로 얽혀 있는 것은, ‘너’에게의 호소로 1장을 시작하여, 2장에서는 죽은 자인 ‘나’를 화자로 하고, 3장은 ‘그녀’를 중심으로 하는 『소년이 온다』의 인칭적 기법과도 관련이 있다. 이 2인칭에서 1인칭, 다시 3인칭으로의 전환은 ‘너’와 ‘나’와 ‘그녀’ 사이에 감정의 연속성을 성립시킨다. 단, 그것은 단순한 연대의 서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가 사건에 휘말린 죽은 자이고, ‘너’는 추도식에 참여한 생존자라는 절대적인 단절 또한 결코 무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광주 항쟁의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상, ‘너’와 ‘나’와 ‘그녀’의 인생은 평행선이 되어 영원히 교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가 감정의 지속성을 문체를 통해 만들어낼 때, 말하자면 유클리드 기하학의 규칙이 무너져, 교차할 리 없는 평행선이 교차하는 듯한 착각이 독자 측에서 발생한다. 그때 생자와 사자는 한없이 가깝고 동시에 한없이 먼 존재가 된다. 바로 이러한 양의성(ambiguity)이 한강의 소설을 특징짓고 있는 것이다.
4.
아득히 먼 사건이 자기에게 근접한 신체나 감각을 탈취하여 거기에 강한 작용을 계속 미치는 것, 그것은 『소년이 온다』 후반부에서는 피폭(被曝)의 은유로서 이야기된다.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207쪽).
이 인상적인 증언은 한강 그 자신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참사의 경험은 수십 년에 걸쳐 악성적인 영향을 계속 미치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의 소설은 종종 참사 그 자체의 증언이라기보다는, 참사를 둘러싼 감각의 증언이라는 양상을 띠고 있다. 즉, 사건을 재현하는 것 이상으로, 사건이 어떻게 사람들의 감각을 결정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피폭의 작용은 주관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이 주관을 초월한 힘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가 한강의 중요한 주제이다. 실제로 그녀의 소설에서는 감각의 지속성, 혹은 감각의 눈사태가 선행하고 있으며, 그곳에 인물은 뒤늦게 당도한다. 『소년이 온다』 도입부에는 그 점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오늘 적십자병원에서 오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몇이나 될까. 네가 아침에 물었을 때 진수 형은 짧게 대답했다. 한 서른명 될 거다. 저 무거운 노래의 후렴이 다시 까마득한 탑처럼 쌓아올려졌다가 쓸려내려오는 동안, 서른개의 관들이 차례로 트럭에서 내려질 것이다. 아침에 네가 형들과 함께 상무관에서 분수대 앞까지 날라놓은 스물여덟개의 관들 옆에 나란히 놓일 것이다(8쪽).
“무겁디무겁게 올라가다가 절정에서 결연히 쓸려내려오는” 애국가의 곡조(8쪽). 이 눈사태의 운동을 배경으로, 불의의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관이 늘어선 광경이 그려진다. 한강 소설의 사건은 군중을 삼키는 무거운 눈사태처럼 발생하여 주체를 사로잡는다. 혹은 이 눈사태 뒤에 주체는 뒤늦게 도착한다. 이 미묘한 어긋남(비동기성)에 의해 한강적 주체는 삶을 강하게 실감하기 전에, 삶으로부터 반쯤 분리되어 버린 유령적 존재, 즉 뜨겁고 화려한 삶보다는 차가운 죽음에 가까운 무채색의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
『소년이 온다』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한강의 문학에서 사건은 저편에서 ‘온다’. 비나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고, 폭력적인 것이 습격해 오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도래 자체가 종종 양의적인(ambiguous) 것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소년이 온다』에서는 히스테리적인 반공주의——공산주의자를 뿌리 뽑아라!——에 사로잡힌 군인이 올 때조차도, 그 폭력의 눈사태와 더불어 ‘양심’이라는 “강렬한 무엇”이 동반되어 온다. 그 양심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이 되어 군중을 움직이는 것이다(114쪽).
통상적인 도덕이 붕괴하고 냉기로 가득 찬 환경에서, 주관의 통제를 초월한 어떤 것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그것이 한강이 반복하는 정경이다. 게다가 그 어떤 것이 끔찍한 폭력인지, 아니면 맑고 깨끗한 양심인지는 사전에 파악할 수 없다. 어떤 강렬한 것이 온다는 예감은 그 미결정성 때문에 양의적인 감각을 강화한다. 일례로 다음 문장에는 한강 특유의 양의성이 응축되어 있다.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174쪽).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발소리가 다가온다. 그것은 최악의 참사일 수도 있고, 숭고한 용기일 수도 있다. 색채 혐오라고 할 수 있을 법한, 한강의 ‘하얀’ 것에 대한 집착 또한 이 미결정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러한 무채색의 미결정성을 그 자체로서 포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건을 공공적・상징적인 기념비로 바꾸는 이벤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학적 서사에 의해 짜인 감정의 태피스트리인 것이다.
5.
이렇듯 한강의 반기념비적인 문학은 과거의 이데올로기적인 ‘피폭’의 경험을 전승한다. 거기에서는 ‘너’와 ‘나’의 경험은 연속하면서도 불연속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피폭의 양의적인 영향은 갑자기, 마치 눈사태처럼 ‘온다.’ 그런데 이 한강적인 정경은 문학의 틀을 넘어 때로는 현실 정치의 세계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냉전 말기에 성립한 전두환의 군사 정권은 그 시대착오성 때문에 오히려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하는 히스테리적인 폭력성을 가속화하여 광주 학살에 이르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와 유사한 히스테리의 구조는 2024년 말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서 반복되었다. 물론 그것은 도저히 성공할 가망이 없는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과거 반공주의・군사주의의 망령이 신경증적으로 재래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은 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피폭’이 아직 한국 내부에서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군정 하의 학살——『소년이 온다』의 광주 항쟁부터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의 제주 4·3 항쟁까지——의 기억을 계속해서 발굴해 온 한강은 바로 이 냉전이 만들어 낸 유령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접근을 반복해 왔다. 그 작업의 중요성이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강의 소설이 오로지 학살의 희생자만을 부각해온 것이, 그녀의 성실함이나 양심을 보여주는 것일지언정, 도리어 일본과 같은 이국의 독자들에게는 놀라움보다는 묘한 안도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장 보드리야르는 1990년대 유고 내전 시기의 저서에서 당시 유럽인들이 사라예보 희생자들에게 보인 공감의 안이함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타자성의 가장 손쉬우며, 가장 진부한 형태로서의 ‘희생자 사회’. 재난으로서, 희생자로서, 알리바이로서 타자가 부활한다. 그리고 그 타자의 ‘장송적 거울’ 속에서 우리 자신 또한 비참한 정체성을 끌어내는 불행한 의식으로 부활한다. 악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우리가 불행의 다양한 기호를 탐색했던 것처럼, 우리는 타자의 비참함을 탐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반증하려 한다. 새로운 정체성은 곧 희생자로서의 정체성이다. 박탈당하고, 좌절하고, 핸디캡을 짊어진 주체를 중심으로 사회의 모든 것이 조직된다.8)
이것은 보드리야르다운 냉소적인 지적이지만, 1990년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문화 환경에도 들어맞는 부분이 적지 않다. 희생자에게 거울을 비추고, 자진해서 그것과 동일시됨으로써 현대인은 정체성을 얻을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정체성의 지지대가 되는 타자성은 불행과 비참함의 기호를 부여받은 희생자이다. 영웅에게는 더 이상 아우라가 없다. 아우라를 가질 권리는 이제 희생자에게 있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 및 그녀를 둘러싼 일본 독서계의 분위기에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희생을 강요당한 약자에 관해서는 당연히 민감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타자성을 희생자의 모델에 집중시키고, 희생자를 정체성 정치의 재료로 삼는 ‘안이함’과 ‘진부함’에 무신경한 것은, 사상적으로 둔감한 것을 의미한다.
한강의 문학적인 민감함이 그대로 독자의 둔감함으로 반전되지 않도록 우리는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쨌든, 한강의 소설에서는 그 수용 방식까지 포함하여 많은 현안적인 주제를 읽어 낼 수 있다. 노벨상 작가라고 해서 신단에 모셔 놓고 찬양의 분위기 속에서 애매하게 얼버무릴 것이 아니라, 수상을 계기로 그 소설의 양의적인 요소를 다각적으로 검증하는 일이 일본 독자들에게 요구되는 바이다.
|
해당 글은 일본의 문예지『군조(群像)』80권 3호(2025년 3월호)에 게재된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의 비평 「ハン・ガンのアンビギュイティ」의 전문을 정창훈이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일부 표현이나 의미가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1) 〔옮긴이〕이 글은 일본의 문예지『군조(群像)』80권 3호(2025년 3월호)에 게재된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의 비평 「ハン・ガンのアンビギュイティ」의 전문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2) 〔옮긴이〕일본의 문예비평가. 릿쿄대학대학원 문학연구과 교수. 한국어로 번역된 저서로는 『신화가 생각한다: 네트워크 사회의 문화론』(기역, 2014), 『부흥 문화론: 일본적 창조의 계보』(리시올, 2020), 『나선형 상상력: 헤이세이 일본 문학의 문제군』(리시올, 2024), 『변경의 사상: 일본과 홍콩에서 생각하다』(청육만과 공저, 현실문화, 2024)가 있다.
3) カーター・エッカート, 『韓国軍事主義の起源』, 松谷基和訳, 慶應義塾大学出版会, 2024, 4쪽〔Carter Eckert, Park Chung Hee and Modern Korea: The Roots of Militarism, 1866–1945,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4) 〔옮긴이〕저자 후쿠시마 료타가 이 문장에서 사용한 ‘한강 텍스트의 애매함’이라는 표현이 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판을 받으며 논쟁이 일어난 바 있다. 하스미는 ‘한강을 둘러싼 일본 독서계의 분위기가 비평성을 결여한 모호한 안개처럼 퍼져 있다’는 후쿠시마의 지적에는 전전으로 동의하지만, 한강의 텍스트 자체가 애매하다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한강의 텍스트는 어떤 의미에서든 애매하지 않고 모든 것이 명확하게 이야기되고 있다”고 반론했다.(蓮實重彥×工藤庸子, 「対話 第二回」, 『群像』 2025. 5). 이에 대해 후쿠시마는 본인이 말한 ‘한강 텍스트의 애매함’이란 하스미가 지적한 문장 표현 차원의 애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사건을 좌우하는 행위 주체가 무명화・중층화되어 있는 불분명함을 의미한다고 재반박한 바 있다(福嶋亮大, 「戦後思想の盲点――蓮實重彥氏に応える」, 『群像』 2025. 6).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군조(群像)』의 해당 권호를 참고하길 바란다.
5) 〔옮긴이〕장식적인 그림 무늬를 짜 넣은 직물. 혹은 다양하거나 복잡한 세부 묘사가 있는 형태 등을 뜻함.
6) 〔옮긴이〕‘세카이계(セカイ系)’란 일본 서브컬처 담론에서 일정한 작품군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세카이계로 분류되는 작품들은 주인공들의 행동이나 사적 관계성 등이 본래 존재해야 할 중간 영역으로서의 ‘사회’를 매개하지 않고, 곧바로 상위 영역인 ‘세계’의 모습이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구조적 특징을 지닌다.
7) 〔옮긴이〕저자는 일본어판 『소년이 온다』(『少年が来る』, 井手俊作訳, CUON, 2016)를 인용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한강,『소년이 온다』(창비, 2014)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기로 한다. 또한 이하 해당 텍스트의 인용 표기는 본문 내에 쪽수만을 간략히 적는 방식을 택했다.
8) ジャン・ボードリヤール, 『完全犯罪』, 塚原史訳, 紀伊國屋書店, 1998, 200-201쪽.〔영역본 Jean Baudrillard, The Perfect Crime, Translated by Chris Turner, Verso, 2008, p.137를 참고하여 일부 번역을 수정・보완함〕
추천 콘텐츠
*아래의 글은 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딱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
- 관리자
- 2025-11-0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rs
- 관리자
- 2025-11-01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 관리자
- 2025-1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